대만 원주민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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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모습 |
RTI 한국어 방송에 나온 대만 원주민 음식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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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臺灣原住民 / Taiwanese aborigines[1]근현대에 한족이 넘어오기 전부터 타이완 섬에 거주해 온 오스트로네시아족 계통의 원주민 민족 집단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대만 원주민이라는 용어는 1994년에 대만 정부에서 헌법을 수정하면서 제정한 명칭으로, 그 이전에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중국에서는 고산족(高山族)이라 하여 자국의 56개 민족 중 하나에 포함시킨다. 2020년 현재 인구는 588,660명으로 타이완 인구의 2%를 조금 넘고, 평포족까지 합칠 경우 80만명으로 증가한다. 이들은 한족인 본성인과 구별되며, 모두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언어를 사용한다.
위의 지도는 현재 대만 행정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대만 원주민 민족의 분포 지도이다. 이미 한족에 동화된 등의 이유로 행정원에서 원주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원주민 민족들의 분포는 나타내지 않았다.
원주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민족(평포족)까지 나타낸 대만 원주민의 분포 지도.
2. 정의
2.1. 대만 원주민과 대만인의 차이
대만 원주민은 대만인이지만 대만인이 대만 원주민은 아니다. '대만 원주민'(臺灣原住民, Taiwanese Aborigines)은 '한족'인 본성인과 구별되며, 이들은 본래 대만에서 '기원'한 민족으로 한족이 아니다. 이들의 언어인 대만 제어도 아예 중국티베트어족의 언어가 아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다. 즉, 마인어, 필리핀어 등과 같은 계통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얘기. 한족계 본성인들의 모어인 대만어는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한 민남어 계열이다.흔히 대만 원주민과 대만인을, "외성인=한족"으로 "본성인=대만인=대만 원주민"으로 혼동하는 것이 꽤 많이 보이는데, 그게 아니다. 본성인이나 외성인이나 중국대륙에서 기원한 한족이다. 그래서 이걸 혼동하면 대만을 '소수의 한족이 다수의 대만인(대만 원주민)을 지배하는 사회'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다보니 일부 외국인들은 '어? 한족(외성인 또는 중국)들이 대만을 점령하고(또는 노리고) 있네? 대만 민족은 독립해야 해.'란 착각으로 대만 독립을 지지하기도 한다.
본성인 기준을 넓게 잡으면 원주민들도 포함된다. 이 경우에는 본성인의 대다수를 한족계 본성인이라 하여 따로 구분한다.[2]
원주민 중 상당수는 한족과 동화되었는데 그렇게 동화된 원주민과 그 후손들은 생활 습관이나 언어, 외모로 한족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 대만에서 '원주민'으로 간주되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남방계인 대만 원주민들도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걸로 추측되고 본성인들 대다수도 중국 푸젠성 일대에서 기원했으며 유전적으로 보면 한족과 남방계인 월인의 통혼으로 태어난 혼혈이기에 외형적으로 차이가 크게 나지는 않는다. 사실 춘추전국시대때 푸젠성 지역은 월나라의 영역이었는데 월나라는 중원의 문화를 일정 부분 받아들인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언어부터가 달랐고 종족 구성원도 남방계로 이루어졌던 걸로 보이기에 정체성 자체가 달랐고, 진시황에 의해서 진나라에 정복된 적이 있었지만 얼마안가 다시 민월-동월로 독립하였다. 이 지역이 온전히 중국의 영역에 편입된 것은 한나라의 한무제때 와서였다.
2.2. 평포족과 고산족
청나라 통치 즈음부터 한족은 한족에 동화가 좀 된 원주민 민족은 평포족(平埔族), 동화가 덜 된 민족은 고산족(高山族)으로 분류하였다. 평포족은 평지에 사는 원주민을 의미하고[3] 고산족은 높은 산에 사는 민족이란 뜻으로서 외지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피해 높은 산으로 올라가 정착한 것에 기인한다.그러나 당대에 이것보다 더 많이 쓰인 명칭은 숙번(熟蕃)과 생번(生蕃)이다. 한족에 동화가 덜 된 원주민 민족은 생번(生蕃), 동화가 좀 된 민족은 숙번(熟蕃)이라 불렀다. 따라서 생번이 고산족, 숙번이 평포족에 대응된다. 뜻은 생번은 "날것 그대로의 야만인", 숙번은 "(벼가 익듯이)앞선 문명을 접해 어느정도 '문명이 익은', 즉 개화된 야만인" 정도다.[4] 일단 글자 그대로의 뜻은 그렇지만, 熟은 (나/우리가) "잘 아는, 낯익은", 生은 "잘 모르는, 낯선"이라는 뜻도 있으니,[5] 이렇게 해석하면 "낯선 야만인", "낯익은 야만인" 정도. 뜻에서 알 수 있듯 숙번이든 생번이든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염상섭의 만세전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요보라고 말하면서 "젊은 자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 정도의 멸칭이다. 그 외에도 일본 통치기에는 대만토인이라는 멸칭도 통용되었다.
일본 통치기에는 대만 원주민을 호적에도 숙번이나 생번으로 기재하는 등 거리낌없이 멸칭을 사용했는데, 우서 사건이 터지고 난 1935년부터는 숙번을 평포족, 생번을 고사족(高砂族)[6]이라고 개칭하였다. 국민당 통치기의 대만에서는 고사족이나 고산족이라는 명칭을 산지족(山地族), 산지동포라 개칭했다. 생번이나 숙번, 평포족, 고사족, 산지동포 따위 말들은 모두 지배집단의 입장과 편의에 따라 붙여진 말이기에 1980년대부터 원주민 운동가들은 자신들에 대한 명칭으로 '대만 원주민'을 써주기를 요구했으며, 1994년에 헌법에 수정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대만 원주민'으로 개칭되였다.
좁은 의미로 쓸 때는 고산족으로 분류되는 민족만이 한족에 덜 동화되었다는 이유로 원주민으로 분류되고 평포족은 한족에 많이 동화되었다는 이유로 대개 원주민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평포족과 고산족은 거주지나 한족에 대한 동화 정도를 기준으로 분류하므로 이 분류가 명확히 정해진 것은 아니고 시대나 연구자, 정치적 상황 등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평포족은 대만 정부에서 원주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나, 카발란족은 전통적으로 평포족으로 분류됨에도 원주민 운동을 통해 원주민으로 인정되었다.[7] 타오족 역시 과거에는 고산족의 하나인 초우족의 분파로 분류되었으면서도 오래 전에 한족(청나라) 정권에 복속되어온 이유로 인해 평포족인지 고산족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평포족은 한족에 상당히 동화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체계적인 동화가 이뤄진 것이 아니기에 오늘날에도 평야지대에 동화가 덜 되고 원주민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집단이 소수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아직 대만 정부로부터 원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민당 정권이 대만 반환과 외성인 유입에 따라 인구구성이 급변한 대만(타이완성)의 호적을 1950년대에 재정리하면서 호적에 고산족을 위한 분류(산지 거주 산지동포, 평지 거주 산지동포)만 만들고 평포족을 위한 분류를 만들지 않았고, 그나마도 평포족은 스스로 신청해야만 원주민으로 분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던 당시 평포족은 자기들을 위한 분류도 없는데다 차별도 두려우니 신청을 기피했고, 설령 평포족인 사람이 산지동포로 분류해달라고 신청하더라도 국민당 정권은 거의 받아주지 않았다. 출처(중국어) 오늘날 대만에서 원주민으로 인정받으려면 직계존속이 원주민으로 등록되어 있어야 하는 바, 이런 구조적 이유로 인해 평포족은 원주민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처지이다. 2022년에 이를 규정한 원주민신분법 조항이 사법원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기에, 앞으로는 달라질 수도 있다.관련 글(영어)
3. 현황
3.1. 개별 민족
(지도 기준으로 본 민족별 분포)
(캐릭터로 그려진 대만 원주민 각 민족)
대만 정부에서 공인한 민족은 16개이다. 중국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 56개 민족의 하나인 고산족에 포함시킨다.
- 아미족(阿美, Amis) 218,703명[A]
- 파이완족(排灣, Paiwan) 105,704명[A]
- 아타얄족(泰雅, Atayal) 94,920명[A]
- 부눈족(布農, Bunun) 61,216명[A]
- 트루쿠족(太魯閣, Truku) 33,756명 - 타로코(Taroko)족이라고도 한다.[A]
- 루카이족(魯凱, Rukai) 13,710명[A]
- 푸유마족(卑南, Puyuma) 15,141명[A]
- 초우족(鄒, Tsou) 6,743명[A]
- 시디크족(賽德克, Seediq) 10,978명[A]
- 사이시얏족(賽夏, Saisiyat) 6,862명[A]
- 따오족(達悟, Tao) 4,830명 - 야미(雅美, Yami)족이라고도 한다.[A]
- 카발란족(噶瑪蘭, Kavalan) 1,572명[A]
- 타오족(邵, Thao)족 845명
- 사키자야족(撒奇萊雅, Sakizaya) 1,049명
- 흘라알루아족(拉阿魯哇, Hla'alua) 461명 - 사아로아(沙阿魯阿, Saaroa)족이라고도 한다.
- 카나카나부족(卡那卡那富, Kanakanavu) 414명
(남성 복장 기준 분류)
대만일치시기 대만 원주민을 대대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일본 제국 당국에 의해 처음 공인된 민족은 아미(阿美)족, 파이완(排灣)족, 아타얄(泰雅)족, 부눈(布農)족, 루카이(魯凱)족, 푸유마(卑南)족, 초우(鄒)족, 사이시얏(賽夏)족, 따오(達悟)족의 9개 민족이다. 대만일치시기 이후 국민당 일당독재 시절에도 이 분류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연구 성과의 미진함과 원주민 정체성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해 서로 다른 민족을 한 민족 안에 묶는 경우가 많았다.
대만 정부는 민주화 이후 연구 성과의 축적과 원주민 권익 수호 운동을 반영하여 한 민족으로 분류되었던 민족집단을 구분해나아갔다. 그 결과 21세기 들어 2001년 타오(邵)족[20], 2002년 카발란(噶瑪蘭)족[21], 2004년 트루쿠(太魯閣)족[22], 2007년 사키자야(撒奇萊雅)족[23], 2008년 시디크(賽德克)족[24]이 추가로 인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카나카나부(卡那卡那富)족[25], 흘라알루아(拉阿魯哇)족[26]이 대만 정부로부터 인정되었다. 이들은 펑포족으로 취급되었던 타오족을 제외하면 모두 다른 원주민 민족과 같은 민족으로 분류되었다가 독자 정체성을 인정받은 경우이다.
중앙정부의 인정은 받지 못했으나 지방정부의 인정을 받은 원주민 민족들도 있으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의 공인을 받지 못한 미식별 민족까지 합하면 40여 개가 넘는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중앙정부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으나 원주민 권리 운동이나 학계의 연구 및 역사 기록을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민족이며, 오늘날에도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답할 수 없는 민족들도 있다. 역사적인 이유로 이들은 대부분 평포족이었다.
- 시라야족(西拉雅, Siraya): 타이난시 및 난터우현 푸리진(埔里鎮)에서 원주민으로 인정받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천진펑이 있다.
- 마카타오족(馬卡道, Makatao): 핑둥현 및 난터우현 푸리진에서 원주민으로 인정받았다. 도시 가오슝의 어원이 이 마카타오족의 언어에서 유래했다. 주로 반(潘)씨 성을 쓰며 대표적 인물로는 판웨이룬, 판우슝[27], 판즈팡[28] 등이 있다.
- 타이보안족(大武壠, Taivoan): 난터우현 푸리진에서 원주민으로 인정받았다.
- 바부자족(巴布薩, Babuza)
- 호아냐족(洪雅, Hoanya)
- 케타갈란족(凱達格蘭, Ketagalan): 후술할 타이베이의 케타갈란 대로가 해당 민족명애서 유래했다.
- 파보를랑족(虎尾壟, Favorlang)
- 루이랑족(雷朗, Luilang)
- 바사이족(巴賽, Basay)
- 트로비아완족(哆囉美遠, Trobiawan)
- 리나우족(里腦, Linaw)
- 아리쿤족(阿立昆, Arikun)
- 를로아족(羅亞, Lloa)
- 쿠론족(龜崙, Kulon)
- 파포라족(巴布拉, Papora)
- 타오카스족(道卡斯, Taokas)
- 파제흐족(巴宰, Pazeh)
- 카하부족(噶哈巫, Kaxabu)
- 카우카웃족(猴猴, Qauqaut)
- 치모족(箕模, Chimo)
- 오포노호족(歐佈諾伙, 'oponoho)
- 쿤가다바네족(古納達望, Kungadavane)
- 텔드레카족(得樂日卡, Teldreka)
- 타쿠푸야누족(達谷布亞努, Takupuyanu)
- 세칼루족(斯卡羅, Seqalu)
3.2. 인구와 거주지
원주민 대부분은 대만에 거주하여 2006년 기준 468,602명으로 전 인구의 2%를 차지했으며, 16년이 지난 2022년 기준으로는 582,846명으로 전 인구의 2.47%을 기록했다. 대만 원주민들의 인구 추세는 인구 감소에 시달리는 대만의 현 상황과는 달리 대만의 1990년대 수준으로 젊다. 원주민의 인구증가율은 연 1%를 조금 밑도는 수준에 합계출산율은 1명대 중후반대이며, 원주민의 중위연령은 대만 평균보다 약 10세가량 젊은 30대 중반 정도이다. 2014년 기준 원주민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타이둥(35.4%)·화롄(27.4%)·핑둥(6.9%)의 세 현이었다. 이 세 현은 동시에 원주민 인구가 가장 많은 세 현이기도 했다. 한편 이들은 과거에는 대만 전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한족의 도래를 거쳐 평지에 있었던 원주민은 한족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거나 산지로 이주했고, 현재는 산지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와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들도 꽤 있다.일본 통치기에는 원주민(산지 원주민) 거주구역을 단순히 오랑캐의 땅이라는 "번지(蕃地)"로 불렀으나(가령 대북주 소오군 번지(台北州 蘇澳郡 蕃地)), 중국국민당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전부 향(鄕)으로 개편하고 행정구역 이름을 붙여줬다. 이때 제정된 이름 중에서는 원주민들의 명칭을 존중하지 않고 유교에서 유래한 한족식 지명이거나 국민당을 선전하는 명칭이 많았는데(부흥, 삼민, 신의, 화평 등) 민주화 이후 일부는 원주민들이 부르던 명칭으로 개칭되는 사례도 있다. 이때 만들어진 향들을 산지향(山地鄕)이라 했는데, 현재도 이 지역은 "산지원주민지구"로 지정되어 외부인의 활동에 제약이 있으며, 이 지역의 지자체장은 원주민만이 될 수 있다. 이 지역들 중에서는 직할시가 되어 구로 바뀐 향도 있는데, 본래 대만에서 직할시의 구는 지방자치단체가 아니어서 구청장을 선거로 뽑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임명하지만 이 지역은 예외적으로 지자체로 인정받아 구청장을 선거로 선출하고 구의회도 있다. 이들 산지원주민지구 지역을 모두 합치면 대만 면적의 약 40%, 인구의 약 1% 정도를 차지한다.
대만 행정원이 설정한 산지원주민지구(녹색), 평지원주민지구(갈색). 평지원주민지구는 산지원주민지구와는 달리 비원주민도 지자체장이 될 수 있다.
중국에도 소수 거주하는데, 2000년의 경우 4,461명의 대만 원주민이 중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원주민 전체를 아울러 고산족이라고 하며, 중국의 56개 민족 중의 소수민족으로 인정되어 전국인민대표대회에도 할당 의석이 있는 등 그 나름대로의 대우를 받고 있다. 중국의 대만 원주민(고산족)은 대만과 가까운 푸젠성이나 광둥성 등이 아닌 허난성에 가장 많은데, 허난성 난양시 덩저우시(鄧州市) 장춘진(張村鎮) 상잉촌(上營村)에 수백 명 단위의 고산족 집단 거주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예 별명이 타이완촌(臺灣村)일 정도로, 동녕국의 장군 황연이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동녕국에 복속된 일부 대만 원주민을 이곳으로 데려온 데서 유래한다. 그 외에도 국공내전 시기 국민당군에 징집된 대만 원주민이 중국 대륙에서 공산군에 항복하여 중국에 정착한 경우도 있다.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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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고대, 중세
초기 사진 자료
대만 원주민들은 대략 8천 년 전부터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족들이 중국 남부지역으로 남하하기 이전에 상당수 오스트로네시아계 부족들이 중국 남부에 살고 있었기에 이들과의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백월의 일파로 여겨졌다. 사실 월이라는 말이 중국 남부에 살던 종족들을 통칭하던 용어지만. 하지만 진나라 때 이들 지역이 중국에 편입되고 한무제 이후 확고하게 중국의 영역이 되었고 이후로도 위진남북조 시대에 한족이 남하하여 현지인에 융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족에 동화되었기에 고고학적인 발굴이나 언어학적인 연구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어쨌든 상당수 부족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미크로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오세아니아 일대로 진출하기도 했다.
폴리네시아의 여러 원주민들은 자기들 민족의 기원지를 '하와이키'(Hawaiki)라고 지칭하는데, 마오리족은 '하와이키', 하와이 원주민들은 '하와이'(Hawai'i), 사모아인들은 '사바이'(Savai'i)하는 식으로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고향을 서쪽이라고 지칭한다. 하와이 원주민의 경우는 자신들이 사는 곳을 하와이라고 부르지만, 여기가 본래 하와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그냥 자기들 조상이 살던 땅과 얼추 비슷한 곳이라서 그들의 전설에 나오는 고향의 이름을 따서 하와이라고 명명했을 뿐이다. 이후 근세에 들어 문화인류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이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한 결과, 이 하와이키의 정체가 바로 타이완 섬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나오는 대양을 향한 항해가 바로 이들 폴리네시아인들 조상의 역사인데, 그들은 원양 항해를 통해 태평양 곳곳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고대 중국 삼국시대였던 서기 230년경에 오나라 황제 손권의 칙령에 의하여 대만에 파견된 군인이 원주민 1,000명을 포획해 건업으로 끌고갔던 바 있다.
4.2. 근세
스페인 제국, 네덜란드 제국의 타이완 섬 통치 시대부터 동녕 왕국 통치 시대까지를 보통 조기대만시기(早期臺灣時期)라고 한다.원주민들은 근처 중국 대륙에서 볼수 있을 법한 고도화된 국가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이 때에 타이완 섬 중서부[29]에서 파포라족(巴布拉族)을 중심으로 바부자족(貓霧捒族), 파제흐족(巴宰族), 호아냐족(洪雅族), 타오카스족(道卡斯族), 카하브족(噶哈巫族)이 연합하여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 왕국인 다두 왕국을 건국하였으며 원주민들은 대만에 정착한 한족들과 교역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옆에 있는 오키나와 섬의 류큐 왕국에 비해서도 외부의 영향과 교류가 적었고 체계적인 문명의 형성이 늦었다.
중국 대륙에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타이완 섬은 원주민들의 부족 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소왕국들이 존재하였다. 한편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서구권 열강들도 세계 각지에 세력을 뻗치기 시작했고 이들은 동아시아에도 당도했다. 이 과정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아시아에 대한 권리를 얻은(?) 포르투갈 제국의 항해사들이 유럽인 중 처음으로 타이완 섬의 존재에 대해 알렸고, 이들은 이 섬을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란 뜻의 '일랴 포르모자(Ilha Formosa)'라 하였다. 이 포르모사 명칭은 현재에도 타이완 섬을 이르는 별칭으로 쓰인다.
15세기에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 서양 세력에게도 원주민들의 존재가 알려졌다. 타이완 섬을 처음으로 찾은 유럽인들인 포르투갈 항해사들은 포르투갈 제국의 국가 역량 한계로 인해[30] 이 지역을 식민화할 의도나 역량은 없었고, 대신 그곳의 원주민들, 이 섬에 정착한 한족들과 약간의 교역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다 1624년에는 네덜란드 제국이 펑후 열도와 타이난에 당도하였다. 이들은 타이난에 질란디아 요새를 쌓고, 펑후에는 포대를 구축해 거점으로 삼고자 했는데 펑후에 대해서는 명나라가 자국 영토라고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밀려났다. 지역 원주민들은 이들에 영 호의적이지 않아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원주민들보다 우수한 무기를 지닌 네덜란드(동인도 회사)를 이길 수는 없었고, 이내 타이난, 가오슝, 핑둥, 타이둥 일대 등을 세력권 안에 넣어 원주민 부족들과 오래 전에 타이완 섬에 정착한 한족들을 노예로 착취한다. 네덜란드인들은 타이완 섬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수출하여 이득을 얻었으며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명나라 푸젠 지역에서 한족 노동력을 수입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첫 한족의 타이완 섬 진출 및 한족과 원주민의 첫 공생이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일부 한족들을 하급 관리로 기용해 원주민을 통제하거나 세금을 거두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한편 네덜란드로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와 개신교 교회 등을 세우고 이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31]
스페인 제국 역시 1626년에 타이베이, 신베이, 지룽, 단수이 등에 당도하여 요새를 구축하고 타이완 섬 북부를 지배했다. 그렇게 남북에서 유럽의 두 국가 세력들이 중서부의 다두 왕국을 압박해왔다. 그러다 당시 견원지간이었던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에서
4.2.1. 동녕국(명정)
이 시기 중국 대륙은 명말청초로써 베이징이 함락되고 명조가 멸망한뒤 장강 이남에는 남명정권이라 불리는 유민들이 속속 등장하였으며 정성공은 평생을 명나라 부흥운동에 바쳤고 명나라의 옛 도읍 난징을 거의 되찾을 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7세기 중반 대륙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자 정성공은 청나라의 해안 봉쇄에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명나라 부흥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거점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타이완 섬을 노렸다. 1661년 4월 29일에 타이난을 공격[33], 네덜란드령 대만의 반네덜란드파의 원주민들, 한족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봉기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공격해서 질란디아 요새를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네덜란드를 축출하고[34] 대만 남서부를 차지하여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는 동녕 왕국을 건국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은 수백명의 네덜란드 남성을 고문, 학살하고 여성들은 성노예로 삼았다.[35] 이후 한족들은 동녕 왕국에 흡수되었으며 동녕 왕국은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들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다두 왕국을 통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고 이들에게 농사, 중국어, 사냥, 덫이나 옷 등의 물건제작을 가르쳐 주는 등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어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다. 그러나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그로 인해 동녕 왕국과 남부의 평포족 간의 갈등이 생겨났고[36] 원주민들을 좀더 세력권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탄압해 학살하거나 세력권 안에 있는 원주민들을 착취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녕 왕국과 원주민들 간의 갈등 끝에 사록사 전투가 일어났다.또한 정성공은 동녕 왕국을 세우면서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도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은 동북아시아사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정성공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타이완 섬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반청복명을 대의명분으로써 지속적으로 청나라에게 반기를 들어 청나라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683년 7월, 청나라와 동녕 왕국 사이에 벌어진 펑후해전(澎湖海戰)에서 동녕 왕국의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동녕 왕국은 더이상 청나라에게 저항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동년 10월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동녕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4.2.2. 대만청치시기
1683년 강희제가 동녕 왕국을 멸망시킨 후에 청나라는 미개척된 타이완 섬 동북부에 진출하여 그곳을 정복했다. 한족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토지를 빼앗긴 원주민들은 계속 산악 지대로 밀려났다.[37] 결국 1732년 옹정제 통치 때에는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한족의 군사작전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다두 왕국은 멸망한다. 이 사건을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다두 왕국의 영토는 청나라의 관할이 되었으며 청나라는 타이완 섬을 푸젠성 영토로 편입시키고 타이난을 중심으로 타이완 섬을 통치했다.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족의 대만 이주가 본격화된다. 청 정부는 타이완 섬이 또 다시 다른 세력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족들의 타이완 섬 이주 금지 정책을 펼쳤지만, 전근대의 모자란 행정력 때문에 한족들의 불법 이주가 판을 쳤다.[38] 이주한 한족들은 대체로 타이난 인근에 정착하여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점차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거주 범위도 타이완 섬 평야지대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청나라는 한족과 원주민(당시에는 날것 그대로의 야만인이라는 멸시 의식에서 생번(生蕃)이라 하였다)의 경계인 '번계(蕃界)'를 정해 서로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금했지만, 한족의 이주가 계속되면서 한족들이 점차 번계를 넘어 원주민 영역에서 마을을 만들거나 농사를 짓고, 시간이 흘러 번계가 재조정되어 원주민 영역이 점차 축소되어 갔다. 또 원주민 영역에서 토지를 빌리거나 사서 건축이나 농사를 지은 한족들도 있었지만 원주민 토지를 강탈한 한족들도 있었다.
이렇게 한족의 생활영역과 원주민의 생활영역이 중첩되기 시작하고, 타이완 섬 한족 주민의 남초현상이 심각했기에, 한족 남성들이 주로 평야지대의 대만 원주민 여성들과 혼인하여 대만 원주민의 한족 동화가 촉진되었다.
청나라는 타이완 섬을 영토로 삼고 통치했지만 중앙에서 너무나 먼 땅이라 그런지 행정력은 그리 강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원주민들과 대륙에서 밀려들어와 대만에 정착하고자 하는 한족의 갈등이 공권력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로 끝없이 벌어졌다. 원주민들은 밀려드는 한족에 맞서 자신의 영역을 내주지 않기 위해 자체적인 무력으로 한족 마을을 습격했고, 반대로 평야에 정착한 한족들도 마을마다 자경단 비슷한 것을 만들어 원주민들의 습격에 대응하거나 원주민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족 이민 인구는 원주민 인구를 쉽게 압도했고, 따라서 큰 틀에서 보면 이 시기 원주민들은 점차 대만의 한족과 동화되거나 산으로 밀려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인상적인 사건으로 1867년 로버호 사건으로 인해 대만으로 원정온 미해병대를 대만 원주민인 파이완족이 격퇴한 사건이 있다.영문위키
일본과도 이와 비슷한 모란사 사건이 있었다. 대만 원주민들이 파이완족이 표류해온 류큐인 수십 명을 살해했고, 이에 일본 제국이 사이고 주도 등이 이끄는 일본군을 파병해 파이완족을 학살한 사건이다.
4.3. 근대, 현대
4.3.1. 대만일치시기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에서 대만을 빼앗아 점령하고 이른바 이번정책(理蕃[39]政策)을 펼쳤다. 일본은 평지와 원주민 거주지역 사이에 액용선(隘勇線)을 그어 원주민을 격리시키고, 이 땅을 오랑캐의 땅이라는 "번지(蕃地)"로 불렀다. 그리고는 일단 평지에 거주하는 한족의 저항을 막는 데 치중하였다.그러나 평지의 정세가 안정되자 점차 원주민이 사는 산지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대만 원주민들이 사는 산지의 울창한 삼림자원과 지하자원에 주목하여 원주민 영역에 침투하고자 했다.
일본은 대만을 통치하기 위해 대만 원주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학자들은 이 연구에 참여해 원주민들을 평야지대에 거주하는 평포족과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고산족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1910년대부터는 원주민(고산족) 거주지를 특별거주구역으로 정하고, 일본 법이 통하지 않으며 경찰이 사법, 행정권을 행사하는 구역으로 만들었다. 사람사냥 금지, 토지 국유화, 한족과의 분리정책, 주둔 경찰관(현지 학교의 선생도 겸했다)과 현지 여성과의 정략결혼이라는 통혼 정책이 취해졌다. 일본은 원주민 영역으로의 침투를 "야만인들에 대한 교화"로 포장함으로써 대만의 한족 세력에도 원주민 영역 침투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했고, 이는 일본의 대만 통치에 대한 한족의 저항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1930년 우서 사건(霧社事件)의 원인이 되었다. 이 우서 사건을 진압한 이후에는 산지 원주민들을 고사족(高砂族/타카사고 족)이라 개칭하고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선전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철저한 황민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1944~45년 전쟁 말기, 일본 군부는 고사족으로 구성된 의용대를 조직하고 뉴기니, 필리핀 등으로 차출했다. 이 부대를 타카사고 의용대라고 한다.
4.3.2. 국민당 독재 시기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후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을 접수했으며 이어 국공내전과 국부천대로 대만으로 본진을 이전했다. 중화민국은 대만 원주민에게 고사족 대신 '산지동포'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줬고, 번지(蕃地)라 이름붙여진 원주민 거주구역에 전부 정식 행정구역을 편성해줬다.그러나 일본이 그랬듯 중국국민당도 이들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데에는 인색했다. 일본이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멸시하여 2등 국민 취급을 했다면, 중화사상과 한족 위주의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국민당에서는 이들을 중국인, 중화민족으로 동화하려 했다. 원주민들에게 한족식 이름을 붙이고 원주민 고유 이름은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교육과정에서도 원주민의 언어나 역사, 문화보다는 중국의 언어, 역사, 문화가 훨씬 더 크게 강조되었다. 국민당 독재 시절 표준 중국어가 교육현장에서 강조되고 대만어가 학교에서 금지된 것처럼 원주민의 언어도 학교에서 금지되었다. 일제에 의해 빼앗긴 옛 땅을 되찾고 자치를 얻으려는 민족 지도자들은 중국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명목으로 공비로 몰려 처형당했다.
대만의 고도성장 시기에도 이들은 그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다. 교육수준이 한족에 비해 낮았던 원주민들은 사회적 성취라는 면에서 한족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원주민 거주 지역은 거의 대부분이 험준한 산지로써 고도성장 시기 개발에서 소외되어, 많은 원주민들이 도시로 이주해 저임금 노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도시로 이주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갔다.
4.3.3. 민주화 이후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원주민 권리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원주민 정체성 공인, 땅 되찾기 등의 운동을 벌였고 이는 민주화 운동과도 연계해 진행되었다.그리고 리덩후이 집권기에 민주화와 함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80년에 개설된 입법위원(국회의원 격) 원주민 대표 의석이 1992년부터 점차 늘어났고, 1994년 8월 1일에 명칭이 산지동포, 산지족에서 대만 원주민으로 개칭되었으며[40], 1996년에 행정원에 원주민 위원회(현 원주민족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95년 입법위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아슬아슬하게 절반을 넘었는데 국민당에 소속된 원주민 선거구 의원 6명이 캐스팅 보트를 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한다.
2016년 8월 1일(원주민의 날)에는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대만 원주민에 대해 이루어진 차별과 억압의 역사에 대해 대만 정부를 대표하여 사과하였다. 기사 또한 12월에 총통부 원주민족 역사정의 및 이행기 정의 위원회(總統府原住民族歷史正義與轉型正義委員會)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는 원주민에 대한 부당한 권익 침해 등을 조사하고 시정하는 활동을 하며, 위원회 인사는 원주민 민족 대표들과 관련 학자들 및 원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평포족 인사 등으로 구성된다.
2017년에는 원주민 토지 법안을 놓고 원주민들이 총통부 앞 카이다거란 대도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최근 대만에서 국경절 행사로 각 소수민족의 가수들이 모여 <手牽手>를 합창하는 등, 소수민족의 지위가 인정받는 일이 늘고 있다.
대만 정부가 고산족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고산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고산족들의 언어 수업을 실시하기로 했지만, 표준 중국어를 외래어로 표기해 논란이 일어났다.#
5. 민족 간의 갈등
5.1. 대만인과의 갈등
대만 원주민들은 전통적으로 본성인(민남인)과의 갈등이 잦았다. 청나라를 피해 대만에서 자리잡으려는 한족과 그들에 맞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는 대만 원주민 간의 전쟁이 많이 일어났고 지금도 본성인과 대만 원주민 간의 갈등도 꽤 크다. 반대로 일부 객가인과 외성인들은 원주민과 그럭저럭 잘 지냈다. 외성인들도 원주민을 억압하긴 했지만, 청나라~일치시기 시절까지 오랜 시간동안 원주민들을 억압한 본성인들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었고, 본성인을 견제할 겸 산지 개발을 시작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호감을 샀으며 또한 90년대 국민당이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해 원주민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원주민에 대한 회유가 어느 정도 먹혀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28 사건 관련 문제를 논할 때는 오히려 중국국민당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이렇다 보니 20세기 중후반 출생 원주민 세대는 국민당에 물표를 던져 주기도 했고 현재도 대만인과 원주민 간의 갈등이 꽤나 커서 본성인들이 대놓고 원주민들을 국민당 앞잡이 라고 부르는 경향도 있다. 원주민들도 이에 대항해 '진짜 대만의 주인'이 누구냐면서, 외성인 정권이나 본성인 정권이나 외래 정권임은 매한가지이며, 오히려 '조금 일찍 굴러왔을 뿐인' 본성인들이 대만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대만 독립을 외치는 것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만 본성인들이나 외성인들이 무조건 대만 원주민들을 억압하려 던 건 아니고 민주주의자들도 대만 원주민들과 화해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5.2. 원주민끼리 갈등
흔히 통틀어 대만 원주민이라 칭하지만 사실 대만 원주민은 어족만 같을 뿐 도저히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존재하고 있다. 민족끼리 언어가 통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일제가 들어서기 이전부터 원주민끼리 부족전쟁하는 건 굉장히 흔한 일이었다.[41]그 외에도 흔히 평포족이라 불리는 평야 지대 원주민과, 소위 고산족 위주인 정부 공인 원주민 사이에서도 갈등이 있다. 평야 지대 원주민 역시 자신들의 원주민 정체성을 공인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소위 고산족 위주로 이뤄진 현재의 정부 공인 원주민들은 그들이 한족에 동화되었다는 이유로 원주민으로 인정하는 데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무늬만 원주민인 한족이 원주민 사회로 진입해 원주민 권익 신장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우려와, 원주민 숫자가 늘어나 개별 원주민에 주어지는 혜택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이해관계 문제가 얽혀있다. 만약 평포족이 원주민으로 공인될 경우 최소 20만명이 원주민 사회의 일원으로 추가되는데 이는 원주민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문제이다. 관련 기사(영어)
5.3. 일본계와의 갈등
원주민 끼리 혹은 한족(외성인,본성인)과의 갈등도 심하지만 일본계인 완성인들과의 갈등도 만만치 않다.자세한 건 대만일치시기, 우서사건, 보갑제(일본 제국)등을 보자
6. 특성
(거주지 모습)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전통 선박)
오스트로네시아어족임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모로 민족 어족적으로 한족보다는 필리핀인이나 말레이인 혹은 인도네시아인에 가깝다. 대부분이 쌍꺼풀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는 화전농업과 수렵을 병행했으며, 오스트로네시아 쪽에서 흔한 수많은 터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움집에 거주하며 곡물창고를 높게 세웠다.
과거엔 '출초(出草)'라고 해서 란위섬에 살면서 필리핀어군에 속해 대만 제어에 속한 다른 대만 원주민과는 따로 노는 필리핀계[42] 따오(達悟)족을 제외한 모든 부족이 적대적 부족이나 타종족을 사냥해서 머리를 베어 전리품으로 삼는 풍습이 있었다. '출초'라는 이름은 풀밭에 숨어 있다가 사냥감의 목을 습격한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주로 성인식으로 행해졌다. 해골을 비치해 놓기도 하였으나 일본이 이를 엄금한 뒤로는 인간 사냥을 하진 않는다. 과거에는 한족들이나 일본인들이 대만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비하할 때 이러한 사람 사냥을 언급하는 일이 많았다.
푸유마와 아미족, 카발란족, 사키자야족 등 동부 평야 거주 원주민들은 모계 사회고 나머지 산악지역은 수렵민 특성상 대부분 부계사회로 루카이, 파이완, 푸유마족은 귀족과 평민의 두 계급이 존재한다고 했다. 또한 이름의 방식도 제각각 달라 자녀 이름에다 부모의 이름을 첨가한다던지, 아니면 성씨를 사용하는 민족도 있다. 가령 아타얄족은 이름 + 아버지 이름을 사용하며 부눈족은 이름 + 성씨를 사용하고, 파이완 족은 출생지 + 이름의 형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개명을 통해 만들어진 한족 방식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1945년에 중화민국이 대만을 접수한 이후로는 한동안 정부에서 한족식 이름이 아니면 등록을 거부했기 때문에[43] 원주민들에게는 중국식 이름을 갖는 것이 불가피했다. 민주화 이후 1995년부터 원주민 고유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한족식 이름과 함께 민족어로 된 자신의 본명을 한자로 음차하거나 본명 발음을 라틴 문자로 적어서 함께 나타내기도 한다.
이들은 대만 제어를 사용한다. 민족마다 언어가 다르지만, 대만 원주민들도 공용어인 표준 중국어나 사용 인구가 많은 대만어를 익혀야 대만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으므로 대부분이 표준중국어나 대만어를 구사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17세기에 한족이 대만에 들어온 이후로 한족에 많이 동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현존하는 대만 제어 중 일부는 소멸위기에 처해 있고, 원주민들 중에서도 민족어에 서툴거나 아예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딱히 자신이 소수민족이라는 자각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원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평포족들의 언어는 대부분 청 말기나 대만일치시기에 사멸하여 현재는 모두 사어가 되었기 때문에,[44] 평포족 중 원주민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표준중국어나 대만어를 사용한다. 일부 평포족 언어는 성경 번역 등의 형태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평포족 언어를 복구하는 움직임이 있기는 하다. 관련 기사(영어)
종교에서는 각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 외에도 많은 수가 기독교 특히 장로교를 믿는다.[45] 19세기 장로교 선교사들이 대만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포교 사업을 해온 결과이며, 대만 장로회는 역사적으로도 원주민 권익 신장에 목소리를 내오고 기여해왔다.
현대에 발전된 대만에서는 원주민 하면 "잘 놀고 재밌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덩치가 한족 등에 비해 현저히 크고, 눈 색이 검은색이 아닌 경우도 많아 한 눈에 구별 가능하다. 놀기 좋아하고, 잘 노는 친구들로 대만인들 사이에서 인식되고 있다.
7. 정치
7.1. 원주민 선거구
대만의 국회 격인 입법원의 입법위원(국회의원) 113명 중 6명은 원주민 유권자들끼리의 투표로 선출된 원주민 대표에 할당되어 있다. 물론 출마자도 원주민이어야 한다. 평지원주민선거구에 3명, 산지원주민선거구에 3명이 할당되어 있으며, 중선거구제를 채택했다.원주민은 지역구 국회의원에 대한 선거권/피선거권이 없이 원주민 대표에 대한 선거권/피선거권만 존재하는데, 도시 거주 원주민의 권익을 제대로 대변할 수 없어 이에 대한 개혁 요구도 꽤 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처럼 지역구 투표와 원주민 선거구 투표 모두 가능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관련 기사
대만의 일부 직할시와 성할시, 현의 시/현의회는 원주민만 출마 및 투표가 가능한 원주민 선거구를 갖추고 있다. 대만의 직할시와 성할시, 현의 시/현의회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해 직할시와 성할시, 현의 각 향진시구 하나 혹은 여러개를 단위로 선거구를 구성하는데 원주민 선거구의 분할 방식 역시 일반 선거구와 같다.
국민대회가 있었을 시절엔 국민대회에도 원주민 선거구가 따로 있었다. 1947년에 중화민국 헌법을 처음 제정했을 때도 국민대회 대표와 입법위원에 변강지구의 소수민족 사이에서 선출된 인원을 포함시키도록 하는 조문이 있었기 때문에, 대만만 실효지배하는 현재의 실정에 맞도록 이 제도를 변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2. 정치 성향
2012년 총통 선거 기초자치단체별 다득표 후보 파란색 : 마잉주(중국국민당), 녹색 : 차이잉원(민주진보당), 노란색 : 쑹추위(친민당) | 2016년 총통 선거 기초자치단체별 다득표 후보 파란색 : 주리룬(중국국민당), 녹색 : 차이잉원(민주진보당), 주황색 : 쑹추위(친민당) |
정치적으로는 중국국민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총통선거 결과 지도에서 보면 원주민이 주로 거주하는 동부 산간지역은 국민당(파란색) 일색이다. 역대 입법원과 국민대회 선거결과를 보면 1986년 증액선거때부터 2001년 총선거때까지는 두개의 원주민 지역구(산지원주민선거구, 평지원주민선거구)에서 민진당이 단 한석도 확보한 적이 없고, 이는 국민대회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진당은 평지선거구는 2004년, 산지 선거구는 2020년에야 겨우 한 명을 당선시켰다.
이들이 국민당에 몰표를 던진 이유는 명청시기에 이주해온 본성인들이 원주민들을 야만인 취급하면서 땅을 빼앗은 전적이 있어서 본성인에 대한 불신감이 상당한 것, 그리고 국부천대 이후로 국민당이 산지 개발을 시작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호감을 샀으며, 또한 1990년대 국민당이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해 원주민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원주민에 대한 회유가 어느 정도 먹혀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국민당 일당제 시기에 국민당에서 원주민 거주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탄탄히 구축하여 지역의 현안 해결 등에서 민진당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자랑한다. 관련 기사
사실 국민당 독재 시절에 대만 본성인 문화가 억압된 것처럼 원주민들의 문화도 존중받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20세기 말의 원주민 운동에는 민진당계 인사들이 많이 동참했고, 천수이볜 정부 하에서 선거공약으로 원주민 자치권 보장을 내세우고 총통 재직때는 대만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교육에서도 원주민들의 문화나 역사, 언어에 대해 가르치는 비중을 크게 늘렸고 원주민족 텔레비전(原住民族電視)도 개국하는 등 원주민 문화 진흥에 나름대로 공을 들였다. 그렇지만 역사적 이유로 본성인에 대한 불신 의식은 여전하다. 극단적인 사견으로는 원주민이 한족계 본성인을 싫어하는 정도는 2.28 사건 유족이 국민당을 싫어하는 정도나 똑같다고 말한다.
또한 한족계 본성인들의 대만 독립 주장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진짜 대만의 주인'이 누구냐면서, 외성인 정권이나 본성인 정권이나 외래 정권임은 매한가지이며, 오히려 '조금 일찍 굴러왔을 뿐인' 본성인들이 대만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대만 독립을 외치는 것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것이다. 이들은 대만 독립 세력의 원주민 권익 수호 운동 참여도 결국 대만 독립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수단이 아니냐는 의심을 보내기도 한다. 멕시코 독립운동가들이 과거 자기들이 열의를 다해 탄압했던 아즈텍 제국의 문화유산을 강조했던 것처럼, 원주민의 존재가 대만과 중국 대륙을 구분하는 중요한 점 중 하나이니 원주민을 띄워줄 뿐인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46]
차이잉원 총통 당선을 전후해 젊은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국민당 몰표 성향은 누그러지고 있고 민진당 득표율도 점점 높아지는 추세다. 대만 원주민들의 민진당 지지율이 차이잉원 총통 시절부터 조금씩 높아지는 건 민진당의 성향이 본성인 중심의 종족 내셔널리즘 대신 시민 내셔널리즘으로 바뀌어가면서 원주민에 반감을 살 일이 적어진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일부 원주민은 양안통일 지향자이기도 한데, 이 경우 대륙의 소수민족과도 어느 정도 교류한다.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만들어진 당도 있다. 이름하여 대만 제1민족당(台灣第一民族黨). 2020년에 해산되었다.
8. 유명한 대만 원주민
대만 스포츠계에서 여러 원주민 출신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다. 마치 미국 흑인처럼 소수민족으로서 정치권 등 대만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되기에 불리한 이들에게는 뒷배경을 비교적 덜 타는 스포츠가 지위 상승을 위한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었던 점을 반영한 듯.아미 족 출신의 마이상 칼리무드(Maysang Kalimud). 한식(漢式) 이름인 양촨광(楊傳廣)으로 잘 알려져 있다. 타이둥 시내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촨광 로(傳廣路)라는 길도 있다. 1960 로마 올림픽 남자 10종 경기 준우승자로 10종 경기 역사상 전설적인 선수다.[47] 중화권(중국·대만·홍콩·마카오)을 통틀어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48] 마이상은 은퇴 후 1983년 국민당에 입당하고 국민당의 추천으로 평지 원주민 선거구 입법위원을 지냈으며, 나중에 국민당을 탈당하고 1989년 민진당에 입당하여 타이둥현 현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2007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만의 올림픽 두 번째 메달리스트인(육상 여자 80m 허들, 지금은 100m로 바뀜) 지정(紀政) 역시 원주민, 정확히는 혼혈이며 평포족으로 부계는 원주민, 모계는 한족이다.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올림픽 시상대에 매화기가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올린 사람은 이 두 사람이 전부다.
대만의 인기 스포츠인 야구에서도 장타이산(아미 족), 린즈성(아미 족), 장즈셴(아미 족), 양다이강(아미 족), 가오궈후이(객가인과 아미 족 혼혈), 천진펑, 양야오쉰 등 원주민 출신 스타 선수가 상당수 존재한다. 2017 WBC 국가대표팀에서는 오히려 한족 선수보다 원주민 선수가 더 많았다고 할 정도. 2018년에 NC 다이노스에 입단한 왕웨이중 역시 원주민인 아미 족 출신이다.
원주민들이 오스트로네시아계통에 눈에 띄는 이목구비에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서인지 연예계에도 원주민 출신들이 꽤 있다. '대만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여가수 장혜매는 푸유마 족 출신이다. 비비안 수, 대만판 '꽃보다 남자'(원제 유성화원)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F4의 멤버 언승욱과 주유민은 아타얄 족 혼혈이다. 가수와 배우, 예능 MC 등으로 활동하는 나지상은 아미 족 혼혈. 그밖에도 A-Lin(아미 족), 가가(家家, 부눈 족과 푸유마 족 혼혈), 둥리훠처(動力火車, 파이완 족) 등이 원주민 출신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여자)아이들 멤버 중 대만 출신인 슈화도 모친이 아타얄족 태생으로 알려져 있다.
2020년에는 아타얄족 태생인 쉬옌푸 육군 2급 상장이 대만군의 2인자격인 참모본부의 부참모총장집행관(한국의 국군 합참차장격)에 임명되었다. 원주민 출신으로 군부의 고위직에 오른, 정관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문 사례.
제14대 대만 총통인 차이잉원의 할머니가 파이완 족 출신이다.(할아버지는 객가인 출신.)
9. 기타
1986년부터는 중부의 내륙 난터우 현에 '구족문화촌'(九族文化村)이라 하여 원주민 문화, 풍습을 주제로 하는 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과거에 원주민을 9개 민족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일종의 민속촌인 셈. 이곳에는 유럽식 정원, 케이블카 등의 위락 시설들도 위치하고 있어서 나름 대만의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다.
원주민 관련 박물관으로는 타이베이의 순이 대만원주민박물관(順益台灣原住民博物館)을 비롯하여 기타 지역에서 찾을 수 있다. 순이그룹에서 운영하는 사립박물관으로 3층 규모의 사무용 건물 수준이다. 국립고궁박물원 근처에 지어졌는데(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 중화권 문화의 총본산과 대만 고유문화의 상징이 서로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느낌을 준다. 고궁박물원에서 통합입장권을 할인해서 판매하고 있고, 고궁박물원 표가 있으면 원주민박물관 입장료가 약간 할인되는 혜택도 제공하고 있다.
향후 가오슝에 국립 원주민 박물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2025년 착공하여 2030년대 초 완공한다는 계획이다.
대만에서 제조되는 고급 위스키 브랜드 '카발란'(Kavalan)은 동명의 원주민 부족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타이베이 중심부인 총통부를 가로지르는 대로에는 역시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케타갈란(Ketagalan[49])'의 이름이 붙여졌다. 과거의 이름은 장제스의 장수를 기원하는 '제서우'(介壽)[50]였는데, 1990년대에 대만 독립 성향인 천수이볜이 타이베이 시장을 하고 있었을 시절에 현재 이름으로 바뀌었다.
2016년 조사 기준으로 대만 원주민은 전체 인구수의 약 2%에 불과하지만 중화민국군 전체 직업군인의 7%, 특수부대의 60%가 원주민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차별 탓에 원주민의 평균 소득은 일반 대만인의 약 70% 정도 밖에 안 돼서, 상대적으로 차별이 덜하고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군대에 많이 간다. 그러나 군에서도 차별이 없는게 아니라서 복무하는 원주민 수가 약 1만명에 달하지만 2009년 기준 원주민 출신 장성 수는 총 341명 중 5명에 불과하며 원주민 군인들이 영관급까지 승진하는 비율은 극히 낮다.
대만 제어로 된 지명은 대만 곳곳에 남아 있다. 타이완(臺灣)이라는 지명부터 대만 제어를 음차한 것이다. 대만 제2의 도시인 가오슝(高雄)도 그 지역 원주민 언어로 '대나무숲'을 뜻하는 '타카우'를 일본어로 음차한 것이고(高雄의 일본어 독음이 타카오), 베이터우(北投, ←Ki-Pataw), 난터우(南投 ←Ramtau), 유명 관광지 타이루거(太魯閣 ←Truku 혹은 Taroko) 같은 지명도 원주민 언어가 어원이다. 다만 대부분의 대만 제어 지명을 음차할 때 대만어에 기초해 한자 음차했고, 그 한자를 표준 중국어 독음으로 읽은 것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 기원을 쉽게 유추해내기는 힘들다.
10. 대중매체에서
월드 뮤직 아티스트 Enigma의 히트곡인 Return To Innocence 속의
아미족 공연단의 老人飲酒歌. Enigma의 곡 속의 후렴과는 다르게 향토적이다.
각 부족을 만화풍 캐릭터로 디자인한 것도 있다.
대만 원주민 작가 단편소설집 <생강로드>가 있다.
10.1. 대만 원주민을 모티브한 캐릭터
- 천하제일상 거상 - 원주민장로, 원주민술사, 원주민무당, 원주민, 조세림, 크라슈미, 각성 크라슈미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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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만의 헌법 영역본에는 aborigines를 쓰고 있으나, 일부 원주민 기관(원주민족위원회 등)은 indigenous peoples를 쓴다.[2] 한족 본성인 안에서도 크게 대만어를 사용하는 민남지역 출신 한족들과 객가인으로 구분된다.[3] 평포족의 '평포'는 평지초포(平地草埔)의 줄임말이며, 埔는 객가어와 민남어에서는 '평야'라는 뜻을 지닌다. 그래서 평포족은 '평지와 초원에 사는 민족' 정도의 뜻이다.[4] 명나라 때 여진족에 대해서도 생여진과 숙여진으로 구분한 바 있다.[5] 잘 아는 길을 熟路, 초행길을 生路라고 한다.[6] 고사(高砂)는 일본어로 타카사고라 읽으며, 전국시대나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대만 지역을 이르던 말이었다.[7] 본래 지금의 이란현 일대에 거주했지만, 19세기 초에 한족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밀려나 화롄현으로 이주하였다.[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A] 2023년 5월 기준[20] 원래는 펑포족으로 분류되었다.[21] 원래는 이란현과 지룽시 일대에서 살았으나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리어 쫓겨와 타이둥현 일대에 정착해 이들을 받아준 아미(阿美)족과 섞여 살아서 아미족의 일파로 간주되다 분리되었다. 위스키 카발란이 이들의 민족명에서 유래했다.[22] 타이루거 국가공원 일대의 원주민으로 아타얄(泰雅)족의 일파로 분류되었다가 독립성을 인정받았다.[23] 위의 카발란족처럼 청나라에 항쟁했으나 실패하고 아미족 사이에 숨어살다 독자성을 인정받았다. 주로 불을 숭상한다.조로아스터교?![24] 난터우현 일대에 살고 있으며 우서사건을 일으킨 민족이기도 하다. 원래는 상술한 타이루거족처럼 아타얄족의 일파로 분류되었고 우서사건 당시에도 이들의 반란은 아타얄족이 일으킨 반란으로 불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언어와 문화(특히 턱 문신)가 아타얄족, 타이루거족과 비슷한거 빼고는 차이점이 많고 부족민들 자신은 이미 자신과 아타얄족을 다르게 인식하고 '시디그'란 말 자체가 그들 자신을 스스로 일컫는 말이어서 결국 2008년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았다. 전사가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넌다고 믿으며 세디크 발레(Seediq Bale)의 영어 제목인 레인보우 워리어스도 여기서 따왔다.[25] 부눈(布農)족 생활권에 혼거하다 독자적인 민족으로 인정받았다.[26] 초우(鄒)족의 일파로 인식되어 남부 초우(南鄒)족이라고 불렸으며 이후 독자성이 인정되어 분리되었다.남수단?[27] 퉁이 라이온즈의 터줏대감 고참 선수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09 WBC에 참가했다.[28] 중신 브라더스의 내야수로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과 2017 WBC에 참가했다.[29] 영토는 현재의 타이중시 · 장화현 · 난터우현 일대라고 한다.[30] 이 시점에서 포르투갈 인구는 200-250만 명에 불과했다.[31] 여기서 스페인어, 네덜란드어를 배운 한족들,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중국어를 배운 원주민들이 생겨났다.[32] 그러나 아슬라미에는1645에 우강(烏溪) 유역 지대를 중심으로 다자시(大甲溪) 남쪽 기슭에서 동루어시(東螺溪) 북쪽에 이르는 지역을 다스리며 여전히 다두 왕의 칭호를 유지하면서 다두 왕국을 반독립 왕국으로 계속 통치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역시 아슬라미에의 사후, 다두왕국의 세력과 영향력을 약화시키는데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33] 프로빈티아 요새, 질란디아 요새[34] 이후 네덜란드군이 질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는 질란디아 요새 성벽이 네덜란드 공격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35] 정성공 자신도 전직 네덜란드 관료였던 선교사 안토니위스 함브룩(Antonius Hambroek)을 참수하고 그의 딸인 백인 소녀를 첩으로 삼기도 했다.[36] 이때 다두 왕국의 전사였던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파포라족 아 텍 카우종(阿德狗讓 / 1592년-1661년)이 정성공의 원정으로 파견된 두 장군의 매복전술에 살해당했다.[37] 이로 인해 툰샤오 사 사건이 벌어진다.[38] 이들은 대개 대륙에서 가난하게 살던 자들이나 나라에 찍힌 해적들이었기에 어차피 이주를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39] 오랑캐(蕃)를 다스림(理)[40] 오늘날 대만은 이 날을 원주민의 날(原住民族日)로 기념하고 있다.[41] 특히 시디크족은 씨족들 간의 갈등이 매우 크다고 한다.[42] 정확히는 바탄 제도 계열인[43] 명시적으로 거부하기도 했고, 이름 기입 칸이 한족식에 맞게 4자를 넘어가지 않아서 그것보다 길이가 긴 민족어 이름을 기입하는 것이 어려웠다.[44] 대만 중부에 거주하던 파제흐족의 언어가 유일하게 21세기까지 남아 있었지만, 2010년에 마지막 파제흐어 모어 화자인 판진위(潘金玉, 1914~2010)가 사망하면서 평포족들의 언어는 모두 사멸했다.[45] 대만기독장로교회. 대만 최대 개신교 교단이자 유일한 장로회 교단이다.[46] 일례로 2008년에는 DNA 연구를 통해 대만인의 85%는 원주민 혈통을 일부 갖고 있다는 연구가 발표된 적이 있다. 해당 연구는 학계에서 여러 한계점이 지적되어 연구의 결론이 학계의 합의된 정설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이 연구는 대만 독립주의자들에게 대만은 중국과 다르다는 근거로 널리널리 활용되었다. 예시(중국어) 그리고 원주민 권익 운동가들에게 자신들을 독립주의자들의 정치적 이익에 활용한다며 극딜을 당했다.[47] 1960년 로마 올림픽 10종 경기 금메달 리스트인 레이퍼 존슨과의 라이벌 관계는 그야말로 10종 경기의 레전설. 10종 경기에서 던지기 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레이퍼 존슨을 앞섰고 로마 올림픽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경기에서 마이상 칼리무드가 이기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약점인 던지기 부분에서 레이퍼 존슨에게 조금 심하게 밀려서 마지막 1,500m 경기 하나를 남겨놓았을 때는 존슨이 점수에서 앞섰지만 두 사람의 평소 1,500m 기록대로라면 점수가 역전이 되어 금메달은 마이상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이때 레이퍼 존슨은 평소대로 달려서는 절대 마이상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마이상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을 떨어지지 않는다는 특이한 전략을 세운다. 그리고 이 전략이 맞아떨어져 마이상이 이기긴 했으나 두 선수의 기록은 얼마 차이가 안 났고 결국 총점에서는 역전에 실패하여 금메달은 레이퍼 존슨의 차지가 되었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10종 경기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의 하나다. 사실 마이상이 미국 유학 중이라서 두 선수는 같은 코치 밑에서 배웠고 코치는 1,500m를 남겨놓고 한쪽은 점수를 지키는 방법, 다른 쪽은 역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고 했는데 성공한 것은 존슨이었다.[48] 한족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같은 로마 대회에서 나왔는데, 중화권이 아닌 싱가포르에서 나왔다. 참고로 이쪽은 역도 선수로 역시 은메달을 땄다.[49] 대만어에 기초한 한자 음차로는 발음이 유사한 凱達格蘭(Khái-ta̍t-kek-lân). 표준중국어 독음은 카이다거란(Kăidágélán)이며 한국에는 표준중국어 독음으로 알려져 있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과는 무관하다.[50] 근처에는 제서우 공원도 있는데 이건 이름이 바뀌지 않았으며, 제서우라는 지명은 대만 곳곳에 흔하다. 제서우 공원은 길 건너에 있는 228평화공원에 비하면 동네공원 수준으로 작다. 타이베이에는 제서우라는 지명을 거의 찾기 힘들지만, 강 건너 신베이 시에는 제서우라는 지명이 비교적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