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کٲشُر لوٗکھ | कॉशुर लूख 카슈미르족 | Kashmir People | ||
주 거주지 | 인도 서북부 (잠무 카슈미르) 파키스탄 (아자드 카슈미르) | |
인구 | 인도 | 약 680만명 |
파키스탄 | 약 35만명 | |
주 종교 | 이슬람교 | |
언어 | 카슈미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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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슈미르인은 카슈미르 계곡 출신으로, 인도유럽어족 인도아리아어군 다르드어파에 속하는 카슈미르어를 사용하는 여러 무슬림 및 힌두 민족 집단을 지칭한다.[1] 카슈미르 계곡의 주 민족집단이지만 근대 시크 제국과 두라니 왕조 시기에 많은 카슈미르인들이 펀자브 지역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오늘날에는 1947년 카슈미르 분할 및 그에 따른 분쟁의 영향으로 파키스탄의 아자드 카슈미르[2] 및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연방 직할지)로 나뉘어져 있으며, 인도령 카슈미르 무슬림들은 독립 혹은 파키스탄 편입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카슈미르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지만 힌두교도 인구도 적지는 않다.현재 인도 내 670만여 명 이상의 카슈미르인이 거주하며 파키스탄 내 거주하는 카슈미르인은 35만여 명에 달한다. 인도 대부분 지역이 계절이 건기, 우기로 나뉘는 것과 다르게 카슈미르 지역은 사계절이 뚜렷한데 이는 카슈미르인과 다른 대부분의 인도인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로 연결된다. 다른 북인도 지역과 다르게 카슈미르에서는 밀보다 쌀을 더 많이 먹으며 망고 같은 열대 과일 대신에 온대 기후에서 주로 자라는 과일들을 많이 먹는 편이다.
카슈미르는 "물에서 건조한 땅"을 의미한다.
2. 기원과 역사
카슈미르는 북천축국(북인도)에 속하는데, 이 나라는 조금 크다. 왕은 코끼리 3백 마리를 가지고 있고, 산 속에서 산다. 길이 험악하여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 인구가 매우 많은데, 가난한 이가 많고 부유한 이는 적다. 왕과 수령과 여러 부자들은 의복이 중천축국과 다르지 않으나 그 밖의 백성들은 모두 모포로 몸의 추한 곳을 가린다. 이 지방 산물로는 구리와 철, 면직물, 모포, 소, 양이 있고, 코끼리, 작은 말, 멥쌀, 포도 등이 있다. 기후가 매우 추워 이전의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가을에는 서리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며, 여름에는 찬 비가 많이 내려 온갖 초목이 늘 푸르다가 잎이 시들고 겨울이 되면 풀들이 모두 말라 버린다. 시내와 골짜기가 좁아 남북으로는 5일 정도 걸리고, 동서로는 하루만 가면 땅이 끝나며 나머지는 모두 산으로 덮여 있다. 지붕은 모두 나무 널판자로 덮고, 짚이나 기와는 쓰지 않는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삼보를 매우 공경한다. 왕과 대수령은 외출할 때 코끼리를 타고, 낮은 관리들은 말을 타고, 백성들은 모두 걸어간다. 나라 안에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 왕오천축국전, 혜초 서기 8세기 기록
- 왕오천축국전, 혜초 서기 8세기 기록
카슈미르인은 누리스탄인, 칼라쉬인 등과 마찬가지로 산악 지대에 정착 후 잔류한 고대 인도아리아인 조상들의 후손이다. 중세 이후 육로로 인도 반도를 침략한 유목민 상당수는 카슈미르 계곡 대신 부유한 북인도 평야 지대를 장악하는데 주력하였고, 이는 카슈미르 고유 언어와 문화가 보존되는 계기가 되었다. 11세기 호라즘 출신 무슬림 역사가 알 비루니는 카슈미르인들이 상당히 폐쇄적이며 배타적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바라나시와 카슈미르는 인도에서 학문이 발전한 지역이다. 산스크리트어 문법은 카슈미르에서 기원하였다 한다. ... 카슈미르 주민들은 자신들의 국력이 비교적 약함을 걱정하여 외부인의 출입을 경계하는 편이다. 이 때문에 이들과 교역하는 것은 어려우며 과거에는 유대인을 비롯한 일부 외국인만 출입이 가능했다 한다. 오늘날에는 개인적으로 인맥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인도인이 카슈미르에 출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키탑 알 힌드 / 알 비루니
키탑 알 힌드 / 알 비루니
고대에는 설일체유부 불교가 번성하고 중세까지 불교가 우세하던 카슈미르에서 이슬람이 뿌리내린 계기는 1320년대 불교도 토후 린찬(Rinchan)의 자발적인 이슬람 개종이었다. 그의 개종은 주변 무슬림 국가들의 지하드 외침을 예방하고 무역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실리적인 목적에서 개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다르드어군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카슈미르 무슬림들도 개종 초창기에는 쉬아파가 우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순니파 우세 지역인 카슈가르와 교류가 증가하고, 1586년부로 순니 이슬람 국가이던 무굴 제국이 카슈미르 토후들이 순니파와 쉬아파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틈타 카슈미르를 정복하면서 카슈미르는 순니파 다수 지역이 된다.
무굴 제국은 1540년대 카슈미르를 정복한 이후 상실했던 경험 및 카슈미르의 산악 지대에서 카슈미르인들이 다시 봉기하는 경우 진압이 힘들 것임을 우려하여 카슈미르인들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말려버리는 전략을 취했다. 무굴 제국 치하 카슈미르에서는 무기 생산이나 병력 훈련과 관련된 행동은 철저히 제한되었고, 힌두교도 브라흐민 지주,관료들이 무슬림 농민들을 다스릴 권리가 암묵적으로 승인되었다.
카슈미르인들은 소득의 3분의 2에서 2분의 1 정도를 무굴 제국 정부에 납세해야 했으며, 여기서 추가적인 부역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소작농이 아닌 자영농도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편이었다. 카슈미르인들은 대개 농업 외에도 가내 수공업으로 모직물을 가공해서 소득을 보충하였는데,[3] 이렇게 생산된 모직물 숄이 오늘날 캐시미어(Cashmere)의 기원이 된다.
3. 카슈미리 펀디트
카슈미르의 브라흐민 계급인 카슈미르 펀디트는 카슈미르인 힌두교도 중 가장 대표적인 집단으로, 카스트 제도 내에서는 브라흐민 중에서 사라스와티 브라흐민[4]에 속하며 인도 카스트 제도 내 브라흐민 중에서도 계급이 가장 높다고 한다. 이들의 기원은 고대 마우리아 왕조 시대 카슈미르 주민 대다수가 불교로 개종하던 시절 브라만교를 유지하는 대가로 카스트가 상승한 브라흐민 집단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카슈미르 펀디트들은 소수의 지주층 입장에서 무슬림 다수층을 핍박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펀디트들은 자신들이 이슬람이 인도에 유입되기 이전부터 카슈미르에 살던 토박이라고 주장한다. 실질적으로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은 중세 이후 불교나 힌두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현지인들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이들이 고대부터 이어진 권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와르나(Varna) 즉 피부색에 따라 계급을 결정하는 힌두교 사회 카스트 제도의 특성 때문이었다. 카슈미르는 인도 다른 지역보다 북부에 위치하고 고산 지대 특성상 날씨도 훨씬 서늘한 편이다. 이 때문에 카슈미르인들은 인도 내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피부가 평균적으로 훨씬 더 밝은 편이었고, 카슈미르 출신 브라흐민들은 카슈미르가 비교적 빈곤한 지방임에도 불구 여러 힌두교도 카스트 중 가장 높은 브라흐민 계급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계급을 2천년이 넘도록 유지할 수 있었다.
4. 근세 이후의 역사
4.1. 아프간계 두라니 왕조 치하
카불 근교를 장악했던 무굴 제국[5]이 세력이 약화되고 아프가니스탄에는 파슈툰족들이 독자적인 왕조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발흥한 두라니 왕조는 무굴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무굴 제국의 서북부 영토 상당수를 병합하기 시작하면서 카슈미르의 서부 지역 역시 두라니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무굴 제국에서 카슈미르인들이 자체적인 방어 조직을 만들 수 없게 제한한 이유로 파슈툰족들은 카슈미르인들을 마음껏 약탈할 수 있었다. 두라니 왕조의 군인들은 카슈미르인들을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가리지 않고 약탈했으며 종종 힌두교도들에게 더 잔인하고 심각한 폭력을 휘두를 때도 있었지만 통치상의 편의를 위해 카슈미르 펀디트 관료들과 지주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었다.당시 상당수의 카슈미르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노예로 끌려갔으며, 일부 파슈툰족들이 부녀자들을 이끌고 카슈미르 계곡에 정착하였다. 당시 카슈미르에 정착한 파슈툰인들은 오늘날에도 파슈토어를 사용하며, 카슈미르인들과 별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카슈미르인들은 무슬림 무굴 제국과 두라니 왕조 지배 시절 소외되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파키스탄과의 통합에 회의적인 의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으며, 가능한한 독립적인 카슈미르 무슬림 국가 건설을 희망하는 상황이다.
4.2. 시크 왕국 치하
무굴 제국 내에서 탄압을 받던 시크교도들은 봉기 와중에 시크 왕국을 건설하고 1819년부로 마하라자 란지트 싱의 지휘 하에 카슈미르 계곡을 병합하였다. 시크 왕국의 지배는 1846년까지 이어졌고 이 시기 많은 카슈미르인들이 펀자브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 시기에도 카슈미리 펀디트들의 카슈미르 지배 구조는 변혁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27년에 걸친 지배 기간 동안 카슈미르를 다스린 10명의 총독 중 5명이 힌두교도였다.시크 왕국의 지배는 두라니 왕조처럼 직접적인 약탈은 자제하는 편이었으나, 카슈미르 무슬림 농민들에게는 엄청난 양의 세금이 부과되고 차별적인 법이 시행되었다. 1833년 당시 시크 왕국은 카슈미르 지역의 기근을 구제하지 않고 방치하여 많은 카슈미르인들이 기근으로 고통받았으며 이는 상당수의 카슈미르인 무슬림들이 비옥한 펀자브 강 유역 평야 지대로 이민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6] 시크교도가 카슈미르 펀디트를 살인하면 벌금으로 4루피를 지불해야 했으나 무슬림 농민을 살해한 경우 벌금으로 2루피를 지불하면 되었다 하며, 카슈미르 내 모스크들은 아잔을 울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시크 왕국의 전성기 이전 시크교도들은 무굴 제국의 근본주의 무슬림들과 두라니 왕조의 아프간인들로부터 엄청난 고초를 겪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카슈미르에서 반 이슬람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정작 화풀이 대상이 되었던 카슈미르인 무슬림 농민들 역시 약자 입장에서 무굴 제국과 두라니 왕조에게 수탈당하던 사람들이었다.
4.3. 힌두 도그라 왕조 치하
- 목공예품을 만드는 카슈미르인들
1846년 시크 왕국은 잠무와 히마찰프라데시 지역에서 발흥한 라지푸트계 힌두 도그라 왕조에게 카슈미르 지배권을 상실하고 도그라 왕조의 카슈미르 지배는 1947년까지 이어지며 카슈미르의 분할 및 대부분 지역의 인도 편입의 원인이 되었다. 도그라 왕조는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원인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이라는 타이틀을 수여받았으며, 무굴 제국, 시크 왕국처럼 카슈미르 무슬림 농민들에 대한 중과세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당시 영국에 적대적이었던 시크 왕국의 지배가 끝나고 친영파 도그라 왕조가 카슈미르를 지배하면서 서구인들도 자유롭게 카슈미르를 탐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카슈미르를 방문했던 서구인들은 카슈미르 농민들이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빈곤을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며, 카슈미르 펀디트들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신사적이고 친절하지만 집단으로 정책을 짤 때는 무척 잔혹하고 억압적이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19세기 말 인도 서북부 전역에서 대기근이 발생하여 2천만여 명 이상이 사망할 당시 카슈미르에서도 엄청난 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7] 카슈미르의 경우 구자라트와 라자스탄만큼 기근 피해가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전체 인구의 60%가 1877년부터 1879년 사이 기근으로 사망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사망자들은 물론 농민들과 소상인들이었다.[8]
카슈미르 무슬림들의 지속적인 이주 및 기근 피해가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슈미르 인구 중 대다수는 여전히 무슬림이었다. 1941년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당시 카슈미르 지역 인구의 77%는 무슬림[9]이었고, 20%는 힌두교도[10]였으며, 3%는 불교 혹은 시크교 신자였다 한다.
5. 현황
잠무 카슈미르, 잠무 카슈미르(연방 직할지) 문서 참조인도 파키스탄 전쟁과 카슈미르 분쟁 및 독립 투쟁 과정에서 카슈미르 내 힌두교도 상당수는 이웃한 잠무 지방 및 인도 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카슈미르 지방이 분쟁 지역으로 분류되어 인프라 투자가 지체되면서 카슈미르 내에서 생업을 하는 사람들은 무슬림, 힌두교도 할 것 없이 인도 평균에 비해 빈곤한 편이다.
무슬림 카슈미르인들은 평균적으로 빈곤한 편이지만 일부 카슈미르인들은 인도 내 다른 지역이나 해외로 이주하여 카슈미르 특산물(보석, 캐시미어 등)을 취급하면서 부를 쌓기도 한다. 카슈미르인들은 힌두교도와 무슬림 모두 인도 내 다른 지역에 비해 경건하고 종교적인 편인데, 카슈미르 무슬림들은 인도 다른 지역 내 친힌두파 수피들에게 적대적이고, 펀디트들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유형 무형으로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 서구권으로 이주한 카슈미르인들 중에는 기존의 종교를 버리고 서구 사회와 완전히 동화되는 경우도 많으며, 이들은 해외 내 인도 혹은 파키스탄 커뮤니티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편이다.
6. 출신 인물
- 살만 루슈디 - 카슈미르계 무슬림 출신이다. 다만, 출생지는 뭄바이다.
- 자와할랄 네루 - 인도 카스트 제도 내 브라흐민 중에서도 계급이 가장 높은 카슈미리 펀디트 가문 출신으로(다만 출신지는 알리하바드이다.) 정치, 사회 생활에서 그 혜택을 상당히 많이 봤다.
- 쿠마라지바 - 아버지가 카슈미르인
[1] 카슈미르 계곡에 거주하는 일부 민족들, 이를테면 구자르인과 발티인 등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2] 다만 파키스탄의 아자드 카슈미르의 카슈미르라는 명칭은 상징성이 더 강하며 해당 행정구역의 거주인구 중 카슈미르인은 소수에 불과하다.[3] 해당 상황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4]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헬만드 강 출신으로 비정된다.[5] 무굴 제국의 초창기 근거지 중 하나가 바로 카불이었다.[6] 특히 암리차르나 라호르, 라왈핀디로 많은 수가 이주하여 모직물을 가공하는 가내 수공업으로 연명했다 한다. 교통이 열악한 카슈미르보다는 당시 시크 왕국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암리차르에서 모직물 가공품을 더 비싸게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7] 1차적인 원인은 가뭄이었지만 아일랜드 대기근이나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와 마찬가지로 사회구조적인 요인도 많았다.[8] 영국인들과 인도 내 무슬림 운동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카슈미리 펀디트 중에서는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극히 드물었다 한다.[9] 파슈툰족 등 포함[10] 카슈미리 펀디트 외 네팔/티베트계 힌두교도 부족 및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힌두교 인구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