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B8480B 0%, #FF671F 20%, #FF671F 80%, #B8480B); color: #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자와할랄 네루 |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 인디라 간디 | 모라르지 데사이 | |
제5대 | 제3대2 | 제6대 | 제7대 | |
차란 싱 | 인디라 간디 | 라지브 간디 | 비슈와나트 프라탑 싱 |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
찬드라 셰카르 | P. V. 나라심하 라오 |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 H. D. 데베 고다 | |
제12대 | 제10대2 | 제13대 | 제14대 | |
인데르 쿠마르 구지랄 |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 만모한 싱 | 나렌드라 모디 | |
인도 총독 · 자치령 총독 · 총리 관련 직위: 인도 대통령 | }}}}}}}}}}}} |
자와할랄 네루 관련 둘러보기 틀 | ||||||||||||||||||||||||||||||||||||||||||||||||||
|
<colbgcolor=#046a38><colcolor=#fff> | |||
출생 | 1889년 11월 14일 | ||
인도 제국 알라하바드 (現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알라하바드) | |||
사망 | 1964년 5월 27일 (향년 74세) | ||
인도 공화국 뉴델리 (現 인도 뉴델리) | |||
재임기간 | 초대 총리 | ||
1947년 8월 15일 ~ 1964년 5월 27일[1]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46a38><colcolor=#fff> 학력 | 해로우 스쿨 (졸업 / 1906)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자연과학사 / 1910) Inns of Court (수료)[2] | |
종교 | 힌두교 (세속주의) | ||
신체 | 179cm[3] | ||
배우자 | 카말라 네루 (1899 ~ 1936, 1916년 결혼) | ||
자녀 | 딸 인디라 간디 (1917 ~ 1984) 아들 (1924 ~ 1924) | ||
외손자 | 라지브 간디 (1944 ~ 1991) 산자이 간디 (1946 ~ 1980) | ||
소속 정당 |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 회의 ]] | ||
약력 | 인도임시정부 부수상 인도 외무부장관 1947년 – 1964년 | ||
인도 재무부장관 1956년 – 1956년 1958년 – 1958년 | |||
인도 국방부장관 1953년 – 1955년 1957년 – 1957년 1962년 – 1962년 | }}}}}}}}} |
[clearfix]
1. 개요
<rowcolor=white> 딸 인디라 간디와 함께 | 1961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국왕과 함께[4] |
인도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영국에서 사실상 독립해 세워진 인도 자치령의 유일한 총리이자 1950년 세워진 인도 공화국의 초대 총리였다.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오늘날 인도의 국부격인 인물로, 비폭력 운동을 벌였던 마하트마 간디와 달리 적극적인 파업과 투쟁적인 독립 운동을 이끈 인물이었다.[5]
2. 생애
알라하바드에서 부유한 브라흐민 가문에서 출생하여[6] 15세 때 영국에 유학하여 영국의 최고 사립 학교인 퍼블릭 스쿨의 일각인 해로우 스쿨과 역시 최고 명문인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 귀국하였다. 그 이후에 변호사 일을 하다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마하트마 간디에게 감명을 받아 인도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1916년 간디의 영향을 받아 그 해 인도 국민 회의에 참가하였고, 1918년 자치 연맹 간사, 국민 회의 의원이 되었다. 192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피압박국 국민대회에 인도 대표로 참석. 영국 왕태자의 인도 방문 때 파업 투쟁을 주도하여 1922년~1923년까지 투옥되는 등 독립을 이루기까지 9차례 투옥되었다.1923년 알라하바드 시의회 의장에 선출되고 인도 국민회의에 20년 이상을 국민회의 집행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인도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협력하는 실질적 리더 역할을 했다. 1929년 국민 회의파 라호르 대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비로소 인도의 완전 독립이 결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국민회의파 내각은 총사직하고 1942년 영국에 대한 인도로부터의 즉시 철수를 결의하여 간디와 함께 체포되면서 인도 국민을 시름에 빠지게 했다.
출소한 뒤 1946년 임시정부의 부수상 겸 외상이 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47년 인도 제국은 파키스탄 자치령과 인도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인도는 자치령으로 지정되어 실질적인 독립을 달성했다.[7] 이 때 네루는 인도 총리 겸 외상, 연방관계상에 취임하여 뉴델리에서 아시아회의를 주재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지 제도에 대한 항전을 재선언하였다. 그리고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헌법을 제정하고, 1950년에 인도 공화국을 선포하여 공식적으로 왕정을 폐지했다.
간디와는 독립투쟁을 함께 한 양대 거두였지만 간디와 다르게 철저한 세속주의자였다. 이는 영국에서 발흥한 온건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페이비언 협회에 소속되었던 네루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적 사상도 크게 작용했는데, 간디와 달리 네루는 초대 총리로 취임한 이래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결합하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으며[8] 1947년 인도 자치령 정부가 수립된 후에 카스트 제도를 헌법상 폐지하는 등 소위 '네루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카스트 제도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고 이를 막으려는 브라만 계층을 앞세운 간디의 저지를 받기도 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독립한지 1년 후 암살당하면서 네루에게 힘이 쏠렸었다.
외교적인 중립주의 노선 역시 네루가 이후 인도의 국제관계에 남긴 큰 방향이다. 특히 제3세계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반둥 회의를 주관한 사람 중 하나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생독립국끼리 연대하여 국제질서를 유지한다는 전략을 다졌다. 반면 인접국과의 국경분쟁에는 적극적인 일면을 보여서 카슈미르에 출병하거나, 티베트 문제로 막판에는 중국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네루는 파키스탄의 분리에 공헌한 과오가 있었다고 했지만[9], 독립했을 당시 문맹률이 80%를 넘고, 카스트 제도가 뿌리깊이 박혀있었던 데다가 인도와 포르투갈, 프랑스가 직접 통치했었던 지역 말고도 수백여개의 토호국이 잔존해있었던 인도에 의회민주주의 제도가 비교적 순탄하게 정착될 수 있었던 것과 절대 다수의 토호국들을 공화정을 채택하면서 비교적 큰 분쟁 없이 통합시켜 인도가 수십-수백여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지 않게 된 것도 네루의 업적이다.
특히 파키스탄 분리 이후에 힌두 극단주의를 인도 사회 주류에서 배제하면서[10] (사실 이는 마하트마 간디가 힌두 극우파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 결정적인 요인이긴 했지만) 인도를 힌두교인"만의" 국가로 만들어내지 않고,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세속국가로 만들어낸데다가 독재의 유혹에도 빠져들지 않았고,[11] 굳건하게 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점을 보면 정치적인 능력 하나는 특출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비록 인도가 그 이후로도 항상 민주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딸인 인디라 간디가 강압적인 정치를 펼치기도 했지만[12] 같은 인도 제국 출신 국가이면서 군사독재에 빠지기도 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나 아예 싱할라족과 타밀족끼리 내전을 한바탕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평화가 정착된 스리랑카에 비하면 안정적인 민주정 체제가 잘 정착했다.[13]
한편,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고속 성장까진 아니지만 집권기간 3~5%대 내외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을 했다. 1950~55년 1차 5개년 당시엔 농업에 집중했다면, 2차는 공업에 집중했고[14] 1, 2차 계획 모두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에 신난 정부는 1960년대 3차 5개년을 실시했고 다시 농업에 초점을 맞췄는데, 안타깝다면 안타깝게도 이 3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는 1962년 터진 중인전쟁과 네루가 사망한 이후긴 하지만 65년 터진 인도-파키스탄 전쟁, 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등 당시 남아시아 일대가 휘청일 정도의 대외적 혼란상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여파가 컸다. 또 인도 통합 초기인지라 분열의 단초가 될 수 있는 토지개혁을 주저해서 이 부분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기술 교육을 중시해, 1951년 인도 공과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인도에 기술 인재가 많다는 인상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
하지만 위의 업적들은 인도를 단숨에 영국과 같은 산업국가로 가려는 목적으로 농업, 경공업을 무시하고 중공업에 중점을 하였고, 일본, 한국, 중국으로 이어지는 경제발전모델을 무시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인도의 극단적인 빈부격차의 원인을 네루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https://youtu.be/byZUCnLgSnk?si=kZ5GkAAj2fiB8zDn
1964년 5월 27일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3. 선거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2 | 인도 하원 선거 | 풀푸르 |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 회의 ]] | 233,571 (38.73%) | 당선 (1위) | 초선[중] |
1957 | 227,447 (36.87%) | 재선[중] | ||||
1962 | 118,931 (61.62%) | 3선 |
4. 네루의 후예들
네루 가문의 위엄.[17] |
- 자와할랄 네루 (1889 ~ 1964) / 카말라 카울 (1899 ~ 1936)
브라만 출신의 거두 정치인이라 사후에도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인도 최고의 명문 정치인 가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루는 1917년 카말라 네루[18]와 결혼했다. 하지만 자와할랄 네루 자신은 카말라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집안의 관계에 따라 맺어진 정략결혼이기도 했고, 영국에서 유학해 모국어인 힌디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잘 했던 본인과 달리 카말라는 영어도 잘 몰랐던 전통적인 힌두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인 인디라 간디[19]는 극진히 사랑했다.[20]
1936년 카말라 네루와 사별하고 나서 딸 인디라 간디는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거의 퍼스트 레이디 노릇을 하다시피 했다. 인디라 간디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인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21] 1964년 아버지 사후에 인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1980년 시크교도들의 독립운동을 강경 진압한 데 대해 앙심을 품은 시크교도 경호원에게 총격을 받아 1984년 암살당했다.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라지브 간디 역시 인도의 총리를 지냈으나 그도 1980년대 말 스리랑카 내전에 개입했다가 1991년에 선거 유세 도중 스리랑카 타밀족 반군 단체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에서 보낸 테러범의 자폭 테러[22]로 어머니처럼 암살당하고 말았다.
라지브 간디의 부인(즉, 인디라 간디의 며느리이자 네루의 손자며느리)인 이탈리아 출신의 소냐 간디[23] 여사가 1998년 국민회의당 당수로 선출되어 인도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소니아 간디는 2000년대 중반 국민회의당의 재집권, 만모한 싱의 수상 선출 등을 주도하는 등 인도 정계의 실력자로 자리잡았다.[24][25] 그녀의 아들인 라훌 간디, 딸 프리양카 간디도 가문의 후광을 바탕으로 정계에 안착하면서 인도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 중. 말하자면 네루 가문의 영향력은 무려 4대에 걸쳐 인도 정계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여담으로 네루 가문의 이 영향력은 심지어 반대당인 인도 인민당에도 미치고 있는데, 라지브 간디의 동생인 산제이 간디의 아내 마네카 간디와 산제이와 마네카의 아들인 바룬 간디가 인도 인민당 소속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물론 마네카 간디는 원래 인도 국민회의 소속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나, 산제이가 죽으면서 시어머니인 인디라 간디와 고부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인도 국민회의에서 쫓겨나게 되자 인도 인민당으로 건너가게 되었다고 한다.
5. 저술
문필가로서 대표적인 저작인 세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세계사 편력>(1934년), <자서전>(1936년), <인도의 발견>(1946년)이 그것이다. 제3세계에 박한 한국이지만 아무래도 영어로 쓰여있다 보니 쉽게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더불어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편지를 교도소 안에서 썼는데 기네스북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편지로 인정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썼다. <세계사 편력>이 이 편지를 추린 것이다. 한국에선 2004년 일빛에서 3권짜리 책으로 나왔는데, 1500페이지에 달한다. 이 편지를 보면 한반도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격찬하는 서술이 쓰여있다. 더불어 네루는 일본도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와 같은 식민제국주의 국가이니 인도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여기지 말고 경계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6. 영국에 대한 태도
인도의 독립 운동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인도를 통치한 마지막 영국인"이라고 칭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도인과 영국인의 중간쯤 위치에 놓은 친영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인도에서는 입은 옷만 빼곤 전부 영국인인 사람 식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담으로 네루 뿐만 아니라 다른 인도의 엘리트[26]들도 영국에서 공부하고 영국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는데, 독립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인도 상류층은 자기 집의 실내 양식으로 영국식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27] 정치인들이 매스미디어에 나올 때 입고 나오는 다양한 전통 복장은 평소 복장이 아니라 일부러 입고 나온 정치적 프로파간다인 경우도 많다는데, 어찌보면 일종의 민족적 배신 행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영국의 의회 정치 문화가 상류층에 내면화된 덕분에 높은 부패도에도 불구하고 네루의 딸 집권기를 제외하면 정치적 민주주의는 그럭저럭 잘 지켜지고 있다.네루의 (한국식으로 치면 강남 좌파 비슷한) 엘리트주의 성향과 영국 제국주의의 유산에 대한 미묘한 감정은 한편으론 여러 사회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인도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고평가 받는게 일반적이나, 장기적으로 볼때 정치적 약점이 되기도 했다. 한 예로 2010년대 중반 이후 장기집권하던 인도 국민회의를 선거에서 제껴버리고 급부상한 나렌드라 모디와 인도 인민당이 국민회의를 디스할 때 강조하는 전형적인 레토릭이, 인도국민회의는 네루 가문의 족벌 체제이며, 네루는 무늬만 인도인인 '세속주의에 타락한(?)' 영국인, 엘리트주의자였다는 주장이다. 전자, 즉 네루 가문의 정치적 족벌화는 딱히 틀린 말이 아니지만 자기 딸인 인디라 대도 아니고 3대, 4대, 5대까지 족벌을 해먹는걸 네루가 책임지기는 힘들고, 후자는 순 억지다.
네루가 사상적으로나 개인적인 기호로나 여러 면에서 친영적인 모습을 보인건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국의 국력을 만든 선진 문물, 제도 등을 본받아 인도도 독립을 이루고 힘을 키우자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민족개조론'적인 자세였으며, 네루는 끝까지 영국발 문화, 사상에 대한 호감과는 별개로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에는 타협하지 않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였다.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서 영국의 민주주의나 학문적 풍토, 본인이 사귄 양심적이고 개방적인 영국인들에 대해선 입이 마르게 칭찬하지만 영국의 제국주의까지 긍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중정치, 특히 자극적인 역사 왜곡에 기반한 선동은 동서고금 불문하고 합리적으로 반박하기 힘드므로, 현대 인도내 네루 안티 진영에선 '위선자, 친영파, 엘리트주의자'란 인식도 있었다. 예시[28]
7. 마운트배튼 백작부인과의 관계
네루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여성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이다. |
영국 문화에 익숙하여 신사적인 태도를 갖추었고, 키도 장신인데다[29] 미남이다 보니 주변에 여자들이 꼬였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에드위나 마운트배튼 백작부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인도 제국의 마지막 총독이자 인도 자치령의 초대 총독이었던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30]의 아내였다. 네루와 에드위나는 1947년(인도가 영국으로부터 해방된 해)부터 관계가 가까워진 것 같다. 인도에서는 육체 관계는 없고 플라토닉 러브하였다고 주장하지만, 루이와 에드위나의 두 딸은 "직접 본 게 아니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에드위나와 네루의 성격으로 봐서 실제로 육체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31] 루이와 에드위나 부부의 두 딸 패트리샤와 파멜라, 특히 파멜라는 네루와도 아주 친해서 두 사람의 증언을 마냥 증거가 없다고 무시하기도 애매하긴 하다. 하지만 네루와 에드위나 두 사람의 애정 문제를 떠나 네루의 연령 때문에 실질적 육체 관계는 어려웠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세 인물의 관계가 매우 잘 드러난 사진 |
이렇게 독특한 관계이다 보니, 훗날 할리우드에서 이 로맨스(불륜)를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려고도 했으나 인도 정부의 요청으로 프로젝트가 중단된 적도 있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해도 네루란 거물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기엔 너무 민감하기 때문이다. 인도뿐 아니라 영국 왕실의 인척이 엮여있으므로 아마 영국 왕실도 싫어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태국의 국왕과 서양여인의 러브스토리인 <왕과 나> 나 <애나 앤드 킹> 같은 작품도 태국인들은 왕실모독이라며 굉장히 싫어했으며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다. 다만 애나 레오노웬스가 라마 4세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눴다는 건 애나 레오노웬스 혼자의 주장일 뿐 증거나 증인이 하나도 없는데 비해 에드위나와 네루가 아무리 못해도 플라토닉한 연인 관계였다는 증거와 증인은 차고 넘친다.
마운트배튼 백작부인의 최후는 다소 허무한데, 인도 독립 이후 1960년 남편과 함께 당시 영국령 북보르네오(현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 시찰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을 호소하며 잠을 자러 갔는데 파티 다음날 아침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영결식은 평소 자신이 죽으면 고향 바다에 수장해달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영국 포츠머스 바닷가에서, 영국 구축함 HMS 웨이크풀 호 선상에서 치러졌다. 이때 네루는 인도 해군의 구축함을 2대나 보내서 그녀의 유해를 호위하도록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에드위나 개인에 대한 사랑도 있었겠지만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공식적으로 인도 자치령의 초대 총독(사실상의 초대 국가 원수)이었기 때문에, 에드위나도 인도 자치령의 초대 영부인이 되어 네루도 이에 걸맞은 예우를 해준 것이다.
참고로 크리스토퍼 리가 무함마드 알리 진나로 분했던 파키스탄 영화 진나(1998)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나오는데, 네루와 마운트배튼 백작부인이 바람 피는 장면까지 묘사하고, 대인배 진나가 이런 추문을 이용함으로 저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나온다.
8. 기타
- 인도에서 떠도는 음모론으론,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인들이 인도 독립에 기여한 인물로 존경하는 찬드라 보스를 암살한 인물이 네루라는 설이 있다. 정신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간디를 제외하면 현실 정치에서 네루와 겨룰 인물은 찬드라 보스가 사실상 유일하였고, 이에 네루가 손을 써서 찬드라를 제거했다는 설. 물론 음모론의 특성상 명확한 증거는 없다. 게다가 보스가 죽은 곳은 타이베이라서 네루가 직접 손을 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음모론의 변형으로, 찬드라 보스는 사실 소련에 끌려가 생을 마감했으며 네루가 이를 방조했거나 묵인했다는 내용의 음모론도 있다.
- 사진에서 종종 쓰고 있는 네루의 흰 모자를 인도에서는 보통 네루 캡(cap) 혹은 간디캡이라고 부른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90년대 정계 복귀하며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가 이 네루의 국민회의파에서 따왔다는 말이 있다. 물론 설일 뿐이라, 넬슨 만델라의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모티브로 했다는 설도 있다. 사실 네루는 이미 사망한지 오래된 상태였고 만델라는 한창 떠오르던 시기였으니 후자일 확률이 더 높다.[34]
9. 매체에서
리처드 애튼버러의 영화 간디에서는 인도계 영국 배우 로샨 세스가 분했다. 간디의 열렬한 추종자로 묘사되며 영화 막판에 힌두교 급진주의자들이 간디를 죽이자고 구호를 외치자 격노해서 "어떤 놈이냐! 날 먼저 죽여봐라!"라고 마구 호통을 칠 정도였다. 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를 막기 위해 진나를 인도의 초대 수상으로 하고 내각을 무슬림으로 구성하자는 간디의 제안에 대해서는, 자기와 동료들은 간디를 따르겠지만 힌두교도들은 격렬하게 반대하여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져들 것이라며 우회적으로 압력을 넣는다.
[1] 인도 공화국 총리는 1950년 1월 26일부터.[2] 영국 특유의 법학원이다.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부총리도 이 과정을 이수하였다.[3] 당시는 물론이고 현대 인도인 평균키보다도 10cm이상 크다. 저정도 키면 동양인들 중에서 평균키가 가장 큰 한국와서도 꽤 키가 크다는 소리 들을 수준이다.[4] 오른쪽은 여왕의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이다.[5] 이 때문인지 당시 인도의 독립 운동계에서는 간디를 지지하는 세력과 네루를 지지하는 세력들로 양분되어 있었고, 네루도 간디와 의견 충돌이 꽤 있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네루는 간디를 사상적 스승으로서 한평생 존경했다.[6] 그냥 엘리트 가문 정도가 아니라 카스트 제도상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흐민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카슈미르 펀디트 출신으로 신라로 치면 성골 수준이다. 그런 최상위 가문 사람이 영국으로 치면 노동당에 가입한 셈이니 재미있는 부분이다.[7] 자치령은 대영제국의 자치공동체지만 이 시기의 자치령은 웨스트민스터 헌장으로 인해 내정 자치권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갖는 영연방 왕국과도 같은 사실상의 독립국가였다. 다만 영국 국왕을 실권 없는 국왕으로 모시고, 형식상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실권 없는 총독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아예 자치령으로 지정하는 법안이 Indian Independence Act 1947이었으니 이름만 자치령이고 독립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8] 공산주의도 안좋게 봐서 인도 공산당을 견제했다.[9] 그러나 이를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 다이렉트 액션 데이 문서만 봐도 알수 있듯이 당시 인도의 종교갈등은 아주 극심한 상태였고, 이미 영국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른 상태였다.[10] 힌두 극우파는 1970년대부터 다시 지방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하고, 1980년대 후반 들어 이들이 포함된 정당인 인도 인민당이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하여 1991년 총선에서 아요디아 모스크 파괴사건을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으면서 제1야당이 되더니 90년대 중반에 아예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인도 인민당은 여당과 야당을 오가고 있다. 인도내 소수종교인 이슬람교 탄압과 힌두교 권위주의 성향을 보인다고 지적받기도 하는 나렌드라 모디도 인민당 소속 총리다.[11] 2차 대전 이후 신흥독립국 중 독립영웅이 독재자로 변하는 클리셰를 겪지 않은 나라는 보츠와나, 동티모르 정도가 전부다.[12] 물론 항목에도 있듯 인디라 간디는 초기만 해도 2대 총리인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사망하자 오히려 네루 후광이 있는 딸을 이용하려는 원로들의 꼭두각시 느낌으로 추대된 총리였다.[13] 사족으로 오늘날엔 상기한 소수종교 관련 문제나 포퓰리즘 정치, 정경유착적 요소 때문에 최대 인구 민주국가라는 명성에는 못 미치는 성숙도를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이걸 60년대에 사망한 네루한테 탓하는건 좀 비약이 심한 감이 있다. 애초에 인도에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등과 함께 카스트 제도를 헌법에서부터 부정한게 네루 시대 일이었다. 당시 인도는 언어, 문화부터 다른 극과 극을 달리던 다민족, 다인종 사회라 사실상 다른 나라들 수십개를 통합하는거나 마찬가지인 기로에 있던 시절이었던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장 왕건만 해도 통합한답시고 호족 가문 수십명과 혼인 관계를 맺은 바 있다.[14] 네루는 스탈린식 급진적 산업화 정책을 인도에서 실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계획경제정책을 펴는 과정에서 부정부패 척결에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중] 중선거구제[중] [17] 왼쪽부터 네루, 인디라 간디, 라지브 간디, 소니아 간디, 프리앙카, 라훌[18] Kamala Nehru. 결혼 전 성은 카울Kaul로서 델리의 브라만이다.[19]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와는 무관하다. 인디라의 남편은 페로젠 간디로, 마하트마 간디와는 단지 성씨만 같은 사람이다. 태어날 때에는 인디라 네루였던 셈이었다.[20] 그러나 딸을 사랑한 것과 별개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직업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영국 유학을 가서는 1년에 용돈을 800파운드나 쓸 정도로 방탕하게 놀았으면서, 정작 돈을 벌어야 할 때가 되어서는 본업인 변호사는 팽개치고 정치와 식민지 독립운동에 빠져 버린 탓이었다. 오죽하면 "네 어머니, 누이들, 아내, 딸은 도대체 언제 먹여살릴 테냐!"하고 화를 내는 네루의 아버지가 쓴 편지가 남아 있을 정도. 네루의 아버지(1861~1931)도 역시 변호사였는데, 이쪽은 평생 근면하게 변호사 일을 하였고 아들과 다르게 금전감각도 갖추어 가장의 임무를 다한 인물이다.[21] 실제로 네루가 영국군에 의해 검거되어 수감 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아버지의 지지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지휘했을 정도였다.[22] 라지브 간디를 자폭 테러로 암살했던 이 테러범은 1980년대 후반 인도군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 당시 스리랑카 주둔 인도군에 의해 성폭행당한 스리랑카 타밀인 여성이었다.[23] 본명은 안토니아 마이노(Antonia Maino)로, 라지브 간디와 결혼하게 되면서 이름을 이탈리아식 이름인 안토니아에서 비슷한 발음의 인도 이름인 Sonia로 개명했다.[24] 일반적인 경우라면 집권당 당수인 소니아 간디 자신이 수상이 될 수 있었지만, 외국 태생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막후 실세가 되는 편을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5] 원래의 소니아는 모국 이탈리아의 정치에도 큰 관심은 없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결혼 해서도 내조에 충실한 삶을 꿈꾸었다고 한다. 애초에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다 트리니티 칼리지 재학 중이던 라지브 간디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 이른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네루-간디 가에 시집 온 이상, 정계 입문의 압박을 계속해서 받아 왔으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편 라지브 간디가 암살 당하면서 선택의 여지 없이 정계 입문을 하게 된 케이스. 게다가 일단은 외국인 출신이기도 하고, 직접 수상이 되는 것 보다 당의 실세로 남는 것이 그녀에게도 최선의 선택이었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그녀는 당 수장이 되기 이전에 그 어떤 공직도 맡은 바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니아 간디가 집권당의 총재까지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거의 "세습제"처럼 되어 버린 인도의 비정상적인 정치 지형 덕분이다.[26] 대부분이 브라만이다.[27] 정작 동시대 영국에서는 인도풍이 유행하기도 했다.[28] 힌두 극단주의자들의 진짜 표적은 원한을 갚기엔 국력차도 크고 결정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진 영국이 아니라, 인도 안에서 영국보다 훨씬 오랫동안 힌두교인 위에서 지배층 노릇하던 무굴 제국의 상류층 출신 무슬림들이었기 때문에 독립 후 이들을 포용하고자 했던 간디도 암살했다. 그럼에도 네루가 간디처럼 파키스탄의 독립을 막지 않고, 그럼에도 이주하지 않고 남아있는 약 3,000만명의 본토 무슬림을 포용한 것에 대해 여전히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이 힌두 극단주의자들이다. 이들에게 네루의 친영파 프레임은 일종의 포장에 불과한 것이다.[29] 네루의 신장은 179cm인데, 오늘날 인도 남성의 평균은 165cm이기에 오늘날로 따져도 장신이라고 볼 수 있다.[30] 1900~1979.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이었던 에드버러공 필립 마운트 배튼의 삼촌이며,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으로 여왕의 친척이기도 했다. IRA의 폭탄테러 공격으로 자신의 요트에서 끔살당했다.[31] 다만 에드위나의 딸인 파멜라는 최근 인터뷰에서 두 사람 사이에 성관계는 없었을 것이라 주장했다.#[32] 사실 배우자 외 정부를 두는 것은 유럽 귀족층에서 공공연히 행해지던, 그렇다고 대놓고 하지는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이로 인해 사생아가 굉장히 많았는데, 그 때문에 발생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리처드 3세의 부계 후손 문제다.[33] 그래도 에드위나 소생의 두 딸은 모두 생물학적으로 루이의 자녀들이 맞다. 특이한 예를 하나 들자면 루이의 정부였던 젊은 여성 중 하나는 동시에 에드위나의 동성애 상대였던 경우도 있었다.[34] 그리고 탄압받는 정치범에서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자신을 탄압했던 이전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포용하여 국가 분열을 막으려 했던 행보 등을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행보 자체가 네루보다는 만델라 쪽과 훨씬 비슷하다. 둘은 직접 만난 적도 있고, 만델라가 자신이 감옥에서 차던 시계를 김대중에게 선물한 적도 있었다.[35] 사족으로 오늘날 G2가 된 중국이 여전히 권위주의 체제인 것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민주 체제 하에서도 경제적 발전을 하고 있는[36] 인도가 장기적으론 훨씬 가치있다고 평가하기에 그 시초를 다진 네루도 호평하는 편이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인디아 프로젝트 책임자인 탄비 마단 박사는 "인도가 트라이애슬론에 참가하는 동안 중국은 마라톤만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인도는 마라톤(경제성장), 수영(민주주의), 사이클(사회개혁)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경제성장에만 몰두해 정치·사회 개혁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마단 박사는 "서구인들은 다인종·다종교에서도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인도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면서 "하지만 민주주의가 성장 둔화의 변명이 돼서는 안 되며 민주주의 없는 성장 역시 인도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