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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924년 3월 3일 ([age(1924-03-03)]세)[1][2] | ||
오이타현 오이타시 | |||
현직 | 메이지대학 고문 | ||
재임기간 | 제81대 내각총리대신 | ||
1994년 6월 30일 ~ 1996년 1월 11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 무라야마 요시에 | |
자녀 | 슬하 2녀 | ||
신체 | 178cm, O형 | ||
학력 | 오이타시립 나카지마 심상소학교[3] (졸업) 오이타시립 오이타 고등소학교[4] (졸업) 메이지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 / 졸업) 메이지대학 (법학 / 명예박사) 숭실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 ||
병역 | 일본 제국 육군 군조 전역 | ||
정당 | |||
지역구 | 오이타 1구 | ||
의원 선수 | 8 (중) | ||
의원 대수 | 33, 34, 35, 37, 38, 39, 40, 41 | ||
약력 | 오이타현 어촌청년동맹 서기장 오이타시의회 의원 오이타현의회 의원 중의원 의원 제13대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제81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사회민주당 당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 이사장 사회민주당 고문 사회민주당 명예 당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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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81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무라야마 도미이치/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논란
3.1. 1994년 김일성 조전 논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는데 그는 일본사회당 명의로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는 조전을 보냈다.# 이 같은 행보에 대해 일본사회당은 조선로동당과의 오랜 우호관계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일본 특유의 국익을 위한 남과 북에 대한 줄다리기식 외교라고 분석했다.그는 조전을 통해 "'위대한 지도자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에 가슴깊이 우러나오는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라고 밝혔다.[5][6][7] 이 조전이 논란이 되자 14일에 일본 정부 측은 총리 혹은 각료의 명의로 김일성을 조문하거나 조전을 보내지 않겠다고 밝혔으며 각국 재외공관에 이를 통보했다.
3.2. 한일합병에 대한 발언 논란
1995년 8월, 무라야마 총리는 한일합병은 합법적이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는데, 자민당 인사도 아닌 사회당 같은 야당 출신이 종래의 일본국 정부 입장을 답습하며 발언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줬다.(연합뉴스 기사) 이에 대해 외무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해 국민들의 거센 질타를 받았으며(MBC 기사) 이에 따라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양국간 정상회담마저 무산되면서 한일 관계가 일시적으로 싸늘해졌다.(KBS 기사)무라야마 총리는 또 일본 정부가 과거의 역사에 대해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이는 정치적 도의적인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내각총리대신이 공식석상에서 한일합방을 합법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지난 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줄곧 한일합방조약은 합법이라고 주장해왔으며 일본의 수많은 정치인들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최근의 예로는 95년 6월 와타나베 전 외무대신이 지방에서의 강연을 통해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된 것이 아니며 합법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단편적으로 들으면 오해를 사겠지만 의사록을 잘 읽어보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아직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8]
무라야마 총리는 17일에도 한일합병조약은 형식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 이 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됐음을 거듭 강조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오늘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답변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합방조약의 형식과 정치적도의적 견해는 별개라고 밝혔다. 무라야마 총리는 그러나 정치적 도의적 실태 론으로 판단하면 한일합방조약이 대등하고 평등하게 체결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 지배가 현실적으로 있었던 만큼 사실을 직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무라야마 총리는 그러나 지난 5일 한일합방조약과 관련한 자신의 망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9]
그러나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10][11][12]
4. 평가
4.1. 정치
한국에서는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과거사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 내에서의 평가는 한국의 사고 공화국 시절에 필적할만한 대형 사건사고가 연이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대응에 실패한 점 때문에 다소 부정적이다.무라야마의 재임기간은 1년 6개월 남짓으로 아주 길지도 또 짧지도 않은 편이었으나, 이 기간 동안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여러모로 우여곡절이 많았다.[13] 1995년 1월에는 동일본 대지진 이전까지 전후 최대규모의 피해를 낳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고, 불과 석 달 뒤인 3월에는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내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특히 고베 대지진에서 일본 정부의 늑장 대처로 피해를 확산시켰다는 비판이 일어나면서 내각 지지율이 급락했으며 이후 1년동안 무라야마 내각은 낮은 지지율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라야마 본인은 파벌에 좌우되지 않는 청렴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의지가 약해서 재임 초반부터 사의를 밝히면 다른 각료들이 만류하는 식으로 간신히 내각을 이끌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노선전환을 둘러싼 당 내분에 재임기간 내내 시달렸다. 과거사를 반성하는 담화를 발표했지만 위에 서술한대로 1995년 한일합방과 관련된 발언 논란에 휩싸였고, 의석수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기존 자민당의 노선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다.[14]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1995년 8월 15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명기한 총리 담화(무라야마 담화) 발표, 피폭자 구제법 성립, 미나마타병 미확인 환자에 대한 전면 구제 등의 업적으로 나름 사회당 정권다운 모습을 조금은 보여주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경제성장률이 1991년 이후 최고치인 2.7%를 기록하며 뚜렷하게 반등하기 시작하는 등의 공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후임인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소비세 인상을 시작으로 잃어버린 10년의 서막을 연 탓에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꾼지도 꽤 되었고, 아무래도 현재의 사회민주당은 오키나와현을 벗어나면 전혀 영향력이 없는 정치 단체급의 군소정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총리 시절 일으켰던 실책들은 점점 잊혀가고 대신 최장수 총리로서의 모습이 부각되는 추세이다. 소위 '정치'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평. 그래서 현재 들어서 무라야마 총리에 대한 일반적인 일본인들의 평가는 "정책 방향이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겸손했고 인품이 좋았던 사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4.2. 사회당으로서
사회당 내에서는 무라야마가 총리가 되고 싶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려서 사회당이 결국 망한 거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다. 일단 무라야마 집권 이후 사회당이 확연히 추락한 것은 사실이다.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물러나고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변경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구 사회당 의원과 당원, 노조 등의 조직의 상당수가 사민당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서 신당 사키가케 탈당파 의원들[15]과 합세해서 구 민주당으로 빠져나갔다. 이때 도이 위원장과 더불어 무라야마 본인도 민주당에 입당하려고 했지만, 당시 당권을 잡고 있던 간 나오토와 하토야마 유키오는 도이와 무라야마의 이미지가 너무 나쁘다며 이들의 입당을 거부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그러고서 사민당은 1996년 총선에서 고작 15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그 이후로는 1998년 참의원 선거와 2000년 중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중의원에서 10석도 못얻는 군소야당이 되어버렸다. 불과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당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정당인 일본공산당이 야당 중 늘 1당 역할을 맡아왔던 사회당을 추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는 사민당보다 규모가 월등히 큰 정당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사회당 몰락의 책임을 전부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 단독내각도 압도적 다수의 연립내각도 아닌 상황에서 당의,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애당초 자민당에 밀려 정권을 잡은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수권능력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일본사회당의 당세는 무라야마 집권 이전에 일찍이 1960년대 이후로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과 도이 다카코 위원장 시절을 제외하면 꾸준히 정체, 혹은 하락세였다.
무라야마 총리 시절 사회당은 그동안 거듭해왔던 비현실적인 정책 일부[16]를 수정하여 중도화를 꾀하는 등 나름 사회당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무라야마의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그나마 사회당에 남아있던 유권자들마저 사회당의 불분명한 색채에 회의감을 느끼고 지지 정당을 옮기게 되었다는 재반박도 존재한다.
5.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 1955 - 1996 | 정계 입문 |
| 1996 - 현재 | 당명 변경 정계 은퇴[17] |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오이타 1구 | | 93,256 (22.41%) | 당선 (1위) | 초선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2,307 (23.97%) | 재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6,736 (19.18%) | 3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9,466 (14.50%) | 낙선 (5위)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1,919 (25.92%) | 당선 (1위) | 4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7,988 (22.52%) | 5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8,343 (22.22%) | 6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6,260 (23.81%) | 7선[18]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오이타 1구 | | 106,258 (59.49%) | 8선 |
7. 여담
- 2014년 당시 모습(90세).
- 100세의 나이에도 거의 현역처럼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19][20] 최근 일본의 우경화 행보에, 얼마 안되는 혁신계열 전직 총리[21]로서 국민들의 경각심을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 위에서 언급한 바 있듯 돈짱(トンちゃん)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다.
- 신선 같은 눈썹이 인상적이다. 관상학적으로도 저런 유형의 눈썹은 장수하고 현명한 이미지의 좋은 눈썹으로 본다고 한다. 이 눈썹이 강조된 인형도 있다. 무라야마 총리 인형 또 다른 디자인
- 후루타 하지메 현임 기후현지사가 그의 비서관으로 활동했다.
- 2012년에 방한하여 순천시 운평리 고분을 방문했다.
- 현재 생존한 전직 정부수반 중 장수 순위 3위이다. 1위는 기예르모 로드리게스 전 에콰도르 대통령 권한대행(1923년 11월생), 2위가 캄타이 시판돈 전 라오스 국가주석(1924년 2월생)이다. 2024년 3월 3일, 드디어 100세가 되었다.
8. 관련 문서
- 무라야마 담화
- 일본사회당
- 사회민주당
- 가타야마 데쓰 - 무라야마와 함께 유이한 일본사회당 출신 총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무라야마와 함께 일본 정계의 대표적인 평생현역. 나카소네의 경우 2019년에 101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1] 히가시쿠니 나루히코와 나카소네 야스히로에 이어 역대 최장수 일본 총리 3위에 랭크되어 있다.[2] 2024년 기준으로 일본 총리들 중에서 최고령자이다.[3] 2017년 3월 31일 폐교.[4] 고등소학교는 구제중학교에 해당하는 학제다.[5] 일 총리 북측에 애도 전문 동아일보[6] 무라야마 북한에 조전 한겨레[7] 일 총리 사회당 명의로 북한 조전 경향신문[8] 일본 무라야마 총리 망언 KBS 1995[9] 무라야마 일본 총리 "합병 합법" 되풀이 kbs 1995[10] 발언'잘못 시인 1995.11.13 한겨레[11] "日(일)은 과거역사 바로봐야"金(김)대통령 "韓國民(한국민)고통에 깊이사과 1995.11.19 매일경제[12] 韓(한)-日(일) 정상회담「과거사妄言(망언) 갈등」일단 봉합 1995.11.19 경향신문[13] 여담으로 김일성 사망 사건이 총리에 오른 직후에 터졌다.[14] 연립 내각을 구성한 정당 중 자민당이 절대 다수당이었기 때문에 고노 요헤이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비롯해 자민당 소속 의원들이 내각 내 요직을 독점한 수준이었기 때문.[15]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마에하라 세이지, 에다노 유키오, 겐바 고이치로, 아라이 사토시, 오자와 사키히토, 이시이 코키 등 15명.[16] 과한 친북 성향, 자위대 해체 주장 등[17] 2000년 6월.[18] 일본 중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9]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동갑이다.[20] 만약 2025년 9월까지 생존해있을 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를 넘어 역대 최장수 일본 총리 2위에 등극한다. 또한 2026년 4월까지도 생존해있을 시,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총리를 넘어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된다.[21] 일제 패망 이후 총리들 중 혁신계열, 즉 자민당에 몸담았던 적이 없는 사람은 가타야마 데쓰, 무라야마 도미이치, 간 나오토 3명뿐이다. 리버럴 계열로 확장하면 미키 다케오,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하토야마 유키오, 노다 요시히코가 더 있지만 이들의 재직기간을 다 합쳐도 5년 남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