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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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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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 |
<colbgcolor=#DA2128> 제34-41대 일본국 중의원 의원 야마하나 사다오 山花貞夫 | Yamahana Sadao | |
출생 | 1936년 2월 26일 |
일본 제국 도쿄도 도쿄시 혼조구 (현 스미다구) | |
사망 | 1999년 7월 14일 (향년 63세) |
일본 도쿄도 미타카시 | |
학력 | 와세다대학 부속 중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부속 고등학교 (졸업) 주오대학 법학부 (법률학 / 학사) |
최종당적 | |
의원 선수 | 8 (중) |
의원 대수 | 34, 35, 36, 37, 38, 39, 40, 41 |
가족 | 부친 야마하나 히데오[1] 장남 야마하나 이쿠오[2] |
지역구 | (구) 도쿄도 제11구 → 도쿄 블록 비례대표 |
약력 | 변호사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변호단 변호인 일본사회당 홍보국장 일본사회당 부서기장 일본사회당 서기장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정치개혁담당대신(호소카와 내각)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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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으로 일본사회당의 제13대 중앙집행위원장직을 지냈다.2. 생애
1936년 2월 26일 일본 제국 도쿄도 도쿄시 혼조구(현 스미다구)에서 무산정당의 정치가로 활약한 야마하나 히데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와세다대학 부속 중학교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오대학 법학부 법학과를 거쳐 22세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1961년부터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이때 변호사로서 일본노동조합평의회(총평) 변호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아버지 히데오가 속해있는 일본사회당과 본격적으로 접점을 가지게 된다.[3]1969년 열린 제33회 중원선에서 야마하나 히데오가 낙선을 맛보면서 정계를 은퇴하자, 아버지가 남겨놓은 정치적 기반을 흡수하여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게 됐다. 첫 선거였던 1972년 제33회 중원선에서는 아버지가 출마했던 구 도쿄 7구에 그대로 출마했다가 낙선을 맛봤지만 이후 신설된 11구로 지역구를 옮겨 1976년 제34회 중원선에서 첫 당선을 맛봤다.
이후 아스카타 이치오 중앙집행위원장의 지명으로 1978년 지도부(중앙집행위원)에 합류했고 이후 바바 노보루가 사회당 우파의 반발로 1983년 집행부서기장에서 내려오게 되자[4] 이를 계기로 지도부가 전면 개편될때 당 홍보국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1986년 도이 다카코 지도부에서는 당 집행부 부서기장으로, 타나베 마코토 지도부에선 1991년 집행부 서기장으로 영전했다. 타나베 마코토는 29년만에 등장한 사회당 우파 출신 중앙집행위원장으로 그덕분에 자민당, 공명당과 소통하면서 당의 위치를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는데, 정작 그 파이프라인 중 하나인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이 사가와 규빈 사건에 얽혀 몰락하고 PKO 법안 저지 실패 - 사공민 노선 붕괴 - 1992년 제16회 참원선 참패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만다.
타나베의 사임 이후 야마하나 서기장이 후임 중앙집행위원장에게 무투표 당선되었다. 사회당 좌파로서는 사다오의 아버지인 히데오가 대표적인 사회당 좌파 출신 인물이었기도 하고, 사회당 우파로서는 타나베 노선을 이어갈 수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타나베 사퇴 이후 사회당 분열을 막을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기 때문.
취임 이후 타나베의 중도 사민주의 노선을 이어가며 자위대 존재 인정, 미일안전보장조약 인정 등 사회당의 기존 입장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야마하나에게는 아쉽게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1993년 자민당에서 분당 러시가 일어난 후에 미야자와 개조내각에 대한 내각불신임결의가 통과되며 갑작스런 조기 총선으로 정국이 전환된 것.
1993년 7월 18일 열린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단독 과반을 상실하는 대형 사건이 터졌지만, 그 수혜자는 야마하나가 이끄는 일본사회당이 아니었다. 사회당 역시 반자민표가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 자민당 출신 신당들에 분산되면서(신당 붐) 의석을 크게 잃고 70석까지 추락했다.
그래도 정권교체를 우선하여 사회당 좌파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신생당과 손잡고 비자민 연립 내각 협상을 완수해 전후 첫 비자민 내각인 호소카와 내각 출범에 기여했다. 본인도 무임소 국무대신으로 처음으로 입각했지만 정작 당내에서는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무는 목소리가 강했고, 결국 중앙집행위원장직에서 사임하게 됐다. 후임은 사회당 우파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위원장 사임 이후 연립정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던 오자와 이치로의 독주에 반발해 사회당이 오랜 숙적이었던 자민당과 연정을 꾸리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야마하나는 이 연정에 반대를 표하며 사회당을 탈당한 후 가이에다 반리 등의 인사와 함께 시민리그라는 군소정당을 창당했다.
1996년 구 민주당 창당에 합류했고, 그해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동 당 소속으로 도쿄도 제22구에 입후보 했지만 이전 총선에서 함께 당선되었던 신진당의 이토 다쓰야에게 밀리며 지역구에서 낙선했고, 도쿄도 비례대표에 석패율제로 구제되어 당선되었다.
1998년 민주당의 창당에도 참여해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하던 와중 1999년 7월 14일 급성 신부전으로 향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지역구는 장남인 야마하나 이쿠오에게 세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소속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 1968 - 1995 | 입당 정계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5 |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
시민리그 | 1995 - 1996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6 | 정당해산 |
| 1996 - 1998 | 창당 |
| 1998 - 1999 | 합당 사망 |
4.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舊 도쿄 7구 | | 144,415 (12.30%) | 낙선 (6위)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舊 도쿄 11구 | 138,052 (19.35%) | 당선 (3위) | 초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6,326 (20.76%) | 당선 (2위) | 재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1,758 (18.60%) | 당선 (3위) | 3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3,309 (16.04%) | 당선 (4위) | 4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2,939 (16.16%) | 당선 (3위) | 5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77,605 (18.08%) | 당선 (1위) | 6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4,947 (14.84%) | 당선 (2위) | 7선[5]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도쿄 22구 | | 63,974 (27.14%) | 당선 (2위)[석] | 8선[7] |
5. 여담
[1] 1904-1987, 9선 중의원, 초선 참의원 역임.[2] 1967~ 4선 중의원, 외무대신 정무관(간 제1차 개조내각, 간 제2차 개조내각)[3] 일본사회당의 핵심 지지세력 중 하나가 총평이었다.[4] 원래 일본사회당에서는 계파 안배 차원에서 중앙집행위원장과 집행부서기장을 서로 다른 파에서 뽑았는데, 사회당 좌파 출신인 아스카타 위원장이 이 관례를 깨고 집행부서기장까지 사회당 좌파에서 뽑으려 하면서 사회당 우파가 강력하게 반발, 바바가 서기장직에서 사임하게 되는데 이를 '바바 강판'(馬場おろし)사건이라고 부른다.[5] 일본 중의원 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선거[석] 석패율제 당선[7] 1999.7.14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