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8:02:07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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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第39回衆議院議員総選挙
{{{#!wiki style="margin: -7px -12px" 1986년 7월 6일
38회 중원선
(제2차 중참동일선거)
1990년 2월 18일
39회 중원선
(제1차 소비세 총선)
1993년 7월 18일
40회 중원선
(정권교대 총선)
}}}
투표율 73.31%
선거 결과
파일:1990중의원.png
정당
중선거구
총합 비율


275석 275석 53.7%
136석 195석 38.1%
45석
14석
16석 16석 3.1%

4석 4석 0.8%
진보당
1석 1석 0.2%


[[무소속(정치)|
무소속
]]
21석 21석 4.1%

1. 개요2. 선거 전
2.1. 자유민주당2.2. 그 외 정당
3. 개표 결과
3.1. 중선거구
4. 성적5. 왜 예측과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됐는가?

[clearfix]

1. 개요

1990년 2월 18일에 치러진 중의원 의원 총선거.

여러 문제가 엮이면서 발생한 중의원 해산이었지만, 최대 쟁점이 소비세 존폐였기 때문에 보통 소비세 해산이라고 지칭한다.

수 많은 악재가 발생하면서 참의원에 이어 중의원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55년 체제가 붕괴될 위기에 놓인 자유민주당이 신들린 선거 전략으로 예측을 완벽히 벗어나는 결과를 만들어낸 선거라고 평가받는다.

2. 선거 전

2.1. 자유민주당

총체적 난국이었다. 선거 전 2년 동안 다이내믹한 악재들이 연달아 터졌다.

먼저 1987~1988년에 걸쳐 농산물 수입 자유화 이슈가 크게 일어나면서 자민당 지지층의 한 축인 농민쪽에서 지지이탈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1988년에 터진 리크루트 사건[1]에 전임 총리인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현직 총리인 다케시타 노보루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노보루 내각과 자민당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보루 총리는 큰 폭탄을 일본에 또 투척했다. 전임 총리였던 야스히로 총리를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고 야당, 국민 대다수도 강한 반감을 드러냈던 소비세 제도를 결국 노보루 총리가 경제 안정화[2]를 이유로 관철시키면서 소비세 도입이 확정되었다. 이 결단으로 인해 노보루 총리는 당 내에서도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국 리크루트 사건에 노보루 총리가 연루된 것이 확실해지면서 내각 총사퇴를 하게 되었고, 당 내 주류였던 나카소네-다케시타 파는 당 내에서도 비난과 소외를 받게 되면서 정치적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게 된다. [3]

자민당 심판 분위기가 심하게 일면서 모든 이목이 몇 개월 뒤 치러지는 제15회 참의원 의원 선거에 집중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후임 총리로 지명된 우노 소스케가 게이샤 스캔들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참의원 선거 2개월을 앞두고 자민당은 완벽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4]

결국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5]하면서 과반수는 물론, 많은 의석을 잃게 된다. (143석 → 109석)

그리고 소비세 존폐 여부가 일본을 뒤흔들게 되면서, 중의원 우월 관례로 겨우 총리로 임명된 가이후 도시키는 중의원 임기가 4개월 정도 남은 시점에서 사실상 무의미한 해산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2.2. 그 외 정당

일본사회당-공명당-민사당 3당 연합체는 참의원 대승의 기세를 몰아서 중의원 선거에서도 대승을 하기 위해 자민당의 약점인 4대악 청산 (소비세, 리크루트 사건, 농산물 수입자유화, 전임 총리 우노 소스케의 스캔들)을 모토로 걸었다.

특히 전임 총리의 스캔들과 대비되는 사회당 위원장 도이 다카코의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일명 「마돈나 선풍」이 정국을 관통했다.

대부분의 야당은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 '소비세 완전 폐지'를 메인 공약으로 정했다.

40개 정당이 나온 제15회 참의원 선거만큼은 아니지만 20개의 정당이 선거에 참여했다. 그중 도쿄 사린 테러를 일으킨 아사하라 쇼코옴진리교진리당이라는 정당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3. 개표 결과

선거일 1990년 2월 18일
선거 내용 지역구(중선거구제) 512명
선출 인원 512명
투표율 73.31%

의석 구성
여당[6] - 275석 (53.7%) 야당[7] - 216석 (42.2%)
정수 : 512석
선거결과
정당 지역구(중선거구제) 획득
의석
선거이전의석 증감
여당 자유민주당 30,315,417 46.14% 275 275 295 ▼20
야당 일본사회당 16,025,473 24.39% 136 136 83 ▲53
공명당 5,242,675 7.98% 45 45 54 ▼9
일본공산당 5,226,987 7.96% 16 16 26 ▼10
민사당 3,178,949 4.84% 14 14 25 ▼11
사회민주연합 566,957 0.86% 4 4 4 -
진보당 281,793 0.43% 1 1 1 -
제파 58,536 0.09% 0 0 0 -
무소속 4,807,524 7.32% 21 21 7 ▲14

3.1. 중선거구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지역 자유민주당 일본 사회당 공명당 일본 공산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진보당 무소속 합계
홋카이도 12 7 1 1 1 0 0 1[8] 23
아오모리 5 2 0 0 0 0 0 0 7
이와테 4 3 0 0 1 0 0 0 8
미야기 6 3 0 0 0 0 0 0 9
아키타 4 2 0 0 0 0 0 1[9] 7
야마가타 5 1 0 0 0 1 0 0 7
후쿠시마 6 5 0 0 0 0 0 1[10] 12
이바라키 8 3 1 0 0 0 0 0 12
도치기 6 3 0 0 1 0 0 0 10
군마 6 3 0 0 0 0 0 1 10
사이타마 8 5 2 0 1 0 0 1[11] 17
치바 12 5 1 0 0 0 0 0 18
가나가와 9 6 4 0 0 0 1 0 20
야마나시 3 2 0 0 0 0 0 0 5
도쿄 18 11 8 3 1 1 0 2[12] 44
니가타 8 4 0 0 0 0 0 1[13] 13
도야마 4 2 0 0 0 0 0 0 6
이시카와 4 1 0 0 0 0 0 0 5
후쿠이 3 1 0 0 0 0 0 0 4
나가노 8 4 0 1 0 0 0 0 13
기후 6 2 1 0 0 0 0 0 9
시즈오카 10 3 1 0 0 0 0 0 14
아이치 11 6 2 0 2 0 0 1[14] 22
미에 5 2 0 0 1 0 0 1 9
시가 3 1 0 0 1 0 0 0 5
교토 4 2 2 1 1 0 0 0 10
오사카 8 5 7 5 1 0 0 1 27
효고 10 4 2 0 0 0 0 3[15] 19
나라 2 1 1 1 0 0 0 0 5
와카야마 4 1 1 0 0 0 0 0 6
돗토리
2 2 0 0 0 0 0 0 4
시마네 3 1 0 0 0 0 0 1[16] 5
오카야마 4 2 2 0 0 1 0 1[17] 10
히로시마 8 3 0 0 1 0 0 0 12
야마구치 6 2 1 0 0 0 0 0 9
도쿠시마
2 2 1 0 0 0 0 0 5
카가와 4 2 0 0 0 0 0 0 6
에히메 6 3 0 0 0 0 0 0 9
고치 2 1 1 1 0 0 0 0 5
후쿠오카 8 4 4 2 0 1 0 0 19
사가 3 1 0 0 0 0 0 1[18] 5
나가사키 5 2 0 0 1 0 0 1[19] 9
구마모토 6 2 1 0 0 0 0 1[20] 10
오이타 4 2 0 0 0 0 0 1[21] 7
미야자키 3 2 0 0 1 0 0 0 6
가고시마 5 4 0 0 0 0 0 0 9
아마미 제도[22] 0 0 0 0 0 0 0 1 1
오키나와 2 1 1 1 0 0 0 0 5
중선거구 275 136 45 16 14 4 1 21 512

4. 성적

4.1. 자유민주당

대참패가 예고되었던 선거를 행운과 야당의 선거전략 실패 등이 겹치면서 대선방을 했고, 가까스로 정권유지에 성공했다.

그러나 무능력한 총리[23]의 등장과 잃어버린 10년이 겹치면서, 자민당 내에서 내부 분열이 시작되었고, 결국 3년 뒤 정권을 내주게 된다.

4.2. 일본 사회당

명실상부한 최대 승자였지만, 절반뿐인 승리라고 말하기도 뭐할 정도로 민망한 승리를 거뒀다.

일본 사회당은 1967년 이후 총선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냈지만, 실상은 처참했다.

공적이었던 자민당의 의석은 거의 뺏지도 못했고, 오히려 연합했던 공명당, 민사당은 물론 일본 공산당의 표와 의석까지 빼앗아먹으면서 정권교대는 커녕 팀킬 대참사로 선거를 마무리했다.

패배의 요인은 선거 전략 대실패, 자금 부족, 분파간 갈등이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선거 전략 대실패였다. 1989년 참의원 선거가 끝난 뒤 패자였던 자민당 내각이 참의원 대패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1년 뒤 선거를 차근차근 준비할 동안, 승자였던 사회당은 단꿈에 빠져 세계 정세와 민심을 반영한 선거 전략을 내놓지 못했다.

선거 내내 소비세만 물고 넘어지면서 자민당이 내놓은 체제 선택이라는 프레임성 선거전략에 대응조차 못하고[24] 실질적 대패라는 성적표를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이 선거 당시 내걸은 후보자수가 과반의석을 턱걸이로 겨우 넘는 257석에 그쳤기에 혁신 계열 무소속 후보를 감안하더라도 정권 교대에 필요한 의석수를 확보함에 있어선 확연한 한계가 존재했었다.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사공민 연합은 해체되고, 공명당은 일본 사회당과 정책적 연합 종료를 선언했으며 민사당은 그대로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4.3. 공명당

사공민 연합으로 정권교대의 꿈을 꿨지만, 일본 사회당에게만 좋은 일을 시켜준 꼴이 되었다.

이 선거 이후, 공명당은 사회당과 연정관계를 끝내고 일본신당, 신진당 등 집권이 유력한 정당들과 연합하다가 재창당 이후 자유민주당의 연정파트너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4.4. 민사당

사공민 연합의 대실패 주범

자민당을 공격할 무기이자 시의성 있던 선거이슈였던 리쿠르트 사건을 사공민 연합이 아예 쓰지도 못하게 만든 요인을 제공한 정당이다.

당 내 서열 1위인 민사당 위원장 츠카모토 사부로와 국회대책부위원장 다나카 케이슈가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면서 반토막에 가까운 의석을 획득하고 사공민 연합의 정당성에도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사공민 연합 해체 이후 자민당과 연합을 시도하다가 신당 연립정권에 참여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신진당 합당에 참여하며 당을 해체하게 된다.

4.5. 일본공산당

공산당 역시 소비세에 대한 반대표가 사회당에 집중되고, 자민당에 의한 체제 선택의 쟁점화로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의석수가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예를 들면 위의 공명당, 민사당과 마찬가지로 사회당 후보가 두명 당선되면 공산당 후보가 낙선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다.

4.6. 그 외 정당

5. 왜 예측과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됐는가?

가이후 총리가 급한 불을 끄는 정책을 여러 개 내놓으면서 내각 지지율이 10%에서 30% 초반까지 상승했지만, 당시 중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정권를 3당 연합에게 넘겨주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그를 넘어 상당히 많은 의석을 잃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하지만 예측과 정반대에 가까운 결과가 나오게 만든 1등 공신은 자민당 최연소 간사장 기록을 깨고 47세의 나이에 간사장이 된 오자와 이치로라고 해도 무방하다.

선거를 앞두고 먼저 리크루트 사건에 야당 고위직도 연루되었다는 걸 부각시키는 등 오자와 이치로의 행보가 선거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 중 백미는 체제선택을 선거 기조로 내세운 것이었다.

1988년 고르바초프의 신 베오그라드 선언으로 브레즈네프 독트린를 사실상 폐기시키면서 동유럽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를린 장벽까지 붕괴되면서 소련을 대표하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냉전의 종말의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자유민주당은 이런 세계 정세를 이용해 선거의 쟁점을 소비세에서 체제로 이동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좌파노선에 대한 반감을 극대화시킬 세계정세가 자민당이 선방하는데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그걸 잘 이용한 오자와 이치로의 자민당도 신승할만한 했다는 평가다.

또한 자민당 지지를 거두고 사공민 3당 연합으로 이탈한 농민 유권자를 달래기 위해 농산물 자유무역 기조를 거두고 보호주의적 공약[25]을 내놓으면서 야3당이 가지고 있는 무기 하나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가장 큰 선거 쟁점이었던 소비세 제도의 경우에는 이미 1년 정도 시행한 상황에서 국민들의 소비세 저항이 많이 수그러들면서[26] 선거 이슈로써 중요성이 급격하게 추락하게 되었다.

자민당에게는 이탈표를 다시 되찾는 선거전략과 강점과 약점이 각각 부각되고 묻히게 되는 행운이 겹친 선거였다.


[1] 전후 일본에서 발생한 가장 큰 정경유착형 범죄[2] 1989년은 일본 버블경제의 정점이자 끝이었던 시점이다[3]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자 총리 1순위였던 아베 신타로도 여기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게 된다.[4] 결국 우노 소스케는 참의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 사퇴를 했다.[5] 개선 의석 126석 중 36석 획득[6] 자유민주당[7] 일본사회당, 공명당, 일본 공산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진보당[8] 당선 후 사회당 입당 (3구 하치로 요시오)[9] 당선 후 자민당 입당 (2구 미노리카와 히데후미)[10] 당선 후 자민당 추가공인 (1구 마시코 테루히코)[11] 당선 후 자민당 추가공인 (3구 마스다 요시오)[12] 당선 후 사회당 입당 (4구 토구치 타마고) / 당선 후 자민당 입당 (4구 이시하라 노부테루)[13] 당선 후 자민당 추가공인 (2구 이와무라 우이치로)[14] 공명당 추천 (2구 쿠사카와 쇼조)[15] 사회당 추가공인 (1구 오카자키 히로미, 2구 호리 마사오) / 사회당·공명당·민사당·사민련 추천 (5구 요시오카 켄지)[16] 자민당 추가공인 (가메이 히사오키)[17] 자민당 추가공인 (2구 무라타 요시타카)[18] 당선 후 자민당 입당 (사카이 타카노리)[19] 당선 후 자민당 입당 (2구 미츠타케 아키라)[20] 당선 후 자민당 입당 (1구 마쓰오카 도시카쓰)[21] 당선 후 자민당 입당 (2구 이와야 다케시)[22] 1992년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소멸[23] 애초에 미야자와 기이치는 리쿠르트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총리로 부적절했다.[24] 일본 사회당이 비공산주의 정당였지만 공산당보다 더 한 친북좌파 정당이었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는다.[25] 한 알의 수입 쌀은 없을 것[26] 가이후 총리가 소비세법에 예외조항을 두는 개정안을 내놓은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