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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당

일본사회당 민사당 신진당
※ 아래 정보는 해산 당시를 기준으로 함
파일:일본 민사당 로고.svg
민사당
[ruby(民社党, ruby=みんしゃとう)]
<colcolor=#fe0000><colbgcolor=#ffffff> 영문 명칭 Democratic Socailist Party
한글 명칭 민사당
창당일 1960년 1월 14일
해산일 1994년 12월 9일 (신진당과 합당)
전신
()
이념 사회민주주의 (우익 사민주의)[1]
복지국가
의회민주주의[2]
반공주의[A]
일본 내셔널리즘[4]
친미[A]
당 내 우파[6]
스펙트럼 중도[11] ~ 중도좌파[12]
당 색
빨간색 (#FE0000)
주소 도쿄도 미나토구 토라노몬 2초메 3-13
(東京都港区虎ノ門2丁目3-13)
중앙집행위원장 요네자와 타카시 / 8선 (, 33~40대)
중앙집행부위원장 요시다 유키히사 / 재선 (, 15~16대)
아베 모토오 / 3선 (, 37~38·40대)
니시무라 쇼조 / 5선 (, 34~38대)
누키야마 에이코 / 초선 (, 13대)
집행부서기장 나카노 칸세이 / 7선 (, 34~40대)
정책조사회장 이토 에이세이 / 4선 (, 37~40대)
국회대책위원장 아오야마 타카시 / 5선 (, 34~38·40대)
참의원 의원회장 요시다 유키히사 / 재선 (, 15~16대)
참의원
4석[13] / 252석 (1.6%)
중의원
15석[14] / 511석 (2.9%)
국제 조직

후계 정당
1994년 12월 9일 기준

1. 개요2. 역사3. 역대 선거결과
3.1. 중의원 의원 총선거
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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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c5953949-ml.jpg
1959년부터 1994년까지 존속한 일본의 사민주의 정당. 이후 일본신당과 함께 신진당으로 합당되었다.

2. 역사

1959년 지방선거와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한 후, 그 책임소재가 좌파의 좌경화냐, 우파의 분탕질이냐를 놓고 분규가 일어난 결과, 우파가 패배하고 좌파 우위의 구도가 정립되었다. 이후 제명당할 위기에 처한 니시오 스에히로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니시오파 (소위 우파)를 이끌고 탈당했으며, 이후 가와카미 조타로를 중심으로 한 가와카미파(소위 중간파)의 관동지역 일파가 호응하면서 연쇄적인 탈당러쉬를 일으켰다. 이 두 그룹이 합작하여 창당하고 그 당명을 민주사회당이라고 하였다.[15] 이후 1969년 11월 당명을 민사당으로 개칭한다.

창당 당시 민사당은 겉으로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노선을 취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보수세력과 혁신세력에 하나씩 다리를 걸치고 기회주의적인 정치를 꾸려나갔다. 창당 직후 폭발한 안보투쟁으로 정국이 안갯속으로 들어가자, 당시 기시파의 프린스였던 후쿠다 다케오와 밀약하여, 자민당이 분열할 경우 기시파와 힘을 합쳐 정권을 수수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선거에서 줄줄이 패배하면서 그 존재감을 상실하기도 했으나, 다나카 정권의 실정에 힘입어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세를 다시 회복하고, 70-80년대에는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자민당의 당내 파벌역학에 매달려 특정 계파와의 연립정권 수립 같은 것을 획책하고 있었다. 가령 다나카 총리가 실각할 당시 민사당은 참의원의 고노 겐조(河野謙三 1901-1983 고노 이치로의 동생)와 미키 다케오 두 사람에게 양다리를 걸쳐가며 연립정권 수립을 획책했고, 미키 내각의 뒤를 이은 후쿠다 내각이 오히라와의 밀약을 파기하고 각복전쟁이 심화되자 나카가와 이치로와 협력하여 양 파벌을 배제하고 구 미키파 고모토 토시오를 연립정권 수반으로 모시려는 공작을 펴기도 했다. 이후 록히드 사건의 여파 속에서 치러진 83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대패하고 나카소네 내각이 위기에 처하자, 이번에는 나카소네파에 접근하여 연정수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나카소네의 정권연임이 확실시되자, 이번에는 반나카소네파에 접근하여 니카이도 옹립구상에 참가하기에 이르른다.

이렇게 자민당과 농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특히 외교, 국방정책에 있어서는 자민당보다 매파라고 불릴 정도로 우경화가 진전되었다. 칠레피바다로 만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반공주의를 국시로 했다는 이유로 옹호했고[16], 심지어는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당시 전두환에게 김대중을 석방하지 않으면 북한과 수교협상을 하겠다고 압박을 넣은 스즈키 젠코 총리를 한국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비판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편, 때에 따라서는 친정인 사회당을 위시로 하는 혁신세력, 특히 공명당과의 협력도 크게 중시되어 80년 총선에서는 사회당, 공명당과 소위 사공민노선을 통한 비자민 연립정권 수립이 모색되었다. 일반적으로 당내 우파 성향 중앙집행위원장(카스가 잇코, 츠카모토 사부로, 오우치 게이고) 재직시에는 자민당, 공명당과의 연대쪽으로 기울어졌고, 반대로 당내 좌파 성향 중앙집행위원장(사사키 료사쿠, 나가스에 에이이치) 재직시에는 사공민 연대쪽으로 기울어졌다고 알려져있다.

1993년 자민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하자 일본사회당, 공명당, 일본신당, 신생당, 사회민주연합, 신당 사키가케와 함께 7당 연립정권 호소카와 내각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4년 신생당, 일본신당과 연합해서 새로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자 일본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이에 반발해서 연립정권에서 이탈했고 하타 내각이 단명으로 끝나면서 다시 야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1994년 12월에 신진당에 합류하면서 해산되었다. 여하튼 구 민사당 출신 의원과 민사당을 지지했던 노조 '동맹' 등의 조직은[17] 신진당 해산후 이합집산을 거쳐 사공민 노선을 지지하던 당내 좌파 정치인 대다수가 신당우애를 거쳐 민주당으로 이적했고, 이는 현재의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나, 자공민 노선을 지지하던 당내 보수파 일부는 자유연합을 거쳐서 자민당으로 흡수되었다.

혐한, 혐중 발언으로 악명이 높은 카와무라 타카시가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이었던 카스가 잇코의 비서 출신이다. 사실 민사당의 노선 자체로만 본다면 노다 요시히코 수상 당시의 민주당의 노선과 비슷하다.[18]

3. 역대 선거결과

3.1.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의석 증감은 직전회차 선거 의석 수와의 비교임.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증감] 정당투표
득표수 득표율
1960(29회) 105 17 [▼23] 3,464,148 8.77%
1963(30회) 59 23 [▲9] 3,023,302 7.37%
1967(31회) 60 30 [▲7] 3,404,464 7.40%
1969(32회) 68 31 [-] 3,636,591 7.74%
1972(33회) 65 19 [▼10] 3,660,953 6.98%
1976(34회) 51 29 [▲10] 3,554,076 6.28%
1979(35회) 53 35 [▲7] 3,663,692 6.78%
1980(36회) 50 32 [▼4] 3,896,728 6.60%
1983(37회) 54 38 [▲8] 4,129,908 7.27%
1986(38회) 56 26 [▼11] 3,895,858 6.44%
1990(39회) 44 14 [▼11] 3,178,949 4.84%
1993(40회) 28 15 [▲1] 2,205,682 3.52%
정당 해산 (신진당 창당에 합류)

4. 여담

민사당이 창당되기 13년 전인 1947년에 같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도 민사당이 창당되었는데, 기존에 있던 사회당[19]에서 공산당[20]과의 협력에 반대하는 당내 우파가 탈당하여 민주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했다는 점이 유사했는데, 둘다 미국 CIA의 공작 결과라는 걸 생각하면 딱히 놀라울 건 없다.

5. 관련 문서


[1] 일본사회당이 주장한 일본형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사실상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2] 의회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모든 종류의 혁명과 폭력, 전체주의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같은 논리로 신좌파의 학생운동도 비판했으나, 때에 따라선 이들과 연대하기도 했다.[A] 반공 외에도 자민당보다 외교적 친미성향이 훨씬 강했다. 또한 CIA의 비밀리 후원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중일수교당시에는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호전되었던때인지라 이를 환영하는 논평을 냈다.[4] 당 차원에서 스스로를 국민 노동자당(国民勤労者の党)이라고 칭했으며, 실제로 당대에는 매우 적극적으로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했고, 당시에 온건했던 자민당보다 내셔널리즘 성격이 강했다.[A] [6] 당내 우파는 민사당이라는 명칭이 사회주의를 연상시킨다며 당권을 잡았을 때 당명을 '민주당'으로 변경하기도 시도했으나 당 내 좌파와 민사당을 지지하는 각종 시민사회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혀 철회했다.[7] 보수주의 관련 출처: #[8] 민사당은 공식적으로 민주사회주의를 내세우는 등 혁신정당이였으나 안보,외교,사회문화 정책에서 혁신정당인 일본사회당이 아닌 보수정당인 자유민주당에 더 가까워 이쪽으로도 평가받는다.[9] 복지국가론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공공 부문 감축과 소위 '참여복지', 공무원 파업에 대한 강한 반대를 내세웠다. 1990년대에는 아예 공식적으로 제3의 길 추구를 내세웠다.[10] 반면 당내 중도파와 좌파는 공명당과 가까웠으며, 중도좌파 야당 역할을 견지하기를 원했다.[11] 자공민 연대를 지지하던 당내 보수파와 사공민 연대를 지지하던 당내 중도파와 좌파가 있었다.[12] Franklin Henry Hooper; Walter Yust, eds. (1982). Britannica Book of the Year. Encyclopaedia Britannica. p. 1950.[13] 지역구 1석, 비례대표 3석[14] 지역구 15석[15] 창당 당시 CIA의 개입이 있었다는게 2006년 미 국무부 안건에서 발견되었다. 59년부터 64년까지 매년 CIA의 7만 5천불 규모의 원조가 있었다고 한다.[16] 이 때문에 2005년 칠레 대선에서 반 피노체트 투사였던 미첼 바첼레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민주당민사협회 출신 인사들이 칠레 대사관에 사과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본인들의 선배 정치인이 했던 잘못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한 것.[17] 실질적으로 민사당 지지 노총이었던 전일본노동총동맹은 사회당 지지성향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와 통합을 하여 렌고(연합)이라는 명칭으로 통합되었고,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민사당-공명당과 별개로 공천을 내기도 했다.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11석의 당선자를 내면서 선전을 거두기도 했지만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 PKO법을 둘러싼 민사당-공명당과 사회당과의 갈등과 사회당 내의 혼란으로 의석을 얻지못하면서 참패.[18] 물론 노다 요시히코는 민사당 출신은 아니다.[19] 일본사회당, 이탈리아 사회당[20] 일본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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