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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3차 이케다 개조내각 부총리 고노 이치로 河野一郎 | Konō Ichirō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colbgcolor=#fff,#1F2023>1898년 6월 2일 |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도요카와촌 (현 오다와라시) | |
사망 | 1965년 7월 8일 (향년 67세) |
재임기간 | 부총리 겸 도쿄올림픽담당대신 |
1964년 7월 18일 ~ 1964년 11월 9일 | |
학력 |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 / 학사) |
부모 | 부 고노 지헤이[1] |
형제 | 형[2] 동생 고노 겐조[3] |
배우자 | 고노 데루코 |
자녀 | 장남 고노 요헤이[4] |
친척 | 손자 고노 다로[5] 손자 고노 지로[6] |
정당 | |
지역구 | 舊 가나가와 3구 (중선거구) |
의원 선수 | 11 (중) |
의원 대수 | 18, 19, 20, 21, 22, 25, 26, 27, 28, 29, 30 |
약력 | 아사히 신문 직원 야마모토 테이지로 농림대신 비서관 중의원 의원 (제18-22·25-30대) 일본자유당 간사장 농림대신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경제기획청 장관 (제1차 기시 개조내각)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농림대신 (제2차 이케다 제1차 개조내각) 건설대신 (제2차 이케다 제2차 개조내각) 부총리 겸 도쿄올림픽담당대신 (제3차 이케다 내각) 스포츠담당대신 (제1차 사토 내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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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 일본의 정치인. 부총리 겸 오륜대신[7], 농림대신, 경제기획청 장관, 건설대신,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11선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11·12대 참의원 의장을 지냈던 고노 겐조의 형이자,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의 아버지이며, 고노 다로 전 디지털대신의 할아버지이다.
하토야마 이치로, 미키 부키치와 함께 자민당 창당의 주역으로 전후 일본 정치사에 있어서 보수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른바 당인파(党人派)의 거두로 꼽히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1898년 6월 2일, 일본 제국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도요카와촌(현 오다와라시)의 지주였던 고노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지헤이는 아시가라 비료 사장, 오다와라 실업 은행 이사 등을 거쳐 가나가와현의회 의장까지 지낸 가나가와현 정재계의 명사였고, 어머니는 소가에서 태어나 도카이도선의 터널 공사를 하청하던 건설회사의 딸이었다. 형은 태어난지 몇 달 만에 사망했고, 동생 켄조는 훗날 참의원 의장을 역임한 정치인이 되었다.고노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 학교에 빨리 가고 싶어 때를 썼다 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노의 의견에 동의해 호적에서 생년월일을 6월에서 3월로 바꾸어버려, 그 때문에 일년 먼저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 것이 나중에 호적법 위반으로 적발되어 아버지 지헤이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중학교 시절에는 매우 철이 없는 행동을 많이 저질렀다 하는데, 중학교 2학년 때 한 영어교사가 마음이 안든다는 이유로 그를 낙제시키기 위해 시위를 일으켰고, 결국 고노를 포함 총 10여명이 그 교사에게 낙제점을 붙여 그 교사를 일년 낙제시켰다. 그리고 훗날 일본 학사원상을 수상한 당시 교사였던 다케다 유이치에게 '도마뱀'이라는 별명을 붙여 놀리거나, 칠판에 진짜 도마뱀을 풀어 장난을 치는 등 철이 없는 행동들을 많이 벌였었다고 한다. 고노는 훗날 이 일들을 회상하며 반성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본의 광업이 전성기를 맞아 일본의 공업화가 매우 빠른 기세로 진행되고 있었다. 고노는 이에 큰 감화를 받아 광산학을 공부하려 했었고, 시험 이후 와세다대학 이공과에 면접을 넣지만 불합격되어 1년간 중앙예비교를 다녔다. 두번째 시험 이후에는 대학으로부터 "이공과는 유감스럽지만 점수가 부족하다. 다른 학과라면 지망해 볼 수 있다"라는 통지를 받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동생 켄조와 함께 육상 장거리 선수로 활약하여 종합 우승을 가진적 있다.
대학 졸업 이후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기 위해 시험을 치러 1차 시험에서는 합격하지만, 2차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전직 중의원 의원이었던 스기우라 시게요시의 추천으로 시모무라 히로시가 있던 곳에 소개장을 가지고 나간 것이 인연이 되어 입사하게 되었다.
2.2. 정계 입문
1931년, 이누카이 내각의 농림대신인 야마모토 테이지로[8]의 비서관이 되어 1932년, 제1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정우회 소속으로 가나가와 3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에게 붙어 측근이 되었다.종전 이후 1945년, 입헌정우회의 정통파 세력들을 규합해, 하토야마를 총재로 하는 일본자유당을 결성하고 당 간사장으로 취임하며 내각 결성에 분주하지만, 다음 해 하토야마에게 미군정으로부터의 공직 추방령이 내려져 그의 라이벌이었던 요시다 시게루가 후계 총재로 지명되고 내각 조성에 착수한다. 또 고노 자신에게도 공직 추방령이 내려졌다. 추방 중인 1948년에는 정치자금 관련 문제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환문되었다. 1951년에 추방이 해제되어 자유당에 복당, 이후 반요시다파의 선두주자로 하토야마 내각 수립에 앞장섰다. 그러나 1952년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요시다가 하토야마파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이시바시 단잔과 함께 고노를 당에서 제명시켰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제명이 취소되었고 다음 해 3월 14일, 하토야마와 함께 자유당에서 분당하여 일본민주당을 결성했다.
1954년,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농림대신으로 입각해, 2·3차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다음 해 11월 5일, 보수 합동 작전으로 인한 자유민주당 합당에 참여해 고노파를 결성했다.
1956년 하토야마가 정계에서 은퇴하고 기시 노부스케가 당내 주류가 되자 다음 해 제1차 기시 개조내각에서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입각했고, 제2차 내각에서는 당 총무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1959년 고노를 당 간사장으로 취임시키는 안건에 기시가 거부를 하여 이 때부터 반주류파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관련하여 기시 내각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중의원에서 강제체결되자 고노파는 미키파와 함께 결석했다.
기시의 퇴진 이후 자민당 총재선에서 오노 반보쿠와 이시이 미쓰지로를 지지하지만, 이케다 하야토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한 때 '고노신당'의 결성을 고려하지만 오노와 코다마 요시오 등이 반대하여 단념하였다. 오노가 이케다한테의 접근을 도모해, 1961년 제2차 이케다 제1차 개조내각에서 농림대신으로 재입각하고, 다음 해 2차 개조내각에서는 건설대신과 도쿄올림픽담당대신으로 취임했다. 제3차 내각에서는 한 층 더 올라가 부총리 겸 올림픽대신으로 취임했다.
1963년에는 우익 인사 노무라 슈스케의 방화로 인해 저택에 불이 났다.[9]
1964년 도쿄 올림픽의 종막과 이케다의 퇴진으로 인해 차기 유력 총재 후보중 한명으로 거론되었으나, 이케다가 지명한 사토 에이사쿠가 총재로 취임했다.[10] 고노는 코다마 요시오를 비롯해 우익, 야쿠자와 유착한다는 의혹이 짙었고[11] 요시다 계열의 관료출신 정치인들이나 경제 4단체[12]를 중심으로한 경제계는 이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13] 결국 이때문에 총재를 눈앞에 두고 고배를 마셔야 했다.
2.3. 사망
같은 해 11월에 발족한 제1차 사토 내각에서 부총리 겸 스포츠담당대신에 취임했으나 다음 해 6월 개조내각에서는 유임을 거부, 한 달 뒤 7월 8일 대동맥 파열로 사망했다. 향년 67세.3. 기타
- 샤다이 그룹의 그린 팜과 제휴한 오너 브리더인 나스노 목장의 소유주였다. 다만 소유주 시절에는 주목할 만한 경주마들이 없었으며, 훗날 나스노 목장의 첫 중상 우승마가 된 나스노 코토부키를 생전에 봤지만 데뷔전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나스노 목장이 세운 대다수의 업적들은 목장을 물려받은 아들 고노 요헤이가 일궈냈으며, 현재는 손자인 고노 지로가 사장인 에비스 흥업이 운영하는 중이다.
- 생전에도 경마계에 깊게 관여했는데, 일본중앙경마회와 독립된 마차경주 협회를 설립해 전쟁 후 방치된 네기시 경마장을 중심으로 마차경주를 부흥시키는데 앞장 섰거나, 비싼 종마를 수입하는것 보다 효율이 좋다며 서러브레드의 인공수정에 찬성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마차경주 부흥 계획은 직전에 무산되었다.
- 후지 스피드웨이의 건설 당시 오벌이 아닌 유럽식 로드코스를 도입한 장본인이다.
- 메구로의 도쿄 자택은 고노 사후 헝가리 대사관저로 쓰였다.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31 - 1940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0 | 정당 해산 |
| 1940 - 1945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5 |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인한 정당 해산 |
| 1945 - 1946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6 - 1951 | 공직 추방령으로 인한 강제 제명 |
| 1951 - 1954 | 공직 추방령 해제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54 | 일본민주당 창당을 위한 탈당 |
| 1954 - 1955 | 창당 |
| 1955 - 1965 | 신설 합당[14] 사망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32 |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가나가와 3구 | | ? (?%) | 당선 (3위) | 초선 |
1936 | 제1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 당선 (4위) | 재선 | ||
1937 |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 당선 (3위) | 3선 | ||
1942 |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익찬정치회 | ? (?%) | 당선 (2위) | 4선 | |
1946 |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가나가와 전현구 | | ? (?%) | 당선 (3위) | 5선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가나가와 3구 | | 57,580 (15.74%) | 당선 (2위) | 6선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7,774 (13.84%) | 당선 (3위) | 7선[15]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9,433 (17.93%) | 당선 (1위) | 8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3,265 (15.32%) | 당선 (2위) | 9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6,515 (16.05%) | 10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8,830 (20.90%) | 당선 (1위) | 11선[16] |
6. 둘러보기
고노 가문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color=#fff><colbgcolor=#D7003A> 1대 | 고노 지헤이 | ||
2대 | <rowcolor=#D7003A> 차남 | 삼남 | ||
고노 이치로 | 고노 겐조 | |||
3대 | 고노 요헤이 | |||
4대 | 고노 다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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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5~1950, 가나가와현의회 의장, 도요카와촌장, 아시가라 비료 회사 사장 역임.[2] 출생 후 몇 달 만에 사망.[3] 1901~1983, 제11·12대 참의원 의장, 중·참의원 의원 역임.[4] 1937~, 부총리, 중의원 의장, 제128-131대 외무대신, 제55대 내각관방장관, 제16대 자유민주당 총재, 중의원 의원 역임.[5] 1963~, 제145·146대 외무대신, 제20대 방위대신, 제90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제4대 디지털대신 역임. 현 중의원 의원.[6] 고노 가문 소유의 중견기업 일본단자 대표이사.[7] 1964 도쿄 올림픽 담당 국무대신을 일컫는다. 일본에서는 올림픽을 오륜으로 표기하기도 해서 1964 도쿄 올림픽 때는 물론 2020 도쿄 올림픽 때에도 담당 국무대신을 줄여서 올림픽상, 오륜상, 오륜대신, 올림픽대신으로 부르기도 했다.[8] 山本悌二郎, 1870~1933. 입헌정우회의 거물급 정치인으로 입헌정우회 內 친군파, 국수주의 세력의 리더 격 인물로, 이전 다나카 기이치 내각에서 농림대신을 역임한 바 있다.[9] 노무라에 따르면 고노가 파벌정치를 심화시키는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고 하며 더욱이 고노가 나스 고원의 황실 별장 부근에 광대한 토지를 매입하여 별장과 목장을 건설하는 과정에 임야를 불태운 것에 대해 격앙되어 있었다고 한다.[10] 요시다 시게루나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경제계를 비롯해 여러 방면에서 사토를 총리로 지명하기 위한 공작이 진행되어 이미 2, 3일전에 사토가 내정되어 있었지만 고노는 전혀 몰랐다고 한다.[11] 야마구치구미의 주요 돈줄이었던 고베항의 하역업무의 뒷배가 고노 이치로였다.[12] 경단련, 일경련, 경제동우회, 일본상공회의소[13] 재계 주류는 고노 이치로 정권이 탄생할 경우 고다마 요시오, 하기하라 기치타로(홋카이도 탄광기선 회장)등의 인사들이 고노를 배경으로 자신들을 대신할 새로운 '재계 집행부'를 세우려 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14] 자유당과의 신설합당[15] 분당파 자유당 (하토야마파)[16] 1965.7.8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