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2:06:39

리크루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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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수사 과정3. 관련자 처벌4. 여파

1. 개요

リクルート事件
Recruit scandal

1988년일본에서 발생한[1] 정치 스캔들. 록히드 사건(1976), 교와 스캔들사가와 규빈 스캔들(1992)과 더불어 일본 4대 정경유착 비리로 손꼽힌다.

리크루트 홀딩스사가 자스닥 상장 직전[2]인 자회사 리크루트 코스모스[3]의 미공개주식을 정계, 관계, 경제계, 언론계 유력 인사들에게 싸게 양도해 거액을 챙기게 한 사건이다.

정보지 사업에서 시작해 부동산 사업(리크루트 코스모스), 리조트 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한 신흥 기업 리크루트는 재계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으며 고립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재계 내에서 리크루트의 지위를 높이고 싶어했던 회장 에조에 히로마사가 정계 등과 접촉한 것이 사건의 계기가 되었다.

에조에가 벌인 일의 성격과 그 어마어마한 규모는 결국 필연적으로 반작용을 불러와 다케시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2. 수사 과정

1988년 3월 23일 아사히 신문 가나가와지국은 가나가와 현경 수사2과가 가와사키시 부시장의 부패 사건을 내사종결하자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3개월간의 취재 끝에 가와사키시청 간부가 리크루트 카와사키 테크노피아 빌딩(現 카와사키 테크 센터)을 가와사키역 근처 금싸라기 땅인 메이지 제당 가와사키 공장 부지의 재개발 지구[4]에 용적률을 500%에서 800%로 늘려주는 대가로 부동산 업자로부터 뇌물로 받은 코스모스의 주식을 처분하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힌 것이다. 아사히 신문은 이 사실을 1988년 6월 18일 보도하였다. 이후 다른 언론사들도 보도를 하기 시작하는데 7월부터는 뇌물을 받은 인물들도 알려지기 시작한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이하, 당시 직책)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 부총리 겸 대장대신[5], 아베 신타로[6] 자민당 간사장, 와타나베 미치오[7] 자민당 정조회장과 같은 자민당 거물급 의원들을 포함해 약 90명의 정치인이 미공개주식을 양도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모리 요시로의 경우 1억엔의 차익을 남겼다.

7월 6일에는 모리타 코우 니혼게이자이신문 사장도 1984년 12월 미공개주식을 받아 약 8,000만엔의 차익을 본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퇴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국회에서 리크루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리크루트 코스모스는 나라자키 야노스케 중의원 의원[8]에게 뇌물을 제안했다. 나라자키 의원은 코스모스 사장실장과의 면담 영상을 직접 녹화해 9월 5일 리크루트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검찰은 정계, 문부성, 노동성, NTT 4개 루트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10월 19일에는 도쿄지검 특수부가 리크루트 본사, 리크루트 코스모스, 코스모스 사장실 실장의 자택을, 10월 26일에는 토요신탁은행(現 미쓰비시UFJ신탁은행[9]) 증권부를 압수수색하여 코스모스 주주 명부 등을 압수했다.

10월 29일에는 후지나미 타카오 전 내각관방장관, 신토우 히사시 NTT 회장, 다카이시 쿠니오 전 문부성 사무차관, 카토 타카시 전 노동성 사무차관도 주식을 양도받은 것이 추가로 밝혀졌으며 11월 10일, 도쿄지검 특수부는 코스모스사 사장실장을 뇌물죄로 기소하였다.

11월 15일에는 에조에 히로마사 리크루트 회장이 중의원 리크루트 특위에 주식 양도자 리스트를 제출했다. 그리고 12월 9일, 미야자와 기이치가 부총리 겸 대장대신에서 사임하고 12일에는 신토우 NTT 회장도 사임했다.

12월 30일, 하세가와 타카시 법무대신도 주식을 받은 게 발각되어 사임하였으며 해가 바뀌고 1989년 1월 24일 하라다 켄 경제기획청 장관(내각부 특명담당대신)도 리크루트가 정치자금 파티에 관련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임하였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2월 13일 에조에 전 리크루트 회장과 NTT 전 이사진 등을, 3월 6일 신토우 전 NTT 회장을 NTT법 위반[10]으로 체포하였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3월 8일 카토 타카시 전 노동성 차관과 리크루트사 사장실장을 체포했고 3월 28일에는 다카이시 쿠니오 전 문부성 차관을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하였다.

수사 과정에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의 비서가 리크루트 사에서 5,000만엔을 빌린 것이라고 검찰에서 주장했음이 아사히 신문에 의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결국 다케시타 총리가 4월 25일 총리직 퇴진의사를 밝혔고 6월 3일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5월 29일 미야자와 전 대장대신의 비서 등 의원비서 4명을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으로 약식 기소했고 기자회견을 열어 수사 종결을 선언했다.

3. 관련자 처벌

  • 후지나미 타카오 전 내각관방장관: 뇌물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추징금 4,270만엔
  • 이케다 카즈야 전 공명당 중의원 의원: 뇌물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 아베 신타로의 비서, 미야자와 기이치의 비서 등: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으로 약식 기소
  • 다카이시 쿠니오 전 문부사무차관: 뇌물죄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 카토 타카시 전 노동사무차관: 뇌물죄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 신토우 히사시 전 NTT 회장: NTT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 에조에 히로마사 전 리크루트 회장: 뇌물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미공개주식의 양도 대상이 광범위했던 반면 직무관련성은 희박했기 때문에 검찰은 대부분의 정치인들을 입건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검찰은 내각관방장관 시절에 미공개주식을 받아 뇌물죄로 입건할 수 있었던 후지나미 타카오 전 관방장관에 대한 수사에 사활을 걸었다. 거물 정치인 중 유일하게 기소된 후지나미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집혔고 이후 최고재판소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 밖에 문부성과 노동성의 전직 사무차관, NTT 회장 등 직무관련성이 인정된 고위 관료들과 기업인들이 처벌을 받았다.

4. 여파

포스트 다케시타의 유력 주자로 거론되었던 아베 신타로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모두 다케시타 퇴진 후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지 못했으며 다케시타 내각 출신이지만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우노 소스케가 후임 총리로 취임했다.[11]

리크루트 사건 이후 일본 정계의 정경유착을 끊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990년대 초 일본 정치의 핵심 키워드는 정치개혁이었으며 이를 위해 중의원 선거제도를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꾸고 각료의 재산 공개 범위를 친족까지 확대하며 정치자금규정법을 개정해 정치 헌금 규제를 강화하는 등 각종 개혁안이 도입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의 금권 정치는 점점 힘을 잃게 되었으며 이 사건에 연루된 주요 정치인들은 2선으로 후퇴했으나 시간이 흐른 다음 복귀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자유민주당을 탈당했다. 리크루트 사건과 소비세 도입[12] 등으로 자민당은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에게 참패하였고 7월 23일 열린 제1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도 자민당 창당 이래 처음으로 과반에 실패했다.

일본사회당의 경우 우에다 타쿠미 중의원 의원이 이 사건과 관련되어 사임했지만 참의원 보궐선거[13]와 도쿄도의회 선거, 제15회 참의원 선거[14]에서 모두 압승하는 등 이 사건의 득을 많이 보았다. 선거 참패와 게이샤와의 스캔들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69일 만에 우노 소스케가 사임하고 가이후 도시키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15]

이 사건 때문에 리크루트 홀딩스와 리크루트 코스모스의 창업주인 에조에 히로마사가 회장직에서 사임하였다. 이미지 악화와 버블 붕괴로 인한 경영악화로 1992년 에조에 히로마사는 리크루트 지분을 다이에(現 이온그룹 소속)의 창업주인 나카우치 이사오에 매각했다.[16][17]


[1] 뇌물 증여는 1984년 12월부터 진행되었다.[2] 1986년 10월 30일에 상장하였으나 그 직전인 그해 6월경 양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부동산 개발회사[4] 가와사키 테크노피아. 리크루트의 사무건물이 이곳에 지어졌고 1988년 4월에 준공하였다. 준공 전후에 터진 일이라 무산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후 1997년 12월 자산 매각 과정에서 콜로니 캐피탈에 매각되었다.[5] 비서가 자신의 이름을 이용한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6] 아베 신조의 아버지.[7] 와타나베 요시미의 아버지. 자신의 아들인 와타나베 요시미가 비서로 일하면서 5,000주를 받은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8] 록히드 사건 의혹을 파헤쳤고 국회의 폭탄이라는 별명도 있다.[9] 미츠비시 UFJ 은행과는 다르다.[10] NTT법에 뇌물 관련 처벌 조항이 따로 존재한다.[11] 결국 총리가 되지 못한 아베, 와타나베와 달리 미야자와는 1991년 11월에 총리가 되었다. 다만 1993년에 내각불신임결의를 맞은 뒤 치른 총선에서 패해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총리직을 내주게 되었고 총선 패배로 물러난 최초의 자민당 총리라는 불명예를 쓰게 된다.[12] 1989년 4월 도입[13] 1989년 2월 12일에 치러진 후쿠오카와 니가타의 참의원 보궐선거에서 모두 사화당 후보가 자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14] 의원을 절반씩 뽑기 때문에 압승했음에도, 제2당에 그쳤다.[15]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가 되면서 버블경제를 잠재우기 위해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를 실행하였는데 이것이 잃어버린 10년의 단초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의 나비 효과인 셈이었다.[16] 1922~2005. 일본 유통업계의 혁명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오사카의 맹주 난카이 호크스를 인수하여 다이에 호크스로 구단명을 변경하고 현재의 연고지인 후쿠오카 시로 이전시켰다.[17] 주식은 보유하지만 다이에가 리크루트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후 2000년 경 다이에의 실적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나카우치 이사오가 다이에 그룹에서 손을 떼면서 다이에로부터 독립했다. 이 사건과는 별개로 리크루트 코스모스는 2005년 6월 사모펀드 출자를 받아 MBO 방식(해당 사업부 경영진의 직접 인수)으로 리크루트에서 독립하여 2006년 9월 1일 코스모스 이니시아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2013년부터는 같은 건설회사인 다이와하우스그룹에 인수되었다. 사실 이전부터 다이와하우스와의 관계는 있어 왔는데 2009년 리먼 사태로 인한 경영 악화의 재건방안으로 코스모스 이니시아가 자회사인 부동산 관리회사 코스모스 라이프를 다이와하우스에 매각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버블 시기 리크루트에 의해 발생한 리조트 개발로 인한 부채는 전부 리크루트 코스모스가 지고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