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1 22:47:26

고이즈미 준이치로

{{{#!wiki style="margin:0 -10px -5px; color:#C3C96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제74대 제75대 제76-77대 제78대
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제79대 제80대 제81대 제82-83대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무라야마 도미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제84대 제85-86대 제87-89대 제90대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제91대 제92대 제93대 제94대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제95대 제96-98대
노다 요시히코 아베 신조
일본 부총리
인세이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아즈치모모야마 · 에도 · 내무경 · 메이지 수상
다이쇼 수상 · 쇼와 수상 · GHQ · 레이와 수상
}}}}}}}}} ||

고이즈미 준이치로
[ruby(小泉, ruby=こいずみ)] [ruby(純一郎, ruby=じゅんいちろう)]
파일:Image-Junichiro_Koizumi_G8_summit_2.jpg
생년월일 1942년 1월 8일 ([age(1942-01-08)]세)
출생지 일본 제국 가나가와요코스카
학력 게이오기주쿠대학 졸업
정당 자유민주당
신장 169cm
일본의 제87대 내각총리대신
임기 2001년 4월 26일 ~ 2003년 11월 18일
일본의 제88대 내각총리대신
임기 2003년 11월 19일 ~ 2005년 9월 20일
일본의 제89대 내각총리대신
임기 2005년 9월 21일 ~ 2006년 9월 26일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젊은 시절3.2. 총리가 되다3.3. 총리 시절
3.3.1. 北日 정상회담3.3.2. 주변국들의 어그로와 고이즈미 담화
3.4. 퇴임 후: 정치적 제자와의 충돌
4. 성격5. 어록6. 가족 관계
6.1. 가정사
7. 선거 이력8. 여담9. 틀 둘러보기


1. 개요

일본정치인. 제87·88·89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1942년 1월 8일 출생.

2. 상세

일본 총리치고는 상당히 긴 기간인 5년 5개월을 재임했으며, 그렇게 4년 11개월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를 제치고 전후 최장기 재임 4위에 빛나는 기록을 세웠었다. 의원 내각제인 일본/정치에서 연임을 포함해 총리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단임인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 5년보다 더 길게 재임하였고, 그 재임 기간 중 3년 8개월(2003년 ~ 2006년)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겹친다. 게다가 정치인 치고 개성 강한 헤어 스타일[1] 유지해서 한국인에게 여러 의미로 기억되는 일본 총리가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랜 재임기간 덕분에 악명이 비례해진 측면도 있다.(...)

한국에서 고이즈미의 이미지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독도 문제 등이 겹치며 바닥을 찍은 편이지만, 사실 후술되어있듯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에 다녀오기도 하는 등 의외의 면모 역시 제법 보였다.# 이에 대해 일본계 한국인 호사카 유지 교수는 2019년 방송에서 "고이즈미의 성향 자체는 리버럴에 가까운데, 그가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이 (아베의 외조부이기도 한) 기시 노부스케 라인이라 우익적 행동 역시 제법 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

어찌 됐든 이 사람만큼 한국인들에게 관심(?)을 받은 일본 총리는 당시 기준으론 거의 없었던 건 사실. 그래서 한창 반일감정이 고조되던 시기엔 '고이즈미 가지고 놀기'(...) 등의 플래시 게임이 국내에서 유행하기도 했었다. 당시 기사, 게임. 그런데 세월이 약인지 고이즈미의 악명도 퇴임 후 [age(2006-09-26)]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바랬으며, 퇴임 이후 그의 정치적 제자이기도 했던[3] 아베 신조 내각이 2013년 재집권 시작부터 막 나갈 기질을 보이면서 고이즈미를 능가하는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아예 "고이즈미 시절 일본이 그나마 나았다"(...)고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고이즈미가 과거사 망언은 많았지만 현대사는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았는데, 아베 정부 들어선 현대사의 대명사인 한일월드컵 개최 사실도 삭제한 교과서를 검정통과시키는 만행이 나왔으니...

이 외에도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 아소 다로나 모미이 가츠토[4], 햐쿠타 나오키 그리고 다모가미 도시오 등 다수가 미친 존재감을 보이면서 한국에서 고이즈미의 존재감은 점점 묻히고 있다. 도리어 "이런 인간들을 거느리고도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았던 고이즈미는 의외로 정상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재평가론 마저 나오는 상황.(...)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독도 문제를 제외하곤 상식 선에 들었던 인물이었다는 평도 있다. 제외한 것들이 문제의 핵심인 건 함정 실제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하고, 서대문 형무소에도 갔다오는 등 일본제국의 만행에 대해서 참회하는 모습도 보였다. 2004년에는 한국을 안보 우호국격인 백색 국가에 지정해 신뢰할 만한 나라라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임기 초반엔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 추도시설로 쓰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야스쿠니 신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는 일본 우익들의 성화 때문에 무위로 끝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본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임기 내내 이어졌다. 심지어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도 이시기(2002, 2004) 이뤄졌다.

이런 이면엔 대외정책 문제는 미일동맹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국내 문제에 집중하겠다는 의도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고이즈미는 특별한 외교적 지향이나 대외정책에 대한 정견이 없었으며, 내정개혁이 임기 내내 추구한 단일 목표였다. 그 밖의 다른 분야 정책들은 그 달성을 위해 희생되어도 좋다는 것이 내각의 일관된 기조였다. 고이즈미가 보여온 이러한 혼란스러운 모습은 이에 기반한 것일지도. 그러니 신념에 미쳐서 평화헌법 개정을 주창하는 보수 우파 아베 신조와는 결이 다른 측면도 있을 것이라는 주장.

물론 그럼에도 후술되어 있지만, 굳이 해서는 안될 만행들을 제법 한 것 또한 사실이다. 여러모로 리버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본 정치인의 한계 또한 보여준 인물.

3. 생애

3.1. 젊은 시절

1942년 1월 카나가와요코스카에서 출생하였다. 선거구를 3대째 세습해온 정치 명문가의 3세 국회의원이다.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는 야쿠자 조직의 보스로 시작하여 일본제국 국회에서 체신상을 지냈다. 부친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는 1960년대 방위청 장관을 지냈다.

준야의 성씨는 본래 '사메지마(鮫島)'였으나 마타지로의 유일한 친자식인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와 결혼, 아내의 성씨를 따라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꾸고 고이즈미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준야와 요시에는 장녀 미치코(道子), 차녀 다카코(隆子), 3녀 노부코(信子), 장남 준이치로, 차남 마사야(政也)를 낳았는데 3녀 2남 모두 '고이즈미' 성씨를 따랐다.

고이즈미는 사립 명문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런던에서 공부하던 중 부친 준야가 급사하는 바람에 갑자기 귀국하여,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총선에 출마하면서 27세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했다.

파일:external/factsanddetails.com/20091013-Kantei,%20office%20of%20prime%20minister%20Koizumi%201988.jpg

그러나 27세에 처음 출마한 선거에서 낙선하여 자민당 우파의 거두인 후쿠다 다케오 前 총리의 비서로 들어가 정치를 배웠다. 이후 29세 때 처음 중의원에 당선됐고, 대장성 정무차관, 후생상, 우정상 등의 각료를 역임했다. 우정상 때부터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고, 결국 뜻을 이뤘다.

3.2. 총리가 되다

고이즈미는 1990년 가토 고이치, 야마사키 다쿠와 함께 YKK 연합을 결성하고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YKK는 세사람의 영문이니셜로 이들은 다케시타파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YKK 연합은 고이즈미보다는 가토가 리더의 역할을 했기에, 사실상 이 연합의 막내격이었는데...

1995년 9월에는 우정사업 민영화를 내걸고 하시모토 류타로와 총재 자리를 놓고 싸웠으나 대패하고, 1998년에는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와 대결하였으나 역시 패하였다. 그러나 2000년 말 '가토의 난'이 실패하면서 고이즈미가 YKK연합의 대표로 나섰으며, 2001년 4월 24일, 자민당 총재경선에서 예상 밖의 당원 돌풍을 일으키면서 95년 패했던 자민당 최대 파벌 하시모토 류타로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이로 누르고 총재도전 3수 만에 정상에 올랐다. 이후 2003년에 후지이 다카오 후보를 누르고 총재 자리를 연임했다. 그리고 2001년 10월 16일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의 인터넷에선 원래 노나카 히로무가 총리로 유력했으나 부라쿠민이어서 고이즈미가 이겼다는 식의 얘기가 퍼지기도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노나카 히로무는 총재 선거에 출마한 적도 없고, 하시모토 류타로와 후지이 다카오를 후보로 밀었으나 두 후보 모두 개혁을 내세운 고이즈미에게 패배한다.

3.3. 총리 시절

총리로 재임할 당시 2차대전 이후의 일본 정권으로는 사토 에이사쿠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긴 장기 집권기간(1,980일)을 가졌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오래간만에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총리가 된 후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하자며 성역없는 개혁이라는 슬로건하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들어갔는데 공기업 민영화, 낙하산 철폐, 정경관 유착 해소, 조직 유연화 등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당시 일본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반대로 복지 정책 축소와 이로 인한 양극화 심화 등 부작용에 따른 비판도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을 방문하여 온전한 한일관계 유지에 노력하였으나, 노무현 정부 시절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함께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한국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다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자기의 의지가 아닌 자민당내 우익들을 회유하기 위해 고이즈미가 쓴 수단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000년 초반에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묘지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그 외에 반원전 등을 주장하였으며, 2001년 10월 15일 일본 총리로선 최초로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여 참배하기도 했기 때문.# 물론 임기 내내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단순히 우익 회유 수단으로 참배를 했다고 보긴 좀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만. 아니면 회유를 넘어 친밀감을 심으려는 의도였을지도...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 9년 만에 자민당이 압승을 거둘 때까지만 해도 탄탄대로를 걸을 거 같았지만, 2003년에 민주당이 자유당과의 합당을 통해 세력확장을 단행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어그로를 끌었지만 결국 자민당 의석이 줄어들어 단독과반 확보에 실패하고 오히려 민주당에게 비례대표 1당을 빼앗겼다. 그래도 연립여당까지 합해서 275석으로 절반을 넉넉하게 넘었기 때문에 정권을 안정적으로 연장할 수 있었지만 이듬해인 2004년 참의원(상원) 선거에선 민주당이 50석을 확보하며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의 기존 야당 최대였던 사회당 기록을 깨고, 자민당은 49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패배를 기록한다. 이렇게 두 차례 연속 선거에서 부진한 성적표를 보인 탓에 장기집권 여부는 불확실해졌고 당내에서도 점차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우정선거 직전에 치러진 2005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도 자민당은 연립정당인 공명당과 합쳐서 과반을 획득했지만 어쨌든 의석수가 줄어드는 등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썩 좋지 못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을 뒤엎기 위해 단박에 승부수를 던지는데...

2005년 8월 8일 중의원(하원)에서 통과된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민주당이 다수당인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참의원 부결 30분 만에 내각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고, 중의원 해산결의에 서명을 거부한 시마무라 요시노부 농림수산성 대신을 파면시키는 패기를 보인다.(...) 이른바 우정 해산. 이 도박으로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정국을 뒤엎고 지지율이 급상승, 9월 11일 제44회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296석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1986년 중의원 선거 이래로 최다 의석수를 확보한 것이었다. 우정 해산 과정을 서술한 엠팍의 한 게시물.

이후 자민당 총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2006년 9월 20일 일본의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자민당 제21대 총재로 선출되면서 내각 총사퇴 후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마친 몇 안 되는 케이스.

정책적인 면에서는 지금도 제법 회자되는데, 일본 역사에서 손꼽히는 리버럴리스트였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고이즈미의 기본 기조는 작은 정부였으며, 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정치성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 많았다. 모리 요시로 총리가 대표적. 그러나 신자유주의 성향의 리버테리안들과 친미 기조 아래 '북일 정상회담'[5] 등 외교정책에서의 지지층도 있었기에, 이들을 결집시켜서 우정 민영화나 천황의 여계 혈통 인정 등 일본의 내부적인 개혁 안건을 추진하기도 했다. 일본 같은 폐쇄적인 나라에서 고이즈미 같은 (일본 기준) 개혁 소장파(?) 성향 인물이 총리직을 오래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결과, 복지 혜택이 축소되고 많은 분야에서 불평등성이 심화되었다는 평가 역시 나온다. 특히 고이즈미 임기 만료 후, 이러한 폐단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고이즈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친미 일변도 정책 역시 안티들은 '부시의 푸들', '부시의 들러리'라고 비꼬기도 했다.[6]

3.3.1. 北日 정상회담

북핵문제로 인한 고립을 돌파하기 위해서 2000년대 이후 개혁개방적 면모를 한창 보이던 김정일은 2000년 6월, 한국김대중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같은 해 9월에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10월에 러시아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각각 회담을 마쳤다. 하지만 조지 W. 부시가 예상을 깨고 앨 고어를 꺾고 당선 되면서 상황은 뒤집힌다.

그러나 북한의 평화공세는 계속되었고, 결국 2002년 9월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와 일북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당시 김정일은 고이즈미에게 "남한에 8억 달러 줬으니 우리에게도 오른 물가 따져서 100억 달러는 줘야 한다"(...)면서 속마음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했다. 중국처럼 쿨하게 포기하고 뒤로 이리저리 챙기는게 폼은 더 날텐데

그런데 북한의 납북 일본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 사회가 들끓기 시작한다.[7] 요코다 메구미(橫田めぐみ)의 부모를 비롯한 납북자의 가족들이 연일 시위하면서 납북 일본인 귀국을 촉구했고, 이에 고이즈미는 "납북 일본인의 존재를 밝히고 사죄하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른다. 생소한 일본의 역사죄 드립 이에 당혹한 김정일은 "오후에 대답하겠다"고 자리를 피한 다음, 결정을 내렸는지 그날 오후 일본인 납북 문제를 시인하고 사과한다.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던 김정일이 한발 물러선 것이다. 납북자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요코다 메구미의 경우에는 죽었다고 둘러대면서 실체가 불분명한 유골만 돌려주었지만.

허나 북미 관계가 개선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이즈미 내각이 북한과 수교를 서둘러봤자 얻을 것보단 잃을 것이 더 많아보였고, 이런 모험을 할 수 없던 고이즈미에 의해 결국 북일수교는 무산되고 만다. 당연히 북한은 제2의 경술국치, 제2의 을사조약 운운하면서 길길이 날뛰게 된다. 이후 지금까지도 북한과 일본은 납북자 문제를 가지고 지리한 외교적 공방을 벌이면서 관계개선은 올스톱된 상태이다. 한편, 고이즈미도 일본에선 납북자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북한 칠보산 송이를 받아온 일은 "납치된 국민이 아니라 송이버섯을 가져오다니, 제정신이냐?"는 식으로 한동안 일본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3.3.2. 주변국들의 어그로와 고이즈미 담화

파일:external/image.pressian.com/40060815112550.jpg
일단 고이즈미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를 참배하였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는 2001년 8월 13일 첫번째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내가 신사에 구애를 받거나 집착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수상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자가 온 정성을 다해 신사에 참배를 했을 뿐이다. 나라들의 반발과 입장도 고려해서 부득이 오늘(2001년 8월 13일) 참배한 것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즉, 그래도 주변국 신경써서 8월 15일에 안 했다는 소리.(...) 이에 빡쳤는지 중국의 경우, 2차 참배 이후로 고이즈미의 중국 방문을 거부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논란과 관련해서도 한국의 재수정 요구에 '일본 역사교과서는 별 문제가 없다(?)'는 부정적 입장을 밝히는 한편, 자위대의 집단 자위권 용인 등 보수 우경화 정책을 시도하기도 했다. 덕분에 일본 우익층에선 호감을 샀지만, 반대로 일본내 양심 세력이나 주변국들에겐 제대로 어그로를 끌었다. 일본내에선 그래도 소장파 소리 듣던 고이즈미에 대한 환상이 깨지던 순간. 이에 대해 자민당 내부의 강경우익을 비롯한 고이즈미 반발 세력 약화와 선거에서의 보수층 결집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는 약간 다른 방법을 택한 것에 가까웠던 것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으나, 아래 발언들을 보면 진심으로 행동했을 개연성도 충분해 의구심이 들긴 한다.

그러던 와중 패전 60주년이었던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는 뜬금없이 기존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답습, 계승하는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다.
일본국은 일찍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행위로 인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국민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 재차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지나간 전쟁으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담화 전문

그리고 앞선 그해 정월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미루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내각내 반대 탓도 있었고, 여론도 좋지 않았으며,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등도 반대했기 때문. 그렇게 2005년엔 안가는가...했는데, 결국 2달 만인 10월 17일 개인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강행하였다(...). 개버릇 남 못준다 우정 해산 이후 승리에 따른 자신감으로 풀이되었다. 덕분에 같은 해 12월에는 국제무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관련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파일:Tnap2Hs.png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경우)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가 이웃에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해 일체의 추모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독일은 일부 영토까지 포기할 정도로 역사인식을 철저히 청산했다. (역대 공동체 발전은) 과거 질서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 기초해야 한다."
"한 명의 국민, 총리로서 자국 시설에서 평화를 빌고 전몰자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을 비판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2005년 12월 14일, 대통령 노무현 - 총리 고이즈미 설전 내용.

그럼에도 정신 못차렸는지 아예 임기 마지막 해인 2006년에는 쐐기를 박았다.(...)
일국의 수상이 내 나라에 있는 신성한 신사에서 수상 명의로 참배하는 것이 뭐가 그리 거슬리거나 잘못되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고로 반대 세력들이 제발 좀 내정간섭이나 신사참배 가지고 뭐라고 안 했으면 좋겠다.
-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이후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 추도시설로 쓰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던 고이즈미였기에 더 이해가 안되는 부분. 만들어놓고 둘 다 참배했을지도

3.4. 퇴임 후: 정치적 제자와의 충돌

보수주의자로 유명했던 그가 2010년대 들어선 원전 반대를 외치고 다녀서 아베 신조와 자민당 인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시사 잡지 '프레지던트'의 창간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고이즈미는 "인간이 원자력을 제어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이 원전 제로를 결단해야 한다'"고 역설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본 사회민주당과의 좌담 강연회에서는 "(기술 문제와 관계 없이) 국민과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원전 제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며 원전에 대해서는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사실 고이즈미는 총리 재직 시절만 해도 원전 찬성론자였는데, 2013년 8월 핀란드방사성 폐기물 최종처분장을 방문한 뒤 지하수가 많고 지반이 불안한 일본에서 원전을 통제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탈원전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직후 터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도 큰 영향을 줬을듯.

그렇게 아베 내각과 각을 세우다 결국 2014년 1월 14일엔 탈원전을 기치로 하여, 2월 9일에 있을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선 호소카와 모리히로 후보를 전격 지지 선언. 참고로 호소카와는 전 일본 총리로 비 자민당 출신 총리다. 이런 배경엔 정치적 스승인 자신의 탈원전 조언을 아베 신조가 무시한 채 중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원전 세일즈를 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전직 스승 총리 vs. 현직 제자 총리 구도가 되어 언론에서 주목을 받았고, 자민당은 고이즈미 전 총리의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를 자민당 유세에 투입하여 부자대결 식으로 맞불을 놓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신지로가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고이즈미와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원전 이슈를 희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런데 선거 결과 자민당 후보가 막강한 화력을 등에 업고 호소카와 후보를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앞서며 고이즈미 망했어요가 되고 말았다. 고이즈미 퇴물설. 근데 호소카와가 우쓰노미야랑 야권 단일화 안 한 것도 컸다.

자민당의 관계자는 고이즈미가 아베를 흔들려고 이런다기보다는 자민당 내에 친원전 의원들이 아베에게 원전 재가동을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스처로 본다고 지적했다. 어찌 되었든 당의 원전 재가동 정책과는 정반대의 행보라 "그냥 말을 말았으면" 하는 반응이 대다수. 그의 아들인 신지로를 비롯해서 유력 인사들은 고이즈미의 발언과 자민당 사이에 선긋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베와는 우정 민영화 철회 등으로 정책적 골이 상당한지라 고이즈미의 행보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2016년 현재도 원전 반대 운동에 열심인 듯 하다. 5월에는 미국 강연에서 "동일본 대지진 당시 구호작전에 나섰다가 피폭당한 미군을 도와야 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같은 때 일본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아베 신조 총리와 만났는데, 대화 주제 중 하나가 부시와 고이즈미와의 추억이었다고 한다. 아베가 고이즈미 정권 당시 관방장관 출신이라 그런 듯 한데, 원전 문제로 둘 사이가 (조금은) 껄끄러운 점을 감안하면 미묘하다고나 할까.

사실 고이즈미의 성향 자체가 완전히 통일된 게 아니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데, 정치/경제적으로는 좀 더 보수적인 성향이나 사회적인 문제에선 진보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우체국 민영화야 개혁은 개혁이래도 경제적으로 봐서는 약간 보수적인 시각이겠으나, 천황의 여계 혈통을 인정하는 방안을 고려했던 사람도 고이즈미였다.[8]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경제적으로도 마냥 보수적 성향이라기보단,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리버럴 성향이 드러난다고 일본내에서 평가받았던게 고이즈미였다. 애초에 고이즈미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자이고, 사회 분야에서도 시민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자민당 총재직 역임 당시, 파벌 정치에 반대하고 자민당을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판 개혁보수? 하지만 과거사 망언으로 빛이 바랬다.[9][10]

2019년, 아베 내각하에서 환경상이 된 아들에게 본인의 여망을 담아(?) 원전을 없애달라는 덕담을 꺼냈다.#

4. 성격

일명 '헨진(変人:괴짜)', '일언거사(一言居士)'로 불리는 등 파격적이고 독설적인 언동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한국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헤어스타일이 이를 말해준다,)

이 성격 문제 때문에, 그의 아내였던 미야모토 카요코는 결혼한 지 4년 만에 3남 요시나가(佳長)를 임신하고 있던 중에 이혼을 당했다. 고이즈미 집안에 문제가 있다는 설도 자자하다. 또한 카요코는 이혼당한 후, 두고 온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11]와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12]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때마다 고이즈미가 거절해서 멀쩡히 살아 있는 어머니와 아들들을 생이별하게 만들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인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는 소문.[13]

소설가 이케미야 쇼이치로에게 "오다 노부나가와 닮은 꼴"이라는 평가를 받고 대단히 흡족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의 열렬한 팬이라고.# 여담으로 이 소설가는 소설 <혼노지>의 작가로 이 사람의 소설 <혼노지>는 한국에 <난세의 파천황 오다 노부나가>라는 제목으로 정발된 바 있다.

5. 어록

출전은 일본어 위키인용집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문서. 그중에서도 대부분의 출처는 오가타 구니히코의 '괴짜 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이다.
  • 주식을 갖고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만큼 의심을 받고 나쁘다고 말하니 도리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팔아버렸다. - 1989년 2월 각료 재산 공개 시
  • 복지를 담당하는 부서이니 노인에게도 이해가 되는 아름다운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하시오. - 1989년 3월 후생성 예산설명 시
  • 자민당이 증인심문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국회에 나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정치가라 생각한다. 나카소네는 좀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 - 1989년 4월 리크루트 사건 시
  • 일본/경제의 발전은 민간이 노력해서 성장해 왔다. 우정의 일은 관업(官業)이 민업(民業)을 압박하고 있다. 마찰이 있는 부서지만 부서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이 우선이다.
    - 1992년 12월 우정상 취임 기자회견 시
  • 진짜 칼을 뽑아서 행정개혁을 추진해 달라. 당신은 연습용 죽도를 흔들고 있다.
    - 1996년 8월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와 대담
  • 알기 쉽게 말하자면 부하가 책임을 지고 할복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1996년 11월, 뇌물 수뢰 의혹 후생성 사무차관 사직 승인 시
  • 후보자는 유권자를 고르지 못한다. 헌금을 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알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 1996년 12월 후생성 소관 공익 법인 정치단체로부터 뇌물 수뢰시
  • 행정개혁의 제일보는 정치가 자신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 1997년 9월 중의원 연속 재직 25년 표창 거부시
  • 새로운 부서의 이름이 너무나 가볍다. 노동복지성이라면 각의에 서명하지 않겠다. 내 목을 잘라 달라.
    - 1998년 1월 재편예정 명칭 반대 시
  • 보통 사람도 군인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은 괴짜(變人)뿐이다.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데 정계에서는 괴짜라고 평한다. 진짜 괴짜는 나가타 초다.
    - 2000년 7월 다나카 마키코의 보통 사람, 군인, 괴짜 발언 인용. 나가타 초는 일본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동의 이름으로 "일본 정치권"을 의미한다. 영국에서의 웨스트민스터, 한국 언론사가 사용하는 여의도 혹은 여의도정치와 비슷한 맥락이다.
  • 나는 괴짜라고 불리지만, 괴짜라는 것은 변혁하는 사람에 대한 칭찬이다.
    - 2001년 3월 파벌 소속 의원 모임에서
  • 스파게티! 마카로니! 소피아 로렌!
    - 미국 조지아 주 시아일랜드에서 개최된 제30회 주요국 수뇌 회담에 참가하여, 2005년 6월 9일 기념 촬영을 했을 때, 이탈리아 수상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기행. 베를루스코니는 기가 막혀했고, 기자단으로부터는 'Shame on You!'(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그는 이에 대해 '땡큐!'라고 대답했다. 참고로 베를루스코니 또한 버락 오바마에게 썬탠 드립(...)을 날리는 등, 망언으론 어디서 안 꿀리는 막장 정치인이다.
  • 나는, 지금, 국회에서 우정국 민영화는 필요 없다고 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다시 한번 국민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로 우정국의 일은 국가 공무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지. 민간인으로는 안 되는 것인지?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공무원 삭감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어떤 행정 개혁이 가능하겠습니까?
    - 중의원 해산 때의 총리 기자회견. 고이즈미나 다른 우파 정치인들이 보기에, 일본 우정청은 일본 국민들에게 철밥통 공무원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옥상옥식의 비효율적인 조직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관료주의로 인해서 많은 정권들이 어떻게든 손을 보려고 했지만 로비에 밀려서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민영화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의견 역시 존재.
  • 인생 가지가지, 회사도 가지가지, 사원도 가지가지 (人生いろいろ、会社もいろいろ、社員もいろいろ) -
    2004년 국민연금 미납 사실 때문에 곤혹을 치루던 와중에, 알고 보니 한 후원자의 회사에 적을 두고 거기서 직장인 신분으로 월급을 받고 연금보험료까지 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나자 한 소리. 덤으로 저 소리를 하면서 "당시 사장은 '자네 일은 의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회사에 출근한 사실은 없지만 나중에 중의원이 됐으니 사장 말대로 일을 제대로 한 셈"이라는 개드립을 날려 자민당의 지지율은 급전직하, 참의원도 패배(...). 결국 저 말은 2004년 최고의 유행어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원래 저 말은 시마쿠라 치요코(島倉千代子)의 노래인 "人生いろいろ"의 가사의 패러디(?)쯤 된다. 원래 가사는 "인생 가지가지, 남자도 가지가지, 여자도 가지가지"(人生いろいろ、男もいろいろ、女だっていろいろ). 고이즈미의 이 발언 때문에 시마쿠라 치요코는 2004년 연말에는 8년 만에 홍백가합전까지 출장하게 됐다.

고이즈미의 성공적이지 못한 결혼 생활을 비꼰 에로 어록이라는 것도 있다.(...)

6. 가족 관계

  • 외할아버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郞)
  • 외할머니 아야베 나오(綾部ナオ): 게이샤 출신으로, 마타지로의 본처였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 외할머니 이시카와 하츠(石川ハツ): 나오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 마타지로는 하츠와의 사이에서 요시에를 낳았다. 이후 하츠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3남매를 낳았다고 한다.
  • 아버지 사메지마 준야(鮫島純也): 결혼하면서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꿈.
  • 어머니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
  • 첫째 누나 고이즈미 미치코(小泉道子):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지만, 이혼하고 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왔다. 딸도 외가를 따라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 둘째 누나 고이즈미 다카코(小泉隆子)
  • 셋째 누나 고이즈미 노부코(小泉信子): 젊어서부터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밑에서 정치를 배웠고, 쭉 독신으로 살며 남동생 준이치로의 정치활동을 도왔다(정책비서). 준이치로가 이혼한 후로는 일상생활 또한 챙겼다고.
  • 남동생 고이즈미 마사야((小泉正也): 누나 노부코와 마찬가지로 형 준이치로의 정치활동을 도왔다(사설비서). 마사야의 아내는 이시하라 신타로의 아내인 노리코(典子)의 사촌 남동생의 딸이라고 한다.
  • 전처 미야모토 카요코(宮本佳代子): 에스에스(エスエス) 제약회사의 창업주 타이도 쇼잔(泰道照山)의 외손녀.
  •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小泉孝太郞)
  •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 3남 미야모토 요시나가(宮本佳長)

6.1. 가정사

1977년, 당시 35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1세의 미야모토 카요코와 맞선을 봤고, 당일 프로포즈를 받아(!) 다음해인 1978년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하였다. 하지만 카요코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던 외할아버지 쇼잔은 이 결혼을 반대했다. 고이즈미 일족은 제약회사 회장인 쇼잔으로부터 카요코가 물려받을 재산을 기대한 듯하지만,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한 카요코에게 쇼잔은 금전적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카요코는 금방 임신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이즈미 가문에서 여러 갈등을 겪었고, 결국 부부는 4년 후인 1982년에 이혼하였다. 당시 카요코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고, 첫째와 둘째는 고이즈미 일가에 두고 나와야 했다. 두 아이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져 고모들과 가정부들의 손에 자라며,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 준이치로도 맘 고생이 심했는지, "이혼이 결혼보다 10배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었다"며 이후 다신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건 카요코도 비슷했는지, 둘 다 이혼하고 [age(1982-01-0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쭉 독신으로 살고 있다.

파일:external/news.walkerplus.com/203567_400.jpg
장남인 고이즈미 고타로(小泉孝太郎, 1978년생, [age(1978-07-10)]세) #는 일본에서 드라마나 영화의 주조연급 배우로 활약 중이다. 대표작은 국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직장의 신의 원작인 파견의 품격(2007년작)인데, 파견사원을 물심양면 도와주는 사람 좋은 직장상사로 나온다. 재미있는 건 아버지 고이즈미 총리는 각종 노동법을 개악시킨 걸로 유명한데, 드라마 <파견의 품격>에서 고타로가 연기한 '사토나카 켄스케'는 노동법의 부조리에 괴로워 한다는 설정이었다는 점.(…) 물론 선역뿐 아니라 악역으로써도 활약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게 <변두리 로켓 (下町ロケット)>에서 주인공의 회사와 경쟁하는 대기업의 NASA 엘리트 출신의 사장으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압박하는 포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준이치로는 장남인 고타로가 자신의 선거구를 물려 받아 정치인이 되길 원했기에 배우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고집을 꺾지 못해서 인정해 줬다고. 또한 데뷔하기 전부터, 배우로써도 활약하였던 더 드리프터즈의 리더인 이카리야 쵸스케의 제자로 들어가서 연기를 배웠고, 사제 관계보다 나이차가 큰 형제 비슷한 관계로써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고이즈미 고타로는 아버지와 달리(…) 표정이 호감상이어서 한국 일드 팬들에게도 나름 인기를 끌었는데, 알고 보니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들(!)이라서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래도 정치 활동과는 거리를 두고 연기 쪽에 몰두하는 행보를 보이는 터라 국내에서도 크게 논란거리가 되진 않는다. 애초에 인지도가 적다 2010년대 들어선 미국 디즈니사 + 마블 코믹스의 첫 합작품인 빅 히어로 6에서 테디 하마다의 성우로도 활약했다.[14]

드라마 외에도 활약 중인데, 고시엔 등의 여러 스포츠 대회의 메인 캐스터로 자주 나오고, 예능에서는 선배 배우인 사사노 타카시와 함께 블랙마요네즈와 베키가 진행하는 "인간 관찰 버라이어티 모니터링"에 레귤러 패널로, 그리고 매주 다른 연예인들과 하룻밤을 지내는 예능인 모노모노 후타리에서 바나나맨과 함께 진행을 맡기도 했다.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0040701620007300_P2.jpg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1981년생, [age(1981-04-14)]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정계 은퇴 후, 지역구를 물려받았다. 원랜 장남인 고이즈미 고타로에게 지역구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고타로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길로 가면서, 차남인 신지로가 물려받았다. 2019년 8월 7일, 4살 연상의 전직 아나운서 겸 프리랜서 타키가와 크리스텔과의 결혼을 발표했다. 이미 임신 중이며, 2020년 초에 출산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타 고이즈미 신지로의 행보는 해당 항목 참조.

막내(3남)인 미야모토 요시나가는 부모의 이혼 후 출생하여 어머니 카요코의 곁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중학교까지는 일본에서 다닌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고등학교를 마친 후로는 귀국하여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했다. 아버지를 만나려고도 했으나 거부당했고, 어머니 카요코와 함께 친할머니 요시에의 장례식에도 참석하려 했지만 제지당했다고 한다. 카요코와 요시나가는 간곡히 애원하여 간신히 분향만 할 수 있었고, 분향이 끝나자 곧바로 쫓겨났다고. 이때 준이치로, 고타로, 신지로는 카요코와 요시나가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2016년 카요코의 인터뷰에 따르면, 2008년 고이즈미가 정계 은퇴하면서 차남 신지로에게 “집안일은 모두 네게 맡긴다. 3형제끼리 친하게 지내라.”라고 했고, 이후 3형제가 만났다고. 그리고 2013년 말 요시나가의 결혼식 땐 다섯 식구(본인, 전 남편(준이치로), 아들 셋을 말하는 듯)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로서 아들 교육은 나쁘지 않게 했는지 2남 신지로가 타키가와 크리스텔과 결혼한다고 발표했을 때, "개인적으로 정치인으로서 아버지를 본받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아버지로서는 아버지를 본받고 싶다"는 발언을 하기도 한 걸 보면, 정치인으로서 여러가지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자녀들은 제법 돌본 걸로 보인다.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2구) 자유민주당 103,381 (16.5%) 낙선 (5위)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2구) 자유민주당 122,188 (16.8%) 당선 (4위) 초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2구) 자유민주당 117,698 (14.5%) 당선 (4위) 재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2구) 자유민주당 105,125 (16.4%) 당선 (3위) 3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2구) 자유민주당 146,681 (17.5%) 당선 (2위) 4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2구) 자유민주당 115,274 (15.1%) 당선 (3위) 5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2구) 자유민주당 167,838 (20.8%) 당선 (1위) 6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2구) 자유민주당 168,997 (18.4%) 당선 (1위) 7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2구) 자유민주당 149,269 (16.5%) 당선 (2위) 8선[15]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11구) 자유민주당 118,955 (58.2%) 당선 (1위) 9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11구) 자유민주당 157,335 (69.0%) 당선 (1위) 10선[16]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11구) 자유민주당 174,374 (74.4%) 당선 (1위) 11선[17]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나가와 11구) 자유민주당 197,037 (73.2%) 당선 (1위) 12선[18]

8. 여담

파일:attachment/고이즈미 준이치로/kjk3111.jpg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 당시 벽에 고이즈미라고 적힌 문구가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아 당시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알고보니 합성이었다.(...)

파일:attachment/koizumi_1501581c.jpg
은퇴한 뒤인 2009년 대괴수배틀 울트라 은하전설 THE MOVIE에서 다름 아닌 울트라맨 킹의 성우를 맡아서 수많은 특덕후들을 충공깽에 빠뜨린 적이 있다.(...) 팬들의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

엘비스 프레슬리의 왕 팬으로 알려져 있다. 조지 부시와 함께 미국 방문 당시 엘비스의 저택인 "그레이스랜드"가 있는 멤피스에도 방문을 했는데, 여기서 프리실라 프레슬리(부인)와 리사 마리 프레슬리(딸)도 만났다. 그리고 그레이스랜드에는 엘비스가 살아 생전 쓰고 다녔던, 엘비스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선글라스가 유리관 속에 넣어져서 전시되어 있었는데, 고이즈미는 이것을 당당하게 꺼내서 쓰고 엘비스 춤을 흉내냈다. 엘비스 덕후들로서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역시 총리쯤 되면 저 유일무이한 아이템도 써볼 수 있고 좋구나!"라는 조롱과 부러움이 섞인 탄식이 나오는 장면이었다고. 당시 영상.

청년 시절에 한국 가수 계은숙의 열혈팬이라 팬클럽 회장을 맡았던 적도 있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팬 카페에 가입했다는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고이즈미는 1942년생이고 계은숙은 1962년생이라 계은숙이 데뷔했을 때 고이즈미는 이미 40대였다. 당시 40대면 엔카 들을법한 세대긴 하다. 이후 일본에 겨울연가 붐이 일었을땐 여주인공이었던 최지우를 만나 자신도 겨울연가 잘 봤다며 촬영지 남이섬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근데 최지우보다 작다

2천년대 한국 영화 청연이 친일 논란 등으로 흥행 실패를 하게 된 원흉이 준이치로의 외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임이 밝혀져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주인공 박경원을 후원해주는 일본인의 모델이 다름아닌 고이즈미 마타지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 물론 청연이 망한 원인은 이것 뿐만 아니라 애초에 주인공 박경원이 친일 행적을 한 인물이였고, 그 외에도 박경원이 조선 최초의 여성 비행사였다는 제작사의 언플이 실패로 돌아가는 등 여러가지 요인이 있긴 했다.

정치인 오자키 유키오를 존경해서 강연에서도 종종 그의 말을 인용한다고. 사실 그의 조부인 고이즈마 마타지로가 입헌개진당에 참가, 유흥회 시절에 오자키 유키오와 행동을 함께 한 바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세계의 정상들과 마작으로 승부한다는 헛쯔모없는 개혁이라는 만화가 있다.

한때 웹상에서 고이즈미를 로, 당시 고이즈미의 비서관이었던 이이지마 이사오를 으로 만든 일본의 BL동인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이한 헤어 스타일과 기행들로 알려져 있어서인지 해외에서는 일본의 마스코트격(?) 되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 내에서 나오는 CF들 중 일본인 캐릭터를 내세운 CF 중엔 고이즈미를 모델로 한 듯한 인물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아이돌 사변 애니메이션판 오리지널 캐릭터 중 메인 빌런(?)으로 보이는 앵개당 당수 사쿠라바 소이치로 의원의 외모가 고이즈미 총리와 판박이다.

의외로 외모에 대한 평가가 좋다. 하지만 키가.. 실제로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 그런데로 미남이기는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전자 덕분인지는 몰라도 슬하의 두 아들 역시 각각 배우, 훈남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는 이런 아버지의 후광을 제대로 받아 정치인으로선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차기 총리 후보로도 꼽히고 있다. 현실은 공사나 개인사 어느것 하나 뒤치지 않는 구설수를 문무양도로 만들어내고 있으며 아버지의 명성을 실시간으로 말아드시는 중이다

일본의 3대 폭력단 중 하나인 이나가와카이와 유착관계가 있다고 알려저 있다. 그의 10회나 연임한 선거대책본부장 타케우치 키요시가 이나가와카이 계열 요코스카카이의 조직원 출신이었고, 두목 이시이 타카마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

9. 틀 둘러보기


[ 역대 총재 ]
}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가나가와 11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4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제45~48대
고이즈미 신지로

[1]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오히려 평범(?)했다.[2] 여담으로 호사카 유지 교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 오부치 게이조 총리 사망 이후, 2천년대 접어들면서 자민당의 우경화가 심해지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고 있다.[3] 아베 신조는 총리로 처음 취임한 2006년 이전에, 직전 내각이었던 고이즈미 정권에서 관방장관을 지냈으며, 90대 일본 총리 지명 역시 당시 현직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원자력을 중요시하는 아베 신조와 탈원전을 주장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관계는 틀어져 현재는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자세한 건 후술.[4] NHK 제21대 회장. 아베 집권기 NHK를 우경화시킨 인물로 알려져있다.[5] 2002년, 2004년 2차례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때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6] 여담으로 같은 시기 노동당 출신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 또한 안티들에게 이렇게 까였다.(...)[7] 아베 신조 당시 관방장관 역시 고이즈미와 동행하여 2차례 평양을 방문했는데, 이때 그가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부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8] 1965년 이래 일본 황실에는 공주만 줄줄이 9명이 태어났고,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는 오랜 불임 끝에 2001년 겨우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그래서 여성 천황이나 여계 천황 허용도 검토했던건데, 2006년 나루히토 황태자의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이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를 낳으면서 유야무야 되어버렸다.[9] 굳이 변명을 하자면, 사실 이건 과거사 인식에 하자가 있는 인물들과 우익 유권자들이 넘쳐나는(이중 극단종자는 세키호타이 사건 같은 신문사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 정치판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겪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일왕이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발언했다 총격맞은 시장까지 있는 판국이니.. 21세기 들어선 이런 물리적 테러 행위 자첸 줄어들었지만, 넷우익들이 기승이다. 즉, 자기 정치 활동에 차질을 안 빚기 위해 개인적 소신과 무관하게 혹은 소신을 바꿔가면서까지 떠벌리는 측면도 있는 것.[10] 다만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일본에서도 이런 과거사 발언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은 많다. 주로 자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자민당내 비주류가 많아서 문제일 뿐. 물론 그 수가 적진 않다. 당장 2019년 참의원 선거만 봐도 정당 득표율만 보면 범야권이 4할에 가까운 득표를 했다. 게다가 범여권인 공명당도 과거사 문제에선 자민당 주류와 결이 다르다.[11] 배우로 활동 중.[12] 아버지를 이어 정치가로 활동 중.[13] 다만 후술되어 있듯, 2013년에는 3남의 결혼식에서 온 가족이 30년만에 처음으로 만났다고 한다.[14] 여담으로 원판 성우가 한국계 미국인 배우로 유명한 다니엘 헤니였다. 뭐, 한국인 캐릭터라는 고고도 한국계 미국인 배우 제이미 정이 녹음하고, 일본에서는 일본 성우 아사노 마스미가 녹음했지만.[15]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6] 1차 내각.[17] 2차 내각.[18] 3차 내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