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7:37:45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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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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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식무대신 (1896~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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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시마 토모노스케
척무대신 (1929~1942)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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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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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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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고이소 구니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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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고이소 구니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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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오카 요스케
제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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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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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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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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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fff 일본 제국 제58·63대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東郷茂徳 | Tōgō Shigenor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Shigenori_Togo.jpg
<colbgcolor=#003366><colcolor=#fff> 출생 1882년 12월 10일 
가고시마현 히오키군 이주인 나에시로가와무라#
(現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히가시이시키쵸미야마)
사망 1950년 7월 23일 (향년 67세)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 형무소
재임기간 제58대 외무대신
1941년 10월 18일 ~ 1942년 9월 1일
제63대 외무대신
1945년 4월 9일 ~ 1945년 8월 17일
부모 아버지 박수승, 어머니 박토메
배우자 에디타(Editha)[1]
자녀 장녀 이세
학력 도쿄제국대학 (독문학 / 학사)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약력 제58·63대 외무대신

1. 소개2. 집안 배경3. 생애
3.1. 외교관이 될 때까지3.2. 외교관 시험3.3. 결혼3.4. 고위 외교관으로서3.5. 최후
4. 여담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소개

일본외교관. 외무대신을 두 차례 역임했다.

한국계 일본인으로 조선에서 건너온 조선인 도공의 후손이다. 본래의 한국식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2. 집안 배경

임진왜란 당시에 종군한 일본군은 오늘날 같은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게 아니라 다이묘 휘하의 군인을 끌고 온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군사를 보내지 않는 등 다이묘마다 달랐다. 때문에 각자 속셈이 달랐고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조선인들을 납치했다. 특히 유학자나 도공 등이 이에 해당했다.

끌려온 도공들은 일본 내에서 게토처럼 조선인 커뮤니티를 형성했고, 19세기까지 조선어를 쓸 정도였다고 한다.[2] 그러던 것이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막부가 무너지고 일본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아이누, 류큐를 향한 동화가 이뤄지고 얼마 안 남은 조선인 커뮤니티도 이때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도고의 집안은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사쓰마 번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부대에 잡혀 사쓰마번으로 끌려 온 도공 박평의의 후손이었다.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은 도자기를 만들던 가업을 산업화하여 도자기를 외국에 수출하는 일을 하였으며, 어머니인 박토메 역시 조선인의 후손이었다.

3. 생애

3.1. 외교관이 될 때까지

1882년 12월 10일 가고시마현에서 태어났다. 1886년 아버지가 도고(東鄕)[3]라는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사들이면서 도고(東鄕)로 개성(改姓)한다.

도고는 소학교에 다니며 별도로 과외지도를 받았다. 사숙(私塾)의 선생님에게서 독서지도를 받은 것이다. 선생님이 책을 큰 소리로 읽게 하거나 책의 내용을 파악했는지 질문하는 식이었다. 도고는 이 시절 공자(孔子)의 논어(論語)를 그런 식으로 배웠다. #

1897년 열다섯 살이 된 도고는 가고시마 제1중학교에 입학한다. 히오키시의 고향마을을 떠나 가고시마 시내에서 하숙을 하고 방학 때 돌아오는 식이었다.

시게노리는 비록 성을 바꾸고 사족에 편입됐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오히려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었다. 천민부락의 이미지가 남아 있는 나에시로가와 출신의 가짜 사족, 조선 핏줄임을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외롭고 쓸쓸했다.

비슷한 처지의 동급생으로 농부 아들인 사키모토 요시오가 있었다. 그는 자라서 의사가 되었다. 요시오의 아들인 유키오는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

“시게노리와 특히 친하게 지낸 것은 어떤 동류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족의 자제들에 대한 대항의식이랄까, 저항감이 있었고 그 반동으로 우리 둘은 공부에만 매달렸다. 사족 아이들은 우리가 공부하는 것조차 싫어하고 이지메를 했으므로 우리는 데루구니(照國) 신사 경내같이 조용한 데 가서 예습과 복습에 열을 올렸다.”

사키모토 요시오가 아들 유키오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시게노리는 포켓용 영어사전을 늘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단어를 외웠다고 한다. 한 페이지를 전부 암기했다 싶으면 그 페이지를 찢어 삼키는 식이었다.

1902년 스무 살이 된 도고는 명문인 가고시마 제7고등학교에 입학한다. 7고는 이른바 "넘버 스쿨"로서, 학생들은 전국 7대 명문고 가운데 하나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넘쳤다. 명문 고등학교이기에 외지의 수재들도 몰려왔다. 도고의 동기 졸업생 87명 가운데 가고시마 출신이 2할, 그 외 규슈 출신이 2할로, 나머지 6할은 멀리 도쿄동북지방 같은 외지 출신이 차지했다. #

1904년 9월 도쿄제국대학 독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의 도고는 문학청년이었다. 그 후 병 때문에 휴학을 해 동기들보다 1년 늦은 시기인 1908년 7월 만 25세의 나이에 도쿄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한다. #

‘문학에는 재능이 필요하다. 영원히 남을 시인은 되지 못할 터이다. 실제 사회에 몸으로 부딪쳐 도전해보고 싶다. 이제는 딜레탕티즘의 문학을 떠나자.’ (만년의 자필 메모에서) #

3.2. 외교관 시험

외교관 시험을 치기로 결심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왜 같은 고시 가운데서도 외교관 시험이었을까. 우선 외국어에 자신이 있었고, 내무성 관료로서는 ‘핏줄의 장애’가 적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외무고시에 합격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길이었기에 스스로 벌어 수험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독문과 선배의 도움으로 메이지대 독일어 강사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수험준비를 했다. 그러나 두 번 연거푸 실패. 문과대 졸업생이므로 법대 출신에 비해 어려움이 있으리라 각오는 했지만, 이처럼 연속해서 낙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물고늘어졌다. 시간강사 수입으로는 돈이 궁해 문부성의 자료편찬실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더운 여름이면 시원한 고산지대인 가루이자와(輕井澤)까지 가서 책을 파고들었다. 이 가루이자와의 추억, 쓰루야(鶴屋)라는 여관에서의 고시공부에 매진하던 추억을 그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 만년에도 심신이 지치면 늘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세 번째 응시에서 마침내 합격. 1912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

파일:external/showwa-kao.com/s-tougo3.jpg
1912년(다이쇼 원년), 3수 끝에 30세의 나이에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에 합격했다. 도고는 집안의 도움없이 아르바이트를 뛰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는데, 외교관 시험을 준비할 때도 낮에는 메이지대학에서 독일어 강사를 하고 저녁엔 공부를 하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수험기간이 길어진 것이었다. 위의 사진이 외무성 합격이 결정된 뒤에 본가로 내려와 찍은 사진으로 제일 왼쪽의 외무성 관료의 예복을 입은 사람이 시게노리이다.[4]

외교관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자 아버지는 본적을 옮겨 조선인 출신이란 흔적을 없앴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내적으로 급변한 적이 없어서 과거에 어디가 천민들이 살았고 사족들이 살았는지 추적이 가능하다. 부라쿠민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조선인들의 후손은 조선인 후손끼리 마을을 이뤄 살았기 때문에 어느 마을 출신이냐로 구분이 가능했다. 때문에 이는 나중에 무덕이 출세할 때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아버지의 배려였다.

3.3. 결혼

40세가 될 때까지 결혼하지 못했는데, 일본인과 결혼하려고 할 때마다 혈통 문제로 실패했다고 한다. 1919년 독일 베를린에 파견되었는데, 거기에서 5살 연하인 유대계 독일인 에디타 데 랄란데(Editha de Lalande, 1887-1967)를 만나 1922년에 결혼한다. 그녀는 조선총독부의 설계를 맡았던 남편 게오르크 데 랄란데(Georg de Lalande) #와 사별한 4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을 둔 과부였다.

아내는 결혼하면서 이름을 도고 에지(東郷エヂ)로 바꾸었다. 에디타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파일:external/d.hatena.ne.jp/1945-01-10.jpg

파일:ST3TMNb.jpg
딸과 아내와 찍은 사진. 데릴사위를 두어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5]로 자기 호적에 올린다. 사위도 외교관을 지냈고 1975년에 일본의 외무차관으로서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3.4. 고위 외교관으로서

1923년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937년 독일 대사가 되어 다시 독일에 부임했다. 그러나 아내가 유대인이었기에 나치 독일에 부정적이었고, 나치 독일과 동맹을 원했던 군부에 의해 독일 대사에서 물러났다.

1938년 소련 대사로 부임하였다. 재직시 할힌골 전투의 정전협정을 맺었고, 소련이 장제스 지원을 포기하는 대신 사할린을 소련에 넘기는 조건으로 소일 불가침 조약을 추진하기도 했다.[6]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이 출범하면서 외무대신으로 입각한다.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점령지에서 철군하는 것을 기초로 한 협상안을 마련했으나 군부가 반대했고 미국도 강경한지라 무산되었고,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다.[7] 그후 도조 히데키가 척무성을 폐지하고 대동아성이라는 부서를 만들려고 해서 마찰을 빚다가 외무대신을 사임했다.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에 다시 외무대신으로 입각한다. 스즈키는 전쟁 종결처리야말로 줄곧 전쟁을 반대해 온 도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도고를 외무대신에 임명했다고 한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핵무기가 투하되고 소련이 참전하자, 도고는 국체보존, 즉 천황제만 남기고 다 양보하는 항복을 주장했고 # 총리인 스즈키 간타로와 천황인 히로히토는 이를 받아들였다. 도고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으로 유임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여겨 고사하였고 뒤는 시게미쓰 마모루가 잇게 된다. 따라서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서에 사인을 한 것도 후임인 시게미쓰 마모루다.

3.5. 최후

1946년에 5월 1일 전범으로 기소되었고 진주만 공습 직전에 거짓 협상을 벌여 연합군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아 20년형을 받아 수감됐다. 이후 1950년 수감 중에 사망하였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파일:lL6STb1.jpg
1949년, 면회 온 외손자들(가즈히코, 시게히코)

4. 여담

  • 일본의 극우들은 그의 예를 들어 일본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소수민족으로서 성공한 극소수의 케이스만을 근거로 들며 소수민족 전반에 대해 대우를 잘 해주고 차별이 없었다는 식의 주장이다. 도고를 싫어하는 극우들도 많고 특히 재특회가 그렇다. 도고가 전쟁을 반대했다는 점, 조선인 도공 후손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손자가 반극우 인사라는 점이 그 이유이다. 식민지인이라면 부사관 이외에는 출세의 길이 없었던 유럽의 식민지 지배 시스템에서도 왕족이나 귀족출신은 예외로 사관학교입학이나 고등관료가 될 기회가 주어져 출세할 길이 있었다. 즉 출세한 사람이 있다고 차별이 없다는건 말이 안된다. 그리고 도고 시게노리의 조상들이 사쓰마국으로 납치된건 무려 16세기 정유재란 당시에 벌어진 일이다, 약 300년 전의 조상때문에 아직도 외국인 취급 받았다는게 오히려 인종차별이 심했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 보수당의 대부인 디즈레일리의 가족은 그의 조부때 영국으로 이민왓지만 아무도 그를 두고 이탈리아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 도고가 당시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인 최초로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장철수를 개인적으로 불러 격려하고 술도 같이 마신 걸 보면 친근하게 느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 조선인 도공의 후손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국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으며, 다큐멘터리나 서적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파일:external/bimage.interpark.com/209354348s.jpg
  • 사위이자 양자인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 1915~1985)는 1970년대에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육영수 저격 사건 등으로 한일관계가 경색에 빠질 때마다 외교관으로 분주하게 노력했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려고 했을 때 반대한 사람도 이 사람이다. 미일관계에도 공헌했다. 후미히코는 나중에 북미국장을 지내는 동안 1969년 미국과 일본 사이의 오키나와 반환교섭 실무책임을 맡았다. 당시 미일 공동성명에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도 긴요하다’는 구절을 넣어 큰 정치적 반향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 외손자인 도고 가즈히코(東郷和彦, 1945-) 역시 외교관이었으며 서울대학교에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 즉, 3대가 외교관이다.
    파일:external/blog-imgs-52.fc2.com/20120910021423d2e.jpg
  • 가즈히코의 쌍둥이인 시게히코(茂彦)는 아사히 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근데 시게히코 이 인간은 인성 면에서 문제가 많은데 알려진 것만 1973년, 1998년, 2001년에 치한 행위로 체포됐다.
  • 도고 시게노리의 손자들인 가즈히코와 시게히코는 각각 아들이 둘씩 있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

  • 2008년, TBS에서 1부 다큐멘터리와 2부 드라마로 구성된 2부작 특집극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 개전과 도조 히데키'(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条英機)를 방영하였다. 도고 역은 배우 하시즈메 이사오가 맡았는데, 역사대로 온건파에 전쟁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 NHK 대하드라마에도 등장했다. 1984년작인 산하 타오르다(山河燃ゆ)가 그것. 가상의 인물이 주인공인 작품에서 역사상 실제인물로 비중있게 나온다. 츠루다 코지가 맡았다.

[1] 유대계 독일인이다. 도고 시게노리와 결혼한 후 이름을 에지(エヂ)로 바꾼다.[2] 다만, 조선 통신사가 와도 이들의 정체를 숨겼다는 에도 막부였으니 카쿠레키리시탄 못지 않게 본토의 조선어와는 다른 조선어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3] 가고시마에서는 흔한 성으로, 도고 헤이하치로와는 관계가 없다.[4] 외교관, 특히 해외에 파견되는 외교관들이 제복을 입지 않게 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말에나 보편화된 현상이다. 그 전까지 외교관들의 화려한 제복은 국력의 과시의 일환으로 일상적으로 지급되었고, 현재도 많은 나라의 외교관들은 사복을 입지만 대신 무시당하지 않도록 고급 의류를 입고 다닐 수 있게 품위 유지비를 많이 지급받는다.[5] 사위의 결혼 전 성은 혼조(本城).[6] 도고가 추진하던 불가침 조약은 체결되지 못했고, 후임자가 새롭게 소일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7] 그 와중에 주미 일본대사관은 선전포고를 공격 뒤에 전달했고 이로 인해 도고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