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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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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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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전투
南原城戰鬪
시기 1597년 9월 22일 ~ 25일
(음력 8월 12일 ~ 15일)
장소 조선 전라북도 남원
원인 정유재란 시, 일본의 전라도 진공(進攻)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400px-Left-facing_dragon_pattern_on_Wanli_Emperor's_imperial_robe.svg.png
명나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조선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모리 카츠노부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
오타 카즈요시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이복남† 전라 병사
이춘원 광양 현감
이원춘† 구례 현감
김경로† 조방장
마응방† 진암 현감
오응정† 방어사
임현† 남원 부사
오응정[1]† 순천 부사
이덕회† 판관
정기원† 접반사
황대중† 의병장
신호† 별장
조경남 의병장
명나라
양원 부총병
이신방† 중군
장표† 천총
생승선† 천총
병력 조선 56,000 명
전라 병마군 1,000~5,000 명
남원 군민 6,000~7,000 명
명나라
3,000 명
피해 방어군 궤멸, 군민 몰살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일본군의 대승리, 남원성 함락.
영향 일본군, 호남 곡창 지대 장악 및 수륙병진 가능.

1. 개요2. 배경3. 전투 전개
3.1. 8월 12일3.2. 8월 13일3.3. 8월 14일3.4. 8월 15일3.5. 8월 16일
4. 결과5. 만인의총6. 여담7. 기타

[clearfix]

1. 개요

정유재란중 전라도 지역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전투. 연합군과 일본군이 전라도의 운명을 걸고 싸웠다.

파일:attachment/namwon1.png
▲현재 지도 상에서의 남원성[2]과 교룡산성[3]의 위치.

2.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중에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를 미리 점령하지 못해 일본군이 승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음력 2월 21일에 전라도를 우선 점령하라는 명령서를 작성해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 장수들에게 하달했다. 14만 병력으로 편성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8월부터 우군과 좌군으로 나누어 전라도로 진격을 시작했다. 이미 7월 15일에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전라도로 수월하게 진군할 수 있었다. 우군은 총사령관 모리 히데모토,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쵸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끄는 총 73,700명으로 편성되어 서생포에서 출발해 밀양, 합천을 거쳐 황석산성으로 진군했다. 좌군은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로 편성되어 웅천에서 출발해 진주를 거치던 중 사천에 상륙한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수군과 합류해 총 56,000명으로 편성되어 구례를 경유해 남원으로 진군했다.

남원은 지리적으로 경상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오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전라도를 점령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남원에는 5월에 한양을 출발했던 부총병관 양원이 이끄는 명군 3천여 명과 접반사로 따라갔던 예조참판 정기원, 군기시에서 파견한 파진군[4] 12명과 남원부사 임현 및 주민 7천여 명이 있었다. 양원은 남원읍성에 주둔하며 성벽의 성가퀴를 올리고 남원읍성 바깥에 참호를 파는 등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8월 7일 일본군은 구례현감 이희춘이 이끄는 조선군 수백명을 물리치고 구례를 점령한다. 패한 이희춘은 남원에 들어와 이 소식을 전했고 양원은 전주에 주둔한 유격 진우충과 순천에서 일본 수군을 견제하던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병력을 이끌고 남원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낸다. 8월 9일 일본군은 현재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견두산에 있는 둔산령을 넘어 여러 마을들을 파괴/약탈하며 남원읍성으로 다가갔다. 8월 10일, 양원은 남원부사 임현에게 남원성 북쪽에 있는 교룡산성에 있는 가옥들과 남원읍성 주변에 있는 가옥들을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만 급하게 소각하느라 일부 가옥들이 철거되지 못하거나 흙벽이 남아있는 가옥들이 있었다.

3. 전투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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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군의 남원성 공성 작전도.[5]

3.1. 8월 12일

남원 교외에 진을 친 일본군은 정찰 병력을 파견해 남원성의 방어 태세를 살펴보았다. 이무렵 전라병사 이복남도 1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원성 인근에 도착한다. 원래 이복남 휘하에는 병력 3천여 명이 있었으나 남원으로 오는 도중 군사들이 도망을 쳐 군관 50명만 남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복남은 이들을 데리고 옥과현에 있는 조창을 불태우고 서창을 불태우다가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광양현감 이춘원, 방어사 오응정이 이끄는 병력을 만나 다시 1천여 명으로 불어났던 것.

이복남은 이들을 데리고 나팔과 태평소를 불고 북을 치면서 만복사 앞 대로를 따라 일본군 사이를 지나가며 남문으로 들어갔다. 일본군도 놀라서 공격을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이때 일본군이 조선인 포로들한테 "저 사람은 누구이기에 저렇게 당돌하냐?"라고 물어보자 조선인 포로들이 “전라병사 이 아무개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남원성에 들어온 조선군 1천여 명은 남원성 북쪽에 배치되었으며 동문은 중군 이신방이, 남문은 천총 장표가, 서문은 천총 모승선이 명군 병력을 데리고 배치되었다.

3.2. 8월 13일

방암봉에 진을 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 아래 일본군은 3갈래 길로 진군하였으며 북문은 시마즈 요시히로, 동문은 하치스카 이에마사, 남문은 우키다 히데이에, 서문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맡기로 하였다. 오후 12시에 일본군 병사 5명이 동문 돌다리에 서서 조명 연합군을 모욕하며 도발을 걸었다. 이에 양원이 이복남에게 활 잘쏘는 병사를 뽑아 일본군 병사를 사살하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복남은 왜놈은 총으로 잡아야 한다며 부하들을 시켜 총으로 3명을 사살했다.

오후 2시에 일본군 일부 병력이 다가와 조총으로 사격을 가하자 조명 연합군은 조선군의 대완구로 비격진천뢰를 쏘았다. 일본군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양원은 밤에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돌다리와 성곽 주변에 마름쇠를 깔았다.

3.3. 8월 14일

일본군은 남원성을 완전히 포위한 다음 본격적인 공성 준비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주변에 있는 민가와 절을 부숴 나온 재목으로 사다리를 만들고 민가 초가 지붕을 베고 모아 짚단을 만들어 참호를 메웠다. 또한 민가에서 판자를 가져와 나무에 기대고 성 주변에 남은 흙벽에 총구를 만들어 조총을 쏘아댔다. 성 동남쪽에는 큰 장대를 세워 성안을 굽어다보며 조총을 쏘았는데 이때 명군이 많이 쓰러져 동남쪽 성가퀴에 공백이 생겼다고 한다.

오후 12시에 일본군은 고함을 치르며 돌격하고 조총을 쏘아대며 공격했다. 이때 서문에 있던 일본군은 만복사에서 사천왕성을 가져와 성 주변을 돌아다니며 무력 시위를 했다.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에 양원은 기병 1천여 명을 이끌고 돌다리 밖까지 출격했으나 잠복하던 일본군의 공격에 피해만 입고 돌아왔다.

3.4. 8월 15일

일본군은 잡초와 벼를 베어 묶으며 큰 풀단을 만들어 쌓아두었는데 성안 사람들은 무엇에 쓰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조명 연합군은 전주에 있던 진우충이 2천여 명의 병력을 데리고 구원해 줄 것을 기다렸으나 진우충은 적이 너무 많다며 안 오고 있었다. 조선 측에서도 전라감사 황신이 변산반도로 피난가고 도사 김순영이 이끄는 소규모 조선군이 남원으로 가다 적성진에서 일본군에게 패해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양원은 동문에서 바라를 두어 차례 울리고 사람을 시켜 성 위에 올라가 두어 번 크게 소리치게 했다. 이를 듣고 일본군 군사 다섯 명이 동문 밖에 나와 전갈을 청하였다. 양원은 통역관을 시켜 몇 마디 주고받았고 일본군 군사들이 방암봉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몇 마디 말을 전했다. 그 자리에서 양원은 부하 두 사람을 내보내니 일본군 군사들이 그들을 데리고 방암봉으로 갔다. 이후 명군은 고니시 유키나와와 만나 대화를 하고 고니시는 명군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저녁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낸 일본군 군사 5명이 양원을 찾아오자 양원은 이들을 용성관 자기 처소에 들여 접견하였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일본군 장수들이 양원에게 성을 비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양원은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장수가 되어서 천하를 다니면서 싸워서 이기지 않은 전쟁은 없었다. 이제 정예한 군사 십만을 거느리고 와서 이 성을 지키고 있는데 물러나라고 하니 가소롭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일본군은 “천여 명 패잔병이 어찌 능히 백만의 군사를 당해내겠소. 명나라 장수가 조선에 무슨 은혜를 입었다고 후회할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응수했다고.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늦은 밤에 풀단으로 해자를 메우고 큰 풀단을 쌓기 시작했다. 큰 풀단이 쌓여 성벽을 타고 오를만한 높이가 되자 일본군은 풀단을 딛고 일제히 성벽 위로 올라가서 공격하기 시작했고 성안으로 넘어가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순식간에 성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조명 연합군은 주민들과 함께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낼수가 없었다.

3.5. 8월 16일

일본군 공격은 더욱 거세져 새벽 2~3시가 되자 남문과 서문이 일본군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명 연합군과 주민들은 혼란에 빠져 북문으로 몰렸고 양원은 휘하 기병 50~170명을 데리고 남원성을 탈출하였다. 이때 접반사 정기원이 양원을 따라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추격해온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성안에 남은 조선군은 이복남의 진두지휘 하에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색이 짙어져 이복남, 오응정[6], 김경로, 이원춘, 임현은 화약 창고를 불태워 자폭해 자결하고 남은 조선군 병사들도 전사하였다. 성안에 남은 명군 역시 조선 군민과 같이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주민들이 마지막까지 항전을 하지만 이들도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만다.

이때 조명 연합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일본군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7] 남원성 전투를 종군했던 일본 승려 쿄넨이 8월 16일자 '조선 일기'에서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기록하며 당시의 참상을 전하고 있을 정도다. 결국 이렇게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4. 결과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격 진우충과 전주부윤 박경신은 휘하 병력을 데리고 바로 전주에서 도망쳐버렸다. 덕분에 일본군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남원성이 함락된 날 일본군 우군도 황석산성을 점령한 뒤 전라도로 진군하여 결국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이자 평야지대인 전라도도 일본에게 점령당하였다.

이후 전라도는 일본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는데 일본군 좌군은 한동안 전라도 각지를 다니며 학살/파괴/약탈을 벌였고 이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붙잡혀갔다. 별도의 일본군 우군은 북상을 시작해 충청도 직산에 이르게 되었을 때 직산 소사평에서 구로다 나가마사가 부총병 해생이 지휘하던 명군 기병 부대에게 패하였고, 바다에서는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이순신에게 박살나면서 보급로가 차단될까 우려한 전 일본군은 전라도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5. 만인의총

전라북도 남원시 만인로 3 (향교동)에 위치한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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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일곱 충신(정기원, 이복남, 임현, 김경노, 신호, 이덕회, 이원춘)의 충절을 기리고자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1612년(광해군4년) 사당을 건립하여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으며 1653(효종4년)에는 충렬사액이 있었고 1675년(숙종원년)에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한 뒤 1836년(헌종2년) 사헌부지평 오흥업을 추배하니 8충신이 되었다. 다만, 만인의총 내부에 묘가 있으나 시신이 없는 허묘이다.

그러다 1871년(고종8년) 사우 훼철령에 의거 사당이 철폐되어 제단을 설치하고 춘추로 향사하여 왔다. 그러나 일제가 제단를 파괴, 재산을 압수하고 제사마저 금지하였다. 시신을 수습했던 북문 근처는 일제강점기에 남원역이 세워졌고, 증기 기관차 시절에 쓰다 버린 석탄 찌꺼기 따위를 합장한 곳에 버리는 바람에 이장 당시에 유골을 발굴하려고 했으나 폐탄 찌꺼기만 나와서 어쩔수 없이 허묘로 지었다고 한다. 전라선을 복선화하면서 이설했을 때 남원역동충동에서 신정동으로 이전한 것도, 경주역신경주역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동해선경주시 외곽으로 이전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현재의 신정동 남원역 남동쪽에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된 만복사지가 남아 있다는 점은 여전한 상처다.

그러다 광복과 더불어 다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모셔오다가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만인의총(구 남원역) 방문 당시 허술한 묘역을 보고 이장을 검토하도록 하여 1964년 현위치(남원시 만인로 3 (향교동))로 이전하였다. 1981년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2016년 5월 10일 전라북도에서 문화재청으로 관리이관되었다.

6. 여담

남원성 북쪽에는 교룡산성이 있는데 접반사 정기원과 남원부사 임현이 인근 다른 고을 백성들을 교룡산성에 넣어 지키자고 양원에게 건의를 했다. 그러나 양원은 "멍청하고 겁많은 너네들이 적보고 무너지면 어쩌려고?"라며 무시했다고 한다. 근데 원래 산성이 적과 맞서 싸워 지키는데 읍성보다 더 좋다. 실제로 남원에 보존되고 있는 교룡산성 터를 답사해보면 알겠지만 주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고, 경사가 매우 급해 방어하는 측에선 이만한 지형적 우위를 가지기가 어려울 정도다. 현재 남원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교룡산성으로 운동하러 간다거나 나들이 간다고 하면 얼굴이 핼쑥해질 정도로 격한 경사를 자랑한다. 남원성을 보수하러 온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교룡산성도 둘러보고는 "여기도 좋네?"라면서 같이 보수했을 정도이니... 남원성을 보강할 때도 기존에 있던 현안[8]을 다 막은 걸 보면 장수로서 능력이 떨어지거나 조선군을 너무 얕잡아본 듯 하다.

남원성 전투에서 도망쳐서 살아돌아온 양원은 훗날 명나라에서 처형당하고[9] 그 목이 조선에 조리돌림당하게 된다. 처형된 이유는 적전에서 도망친 것도 있지만 적과 내통한 혐의도 있는 듯 하다. 실제로 양원이 전투 도중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벌일 때 조명 연합군 사이에서는 양원이 남원성과 조선군 및 조선 백성을 대가로 명군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았다는 소문과 성이 함락되도 양원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이복남이 명군 중군 이신방에게 "이거 사실이냐?"이라고 묻자 이신방은 "누가 그딴 말을 하고 다니는 거냐? 그런 말 못 나오게 해라!"이라고 답하며 부정했다는데... 정말 양원이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남원성에서 조선 백성들이 몰살당할 때 유일하게 살아 남은 김효의의 기록을 옮긴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도 이와 비슷한 수상한 사실을 전한다. 8월 15일 저녁 일본군이 성 밖의 잡초와 논의 벼를 베며 기습 준비를 할 때 성내에서는 그 목적을 몰랐지만,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말 안장'을 준비하는 등 도망치려는 기색이 있었다고 한다. 성 안의 기병이라면 양원이 지휘하던 요동 마군 3천 명 가운데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이 함락되자 북문은 달아나려 말에 오른 명나라 군사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일본군은 미리 두세 겹으로 겹겹이 둘러싸 있다가 칼로 내려 찍으니 명나라 군사들은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달도 밝아 빠져나간 사람도 얼마 없었는데, 양원도 가정 몇 사람과 함께 말을 달려나가 간신히 죽음을 면한 생존자 중 하나였다. 류성룡은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왜적이 총병인 것을 알아보고 짐짓 빠져나가게 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간양록"의 저자인 강항은 참판 이광정의 휘하에 배속되어 군량 수송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남원성이 함락되자 영광으로 도망쳐온 강항은 왜군을 막아내기 위해 고향 사람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지만, 일본군의 기세가 막강해서 의병은 흩어지고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자 이순신의 진영으로 향하나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자세한 것은 강항 항목 참고. 금계일기의 저자 노인도 권율의 명으로 이때 남원성에 파견왔다가 성이 함락되자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매년 9월 26일 남원의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달 15일 성첩(成貼)한 경상 좌도 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이운룡(李雲龍)의 장계에,
"이달 15일 사시(巳時)에 동해 요망군(東海瞭望軍) 이모작(李毛作)의 진고(進告)에 의하면 ‘일본에 포로되었던 사람들이 도망쳐 돌아왔는데 무안(茂安)에 사는 정병(正兵) 김학성(金鶴聲) 등 남녀 21명이 한 배에 타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김학성에게 포로가 된 근인(根因)과 왜적의 정세를 문초하니, 그 공초(供招)에 ‘정유년 8월 15일 남원(南原)에서의 접전(接戰) 때 포로가 되어 무술년 정월 3일 일본 땅 대판(大坂)에 닿았으며, 이름을 모르는 한 왜인(倭人)의 집에 있으면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했다. 이달 12일 밤을 틈타 도망쳐 왔는데 대마도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동쪽으로 대양(大洋)을 건너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적국의 소식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무술년에 평수길(平秀吉)이 병으로 죽고 나이 어린 아들이 대신 그 자리에 올랐는데, 가강 등이 섭정(攝政)하고 있으며 청정(淸正)과 각처의 왜장들이 군사와 말을 거느리고 모두 왜도(倭都)에 모여 성을 쌓고 군사들을 훈련시킨다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밖의 적정(賊情)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어부로서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니, 회계하기를,
"김학성에게는 해사(該司)로 하여금 면역첩(免役帖)을 작성하여 주게 하고, 그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성명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다가 추후 첩보(牒報)하여 일률적으로 시행하도록 행이(行移)함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선조실록 124권, 선조 33년 4월 27일 경자 2번째 기사

해당 전투 당시 포로가 되어 오사카에 끌려간 사람이 탈출해 돌아온 경우가 있다.

7. 기타

고전소설 최척전도 이 전투에서 헤어진 가족들의 고난과 재회를 다룬다.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이 전투를 처절하고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김시습의 한문소설집 금오신화의 소설 중 하나인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인 만복사도 당시 남원성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방화로 소실됐고, 이후에도 중건되지 못한 채 현재도 절터로 남아 있다.

고형권의 소설 남원성에서도 이 전투를 다루고 있으며, 이 소설을 원작으로 2018년에 한중합작으로 영화를 제작한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그 이후에는 소식이 올라오지 않고 있다.

의병장 황대중이 총탄에 맞고 전사하자 그의 말이 그의 시신을 싣고 그의 집이있는 강진까지 걸어왔다. 이후 말은 아무것도 먹지않고 고개만 떨구고있었고 의병장 황대중의 장례가 끝나자 말이 죽었다. 사람들이 말의 충성심에 감복하여 말의 무덤을 만들었고 후손들이 황대중 묘와함께 같이 관리하고 있다.


[1] 吳應鼎, 같이 남원성에서 전사한 전라도 방어사 오응정(吳應井)과는 동명이인이다[2] 우하단의 빨간 네모, 파란선은 현재 남아있는 성벽 유적, 별표는 각 성문의 위치[3] 좌상단의 녹색선 중 외곽선[4] 조선시대 화약장으로 화포를 가지고 선봉과 전후를 맡던 특수 부대.[5] 성을 공격하는 부대의 위치, 지휘관의 이름과 병력 수가 기록되어 있다. 남원성은 중국식 읍성을 모방해 만든 네모난 평지성으로 주위에 해자가 있었고 4개의 문 앞에는 해자를 건널 수 있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6] 아들인 어모장군 오욱(吳稶), 셋째 아들 오동량(吳東亮)과 함께 삼부자가 화약에 불을 질러 같이 폭사하였다. 이후 사르후 전투에서 전사한 둘째 아들 오직,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남한강에 투신한 오직의 아들 오방언을 합하여 삼세오충(三世五忠)이라 부르며 익산에 삼세오충렬사가 세워져 있다.[7] 징비록에 따르면 파진군이었던 김효겸 한 사람만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한다. 명군 역시 살아돌아온 사람이 양원과 휘하 기병 50~170명밖에 없었다.[8] 성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여기다 끓는 물이나 기름을 부어 성벽에 달라붙은 적들을 공격할 수 있다.[9] 전주에서 사태를 관망하다 도주한 진우충은 곤장 100여대에 처해졌으나 형이 가산을 팔아 속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