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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비진천뢰(飛震天雷)
도화선 방식의 지연 신관 폭탄으로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화포장 이장손(李長孫)이 개발하였다.
2. 상세
쏘기 전에 자체 도화선에 불을 붙인 후, 도화선이 끝까지 타들어가 뇌관에 불이 닿으면 폭발하는 원시적인 시한신관을 가지고 있다. 또한 폭발과 함께 깨진 탄체(casing)와 안에 들어 있는 철편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하며 살상력을 낸다[1]. 용도는 위에서 아래로 굴려서 보내거나, 적당한 곳에 내려놓고 심지에 불 붙이고 도망가거나, 현대의 박격포탄처럼 완구에 넣고 발사해[2] 터트리는 1회용 소모성 무기였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요하지 않으므로 충분한 재료와 설비만 있다면 현재도 재현할 수 있다.2차 경주성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것 한 방으로 성을 탈환했다고 한다. 대완구로 쏜 비격진천뢰가 성 안에 떨어지자 왜병들이 주위에 몰려들어 웬 쇳덩어리가 날아들어왔나 하고 우르르 몰려와 구경을 했으며, 심지어 굴리면서 갖고 놀았다던가 또는 장군이 발로 차고 놀다가 병사들 줬다는 설화도 있다. 그러나 잠시 후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걸레짝이 되어 나가떨어지자 기겁한 일본군들은 다음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3][4] 이에 대한 당시 왜군 기록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 둘러서 구경하고 있는데 이것이 갑자기 폭발하자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같이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주변에 있던 자는 폭풍에 날아갔다. 기이하고 놀라서 서생포로 돌아왔다.
<정한위략>
요 내용은 맹꽁이 서당 제3권에서도 나온다.<정한위략>
경주성 이외에도 1592년 7월 고경명 의병군이 금성을 공격할 때, 1593년 우배선의 의병군이 향교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동년에 이순신 함대가 웅포 해전에서 육상의 일본군을 공격할 때 쓰였다. 진주 대첩과 2차 진주성 전투와 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도 사용하는 등, 널리 활용하였다. 유성룡의 《진사록》에서 1592년 10월 기사를 보면 북쪽 지방에도 이미 비진천뢰가 각 지역 무기고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정만록》에서 중인이었던 저자가 1592년 6월 용인 전투 패전을 논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이장손이 수년 전에 비진천뢰를 만들어 쏘고는 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실제 비진천뢰 발명시기는 1592년 이전일 공산이 크다. 안동의 김해 의병대는 특이하게도 1593년 2월 24일 반암의 야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비진천뢰를 운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향병일기》 참조).
목사(김시민)는 성 위에 비격진천뢰와 질려포(쇠조각이 든 탄환을 쏘던 화포), 그리고 큰 바윗돌을 모아 두고 적의 접근을 막았습니다.…적이 몰려오자 진천뢰나 질려포를 터뜨리고, 큰 돌멩이와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지기도 하고, 끓는 물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왜적들은 계속 죽어나갔는데, 비격진천뢰에 넘어져 죽은 시체가 수도 없이 쌓였습니다.
김성일, <학봉집>
김성일, <학봉집>
비격진천뢰는 군기시의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무기다. 진천뢰를 대완구(대포)에 넣어 쏘면 500~600보를 날아가 땅에 떨어져 한참 있으면 불이 그 안에서 일어나 터진다. 왜적들은 이 무기를 가장 무서워했다.
유성룡, <징비록>
유성룡, <징비록>
폭발까지 걸리는 시간은 조절이 가능하다. 도화선을 원하는 길이로 잘라 목곡에 감고, 대나무통 안에 넣은 뒤 탄체 안에 넣고 뚜껑을 닫아 도화선 끝부분만 밖으로 나오게 하면 안에 있는 도화선이 얼마나 긴지 알 도리가 없다. 더구나 적진에 떨어질 시점이면 탄체 바깥 부분의 도화선은 다 타서 없어졌을 것이기에 어디가 뚜껑인지도 구분하기 힘들다. 그러니 한 번 심지에 불을 붙이고 이게 내부로 타들어가면 이제 이걸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포열이 없다시피 한 중완구로만 발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확도가 낮았지만 위력은 엄청났던 것 같다. 역사스페셜에서 비격진천뢰를 재현해봤는데 발사 후 폭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파편을 뿌리며 폭발했으며, 철편이 바위에 박힐 정도였다. 대인 제압용으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완벽한 유산탄이다. 보병들이 밀집 대형을 이루어 전투를 했고, 지금과는 달리 파편탄을 엄폐하여 방어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 전투의 양상을 고려하면 상당한 위력이었을 것이다. 뭐 파편을 피하겠다고 보병들이 대형을 풀고 엄폐한다 쳐도 그 뒤에 기병들이 달려오면 앞이 깜깜하다. 야전이나 공성전이 아닌 고지대 방어전이나 수성전에서는 불을 붙여 떨어트리거나 그냥 밑으로 굴리기만 해도 된다. 참호를 구축하고 싸우는 진지전은 근대에서야 나왔으므로 야지 전투에서는 기동성도 낮고 대형 유지하며 천천히 몰려다니던 보병을 몰살시킬 수 있다.[5]
융원필비에 기록된 별대완구용 비격진천뢰는 그 무게가 120근에 달한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1근을 600 g으로 환산하면 포탄 무게만 72 kg 남짓인데 융원필비에 나오는 황자총통의 무게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근이 600 g이 아니라 더 가벼웠고, 또한 당시 도량형이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른 경우도 있었기에 실제로는 더 가벼웠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일단 비격천뢰를 소장 중인 현충사 관리소에서는 둘레를 84 cm,[6] 무게는 20근(약 12 kg)으로 기록했다.
17세기 서양의 폭탄들도 전부 이런 흑색화약인데 그 화약과 조선의 화약은 별 차이가 없다. 만드는 과정이 서양에 비해 많이 어려웠던 것뿐이다.[7]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에 개발된 슈랩널(shrapnel)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16세기에 만들어진 비격진천뢰 쪽이 18세기에 등장한 슈랩널보다 빨리 나왔다. 문제는 화약일 뿐이다.
비슷한 걸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말 일본군이 비격진천뢰와 구조상으로 하등 다를바 없는 4식 도제 수류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차이라면 재질과 위력이 다르다는 것이다.
비격진천뢰가 개발되기 전에도 진천뢰라는 폭탄이 있었는데 송나라에서 사용된 예가 최초다. 즉, 화약의 무기화와 함께 개발된 초기형 폭탄이다. 이는 원나라의 일본원정 당시에도 사용되어 일본을 놀라게 하였고 고려, 조선도 사용하였다. 다만 손이나 투석기로 던지는 수류탄에 가까웠고 대포로 발사하기에는 외피의 내구력이 부족하였다. 즉, 이것을 대포로 발사할 수 있도록 주조하고 지연신관을 장착한 것이 비격진천뢰다.
2018년 11월 호남문화재연구원에서 전북 고창 무장현 옛 조선시대 관아와 읍성터를 발굴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과정에서 군사훈련장 터와 무기창고 건물터, 수혈(구덩이), 도로시설 등을 발굴했는데, 이중 수혈 안팎에서 비격진천뢰가 11점이나 발굴되었다. # 기존에 전해진 비격진천뢰 실물이 6점뿐이었는데 한 방에 11점이 나와버린 것. 이전의 유물들이 속이 비어있는 것에 비해 파편역할을 하는 빙철과 화약, 발화장치들이 들어있고 비교적 온전한 모양의 뚜껑도 나와버렸다.
3. 대중 매체
임진왜란 시기를 다룬 작품에서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물건으로 주로 예상치 못한 폭발로 적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역할로 나온다.[8]초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대체역사물에서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필수품으로 반드시 등장하며, 미래 지식을 가진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도움을 받은 주변인물들이 개발하여 조선군의 화력을 폭증시키는데 이바지한다.
3.1. 불멸의 이순신
부산포 해전 중에 이전에 일본군이 조선군에게서 노획했던 걸로 보이는 비격진천뢰가 녹도 만호 정운이 타고 있던 판옥선 한가운데 떨어지고, 정운은 다른 병사들을 지키고자 자기 몸을 던져 비격진천뢰의 파편이 퍼지는 것을 막다가 끔살당한다.[9] 정운의 전사에 분개한 조선 수군은 닥치는 대로 포격하여 백여척의 일본군 전함을 쓸어버린다. 그 외에 대장선 화포장 정대만이 불을 붙여 적함으로 던지는 장면이 뱅크신 마냥 자주 나온다.3.2. 명량
전투 중 일본군이 급속도로 접근해오자 결국 이순신의 대장선은 백병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때 조선 수군은 완구로 비격진천뢰를 적함으로 던져넣어 왜병들은 물론이고 함선까지 침몰시켰다.3.3. 징비록(드라마)
2화에서 이장손이 개발 중인 것으로 등장했으며 3화에서 일본 첩자들에게 도면이 노출될 위험을 간신히 넘기고, 그 외에도 개발하던 비격진천뢰가 사고로 폭발하는 등 온갖 우여곡절 끝에 개발이 완료되었다.
26화의 경주성 전투에 실전 투입되었으며 일본군은 갑자기 뚝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보고 순간 놀라더니 이내 신기하게 여기며 가지고 놀기 시작했지만, 이게 폭발하면서 구경하고 놀던 일본군이 무더기로 폭사했다. 조선군은 대완구부터 팔매질까지 온갖 방법으로 각종 비격진천뢰를 계속 쏘아보내 혼란에 빠뜨린 뒤, 성 안으로 진입하여 성을 탈환한다.
32화에서 권율의 조선군이 행주 대첩에서 화차와 함께 유용하게 사용했으며 50화(최종화)에서 수군들이 직접 던지는 것도 비격진천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던지는 건 질려포통으로 수류탄의 일종이다.[10]
3.4.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
김민이 극중에서 자주 사용한다. 물론 관련 기록인 융원필비도 언급되었다. 맨 처음으로 서필에게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 창 밖으로 던져 폭파시키고 이후 불량 은 제조소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데에 크게 기여한다. 사이즈를 작게 수류탄만하게 만들어서 막 던지고 다닌다. 똑똑한 탐정에다 기계, 장비 제조에 능력이 있음을 1편부터 계속 보여주었으므로 납득이 되지만 폭발력은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슨 네이팜마냥 빵빵 터진다. 하지만 어차피 이 영화에는 행글라이더도 나오는 등 재현은 포기한 판타지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3.5.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대장군포가 발사한다. 게임 중 영웅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단일 데미지를 주며 방사피해를 준다. 꽤 넓은 면적에 피해를 주는데 예를 들어서 훈련소를 때리면 훈련소 주변의 보병도 죽는다. 사거리도 화차 다음으로 길어서 일단 이 무기가 뜨면 적은 이 무기부터 일점사하는게 좋다. 영웅의 아우라까지 받는 대장군포가 발사한 비격진천뢰에 맞으면 보병은 보통 한방에 즉사하고 영웅도 백설산삼으로 체력을 기본보다 올리지 않는 이상 3방, 4방 맞으면 목숨이 위태롭거나 사망이다. 건물도 아무리 단단해봤자 5방 안에 끝난다. 거기다가 강제 공격(고정포격)도 가능해서 사거리 안이면 어디든 포격을 퍼부을 수 있다. 작중 최강 병기 중 하나이자, 조선의 희망. 다만 사거리가 긴만큼 날아가는 시간 동안 회피할 수 있다는게 흠이지만 수송기 2대분의 대장군포로 리버 아케이드 하듯이 건물만 집중공격하면 한 번에 건물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명나라는 건물 대부분이 본영에 부속건물 형식으로 지어야 하는데, 스타크래프트와 달리 본영이 터지면 연결된 부속건물도 다 터지기 때문에 초장거리에서 날려대는 대장군포의 비격진천뢰에 매우 취약하다.3.6. 천군(영화)
남한과 북한이 공동개발한 스텔스 핵무기의 이름이 비격진천뢰인데, 미국에서 가져가겠다고 하자 그것에 반대하는 북한군 한 무리가 비격진천뢰를 훔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3.7. 근육조선
근육조선에서는 화약무기의 빠른 도입으로 문종 시기에 개발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만 원 역사와 달리 조선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에 힘입어 화약과 구리의 공급량이 풍족해졌고, 자연스레 화포의 구경과 위력도 증가하자 발사 시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자폭해버리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어서 2부 초반 시점에서는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이러한 것을 2부 중반 시점에서 이장손[11]이 실전에 쓰일 수 있는 수준으로 개량하여 조선군은 물론이고 영토를 대가로 사들인 뒤 역설계를 통해 도입한 스페인군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12]3.8.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일륜의 데마르카시온
행주대첩 파트에서 비격진천뢰의 간단한 구조적 설명과 함께 사용하는것이 등장. 마치 작열탄이 터지는듯한 묘사로 나온다. 완구로 발사하는건 아니고 성벽위에서 던져 사용한다.4. 기타
- 대한민국 육군의 신형 120mm 자주박격포는 본 병기의 명칭을 따온 비격으로 명명되었다.
- 국립진주박물관에서는 비격진천뢰밤이라는 이름의 입욕제(배스밤)를 기념품으로 판매한다. 나름 폭탄과 배스 '밤'이라는 명칭에서 따온 센스있는 제품. 다만 이름과는 달리 평범한 입욕제 모양이다.
5. 관련 문서
[1] 즉, 파편재가 별도로 들어 있다. 현대의 세열 수류탄과 달리 탄체 자체가 깨져나가면서 파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탄체 내부에는 폭발에 쉽게 깨질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으나, 탄체를 파편화시킬 정도로 조밀하지는 않다.[2] 500~600보(600m~1,080m) 정도 거리를 날려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3] 일본도 전국시대에 호로쿠비야같이 비슷한 물건을 많이 써먹었지만, 이쪽은 대포를 별로 안 쓴 당시 일본답게 비격진천뢰와 달리 사람 손으로 직접 던지는 수류탄처럼 운용했다. 하지만 이웃국가 조선은 각종 대포를 절찬리에 사용하던 나라였고, 그냥 빗나간 포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포를 이용해서 훨씬 멀리서 날아온 호로쿠비야랑 비슷한 무기체계라는 걸 깨달은 순간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후퇴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다 이미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조선군의 공격에 성의 사기도 많이 저하된 상태였다.[4] 현대기준으로 보면야 세열수류탄급, 잘쳐줘도 60mm박격포급 정도밖에 안되겠지만, 그당시 밀집해서 싸우던 상황을 고려하면 일반 깡 보병대대따위를 잡자고 80미리나 4.2인치급이 아닌 하이마스가 날아온 정도나 마찬가지다.[5] 역사스페셜에서 만든 레플리카는 현대의 뛰어난 야금술 때문에 재현 오류가 났는데 폭발력이 화약을 넣는 입구쪽으로 터졌다. 그러나 터진 비격진천뢰 유물을 보면 3조각에서 4조각 정도의 조각이 나있고 온전한 비격진천뢰 발굴 이후 살펴본 결과 포탄 중간을 일부러 얇게 해서 그쪽으로 터지게 만들었다는게 밝혀졌다. 이는 현대의 세열수류탄의 외피 내부에 홈을 파서 파편이 생성되도록 하는 것과 유사한 설계이다.[6] 농구공이 78 cm를 넘지 않는다.[7] 조선에서는 흙 속에 들어있는 아주 적은 미량 원소와 배설물 등등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초석을 긁어 모아 화약을 만들었던 반면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은 신대륙에서 초석 광산을 찾아내서 그냥 파내서 담으면 되는 정도였다.[8] 그 당시 동방 서방 모두 대부분의 포탄은 통짜 쇠로 만들어져 빗나가면 그만인 물건인데 빗나간 포탄인 줄 알았던 물건이 느닷없이 폭발하니 적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9] 원래 정운은 조총에 전사했다.[10] 이건 원래부터 투척용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그렇게 하는 것으로, 비격진천뢰는 무게 때문에 던지기 어렵다.[11] 원 역사에서 비격진천뢰를 개발한 사람이다.[12] 스페인이 비격진천뢰를 도입한 결과 원 역사에서는 스페인의 패배로 끝난 칼레 해전이 영국 해군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혀 영국의 해양 진출이 늦춰지게 되었다. 특히나 선박에 접근하여 나포해야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해적들에게는 함부로 접근했다가 폭사시킬 수 있는 하드카운터로 작용하여 영국 해적의 활동을 위축시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