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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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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군 좌독기.svg
군대가 행진할 때 지휘관의 앞에 세우고, 행진이 멈추면 장대 좌측에 세우는 군기인 좌독기.
파일:조선군 수자기.svg지휘관의 군영에 세우는 군기인 수자기.
도안은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수자기이다.


1. 개요2. 역사
2.1. 전기
2.1.1. 성종 대 시작된 군축과 그 이유
2.2. 중기~후기2.3. 말기
3. 편제4. 계급과 보직
4.1. 계급4.2. 품계4.3. 보직
4.3.1. 경관직4.3.2. 외관직
5. 우수성
5.1. 궁시 병과의 정예화5.2. 화약무기의 대량 운용5.3. 해군의 제도화
6. 문제점
6.1. 유명무실해진 지방군6.2. 빈번한 지휘 간섭과 난잡한 명령체계6.3. 군대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는 재정과 군사행정6.4. 허리가 없는 지휘체계6.5. 비현실적인 원거리 무기 집착
7. 의의8. 장비9. 군사교범 및 문헌10. 주요 전쟁11. 관련 인물12. 대중 매체
12.1. 게임
13. 관련 문서 및 참고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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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군()은 조선정규군으로 1392년 8월 13일, 태조 이성계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위받아 조선 왕조를 개창하면서 설립되었다. 조선군은 1897년 왕조가 칭제건원하면서 대한제국군으로 재편되었으나, 1907년 일본 제국과의 조약에 의해 해산되었다. 사실상 해체일은 1907년이라 보면 된다.

2. 역사

2.1. 전기

파일:thumb_org_xman1717_2011-05-24[1].jpg
[1]


승자총통을 장전하는 총통수[2] - 국립진주박물관

초기 조선군은 고려군의 체계를 그대로 계승했다. 고려군과 마찬가지로 조선군 역시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뉜다. 중앙군은 고려 시대부터 있던 2군 6위에 태조 1년(1392) 이성계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 좌, 우위 2위를 더해 10위(十衛)로 구성된 의흥삼군부로 구성되었다. 각 10위에는 취재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된 갑사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3] 그러나 태조 3년(1394) 의흥친군위와 나머지 8위의 지휘체계가 달라 혼선이 있다는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10위는 10사(十司)로 개편되었다. 이에 중앙군이 4개의 시위사(侍衛司)와 6개의 순위사(巡衛司)로 편제되어, 중군(中軍)에는 의흥, 충좌, 웅무, 신무 시위사가, 좌군에는 용양, 용기, 용무 순위사가, 우군에는 호분, 호익, 호용순위사가 배속되었다.

태종 즉위 이후 시위사를 9개로 증강하고 순위사를 1개(충무순금사)만 남겨놓게 되었다. 세종 즉위 이후 10사는 무려 12사로 증강되었으나 1424년 다시 10사로 돌아왔고, 이후 1445년에 또다시 12사로 늘어났다. 결국 문종 1년(1451) 기존 시위사들을 5사(五司)로 통폐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12사 병력 뿐 아니라 기존에 금군에 포함되던 별시위, 총통위, 방패 등도 5사에 속하게 하였다.[4]

이후 세조 대에 오사는 오위로 개편되었는데, 각 위에는 갑사, 팽배수, 친군위, 파적위 등의 부대가 소속되었으며, 지방에서 번상하는 정병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나누어져서 근무했다. 이를테면 경상도 출신 정병은 용양위에 배치되었고, 평안도 출신 정병은 호분위에 배치되었다. 다만 수도인 한성부 출신 정병들은 무작위로 배치되었다. 총통위는 해체되었으나 중앙군과 지방군 각 부대에 화약무기가 보급됐다.
  • 중군(中軍)
    • 의흥친군좌위(義興親軍左衛) →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 의흥위(義興衛, 중위)
    • 의흥친군우위(義興親軍右衛) →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 → 충좌위(忠左衛, 전위)
    • 응양위(鷹揚衛)[5] →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 → 금군
    • 금오위(金吾衛)[6] → 신무시위사(神武侍衛司) →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7] / 충무순금사(忠武巡禁司)[8]의금부 / 충무위(忠武衛, 후위)
  • 좌군(左軍) → 용양위(龍驤衛, 좌위)
    • 좌우위(左右衛) →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
    • 신호위(神虎衛) →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
    • 흥위위(興威衛) → 용무순위사(龍武巡衛司)
  • 우군(右軍) → 호분위(虎汾衛, 우위)
    • 비순위(備巡衛)[9] → 호분순위사(虎賁巡衛司)
    • 천우위(千牛衛)[10] →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
    • 감문위(監門衛)[11] → 호용순위사(虎勇巡衛司)

지방군은 크게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으로 나누어졌다. 육수군은 각 도에 있는 영과 진에 복무하며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영진군(營鎭軍)과 돌아가며 서울에서 궁궐을 지키던 시위패(侍衛牌)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선군은 말 그대로 수군으로 수영에 배치되어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경국대전이 반포된 후엔 기선군은 수군으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여기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도 있었다.

이후 세조 대에 이르러 조선 초기 지방군사제도인 진관 체제가 자리 잡았는데, 진관 체제는 전국을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나누어 이중 삼중으로 틈틈히 방어망을 구축한 제도이다. 제진은 거진의 명에, 거진은 주진의 명에 복종하였으며 허락 없이 타 진관을 지원하는 것은 성종 대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주진의 장은 병마절도사였으며 거진의 장은 병마절제사나 병마첨절제사(첨사)가, 제진의 장은 병마절제도위(절제도위)나 만호가 맡았다. 단 첨사나 도위 같은 경우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현감이나 현령이 도위를 겸임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진관 체제는 대규모의 적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지적되었고, 실제로 니탕개의 난 당시 3만여명에 달하는 여진족의 준동에 취약점을 노출하였다. 따라서 선조 대에 진관 체제제승방략 체제로 개편되었다. 제승방략은 외적의 침입 시 각 진관의 병사들이 사전에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집결하고 이들을 수도에서 파견된 경장(京將)이 지휘하는 체제였다. 하지만 제승방략 역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문제점을 보이며 폐지되었다.

태종~세조 시기 조선군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북방 방비 및 여진족, 왜구 토벌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의 압록강두만강을 잇는 국경 확립에 공헌한 4군 6진 개척, 1396년과 1419년에 있었던 2차례의 대마도 정벌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후로는 국토 방어에 힘쓰며 가끔 예방전쟁 성격을 띠고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는 것 이외에는 대외 확장은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 진법을 계승하고 후일 집대성해서 문종 때 오위 진법으로 나타난다. 오위 진법은 장군 아래 5위를 두고, 각 위는 5부가 있고, 각 부는 4통으로 구성되고, 사통 2부대는 기병과 2부대는 보병으로 구성되는, 보병과 기병을 균형있게 운용하여 적을 막으면서 각 부대 간에 상호 지원할 수 있게 만든 탄력적인 진법이다. 기병은 중기병 40%, 궁기병 60%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환도는 기본착용했다. 추가적으로 기병은 척후도 담당했는데 보통 10리 정도 안팎을 정찰하였다. 보병은 5가지 병종으로 구성되었다. 방패와 환도로 무장한 팽배수, 소형 총통으로 무장한 총통수, 장창으로 무장한 창수, 길이가 긴 외날 칼인 장검으로 무장한 장검수, 활로 무장한 궁수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총통과 팽배수는 무조건 20%가 포함되어야 하며 나머지 병종은 상황에 따라 가감할 수 있었다. 단순 비율만이 아니라 도끼나 철퇴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등 전장의 즉응성을 강조했다.

진영의 경우 팽배수가 1선에서 팽배와 환도로 무장하여 대기하고, 총통수가 2선에서 저격을 가하고, 3선과 4선에 있는 창수와 장검수가 들어오는 적을 요격하면, 5선에서는 궁수가 적을 저격하는 식으로 운영하였다. 병종 상관없이 찰갑이나 다른 갑옷을 입었으며, 총통수를 뺀 나머지 병종은 환도를 패용해서 근접전을 대비하였다. 전술적으로는 기본적으로 방위위주로 모루인 주통과 예비대인 전통으로 나누어진다. 적이 오면 주통과 전통이 합세하지만 적이 물러나도 주통은 진을 지키고 전통이 나아가서 적을 섬멸한다. 이 진법이 쓰인 당시 주적은 여진오이라트 족으로 정주민이 유목민을 어떻게 상대하야 하는지 고민이 드러난 전법이다. 그러나 오위진법은 유목민 상대에 특화된 전법이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막는데 큰 실패를 겪었으며 이후 명에서 들어온 절강병법으로 대체되었다.

2.1.1. 성종 대 시작된 군축과 그 이유

조선시대에는 현직 관료를 제외한 15세 이상 60세 이하 대부분의 양인 남자는 현역 군인인 정군(正軍)이나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保人)으로 편성되었다.[12]

보인이 별도로 편성된 이유는 개인이 군역을 수행하면서 져야할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내지는 그 이전부터 군인이 써야할 무기, 갑옷, 기타물품은 군인이 직접 마련하고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집안 가세가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방지하고자 태종 15년(1415)에 조정에서 정군에 지급하는 봉족의 수를 경작 면적과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지급하도록 하였다.[13]

그런데 봉족이 정군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다보니 아예 정군이 봉족에게 자기가 할 일까지 떠넘기는 행태가 벌어지게 된다. 1407년 의정부에서 국방대책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수군 같은 경우 “정군이 자기가 배를 타지 않고, 능력을 불문하고 봉족을 시켜 대신하게 하니, 적(賊)을 만나면 모두 배 밑바닥에 엎드려서 손도 쓰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언급될 정도였다. 그래서 세조 10년(1464)에 조선초기부터 실시한 봉족제(奉足制)를 보법(保法)으로 바꾸어 시행하면서 정군 1명당 봉족이 최소 3명 이상 배정되던 것을 정군 1명당 봉족 2명씩 배정되었고 종래의 봉족을 보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세조 시기에 조선 전기 최대 수준으로 증강되었던 조선군은 성종이 즉위하자마자 무자비한 군축에 들어간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대마도 정벌의 영향과 센고쿠 시대가 열리면서 왜구는 조선 연안대신 중국 남동부 연안을 침탈하여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중국 정세가 안정되고 여진족에 대한 명나라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안보 소요 자체가 크게 줄어든 시기가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조선 전기에 인구는 늘어나는데 부양할 경작지가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세종 14년 573만명으로 추정되는 인구는 중종 38년에 946만명으로 추정될 정도로 대폭 늘어나게 된다. 인구가 늘어난만큼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15세기부터 무너미(범람원)일대에 천방과 제언같은 수리시설을 짓고 개간을 하였으나 경작지는 유의미하게 늘지 않았다.시대별 호구당 경적면적 추계표 인구는 늘어났는데 토지는 그만큼 늘지 못하다보니 농민들의 경제력은 높아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보인은 2명으로 줄어들면서 부담은 더 했졌다. 이때문에 백성들은 군역을 회피하려 들었다.

이러한 인구압은 기병에도 영향을 끼쳤다. 말(동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말을 군용이나 사역용으로 쓰려면 엄청난 열량을 충족시켜야했다. 그래서 목초지가 부족한 곳에서는 말에게 곡식을 같이 먹여 열량을 충족시켰다. 유럽에서는 귀리, 한반도는 을 먹였는데 인구압이 가해지면서 말에게 먹일 곡식도 충분치 않다보니 말을 대규모로 키우는데 차질을 빚게 된다. 일례로 세종 시기에 기병에게 바로 지급할 수 있는 전마가 4만 필이었는데 명종 시기에 가면 2만 6천필로 급락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한번 보자. 출처는 성종실록 44권, 성종 5년 윤6월 17일 경자 3번째기사이다.
경인년[14]에 이르러 별시위(別侍衛) 2천 4백 명에서 9백 명을 감하고 갑사(甲士) 2만 명에서 1만 명을 감하였고, 파적위(破敵衛) 3천 명에서 5백명을 감하고 대졸(隊卒) 3천 4백 40명에서 4백 40명을 감하고 팽배(彭排) 6천 명에서 1천 명을 감하고 정병(正兵) 8만 6천 명에서 5천 8백 60명을 감하였고, 임진년[15]에 또 9천 7백 45명을 감하였으니, 양년에 정병을 감한 수가 벌써 많습니다. 이제 또 감하면 병졸이 단소(單少)하여 갑자기 위급(危急)함이 있으면 일을 구제할 수가 없으니, 그 군국의 대계에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군호(軍戶)가 파폐(罷弊)함을 염려한다면 마땅히 그 번수(番數)를 성글게 하여서 그 힘을 쉬게 하소서. 신은 또 듣건대 전날의 군액(軍額)을 감할 때에 관리가 간교(奸巧)를 부려, 감함을 받은 자는 모두 부호(富戶)이며 가난한 자는 뇌물을 줄 수가 없어 오히려 군적(軍籍)에 편입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청컨대 《대전(大典)》의 수에 의거하여 감하지 마소서.

지역별 세부적인 군축 내용은 성종실록 15권, 성종 3년 2월 1일 무진 7번째 기사에 나와 있다.

3년에 걸쳐 조선군은 대규모의 군축을 단행하였다. 수군도 국가 방위보다는 미곡 운송에 쓰이는 조운에 치중했다.

이러한 군축은 군대의 질적 저하에도 영향을 미쳐 무가 기풍 저화와 무신의 역량 저하로 이어졌고 나아가 병종의 불균형까지 심화되었다. 팽배수와 같은 단병접전 병종과 중기병의 비율이 지나치게 낮아진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고려 공양왕 시기에 과전법을 실시하여 이전까지 개인에게 분급되었던 수조권을 모두 국가에서 회수하여 관료들에게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수조권을 분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 주었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수조권에 한정된 것으로 본래부터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재분배 대상이 아니었으며 대상도 전국 단위에서 경기도로 한정하였다.

그래서 토지를 개혁했지만 근본적으로 화폐경제체제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토지중심 경제체제였고 강압적인 힘으로라도 쌀본위나 곡물본위제도를 채택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힘있고 권력있는 자들은 과전법으로 받은 토지를 국가에게 돌려주지 않고 수신전, 휼양전 같은 예외적으로 일부 토지를 한시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제도를 이용, 편법으로 상속을 하였다. 이로인해 토지겸병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1/10 과세 원칙을 정하여 1결당 최대 2석(石)까지만 수취하도록 했던 것도 지키지 않고, 수조권만 주었는데 아예 토지를 소유해 버리는 건 덤.

문제는 그저 토지문제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태종 시기부터 관료들의 수를 늘리다보니 관료들에게 땅을 지급해 줘야 할 토지의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고, 이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점점 그 대상이 확대되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기존체제로는 정규군의 병력 수요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까닭은 기본적으로 세조 이전의 조선의 군사체계는 양인개병제가 아니라 엄연히 말하면 전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세병제에 가까워서 지정된 군호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병력 수요를 채웠는데 군호로 지정된 사람들이 장비와 보수 마련자금의 재원인 곡식을 재배할 만한 땅을 관료들에게 지급하면서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세종 말기와 문종시기를 지나며 심화되었다.

이전 정권을 규탄하며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조도 이 문제는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지를 분급하도록 하고,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수조지를 상속하던 규정을 폐지하는 직전법을 실시했지만 국가가 지는 부담이 가중되는 속도만 늦춰졌을 뿐이다. 토지 수조권 분급의 원칙에 근거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서 손을 더 대었다가는 가뜩이나 고려 말기부터 조정에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느라 권력을 빼앗긴 각지의 지방 토호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에서 중앙관료들까지 합세하면 이징옥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 같은 반란이 어디서 얼마나 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단종 복위 운동이랍시고 사육신과 생육신이 벌어지는 판에 계유정난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 스스로도 4군 6진 같은 새로 영토를 확장한 지역에 전가 사변같은 북방 사민 정책을 시행하고 원주민인 여진족들의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그 지역의 토호를 토관으로 임명했으므로 이들에게 중앙정부의 힘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병력의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진북정, 정해서정 같은 원정을 자주 하다보니 조선군은 병력의 수요가 점점 늘어났다. 결국 보법을 실행해 이전처럼 군호를 지정해서 굴리지 않고 양인개병제로 바꾸어서 3명 단위로 묶어 1명은 정군, 나머지 2명은 보인으로 돌아가면서 군 복무를 하도록 해 정규군의 수를 13만 5천 정도로 불렸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서 앞에도 말했듯이 가뜩이나 컸던 군역 부담이 더 커져서 군역을 지느라 집안이 몰락하거나 심지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유랑하는 농민들이 생겨났다. 결국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성종 대 군대 규모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부족 단위로 나눠진 중소 규모의 여진족과 왜구말고는 외부 불안요소가 없던 당시 조선으로서는 단순 훈련만으로 육성하기 힘든 단병접전 병종과 중기병을 계속 키워야 할 큰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고 이것이 총통수나 궁수를 제외한 원거리 병종만 비대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전 문서에는 창병 육성과 창 제작술 자체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다고 적었는데 가시나무는 오늘날 한반도에서도 유일한 자생지가 진도말곤 없고 그 이전에도 원래 없던 나무로 추정될 정도로 개체수가 없었다. 그나마 종가시나무는 가시나무보다 자생지가 넓었지만 그나마도 한반도 남부 일대 섬에서만 자라서 전국에 공급하기에는 부족했다. 물론 다른 나무로 대체하면 해결 할 수 있을 수도 있으나 1625년이면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조정에서 창 보급과 창병 육성보다는 조총 보급과 조총수 육성에 더 관심이 가던 시기였던지라 이 것만으론 창 제작술 자체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다만 이시기에는 주적인 여진족들을 상대할 정도면 충분했기에 군사적인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이로 인해 1541년 중종 36년에 수포제가 시행되어 군역 부담자에게 번상가를 포로 일괄 징수해서 그 비용으로 군인을 고용하게 된다. 이후 양인 장정들은 대부분은 1년에 군포를 2번 내는 납포군으로 변환된다.

2.2. 중기~후기

1592년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조선군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고 각지의 산성을 보수하고 이순신 등 유능한 장수들을 승진시키는 등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일본군의 규모[16][17]로 인해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국왕이 수도를 버린 뒤 요동으로 내부를 고민할 정도로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다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 의병들의 봉기와 항쟁, 명군의 대규모 파병,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한 관군의 반격으로 개전 1년 만에 전세가 일본 우세에서 교착 상태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심유경의 강화 협상으로 흐지부지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만다. 여기서 조선군은 제2차 진주성 전투, 남원 전투,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여 전라도가 일본군에게 유린당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이 명량 해전직산 전투에서 패배하자 일본군은 다시 수세에 몰려 왜성에 의지해 방어만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결국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임진왜란 와중에 오위진법은 보병 위주인 일본군과 싸우면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전쟁 중에 일본군이 가진 조총의 위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18] 조선은 조총을 도입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1593년에 조총을 모방 생산하는데 성공한다.[19] 여기에 김충선 같은 항왜들의 도움을 받아 조총 제작 기술이 발달하여 임란 이후에는 조총이 보병의 주력 무기로 정착하게 된다. 또한 명군이 불랑기포로 많은 활약을 선보이자 임란 이후로 불랑기포가 주력 화포로 많이 쓰이게 된다. 기존 총통들도 꾸준히 개선해서 사용한 것은 덤.

기존 군제가 효용성이 없다는 판단을 가진 조선은 1593년 새로운 중앙군으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를 토대로 조총을 쓰는 포수(砲手), 창검으로 무장한 살수(殺手), 활로 무장한 사수(射手)로 구성된 삼수병 체제로 전환한다. 지방군 역시 1594년에 속오군 위주의 영장 체제로 개편되어 기존의 제승방략 체제를 대신하게 된다.

보통 척계광기효신서(절강진법)를 기반으로 삼수병 체제를 구성했다고 배우는데 기효신서 자체는 단순 병법책이 아니라 왜구를 상대로 농민들을 훈련시켜 편성하는 법을 수록한 책이다. 기효신서는 팽배수, 낭선, 당파수 등 다양한 병종이 있지만 단병접전에서 왜구한테 밀리던 조선군 입장에서 근접전은 최소화 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훈련도감의 삼수병, 즉 사수, 살수, 포수 등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은 정묘호란병자호란에서 청군에게 패하였다. 이때 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소멸된 평안도 북방군을 대신해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을 신설해 중앙군을 보강하고, 산성 위주 방어 전략을 이용해 청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청군은 이를 눈치채고 산성을 우회해 한성을 향해 속공으로 나왔다. 여기에 청군 기병에 맞설 기병과 창병이 부재하고 지나친 조총수 위주의 보병 편제로 인해 청군 기병을 저지할 수단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이를 보완하고자 조선군은 전거와 기병, 보병을 함께 운용하는 거기보전을 도입하려 시도했다. 특히 삼수병체제는 기본적으로 보병체제이기 때문에 산성 방어에는 적당했지만 야전에서는 기동력을 가진 청의 철기병에는 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오위전법을 가져오되 화력덕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거기보전이다. 거기가 바로 거대한 기계, 즉 화포를 의미한다. 실제 화거방진도를 보면 하나의 방진은 100량의 화거와 20량의 목화수거로 구성되는데 화거 한대당 조총이 50문에 목화수거는 15문이라는 미친 화력을 뽐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산이 많은 한반도의 특성상 전거를 운용하기에는 제약이 많았고 조선의 재정이 좋지못해 거기보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전거와 군마를 대량으로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예산 문제로 만기요람이라고 군수물자 확인서에는 훈련도감에 전거가 겨우 51량만 있게 된다. 결국 살수가 사용하는 무기 중에서 기병을 상대하는데 적절치 않다고 판단된 장창을 빼고 구창과 협도곤을 추가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후 숙종 때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금위영을 신설하면서 오군영 체제가 완성되고, 수도인 한성의 한양도성과 주변 도시들을 지키게 된다.

왜란과 호란 이후부터 조선군은 조총수가 태반인 보병과 활과 편곤으로 무장한 기병, 불랑기포와 기존 총통을 다루는 별파진 전력으로 구성된다. 다만 화포를 만드는데 쓰이는 구리와 화약을 만드는데 필수인 유황의 부족으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동시대 유럽의 군대가 사용한 것보다 어느 정도 뒤쳐진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구리나 유황같은 화포 운용에 있어 중요한 자원들을 거의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인 탓이 컸다. 숙종 시기가 되어서야 진산 근방에 유황이 대량으로 채굴되기 시작해서 겨우 자급자족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 고충을 짐작할 만하다. 의외로 전술은 동시대 유럽에서 쓰던 선형진과 유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조선군이 조총을 주력으로 사용하게 되자 신 유럽처럽 군악대가 편성되어 되었다. 오방색으로 전진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북으로 이동하는 거리를 나타내었고 전투시작을 알렸다. 징으로 멈추하게 후퇴를 명했다. 소라로 만든 나각으로(일종의 뿔나팔같은 악기) 소집시키고 나라는 좀더 큰 징으로 전열을 분열시키고 솔이나 방울으로 대열을 정비하고 살수와 조총수를 분리했다.신호를 하기 전에 승자총통 같은 화기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조선후기 진법과 무예 훈련과 관한 연구>[20]

그러나 화포 부분에서 유럽과의 격차는 계속 벌어졌다. 사실 18세기 전반까지 조선이나 서양이나 화포 제작법에는 토모를 사용했는데 토모는 습기가 차고 무엇보다 규격화하여 제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대원군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토모의 습기는 화포의 성능을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유럽에서는 그리보발이 대포 주조틀의 표면을 깎아내는 '천공 기술'을 사용하면서 화포의 규격화에 성공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1750년대에 '강선'이 등장하면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강선'이 개발되었음에도 1780년에도 활강포를 생산한 걸 보면 불랑기포처럼 불완전했던 것 같다.[21]

한편 바다를 지키던 수군은 수도권 인근 해안을 지키던 통어영(統禦營)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으로 나눠지게 된다. 정조 때 국방비 절감의 일환으로 통어영과 강화도를 지키던 진무영이 통합되었으나(1779), 군사상의 비효율성으로 얼마 후 복구되었다(1789).
숙종~정조에 이르는 시기까지 조선은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였다. 일종의 예비군 개념인 속오군,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소속 정규 지방군 및 수영(水營) 소속 수군, 오군영(五軍營)으로 대표되는 중앙군까지 합하여 약 20~30만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 7월 4일을 보면 병자호란 바로 전년의 조선군 총수는 약 10~11만에 중앙군은 3만 5천정도, 종전 3년 후이자 최초 기사로부터 4년 후인 18년 12월 1일 기록에는 거의 30만까지 불어나있다. 이후 20만 전후의 규모에서 꾸준히 유지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기병 역시 수만 단위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군의 경우, 훈련도감 6~7천여명, 어영청금위영 각 2천여명[22], 금군 및 호위청을 합쳐 1천여명 등 약 1만 3천명 가량이 존재하였으며, 이 밖에도 경기일대 방위를 담당하는 총융청과 수도를 둘러싸던 4유수부 (광주, 수원, 강화, 개성)을 지키던 수어청, 총리영(總理營)[23], 진무영(鎭撫營), 관리영(管理營)[24] 등에 속한 병력이 있었다. 지방군의 경우는 별무사[25], 친기위[26], 별기위[27] 등 정예 기병대를 상비 병력으로 운용하였다. 보병들은 사수와 살수가 도태되고 포수 위주로 개편되어 아예 포군(砲軍)이라 불리는 등 조총 위주의 편제가 굳어졌다. 청과 인접하여 있던 평안도의 경우, 2만 가량의 수비군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군은 군대의 양만 지속적으로 늘어났지 정작 실질적인 전력은 중앙군의 규모인 수만 단위로 계속 머물렀고 지방군은 여전히 형편없어 지방의 반란조차 제대로 진압못하여 중앙군을 파견해서 진압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는 중앙군 육성만으로도 막대한 지출이 나간데다가, 왜란과 호란 이후 100여년에 걸쳐 평화가 지속되면서 지방군을 대규모로 상시 유지할 필요성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방군의 춘조/추조 (봄, 가을의 훈련)이 이루어지던 숙종~영조 시기와는 다르게 정조 시기부터는 춘조나 추조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고, 성을 방어하는 훈련인 성조마저도 기준을 채우지 못하였다.

수군의 경우는 80~100척 가량의 판옥선이 삼도수군 (충청, 전라, 경상)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서히 약체화되어가고 있던 지방군과는 달리 수군은 청나라 해적, 이양선 출몰 등의 위협으로 적어도 순조 때까지는 잘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군 역시 나중에가면 함선 수의 감소와 병력 감소 등으로 인해 육군과 사정이 비슷해질 정도로 서서히 약체화 되어가고 있었다.

2.3. 말기

파일:Korean_soldiers_and_Chinese_captives_in_First_Sino-Japanese_War.png
청일전쟁 당시 청군 포로를 관리하는 조선군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조선의 방위 체계는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농업 생산성이 19세기 초에 크게 악화된데다 오랜 평화로 군대를 크게 유지할 필요성도 없었기에 조선군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기에 서구의 이양선들이 해안에 나타나도 이에 대항할 배 한 척조차 없게 된것이다. 그나마 대원군이 집권하여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하고 서구식 포가를 도입하고 신병기 개발에 노력하고 오군영을 다시 보강하면서 약간이나마 나아진다. 특히 대원군은 병인양요 이후 서양제 무기의 파괴력과 진보성을 인식하고 신무기 제작을 진행했다. 대표작으로는 섬유를 겹쳐 만든 방탄복인 면제배갑이나 수중 기뢰인 수뢰포 등이 있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조선군은 병인양요신미양요에서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백전 발행 등으로 조선 경제를 파탄내면서 조선군은 다시 강화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이 사라지게 되고 이후 고종이 친정하자 군대에 대한 지원이 끊기면서 그 결과 운요호 사건 때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진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군도 변화를 맞는다. 우선 삼군부를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아래 군무사(軍務司)를 설치하여 오군영을 무위영(武衛營)[28]과 장어영(壯禦營)[29]으로 축소 개편한다. 그 유명한 별기군이 바로 무위영(武衛營) 소속이었다. 또한 서양의 신무기를 도입하고 보급하는 데 노력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은 폐지되고 조선의 중앙군은 청, 일본, 조선의 군사교리가 모두 섞인 신식 군대인 친군영(親軍營)으로 변모한다. 지방군 역시 신식 군대화가 진행되어 강화도에 주둔하던 친군심영(親軍沁營)[30], 평양에 주둔하던 친군서영(親軍西營), 대구에 주둔하던 친군남영(親軍南營), 부평에 주둔하면서 경기 연해를 지키는 친군기연해방영(親軍畿沿海防營)[31] 등이 설치된다. 물론 그 당시에도 각 도의 감영, 병영, 수영에 소속된 구식 군대는 남아있었다.[32]

한편 중앙의 친군오영은 전후영(前後營)은 일본군의 영향을, 좌우영(左右營)은 청군의 영향을, 별영(別營)은 전통적인 조선군의 영향을 받아 편제와 교리 등이 중구난방이었다. 그 뿐 만 아니라 당시 한성에는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용호영(龍虎營) 등 기존 조선군 군영들도 온전하게 남아있던터라[33] 중앙군 편제는 상당히 복잡하고 세분화되었었다. 결국 상술한 전통적인 조선군 군영들은 1884년 해체 후 인원들은 친군영에 이관하였으며, 친군영 역시 오영(五營) 체제에서 삼영(三營)체제로 개편한다. 친군 전영과 좌영을 통폐합한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을 통폐합한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 친군 별영을 개편한 친군총어영(親軍摠禦營)으로 친군삼영(親軍三營)체제를 유지하였다가 1891년 북한산성 일대 구 총융청(摠戎廳) 병력을 통위영(統衛營)에서 분리하여 경리청(經理廳)을 신설하면서 친군사영(親軍四營)체제로 굳어지게 된다.

친군영(親軍營)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실전 경험을 다수 겪기도 하였는데, 장위영(壯衛營) 병력과 심영(沁營) 병력[34]이 동학농민군과 교전을 벌인 바 있으며 같은 해 6월 일본군경복궁을 범궐할 당시 장위영(壯衛營), 경리청(經理廳), 평양 기영(箕營) 등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후 무장해제 당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하고 친일내각을 세운 이후 갑오개혁으로 중앙군은 시위대[35], 훈련대[36]가 설치되어 근대식 군대로 재편된다. 하지만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가 일본군과 결탁하여 아군인 시위대를 공격하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가담함에 따라 훈련대와 시위대는 친위대로 개편된다.[37] 지방군 역시 갑오개혁 당시 친군영(親軍營)들이 해체된 이후 구식 감영군(監營軍) 혹은 병영군(兵營軍)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터라 진위대가 신설된다. 이후 의병 봉기가 빈발해자 병력 규모가 증강되어 중앙군은 4,400명으로, 지방군은 3,031명으로 증강되었다.
  • 오군영(五軍營) 폐지 이후 중앙군 군영의 변화
명칭 시기 임무 주둔지 특이사항
무위영(武衛營) 1882 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 한성 별기군이 무위영 소속이었음
장어영(壯禦營) 1882 한성과 수도권 방어 한성 및 수도권 -
친군전영(親軍前營) 1883~1888 - 한성 일본군의 영향 받음
친군후영(親軍後營) 1884~1888 - 한성 전영과 동일
친군우영(親軍右營) 1882~1888 - 한성 청군의 영향 받음
친군좌영(親軍左營) 1882~1888 - 한성 우영과 동일
친군별영(親軍別營) 1884~1888 - 한성 조선군 전통 교리와 편제 따름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1888~1894 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 한성 전영과 좌영 통폐합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 1888~1894 한성과 수도권 방어 한성 및 수도권 후영과 우영,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 통폐합
친군총어영(親軍摠禦營) 1888~1894 한성과 수도권 방어 한성 및 수도권 별영 개편
경리청(經理廳) 1891~1894 수도권 북부 방어 북한산성 통위영(統衛營) 병력 중 구 총융청(摠戎廳) 병력이 분리
훈련대(訓鍊隊) 1894~1895 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 한성 을미사변 당시 왕비 시해에 가담
시위대(侍衛隊) 1894~1895 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 한성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와 교전
친위대(親衛隊) 1894~1905 황제 경호 및 황궁 경비 한성 을미사변 이후 훈련대와 시위대가 통폐합된 조직, 곧 시위대가 다시 독립해나가며 축소
  • 조선 후기 지방군 군영의 변화
명칭 시기 주둔지 특이사항
친군심영(親軍沁營) 1887~1894 강화도 장성 황룡촌 전투 투입
친군서영(親軍西營) 1885~1894 평양 -
친군남영(親軍南營) 1887~1894 대구광역시 -
친군북영(親軍北營) 1894 종성군 -
친군무남영(親軍武南營) 1893~1894 전주시 황토현 전투 투입
친군진남영(親軍鎭南營) 1894 청주시 -
친군진어영(親軍鎭禦營) 1894 춘천 -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 1893~1894 남양 설립 1년만에 심영으로 편입

중앙과 지방의 친군영들은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갑오개혁으로 인해 모두 폐지되었으며,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군은 대한제국군으로 재편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대한제국군을 참고.

3. 편제

육군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눠진다. 전기는 문종 때 형성된 오위 기준이다.
  • 전기
    • 오(伍) : 병사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최하위 제대. 지휘관은 오장(伍長)으로 불렀다. 오장은 군관이 아니라 병졸이 맡았다. 인원 숫자상으론 현재의 [38]에 해당한다.
    • 대(隊) : 5개의 오(伍)로 이루어진 제대. 지휘관은 잡직 정·종9품 치력부위/근력부위 대정(隊正), 부지휘는 잡직 종9품 근력부위 대부(隊副). 현재로 치면 소대에 해당한다.
    • 여(旅) : 5개의 대(隊)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중대와 비슷하다. 지휘관은 잡직 종8품 장건부위 여수(旅帥)로 주로 기병이나 보병에서 승진한 이가 맡았다.
    • 통(哨) : 5개의 여(旅)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대대와 비슷하며 지휘관은 통장(統將)으로 불렀다.
    • 부(部) : 4개의 통(哨)으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연대 내지는 여단과 비슷한 제대. 지휘관은 부장(部長)이라 불렀다. 부장은 종 6품의 병절교위에 해당한다.
    • 위(衛) : 5개의 부(部)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사단과 비슷한 제대. 지휘관은 종2품 위장(衛將)이 맡았다.
  • 후기
    • 대(隊) : 취사병 역할을 하는 화병 1명, 정군 10명과 그 지휘관인 대장(隊長)으로 이루어진 분대급 제대이다. 대장은 잡직 종8품이었으며 보통 군졸에서 승진한 이가 맡았다.
    • 기(旗) : 3개의 대(隊)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소대와 비슷하다. 지휘관은 잡직 정8품 맹건부위 기총(旗摠)이라 불렀다. 기총 역시 군졸에서 승진한 이가 맡았다.
    • 초(哨) : 3개의 기(旗)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중대와 비슷하다. 지휘관은 초관(哨官)이라 불렀다. 초관은 종9품 무관직이었다.
    • 사(司) : 5개의 초(哨)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대대와 비슷한 제대이다. 지휘관은 파총(把摠)이라 불렀다. 파총은 무관뿐만 아니라 문관이 겸임하기도 하였다. 이는 지방관이 해당 고을의 군사를 지휘하는 조선의 군사 체계 때문으로 이런 경우 겸파총이라 불렀다. 실제로 어영청과 금위영의 경우 경기도 일대 수령들이 겸파총이 되어 병력을 이끌기도 했다.
    • 부(部) : 5개의 사(司)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연대와 비슷한 제대이다. 지휘관은 천총(千摠)이라 불렀다. 속오군에는 잘 보이지 않고 주로 오군영에 보이던 제대이다.
    • 영(營) : 5개의 부(部) 내지는 5개의 사(司)로 이루어진 제대. 전자는 사단, 후자는 여단과 비슷한 제대이다. 지휘관은 대장(大將), 혹은 사(使)라 불렀다.[39] 지휘관 밑에는 부지휘관 겸 수석 참모 격인 중군(中軍)이 있다.[40] 중앙군은 오군영(五軍營)에 속해 대장과 사의 지휘를 받았고, 지방군은 해당 지역 감영이나 병영에 속해 관찰사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4. 계급과 보직

아래의 계급과 보직은 조선 중기 / 후기 기준이다.

4.1. 계급

  • 도원수(都元帥) : 임시 계급으로, 지방군을 통솔하던 계급. 지휘 범위는 유동적이다. 주로 정 2품 이상의, 문신이 임명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최고위직이긴 하지만 전시에만 상설되던 임시성과,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던 명령 계통으로 인해 도원수가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상당히 적었다고 한다. 현대의 대장 혹은 현재 한국군에는 없는 원수 정도의 계급으로 현재의 합동참모의장 격.
  • 대장(大將) : 오군영 중 삼군문(三軍門)으로 통칭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장. 종 2품의 무관직으로 훈련도감의 수장인 훈련대장(訓鍊大將)은 서반 최고의 요직으로 대접 받았다.[41]
  • 사(使) : 오군영 중 총융청수어청의 수장으로, 종 2품의 무관직. 대장의 하위 직책 같은 개념으로[42], 초기에는 무관들이 주로 임명되었으나 수어청의 장인 수어사가 18세기 이후 문신인 광주유수 겸임으로 바뀌어 그 세가 약해졌다.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각 도의 육군을 지휘하였던 종 2품의 무관직. 무관이 임명되는 단병사와 관찰사가 겸하는 겸병사가 있었으며, 단병사는 경상도와 함경도에 각 2인, 나머지 6도에 각 1인씩 총 10인이 존재하였다. 지방의 병영에 배치되어 지방군의 훈련을 주재하였으며, 유사시 출전하여 근왕의 임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었으나, 병자호란에서도 보듯이 감사등 문관들이 임무에 상당 부분 간섭하였고, 병마절도사의 권한은 모태가 된 당나라의 절도사의 그 것처럼 막강하진 못했다. 현대의 소장 ~ 중장 정도의 계급.
  • 중군(中軍) : 각 군영에 속했던 종 2품 또는 정 3품의, 참모장 겸 부사령관 정도의 장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에 속한 중군은 종 2품의 품계를 갖고 있었으며, 평시 군영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군영 대장의 유고시 부대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한편 진무영 등 지방군에 속한 중군은 정 3품직이었으며, 병영이나 감영에 배치된 병마절도사감사의 수석 참모장을 맡았다. 현대의 소장 ~ 중장 정도의 계급.
  • 방어사(防禦使) : 각 지방의 방어영에 배치된 종 2품의 무관직. 전원 지방수령이 겸한다. 지방의 방어를 담당하였으며 변란시에는 감사, 병사 등과 협조해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기도 하였음. 방어사를 역임한 무관이 중군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 /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군영 대장으로 영전하는 것이 관례였던만큼 계급은 현대의 소장 정도로 추정된다.
  • 별장(別將) : 각 군영에 속했던 종 2품 또는 정 3품의 당상군관. 금군의 장인 금군별장(禁軍別將)은 종 2품 무관직이었고 5군영과 각 병영에 소속되던 별장은 정 3품직으로 기병을 지휘하였다. 현재의 준장 / 소장(5군영 소속 / 병영 소속) ~ 중장(금군의 경우) 정도의 계급.
  • 천총(千摠) : 현대의 연대나 여단급 정도의 부(部)를 지휘하던 정 3품 무관직의 장교. 군영마다 존재하였으며, 지방의 병영이나 감영에도 배치되어 지방군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현대의 준장 / 소장 정도의 계급.
  • 영장(營長) : 현대의 연대급 정도인 지방의 진영(鎭營)[43]의 군사들을 지휘하던 정3품의 군관 벼슬. 중앙의 총융청, 수어청 등에도 존재하였다. 주로 속오군을 지휘하였으며, 중앙에서는 군영의 중군이나 판관[44]이 겸임하였고 지방에서는 해당 지역 지방관 혹은 판관이 겸직하였다. 인조 때는 전임 영장제를 시행하여 상당 부분 권한이 확대되기도 하였으나 가속된 속오군의 천역화 등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한 자리가 됨. 하지만 북도 (함경도)등의 영장은 계속 존속하여 지방 방위에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음. 현대의 준장 / 소장 정도의 계급.
  • 절제사(節制使) : 진관 체제 하에서 중요한 거진(巨鎭)에 두었던 정 3품 무관직. 경주, 전주, 의주, 광주, 제주에만 두었는데 제주에만 병마수군절제사를 두고 나머지는 병마절제사를 두게 했다. 제주의 경우 제주 목사가 절제사를 겸했으며 경주, 전주, 의주, 광주에서는 부윤이 겸하였다. 현대의 준장 / 소장 정도의 계급.
  • 첨절제사(僉節制使)[45] : 조선 시대의 거진을 담당하던 종 3품 무관직으로 만호와 같이 육군과 수군 모두에 존속하였다. 부산진 등 각 진마다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함경도 등 북도에도 배치되어 국경 경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현대의 대령 / 준장 정도의 계급.
  • 만호(萬戶) : 지방의 진관 체제 하의 각 진에 속한 장교. 육군과 수군 모두에 존재하였으며 변경에서는 독자적인 방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종4품직으로 현재의 중령 정도의 계급.
  • 파총(把摠) : 현대의 대대급 정도인 사(司)를 지휘하던 종 4품의 장교. 지방 수령이 파총을 맡은 겸파총제가 시행되기도 하였으며 중앙군인 5군영뿐만 아니라[46] 각 지방의 감영(監營), 병영(兵營) 소속 사(司)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다. 정 4품직으로 현재의 대령 정도의 계급.
  • 종사관(從事官) : 각 군영의 대장이나 중군 하에서 잡무를 처리하며 보좌하던 관직. 종 6품의 품계를 갖고 있었으며, 무관뿐만 아니라 문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군영의 재정 업무를 겸하기도 하였으며 훈련도감 등에서는 화약색의 관리 중 겸임하여 화약 등 군수품 제조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의 소령 정도의 계급.
  • 조방장(助防將) : 전란 시, 주장(主將)을 도와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임명되는 임시직이다. 주로 관할 지역 내에 있는, 무재(武才)를 갖춘 수령이 이 임무를 맡았다. 제주진관에서는 제주진관 관할 9진(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수산진, 서귀진, 차귀진, 모슬진, 명월진, 애월진)중 만호가 지휘하는 명월진을 제외한 나머지 8진을 지휘하는 종9품 무관직으로 본토와는 다르게 상설직이었다. 조선초기 방호소 시절엔 감영에서 파견된 여수가 수장으로 있었다가 17세기 이후 9방호소가 모두 진(鎭)으로 승격된 후 제주진 병마수군절제사[47] 휘하의 조방장으로 대체되었다. 이들 조방장은 제주출신 군교로서 제주목사가 임명한다.
  • 권관(權管) :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에서 소규모 진보(鎭堡)를 책임졌던 종9품 무관직. 원래는 법에 없는 임시직이었으나 속대전에 기록되면서 정식 관직이 되었다.
  • 초관(哨官) : 무관의 최하직. 종 9품으로 현대의 중대급 정도인 1개 초(哨)를 지휘하였다. 훈련도감에 34인, 어영청에 45인, 금위영에 41인이 존재하였으며 지방군에도 존재하여 초를 지휘하였다. 현대의 중위 / 대위 정도의 계급. 대부분의 무과 급제자들이 처음 제수받는 관직이었다.[48]
  • 기총(旗總) : 서반 잡직 종8품으로 현대의 소대급 정도인 1개 기(旗)를 지휘하였다.
  • 진무(鎭撫) : 무품으로 군영에서 군관을 보좌하여 군사와 관련된 실무를 담당하던 최하위 관직으로서 현대의 중사 / 상사 정도의 부사관 계급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 군교(軍校) : 무품인 아전으로 지방 군영 관청에서 군졸들 위에서 지휘하는 현대의 하사 계급에 대응한다.

4.2. 품계

품계 정직 - 무관 (장교) 잡직 - 군교 (준·부사관)
정1품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 -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 -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 -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 -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 -
정3품하 어모장군(禦侮將軍) -
종3품상 건공장군(建功將軍) -
종3품하 보공장군(保功將軍) -
정4품상 진위장군(振威將軍) -
정4품하 소위장군(昭威將軍) -
종4품상 정략장군(定略將軍) -
종4품하 선략장군(宣略將軍) -
정5품상 과의교위(果毅校尉) -
정5품하 충의교위(忠毅校尉) -
종5품상 현신교위(顯信校尉) -
종5품하 창신교위(彰信校尉) -
정6품상 돈용교위(敦勇校尉) 봉임교위(奉任校尉)
정6품하 진용교위(進勇校尉) 수임교위(修任校尉)
종6품상 여절교위(勵節校尉) 현공교위(顯功校尉)
종6품하 병절교위(秉節校尉) 적공교위(迪功校尉)
정7품 적순부위(迪順副尉) 등용부위(騰勇副尉)
종7품 분순부위(奮順副尉) 선용부위(宣勇副尉)
정8품 승의부위(承義副尉) 맹건부위(猛健副尉)
종8품 수의부위(守義副尉) 장건부위(壯健副尉)
정9품 효력부위(效力副尉) 치력부위(致力副尉)
종9품 전력부위(展力副尉) 근력부위(勤力副尉)
  • 조선에서는 정직과 잡직의 계급을 구분했는데, 정직은 무관 즉 한국군의 장교에 해당하는 자에게, 잡직은 군교 즉 한국군의 준·부사관에 해당하는 자에게 부여되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정직(무관)과 잡직(군교)은 품계가 같아도 동등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직 종9품 전력부위 초관(중대장)이 잡직 정8품 맹건부위 기총(소대장)을 지휘했던 것, 군교(준·부사관)를 무관(장교)으로 천거할 경우에는 1품을 강등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4.3. 보직

4.3.1. 경관직

중추부(中樞府)[49]
  • 정1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원
  •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2원
  • 정2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6원
  • 종2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8원
  •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副事)
  • 종4품 경력(經歷) 1원
  • 종5품 도사(都事) 1원

오위도총부
  • 정2품 도총관(都摠管) 5원
  • 종2품 부총관(副摠管) 5원
  • 종4품 경력(經歷) 6원
  • 종5품 도사(都事) 6원

훈련원(訓鍊院)[50]
  • 정2품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1원: 타관의 겸직이다.
  • 정3품 도정(都正) 2원: 1원은 타관의 겸직이다.
  • 정3품 정(正) 1원
  • 종3품 부정(副正) 2원
  • 종4품 첨정(僉正) 4원
  • 종5품 판관(判官) 8원
  • 종6품 주부(主簿) 18원
  • 종7품 참군(參軍) 2원
  • 종8품 봉사(奉事) 2원

선전관청(宣傳官廳)
  • 정3품~종9품 선전관(宣傳官) 24원
  • 종6품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 2원
  • 종6품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38원
  • 종9품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12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 정5품 좌·우익위(左右翊衛) 각 1원
  • 종5품 좌·우사어(左右司禦) 각 1원
  • 정6품 좌·우익찬(左右翊贊) 각 1원
  • 종6품 좌·우위솔(左右衛率) 각 1원
  • 정7품 좌·우부솔(左右副率) 각 1원
  • 정8품 좌·우시직(左右侍直) 각 1원
  • 정9품 좌·우세마(左右洗馬) 각 1원
세손위종사(世子衛從司)
* 종6품 좌·우장사(左右長史) 각 1원
* 종7품 좌·우종사(左右從史) 각 1원
수문장청(守門將廳)
* 종6품 수문장(守門將) 5원
* 종9품 수문장(守門將) 18원

훈련도감(訓鍊都監)[51]
  • 정1품 도제조(都提調) 1원: 의정이 예겸한다.
  • 정2품 제조(提調) 2원: 호조판서, 병조판서가 예겸한다.
  • 종2품 대장(大將)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별장(別將) 2원
  • 정3품 천총(千摠) 2원
  • 정3품 국별장(局別將) 3원
  • 종4품 파총(把摠) 6원
  • 종6품 종사관(從事官) 6원
  • 종9품 초관(哨官) 34원
  • 지구관(知彀官) 10인: 항오(병) 중에서 취재하여 차출한다.
  • 기패관(旗牌官) 20인: 항오(병) 중에서 취재하여 차출한다.
  • 별무사(別武士) 68인: 항오(병)으로 차출한다.
  • 군관(軍官) 15
  • 별군관(군관(軍官) 15
  • 별군관(別軍官) 10
  • 권무군관(勸武軍官) 50
  • 국출신(局出身) 150

금위영(禁衛營)
  • 정1품 도제조(都提調) 1원
  • 정2품 제조(提調) 1원: 병조판서가 예겸한다.
  • 종2품 대장(大將)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별장(別將) 1원
  • 정3품 천총(千摠) 4원
  • 정3품 기사장(騎士將) 3원
  • 종4품 파총(把摠) 5원
  • 종4품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12원: 고을의 수령이 예겸한다.
  • 종6품 종사관(從事官) 2원: 문무관 각 1원.
  • 종9품 초관(哨官) 41원
  • 교련관(敎鍊官) 12
  • 별무사(別武士) 30
  • 군관(軍官) 5
  • 별군관(別軍官) 10
  • 권무군관(勸武軍官) 50
  • 기사(騎士) 150
  • 별기위(別騎尉) 32

어영청(御營廳)
  • 정1품 도제조(都提調) 1원
  • 정2품 제조(提調) 1원: 병조판서가 예겸한다.
  • 종2품 대장(大將)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별장(別將) 1원
  • 정3품 천총(千摠) 5원
  • 정3품 별후부천총(別後部千摠) 1원
  • 정3품 기사장(騎士將) 3원
  • 종4품 파총(把摠) 5원
  • 종4품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10원: 고을의 수령이 예겸한다.
  • 종6품 종사관(從事官) 2원: 문무관 각 1원.
  • 종9품 초관(哨官) 41원
  • 교련관(敎鍊官) 12
  • 기패관(旗牌官) 11
  • 별무사(別武士) 30
  • 군관(軍官) 41
  • 별군관(別軍官) 10
  • 권무군관(勸武軍官) 50
  • 가전별초(駕前別抄) 52
  • 기사(騎士) 150

수어청(守禦廳)
  • 종2품 사(使)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별장(別將) 2원
  • 정3품 천총(千摠) 1원
  • 종4품 파총(把摠) 3원
  • 종6품 종사관(從事官)
  • 종9품 초관(哨官) 12원
  • 교련관(敎鍊官) 7
  • 군관(軍官) 3
  • 한량군관(閑良軍官) 283

수어청남한(南漢)
  • 정3품 수성장(守城將): 광주부윤(廣州府尹)이 예겸한다.
  • 정3품 유영별장(留營別將) 1원
  • 정3품 성기별장(城機別將) 1원
  • 종9품 초관(哨官) 5원
  • 교련관(敎鍊官) 10
  • 기패관(旗牌官) 60
  • 군관(軍官) 43
  • 권무군관(勸武軍官) 50
  • 이속군관(移屬軍官) 290
  • 부료군관(付料軍官) 27

총융청(摠戎廳)
  • 종2품 사(使) 1원
  • 종2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천총(千摠) 2원
  • 종4품 파총(把摠) 2원
  • 종9품 초관(哨官) 10원
  • 교련관(敎鍊官) 15
  • 군관(軍官) 14
  • 감관(監官) 2
  • 수문부장(水門部將) 1
  • 한량군관(閑良軍官) 300

수어청북한(北漢)
  • 정3품 관성장(管城將) 1원
  • 종4품 파총(把摠) 1원
  • 종9품 초관(哨官) 6원
  • 교련관(敎鍊官) 4
  • 기패관(旗牌官) 5
  • 수첩군관총(守堞軍官摠) 2
  • 군기감관(軍器監官) 1
  • 소임군관(所任軍官) 3
  • 부료군관(付料軍官) 20
  • 성문부장(城門部將) 3

호위청(扈衛廳)
  • 정1품 대장(大將) 1원: 시·원임대신=의정, 국구 중에서 겸한다. 비록 대신(=의정)이어도 훈척(勳戚)이 아니면 겸할 수 없다.
  • 정3품 별장(別將) 3원
  • 군관(軍官) 350
  • 소임군관(所任軍官) 3
  • 당상별부료군관(堂上別付料軍官) 1

용호영(龍虎營)
  • 종2품 별장(別將) 1원
  • 정3품 장(將) 7원
  • 당상군관(堂上軍官) 16
  • 교련관(敎鍊官) 14
  • 별부료군관(別付料軍官) 80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52]
  • 종2품 대장(大將) 각 1원
  • 종6품 종사관(從事官) 각 3원
  • 각 부장(部將) 4
  • 무료부장(無料部將) 26
  • 가설부장(加設部將) 12

관리영(管理營)
  • 종2품 사(使) 1원
  • 정3품 중군(中軍) 1원
  • 종사관(從事官) 1원
  • 별장(別將) 2
  • 천총(千摠) 3
  • 백총(百摠) 4
  • 파총(把摠) 6
  • 초관(哨官) 32
  • 교련관(敎鍊官) 8
  • 기패관(旗牌官) 36
  • 당상군관(堂上軍官) 50
  • 군관(軍官) 250

진무영(鎭撫營)
  • 종2품 사(使) 1원
  • 정3품 중군(中軍)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5원
  • 종사관(從事官) 1원
  • 천총(千摠) 4
  • 파총(把摠) 10
  • 초관(哨官) 36
  • 교련관(敎鍊官) 10
  • 기패관(旗牌官) 71
  • 군관(軍官) 15

4.3.2. 외관직

경기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3원
  • 정3품 절제사(節制使)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7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8원
  • 종4품 만호(萬戶) 4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13원
수군
  • 종2품 수군통어사(水軍統禦使) 1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2원
  • 정3품 절도사(節度使) 1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당상 광주중군(廣州中軍)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6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3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2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5원
  • 종9품 별장(別將) 7원

충청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2원
  • 종3품 우후(虞候)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3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3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38원
수군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2원
  • 정4품 우후(虞候) 1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5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3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1원

경상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3원
  • 종3품 우후(虞候) 2원
  • 정3품 절제사(節制使)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6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25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39원
수군
  • 종2품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1원
  • 정3품 당상 우후(虞候) 1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절도사(節度使) 3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6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4원
  • 정4품 우후(虞候) 2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3원
  • 종4품 만호(萬戶) 15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3원
  • 종9품 권관(權管) 2원
  • 종9품 별장(別將) 10원

전라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2원
  • 정3품 절제사(節制使) 1원
  • 종3품 우후(虞候) 1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7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35원
수군
  • 종2품 방어사(防禦使) 1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3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5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4원
  • 정4품 우후(虞候) 2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6원
  • 종4품 만호(萬戶) 15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 종9품 별장(別將)
제주진관[53]
  • 정3품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 1원
  • 종4품 만호 1원[54]
  • 종9품 조방장 8원[55]
  • <군교> 성장 4원
  • <군교> 별장 383원[56]
  • <군교> 치총 28원

황해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2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1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8원
* 종4품 만호(萬戶) 3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8원
수군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2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5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1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5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3원
* 종9품 별장(別將) 5원
강원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1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3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11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12원
수군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3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1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함경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3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1원
  • 정3품 당상 우후(虞候) 2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24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7원
  • 종4품 만호(萬戶) 18원
  • 정6품 평사(評事) 1원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4원
수군
  • 정3품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정3품
  • 정3품 진영장(鎭營將) 6원
  • 정3품 위장(衛將) 10원
  • 종4품 만호(萬戶) 1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3원
  • 종9품 권관(權管) 15원
  • 종9품 별장(別將) 2원

평안도
육군
  • 종2품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2원
  • 종2품 방어사(防禦使) 2원
  • 정3품 당상 우후(虞候) 1원
  • 정3품 절제사(節制使) 1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24원
  • 종4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25원
  • 종4품 만호(萬戶) 15원
  • 정6품 평사(評事)
  • 종6품 절제도위(節制都尉) 11원
수군
  • 종2품 방어사(防禦使) 2원
  • 정3품 당상 순영중군(巡營中軍) 1원
  • 정3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1원
  • 정3품 진영장(鎭營將) 9원
  •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 5원
  • 종6품 감목관(監牧官) 1원
  • 종9품 권관(權管) 14원
  • 종9품 별장(別將) 4원

5. 우수성

5.1. 궁시 병과의 정예화

왜적은 지난날 중국의 창법, 조선의 편전, 일본의 조총이 천하의 제일이라고 하였다.[57]
지봉유설 권18 기예부
남곤이 아뢰기를,

"왜인도 활을 잘 쏘던가?"

하니, 나사항이 말하기를,

"비록 쏘는 자가 있었으나 활이 강하지 못하여, 맞은 자가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궁(角弓)을 사용하여 쏘던가?"

하매, 나사항이 아뢰기를,

"왜인들이 방패 안에서 활을 쏘았으므로 무슨 활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남곤이 말하기를,

"방패 안에 있었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쏘아 맞혔는가?"

하니, 나사항이 말하기를,

"그 방패 위에 두 귀[耳]가 있었는데, 왜인들이 반드시 이를 통하여 엿보았으므로 쏘아 맞힐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중종실록 48권, 중종 18년 7월 6일 갑술 2번째기사

서양은 영국을 제외하면 궁병이 보통 원거리에서 쏴대는 겁쟁이라는 이미지를 가졌으며 로마 시대에는 헤라클레스의 활 솜씨 가지고 겁쟁이라고 폄하하는 내용도 있던뿐더러 지략과 꾀로 트로이 전쟁을 이기게 한 명장 오디세우스도 명궁수라는 점을 빗대 오디세우스도 겁쟁이라서 가능했다며 폄하하였다. 게다가 중갑기병의 등장으로 활이 장궁이 아니라면 뚫지도 못 하니 더더욱 천대를 받게 되었다.

반면 조선은 건국군주이자 초대 왕 태조가 명궁수였기에 궁시에 대한 대우가 매우 좋았으며[58] 고려시대에도 궁시에 대한 대우는 좋았다. 이런 궁시의 대우 덕에 양반은 물론 왕까지 과녁대에 활을 쏘는 취미 생활을 즐겼으며 장수들 대부분도 해상전을 빼면 궁시가 더 뛰어나다며 고평가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궁시병을 아예 조총병으로 전환하였고 조총병들을 집중육성 한 덕에 명중률이 높은 사수들이 배출되었다.

5.2. 화약무기의 대량 운용

대규모 전투로 나라가 혼란했던 조선 초기의 북방 개척 시기, 왜구 격퇴 시기 및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주로 화약 무기 분야에서 기술적인 발전이 있었다. 주로 중국에서 들여온 화포를 이러저리 뜯어보고 개량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고, 이렇게 쌓아둔 노하우를 바탕으로 비격진천뢰승자총통, 세총통, 천보총, 대장군전처럼 독자적인 병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고려 말의 혼란으로 무기 제작 지식이나 운용 노하우등이 많이 실전되어[59] 화포 기술이 아직 발전하지 않았던 조선 초창기에는 총통이 활보다 성능이 떨어져서 아예 전부 폐기하자는 의견도 나올 정도였다. 태조 역시 일신의 무예와 가문의 전통적 전투기술을 중시하는 집단의 대표라 볼 수 있는 명궁이라 총통에 별 관심이 없었다.[60] 그래서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 소양을 지니고 전통적 전투기술보다 효율성을 먼저 추구하는 집단의 대표라 볼 수 있는 태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화포 관련 개발이 시작되어, 과학기술 발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세종 ~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구경과 종류의 총통과 기타 화약 무기들이 개발되고, 총통의 사용법과 전술까지 제식화하는 등 사실상 조선군 무기 체계의 기틀이 마련된다.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무기들 중 신기전(神機箭)은 여말선초 시기에 등장한 주화를 개량한 것으로, 1448년(세종 30년) 만들어진 로켓 개념의 무기다.[61] 개발에만 그치지 않고 신기전을 실전 배치 및 운용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은 일부 독자적인 과학기술의 발달이 있었으며 로켓 형식의 무기를 운용할 줄 알았다. 신기전을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차는 신기전기(神機箭機)로 불렸고 지금도 설계도가 남아 있다.

신기전은 고려 시대 최무선에 의해 발명된 로켓 병기인 주화(走火)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기도설〉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비장의 무기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기전은 화약의 사용량이 너무 크고 명중률이 떨어져 실효성은 떨어졌다고 한다. 신기전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대신기전(大神機箭),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中神機箭), 소신기전(小神機箭)으로 나뉜다.

대신기전은 길이 5.6m, 사거리 2km, 최대 3km. 공격용 발화통을 장착한 무기다. 1448년 세종 때 만들어졌다고 하며 90개가 제조되어 의주성에서 사용되었다. 화약은 약 3kg으로 조총 1000회 발사 분량이다. 목표 지점에 다다르면 폭발물이 자동으로 터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번에 1발씩만 발사할 수 있다.

산화신기전은 길이 5.3m. 사거리 2.4km, 최대 3.4km. 공격용 발화통을 장착한 무기로 대신기전보다 길이만 짧은 것 뿐이지 사거리나 폭파 범위는 다르지 않다. 다만 탄두에 철편(쇠파편 조각)이 내장되어 있어 살상 능력이 더욱 강력해진 무기이다. 무려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흠좀무한 물건. 1단이 다 소모되면 지화가 점화되어 600미터를 더 날아갈 수 있다. 한번에 1발씩만 발사할 수 있다.

임진왜란비격진천뢰라는 폭발 시간을 조절하여 내부의 철 조각으로 주위에 피해를 주는 일종의 시한폭탄도 개발하여 경주 전투를 시작으로 실전 배치되었다. 주로 인마 살상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바위에도 파편이 박힐 정도로 강력한 성능이라고 한다.

또한 신기전의 발사체계로도 알려진 화차는 문종 치세때 현대의 모듈러식 체계와 같이 상부 부품을 교체하는 것만으로 서양의 오르간 건같은 총통기신기전을 쏘는 신기전기를 둘다 운용할 수 있게 개량되었으며, 이를 문종화차라고 불렀다.

안골포 해전 때 등장한 천자총통용 탄자인 대장군전은 당시 대함 미사일급의 위용으로 왜군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무기였으며, 구키 요시타카가 챙겨갔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5.3. 해군의 제도화

고려 말인 1389년(창왕 1년) 박위 등은 왜구 근절을 목적으로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조선 개국 후인 1396년(태조 5년) 김사형 등이 병력을 이끌고 다시 한 번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1419년(세종 1년) 왜선 50여 척이 충청도 해안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상왕 태종이종무를 삼도 도체찰사로 삼아 그해 6월 19일에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때 동원된 함선은 227척, 병력은 1만 7,285명에 달했다. 20일에 대마도에 도착한 원정군은 다수 적병을 참수하고 조선인, 중국인 포로들을 구출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이 여말선초 시기에 세 차례나 대마도를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수군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 초에 이르러 수군은 육군과 분리된 병종으로 지위가 확립되었는데, 이는 고려 말의 수군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수군의 강화는 역설적으로 왜구의 잦은 침입에 기인한 것이었다.

태종은 즉위 이후 국방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며 수군 체제도 정비하였다. 거북선[62] 등 군선을 건조하고 화기류를 중심으로 다양한 탑재 무기를 개발하였다. 세종도 부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조선술을 발전시키고 대규모로 군선을 건조하여, 맹선(猛船), 병선(兵船) 등 829척에 이르는 군선을 보유하게 되었다. 당시 수군의 총 병력은 5만여 명에 달했다. 그러한 거대한 병력은 수군 도안무처치사, 첨절제사, 만호 등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15세기 이르러서는 수군의 지휘체계가 확립되었다. 1457년(세조 3년)에는 전국 지방 군사 조직이 진관체제로 통일되어, 육군과 더불어 수군도 절도사-첨절제사-만호의 일원적인 지휘체계를 갖추게 되었다.[63]

이러한 노력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순신의 손에 크게 빛나며 조선을 구해냈다. 당시 조선군이 대적한 일본군은 병선 숫자만 2,200여 척에 달하는, 양적으로는 당대 지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전력이었는데, 조선군은 이에 한 번 빼고 밀리지 않고 오히려 시종일관 우세를 점했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부터 숙종 중기까지 조선 수군은 부인할 자 없는 동아시아 최강의 수군으로 군림했다. 청나라도 두려워 했을 정도로.

6. 문제점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64][반론][66]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00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 말 홍건적(紅巾賊)의 난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위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67]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자고로 국세가 이와 같으면 반드시 이적(夷狄)의 화를 받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일이 실로 염려된다. 무략만 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집(宰執)들 중에도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신진 문사들은 전연 무사(武事)를 모르고 있다. 내가 조신(朝臣)들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무신은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독서한 연후에야 고금 성패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알아도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 자 또한 드문데 하물며 전연 옛글을 모르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고사(古史) 뿐 아니라 병가(兵家)의 글을 아는 자 또한 전무하다."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 기사[68]
임금이 경기감사 류엄(柳儼)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때에 심양문안사(瀋陽問安使)의 행차가 있었는데, 경외(京外)에서 어수선하여 뜬소문이 크게 떠도니, 임금이 몹시 근심하여 도성을 지키는 것과 강도(江都)에 들어가는 것의 편의 여부를 류엄에게 물었다. 이에 류엄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외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자, 류엄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약소국가입니다. 몽고(蒙古)가 공격해 오면 청인(淸人)의 경우와 같이 접대(接待)해야 하고, 비록 서달(西韃)이 공격해 온다 하더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할 뿐입니다."[69]
하였다. 이에 임금이 아무 대답 없이 주서를 돌아다보며 이르기를,
"이런 말들은 모두 기록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약소국가이다. 그러나 류엄의 대답한 말은 어찌 이다지도 무례(無禮)하단 말인가? 식자(識者)로 하여금 한심하게 여길 만하니, 임금의 대답이 없었던 것도 마땅한 일이다."[70]
영조실록 58권, 영조 19년 8월 17일 정묘 1번째 기사 1743년 청 건륭(乾隆) 8년

애석하게도 조선은 대규모의 군대를 유기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데 문제가 많았다. 여진족이나 왜구, 반란, 도적 등 소규모 혹은 2만대의 중규모 퇴치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임진왜란과 호란 당시 10만 이상의 왜군과 후금군과 같이 대규모의 외국 정규군과 맞설 때 문제를 보였다. 물론 조선의 실권자들도 이를 인지하고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지만, 조선의 국가적 한계가 발목을 잡아 끝내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은 재정이나 통제 문제로 평시에 대규모 병력을 미리 배치하는 것이 어려웠다.[71] 이를 해결하려면 지방 사족들에게 어느 정도 군사적 자율권을 주어야 하는데 문제는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는 조선의 국왕들 입장에선 정치적 위험이 높을 뿐더러, 지방 사족들이 군사력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발판이 될 수 있어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양민들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하는 것 역시 조선이 추구하는 왕도 정치에 어긋나는 폭정이었다.[72] 그러나 보니 조선은 국경의 방어선이 가진 종심이 얕아 대규모 외침에 쉽게 뚫렸다.[73] 조선이 우수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제승방략에 의거해 급히 병력을 징발하고 소집해도 적의 본대는 이미 영토 깊숙이 들어온 뒤였다. 이러다보니 조선의 정규군 규모는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매우 적었기에 군대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하며 전쟁이 일어나면 최후의 수단이 중앙군 파견이었고 나머지는 각 감영에서 모은 민병대 수준의 정규군을 모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의 최고 지휘관이 전국의 병력을 일시분란하게 지휘하여 적을 포위섬멸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당시 교통통신 기술로 그건 불가능했다. 또한 조선군의 최고 지휘관은 얼마 되지 않는 휘하 병력으로 자기 구역의 전선을 유지하느라 바빠 타지역을 신경 쓸 여유도 부족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현장을 모르는 조정대신들의 수없이 내려오는 간섭과 훈수를 적절히 대처해야만 했다. 왜냐면 전시의 조선 조정은 군대에게 주로 공격적인 작전을 요구했다. 사실 조선 조정도 이러한 작전이 생각없이 한것이 아니고 그들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게 당장 왕의 안위가 위험하기도 했고, 전쟁이 길어지면 조정의 권위가 추락하고 왜란 시기의 의병처럼 지방 세력이 자체적으로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지방 세력의 군벌화는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조선 왕조 입장에서 그 어떤 것보다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지나쳐서 나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결국 각지의 조선군은 서로 원활하게 연계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싸워야 하는 경우가 흔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유격전을 벌이며 잘 싸운 사례도 있지만, 유기적인 운용 부족으로 적군에게 무력하게 각개격파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밖에 부족한 숙련병과 부사관 계층으로 인한 부대 통제의 어려움, 원거리에 편중된 병력 구성으로 생긴 취약한 야전 능력도 큰 난관으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조선군은 지휘관 입장에서 봤을 때 지휘난이도가 매우 높은 난해한 군대였다. 다른 나라였으면 이런 식으로 군대를 엄두도 못 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무과로 선발한 조선의 인재와 인력이 이런 군대도 어떻게 굴러가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기할 점을 하나 꼽자면 조선시대의 군사력 약화가 동서고금의 다른 여러 나라와 달리, 체제의 붕괴가 아니라 체제의 정비와 완성 단계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조선군은 통치세력의 능력과 주변 환경의 영향을 따지기 전에 군사제도 설계와 운용에서부터 심각한 결함을 내포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 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 것은 부당한 면이 크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보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조선처럼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이면의 사정을 살펴보자면, 조선군의 경우 대규모 전투가 드물다보니 독자적으로 군제를 짜기엔 실전 데이터가 모자랐고, 중국의 군제를 많이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당시 중국인 명나라의 군사제도가 조선 입장에선 모방하기 좋은 게 아니었다. 명나라는 초기에 부병제의 원리에 기반한 위소제를 운용했는데 이것이 16세기쯤 되면 유명무실해져 북로남왜라 불리는 가정 연간의 외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74] 이때 척계광이 나서서 자신이 고안한 전술로 남왜와 북로를 소탕했다. 남쪽의 왜구를 상대하기 위한 전술은 기효신서, 북방의 기마민족을 상대하기 위한 전술은 연병실기라는 저술로 남겼고, 이것이 조선에도 도입되었다.

연병실기의 거보기영진은 조선의 지형 특성상 운용하기 어려워서 기효신서의 절강병법이 주축이 되어 도입되었는데, 문제는 이 절강병법이 각 병종 별로 굉장한 수준의 전문성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75] 병농일치가 근간인 조선으로서는 숙련병을 제대로 수급할 필요가 없어서[76] 절강병법을 현지화 하여 삼수병 체제로 운영했다. 그런데 삼수병 체제는 살수의 비중이 매우 적고 포수와 사수의 비율이 과도하다보니 기병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호란 때 조선군이 청나라의 기병대에게 처참하게 패하는 원인이 된다.[77]

6.1. 유명무실해진 지방군

조선은 이전의 한국사 왕조들에 비하면 편집증적인 수준으로 국가의 군사력 전반을 완전히 통제하는데 집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지나쳐서 만약 중앙의 행정력으로 지방의 군사력을 파악하거나 통제하기 여의치 않다면 통제가 가능한 수준까지 군사력을 축소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애초 조선이 태조 이성계가 당대의 최고위 무장으로서 쿠데타를 일으켜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부터 유력 가문들의 사병(私兵) 보유 금지가 국가의 중요한 정책 목표로 자리잡았고, 사병을 혁파한 이후에는 지방의 정규군도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정예병을 보유한 변방의 군사 책임자에게 조정의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가 뒤따랐기 때문에 결국 지방의 군사 책임자들 대부분이 군사 훈련에 소극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군적 역시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장부상으론 수백 명이나 수천 명의 병력이 있어도 정작 전시에 출정하려고 보면 실제 인원은 그것의 반도 채 안 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딴에는 대비를 열심히 한 임진왜란 때도 제대로 군사를 조련해 두었던 지휘관은 이순신을 비롯한 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성을 쌓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일에 그쳤거나 그것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때문에 병력이 부족하거나 없는 성이 많아져 왜란 초에 조선의 성들이 일본군에게 매우 손쉽게 함락되었고, 심지어 비축된 군량미들이 통째로 일본군에게 넘어가서 전쟁이 장기화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병자호란 때는 청을 상대하기 위해 평안도에서 야심차게 정예군 육성을 시도하지만, 그 지휘관인 이괄이 중앙정부의 권력 다툼에 관련되어 위기에 몰리자 반란을 일으켜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반란을 진압한 장수들조차 조정의 극심한 통제 때문에 제대로 군사를 훈련시키지 못했고, 그들에게 주어진 병력도 소수의 군대만 주는 바람에 전쟁 당시에는 청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도 못하고 분전하다가 죽는 사태가 벌어진다. 무엇보다 주력군의 병권을 인조가 측근들에게 넘겨줬는데 문제는 이들이 지리멸렬한 지휘[78]로 도박수를 감행한 청나라를 행복하게 해줬다.

양란 이후 조선에선 지방군 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논의가 있었다.[79] 하지만 그로 인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조선이란 나라의 정치적 정체성과 맞지 않아 포기하고 대신 강력한 중앙군 육성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비대해진 중앙군은 자연스럽게 막대한 재정 수요를 창출했고 조선은 이걸 장기간 건실하게 유지할 역량이 없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후술.

6.2. 빈번한 지휘 간섭과 난잡한 명령체계

조선군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으로 임진강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 쌍령 전투와 같이 아군이 유리한 상황에서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여 조선의 주력군이 어처구니 없이 붕괴되는 참사가 발생한 원인이었다.

군권을 지닌 지휘관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조선의 방침은 평시뿐만 아니라 전시에도, 지방군과 중앙군을 가리지 않고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이로 인해 조선 특유의 기형적이고 난잡한 명령체계가 탄생하고 말았다.

이는 위의 조선군 계급체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온갖 명칭의 직급이 난잡해있으며 심지어 각 직급별 위아래 구분도 명확치가 않다. 이는 비슷한 시기 중세 후반 유럽의 군대 계급체계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군통수권자인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계급인 기병 장관부터[80] 말단 사병까지 그 사이에 있는 계급이 10여 개 이하일 정도였다. 반면 조선군은 상술한대로 부사관 이상만 쳐도 20여 개였으니 소통이 원활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조선군은 명목상 전군의 최고 지휘관인 도원수조차 군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왜냐면 조선 조정이 기존 군대 계급 외에 따로 도체찰사, 체찰사 등을 파견하여 군대에 간섭했는데 여기에 임명되는 건 보통 도원수보다 끗발 있는 대신이었기 때문에 도원수가 제대로 지휘관을 행사하기가 힘들었다. 이전 왕조들엔 10만 이상의 대군을 지휘했던 최고 지휘관도 등장했었지만 조선의 도원수는 최고 지휘관인데도 5만 이상의 병력을 제대로 지휘한 사례가 없다. 이러다보니 각지의 군대는 도원수의 명령보다는 조정의 명령을 우선시했고, 실질적으로 도원수가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많아야 2~3만 정도인 자기 직속부대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도원수부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최고사령부 노릇을 한 조정이 후방에 있어 정보전달이 느리고, 수뇌부인 국왕과 대신들이 군사적 식견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현장 지휘관들의 정당한 판단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이다보니 결국 이는 전세에 악영향을 크게 끼쳤던 것이다. 유약했다는 편견과 달리 조선의 국왕들과 골수 유학자들은 전시에 굉장히 호전적인 강경론자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유학자들은 충의를 중시하기에 국란이 닥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가서 싸우는 걸 당연시했고 그걸 실천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국왕과 대신들은 현장 지휘관이 전세가 불리해서 방어를 해야 할 때도 그를 오히려 겁쟁이로 매도하며 무조건 겁먹지 말고 싸우라고 닥달하는 똥별 같은 행태를 보이며 전투를 말아먹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실무 경험이 적고, 무제한 비판이 가능하며 그 결과를 책임질 필요도 없는 대간들이 이런 경향이 심했다. 당시 흔했던 의사 결정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1. 도원수, 수사, 병사가 현재 작전 진행 상황을 보고한다.
2. 국왕이 대신들과 의논해 보고 이러이러한 작전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3. 현장 지휘관은 이러이러한 작전은 지금 상황에서 어렵다고 답변한다.
4. 국왕과 대신들은 정말 현장의 상황 때문인지, 지휘관이 딴 마음을 품은 건지 의심한다.
5. 중앙에서 조사관이 내려와 군영을 뒤집어 놓는다.
6. 심한 압박감에 못 이긴 현장 지휘관이 최대한 조정의 의견을 반영하여 작전을 진행한다.

당연히 이렇게 진행한 작전은 대부분 폭망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용인 전투칠천량 해전.

지방군의 명령 체계도 문제가 많았는데 각 도의 최고 지휘관인 관찰사[81]와 병마사의 위계를 명확하지 않게 하다보니[82] 명령이 통일되지가 않았다. 위세는 행정권까지 가진 관찰사가 높았지만 실무는 무관 출신이 주로 임명되는 병마사가 더 능했기 때문에 한쪽이 우위를 점하기 힘들었다. 이러다보니 병자호란 때는 평안도관찰사 홍명구와 병마사 류림이 의견 충돌 때문에 부대를 나눠 따로 싸우다가 청군에게 관찰사의 군대는 궤멸하고 병마사의 군대만 승리하기도 했다. 심지어 승리한 류림은 홍명구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까지 당했고 한참 후대에 가서야 공을 인정받고 시호를 받았다.[83]

6.3. 군대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는 재정과 군사행정

짧게 요약해서, 이전 시대보다 반란 위협이 적은 대신 돈이 더 많이 드는 군사제도를 이전 시대보다 적은 비용으로 운용하려다 폐단이 발생했다. 결국 군대가 유명무실해지거나, 폭증한 재정 부담이 백성에게 떠넘겨 지거나, 아니면 둘이 한꺼번에 발생했다. 이는 정치와 군사는 중앙집권을 추구하면서 재정만은 지방자치, 혹은 봉건제에 가깝게 굴린 조선의 특이한 시스템이 가져온 문제였다. 모든 지방의 행정과 군사를 중앙정부에게 파견한 관리가 장악하지만,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지방에서 알아서 조달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지역의 토착민과 유지들은 보상을 받지못해서 불만이 크며 중앙에서 뭘 시키면 의욕이 전혀 나질 않았고, 중앙정부도 되도록 지방에 뭘 안시키려고 했기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현대와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국방력 강화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경제력과 그걸 활용하는 군사행정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상시 유지할 역량이 없었다. 조선보다 인구와 생산력이 훨씬 적었던 고구려, 통일신라, 고려 등의 이전 한국사 왕조들이 조선보다 훨씬 쉽게 대군을 동원하는 걸 보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은데, 여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84][85]

먼저 조선은 중앙집권화를 강화하면서 이전 왕조들보다 정부 조직이 훨씬 커져서 이들에게 봉급을 주는 것만으로도 국가가 어마어마한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그러나 재정측면에서 중앙집권화는 생각보다 진전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당시 운송수단과 통신수단의 미비때문이다. 1863년 함열(오늘날의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현감이었던 임교진이 전라도 세곡을 한성으로 운송하는 과정을 적은 조행일록에 따르면 1862년 11월부터 세금을 거뒀고, 조운선에 실어 출발한 날이 다음해 3월 15일이었고, 한성에 도착한 것이 1863년 5월 2일이었다. 전라도에서 세금을 걷고 도착하는데에만 반년가까이 걸리는데 지방 재정까지 중앙에서 다 관할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지방 관아는 관아에 딸린 관둔전이나 각종 잡세를 거둬서 지방 재정을 알아서 꾸려야 했다.

이전 왕조들은 지방 유력자들에게 해당 지역의 군사력을 맡겼지만, 조선은 반란을 두려워하여 지방 유력자들[86]이 자체적으로 무장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했다.[87] 관료들 녹봉 챙겨주는 것도 힘들어하는 중앙정부 혼자서 나라 전체를 지킬 군대를 키우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의외로 재정 못지않게 나라의 시스템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조선이 전근대의 기술력으로는 달성이 불가능한 수준의 철저한 중앙집권제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사실 통신 기술이라고 해봐야 파발이 말 타고 달려가서 전달하거나 봉화대에 불 올리는 게 한계였던 전근대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 국가마냥 중앙정부가 지방의 모든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외국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초대형 사건마저도 실시간으로 수도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88] 이 때문에 전근대 국가에서는 중앙정부에서 각 지방마다 동원할 인력 수를 정하는 중앙집권제 국가보다는 각 지방을 다스리는 귀족이 자기 지역에서 알아서 인력을 뽑아내는 봉건제 국가가 군대 머릿수에서는 확연히 우위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봉건제 국가의 경우 각 지방을 다스리는 귀족이 최소한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의 사정만큼은 확실히 꿰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명령 내리는 데에만 며칠이 걸리는 중앙정부에서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 것보다는 지방 귀족이 자기 재량껏 움직이는 것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봉건제 국가의 경우 대신 지방 귀족의 이반을 철저하게 막아야 하기 때문에 나라의 안정성이라는 면에서는 조선이 추구한 중앙집권제 국가보다 훨씬 못했던 것은 맞지만[89], 철저한 중앙집권을 추구했던 중국 통일왕조들마저도 중기를 넘어서면 슬슬 당나라절도사 제도처럼 지방의 세력가에게 지방의 통치를 일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조선의 집요한 중앙집권제 추구는 어찌보면 시대의 한계를 감안하지 않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정책이었을 수도 있다.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 상황에서는 정말 아무런 힘도 못 썼던 제승방략 체계만 보더라도 이러한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90]

조선 초기에는 병농일치제 및 양인개병제를 바탕으로 16세~60세 이하 남성들이 3년에 1번씩 번상하며 군역을 맡았다. 이때 봉족제에 따라 군역을 맡은 가구 하나 당 조호[91]를 병종과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고 군역을 맡은 가구는 호수(戶首)가 되었다. 조호는 2~3결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이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빈민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호수가 조호를 노비처럼 부리며 갑질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거기에 호수 대신 조호가 군역을 대신 가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러다 보니 세조 때 보법을 시행하면서 호가 아닌 인정을 기준으로 계산하고 군역을 맡은 사람은 정군으로, 정군을 보조하는 사람은 보인이 되었다. 보인은 정군 1명당 2명씩 배치되었고 보인 2명이 1년에 군포 2~4필을 내는 것으로 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보인들이 지는 부담은 늘어났지만 대신 군대 규모를 크게 늘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조선의 시스템이 완성되는 성종 이후로는 위와 같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관료 조직이 거대해지면서 이를 위한 비용은 늘어났고, 조세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노비의 숫자가 증가함으로써 이 부담이 양인층에게 전가되었다. 농업생산량도 꾸준히 증가했지만 이를 만회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경제적 지원을 담당해야할 보인이 몰락했고, 군역을 맡은 정군도 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노역에만 동원되니 군역을 하면 할수록 손해가 되었다. 결국 조선은 군역 자체를 기피하는 풍조가 나라에 만연하게 되었다. 양반부터 상민들까지 다른 사람에게 군포를 주는 대신 군역을 대신 맡는 대립이나, 매년 군포 3필 또는 쌀 9말을 내고 군역을 빼는 방군수포를 하는 식으로 다들 군역을 회피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성종 대부터는 예전처럼 군대를 대규모로 소집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결국 중종 대에 대립과 방군수포가 법제화되면서 공인되었고 사실상 이 시기부터 조선군은 정권 보위와 국경 수비를 맡은 병력 빼고는 유명무실화된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군적에 올라있는 병력의 숫자는 무려 35만명에 달했지만 실제 병력은 절반도 안되며 그 병력들조차 태반이 대열 한 번 못 맞춰본 일반인들이었다.

양란 이후에는 오군영이 주축인 중앙군, 속오군이 주축이 된 지방군이 탄생한다. 하지만 소규모 재정이 가지고 오는 근본적인 문제는 끝내 해결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속오군은 일찌감치 천예화되었고 오군영은 중앙정부의 재정으론 감당이 안 돼서 광산이나 둔전 운영 같은 이권을 보장받거나, 또는 화폐를 주조하며 버티다가 조선 후기가 되면 이마저도 유명무실화되어 군대가 백성들을 수탈하는 사태가 벌어진다.[92][93][94]

다만 실제로 조선의 국가재정이 작았는지는 의문인것이 당장 초중기 조선의 연간 전세 수입이 고려보다 많았기 때문이다.[95]

첨언하자면, 후기 조선군의 예산 문제는 정부의 소규모 재정에서만 비롯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조선은 화약무기가 일반화된 시대에 건국된 나라였고, 이것은 과거 냉병기만으로 전쟁하던 시대에 비해 훨씬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함을 의미했다. 화약과 그를 활용한 병기는 창칼에 비해 훨씬 많은 연구개발 비용과 제작비를 필요로 했다. 그나마 적의 수준이 조선군보다 한참 뒤떨어졌던 조선 전기에는 소구경의 원시적인 화약무기만으로도 충분한 화력이 나왔기에 예산에 부담이 크지 않았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적과 맞서 싸워야 했던 임진왜란 이후 상황이 급변한다.

인도, 중국 남부, 베트남처럼 자연 염초 광산이 어마어마하게 많거나 일본, 대만, 필리핀 등 화산지대가 있어서 유황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나라들은 그나마 이러한 부담이 덜했다.[96] 하지만 한반도는 자연 염초 광산이나 유황 광산이 타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백병전은 일본군에게 밀리고, 기병대는 청군에게 밀리다 보니 조선군은 더더욱 화약무기에 집중해야 했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은 화약 제작이 주변국보다 훨씬 힘들고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주변국보다 화약무기의 중요성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웃 나라인 청과 일본 모두 잠재적 적국이다 보니 조선에게 화약 재료를 적극적으로 판매하지 않았고[97], 설상가상으로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등 극동아시아 외 지역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없어서 제 3의 경로로 화약을 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종합하자면 무기 트렌드의 변화로 인해, 단순히 재정을 늘린다고 해서 비용 부담이 드라마틱하게 줄어드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6.4. 허리가 없는 지휘체계

대부분의 조선군 부대는 군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하급 장교와 부사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본래 조선 초기까지는 갑사가 실질적으로 부사관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세조가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넣어 사실상 없애버렸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조선군에는 이와 비슷한 병종이나 계급이 창설되지 않았다. 물론 이는 군대 규모가 소수일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급 지휘관들이 조금만 더 신경쓰면 군의 하부까지 통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 상황에서 수만~10만, 수십만 단위 이상의 대군이 소집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하급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하여 고급 지휘관들만으로는 군대를 완벽히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여러가지 문제가 속출했다.

그나마 중앙군은 오위인 위(衛) - 부(部) - 통(統) - 여(旅) - 대(隊) - 오(伍)로 체계적으로 편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하지만 정작 병력의 대다수를 구성하던 지방군에서 군의 통제력 부족이 심각했다. 특히 조선의 지방군은 각지의 수령들이 적당히 자기 동네 병력을 소집해서 거느리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지방군도 수령을 따르는 군관들이 있기는 했는데, 이들조차 숫자가 부족했고 부사관 역할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왜냐면 이들은 수령의 보좌, 호위, 전령, 정찰병, 돌격장까지 여러가지 역할을 겸해야했기 때문이다.
양란기에 조선군이 겪은 위기 대부분도 하급 간부의 부재로 인한 발생했다. 군대 하부까지 세세하게 통괄하는 간부가 없다보니 당장 대군에 대한 일사불란한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러니 조금만 전세가 기울어도 군대가 와해되었고, 조선 정규군이 임진왜란 시기의 일본군과 병자호란 시기의 청나라 팔기군과의 대규모 회전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98] 게다가 부대 간의 지휘권 단일화도 전혀 이루어져 있지 않다보니 조선의 군대는 일국의 군대가 아닌 다국적 연합군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중앙의 지휘력이 이렇게 부실한 상황에서 그나마 병사들의 구심점이 될 하급 간부의 부재는 조선군의 혼란을 심화시켰다.[99]

그나마 이 문제는 오군영이 들어서면서 해결되었다.

6.5. 비현실적인 원거리 무기 집착

국토는 좁고 산지는 많은 한반도 특성상, 조선은 물론 이전 왕조들도 전략 요충지와 길목에 성을 지어 적을 차단하고 원거리 무기로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전략을 선호했다. 다만 조선은 원거리 무기에 지나치게 집착했는데 [100] 문제는 조선의 경우 이 경향이 빈약한 지방군이라는 단점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시대에 따라 병종의 구성이 다르긴 했지만 조선의 기본 전술은 접근해오는 적들을 투사 병기로 타격하고 기병으로 제압한다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백병전 병과도 편제에 있긴 했지만 이들의 기본 역할은 사수나 포수를 적의 돌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대규모 전투에서 공격적으로 운용하기엔 숫자가 너무 적었다. 특히 사수, 포수, 화포수 등의 원거리 병종의 숫자가 백병전 병종의 숫자와 비슷하거나 심하면 2배 이상으로 많았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백병전 병종이 적군을 공격하려고 나서면 원거리 병종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원거리 병종도 자체적으로 환도정도는 들고 다녔지만 그건 권총 수준의 호신 도구에 불과했다.

조선군의 원거리 화력이 나름 강했다고는 하지만, 백병전 없이 적을 섬멸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군보다 원거리 화력이 몇십 배나 우월했던 근대 유럽의 군대들조차도 총검 돌격과 기병전을 비롯한 백병전을 수세기에 걸쳐 수행했다.[101] 백병전의 종말은 기관총을 비롯한 자동화기의 등장 이후에야 가능했다. 현시점에서도 우수한 저격수와 MLRS를 가지고 있다 한들 깃발을 꽃는 건 알보병인데, 조선의 화력이라고 해봐야 결국 조총화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만으론 적의 대군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었다. 이 문제점이 제대로 드러난 일이 사르후 전투로 후금 중기병을 저지하고자 명군과 조선군이 화승총을 다수 동원 했음에도 날씨의 변덕과 기병의 속도를 당해내지 못하였다.[102]

조선군의 부족한 백병전 능력에서 무수한 군사적 문제점들이 파생되었다. 일단, 원거리 화력으로 적을 압도해도 정작 백병전으로 적에게 치명타를 날리지 못하다보니 적을 확실하게 섬멸하는 결정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야전에서는 적이 피해를 감수하며 어떻게든 조선군의 화망을 뚫고 백병전을 걸어오면 방진이 빠르게 붕괴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조선의 체제적 특성상 백병전 병과를 육성하기 쉽지 않았고, 어렵게 육성해 놓아도 오래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왜냐면 백병전을 담당하는 병사들에겐 좋은 무기와 갑주, 그리고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데, 무기와 갑옷을 자부담해야 하는 당시 상황과 지휘관의 군사 훈련을 극도로 통제하려는 지침이 우수한 백병전 전력과 양립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103] 더욱이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중앙군이 상비군화 한 것을 제외하면 일정 1년의 3분의 1 가량 번갈아 가며 군역을 치르는 구조다. 그래서 대신 비용과 훈련이 덜 필요한 원거리 병과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원거리 병과인 사수와 포수는 좋은 갑주가 필요 없어서 무장 비용도 상대적으로 쌌고, 훈련도 많이 필요 없었다. 활쏘기가 신분,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인기있는 스포츠였던 조선에 뛰어난 궁수는 넘쳐났고, 총은 쉽게 숙련될 수 있었으니까.

초기에는 그래도 백병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록도 있는 걸보면 마냥 등한시하지도 않았던 듯하다.[104] 또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도검을 주무기로 삼은 병과들도 있긴 했다. 무예청 무사[105]들 중에는 보직에 따라 칼만 패용하던 경우가 있었고[106], 세자익위사 무사들 중 일부[107] 또한 검을 지니고 호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이 처한 안보적 상황상, 조선군은 원거리 집착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이 초기에 상대해야 했던 여진족 약탈자들과 왜구들은 조선군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양적, 질적으로 뒤떨어지던 세력이었다. 실제로 니탕개의 난이나 을묘왜변 등 조선 전기의 교전 과정을 보면 숫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적이 극소수의 조선 정예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례가 꽤 있다. 니탕개의 난에서는 여진 기병 수천 명이 백 단위의 조선 보병만이 주둔 중인 요새 하나를 못 뚫고 한참을 싸우다가, 신립이 이끄는 기병대가 들이치면 와해되기를 반복한다. 을묘왜변 초반에는 그래도 왜구들이 상당히 선전하지만, 대기병전을 전혀 할 줄을 몰라서 매우 극소수의 기병대만 돌격해도 방진이 무너지곤 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천 단위의 왜구가 조선군 70명이 방진을 치고, 기병 단 4기가 활개치는 것을 뚫지 못하고 패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굳이 멀리서 화살 좀 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근접 전투를 벌일 이유가 없다.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을 노리고 정복 전쟁을 벌이는 군대였다면 모를까, 조선군은 4군 6진 개척 이후로는 그러한 교리를 추구한 적이 없었고 교리는 철저히 방어적이었다. 현대전으로 비유하면, 소총 한 자루만으로 무장한 소말리아 해적이 자그마한 어선을 타고 군함으로 돌격하는 상황에서 그냥 기관포나 미사일로 냅다 때려버리면 아무 피해 없이 이길 수 있는데 굳이 해적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서 똑같이 소총으로 싸울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조선 전기의 안보적 상황상, 조선군은 차츰 정규군을 상대하기 위한 군대라기보다는 소규모 게릴라, 테러리스트를 상대하는 군대로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정규군이 들이닥치면서 일어난 참사가 바로 임진왜란 초기의 졸전이었다.

이후 호란까지 겪으면서 조선군은 차츰 정규전에 대비하는 시스템으로 변화하게 되지만, 근접 병과의 역량이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18~19세기쯤 가면 화승총 든 전열보병 수준으로 총병 비율이 치솟는다. 이는 조선이 대규모 기병대를 운용하는 청나라, 정예보병을 운용하는 일본이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적으로부터 양면전선을 강요받으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기병의 양과 질이 모두 떨어지고[108], 중국 전역을 통일한 청나라가 만주를 쥐고 있는 조선 후기는 공세적인 교리는 펼칠 이유도 없었고, 펼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즉 야전 역량이 현격히 떨어지는 상황에서 양과 질 모두 우월한 적을 양쪽에서 상대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기 조선군은 전기의 방어적인 교리를 더더욱 강화하고 다듬는 데에 집중하여, 주요 방어 거점 주변에 엄폐하기 좋은 숲을 조성하거나 수레방진을 도입하려 시도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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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의의

그래도 15세기 조선은 대외로 무력을 투사하는데 꽤나 적극적인 편이었다. 고려말 왜구 및 원나라 잔당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군대는 불세출의 무장인 이성계가 세운 새 나라의 안정된 통치 아래 강군으로 재편되었고, 이 유산은 100여년 이상 이어져 15세기 내내 좋은 성과를 여러 번 냈다. 이중 가장 큰 성과는 윤관별무반 십수만명을 동원했음에도 끝내 이루지 못한 4군 6진 개척을 불과 만 오천명으로 확보하는데 성공한 일일 것이다.[110] 이렇기에 임진왜란 초의 졸전 이전까지만 해도 명나라와 여진족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강군이었다.[111][112]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113][114]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115]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116]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평안도 도원수 이극균을 인견하다. #[117]

실제로 15세기때는 여진족들을 정벌할 때도 1만단위의 병력을 모아 압도했고 이시애의 난 당시 수만병력을 어렵지 않게 동원한적이 있다.[118]

또한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119]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120],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121]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세조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122]

다만 여진족이 그렇다고 마냥 오합지졸들도 아니었던것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이 평소에 올적합(兀狄哈)과 올량합(兀良哈)을 알고 있는데, 성질이 굳세고 사나워 싸움하기를 즐겨하며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않고 진중(陣中)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한곳에 모여 사는데, 3, 4백 명에 밑돌지 않습니다. 그러나 3, 4백명으로도 우리 나라의 1만 군사를 당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당시 여진족들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는 성종시기 기록도 있고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여진족들의 부락을 공격한적이 있는데 여진족들이 반격하려하자 피해가 커질것을 우려해 철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족들이 단순히 오합지졸이었다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할리는 없으니 전투력에서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인이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로 여겨질정도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석하는 게 맞고 이정도면 못해도 오늘날 탈레반하마스 같은 무장단체정도라고 볼 수 있다.[123]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계하기를,
"올적합(兀狄哈)·올랑합(兀郞哈) 등 잡종들은 갑옷과 투구도 쓰지 아니하고 열도 이루지 아니하고 싸우나 활[弓]을 잘 쏘기 때문에 상대하기 어려우니, 나무로 방패(防牌)를 만들어서 사용하되, 매양 싸울 때에 이것을 전열에 세우고 기창(騎槍)·기사(騎射)를 뒤에 세우면, 비록 겁이 많고 약한 자라도 반드시 등지고 달아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7월 18일 계유 4번째기사
"갑옷을 입은 적은 얼마나 되던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겨우 20, 30인이고 그 나머지는 다 푸르게 물들인 반신(半身)의 납의(衲衣)1133) 를 입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와 말은 하나도 죽거나 다친 자가 없었는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옥천(沃川)의 군인 김응보(金應輔)가 화살에 다리를 맞아 말에서 떨어져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났으나 이튿날에 죽었고, 화살에 맞은 말은 서넛뿐입니다."
성종실록 259권, 성종 22년 11월 16일 무자 3번째기사

어쨌든 철기가 없거나 소수에 불과할 땐 조선의 토벌군이 여진족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누르하치 세력이 흥기하면서 갑주를 입은 철기병을 대규모로 굴리기 시작하자 상황은 반전된다. 이성량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갑옷을 수입하거나 아예 제작기술을 확보하여 대규모 중기병을 거느렸기 때문이다.[124]

게다가 여진족들을 성공적으로 통제 하에 둘 수 있었던 건 정규군 외에 조선군의 특수부대였던 체탐인들의 활약이 컸다. 세종때 창설된 이 부대는 정말 오늘날의 특수부대처럼 소규모로 적진에 침입해 낮에는 은신, 밤에만 이동하면서 주로 여진족들에 대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주기적으로 교대로 활동하던 체탐인들은 여진족들이 쳐들어올 낌새를 미리 알아채고 보고하기도 하였으며 여진족을 정벌하러 갈 때 미리 그들이 주둔지를 정찰하여 지도를 그려오기도 했다. 때문에 사망률도 높은 대신 임금도 후한 정예 정찰 부대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허나 바로 위의 성종 시절, 전쟁은 줄어드는데 자꾸 체탐인들을 보내 사상자가 나온다며 조정에선 이를 책임질 사람을 끈질기게 추궁했다. 결국 지휘관들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소극적인 부대 운영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성종은 그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체탐인(자) 부대를 해체시켜버렸다. 하지만 여진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 역설적으로 바로 이 체탐자였기에 이후 조선은 여진족으로부터 점점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렇게 조선의 특수정찰부대는 맥이 끊겼다. 젊은 시절의 이순신 역시 그 피해자 중 하나였고 이후 임진왜란병자호란 때도 조선군은 정찰 능력이 매우 뒤떨어져 고생을 했다.
함경도 안문 어사(咸鏡道按問御史) 이정험이 아뢰었다.

"신이 이달 4일 토병(土兵)을 시재(試才)하는 일로 행영(行營)으로 달려가는 길에 병사(兵使)를 만났는데, 그는 남·북도(南北道)의 포수(砲手)와 사수(射手) 3천여 명을 거느리고 건퇴를 분탕시키기 위해 번호(藩胡)의 탁두와 약속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행영에 머물면서 첩보(捷報)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8일 신시(申時) 경에 갑자기 영중(營中)에서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였습니다. 깜짝 놀라 연유를 물었더니 ‘행영의 군사가 싸움터로부터 와서 아무 아무의 존몰(存歿)을 말한 까닭이다.’고 했습니다. 신이 바로 행군(行軍)의 승패에 대해 묻자 ‘7일 석양에 아군이 종성(鐘城)에서 탁두의 군사를 대동하고 강을 건넜고 8일 이른 새벽에 건퇴의 적굴(賊窟)에 도착했다. 선봉이 시배(時排) 밖에 있는 오랑캐들의 집에 들어가 분탕할 무렵에 오랑캐들이 미리 대비하여 매복시킨 철기(鐵騎) 수백 명이 불시에 뛰쳐나와 칼을 휘두르며 아군을 어지럽게 공격하자 아군이 당해낼 수가 없어 일시에 무너졌다. 보병은 산으로 도망치고 기병은 길을 따라 달아나 각기 살길을 찾아 도망쳤다. 우후 성우길이 몸을 돌보지 않고 용맹을 떨쳐 일어나 몇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서 퇴각하여 직접 오랑캐 서너 명을 베자 적이 조금 물러섰다. 만일 우길이 힘을 다해 적을 막지 않았더라면 아군은 거의 강을 건너지 못할 뻔했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87권, 선조 38년 5월 22일 을미 3번째기사

1605년, 누르하치와 대립했을 정도로 강성한 여진족 세력[125]인 홀라온이 함경도를 노략질하자 조선에선 토벌군을 보냈다. 직전 노토 부락을 상대로 우수한 전과를 얻었기에 자신감 있게 진격했지만, 홀라온 철기병이[126] 급습하자 참패하고 우후 성우길의 분전으로 간신히 퇴각만 했다. 조선은 이 전투에서 큰 충격을 받고 여진에 대하여 방어적인 입장으로 선회했고, 나중에 누르하치가 홀라온을 압도적으로 박살내고 조선의 번호들까지 죄다 털어가자 여진족의 부상을 국가의 존망이 걸린 심각한 위기라는 것을 인지했다.

아무튼 개별전투에서 1만이상의 군대를 이끈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그마저도 용인전투같이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들이었던 임진왜란시기 조선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으로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지만 만약 이 시기 그저 국경부근에서 여진족의 난동이나 내부 반란정도가 아니라 국력을 총동원하여 막아야 하는 임진왜란 수준의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조선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127]

심지어 조선 초기에는 무려 32만이 넘는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128]

8.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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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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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 <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ff> 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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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무기 (1392~1895) 참조.

9. 군사교범 및 문헌

10. 주요 전쟁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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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 (제2차, 제3차) 1396, 1419왜구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소 가문
4군 6진 개척 1433 ~ 1437여진족
모련위 정벌 1461여진족
정건주위(세조) 1467여진족
정건주위(성종) 1479여진족
정니마군 1491여진족
정서북로구 1492여진족
삼포왜란 1510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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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진 왜변 1544왜구
을묘왜변 1555왜구
니탕개의 난 1583여진족
녹둔도 전투 1587 ~ 1588여진족
임진왜란 1592 ~ 1597파일:고시치노키리.svg 일본 (도요토미 정권)
정유재란 1597 ~ 1598파일:고시치노키리.svg 일본 (도요토미 정권)
제2차 당포 해전 1604파일:도쿠가와 가몬.svg 일본 (도쿠가와 정권)
사르후 전투 1619파일:청나라 국기.svg청나라
흥양 해전 1622파일:네덜란드 동인도 회사.png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정묘호란 1627파일:청나라 국기.svg청나라
병자호란 1637파일:청나라 국기.svg청나라
가도 정벌 1637모문룡 휘하 명군 잔당
송산 전투 1641명나라
나선정벌 1652 ~ 1658파일:루스 차르국 국기.svg 루스 차르국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파일:미국 국기(1867-1877).svg 미국
병인양요 1866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제2제국
신미양요 1871파일:미국 국기(1867-1877).svg 미국
운요호 사건 1875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11. 관련 인물

12. 대중 매체

제작비 때문인지 제작진이 고증에 관심이 없는 건지, 미디어에 나오는 조선군은 죄다 근무복 평복이다. 고증이 철저했던 과거에도 군복은 죄다 평복이었다. 때론 그냥 포졸복 차림으로 나오는 게 허다하다. 고증이 그만큼 엉망인데 여러 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죽어라 당파만 들거나 화살을 든 정도로만 나오는 게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에서 허다하다. 심지어 사극 고증이 뛰어났던 90년대에도 다 포졸복 차림이었으며 신발 역시 짚신 차림인 경우가 가득했다. 그 뿐만 아니라 90년대까지만 해도 나름 엘리트 군사들이라 평가받는 내금위, 의금부, 포도청, 오위도총부, 5군영, 훈련원, 병조, 형조의 군사들이나 금군들도 다 지방관아 군사들과 비슷한 평복을 입었으며 게다가 신발도 짚신만 신는 경우가 허다했다.[131] 그래도 90년대 말~2000년대 초를 거치면서 내금위, 의금부, 포도청, 훈련원, 오위도총부, 5군영, 병조, 형조의 군사들은 각각 색을 다르게 입히고 있으며 2000년대 초반 후기부터 조금씩 갑옷을 입히기 시작하더니[132]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신발도 신기고 있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과 기록, 해당 항목의 설명을 봐도 알수있듯 조선군은 초기부터 갑옷과 화약무기로 무장한채 싸웠으며, 임진왜란 당시 선교사로서 조선에 온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지에 조선군은 검은 갑옷 차림이 많다라고 적었는데 위에 나온 갑사 갑옷을 말한 듯하다.

그래도 2000년대 후반이나 2010년대 이후부터는 조금씩 고증에 신경쓰는 작품들이 늘어나며, 그중엔 그동안 조명되지 않던 경번갑이나 찰갑, 두정갑 등을 입은 병사들을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나온 작품중 조선군의 고증을 잘 지킨 경우는 만화는 칼부림, 영화는 남한산성이라고 볼수있다.

12.1. 게임

임진록 2에서는 당연히 등장한다. 주인공 세력답게 어느 하나 딱히 튀는 건 없는 무난한 진영이다. 자세한 설명은 임진록 2/조선 유닛 및 건물 문서 참고.

2022년 얼리억세스로 출시된 산나비에서는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근미래적인 배경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조정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실제로 주인공이 장군의 복식을 갖추고 있으며, 보스 중 저스티스라는 등장인물은 두정갑을 입고 있다.

13. 관련 문서 및 참고 사이트



[1] 조선 전쟁사 분석서 '조선 전쟁 생중계'의 삽화를 담당한 "불나방"의 그림. 조선 전기의 찰갑을 비롯한 군졸의 무장 상태가 잘 고증되어 있다.[2] 영상은 조선 중앙군의 정병(正兵)#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원주형 투구를 쓰고 천 갑옷 역할을 하는 납의 위에 가죽으로 만든 엄심갑을 착용하고 있다.[3] 이후 갑사오위 중 중군(中軍)인 의흥위 소속으로 모두 편입된다.[4] 이는 오사를 번상시에는 경군으로, 부방시에는 지방군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였다.[5] 고려 2군 중 하나인 응양군과 용호군이 통합되어 개편된 부대.[6] 본래 비순위의 다른 명칭이었지만 어느 순간 분리되었다. 금오라는 명칭은 이후 의금부의 별칭이 된다.[7]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에서 개칭.[8] 이 두 순금사는 도성 내 치안 업무를 관장했다.[9] 도성의 치안을 맡아보던 부대[10] 고대 중국에서 황제를 지키던 무사들이 차던 칼을 천우라고 지칭하는데서 유래한 명칭[11] 성문을 지키던 부대[12] 아전 등의 중인계층과 천인들 역시 제외되었다. 그리고 양반층은 현직관료가 아니여도 유학호로 등록되어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다.[13] 태종실록 15년 11월 11일[14] 성종 즉위 첫해인 1470년[15] 성종 즉위 2년 뒤인 1472년[16] 많아봐야 3-4만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침략한 일본군의 숫자는 거의 4배에 달하는 16만의 정예병이였다. 더 놀라운 것은 심지어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며, 일본 본토에 대기 중인 예비대와 본토 수비 병력을 남기고 왔다. 당시 조선일본의 국력 차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려주는 대목. 다만 전쟁 발발 후 크게 지나지 않아 조선도 일본과 거의 대등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북방 기병 주력의 북병과 조총화포 주력의 남병의 명나라군의 파병을 받으면서 동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었으며, 중후반기에 가면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을 크게 압도할 정도로 잘 싸웠다.[17] 병력 규모 10만 이상의 부대를 상륙시키는 것은 현대 관점으로도 난이도 높은 작전이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 조차도 10만을 투사할 수 있는 상륙전 능력이 없으며, 현재 세계에서도 이게 가능한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다.[18] 화약을 적게 쓰는데도 위력이 나온다는 점도 컸다.[19] 이는 중앙정부에서 해낸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조총에 맞설 무기를 만들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에서 자체적으로 이룩한 업적이었다. 이순신은 이 조총에 정철총통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후 그냥 조총이라고 불렸다. 다만,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 사용하게 되는 조총은 이순신이 만든 정철총통이 아니라 명군이 들여온 오스만식 화승총이다. 당시 조선군은 지원군으로 온 명군의 총 20,000정을 들여와 조선군을 무장시켰다. 게다가 조선 수군 역시 정철총통 3천 정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고,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정유재란 발발 시점에는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더 많은 조총과 총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오해는 일본군의 조총을 부각시키는 미디어의 영향이 큰데, 조선군이 조총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과 별개로 일본군의 주 원거리 무기는 조총이 아니고 활이었다. 정유재란 시점에는 총병의 비중이 많이 줄었지만, 총병의 비중이 더 높았던 임진왜란 시기에도 일본군의 전체 병력 중 많아야 15%~20% 정도만이 조총으로 무장했었으며 이조차도 갈수록 보급이 어려워져 임진강 전투까지 가서는 조총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히 보급의 불능만은 아니고 전근대의 일본이 화약 자체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나라였기 때문으로, 가장 큰 문제로서 일본에는 염초 광산이 없었고, 그렇다고 조선처럼 자체적으로 염초를 만드는 기술도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일본군의 초반 파죽지세와 같은 진격은 조선군의 대응 불능과 일본군의 높은 정예도 때문이지, 조총의 영향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20] 朝鮮後期 陣法과 武藝의 訓練에 관한 연구: 국립서울대학교 S-Space,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120546/1/000000013644.pdf.[21] 초기 강선은 총알을 망치로 때려박아 넣어야 돼서 당시 강선포는 3분당 1발이라는 끝내주게 느린 공격 속도를 가졌고, 미니에 탄이 등장하며 그나마 강선을 제대로 활용하게 될 때쯤엔 이미 강선이 등장한지 100년이나 지난 1850년대였다.[22] 장부상의 병력은 수만에 달하였으나 단순히 군포를 납부하는 자도 군적에 넣었던 조선의 특성상 실질적인 병력은 번상정군을 포함한 포수 1~2천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3] 정조 연간 설치한 장용영 외영의 후신이며, 수원유수가 총리사(管理使)를 겸했다. 용인,안산, 시흥, 과천 병력 4초(哨)가 소속되었다.[24] 관리사(管理使)는 개경유수가 겸하였다.[25] 일반적인 기병이 아니라 기사들로 이루어진 정예기병대로, 평안도,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등에 있었다. 여담으로 평안도 별무사는 홍경래의 난 당시 반군에 가담하였다.[26] 함경도에 주둔하던 기병대로 함경도 별무사가 개편된 부대[27] 동래부에 설치되었던 기병대[28]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을 통합하여 설립한 군영으로 왕의 경호와 궁궐 경비를 맡았다.[29]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을 통합하여 설립한 군영으로 한성과 수도권의 방위를 담당했다.[30] 진무영이 개편된 군영으로 1894년 해연총제영마저 흡수한다.[31]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수군을 총괄하던 통어영(統禦營)이 개편된 군영[32] 구식군인들은 주로 포군(砲軍)이라 불렀다.[33] 임오군란 이후 설치된 친군영을 고종이 완벽하게 믿지 못하여 재창설되었다.[34]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전멸당한 경군(京軍)이 친군심영 소속 병력이다.[35] 미군 퇴역 장군인 윌리엄 다이가 훈련.[36] 일본군 장교가 훈련.[37] 얼마 후 시위대가 다시 독립하며 규모가 축소된다.[38] 분대장조, 부분대장조[39]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경우 대장(大將)이라 불렀고, 수어청, 총융청의 경우 사(使)라 불렀다.[40] 중군은 각 군영 대장을 보좌하며 실무를 총괄하여, 실질직인 지휘관 역할을 맡았다.[41] 이는 당연한 것이, 조선군의 핵심 전력이 훈련도감이었던만큼 그 위상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42] 금위영이 쓸모 없으니 금위대장의 명칭을 금위사로 바꿔버리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을 보면, 확실히 대장이 사보다 높은 개념이다.[43] 조선전기 거진(巨鎭)을 대체하여 설치된 군영으로, 병영이나 수영보다 그 수가 많아 조선후기 지역방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44] 행정, 군사 실무를 맡아보던 관직[45] 줄여서 첨사(僉使)라고 한다.[46] 훈련도감을 제외한 어영청과 금위영의 파총들 역시 대다수가 겸파총이었다. 이는 어영청과 금위영 병력의 주력이 직업군인이 아닌 번상정군(番上正軍)이었기 때문이다.[47] 전라도 수군방어사와 함께 제주목사가 겸하는 무관직이다.[48] 성적우수자는 오위의 부장이나 수문장, 선전관으로 발령났다.[49] 명목상으로는 서반의 필두였지만, 실제로는 문무관의 전관예우를 위한 관청으로 실무는 없었다.[50] 무관의 선발, 무예/병법 훈련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훈련도감과는 다르다. 훈련도감이 육군본부의 역할을 했다면 이쪽은 사관학교 혹은 교육사령부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좋을 듯.[51] 훈련원과는 다르다.[52] 조선시대에는 군경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53] 전라우수영 소속의 제주진관은 본토와 방어체계가 달랐으므로 따로 빼놓았다.[54] 명월진[55]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애월진, 수산진, 서귀진, 모슬진, 차귀진[56] 봉수대 25개소 149원, 연대 39개소 234원[57] 賊甞曰中朝之槍法。朝鮮之片箭。日本之鳥銃。爲天下第一云。[58] 굳이 태조가 명궁이었던 것 외에도 많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유교 국가인 점. 선비의 덕목 중 하나가 활쏘기였으므로 남녀노소 활쏘기를 즐겼으며 이에 따라 궁시 병과도 정예였다. 둘째로 조선에는 산지가 많았던 것. 그에 따라 산성도 많아서 수성전이 많이 일어나기에 수성에 필요한 궁병들이 집중 양성되었다.[59] 화약 무기 전래 전까지 총통의 역할을 해오던 쇠뇌의 제작 기술도 이때 증발해버려서, 세종 대에 쇠뇌를 다시 만드려고 도자기의 그림을 참고하는(...) 웃픈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60] 총과 총은 승부가 잘 안나지만 활대 활은 이성계측 군대가 유리하니 반란과 화약무기로 난리치는 걸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한다.[61] 다연장이 아닌 일반 로켓 개념의 무기는 1232년 중국의 비화창(飛火槍)이 최초다.[62]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과는 다른 것이다.[63] 이민웅, 《조선전기(15~16세기)의 수군 변천》, 이순신연구논총, 2010[64] 근데 고려도 카다안의 침입당시 쿠빌라이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 라고 디스당한 적이 있으며 이를 보면 당시 고려가 왜란 시기 조선보다 국방에서 더 나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과거의 군사력을 지금보다 높게 치는 것은 명백하게 침략과 정복까지 거리끼지 않았던 고구려를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좋았던 옛날 편향이다.[반론] 고려시절과의 비교를 좋았던 옛날 편향만으로 볼 수는 없다. 물론 카다안의 침임 같은 흑역사가 있긴 하나 이 때는 여몽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원나라의 강력한 통제력 하에 놓여 있었기에 과거와 같은 저력은 보여주기 힘들었다. 그럼 과거는 어땠느냐? 여요전쟁의 경우 1차 침입은 상황을 잘 파악한 고려에 의해 그렇게 큰 피해를 입지 않고 거란군을 돌려보냈으며 강동 6주를 얻었다. 2차 침입때는 정말로 나라가 망할뻔하긴 했지만 이 때도 어쨌든 자력으로 거란군을 물러나게 했다. 3차 침입은 말할 것도 없이 자력으로, 완벽하게 승리했다. 이후 벌어진 여진족의 침입도 동북 9성을 일시 점령하는 것으로 한방씩 주고받았다. 즉 조선과 고려를 비교하는 건 좋았던 옛날 편향이 아니다. 물론 고려 말의 군사력이 심각하게 허약해졌지만 왕조 말기란게 다 그렇고 정작 이 말을 한 선조는 조선 중기의 임금이다. 또한 선조 38년은 임진왜란 끝난 후의 일이고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던 때이니 중원 왕조들조차도 무너뜨리기도 했던 북방민족인 거란, 여진들조차 자기 힘으로 막아낸 고려에 비해 여지껏 제대로 된 체계의 침공은 없었던 일본의 침입 하나 혼자 못 막아내 명나라에게 도움을 구했던 현재가 많이 비교되었을 것이다.[66] 근데 이건 당시 일본을 너무 과소평가한것이다. 당장 고려 말 왜구의 침입시절 부터 당시 고려의 군사력이 개판된것을 감안해도 왜구는 이미 조직적인 군대의 모습을 갖추고 고려를 괴롭혔으며 16세기때는 척계광원앙진전법을 고안해내기전까 지는 조선보다 훨씬 국력이 강했던 명나라도 왜구에게 남부지방을 유린당했었는데 정규군도 아닌 왜구조차 명나라를 고전시킬 정도의 전투력을 가졌으니 조선이 자력으로 10만이 넘는 일본 정규군을 물 리치는 건 불가능한게 당연하다.[67] 참고로 이 사례는 홍건적이 빠른 기동성을 주무기로 삼는 기병 부대나 해적 집단이 아니어서 고려도 병력을 집결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서 가능했다. 반면 이후 극심해지는 왜구의 침입 때는 이런 대응이 불가능했다. 이 당시 상황은 훗날 조선군에게도 여러모로 시사할 점이 많다. 당시 왜구는 틈만 나면 수백 척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이건 이미 붕괴된 고려 지방군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그래서 급박하게 중앙군을 보내도 권신들의 사병+대충 징집한 민병으로 이루어진 중앙군 역시 질적으로 우수하지 못했다. 게다가 왜구는 고려 중앙군이 내려오는 소식을 들으면 미리 내빼거나 아예 매복하고 있다가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지방군을 극도로 억제한 조선은 결국 원인은 다르지만 같은 고민들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1, 일정규모 이상의 적이 오면 맥없이 붕괴되는 지방군. 2, 급히 파견되는 중앙 장수와 중앙군+타 지역징발군으로 이루어진 군대. 3, 타이밍이 늦어 적에게 공세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못 살리는 자국 군대. 여기에 대한 조선의 선택은 지방군을 키우는 게 아니라 우수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중앙군 시스템을 양적 질적으로 진보시키는 것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당대 어느 나라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었다. 물론 조선도 2차 을묘왜변등 지방군선에서 외침을 정리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68] 다만 이 시기 조선군도 군소 여진 부락들을 상대로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다음엔 당시 부상하는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과 대립했을 정도로 강성한 세력인 홀라운이 조선을 노략질 했을 땐, 조선군도 큰 피해를 입었고 이후 여진에 대해 방어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69] 앞의 말과 연결해서 보면 우리나라는 너무 약해서 누가 쳐들어오든 일단 항복하고 적들에게 설설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게 없어서 국방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극한의 빈정거림이다.[70] 즉 류엄의 말은 사실이나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말하냐고 지적하는 것이다. 류엄의 말이 단순히 돌직구도 아니고 완전히 빈정거리는 말이니 사관도 무례하다고 비평할만하다.[71] 늘 그랬던 건 아니고 호란에 대비하던 광해군~인조 시기를 보면 관서지방의 요새들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조가 이괄의 난에 데이고 나서 군부에게 실권을 주면 안된다며 수도방어체제로 선회하는 바람에 명맥이 끊겼다. 사실 이괄의 난 이전의 병력도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하며 후금의 침공을 대비해 무리해서 증강해 놓은 거라 당시 조선의 재정으론 감당하기 버거웠다. 변방의 많은 군사들이 이괄의 명분 없는 반란에 동조했던 것도 워낙 부대 상황이 열악해서 불만이 쌓여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괄의 난이 없었어도 그 병력 그대로 12년을 더 버텨 병자호란까지 갔을 지가 미지수다. 물론 반란이 터진 것보단 훨씬 상황이 좋았겠지만.[72] 임진왜란 전에 미리 대비를 할 때도, 성을 증축하고 해자를 깊게 파는 것만으로도 민심이 떠난다며 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소가 빗발쳤다.[73] 다만 이 경우는 상대(일본, 후금/청)이 뛰어난 기동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특히 청나라의 기동전은 조선으로 하여금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종심이 얕다고 치면 고려 또한 같은 문제점이 드러나야 하고 실제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은 조선보다 약간 북쪽에 위치한 반면 고려 초의 국경은 조선보다 남쪽이었기에 그런 문제가 심각했어야 했다. 그러나 거란의 1차 침공에서 곧 개경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성종이 다른 곳도 아니고 개경보다 더 북쪽인 서경(평양)까지 올라오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이 때는 적들도 조선때처럼 뛰어난 기동전을 펼친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몽골의 침략이 있었을 때는 경주까지 공격당했을 정도로 처참하게 털렸다.[74] 일본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한 사례까지 있을 정도였다. 참조: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75] 그래서 척계광도 따로 병사를 모집해서 사병+상비군, 혹은 국가가 고용하는 용병의 특성을 지닌 척가군을 운용했다. 다만 이게 단순한 사병은 아니고 엄연히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군대였다. 상당수는 정규군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한국사를 찾아보면 이성계의 가별초, 혹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들과 비슷하다.[76] 조선 후기엔 오군영 체제로 가면서 조선도 나름 상비군을 운용하는데, 제대로 된 직업군인은 훈련도감뿐이고 나머지 군영은 지방군이 교대로 번상해서 복무하는 형태라 절강병법이 요구하는 훈련도를 갖추기 어려웠다.[77] 애초에 원본인 절강병법 자체가 기병이 아니라 보병인 왜구를 상대하는 전술이라 기병 상대로 효율적이지 않았다.[78] 개개인의 유능, 무능을 떠나서 김경징-장신, 김자점-심기원의 사례처럼 자기들끼리의 의견 충돌로 군대 자체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각자 따로 놀게 만들었다.[79] 개중에는 일본처럼 봉건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었다.[80] 등자가 없던 시대라 기병 양성이 더 힘들어서 기병이 국가 중요 전력 취급받은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명칭이나 이마저도 나중엔 국왕이 전군을 통솔하게 되면서 폐지된다.[81] 행정책임자지만 기본적으로 병마사를 겸했다. 그래서 겸병사라고도 불렸다.[82] 둘 다 똑같이 종2품이었다.[83] 비슷하게 명나라도 이렇게 하다가 사르후 전투 때 우세한 전력에도 청에게 참패를 당한다.[84] 다만 당시 인구로는 말도 안 되는 병력이 나오기도 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전 왕조가 동원한 군대 규모를 허수로 취급하기도 하거나 전부 허수는 아니더라도 종종 기록이 과장되었거나 잘못되었다고 보기도 한다.[85] 반면 왜란을 일으켰던 일본군은 약육강식 시대인 센고쿠 시대 당시 다이묘들은 영지를 지키기 위해 군을 조직했다. 이후 도요토미 정권에는 집합령을 내리면 복속된 다이묘들이 집합해 대다이묘가 군을 이끌고 그 밑에 인근 다이묘들이 따르는 체계를 구성하였다. 에도 막부 시기에도 중앙군 개념보다는 쇼군이 호령하면 모인 다이묘들을 연합해 영지가 큰 다이묘들이 다이묘들을 이끄는 구조가 된다. 나름 체계적이지만 단점으로는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처럼 사이가 안 좋다고 협력을 거부하기도 하였다.[86] 넓은 토지와 노비를 보유한 지방 유력자들에게 자체적인 무장을 허락했다면 조선도 얼마든지 더 많은 군대를 뽑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를 봐도 큰 고을의 유력자가 주축이 되는 의병진은 수백~ 수천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이들을 중세시대 유럽에 던져놓으면 대영주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87] 이 때문에 의병은 조선 조정에게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조정은 의병을 어떻게든 관군의 통제 아래 두거나 흡수하려고 했고, 관리하기 힘들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해산시켰다.[88] 이 때문에 조선은 전근대 국가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지방 통제를 할 수 있었으나, 이 높은 수준의 지방 통제라는 것마저도 현대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중동 같은 막장국가들보다 못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대의 경우 통신기술이나 감시카메라 등이 발전하면서 중앙정부가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철저한 통제를 아주 못해내지는 않는다.[89] 조선에 비하면 봉건적인 성격이 굉장히 강했던 고려의 경우 이 때문에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은 것들까지 합치면 정말 밥먹듯이 반란이 일어나는 편이었다. 딱히 고려만 그랬던 것은 아닌 것이, 굳이 반란 같은 극단적인 행위가 아니라 국왕의 의도에 반하는 사소한 이반행위까지 포함하면 봉건제로 굴러갔던 삼국시대랑 중세 유럽이나 일본에서도 똑같은 일이 빈번했다.[90] 유, 무선 통신망이 어느 정도 깔리고 있었던 근대의 국가인 대한제국마저도 지방에 파견된 관리의 행동을 100% 통제하는 데에 실패했다. 실제로 대한제국 말기 대한제국군의 간도 개입은 대부분 지방정부의 관료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군대가 행했지 중앙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91] 봉족호.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92] 단, 19세기까지도 상당수의 군대는 주둔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자국민이건 외국인이건 간에 어느 정도의 수탈은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조직이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즉 자국 군대에 의한 자국민의 수탈은 전근대의 보편적인 현상이지, 조선 후기만의 특수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93] 다만 후기 조선군처럼 지방군도 아니고 중앙군에게, 세습군인도 아니고 시험으로 뽑는 무장들에게, 징세권과 화폐발행권까지 쥐어준 사례는 드물다. 이것은 정부에서 돈은 없는데 군대는 줄이기 싫어서 특권을 부여하다 보니 발생한 특이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전근대에는 정부가 징세권, 화폐발행권을 외주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유럽에서는 근세까지 비슷한 일이 있었고, 중국 역시 송나라에서 상인에게 화폐발행권을 준 사례가 있다. 다만 외국은 이러한 사례가 대부분 행정력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반면, 조선은 국방비 부담을 덜기 위함이었다는 차이가 있다.[94] 이러한 경향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지속되는 바람에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의 무기체계가 통일되지 않고 잡탕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중앙군이야 중앙의 의도대로 통일이 가능하지만 지방군영은 각자 무기를 마련해야 했기에 각 군영의 사정에 따라 잘 무장된 군영과 제대로 무장을 못한 군영으로 나뉘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총기류 중엔 조총을 뇌관식으로 개조하였거나 미니에탄 라이플을 화승식으로 개조한 이상한 총들도 나오게 되었다.[95] 출처:https://www.fmkorea.com/3973994767[96] 물론 조선보다 나을 뿐 이 나라들도 화약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특히 일본은 유황은 풍부했지만 염초는 턱없이 부족했고, 이것 때문에 염초를 중국으로부터 밀수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97] 특히 청나라는 호란 직후에는 조선 사신이 염초 등을 사가는 것을 철저히 단속했다.[98] 이 둘은 각각 전국시대, 명청 전쟁을 경험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 이었으며, 하필이면 이런 높은 수준의 군사역량을 쌓은 직후 조선을 침공했다.[99] 이는 쌍령전투 기록만 봐도 단적으로 알수 있는데 조총은 분명 강력한 무기이기는 하나, 이는 통제된 상태에서 적이 유효사정거리 내에 들어오고 쐈을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당시에 사격통제를 해야할 조방장을 문신 지휘관이 멋대로 처형하는 바람에 통제할 중간 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조총병들이 공포심에 마구잡이로 쏴대니 맞을 리가 없었고, 기회를 잡은 청나라 기병 300기가 조선군 진영을 헤집고 이후 후속부대가 전장에 난입하면서 조선군은 제대로 와해되어버리고 만다.[100] 이는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화력덕후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된다.[101] 유럽전사상 가장 선진적인 형태의 화력 운영으로 유명한 나폴레옹의 군대 역시 백병전 수행을 중요시 여겼으며 많은 훈련량으로 개인화기의 빠른 장전속도와 높은 정확도로 유명한 영국군 역시 백병전 수행을 평가절하하지 않았다.[102] 다만 사르후 전투는 조선군의 원거리 위주 전술을 비판하는 데에 있어서 100% 적절한 사례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때 조선군은 애초에 파병군 1만여 명 대부분이 조총병이었고, 살수와 기병은 철저히 명군에게 의지하는 상황이었다. 즉 조선군이 모든 병종을 주도적으로 배치해서 싸우는 게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군이 지휘부의 분열로 인해 각개격파당하는 바람에 조선군 역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갔던 것. 사르후 전투보다는 병자호란 당시 있었던 패전들이 좀 더 적절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103] 다만 왕의 호위를 맡은 병사들만큼은 백병전을 잘했다. 이들은 애초에 신체 조건이 좋은 인적 자원을 선발하는데다가 좋은 무장을 지급받고 훈련도 많이 했다.[104] "올적합(兀狄哈)은 부딪치기를 잘하니, 팽배(彭排)와 창검(槍劍)이 아니면 방어하기 어렵습니다. 팽배는 준비하기 쉬운 물품이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더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리고 만약 저장해 둔 창검이 많지 않으면 수를 헤아려서 더 보내는 것이 적당합니다." 출처[105] 무예별감(武藝別監)이라 불리며, 무예청은 용호영, 호위청 등과는 별개의 국왕 호위 기관이었다. 장용위의 초기 맴버들이 이곳 출신.[106] 대령무예청, 가대령무예청[107] 사어(司禦)[108] 조선 중기부터 인구가 늘어나면서 목장으로 사용하던 허허벌판이 농경지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기병 양성에 필요한 말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때 한반도 남부의 목장들이 쓸려나가면서 치명타를 먹었다. 게다가 왜란 직후 집권한 광해군이 목장을 다시 살리기는커녕 방치하면서 문제가 더 심화되었다.[109] 그런데 아무리 방어적인 교리를 잘 다듬어 낸다고 한들 결국 화승총만으로 수행하는 전술에서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양란 이후 조선군은 병인양요 전까지 약 200여 년간 외적을 상대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 단점이 크게 부각되는 일은 없었다. 이인좌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처럼 대규모 반란이 몇 차례 있었으나, 반란군도 어차피 조선인이라 조선군 교리로 싸웠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110]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대단한 일이다. 이 일대는 혹독한 황무지나 다름 없음에도 개마고원압록강, 두만강의 수원이 위치하는 전략로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이곳에 발을 딛은 수많은 군대가 많은 피해를 보았다. 당장 고려의 여진 정벌 당시 수많은 여진족과 고려인이 사망했고, 북관 대첩으로 인해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들이 동사했으며, 장진호 전투로 중공군과 미군 모두 전투보다 얼어죽은 쪽이 많았던 곳이다.[111] 당장 명나라군이 조선군처럼 위장하자 여진족들이 그대로 도망쳐버렸다는 기록이 있다.[112] 중종실록 31권, 중종 12년 12월 14일 을묘 2번째기사[113] 만주어로는 우디거(숲사람)라고 하며 조선시대 두만강(豆滿江) 일대에 살던 야인 여진의 분파이다. 비록 명나라 아래 있었던 건주 여진이나 몽골에 가까웠던 해서 여진에 비해 문명 수준은 낙후되었으나 호전성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세력권에 속해 있어 조선이 공격할 땐 명나라 눈치를 봐야 했던 건주여진, 너무 멀어서 당시엔 부딪힐 일이 없는 해서여진과 달리 조선과 직접적인 충돌을 가장 많이 일으켰던 세력이었다.[114] 문명 수준이 낙후되었다고 보기도 애매한 것이 실록에 보면 "알타리(斡朶里)와 올량합(兀良哈)은 사는 집에 풍족하지 못하여 집이 좁고 더러웠는데, 올적합은 집이 크고 깨끗하며 또 큰 궤를 만들어 쌀을 담고 집집이 쌍다듬잇돌(雙砧)이 있으며 밭이 기름지고 개 · 돼지 · 닭 · 오리도 많이 길렀다"거나 "(올적합의 집은) 대들보 하나로 된 집이고 그 만듦새는 중국인이 사는 집과 서로 닮았다"라는 이계동의 언급이 있는데, 이계동은 "올적합이 예전에 개원위(開原衛) 사람을 잡아다가 남녀가 혼인하여 여러 세대를 살아 왔기 때문에 그 사는 집의 만듦새가 이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115] https://www.fmkorea.com/5366988869[116] 올적합은 당시 야인여진 중 가장 강하고 호전적인 세력이었으니 그런 올적합을 털어버린 조선군이 두만강 일대 여진 부락들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여겨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117] 여진족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이후 해당 올적합 토벌에 대해 귀화한 여진족인 동청례가 강성하던 금나라도 못한 일이라며 여진족들을 회유했던 근거로 써먹은 기록이 있다."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출처[118] 이시애의 난 진압과정을 보면 용인 전투마냥 단순히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들로 보기도 어렵다.[119] 당시 명나라는 비록 토목의 변 이후 영락제 시절에 비해서는 국가위상이 낮아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오늘날 미국정도의 위상을 가진 강대국이었다.[120] 당시 명나라군은 1만명당 128명의 여진족을 죽였다.[121] 출처: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dbGubun=SD&category=Report&m201_id=10038483&local_id=10052878[122] 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123] 탈레반과 하마스가 비록 미군이스라엘군에 비해서는 훈련과 장비 모두 열악하나 미군과 이스라엘군도 아무 군대나 보내는 게 아니라 특수부대를 보낼만큼 탈레반과 하마스의 게릴라 전술은 무시못할 수준이다.[124]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정규군을 상대로는 게릴라전이 고작이었던 탈레반정도의 무장단체가 갑자기 정규군 못지않은 기갑부대를 거느리게 되자 정규군과 전면전이 가능해질정도로 전투력이 비약적 상승한 셈이다.[125] 해서여진의 일파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과 함께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번호 여진족들을 정복하는 것을 두고 경쟁했었다.[126] 조선 측에선 300명 정도로 파악했다. 기존의 홀라온 기병과는 차원이 달라서 당시 기록엔 혹시 누르하치 세력이 지원온 게 아닌가 의심하는 대목도 있다.[127] 사실 조선군은 어느 시기든 단순한 동원력만큼은 수십만 대군을 뽑을 수 있긴 했다. 문제는 이걸 운용할 숙련병과 부사관 계층이 턱없이 얇았을 뿐. 초기 조선군의 활약은 아직 군인의 힘이 강했던, 과도기적인 풍조에 덕을 본 것도 크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체적인 경제 기반을 가진 군인계층이 존재했고 이들이 군대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128]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003) 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 【곧 동소문(東小門). 】 ,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 【곧 수구문(水口門). 】 ,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 【곧 남대문. 】 ,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 【곧 서소문(西小門). 】 ,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129] 대마도(쓰시마) 정벌은 원정으로서의 의미가 강했으며, 대규모 전쟁이라기 보다는 조선 세종대왕 시기 왜구들에 대한 강압책에 해당한다.[130] 청-러시아 국경분쟁 과정에서 청 황제의 지시로 파병된 전투다.[131] 용의 눈물에서 정종 때까지는 갑옷을 입혔으나 태종 때가 되자 포졸복으로 바뀌었다.[132] 다모에서 일부 군사들이 갑옷을 입은 장면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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