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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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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깃발인 좌독기수자기[1].

1. 개요
1.1. 전기1.2. 중기1.3. 후기
2. 편제3. 계급4. 군사 과학 기술5. 기타6. 장비7. 주요 전쟁8. 유명인9. 대중 매체
9.1. 게임
10. 관련 문서 및 참고 사이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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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정규군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조선을 이으면서 대한제국군으로 이어졌으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대한제국군은 해체되었다.

1.1.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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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조선군은 고려 왕조를 쿠데타로 접수해 고려군의 체계를 그대로 계승했다. 고려군과 마찬가지로 조선군 역시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뉜다. 중앙군은 고려 시대부터 있던 2군 6위에 태조 1년(1392)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 좌, 우위 2위를 더해 10위(十衛)로 구성된 의흥삼군부로 구성되었다. 10위는 의흥친군좌위(義興親軍左衛), 의흥친군우위(義興親軍右衛), 응양위(鷹揚衛)[3], 좌우위(左右衛), 금오위(金吾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비순위(備巡衛)[4], 천우위(千牛衛)[5], 감문위(監門衛)[6]로 나누어졌다. 각 10위에는 취재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된 갑사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7] 그러나 태조 3년(1394) 의흥친군위와 나머지 8위의 지휘체계가 달라 혼선이 있다는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10위는 10사(十司)로 개편되었다. 의흥친군좌위가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로, 의흥친군우위가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로, 응양위는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금오위는 신무시위사(神武侍衛司)로 개편되어 중군(中軍)에 편성되었고, 좌우위는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로, 신호위는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로, 흥위위는 용무순위사(龍武巡衛司)로 개편되어 좌군(左軍)에 편성되었으며, 비순위는 호분순위사(虎賁巡衛司)로, 천우위는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로, 감문위는 호용순위사(虎勇巡衛司)로 개편되어 우군(右軍)에 편성되었다. 개편 내용을 보면 중앙군이 4개의 시위사(侍衛司)와 6개의 순위사(巡衛司)로 편제되었고 시위사들은 모두 중군(中軍)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태종 즉위 이후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8]가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개편되고 충무순금사(忠武巡禁司)가 설치되면서 도성 내 치안 업무를 관장하게 되자 시위사를 9개로 증강하고 순위사를 1개만 남겨놓게 되었다. 세종 즉위 이후 10사는 무려 12사로 증강되었으나 1424년 다시 10사로 돌아왔고, 이후 1445년에 또다시 12사로 늘어났다. 결국 문종 1년(1451) 기존 시위사들을 5사(五司)로 통폐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12사 병력 뿐 아니라 기존에 금군에 포함되던 별시위, 총통위, 방패 등도 5사에 속하게 하였다.

지방군은 크게 육진군(육군)과 기선군(수군)으로 나눠진다. 육진군은 각 도에 있는 영과 진에 복무하며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영진군과 돌아가며 서울에서 궁궐을 지키던 시위패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선군은 말 그대로 수군으로 수영에 배치되어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여기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도 있었다.

현직 관료를 제외한 12세 이상 60세 이하 모든 양인 남자는 현역 군인인 정군이나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으로 편성되었다.

이 시기 조선군은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북방 방비 및 왜구 토벌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의 압록강두만강을 잇는 국경 확립에 공헌한 4군 6진 개척, 1396년과 1419년에 있었던 2차례의 대마도 정벌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후로는 국토 방어에 힘쓰며 가끔 예방전쟁 성격을 띠고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는 것 이외에는 대외 확장은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 진법을 계승하고 후일 집대성해서 문종 때 오위 진법으로 나타난다. 오위 진법은 군대장군 아래 5위를 두고, 각 위는 5부가 있고, 각 부는 4통으로 구성되고, 사통 2부대는 기병과 2부대는 보병으로 구성되는, 보병과 기병을 균형있게 운용하여 적을 막으면서 각 부대 간에 상호 지원할 수 있게 만든 탄력적인 진법이다. 기병은 창기병 40%, 궁기병 60%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환도는 기본착용했다. 추가적으로 척후도 담당했고 보통 정찰은 10리 정도. 보병은 5가지 병종으로 구성되었다. 방패와 환도로 무장한 팽배수, 소형 총통으로 무장한 총통수, 창으로 무장한 창수, 긴 자루가 달린 외날 칼인 장검으로 무장한 장검수, 활로 무장한 궁수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총통과 팽배수는 무조건 20%가 포함되어야 하며 나머지 병종은 상황에 따라 가감할 수 있었다. 단순 비율만이 아니라 도끼나 철퇴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등 전장의 즉응성을 강조했다.

진영의 경우 1선은 팽배수나무방패와 환도를 가지고 대기, 2선은 총병이 저격을 하고 3선의 검수가 들어오는 적을 요격한다. 그리고 후열에서는 궁수가 적을 저격하는 식으로 운영하였다. 무장 수준은 찰갑과 총수를 빼고는 환도를 패용해서 근접전도 언제나 각오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술적으로는 기본적으로 방위위주로 모루인 주통과 예비대인 전통으로 나누어진다. 적이 오면 주통과 전통이 합세하지만 적이 물러나도 주통은 진을 지키고 전통이 나아가서 적을 섬멸한다. 이 진법이 쓰인 당시 주적은 여진오이라트 족으로 정주민이 유목민을 어떻게 상대하야 하는지 고민이 들어난 전법이다.

세조 즉위 이후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9]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편되면서 오위가 조선의 중앙군이 되었다. 오위도총부의 장인 오위도총관은 정2품 서반직으로서 조선 전기까지 무관들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로 여겨졌으나 양란 이후 오군영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단순히 왕실 종친들을 위한 명예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렇게 구성된 조선군은 4군 6진 개척과 대마도 정벌을 통해 전투력이 검증되었으나 세조 때 의흥삼군부가 오위도총부로 변형되서 부사관 계층을 이루던 지휘체계가 붕괴되고 총통위가 폐지되서 화약무기의 개발 및 보급이 약화되었으며[10], 지나친 궁시 위주의 고과로 백병전이 취약해지고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 3명으로 편성된 것이 보인 2명으로 줄어들어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고 조호[11]를 지급하는 기준이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뀌어서 이로 인해 군인층이 붕괴되자 조선군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한다.[12]

급기야 성종 대에 이르러선 대간이 화차가 낡았다고 버리자고 해서 버리거나, 병선들이 썩고 있다는 윤필상의 보고가 들어오기도 했다. 특히 보법이 시행되어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자 정군들이 보인이 지어야 할 부역까지 지게 되면서 군사들은 보인에게 받은 비용으로 사람을 사서 대역시키는 방식이 점차 퍼지게 된다. 결국 1541년 중종 36년에 수포제가 시행되어 군역 부담자에게 번상가를 포로 일괄 징수해서 그 비용으로 군인을 고용하게 된다. 이후 양인 장정들은 대부분은 1년에 군포를 2번 내는 납포군으로 변환된다. 국가간의 전면전 없이 지속된 오랜 평화로 인해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조선군 중 전력을 유지하던 부대는 중앙군으로는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를 포함한 금군(禁軍) 수백 명과 오위 중 중위에 해당하는 의흥위(義興衛)에 속하는 갑사 수천 명, 지방군으로는 1만 남짓한 하삼도의 수군과 평안 함경 지역의 북방군 수천 명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 유럽 각국의 축소되고 약화되는 군대 수준과 비슷한 일을 겪었던 셈이다.

1.2. 중기

1592년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조선군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고 각지의 산성을 보수하고 이순신 등 유능한 장수들을 승진시키는 등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일본군의 규모와 일부 지휘관들의 도주로 인해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 의병들의 봉기와 항쟁, 명나라 대군의 참전,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한 관군의 반격으로 개전 1년 만에 전세가 일본 우세에서 교착 상태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심유경의 강화 협상으로 흐지부지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만다. 그러나 조선군은 2차 진주성 전투, 남원성 전투,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여 전라도가 일본군에게 유린당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이 명량 해전직산 전투에서 패배하자 일본군은 다시 수세에 몰려 왜성에 의지해 방어만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결국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임진왜란 와중에 오위진법은 기병위주가 아닌 왜구들과 싸우면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전쟁 중에 일본군이 가진 조총의 위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조선은 조총을 도입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1593년에 조총을 모방 생산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에 김충선 같은 항왜들의 도움을 받아 조총 제작 기술이 발달하여 임란 이후에는 조총이 보병의 주력 무기로 정착하게 된다. 또한 명군이 불랑기포로 많은 활약을 선보이자 임란 이후로 불랑기포가 주력 화포로 많이 쓰이게 된다. 기존 총통들도 꾸준히 개선해서 사용한 것은 덤.

기존 군제가 효용성이 없다는 판단을 가진 조선은 1593년 새로운 중앙군으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를 토대로 조총을 쓰는 포수(砲手), 창검으로 무장한 살수(殺手), 활로 무장한 사수(射手)로 구성된 삼수병 체제로 전환한다. 지방군 역시 1594년에 속오군 체제로 개편되어 기존의 오위진법 체제를 대신하게 된다. 보통 척계광기효신서(절강진법)를 기반으로 삼수병 체제를 구성했다고 배우는데 기효신서 자체는 단순 병법책이 아니라 왜구를 상대로 농민들을 훈련시켜 편성하는 법을 수록한 책이다. 기효신서는 팽배수, 낭선, 당파수 등 다양한 병종이 있지만 왜구한테 발리던 조선군 입장에서 근접병은 최소화 할수 밖에 없었고 이는 훈련도감의 삼수병, 즉 사수, 살수, 포수 등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은 정묘호란병자호란에서 청군에 또 다시 패하였다. 이때 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아작난 평안도 북방군을 대신해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을 신설해 중앙군을 보강하고, 산성 위주 방어 전략을 이용해 청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청군은 이를 눈치채고 산성을 우회해 한양을 향해 속공으로 나왔다. 여기에 지나친 조총수 위주의 보병 편제로 인해 청군 기병을 저지할 수단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이를 보완하고자 조선군은 전거와 기병, 보병을 함께 운용하는 거기보전을 도입하려 시도했다. 특히 삼수병체제는 기본적으로 보병체제이기 때문에 산성 우주방어에는 적당했지만 기동력을 가진 청의 철기병에는 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오위전법을 가져오되 화력덕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거기보전이다. 거기가 바로 거대한 기계, 즉 화포를 의미한다. 실제 화거방진도를 보면 하나의 방진은 100량의 화거와 20량의 목화수거로 구성되는데 화거 한대당 조총이 50문에 목화수거는 15문이라는 미친 화력을 뽐내고 있다. 하지만 산이 많은 한반도의 특성상 전거를 운용하기에는 제약이 많았고 조선의 재정이 좋지못해 거기보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전거와 군마를 대량으로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예산의 문제로 만기요람이라고 군수물자 확인서에는 훈련도감에 전거가 겨우 51량만 있다는 안습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살수가 사용하는 무기 중에서 기병을 상대하는데 적절치 않다고 판단된 장창을 빼고 구창과 협도곤을 추가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후 숙종 때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금위영을 신설하면서 오군영 체제가 완성되고, 수도인 한양 도성과 주변 도시들을 지키게 된다.

왜란과 호란 이후부터 조선군은 조총수가 태반인 보병과 활과 편곤으로 무장한 기병, 불랑기포와 기존 총통을 다루는 포병 전력으로 구성된다. 다만 화포를 만드는데 쓰이는 구리와 화약을 만드는데 필수인 유황의 부족으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동시대 유럽의 군대가 사용한 것보다 어느 정도 뒤쳐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구리나 유황을 거의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진산 근방에 대량으로 채굴되기 시작해서 겨우 자급자족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 숙종 때다. 의외로 전술은 동시대 유럽에서 쓰던 선형진과 유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화포 부분에서 격차는 계속 벌어진다. 사실 18세기 전반까지 조선이나 서양이나 화포 제작법에는 토모를 사용했는데 토모는 습기가 차고 무엇보다 규격화하여 제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대원군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토모의 습기는 화포의 성능을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유럽에서는 그리보발이 대포 주조틀의 표면을 깎아내는 '천공 기술'을 사용하면서 화포의 규격화에 성공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1750년대에 '강선'이 등장하면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강선'이 개발되었음에도 1780년에도 활강포를 생산한 걸 보면 불랑기포처럼 불완전했던 것 같다.[13]

한편 바다를 지키던 수군은 수도권 인근 해안을 지키던 통어영(統禦營)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으로 나눠지게 된다. 정조 때 국방비 절감의 일환으로 통어영과 강화도를 지키던 진무영이 통합되었으나, 군사상의 비효율성으로 얼마 후 복구되었다.
숙종~정조에 이르는 시기까지 조선은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였다. 일종의 예비군 개념인 속오군,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소속 정규 지방군 및 수영(水營) 소속 수군, 오군영(五軍營)으로 대표되는 중앙군까지 합하여 약 20~30만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 7월 4일을 보면 병자호란 바로 전년의 조선군 총수는 약 10~11만에 중앙군은 3만 5천정도, 종전 3년 후이자 최초기사로부터 4년 후인 18년 12월 1일 기록에는 거의 30만까지 불어나있다. 이후 20만 전후의 규모에서 꾸준히 유지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기병 역시 수만 단위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군대의 양은 지속적으로 늘어났지만 실질적인 전력인 중앙군의 규모는 수만 단위로 계속 머물렀는데, 이는 조선조정을 고질적으로 괴롭힌 좋지못한 재정, 그리고 100여년에 걸친 평화는 삼남 지방의 지방군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지방군의 춘조/추조 (봄, 가을의 훈련)이 이루어지던 숙종~영조 시기와는 다르게 정조 시기부터는 춘조나 추조가 제대로 치루어지지 않았고, 성을 방어하는 훈련인 성조마저도 기준을 채우지 못하였다.

중앙군의 경우, 훈련도감 6~7천여명, 어영청금위영 각 2천여명[14], 금군 및 호위청을 합쳐 1천여명 등 약 1만 3천명 가량이 존재하였으며, 이 밖에도 수도를 둘러싸던 4유수부 (광주, 수원, 강화, 개성)을 지키던 총융청, 수어청, 관리영, 진무영등에 속한 병력이 있었다. 지방군의 경우는 별무사[15], 친기위[16], 별기위[17] 등 정예 기병대를 상비 병력으로 운용하였다. 보병들은 사수와 살수가 도퇴되고 포수 위주로 개편되어 아예 포군(砲軍)이라 불리는 등 조총 위주의 편제가 굳어졌다. 청과 인접하여 있던 평안도의 경우, 2만 가량의 수비군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수군의 경우는 80~100척 가량의 판옥선이 삼도수군 (충청, 전라, 경상)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서히 약체화되어가고 있던 지방군과는 달리 수군은 청나라 해적, 이양선 출몰 등의 위협으로 적어도 순조 때까지는 잘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군 역시 함선 수의 감소와 병력 감소 등으로 서서히 약체화되어가고 있었다.

1.3. 후기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조선의 방위 체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재정도 좋지못하고 오랜 평화로 군대를 크게 유지할 필요성도 없었기에 조선군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어 서구의 이양선들이 해안에 나타나도 이에 대항할 배 한 척조차 없게 된다. 그나마 대원군이 집권하여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하고 서구식 포가를 도입하고 신병기 개발에 노력하고 오군영을 다시 보강하면서 약간이나마 나아진다.[18]

이러한 노력 덕택에 병인양요신미양요에서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등으로 조선 경제를 파탄내면서 다시 강화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이 사라지게 되고 이후 고종이 친정하자 군대에 대한 지원이 끊기면서 그 결과 운요호 사건 때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진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군도 변화를 맞는다. 우선 삼군부를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아래 군무사(軍務司)를 설치하여 오군영을 무위영(武衛營)[19]과 장어영(壯禦營)[20]으로 축소 개편한다. 그 유명한 별기군이 바로 무위영(武衛營) 소속이었다. 또한 서양의 신무기를 도입하고 보급하는 데 노력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은 폐지되고 조선의 중앙군은 청, 일본, 조선의 군사교리가 모두 섞인 신식 군대인 친군영(親軍營)으로 변모한다. 지방군 역시 신식 군대화가 진행되어 강화도에 주둔하던 친군심영(親軍沁營)[21], 평양에 주둔하던 친군서영(親軍西營), 대구광역시에 주둔하던 친군남영(親軍南營), 부평에 주둔하면서 경기 연해를 지키는 친군기연해방영(親軍畿沿海防營)[22] 등이 설치된다. 물론 그 당시에도 각 도의 감영, 병영, 수영에 소속된 구식 군대는 남아있었다.[23]

한편 중앙의 친군오영은 전후영(前後營)은 일본군의 영향을, 좌우영(左右營)은 청군의 영향을, 별영(別營)은 전통적인 조선군의 영향을 받아 편제와 교리 등이 중구난방이었다. 뿐 만 아니라 당시 한양에는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용호영(龍虎營) 등 기존 조선군 군영들도 온전하게 남아있던터라 중앙군 편제는 상당히 복잡하고 세분화되었었다. 결국 상술한 전통적인 조선군 군영들은 1884년 해체 후 인원들은 친군영에 이관하였으며, 친군영 역시 오영(五營) 체제에서 삼영(三營)체제로 개편한다. 친군 전영과 좌영을 통폐합한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통폐합한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 친군 별영을 개편한 친군총어영(親軍摠禦營)으로 친군삼영(親軍三營)체제를 유지하였다가 1891년 북한산성 일대 구 총융청(摠戎廳) 병력을 통위영(統衛營)에서 분리하여 경리청(經理廳)을 신설하면서 친군사영(親軍四營)체제로 굳어지게 된다.

친군영(親軍營)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실전 경험을 다수 겪기도 하였는데, 장위영(壯衛營) 병력과 심영(沁營) 병력[24]이 동학농민군과 교전을 벌인 바 있으며 같은 해 6월 일본군경복궁을 범궐할 당시 장위영(壯衛營), 경리청(經理廳), 평양 기영(箕營) 등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후 무장해제 당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하고 친일내각을 세운 이후 갑오개혁으로 중앙군은 시위대[25], 훈련대 [26]가 설치되어 근대식 군대로 재편된다. 하지만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일본군과 결탁하여 아군인 시위대를 공격하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가담함에 따라 훈련대시위대친위대[27]로 개편된다. 지방군 역시 갑오개혁 당시 친군영(親軍營)들이 해체된 이후 구식 감영군(監營軍) 혹은 병영군(兵營軍)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터라 진위대가 신설된다. 이후 의병 봉기가 빈발해지자 병력 규모가 증강되어 중앙군은 4400명으로, 지방군은 3031명으로 증강되었다.
  • 오군영(五軍營) 폐지 이후 중앙군 군영의 변화
명칭시기임무주둔지특이사항
무위영(武衛營)1882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한양별기군이 무위영 소속이었음
장어영(壯禦營)1882한양과 수도권 방어한양 및 수도권
친군 전영(前營)1883~1888 한양일본군의 영향 받음
친군 후영(後營)1884~1888 한양친군 전영과 동일
친군 우영(右營)1882~1888 한양청군의 영향 받음
친군 좌영(左營)1882~1888 한양친군 우영과 동일
친군 별영(別營)1884~1888 한양조선군 전통 교리와 편제 따름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1888~1894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한양친군 전영(前營)과 좌영(左營) 통폐합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1888~1894한양과 수도권 방어한양 및 수도권친군 후영(後營)과 우영(右營),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 통폐합
친군총어영(親軍摠禦營)1888~1894한양과 수도권 방어한양 및 수도권친군 별영(別營) 개편
경리청(經理廳)1891~1894수도권 북부 방어북한산성통위영(統衛營) 병력 중 구 총융청(摠戎廳) 병력이 분리
훈련대(訓鍊隊)1894~1895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한양을미사변 당시 왕비 시해에 가담
시위대(侍衛隊)1894~1895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한양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와 교전
친위대(親衛隊)1894~1905황제 경호 및 황궁 경비한성을미사변 이후 훈련대와 시위대가 통폐합된 조직
  • 조선 후기 지방군 군영의 변화
명칭시기주둔지특이사항
친군심영(親軍沁營)1887~1894강화도 장성 황룡촌 전투 투입
친군서영(親軍西營)1885~1894평양
친군남영(親軍南營)1887~1894대구광역시
친군북영(親軍北營)1894종성군
친군무남영(親軍武南營)1893~1894전주시황토현 전투 투입
친군진남영(親軍鎭南營)1894청주시
친군진어영(親軍鎭禦營)1894춘천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군은 대한제국군으로 재편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대한제국군을 참고.

2. 편제

아래의 편제는 조선 중기 / 후기 육군 기준이다.[28]
  • 오(伍) : 군사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최하위 제대. 지휘관은 오장(伍長)으로 불렀다. 오장은 군관이 아니라 병졸이 맡았다.
  • 대(隊) : 3개 ~ 5개의 오(伍)로 이루어진 제대. 지휘관은 대정(隊正)이라 불렀다.
  • 기(旗) : 3개 ~ 5개의 대(隊)로 이루어진 제대. 현재의 소대와 비슷하다. 지휘관은 기총(旗摠)[29]이라 불렀다.
  • 초(哨) : 현재의 중대와 비슷한 제대. 지휘관은 초관(哨官)이라 불렀다. 초관은 종 9품 무관직이었다.
  • 사(司) : 현재의 대대와 비슷한 제대. 지휘관은 파총(把摠)이라 불렀다. 파총은 꼭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 겸임하기도 하였다.[30]
  • 부(部) : 현재의 연대, 사단과 비슷한 제대. 지휘관은 천총(千摠)이라 불렀다.
  • 영(營) : 현재의 군단, 사령부와 비슷한 제대. 지휘관은 대장(大將), 혹은 사(使)라 불렀다.[31] 지휘관 밑에는 부지휘관 겸 수석 참모 격인 중군(中軍)이 있다.[32] 중앙군은 오군영(五軍營)에 속해 대장과 사의 지휘를 받았고, 지방군은 해당 지역 감영이나 병영에 속해 관찰사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3. 계급

아래의 계급은 조선 중기 / 후기 기준이다.
  • 도원수(都元帥) : 임시 계급으로, 지방군을 통솔하던 계급. 지휘 범위는 유동적이다. 주로 정 2품 이상의, 문신이 임명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최고위직이긴 하지만 전시에만 상설되던 임시성과,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던 명령 계통으로 인해 도원수가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상당히 적었다고 한다. 현대의 대장 정도의 계급.
  • 사(使) : 오군영 중 총융청과 수어청의 수장으로, 정 2품의 무관직. 초기에는 무관들이 주로 임명되었으나 수어청의 장인 수어사가 18세기 이후 문신인 광주유수 겸임으로 바뀌어 그 세가 약해짐. 반대로 총융청은 무관들의 직책으로 남아 비변사 당상을 겸임하는 등 상당한 요직으로 잔존.
  • 대장(大將) : 오군영 중 삼군문(三軍門)으로 통칭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장. 종 2품의 무관직으로 훈련대장(訓鍊大將)은 서반 최고의 요직으로 대접 받았다. 현대의 중장 정도의 계급.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각 도의 육군을 지휘하였던 종 2품의 무관직. 무관이 임명되는 단병사와 관찰사가 겸하는 겸병사가 있었으며, 단병사는 경상도와 함경도에 각 2인, 나머지 6도에 각 1인씩 총 10인이 존재하였다. 지방의 병영에 배치되어 지방군의 훈련을 주재하였으며, 유사시 출전하여 근왕의 임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었으나, 병자호란에서도 보듯이 감사등 문관들이 임무에 상당 부분 간섭하였고, 병마절도사의 권한은 모태가 된 당나라의 절도사의 그 것처럼 막강하진 못했다. 현대의 소장 ~ 중장 정도의 계급.
  • 중군(中軍) : 각 군영에 속했던 종 2품 또는 정 3품의, 참모장 겸 부사령관 정도의 장교.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에 속한 중군은 종 2품의 품계를 갖고 있었으며, 평시 군영의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군영 대장의 유고시 부대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한편 진무영 등 지방군에 속한 중군은 정 3품직이었으며, 병영이나 감영에 배치된 병마절도사나 감사의 수석 참모장을 맡았다. 현대의 소장 ~ 중장 정도의 계급.
  • 방어사(防禦使) : 각 지방의 방어영에 배치된 종 2품의 무관직. 지방의 방어를 담당하였으며 변란시에는 감사, 병마사 등과 협조해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기도 하였음. 방어사를 역임한 무관이 중군을 거쳐 삼도수군통제사 /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군영 대장으로 영전하는 것이 관례였던만큼 계급은 현대의 소장 정도로 추정된다.
  • 별장(別將) : 각 군영에 속했던 종 2품 또는 정 3품의 당상군관. 금군의 장인 금군별장(禁軍別將)은 종 2품 무관직이었고 5군영과 각 병영에 소속되던 별장은 정 3품직으로 기병을 지휘하였다. 현재의 준장 / 소장(5군영 소속 / 병영 소속) ~ 중장(금군의 경우) 정도의 계급.
  • 천총(千摠) : 현대의 연대나 여단급 정도의 부(部)를 지휘하던 정 3품 무관직의 장교. 군영마다 존재하였으며, 지방의 병영이나 감영에도 배치되어 지방군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현대의 준장 / 소장 정도의 계급.
  • 영장(營長) : 현대의 연대급 정도인 지방의 영(營)을 지휘하던 장교, 주로 속오군을 지휘하였으며, 문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인조 때는 전임 영장제를 시행하여 상당 부분 권한이 확대되기도 하였으나 가속된 속오군의 천역화 등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한 자리가 됨. 하지만 북도 (함경도)등의 영장은 계속 존속하여 지방 방위에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음. 현대의 준장 / 소장 정도의 계급.
  • 절제사(節制使) : 조선 시대에 절도사가 관장하던 주진에 두었던 정 3품 무관직. 외침이 잦았던 함경도나 평안도, 황해도 등 북도에는 전문 무관이 임명되던 경우가 많았으나 다른 지방에서는 보통 지방관이 겸직하였다. 현대의 준장 / 소장 정도의 계급.
  • 첨절제사(僉節制使) : 조선 시대의 거진을 담당하던 종 3품 무관직으로 만호와 같이 육군과 수군 모두에 존속하였다. 부산진 등 각 진마다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함경도 등 북도에도 배치되어 국경 경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현대의 대령 / 준장 정도의 계급.
  • 만호(萬戶) : 지방의 진관 체제 하의 각 진에 속한 장교. 육군과 수군 모두에 존재하였으며 변경에서는 독자적인 방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정 4품직으로 현재의 대령 정도의 계급.
  • 파총(把摠) : 현대의 대대급 정도인 사(司)를 지휘하던 종 4품의 장교. 지방 수령이 파총을 맡은 겸파총제가 시행되기도 하였으며 중앙군인 5군영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병영군, 감영군 하의 사의 지휘관으로 복무하기도 하였다. 현대의 중령 정도의 계급.
  • 종사관(從事官) : 각 군영의 대장이나 중군 하에서 잡무를 처리하며 보좌하던 관직. 종 6품의 품계를 갖고 있었으며, 무관뿐만 아니라 문관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군영의 재정 업무를 겸하기도 하였으며 훈련도감 등에서는 화약색의 관리 중 겸임하여 화약 등 군수품 제조에 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의 소령 정도의 계급.
  • 초관(哨官) : 무관의 최하직. 종 9품으로 현대의 중대급 정도인 1개 초(哨)를 지휘하였다. 훈련도감에 34인, 어영청에 45인, 금위영에 41인이 존재하였으며 지방군에도 복무하며 초를 지휘하였다. 현대의 중위 / 대위 정도의 계급.
  • 진무(鎭撫) : 무품으로 군영에서 군관을 보좌하여 군사와 관련된 실무를 담당하던 최하위 관직으로서 현대의 중사 / 상사 정도의 부사관 계급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4. 군사 과학 기술

대규모 전투로 나라가 혼란했던 조선 초기의 북방 개척 시기, 왜구 격퇴 시기 및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주로 화약 무기 분야에서 기술적인 발전이 있었다. 주로 중국에서 들여온 화포를 이러저리 뜯어보고 개량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고, 이렇게 쌓아둔 노하우를 바탕으로 비격진천뢰나 세총통, 천보총처럼 독자적인 병기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화약 무기에 좀 묻히는 감이 있지만 도검류나 방패, 궁노 계열에서도 시대나 필요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고려 말의 혼란으로 그나마 있던 관련 지식조차 대부분 날아가버려[33] 화포 기술이 아직 발전하지 않았던 조선 초창기에는 총통이 활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해버리기도 해서 아예 전부 폐기하자는 의견도 나올 정도였지만, 명궁이라 총통 같은 거에 별 관심이 없던 태조와는 다르게 태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화포에 관한 개발이 시작되어, 과학기술 발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세종 ~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구경과 종류의 총통과 기타 화약 무기들이 개발되고, 총통의 사용법과 전술까지 제식화하는 등 사실상 조선군 무기 체계의 기틀이 마련된다. 화력덕후 조선군의 시작.

조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무기들 중 신기전(神機箭)은 여말선초 등장한 주화를 개량한 것으로, 1448년(세종 30년) 만들어진 로켓 개념의 무기다.[34] 개발에만 그치지 않고 신기전을 실전 배치 및 운용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은 일부 독자적인 과학기술의 발달이 있었으며 로켓 형식의 무기를 운용할 줄 알았다. 신기전을 발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차는 신기전기(神機箭機)로 불렸고 지금도 설계도가 남아 있다.

신기전은 고려 시대 최무선에 의해 발명된 로켓 병기인 주화(走火)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기도설〉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비장의 무기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기전은 화약의 사용량이 너무 크고 명중률이 떨어져 실효성은 떨어졌다고 한다. 신기전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대신기전(大神機箭),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中神機箭), 소신기전(小神機箭)으로 나뉜다.

대신기전은 길이 5.6m, 사거리 2km, 최대 3km. 공격용 발화통을 장착한 무기다. 1448년 세종 때 만들어졌다고 하며 90개가 제조되어 의주성에서 사용되었다. 화약은 약 3kg으로 조총 1000회 발사 분량이다. 목표 지점에 다다르면 폭발물이 자동으로 터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번에 1발씩만 발사할 수 있다.

산화신기전은 길이 5.3m. 사거리 2.4km, 최대 3.4km. 공격용 발화통을 장착한 무기로 대신기전보다 길이만 짧은 것 뿐이지 사거리나 폭파 범위는 다르지 않다. 다만 탄두에 철편(쇠파편 조각)이 내장되어 있어 살상 능력이 더욱 강력해진 무기이다. 무려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흠좀무한 물건. 1단이 다 소모되면 지화가 점화되어 600미터를 더 날아갈 수 있다. 한번에 1발씩만 발사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비격진천뢰라는 폭발 시간을 조절하여 내부의 철 조각으로 주위에 피해를 주는 일종의 시한폭탄도 개발하여 경주성 전투를 시작으로 실전 배치되었다. 주로 인마 살상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바위에도 파편이 박힐 정도로 강력한 성능이라고 한다.

또한 신기전의 발사체계로도 알려진 화차는 문종 치세때 현대의 모듈러식 체계와 같이 상부 부품을 교체하는 것만으로 서양의 오르간 건같은 총통기신기전을 쏘는 신기전기를 둘다 운용할 수 있게 개량되었으며, 이를 문종화차라고 불렀다.

5. 기타

다른 국가 군대와 달리 부사관에 해당되는 계층이 조선군에 없었다.[35] 그나마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던 갑사가 부사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세조가 오위도총부를 만들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사실상 없게 되었다. 말단 부대를 통제하고 지휘할 부사관이 없으니 전투 시 장군이나 장교가 전사하거나 사기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일선 부대가 순식간에 와해되는 건 당연하다. 초급 군관이 있지만[36] 무관을 많이 뽑지 않다보니 말단 부대를 다 통제하기엔 수가 부족했다. 부사관이 군대의 허리나 마찬가지인 점을 고려하면 이는 조선군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다.
문치주의와 군대를 통제하기 위해 문신들이 지휘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일이 많았다. 감사 - 병사가 이중으로 군대를 지휘하는 등 군사 제도 자체에 문신의 개입이 허용된 탓이 크다. 감사가 해당 도의 병사와 수사를 겸임하는 것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어 있었다.[37] 군사 지식이 전무한 문신들의 지휘권이 높다보니 무신들이 이러지도 못하고 결국 패배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임진강 전투.

또한 조선 정부는 군대의 반란을 상당히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반란 진압 시 오군영에서 몇 개 초[38]를 차출해 순무영[39]을 임시 편성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훈련할 때 있는 친구랑, 싸울 때 있는 친구랑 다르다는것..

이것이 무엇이 문제냐면 전투 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병력이 손발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우리 대대에서 중대 한 개, 타 대대에서 수 개 중대를 차출해서 새로운 대대를 만든 후 전투에 투입하는 것이다...[40]

6. 장비

조선시대의 무기 (1392~1895) 참조.

7. 주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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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후 전투 파일:청나라 국기.png 후금
정묘호란 파일:청나라 국기.png 후금
병자호란 파일:청나라 국기.png 청나라
나선정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Flag_of_Oryol_%28variant%29.svg.png 루스 차르국
병인양요 파일:프랑스 국기.png 프랑스 제2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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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 파일:일본 제국 국기.png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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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명인

9. 대중 매체

제작비 때문인지 제작진이 고증에 관심이 없는건지, 미디어에 나오는 조선군은 죄다 근무복 평복. 때론 그냥 포졸복 차림으로 나오는 게 허다하다. 고증이 그만큼 엉망인데 여러 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은 죽어라 당파만 들거나 화살을 든 정도로만 나오는 게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에서 허다하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과 기록, 해당 항목의 설명을 봐도 알수있듯 조선군은 초기부터 갑옷과 화약무기로 무장한채 싸웠으며, 임진왜란 당시 선교사로서 조선에 온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군은 검은 갑옷 차림이 많다라고 적었는데 위에 나온 갑사 갑옷을 말한 듯하다.

2010년대 이후부터는 조금씩 고증에 신경쓰는 작품들이 늘어나며, 그중엔 그동안 조명되지 않던 경번갑이나 찰갑, 두정갑 등을 입은 병사들을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나온 작품중 조선군의 고증을 잘 지킨 경우는 만화는 칼부림, 영화는 남한산성이라 볼수있다.

9.1. 게임

임진록 2에서는 당연히 등장한다. 주인공 세력답게 어느 하나 딱히 튀는건 없는 무난한 진영이다. 자세한 설명은 임진록 2/조선 유닛 및 건물 문서 참고.

10. 관련 문서 및 참고 사이트



[1] 지휘관 군영에 세웠던 군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이다.[2] 조선 전쟁사 분석서 '조선 전쟁 생중계'의 삽화를 담당한 "불나방"의 그림. 조선 전기의 찰갑을 비롯한 군졸의 무장 상태가 잘 고증되어 있으나, 알다시피 조총은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중기부터 사용되었다. (흔히 인식하는 바와 달리 조선은 왜란 이전부터 조총의 존재를 알았다. 조총 문서 참조.) 물론 찰갑은 조선 중기에도 여전히 쓰였다.[3] 고려 2군 중 하나인 응양군이 개편된 부대.[4] 도성의 치안을 맡아보던 부대[5] 고대 중국에서 황제를 지키던 무사들이 차던 칼을 천우라고 지칭하는데서 유래한 명칭[6] 성문을 지키던 부대[7] 이후 갑사오위 중 중군(中軍)인 의흥위 소속으로 모두 편입된다.[8] 의금부의 전신[9] 조선 초 군령을 관장하던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가 승추부(承樞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 등으로 이름을 바꾸다가 문종 대에 개칭된 기구[10] 총통위 폐지 이후에는 각 위가 알아서 화약무기를 만들었다.[11] 봉족호.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12] 세조 때 이전의 세병제에 가까운 군호제에서 양인개병제로 바꾸어 정군 1인에 보인 2인 번갈아가며 번상병으로 복무시켜 15만 상비군을 마련 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세조 이전인 태종 ~ 문종때도 조선군은 상비군이 30만 이상이나 될 정도 막강한 전성기였다.[13] 초기 강선은 총알을 망치로 때려박아 넣어야 돼서 당시 강선포는 3분당 1발이라는 끝내주게 느린 공격 속도를 가졌고, 미니에 탄이 등장하며 그나마 강선을 제대로 활용하게 될 때쯤엔 이미 강선이 등장한지 100년이나 지난 1850년대였다.[14] 장부 상의 병력은 수만에 달하였으나 단순히 군포를 납부하는 자도 군적에 넣었던 조선의 특성상 실질적인 병력은 1~2천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5] 일반적인 기병이 아니라 기사들로 이루어진 정예기병대로, 평안도,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등에 있었다. 여담으로 평안도 별무사는 홍경래의 난 당시 반군에 가담하였다.[16] 함경도에 주둔하던 기병대로 함경도 별무사가 개편된 부대[17] 동래부에 설치되었던 기병대[18] 특히 대원군은 병인양요 이후 서양제 무기의 파괴력을 인식하고 신무기 제작을 진행했다. 대표작으로는 섬유를 겹쳐 만든 방탄복인 면제배갑이나 수중 기뢰인 수뢰포 등이 있다.[19]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을 통합하여 설립한 군영으로 왕의 경호와 궁궐 경비를 맡았다.[20]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을 통합하여 설립한 군영으로 한양과 수도권의 방위를 담당했다.[21] 진무영이 개편된 군영[22]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수군을 총괄하던 통어영(統禦營)이 개편된 군영[23] 구식군인들은 주로 포군(砲軍)이라 불렀다.[24]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전멸당한 경군(京軍)이 친군심영 소속 병력이다.[25] 미국 퇴역 장군인 윌리엄 다이가 훈련[26] 일본군 장교가 훈련[27] 얼마후 시위대로 환원된다.[28] 조선 초기의 경우 중앙군과 지방군의 편제가 따로 있었다.[29] 무관 뿐 아니라 군졸에서 승진한 이도 맡았다고 한다.[30] 지방관이 해당 고을의 군사를 지휘하는 조선의 군사 체계 때문이다. 이런 경우 겸파총이라 불렀다. 실제로 어영청과 금위영의 경우 경기도 일대 수령들이 겸파총이 되어 병력을 이끌기도 했다.[31]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경우 대장(大將)이라 불렀고, 수어청, 총융청의 경우 사(使)라 불렀다.[32] 중군은 각 군영 대장을 보좌하며 실무를 총괄하여, 실질직인 지휘관 역할을 맡았다.[33] 화약 무기 전래 전까지 총통의 역할을 해오던 쇠뇌의 제작 기술도 이때 증발해버려서, 세종 대에 쇠뇌를 다시 만드려고 도자기의 그림을 참고하는(...) 웃픈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34] 다연장이 아닌 일반 로켓 개념의 무기는 1232년 중국의 비화창(飛火槍)이 최초다.[35] 다만 김탁환 원작의 불멸의 이순신 이나 난중일기에 종종 등장하는 진무(鎭撫)라고 불리는 직책이 현대 한국군의 부사관 역할에 대응한다고 볼 수도 있다.[36] 현대의 소대장이라 할 수 있는 기총이나 중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초관이다.[37]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충주에서 신립의 기병대가 무너지자 전라도 군사들이 한양을 지키기 위해 북상했는데, 전라감사가 이들을 이끌고 전라병사는 그냥 임지에 남아있었다... 결과는 용인 전투[38] 현대의 중대[39]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편성한 임시 군영. 주로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병력이 차출되었다. 이인좌의 난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것도 순무영 병력이다.[40] 다만 이렇게 다른 군영에서 병력을 차출해서 새로 부대를 편성하는 방식이 조선만의 특징은 아니다. 영국군의 경우 각 지역 연대에서 병력을 차출해서 여단을 편성해서 파병하는 방식을 사용한다.[41] 대마도(쓰시마) 정벌은 원정으로서의 의미가 강했으며, 대규모 전쟁이라기 보다는 조선 세종대왕시기 왜구들에 대한 강압책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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