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 오군영을 구성하는 군영.2. 역사
오군영 가운데 그 형성이 가장 늦어 영조의 재위기간이었던 1754년에야 독립된 군영으로 편제되었다. 금위영의 시초는 1682년 병조 소속의 정초군(精抄軍)[1]과 훈련별대(訓鍊別隊)[2]를 통합한 것이었는데 그 통합의 이유가 경비 절감 차원이었다. 훈련도감 항목에 나와있듯이 도감군은 그 시대 다른 조선의 관군과 달리 직업군인이었기에 상당한 인건비를 요구하였는데 이 돈을 아끼고자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금위영을 설치한 것이다. 금위영은 이름과는 달리 금군의 군영이라기보다는 훈련도감·어영청과 더불어 삼군문으로 불리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의 중추역할을 맡았던 금위영의 대장은 병조판서가 겸임하였지만[3] 영조 연간에 금위대장을 별도 임명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금위영은 어영청보다 늦게 만들어졌지만 훈련도감의 병력이 기간병이 되었다는 근거로 어영청보다 앞서는 것으로 대우받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시기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일시적으로 그 위상이 강화되기도 했으나, 고종의 친정 이후 다시
3. 복식
금위영의 보군들은 주로 전립에 청전복을 착용했으며 갑주는 입지 않았던것으로 보인다.
금위영의 기사들 또한 전립에 청전복[4]을 착용하였는데 갑주로는 철갑[5]과 피갑[6]을 혼용하였다.
[1] 어영청 병력이 청의 요청에 의해 명과의 전쟁에 투입되자 수도 방위를 위하여 경기 지역의 속오군 중 정예 자원을 가려뽑은 부대.[2] 훈련도감 소속 군인들이 모두 직업군인인데 비해, 훈련별대 소속 군인들은 번상하여 군역을 수행하던 농민들이었다.[3] 금위영 설치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숙종 초년의 실세 외척 김석주였기 때문에 빚어진 상황이다. 사실 훈련도감은 설치 이후 서인 계열 무반들이 장악하였고,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은 모두 서인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부대들이였으나, 유일하게 현종시기 남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막대한 자금이 소모되던 훈련도감의 문제 해결을 이유로 훈련별대를 조직하였다.(이렇게 한 이유는 서인의 중심이던 산림들은 쫓겨났지만, 왕실의 외척으로 남아있던 광산 김씨를 바탕으로 서인의 군 장악력은 조금도 변동이 없었다.) 이후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면서 이를 다시 없애는 차원에서 창설한 것이 금위영이다.[4] 보군의 전복과 다르게 소매가 홍색이다.이는 무관의 구군복도 마찬가지이다.[5] 내부 갑찰이 철인 두정갑으로 상하분리형이다.[6] 내부 갑찰이 가죽인 두정갑으로 상하일체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