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8 02:22:52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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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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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왕세제
경종 이윤 (왕세자) 영조 이금 효장세자 이행 (왕세자)
조선 제21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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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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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영종(英宗) → 영조(英祖)
시호 조선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1]
장순(莊順)
본관 전주(全州)
금(昑)
광숙(光叔)
양성헌(養性軒)[2]
출생 한성 창덕궁 보경당
사망 한성 경희궁 집경당
능묘 원릉(元陵)(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위치)
왕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純王后)
부왕 조선 숙종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 崔氏)
생몰
기간
양력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81년 5개월 22일, 총 29759일)
음력 1694년 9월 13일 ~ 1776년 3월 5일
재위
기간
양력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
(51년 6개월 6일, 총 18816일)[3]
음력 1724년 8월 30일 ~ 1776년 3월 5일

1. 개요2. 생애3. 성격4. 업적5. 한계6. 어진7. 가계8. 트리비아9. 창작물에서
9.1. 사극9.2. 만화, 소설
10.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의 제21대 국왕.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시는 몸종이자 궁녀의 옷을 빨던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사이에서 서차남로 태어났다.

군호는 연잉군. 대부호집안 중인출신에 한때 정비 인현왕후를 제치고 정비가 됐던 희빈 장씨의 아들인 형 경종과 달리, 숙빈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약점이 있었다. 형 경종 즉위 때 신임옥사(당시 연잉군, 훗날 영조를 지지해준 노론4대신이 집권여당 소론 측의 공격으로 이때 사약을 먹고 죽었다)가 일어나면서 죽을 뻔 했었다.

비록 31세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즉위했지만, 장장 52년간[4][5] 역대 한반도 군왕 중 장수왕(78년간 재위), 문왕(57년간 재위), 진평왕(53년간 재위)에 이어 네 번째로 오래 집권한 군주이며 장수왕 이래 두 번째로 오래 산 군주다.[6] 장기간 집권하면서 치적도 많이 남겼지만 과오도 저질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임오화변(사도세자)이다. 영조는 당시 69세로 이미 조선 역대 왕 중 최고령이었으나 뒤주 사건인 임오화변 이후로도 14년간 더 나라를 다스렸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43세인데, 영조는 무려 83세까지 살았으니 현재 기준으로는 100세를 훌쩍 넘기고도 몇십년은 더 산 셈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81세면 장수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장수 비결로 소식과 검소한 식단이 거론되는데[7], 정작 실록을 보면 당시에는 영조의 금욕적인 소식과 채식 위주 식단[8]을 주변에서 무척 걱정했다고 한다. 영빈(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 생모)은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즉위 52년간 큰 병 없이 최장수 왕이 되었다.

이 때문에 현대 한국의 웰빙 바람과 더불어 영조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참고로 영조는 큰 병을 앓지도 않았고 조선 왕들의 고질적인 유전병인 종기당뇨도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약을 입에 달고 사는 체질이었는데, 소화불량이나 소화장애로 고생했고, 말년엔 극심한 피로와 하지무력감, 건망증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골골백세였는데, 한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소음인적 체질인 비위허냉(脾胃虛冷) 체질이라서 산증(疝症, 아랫배에 병이 생겨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병증)에 시달리고 살았다.[9]

탕평책 등 정치는 크게 성공했지만 가정사는 즉위 후로도 불행했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와는 자식이 없었고, 그나마 후궁(정빈 이씨)에게서 얻은 장남 효장세자는 10살이 못 돼 그만 요절했다. 뒤를 이어 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늦아들을 낳았다. 그 늦아들이었던 사도세자는 어릴때부터 일찍이 세자로 세워 젖먹이 유아한테 공부시키고 아버지 영조에게 정서적인 학대와 강요로 인해 사도세자는 결국 아버지와 자신의 학대로 인해 정신병 증세를 보이고, 세자 책봉을 물릴 수 없어 뒤주에 가둬 죽이는 아주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손자인 정조(당시 왕세손)에 대한 애정과 그를 통해 300년 종사와 보위를 이을려는 생각만큼은 확고했다. 왕으로서 불가결한 정통성 컴플렉스 때문에 정조의 세손 책봉식 때는 영조 자신이 왕세제 책봉식 때 입은 옷을 입힐만큼 지극정성이였다.

2. 생애

3. 성격

3.1. 독살설 의혹을 가지고 있었던 왕

경종이 재위하던 기간에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 아래 남인과 소론 준론 쪽의 지지아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의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10]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는 상당한 콤플렉스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 궁합을 이용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음식이 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 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사실 이건 야사 수준이 아니라 당대에 흔히 떠돌던 소문으로 보인다. 영조 31년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괘서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11]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12] 그 외에도 나온 말들이 조선 시대 표현으로 하자면 '지극히 흉참'했는데 "그거 글은 쟤가 썼지만 짓기는 내가 지었다!", "그 중에서 제일 불측한 말이 내 말이다 어쩔래?", "니가 죽인 김일경이 사실은 충신이었던 것을 우린 다 안다!" 등 대놓고 우릴 죽여라! 라고 개겼다.[13]

당시 경종은, 병세가 워낙 심각해서 그런지 자리에 드러누웠을 때 수랏상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영조가 지휘해서 게장과 생감을 올리고[14][15] ,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16]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그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17] 사실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18]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독살설은 확실히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긴 하다. 경종 독살건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 심지어 울다 지쳐서 나가떨어져서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는 말을 못한바람에 소론 준론들의 소위 참람한 언사가 실록에 기록되었다.

영조는 이 독살 사건에 대해 억울한것이 많았는지 영조 31년(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에서 "그 생감과 간장게장 내가 형님에게 올린거 아니라고 이놈들아!"라는 글까지 쓴다.[19] 그러나 당시는 임금의 주장에 쉽게 반박, 반론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였다.

몇가지 덧붙이자면 당시에도 감과 게장이 상성이 최악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있었고, 영조가 읽었던 책들 중에서 의학 서적이 있었는데 그 의학 서적에도 감과 게장의 관계는 아주 잘 나와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세제였던 영조는 이복형 경종을 죽일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일단 몇 해전에 그나마 자신의 지지세력이였던 노론들이 대거 죽거나 쫓겨났으며, 출생에서부터 천출이라는 차별[20][21]이 당시에도 있었기에 비록 세제라고 하더라도 그의 말을 듣고 따를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또한 이인좌의 난 직전 중용된 많은 소론계 중신들은 신임사화 당시 노론을 쫓아낸 사람들이였으며, 경종 사망시기에 측근에서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였다. 만약 경종이 독살되었다면 이들이 영조에게 신하로서 충성을 했었을리가 전혀없다.

3.2. 영조의 노망?

아무래도 조선 왕조의 왕 중에 최장기 집권, 최장수 기록을 세운 왕인데다가 가뜩이나 성격이 왈가닥에 편집증적이었던지라 결국 노망이 난듯 보이는데, 이에 관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다.

조중회라는 신하가 영조가 종묘 대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들렀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간언을 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영조가 "조중회를 당장 귀양보내라!"하고 노발대발하였는데, 하필 조중회가 충신 중의 충신이라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고 영조가 "당장 귀양 보내지 않으면 대신 네놈들을 귀양보내리라!"하고 역정을 내면서, 갑자기 엉엉 울며 '내가 늙으니 저런 것들이 내 말을 안듣지…' 하며 연못 물에 빠져죽겠다 하여 발만 잠기는 웅덩이에 들어간 채 군사들을 웅덩이 주위에 둘러서게 하여 신하들의 출입을 막았다.[22] 유일하게 알현을 허락받은 세손이 안절부절못하며 영조를 말리자 영조는 조중회의 목을 베어와야만 연못에선 나오겠다고 버티었다. 세손은 조중회의 목을 가져오라고 신하들을 다그쳤으나 세손과 신하들도 평상시 옳은 말을 자주 하는 충신의 목을 명분 없이 벨 수는 없었다. 결국 타협책(?)으로 조중회를 흑산도위리안치하기로 하자 영조가 "이제야 속이 후련하구나!"라며 연못에서 걸어나와 입궐하였다. 그리고 조중회가 흑산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다시 불러들였다. 귀양 보낸 것까지 취소하고!

이 해프닝 이후로 사람들이 영조를 '노망났나?'하면서 수군댔다고 한다. 어머니(숙빈 최씨) 사당에 자주 간다고 간하는 신하도 유배, 마누라 죽은 것도 팽개치고 사위 보러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신하도 유배, 사도세자 운운한 신하는 사형. 사실 영조가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난동을 부리면서 닥치는대로 신하를 벌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을 거두는 행위는 젊은 땐 좀 덜하긴 했어도 재위 기간 내내 이랬다. 말년에 영의정만 미친듯이 갈아치우기도 했다. 게다가 세손을 이미 후계자로 삼아 후계 구도가 탄탄했고, 영조의 왕권 또한 오랜 세월 끝에 굳게 다져졌기에 상왕으로 있던 태종처럼 거리낄 것이 없어 일부러 그런 점도 있다. 사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노망이라기보단 성격 파탄.

영조 노년에 신하로 생활하는 것은 매우 고달팠을 법 한데, 장유유서의 유교 사회에서 임금이 환갑을 넘어 장수한 노인인데다가 둔하기는 커녕 머리 회전과 눈치가 빠른 정치 고수이다. 게다가 머리 회전만 빠른게 아니라 툭하면 울고 툭하면 화내고 툭하면 짜증을 내며 자기 감정마저 수싸움에서 밀고 들어온다. 나이가 많으니 자연히 경험도 많고 수읽기에도 능한 성격 파탄 정치 괴물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있으니...

오죽했으면 임오화변 때도 '저 영감 또 시작이구나. 저러다 곧 풀어주겠지??' 하고 처음엔 궁인들이 뒤주를 열고 세자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영조는 결단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였다.

4. 업적

경종을 제치고 영조를 등극시키려 했던 것은 원래 노론이다. 그러나 노론이 경종 즉위 당시 신임옥사로 죄다 떨려나가면서 영조는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복 형 경종이 4년 만에 승하하면서 당시 연잉군이 보위에 올랐지만 집권 중이던 소론을 어쩌기는 어려웠다. 이때 소론의 거두 김일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계기로 소론(준론)을 숙청한다. 때문에 벌어진 이인좌의 난(준론 + 남인)까지 진압하고 조선 조 마지막 공신 지정인 분무 공신을 지정했다.

노론을 재집권시켰지만 노론은 사실상 영조에게 아첨해 정권을 유지했어야 할 만큼 영조는 탕평책이란 이름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일례로 즉위 초 사면 복권으로 기가 오른 노론들이 정치 보복을 하려하자 정미환국을 일으켜 정권을 간단히 뺏고는 소론(완론)에게 줬다. 한편 이인좌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출사길이 금지된 영남 남인들이 억울하다며 상소를 연달아 써도 간단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1755년(영조 31년) 나주 벽서 사건을 해결한 영조가 《천의소감》이란 책을 지어 세자 책봉에서의 문제점을 변명하려 했다. 이미 소론들은 다 떨려 나가고 조정은 노론 일색이었다. 거리낄게 없어보였던 노론은 마음껏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영조에게 분노를 샀다. "이 미친 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23]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란 일갈에 싹싹빌고 다시는 안 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영조 자신과 정치의 안정을 위한 서적 간행을 다시금 정치 보복에 써먹으려던 노론에게 겁을 준 것이다.[24]

결국 영조는 노론 명문가들마저 쩌리로 만들고, 풍산 홍씨 같은 한미한 가문을 순식간에 조정 영수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했다. 곧 당파 경쟁은 유명 무실해져 태평 성대가 될 것 같았지만 영조, 정조 두 명군이 죽자마자 척신 정치(세도정치)로 귀결된다. 영조가 외척도 박대하면서 만들어낸 강한 왕권이, 불과 2대 만에 큰 권력을 거머쥔 신하 몇에 의해 좌우되게 된 것이다. 벌써 정조 즉위 초부터 홍국영세도 정치를 선보이는 등 조선 말기 정치의 난맥상은 그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영조는 가혹한 형벌을 없애 압슬형(깨진 유리 조각에 죄인를 꿇리고 꿇린 무릎 위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 고통을 느끼게 하는 형벌), 낙형[25], 자자형[26], 부관참시(죽은 죄인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시신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는 극형), 전도주뢰형[27]과 같은 고문을 없앴으며, 균역법을 실시해 조세 제도의 모순을 개혁했고 서원의 중복 설립 금지[28], 청계천 준설, 서얼 차별 완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29] 통치 기간 동안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완전히 수습되고 안정을 되찾았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죄를 엄히 물었다.

영조 때 동아시아는 평화로웠다. 청나라는 최대 판도를 자랑했고 상공업이 발달해 조공 무역도 본궤도에 올랐다. 일본 역시 에도 막부 치하의 안정기로 도쿄 인구는 현재 추산 100만을 넘는다는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아직 산업 혁명 초입에 불과한 서방 역시 아직 인도 동쪽까지는 본격적으로 손을 뻗지 못했지만 청나라와의 교역으로 문명의 이기를 동쪽에 보내고 있었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영조는 청나라와의 교류를 늘렸고, 조공 사신들을 통해 서방의 문명을 조금씩 들여오고 있었다. 영조 역시 안경을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담배 등의 상품 작물이나, 고구마나 감자 등 이국적인 구황 작물이 널리 재배됐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술 만드느라 곡물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십 년간 금주령[30][31][32][33]을 내렸다. 숙종 때 강화된 오가작통법을 엄히 지켜 백성의 유민화를 막고 조세 수입의 안정화를 꾀했다.

또한 양역변통론을 통해 균역법 시행에 앞장섰으며, 청계천 준천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참고로 이 두 가지 업적과 탕평을 영조 스스로가 만년에 자신의 치적이라 내세운 세 가지 업적이 되겠다.

무엇보다 검소했다.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이 있고, 식사는 김치같은 채식 위주의 반찬, 장류 정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소식했다. 여자들의 사치스런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하기도 했다.[34] 또한 연과 여(왕실 가마)의 금박주석으로 대체시켰다.

5. 한계

자신의 출신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나머지, 사도세자를 지나칠 정도로 질책하고 매우 닦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너는 왜 이거 밖에 안되냐는 등 아들을 몰아붙이다가 세자가 시름시름 앓는다. 그런데 영조는 완전히 신용할만한 상태도 아닌 아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대리 청정이란 미명 하에 뒷방으로 물러나 있는다. 그렇다고 참견을 멈춘 것도 아니었다. 신하들과 조금이라도 부딪히거나 무시당했다고 생각이 들면 사도세자에게 양위한다 난리를 치고, 사도세자는 잘못한 것도 없이 아비의 침전 앞에서 석고대죄를 반복해야 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미쳐버려 대낮에 사람을 죽이는 등, 차기 군주로서는 절대 보여서 안될 온갖 추태를 부리고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고 만다.

문제는 후에 왕위를 잇는 정조에게 정치적, 심리적 상처를 준 것을 넘어,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한 신하들로부터 안 받아도 될 견제를 받게 만들었다. 연산군 때 일을 떠올린 그들은 정조를 매우 힘들게 했다. 물론 영조 본인은 세손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에 자기 세자 책봉 때 입던 옷을 입히는 등 노력을 아끼진 않았다. 아무리 정치에 부자지간도 서로 죽고 죽인다지만 사도세자 건은 당시로서도 매우 불편하고 큰 흠이 될 행동이었다 볼 수 밖에 없다. 영조는 이후 정국 운영에서 세자 책봉에 관해 조금의 문제 제기도 받아들이지 않는 강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반발하는 신하들을 친국[35]하고 죽이느라 당파 몇이 날아갔다.

아버지 숙종을 본받아 환국을 써먹은 적이 있을 뿐더러, 이복 형 경종 시절의 삼수의 옥(목호룡 사건)으로 영조의 탕평은 시작부터 자기 모순이 됐다. 모든 당파에서 두루 인재를 뽑겠다는 영조의 구상은 자신을 왕위에 올린 노론 독차지의 양상으로 결국 변질돼간다. 이에 대한 폐단을 시정하려 외척 세력이나 노론을 중용하지 않고 새로 척신을 만들어 다스렸지만...... 이때 출세한 사람이 홍봉한으로 종9품 말직에서 7년 만에 훈련 대장으로 출세해 영조 46년까지 실세가 된다. 이것이 정조 즉위 후 홍국영 등의 배경이 됐으며 세도 정치의 물꼬를 터, 조선이 멸망 테크를 제대로 타게 만든다.

영조가 너무 오래 산 나머지 정비인 정성왕후가 66세의 나이까지 버텨줬음에도 새 장가를 들어야 했다. 이 때 계비로 들어온 것이 정순왕후 김씨였고, 영조는 조강지처 때와 달리 경주 김씨 처족들을 중용했다. 이 때 정순왕후의 6촌 오빠인 김귀주 등이 실세로 잠깐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다. 김귀주는 너무 기분을 낸 나머지 실세 홍봉한까지 목을 날리려다 실패해 함경도 이원으로 유배된 일도 있었다. 김귀주는 유배가 풀린 후,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과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 등과 손잡고 영조 말년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다. 척신들의 힘이 너무 커지자 김종수를 비롯한 노론 청년들이 비밀 결사를 만든다. 이들이 이른바 청명당(벽파)의 선비들이다.

영조 사후 정조의 승계를 방해하려 했던 정후겸, 홍인한은 처형되고 김관주는 순조가 수렴 청정을 당할 당시 우의정에 올라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려다 실패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가 죽는다. 홍봉한은 정조 등극과 함께 새로 떠오른 척신 홍국영 덕에 실각에도 목숨을 부지한다. 잠시 홍씨 세도 정치를 기획한 홍국영 역시 정조에게 숙청되며 척신 정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나 싶던 찰나, 정조가 어린 아들 순조를 위해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안동 김씨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도정치의 서막이 오른다. [36]

덕분에 영조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꽤 엇갈린다. 명군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평가와 비뚤어진 성격에 초점을 맞춘 평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에서는 즉위 이전의 군호인 연잉군으로 부르면서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37][38]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바로 사초를 폐기한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 연산군, 영조가 사초를 왜곡 혹은 폐기한 왕이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0일, 영조는 새벽까지 대신들과 함께 과거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영조는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을 둘러싼 독살설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연루설, 그리고 계속되는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지 않았느냐. 연잉군(세제 시절의 영조)이 정궁을 박대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데 만약 그(영조)를 책립하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39]이 일어날 것이라는 별의별 유언비어 말이다."

신하들도 어쩔 줄 몰라하는데 이때 호조 판서 이정제(李廷濟)가 나서서 "이것은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는 망측한 이야기"라면서 "사초의 책자를 불태우자"고 제안했고 영조가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조는 새벽 3시가 넘어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자 "사초의 책자를 모두 가져와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 시황의 분서와 다를 바 없는 사상 초유의 '사초 폐기' 사건이었다. 사초가 한줌의 재로 사라지자 극심한 부작용이 생겼다. 임금과 신하가 나눴던 '심야 대화'가 무수한 억측을 낳은 것이다. 신하들은 "내전(중전)까지 언급된 대화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고 설왕설래하며 두려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기 때문에 여러 설만 떠돌 뿐이었다. 훗날 사관들은 당시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참고해서 추후에 사초를 기록했다.

재위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1760년대 후반이면 청나라는 건륭제 대인데 혹여 칭제한 것이 들켰더라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이은 호란 시즌3가 될 수도 있었다.
在魯又曰: "頃日觀象監燕貿冊子及測候器、千里鏡與圖內入之後, 冊子半帙還下, 半帙不下, 鏡與圖、器, 各有用處而未下矣" 上曰: "所謂窺日影, 雖云有功於察見日食, 而直見日光本非美事。 蔡京視日不瞬, 知其爲小人, 今名之曰窺日, 則不逞之徒窺上之象也, 已命碎之, 冊與圖亦已洗草矣。" 諸臣皆贊歎。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 관상감(觀象監)에서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온 책자(冊子) 및 측후기(測候器)·천리경(千里鏡)·지도(地圖) 등을 안으로 들여간 후, 책자는 반질(半帙)만 다시 내려 보내고 반질은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천리경 및 지도, 측후기는 각기 쓸 곳이 있는데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규일영(窺日影)이란 것이 비록 일식(日食)을 살펴보는 데는 공효가 있으나 곧바로 일광(日光)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채경(蔡京)은 해를 보고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겠는데 이제 이름하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氣象)이 되는 것이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고, 책과 지도도 역시 세초(洗草)해 버렸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贊歎)하였다.
영조 실록 61권, 영조 21년(1745년) 5월 12일
또한 왕권에 대한 도전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지 재위 후반에 중국에서 들여온 망원경 등 각종 천체 관측 장비들을 파기하고 자료를 없앤 일도 있다. 이에 대한 설명 단, 파기한 것은 천체 관측용 망원경이고 승정원일기를 보면 지상 관측용 망원경은 군사용으로 사용을 계속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이에 대한 설명

6.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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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 시절 영조 조선 영조의 어진
연잉군 시절 영조의 어진은 현재 남아있는 어진 중 유일한 원본이다.[40] 숙종 40년인 1714년, 영조가 21살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가 그린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 1491호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은 51세 때의 모습으로 대한제국 광무 4년인 1900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이 모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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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어진 박물관에서 복원한 영조 전신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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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 어진영조의 초상
열성 어진에 실린 영조[41]의 초상은 동일인을 모사한 건지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어디 중국 불교 선문답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저 용모를 보라.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 시대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 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형 수술을 하면 견적도 안 나올 정도로 다르게 생겼다. 그래도 매부리코와 치켜올라간 눈매, 약간의 사각턱 등 다른 영조 초상화나 연잉군 초상화와 이 그림을 "글로 묘사한다면" 비슷하게 나올 것 같기는 하다.

7. 가계

  • 정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년 - 1757년)
  •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 제1후궁: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년 - 1721년 11월 16일)
    • 제1왕녀: 화억옹주(和憶翁主, 1717년 4월 22일 - 1718년 4월 8일)
    • 제1왕자: 진종 소황제 행(眞宗 緈,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년 2월 15일 - 1728년 11월 16일)
    • 제2왕녀: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년 3월 8일 - 1758년 1월 17일)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
  • 제2후궁: 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7월 18일 - 1764년 7월 26일)
    • 제3왕녀: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
    • 제4왕녀: 옹주(翁主, 1728년 8월 3일 - 1731년 2월 18일) - 조졸
    • 제5왕녀: 옹주(翁主, 1729년 12월 12일 - 1731년 3월 21일) - 조졸
    • 제6왕녀: 옹주(翁主, 1732년 1월 1일 - 1736년 4월 12일) - 조졸
    • 제7왕녀: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년 3월 7일 - 1752년 11월 27일)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
    • 제2왕자: 장조 의황제 선(莊祖 愃,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 1월 21일 - 1762년 윤5월 21일)
    • 제9왕녀: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1월 19일 - 1808년 5월 17일)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
  • 제3후궁: 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년 10월 16일 - 1780년 10월 5일)
    • 제8왕녀: 옹주(翁主, 1735년 9월 19일 - 1736년 9월 3일) - 조졸
    • 제10왕녀: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년 9월 29일 - 1777년 5월 21일)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
  • 제4후궁: 숙의 문씨(廢 淑儀 文氏, 생년 미상 - 1776년 8월 10일)
    • 제11왕녀: 화령옹주(和寧翁主, 1753년 3월 3일 - 1821년 9월 3일) -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에게 하가
    • 제12왕녀: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년 5월 19일 - 1772년 12월 18일)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

8. 트리비아

한국사에 유일무이한 공식 왕세제다. 이전까지 한국사에 형제승계 사례 자체는 많았지만, 그 형제들은 보통 선대왕이 후사 없이 사망한 이후 정치적 결정에 의해 즉위하거나 선대왕이 임종하면서 직접 유언으로 왕위를 물려주거나 했지[42] 태제/세제를 공식적으로 임명한 사례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은 고대부터 부자세습이 원칙이라 아무리 왕에게 후사가 없더라도 혹여나 후사가 생산되는 것을 기다려야지 세제를 임명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나 더이상 아들 못낳소" 하고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 그만큼 전례없는 세제책봉을 해야 했던 경종(조선)의 처지가 안습했다는 소리다. 영조 이전 사례로 최충헌 묘지명에서 신종(고려)명종(고려)의 황태제였다고 기록하긴 했는데, 정사를 보면 신종은 사저에 있다가 얼떨결에 추대된거라 황태제 운운은 그냥 최충헌 정권에서 즉위를 위해 어거지로 붙여준 직함으로 볼 수 있다. 이방원이 세제로 책봉되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방원은 공식적으로 세자로 책봉되었다. 아마도 정종의 지위를 부인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상왕인 이성계의 개입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영친왕 이은 역시 순종의 황태제가 아닌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때는 고종의 의지가 크게 반영되었다.

영조 본인이 금주령을 내렸지만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자신도 몰래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다. 본인은 오미자차라 변명했다고 한다. 말년에 다리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서 송다(松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름은 차이지만 실상은 솔잎과 누룩을 넣어 만든 술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조 48년에 영의정 홍봉한을 탄핵하는 김관주의 상소에서, 몇 해 전 영조가 송다를 내오라 시켰을 때 홍봉한이 금주령 기간이라고 거부해 왕의 체면과 건강에 해를 끼쳤다는 내용이 있다. 진짜 차가 맞다면 홍봉한이 금주령을 들먹여 막을 리가...

여담이지만, 김귀주의 당색은 노론 벽파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친오빠가 된다. 홍봉한 탄핵에 실패한 그는 함경도로 유배를 간다. 정순왕후 김씨의 6촌 오빠 김관주는 먼 훗날 순조 때 정순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면서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순원왕후를 등에 업은 안동 김씨들과 싸우다 져 다시 함경도 유배를 가서 죽는다.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여는 인물이다.

여담으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많이 닮았는데 서로 피가 다른 이복 형제 자매가 있었으며 서로 형제 자매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성격을 닮아 다혈질이고 평소에 검약을 실천하였고 둘다 학업에 열중하면서 학식이 수준이 높았고 명군이며 장수하면서 재위가 길었다는 점과 백성들에게 자비로운 군주였단는 점이 비슷하다.

참고로 전 세계 근대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서서히 일기 시작했던 시점이 영조의 말년 무렵이라는 시각이 있다. 대표적으로 이 사건도 영조가 죽기 1년 전에 일어났다.

9. 창작물에서

대부노년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편.

9.1.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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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이산의 이순재, 우측이 대왕의 길의 박근형.* 사극에서는 어째 본인이 주역이 되기보다는 사도세자의 비극이나 정조에 관련해서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장희빈이 주인공인 사극에서 아역으로 등장하곤 한다.
많은 배우들이 영조를 맡았지만 그 중 《대왕의 길》의 박근형이 연기한 영조가 최고의 영조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박근형은 외모 자체가 영조의 남아있는 초상화와 흡사할 정도였는데, 영조의 세제 시절을 연기하기도 했고, 드라마 전반적으로 살아있는 《한중록》의 말씨로, 사료에 등장한 발언들을 쏟아내는데 그야말로 폭풍간지. 심지어 사도세자가 공부 안한다고 까는 장면에서도 영조의 괴팍스러움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특히나 영조의 편집적증 심리묘사를 섬세히 연기하여 극찬을 받았다.
이산》이순재의 연기도 인상적인데 특히 "나야 임금이니까 되는대로 떠든다지만 경들은 그렇게 밉보였다가 장차 어쩔려고 그러는게야?"라고 정곡을 찌르는 장면은 그야말로 폭풍 간지. 《동이》에서 아역 배우 이형석이 어린 영조로 출연했는데 영특한 모습과 어린 아이 특유의 귀여움으로 화제가 되었다. 마지막 회에서는 청년 영조 역으로 《탐나는도다》의 얀으로 알려진 이선호가 잠깐 출연했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전국환이 출현했다.
  • 사극 홍국영에서는 최불암이 영조로 분했다.[43] 유명한 강목 사건도 등장.#
  • 유준상박문수로 등장했던 MBC의 《어사 박문수》에서는 조민기가 영조를 연기했는데, 다른 매체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운동을 좋아했던 사실을 반영했는지 격구를 하는 장면도 있을 정도.
  • SBS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한석규가 영조 배역을 맡았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보여주었던 연기력과 아들 사도세자를 맡은 이제훈과의 파파로티 조합 때문에 많은 팬들이 기대를 하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강한 신권에 시달리는 불쌍한 왕으로 등장하여 역덕들은 이미 통곡할 지경. 배우의 연기력만은 역시 한석규란 말이 나오긴 했다.
  • 이준익 감독의 2015년작 영화 《사도》에서는 송강호가 영조 역을 맡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송강호 배우 인생상 첫번째 상류층 캐릭터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중하류층 인물들.
  • 대박에서는 여진구가 맡았다. 그리고 무려 주연이다.[44] 하지만 드라마의 내용은 영조의 치세가 아닌 메인 주연인 대길이 이인좌에게 맞써 싸우는 스토리라 이인좌의 난을 진압할 때까지만 진행된다.
  • 영화 상의원에서 영조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실상 영조를 모델로한 왕으로 유연석이 열연하였다.

사실 치세가 너무 길어서, 영조를 주인공으로는 사극을 만들기도 쉽지는 않을 듯하다. 만약 만든다면 《야인시대》와 《연개소문》의 선례를 따라 젊은 시절과 늙은 모습을 각각 다른 배우가 맡는 게 좋을 듯.

9.2. 만화, 소설

  • 야뇌 백동수》에서 등장하는데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로 하지만 차마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임수웅을 시켜서 미리 탈출시켜놓고 노론에게서 구출하는 계획을 세운다.
  • 정조 시대가 주된 배경인 이윤창 작가의 웹툰 《타임인조선》에서도 과거 회상에서 짧게 등장한다. 아들 사도세자를 향해 그 죄상을 열거하며 죽으라고 호령하는 장면으로. 그것도 손주가 보고 있는 앞에서.
  • 승은궁녀스캔들에서는 아직 연잉군이던 시절로 나온다. 여주인공 순심에게 관심이 많으며, 왕세제가 된 후에 형인 윤(경종)에게 복잡한 마음을 품고 있다. 윤이 죽은( 걸로 위장하고 궁을 나온) 후에 보위에 오른다.
  • 밤을 걷는 선비에서는 잘못된 자식 교육으로 억압 받아온 아들을 이해하기는 커녕 그런 아들이 점점 엇나가기 시작하자 자신의 권력과 왕실의 안위를 위해 귀를 이용해 사도세자를 죽이려하나 오래전부터 동질감을 느껴 동성애를 가져온 귀가 사도세자를 죽이지 못하고 사도세자를 흡혈귀로 만들어버리고 이에 분노한 영조는 귀와 사도세자를 같이 불태우게 되고 귀는 가까스로 살아남고 사도세자는 불에 타죽게된다. 더구나 이에대한 후회는커녕 그 잘못을 귀에게 돌리고 귀와 사생 결단을 내려는 모습을 보인다.

10. 관련 문서



[1] 고종 때 묘호를 변경하면서 황제로 추존하지는 않고 그냥 존호를 더 추가했다.[2] 이 호는 영조가 재위 전에 살던 사가(잠저)인 창의궁(昌懿宮)의 한 누각 이름으로 부왕 숙종이 지어주었다. 영조는 이를 그대로 자기 호로 썼다.[3] 조선 왕조 최장기 집권이다.[4] 평균 재위 기간의 2배 하고도 14년, 조선 왕조 519년 역사 중 영조 혼자서 무려 1/10을 차지한다. 아버지 숙종도 조선 역사상 두번째로 재위가 길었기때문에(46년) 부자 합치면 조선 왕조 오백년 중 약 100년, 거의 1/5를 차지한다.[5] 숙종(46년), 고종(44년), 선조(41년), 중종(38년)이 뒤를 잇는다.[6] 단순 기록상으로는 가야 수로왕과 고구려 태조왕이 더 오래 살았고 더 오래 집권했으나 믿을 수 없는 기록인지라 후세에 조작된 것으로 본다.[7] 식사를 매우 규칙적으로 한 것도 장수 비결로 뽑힌다. 하루 3번 식사를 채식위주로 꼭꼭 씹어먹으면서 검소하게 먹었는데(이 마저도 원래 5번이던 것을 영조가 줄인 것) 대신들과 회의 중에도 식사 때가 되면 수라부터 받았다고 한다. 다른 왕들은 아침을 거르거나 야식을 즐기는 등등 식사가 불규칙했지만, 영조는 소식을 하되 끼니는 거르지 않고 무조건 제때 꼬박꼬박 챙겼다.[8] 그러나 몸보신 할때는 전복이나 꿩고기, 조기 등을 먹는 등 단백질 보충을 확실하게 해주어서 균형잡힌 식단을 짰다.[9] 영조와 비슷한 인물이 서양에도 하나 있는데 바로 로마 제국의 프린켑스 아우구스투스이다. 아우구스투스도 어릴적부터 몸이 약했고, 특히 위장이 안좋아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려 식도락을 즐긴 당시 문화와 달리 끼니마다 간단하게 챙겨먹는 소식을 했다. 그 소식 덕에 허약체질에, 격무에 시달렸음에도 아그리파, 드루수스같은 유력 후계자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며 꿋꿋하게 살아남아 76세까지 장수했다.[10] 숙빈 최씨는 과부였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해당 사항이 없는게,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의 차남이었다. 장남은 일찍 사망.[11] 경종이 죽은 해인 1724년. 즉 네가 선왕에게 게장 먹여 독살한거 다 안다! 라는 조롱이다.[12] 영조 31년 신치운의 심문 과정에서 나온 말. 헌데 이 말은 영조 1년 이천해의 공초에서 영조가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기록되지 못했던 말과 같다고 한다. 그 때는 즉위 초의 대사건이라 사관도 어지간히 겁이 났는지 '그 말이 아주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초책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설설 기었다.[13] 이상하게도 조선 초 사육신의 친국 정도를 빼면, 아니 실록에서는 사육신조차도 역모 혐의로 체포된 혐의자들은 자기 죄를 시인하며 고분고분하게 굴어 고통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친국에서도 개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영조 31년 나주 괘서 사건 이전에도 "김일경의 상소를 보고서야 충성이고 뭐고 충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누구 마음대로 우릴 역적이라고 하냐?"고 왕에게 바락바락 달려드는 사건도 있었고 김일경도 매를 맞으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무죄를 조목조목 따지며 항변했다. 정조 시기에는 아예 스스로를 (臣)이라 칭하지 않고 라고 칭하면서 정조를 왕 대우 안하고 개기는 죄인들도 있을 정도였다.[14] 실록에 경종은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게장과 감을 올리자 모처럼 잘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먹은 후에 복통과 설사가 계속되었다고. 게장과 감은 오늘날에도 음식 궁합 이야기할 때 최악의 궁합 중 하나로 자주 이야기되는 메뉴다. 좋게 생각하면 식욕이 없는 경종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올리다 보니 음식 궁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안 그래도 병약한 경종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감과 게장을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15] 게장은 기본적으로 직접적 가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식중독이나 기생충 감염을 굉장히 주의해야 하는 음식이다. 게를 제대로 세척하지 않거나 게장에 쓰일 간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만드는 중간 중간 간장을 따라내 가열해서 염도를 최대한 올려 주는 작업을 여러번 반복해야 한다)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이 현대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을 정도. 거기에다 고단백(그것도 가열되지 않아 소화에 더 큰 에너지가 드는), 고나트륨 음식이기까지 하니 게장은 소화력이 현격히 저하된 와병 중인 환자에게 먹일 만한 음식은 아니다.[16] 부자는 잘만 쓰면 좋은 약이지만 흔히 사약의 원료로 추정되는, 강한 독성을 지닌 식물이다. 지금도 해마다 제대로 처방없이 부자를 달여먹다가 죽는 사람이 나온다. 물론 임금에게 올려야하니 당연히 어의들도 정성스레 추출하고 정제를 했겠다만 그 특유의 독 이미지때문에 독살설 지지자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본 것은 자명한 일. 또한 사약넣을때 인삼을 넣었다는데 부자는 열을 받아야 최고로 활성화되기때문이라고 한다.[17] 눈빛이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이를 본 영조 왈, "내가 약은 잘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 정도는 안다."[18] 그런데 재미있게도 영조는 조선 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즉 그 긴 통치 기간 내내 시달린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황을 소론 측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인좌의 난.[19] 천의소감은 영조가 경종의 왕세제(王世弟)로 즉위 할때부터 나주 괘서 사건까지 정치적 사건의 전말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책의 집필 목적이 영조의 정통성을 밝혀서 왕권의 안정화를 위한 작업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자면 경종 독살설을 변론하기 위한 책이라고 보면 된다.[20] 그나마 숙종의 살아있는 아들이 당시 경종과 영조가 유일했다. 이것만 아니였다면 적서에 대한 차별이 강했던 조선사회에서 무수리의 아들을 왕으로 올리자는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21] 조선시대에는 후궁들도 양반가문에서 선발하였고, 궁인 중에서 되더라도 상궁-나인들은 상민 이상 계층에서 선발된다. 궁인의 잡역을 위해 고용된 무수리가 후궁이 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일이였다.[22] 참고로 이때가 한겨울이었다. 까딱하면 동상도 걸리는 날씨이니 신하들이 애가 탔을 것이다. 게다가 발만 잠긴다고 해도 노인이라면 자칫 사소한 고뿔(감기)로 인한 폐렴이나 동상 후유증으로 사망할 여지가 있다.[23] 둘 모두 소론의 초기 영수들이다.[24] 애초에 영조가 천의소감이란 책을 편찬한 것도 경종조의 역모에 연루된 자신을 신원하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한 것인데, 노론이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천의소감을 자파의 의리를 세우는 데 써먹으려하니 격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25]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형벌[26] 죄인의 얼굴이나 팔에 흠을 내어 먹물로 죄를 쓰는 형벌[27] 주리를 트는 형벌[28] 다만 근본적인 제한은 아니어서 흥선 대원군 때에 와서야 전면적인 철폐를 한다.[29] 재미있게도 이런 영조의 많은 성과들은 주로 젊은 시절에 집중되었고, 노년기에 이르러선 이렇다 할 만한 성과가 많지 않은 특징을 보인다.[30] 재위 기간(1724년 ~ 1776년)을 포괄하였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31] 대표적으로 병마절도사 윤구연인데 이 사람은 역사책에서 말하는것처럼 술을 마시다가 걸린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소지하고 있는 술단지에서 알콜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즉결처분을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 경우는 굉장히 억울한 것이 금주령을 막 반포했을시 1타자로 본보기로 보이려고 일부러 이랬다는 점이다. 심지어 당파를 막론하고 신하들이 그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사형을 만류하며 변호하자 되려 그 사람들을 파직시켰을 정도. 결국 나중에 금주령이 느슨해진 이후에 은근슬쩍 윤구연은 복위된다. 물론 이미 사형당한 사람이 복위되었다고 되살아나는 건 아니고 직위만 원래대로 돌아온 것. 사실 이 사건만 보면 아무리 전제군주제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독재에 가까운 면모가 보인다. 애초에 영조 성격이 원래 이런 것도 있지만...[32] 정조는 즉위 즉시 금주령을 해제하고, 금주령을 발포하라는 일부 신하들의 요구도 쿨하게 씹었다.[33] 대신에 술을 완전히 금지하지 않고 약술은 마실 수는 있었다.[34] 다만 가체를 금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사치를 금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공식 행사 땐 가체를 착용하는 것이 맞다.[35] 임금이 친히 죄인을 심문하는 일. 사실 여기에 고문도 포함된다.[36] 다만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조는 세조처럼 다른 왕들 비해 정통성이 취약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심지어 재위한지 30년이나 되는데도 역모가 생겼으니 더욱 권력에 집착이 커지만도 한다.[37] 사육신세조수양대군이라는 군호로 낮추어서 불렀던 것이라든가, 폐위되어서 묘호를 받지 못한 광해군이나 연산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폭군이나 암군을 즉위 이전의 군호로 부르면서 깎아내리는 것은 적어도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제법 유구한 전통이다. 그래서 현대에도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 보편적으로 평가가 나쁜 폭군 내지 암군이었거나, 그 정도는 아니지만 작정하고 까려면 충분히 깔 여지가 많은 인물들을 묘호가 아닌 군호로 부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시대 순서대로 하자면 수양대군, 하성군, 능양군, 연잉군.[38] 군호도 아닌 를 대놓고 부르는 이성계이방원 같은 사례도 있긴 한데, 이 경우는 주로 '고려의 신하'와 '조선의 왕'이라는 그들의 두 가지 상반된 정체성 중 '고려의 신하' 쪽을 강조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실제로 태조와 정종, 태종은 태어날 때는 왕족이 아니라 고려의 신하였으며 조선의 임금이 아닌 고려의 신하로서도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들인만큼) 한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본명이 많이 쓰일 수 밖에 없다.[39] 1689년의 기사환국장희빈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폐위된 일[40] 다른 것은 모두 이모본 또는 복원본이다.[41] 영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다. 후대에 영조로 바뀐 것. 정조 역시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후대에 정조로 바뀌었다.[42] 문종(고려)이 이런 케이스다. 정종(고려 10대)이 죽기 하루 전에 선양(線陽)해 즉위했다.[43] 1979년에 같은 MBC에서 방영한 《안국동 아씨》 에 이어 약 22년만에 다시 영조역을 맡았다![44] 다만 메인 주인공은 본인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버려진 왕자인 대길(장근석).[45] 군 복무 후 첫 복귀작이며, SBS 드라마 출연은 49일 후 8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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