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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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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李仲燮 | Lee Jung-sub
파일:이중섭_2023630_235951.jpg
출생 1916년 9월 16일[1]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現 평안남도 숙천군 송덕리)[2]
사망 1956년 9월 6일 23시 45분 (향년 39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교남동 서대문적십자병원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남동 서울적십자병원)
본관 장수 이씨[3]
학력 오산학교 (졸업)
제국미술학교[4] (서양화과 / 중퇴)
분카가쿠인 (미술과 / 졸업)
직업 화가
가족 아버지 이희주(1886년 ~ 1920년)
어머니 안악 이씨[5](불명 ~ 1950년)
형 이중석(1904년 ~ 1946년)
누나 이중숙(1914년 ~ 불명)
배우자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李南德)[6](1921년 ~ 2022년)
장남 (요절)(1946년 ~ 1946년)
차남 이태현(1947년 ~ 2016년)
3남 이태성(1949년~)
데뷔 1941년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수상 1937년 자유미술협회전 태양8상
훈장 1978년 은관 문화훈장
종교 개신교
대향(大鄕)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유학 시절2.3. 전쟁 말기2.4. 공산 치하2.5. 한국 전쟁2.6. 가족과의 이별2.7. 애절한 그리움2.8. 외로운 죽음
3. 사후
3.1. 1960년대3.2. 1970년대3.3. 1980년대3.4. 1990년대3.5. 2000년대3.6. 2010년대3.7. 2020년대
4. 가족5.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예술가.

20세기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특히 를 많이 그려 한국적인 미를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릴 적부터 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을 그릴 때는 하루 종일 소만 바라봤다고 한다.[7] 대표적 작품으로는 흰 소가 있다.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사후에야 그 진가를 인정받아 작품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비교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다만 고흐가 개척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빈궁하게 살아온 것과 달리 이중섭은 일제강점기에 돈이 많이 드는 일본 유학[8]을 갈 수 있을 정도로 풍족했던 집안 출신이다. 단지 북한이 건국된 이후에도 조선미술건설본부 등에 활동하며 북에서 공산당 동맹에 임하다 6.25 전쟁 이후 피난을 오면서 모든 재산을 잃었으며 험한 시기를 헤쳐나가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다가 영양실조와 간암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통에 가난하다는 이미지가 뿌리 깊게 박혀 있을 뿐이다.

그의 재능을 안타까워한 지인들에 의해 사후에 회고전이 열리고 점차 인지도가 높아졌다. 1970년대 집중 발굴되어 1990년대 이후에는 박수근과 함께 대한민국의 확고한 '국민화가'로서 인식되고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現 숙천군 송덕리)에서 아버지 이희주(李熙周)와 어머니 안악 이씨(安岳 李氏)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이중섭의 부친은 부농이자 지주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또한 출생지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는 외가의 집성촌이면서 외가 역시 상당한 부잣집이였다. 외조부 이진태(李鎭泰)는 서북 농공은행장, 초대 평양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할 정도였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상당히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1920년 부친 이희주가 세상을 떠났지만, 친가와 외가 모두 엄청난 부자여서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었다.

1923년, 평양 외가로 이주한 뒤 평양 공립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다.[9]

1925년, 동기 김병기의 아버지 김찬영의 작업실을 출입하며 각종 화구와 '더 스튜디오(The Studio)' 같은 유명 미술서적을 접하고 큰 자극을 받았다.

1930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1931년, 오산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한 임파(任波) 임용련(任用璉, 1901 ~ ?)에게 미술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유학파로, 그의 "조선인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라는 멋지고 훌륭한 연설에 이중섭은 깊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적인 미를 추구하고 서명을 할 때 항상 풀어쓰기로 서명을 한 것이 임용련의 영향이라는 평이 많다. 실제로 이중섭의 작품들을 잘 보면 한켠에 'ㅈㅜㅇㅅㅓㅂ'이라고 풀어 쓴 서명이 있는 경우가 많다.

1932년,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중등부에 입선한다. 이 해 형 이중석이 사업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원산으로 이주한다. 이중석은 원산 최초의 백화점 겸 문방구인 '백두상점'을 열어 부를 일구었다. 이중섭이 시인 구상과 절친하게 된 것도, 구상 또한 어렸을 적에 가톨릭 신부이던 형을 따라 원산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

1933년, <제4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중등부에 입선한다.

1935년, <제6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중등부에 입선한다. 다만 논란거리가 하나 생겨난 해이기도 한데, 졸업앨범에 넣을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본에서 불덩이가 한반도로 날아드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이는 교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단순히 화가의 세계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뿐이라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하도 논란이 되어서 결국 졸업앨범에 반영하기로 했던 것은 전격 취소되었다.

2.2. 유학 시절

파일:이중섭.jpg
이중섭 젊은 시절

1936년 2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4월 도쿄 교외 무사시노에 있던 제국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 데이코쿠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1937년 4월, 제국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문화학원(文化学院, 분카가쿠인)에 입학한다. 이 곳은 경직된 일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자유롭고 독창적이며 감성적인 인간을 키워낸다는 이념 아래 설립되어 일본 최초의 남녀 평등교육을 실시한 학교로도 유명하다.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입선한다.

1939년, 같은 미술부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 ~ 2022)를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당시 이중섭은 굉장히 미남에다가 운동, 노래도 잘 하고 그림 실력도 탁월해 교내의 인기스타였다고 한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연애 중에 서로를 '아고리', '아스파라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아고리'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들이 턱(あご, 아고)이 길었던 이(李, 리)중섭을 부르던 별명이었다. 요즘말로 말하면 '턱돌이' 비슷한 셈. 당시 같은 반에 이(李) 씨가 3명이나 있어[10] 서로 구분할 겸 저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아스파라거스'는 둘이 하얀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을 자주 같이 먹고는 했는데, 길쭉한 아스파라거스와 마사코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해서 이중섭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또 이중섭은 마사코를 '발가락군(ゆび君)'이라는 애칭으로도 많이 불렀는데, 전에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쳐서 이중섭이 치료해 준 것이 계기이다. 우연히도 둘 다 발가락과 관련되어 있다.

처가도 그녀의 아버지가 미쓰이창고 주식회사[11] 고위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역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마사코의 집안에서 이중섭과의 교제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야마모토 마사코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부모님은 결혼을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저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화가로 먹고살 수 있겠나' 걱정은 하셨지만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딸바보였어요. 저를 믿어주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어요.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프리미엄조선》 〈이중섭과 이남덕에 대한 왜곡된 사실들

1940년,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입선, <기원 2600년 기념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에 출품한다. 이 해 성탄절부터 마사코에게 그림엽서를 발송하기 시작한다.

1941년 3월, 문화학원을 졸업했다. 이쾌대와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창설한 뒤 도쿄(3월)와 경성(5월)에서 창립전을 열고 '연못이 있는 풍경'을 출품한다. 4월엔 <제5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입선하고 협회 회우 자격을 얻었다.

2.3. 전쟁 말기

1942년,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한다.

1943년,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한다. 한신태양사에서 '제4회 태양상(조선예술상 개칭)'을 수여한다. 이 해 전람회 준비를 위해 조선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에 돌아오지 못하고[12] 원산에 계속 체류했다.

1944년 12월, 이중섭이 가족의 결혼 승낙을 받고 마사코를 조선에 불러온다. 당시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미군이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 일본 연안 해상교통을 옥죄던 시기였으나, 마사코는 겨우 배를 얻어타고 부산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올 수 있었다. 이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총후 화가[13]로 일한 흑역사가 있다. 물론 원해서 그런건 아니고 이중섭이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형 이중석[14]이 일부러 총후 화가로 만든 것이었다.

1945년 5월 20일, 원산에서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파일:이중섭마사코.jpg
둘의 결혼식 사진[15]

2.4. 공산 치하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광복되었으나 38선이 그어지고 원산은 북한의 공산 정권 치하에 놓인다. 형 이중석이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고, 이중섭은 강제적으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해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중섭의 고충이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사상적으로 표면적 압박을 받은 적은 별로 없지만[16] 공산당 회의에 다녀올 때마다 "맥없다(맥 빠진다)"라고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는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8월에는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에 가입해 연합군 환영을 위한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국가 원수 대형 초상화와 국기를 그리는 일에 참여했다. 9월엔 김영주와 원산미술협회를 결성했다. 11월에 미도파백화점의 지하실 벽화를 공동제작하기도 했다.

1946년 1월엔 이쾌대가 신미술가협회를 확대시킨 독립미술협회에 가입했다. 3월엔 북조선예술동맹 산하 원산미술동맹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해 봄에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그 비통함을 승화시켜 8월 광복절 기념 평양에서 열린 <제1회 해방기념종합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날으는 어린이'를 출품한다.

1947년, <제1차 전국미술전람회>(평양)에 출품했다.

1947년, 둘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1949년, 셋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원산 근처의 송도원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며 연필 소묘 등을 많이 했다.

2.5. 한국 전쟁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소개령에 따라 과수원으로 이주되었다.[17] 그 와중에도 11월 원산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초대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10~12월 연합군이 북진해 압록강에 이르렀다가 다시 중공군이 남하하며 원산이 전화에 휩싸이자 이중섭의 가족은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둔 채 알거지로 12월 흥남 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온다. 이 때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원산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쉽게 구할 길이 없다.[18]

그렇게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 의지할 만큼 형편 좋은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이중섭으로서는 생계가 막막했다. 본래 이중섭은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금수저 출신이라 남에게 신세를 지고 산 적이 없다 보니, 자연히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신세를 진다는 행위를 아주 싫어하고 어쩌다 신세를 져도 어떻게든 갚아야만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에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19] 이런 지경이니 취침 때도 각종 옷들을 다 껴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추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1951년 1월 15일, 정부의 수용피란민 소개정책으로, 그나마 조카 이영진이 있어 연고가 있다는 제주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제주도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 머물지도 정하지 못하다가, 어떤 노인이 "서귀포가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몇 날을 걸어갔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반장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본인들의 집 곁방(4.6㎡, 1.4평) 한 칸을 내어주어 네 식구가 살았다.(현 서귀포시 정방동/서귀동 512-1번지) 여기서도 그의 가족은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어 피난민에게 주는 약간의 배급을 받고, 종교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삶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시기 꽃게와 물고기와 좁은 방에서 얼킨 가족들이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된다.) 그래도 몹시 춥고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부산과 달리 제주도는 그나마 덜 춥고 평화로워[20]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웠으며,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배기에서 산 경험이 창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10월엔 대한오페라단 창작오페라 '콩지팟지'의 무대장치-소품제작에 참여하는 소일거리를 얻기도 한다.

이 당시 이중섭이 기거하던 정방동의 송태주·김순복 부부의 집과 방은 '이중섭거주지'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으며[21], 그 뒤에는 2002년 이중섭미술관이 개관했다.

1951년 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파다한 데다, 역시 제주도에서도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서 12월에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여전히 돈벌이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가난과 추위로 상당히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2.6. 가족과의 이별

1952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인상을 당하여 6월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가족끼리의 사랑은 여전히 깊어서 이별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내 마사코와 차남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이기도 했고[22], 장인이 작고하면서 남긴 유산이 있으니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도 여겨 이를 선택했다고 한다.

전쟁 중이던 당시 한국에는 한국인 배우자를 따라 남아 있다가, 배우자가 전사/행방불명되면서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던 일본인들이 꽤 많이 있었다. 반대로 일본에는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뒤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해야 할 한국인들이 제법 있었다. 이들을 맞귀국시키기 위해 일본 측에서는 송환선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사코는 우선 부산 초량동의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7월 경에 제3차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원래는 이중섭까지 온 가족이 함께 도일하려 하였으나, 당시에는 해방 후 한일간 국교 단절이 이어져 정상적인 인적 교류가 매우 어려웠기에[23] 이중섭은 동행할 수가 없었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이 때부터 가족의 재회를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중섭은 그림을 열심히 그려 이를 팔아 일본으로 건너갈 밑천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 해 7월엔 친구 구상의 저서 '민주고발'의 표지를 정기적으로 제작했다. 12월엔 <제1회 기조전>에 출품했다.

1953년 5월, <제3회 신사실파전>에 출품했다.[24]

하지만 이렇게 재회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부부는 치명적인 사기에 휘말리게 된다.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로 마영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5], 이 마영일이 일본에 있던 마사코를 찾아와서는 일본서적 무역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한다. 여전히 낙후된 한국에서는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의 문물과 지식에 대한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일본서적을 한국에 들여와 팔면 제법 돈이 되었다. 마영일은 마사코가 일본에서 책을 사서 본인에게 부쳐주면, 본인이 그걸 한국에서 팔아 구입 원금은 마사코에게 부쳐주고 이익금의 일부는 한국에 있던 이중섭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에 솔깃한 마사코는 마영일의 말대로 도쿄 대학가에서 서점을 하던 친구에게 약속어음을 써주고 5만엔 어치의 책을 보냈다. 이때는 마영일이 약속대로 원금은 마사코에서 보내주고, 이익금 일부를 이중섭에게 나눠줬다. 안심한 마사코는 그 다음에는 무려 27만엔 어치의 책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영일이 원금도, 이익금도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다. 마영일로부터 8만엔 정도를 돌려받은 것으로 보이나 결국 20만엔 가량 거액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돈을 벌기는 커녕 빚을 갚기 위해 마사코도 20년 이상을 삯바느질을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953년 7월, 이중섭은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해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되는데, 이 때 마사코의 어머니(장모)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서까지 구해 주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에게 부탁한 게 아니고, 친분이 있던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 농림대신에게 부탁해서 보증해 주었다고…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했던 이중섭을,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이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며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사람 역시 장모다. 이들 네 식구는 1주일 동안 히로시마의 여관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이것이 이들 가족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되고 말았다.

2.7. 애절한 그리움

주요 작품
파일:이중섭 황소.jpg
파일:이중섭 흰소.jpg
황소, 1953년 흰 소, 1954년

그렇게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다시 재회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며 홀로 부두의 막노동을 하면서도 그림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 1953년 11월, 공예가 유강렬의 초청으로 통영의 나전칠기기술원에서 교사로 근무한다.
  • 1954년 5월, 유강렬, 장윤성과 <3인전>(통영 호심다방)을, 강신석, 김환기, 남관, 박고석, 양달석과 <6인전>(마산 비원다방)을, 박생광과 <이중섭 개인전>(진주 카나리아다방)을 차례로 개최한다.
  • 1954년 6월, <제6회 대한미술협회전>(경복궁미술관)에 출품했다.
  • 1954년 7월, <현대미술작가전>(천일백화점)에 출품했다.
  • 1954년 9월, 책 <저격능선>, <황금충> 등의 표지화를 제작했다.
  • 1955년 1월, <이중섭 작품전>(미도파백화점)을 개최했다.
  • 1955년 4월, <이중섭 작품전>(대구 미국공보원)을 개최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 마지막 전시회였다.

그가 간간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엽서엔 가족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예컨대 신혼 초에 잃은 첫아들이 관 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발가벗은 채[26]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그저 '벌거벗었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에 춘화로 취급되어 정부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어린이에 대해서 너무한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성이 폐쇄적인 시대에 작가 루이스 캐럴 같은 양반이 때때로 페도필리아로 비난받는 걸 생각하면 당시의 기준으로는 그다지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다. 또 어디까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 그린 그림에는 복숭아 등 동양화에서 장수나 복을 상징하는 사물도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 또한 죽은 아들이 천국에서 따다 먹으라고 천도복숭아를 그렸다는 뒷얘기가 있다.

부두 막노동조차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뱃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은지화) 또한 유명하다. 당시 6.25 전쟁으로 그림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쓸모 없어진 엽서나 담뱃갑의 은박지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 이런 은박지에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뒤에 잉크를 칠하고 닦아내면 파인 곳에만 잉크가 스며드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27] 이후 은박지 작품 3점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2.8. 외로운 죽음

1955년 7월, 험한 생활고로 건강을 크게 해친데다 개인전이 기대에 못 미치는 수입을 내자 상심한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거식증, 자학 증세[28] 등이 생겨 친구 구상[29]이 대구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10월엔 성베드로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30] 상태가 다소 호전되어 12월에 퇴원했다. 박고석이 살고 있던 정릉으로 와 한묵, 조영암과 생활하게 되었다.

1956년 1월, 퇴원 후에도 삽화와 표지화를 다수 제작했다.

이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청량리정신병원[31]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병원 원장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닌 심한 간염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하여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32]

그러다 여름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 정신병, 거식증 등이 겹쳐 안타깝게도 9월 6일 향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사흘 후 문병 온 이중섭의 선배이자 소설가 김이석이 사망 소식을 처음 알고 친구와 유족에게 연락을 돌렸다. 이중섭의 시신을 수습하기 전에 병원에서 입원비로 18만원을 청구했는데, 김광균이 5만원, 기타 인물들의 조의금으로 4만원을 내고 나머지는 병원이 삭감해주었다.[33] 시신은 9월 11일 홍제동 장재장에서 화장되어 봉원사 납골당에 잠시 머물다가 11월 18일 입관했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34]

3. 사후

3.1. 1960년대

1960년, <이중섭 유작전>(부산 로타리다방)이 개최됐다.

1962년, <한국현대미술가유작전>(중앙공보관)에 출품되었다.

1967년, <이중섭 화백 10주기 추도식>(예총화랑)이 개최됐다.

3.2. 1970년대

1972년, <15주기 기념 전시회>(서울 현대화랑)가 열렸다.

1973년, 고은이 쓴 최초의 평전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가 발간되었다. 이 작품이 이중섭의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기는 하였으나, 미망인 마사코는 그 내용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마사코가 남편 이중섭을 버리고 혼자 살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고, 나중에 가족을 만나기 위해 잠시 일본을 방문한 이중섭을 그의 장모가 냉대했다고 묘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아래 가족사 부분에서 보듯이 마사코는 생활력이 떨어지는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다가 병도 얻었고, 친정 아버지의 부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하게 된 것이다. 장모 또한 사위를 계속 아끼고 지지해줬다고 한다.

1974년, 박근형 주연의 영화 《이중섭》이 만들어져 대종상 우수작품상[35],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요절한 천재화가라는 이미지로 대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78년, <미발표 이중섭 작품전>(부산국제화랑)이 열리고,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고, 그의 그림이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3.3. 1980년대

1986년, <30주기 특별기획 이중섭전>(호암갤러리)가 열리고, 이중섭기념사업회, 이중섭미술상 제정이 추진되었다.

3.4. 1990년대

1991년,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언급되었다. 맨 마지막 인물이다.

1996년, 서귀포시가 이중섭기념관을 개관하고 이중섭거리를 지정했다.

1997년, 서귀포시가 이중섭이 거주했던 송태주·김순복 부부의 초가집을 매입해 복원했다. 가나아트 주최로 <이중섭 특별전>(서귀포 신라호텔)이 열렸다.

3.5. 2000년대

파일:이중섭유족.jpg
왼쪽이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 오른쪽이 삼남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

2002년 11월, 서귀포시가 이중섭전시관을 개관했다. 그러나 재정이 열악한 지자체 형편상 유화 진품은 1점도 소장하지 못한 채 개관했다. 2003년 3월,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회장이 기증한 8점을 필두로 점차 이중섭의 작품이 뒤늦게나마 들어왔고, 2종 미술관이 되어 이름이 '이중섭미술관'으로 변경되었다. 2004년엔 1종 미술관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 3월 16일, 이중섭의 삼남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가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 가짜로 밝혀져서 파장이 일어났다. 이씨가 한국고서 연구회 고문 김용수와 함께 공모해 사기를 친 것. # 이를 기점으로 이중섭 작품에 대한 위작 논란이 생겨났다. 한국미술품평가원에 따르면 이중섭이 위작이 가장 많은 작가라고 한다. 187건의 감정 중 무려 108건이 위작이고 진작은 77건, 감정 불능 2건이었다. 의뢰된 작품의 58%가 가짜였던 셈이다. #

이태성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가짜라고 주장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한국미술품감정협회 관계자들을 고소하기도 했으나, 과학 감정에서 들통나고 말았다. 물감에 들어간 티타늄과 규소 성분을 찾아낸 X선 형광 분석기 확인, 현미경 관찰, 적외선 촬영 등을 활용한 과학감정 결과 '이중섭의 그림에는 펄 물감이 사용된 적이 없는데 위작은 펄 물감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하며 사용된 종이도 그 시절이 아닌 최근에 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 위작은 모두 압수되어 폐기되었고, 일본 국적의 이태성씨는 현재 '기소유예' 상태로 사실상 한국 입국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림편지 같은 작품 때문에 이중섭의 작품세계와 불가분한 인물이기도 하고, 202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기증하는 등 주요 인물 대접은 받는 듯하다.

2006년, 이중섭의 그림 '황소'가 35억~45억원 가격대로 경매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2018년 47억원에 낙찰되었다. # 이후 2021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기증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게 되었다.

2007년, 나희덕 시인(現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 서귀포에 있는 이중섭의 자택과 미술관을 들러 구경한 뒤에 그에 대한 시를 썼다. 이중섭이 살아 생전 알고 지내던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가족의 가난하고도 행복했던 시절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한편 그의 작품에 대한 묘사도 절묘하게 섞여 들어가 있다. 참고로 나희덕 시인은 원래 화가 지망생이어서 그림과 화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본 작품은 2022학년도 EBS 수능특강 문학 연계교재에 실린다.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36]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37]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 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 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게 가질 수 있었다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38]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39]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 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40]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41]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처럼
— 나희덕, <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

3.6. 2010년대

파일:external/www.google.co.kr/Lee_Jung_seob-2012-hp.jpg

2012년 4월 10일, 구글이 구글 두들로 이중섭 탄생 96주년을 기념하여 '흰소'를 로고화했다.

2012년 11월 1일, 미망인 마사코가 생전 마지막으로 92세의 나이에 서귀포를 방문했다. 이때 이중섭이 1943년 일본에서 미술창작가협회(자유미술가협회(自由美術協会)의 전신) 태양상 부상으로 받아 마사코에게 청혼의 징표로 선물한 팔레트를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측에 기증했다. #

2014년 5월, 부산광역시가 이중섭 가족이 피난으로 머물던 범일동 풍경거리를 이중섭거리로 조성하기로 한다. #

2014년 9월, 미술평론가 최열이 5년 작업을 거쳐 돌베개 출판사에서 이중섭 평전을 펴냈다.

2014년 12월, '이중섭의 아내'(원제: ふたつの祖国、ひとつの愛 ~イ・ジュンソプの妻)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어 2016년에 개봉했다.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배우 이정재가 오디오 가이드로 참여했다. 자타공인으로 이정재가 젊은시절 이중섭의 외모와 매우 흡사하기에, 배우 본인도 제의받은 당시 운명과 같이 느꼈다고 회고했다. # 이 해에 차남 이태현이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7. 2020년대

2020년 12월 4일, 일본의 신문기자 오오누키 도모코(大貫智子)씨가 이중섭-이남덕 부부의 사랑을 그린 논픽션 《帰らざる河 ― 海峡の画家イ・ジュンソプとその愛 (돌아오지 않는 강, 해협의 화가 이중섭과 그의 사랑)》이 제27회 쇼가쿠칸 논픽션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듬해인 2021년에는 《愛を描いたひと イ・ジュンソプと山本方子の百年 (사랑을 그린 사람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의 100년)》이란 이름의 단행본으로 쇼가쿠칸에서 출간되었다.

2021년 4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진품 12점(유화 6점, 수채화 1점, 은지화 2점, 엽서화 3점)이 이중섭미술관에 기증되었다. #

2022년 7월, 제주도-서귀포시는 350억원을 투입해 기존 미술관을 헐고 약 10배 규모(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5700㎡)로 새 미술관을 건축하여 2025년 6월에 재개관할 예정을 밝혔다. #

2022년 8월 12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미술품 1488점 중에서 선정한 이중섭의 작품 90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이 기존에 소장하고 있었던 작품 10점을 더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총 100점의 작품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배우 고두심이 오디오 가이드를 맡았다.

2022년 8월 13일, 부인 이남덕은 남편을 잃은 이후에도 평생을 수절하다 일본 도쿄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101세. 장례식은 8월 18일 도쿄 세타가야구 기독교회 예배당에서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 상주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인 막내아들 이태성이다.[42] 하지만 이태성은 앞서 언급된 2006년 위작 사기 사건으로 사실상 국내 입국이 불가능하기에 한국에서 부친의 일 관련으로는 더 이상 참석하기 힘들 듯 하다.

4. 가족

  • 증조부: 이동규 (1826년~1898년)
    • 조부: 이창희 (1856년~1898년)
      • 아버지: 이희주 (1886년~1920년)
        • 형: 이중석 (1904년~1946년)
          형수: 김의녀
          • 조카: 이영진 (1935년~2016년)
            조카며느리: 강순남 (1946년~)
            • 조카손녀: 이지연 (1970년~)
              조카손녀사위: 공병인 (1962년~)
            • 조카손녀: 이지숙 (1972년~)
              조카손녀사위: 이경광 (1962년~)
            • 조카손녀: 이지향 (1974년생~)
              조카손녀사위: 심재현 (1970년~)
        • 누나: 이중숙 (1914년~?)
        • 본인: 이중섭 (1916년~1956년)
          배우자: 야마모토 마사코 (1921년~2022년)
          • - 첫째 아들(1946년)은 이름도 짓지 못하고 디프테리아로 사망
          • 차남: 이태현 (1947년~2016년) - 후두암으로 사망
          • 삼남: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 (1949년~)

5. 기타

  • 이중섭이 그린 초상화는 자기 자신을 그린 자화상을 포함해서 5점이 남아 있다. 자화상 자화상을 제외한 초상화 중 1점은 서귀포 시절 집 주인 부부 중 남편인 송태주 씨의 초상화이고, 나머지 3점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인근 서귀포 사람들의 그림이다.

    본래 이중섭은 초상화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해도 그려주지 않았을 정도이고,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도 한 자리에 모인 가족 그림은 그렸어도 가족 개개인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다.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이 초상화들도 당시 전사자들의 가족들과 집 주인인 송태주가 부탁해서 그린 것. 전사자들의 초상화는 겨우 남아 있는 증명사진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웃 주민들은 사례로 이중섭 가족에게 보리쌀과 고구마 등을 나눠줬다고 하며, 이 초상화들은 전사자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송태주의 초상화는 어려운 처지에 이런 밥벌이를 소개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집 마루에 앉혀 놓고 그려준 것이라고 한다. #

    마지막으로 이중섭 본인의 자화상은 1955년에 그렸는데, 당시 이중섭은 몸과 정신 모두 병으로 망가진 상태였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 치료를 시키려 하자, 이중섭은 '나는 미치지 않았다. 내가 미쳤다면 그림을 멀쩡하게 그릴 수 있겠느냐?'라는 의도로 자화상을 그렸다. 하지만 지인들의 권고로 정신병원에 가 치료를 받았고, 이듬해 사망하게 된다.
  • 노래 실력이 좋아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 삽화 작업으로 근근이 돈을 마련하곤 했으나 자신은 삽화를 싫어했다고 한다.


[1] 당초 출생이 4월 10일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로 추측하고 있다. 고은이 이중섭 평전을 집필하기 위해 일대기를 조사하다가 이중섭 친구의 생일을 이중섭의 태어난 날로 착각하여 기재한 것이다. 이중섭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해도 늦여름으로 기억하고 있고, 실제로 이중섭이 다니던 학교의 기록부를 펼쳐보니 9월 16일로 기재되어 있었다. 나중에 집필된 최열 미술평론가가 쓴 이중섭 평전에도 이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2] #[3] 시조 33세손, 양후공파 29세손 중(仲)○ 항렬.(족보)[4]무사시노미술대학[5] 이진태(李鎭泰)의 딸이다.[6] 1945년 5월, 결혼 기념으로 남편 이중섭이 선물한 한국식 이름이다. 남쪽 지방, 즉 일본에서 온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족보에는 이씨라고 적혀 있다.[7] 그래서 한 번은 소를 멋지게 그리려고 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고, 소는 나중에 더 자라면 다시 그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아내 마사코(이남덕) 여사의 증언으로는 소를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몰려서 부리나케 도망가야 했던 경험도 있었다고 한다.[8] 지금도 유학을 가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그 시절에 일본 유학을 다 갔다는 데서 이중섭이 금수저였음을 알 수가 있다.[9] 동기생들로 채병덕(1916 ~ 1950, 육군총참모장 역임), 이용문(1916 ~ 1953, 남부지구경비사령관 역임), 오영진(1916 ~ 1974, 극작가) 등이 있다.[10] 일본에서는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서로 성씨로 부른다.[11] 일본 3대 재벌 가운데서도 1위였던 미쓰이 그룹의 물류 회사이며, 지금도 존재한다.[12] 당시 태평양전쟁이 확전될 시기라 징병제를 시행했던 탓도 있다.[13] 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를 뜻한다.[14] 당시 상당한 권력자였으며 6.25 전쟁 당시 부르주아로 몰려 비참한 꼴을 당했다.[15] 보다시피, 사모관대[43]에 족두리를 쓰고 전통 혼례를 올렸는데, 서양식 결혼식이 흔해지기 시작했던 당시로도 이미 드문 일이었다.[16] 정치적으로 가장 큰 사건이래 봐야 친구 구상이 참여한 시집 "응향"에 그림을 그렸다가 시집이 사상적으로 비판받자(구상은 이 일로 일찍 월남한다) 심문받은 일뿐이었다. 이 사건으로 문초를 겪기는 했으나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게 심하지도 않았던 듯하다.[17] 원산, 평양, 남포 등은 당시 UN군의 표적 1순위였다. 한 미군 장교는 "원산에서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산에서 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라고 회고했을 정도.[18] 이러다보니 박수근과 함께 가장 위작이 많은 한국 화가이기도 하다.[19] 일본 유학 시절부터 이중섭의 절친이었던 화가 황염수의 아내 남경숙은 이렇게 이남덕이 고생하는 광경을 보고 이중섭이 정말 무능하고 나쁜 남편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20] 사실 제주라고 해서 그리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분명히 전쟁의 참화에서는 한 발짝 벗어나 있었지만, 4.3 사건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8년 시작된 4.3사건은 1년 가까이 맹위를 떨치다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1950년 6.25 전쟁의 개전과 함께 대대적인 예비 검속이 발동되었고, "산폭도"로 유배되어 있거나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였다.[21] 세월이 지나면서 집이 옛 모습을 잃었다가, 1997년에 1950년대의 원형대로 복원했다. 집 안주인 김순복은 마사코와 동갑으로, 최근까지도 이 집을 지키고 살았다.[22] 원래는 아내에게 장인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당시 아내는 심한 영양실조폐결핵에 걸려 각혈까지 하는 중증 환자로, 건강이 상당히 나빠진 상태여서 이 소식을 들으면 충격을 받아서 더 건강이 나빠질 것도 우려했고, 또한 설령 알았다고 해도 곧바로 일본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어찌어찌해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렇게 아들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다.[23]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상당한 배경과 재력이 있어야 했다. 평시도 아니고 전시이던 1952년에 병역을 피해 국교 단절 상태인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그 시절에 있긴 있었는데, 바로 이맹희이창희. 반대로 말하면 굴지의 기업인 이병철 정도의 재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는 뜻이다.[24] 일본 유학파 화가들인 김환기·유영국·이규상·장욱진이 결성. 신사실파(新寫實派)는 1948년 12월에 창립전, 1949년에 2회 전시회를 연 이후, 1953년 부산에서 이 3번째이자 마지막 전시회를 열고 해체되었다.[25] 고은의 평전에서는 마영일이 부산 광복동에서 서점을 경영했다고 하고 있고, 최석태의 《이중섭 평전》에서는 통운회사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26]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27] 담뱃갑 은박지가 가난한 이중섭의 상징처럼 남아 있지만, 사실 그렇게 은박지로 싼 담배 자체도 당시에는 돈이 없으면 구매도 힘들었던 물건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처절한 작품 활동이 말년의 생활고를 가중시킨 원인이 되었다.[28] 구상의 증언에 따르면 이중섭은 "나는 그림을 그린답시고 세상을 속였다. 꽁밥을 얻어먹고 다니며 무엇이 될 것처럼 사기를 쳤다."라면서 자학했으며, 아내에게 온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구상은 이중섭의 정신병 증세가 '별것 아니었다'라고 기록했다.[29] 해당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야구선수 구자욱의 종증조부(증조할아버지의 형제)이다. 정확히는 구상의 친형의 증손자가 구자욱이다.[30] 이 과정에서 혼자 병실 3개에 흰 페인트칠을 하기도 했다.[31] 당시의 병원명은 청량리뇌병원[32] 당초에는 한묵과 박고석 등의 결정으로 정신과에 입원했는데, 나중에 구상이 찾아와 내과 증세가 심각한 것을 보고 여러 인맥을 동원해 전원시켰다. 정작 서울적십자병원에서는 또 발작을 일으켜 내과의가 "정신병자를 내과에 입원시키라는 의사가 세상에 어딨냐?"라고 반발했다고 한다. 최열은 1956년 8월 고모 집에서 요양하는 이중섭을 보았다는 김광림의 증언을 바탕으로 병원의 반발 때문에 잠시 한 번 퇴원한 적 있었으리라고 추측했다.[33] 이중섭의 이종사촌형 이광석이 적십자 서울지사 사무국장 이범석과 친구였다.[34] 후배 조각가 차근호가 1주기 때 돈을 각출해 세운 조각상이 있으며 유골의 절반은 아내 이남덕 여사가 도쿄의 야마모토 가족묘로 모셔갔다. 따라서 망우리에는 유골의 절반만 있다. 그 외에도 박고석이 이중섭이 마지막으로 머문 정릉의 청수동 계곡에 조금 뿌렸다고 한다.[35] 최우수작품상은 김지미 주연의 《토지》가 차지했다.[36] 우리가 오늘날 이중섭 자택이라 아는 것은 사실 그 마을 촌장 댁이고, 그중 맨 오른쪽에 있는 창고방 하나만이 이중섭 가족이 얹혀 산, 진정한 그의 자택이다.[37] 윗 문단에 나오다시피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마사코와 서로를 부르던 애칭이다.[38] <서귀포의 환상>이라는 작품의 묘사이다. 참고로 현재까지 알려진 이중섭의 작품 중 가장 큰 것이다.[39]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이중섭이 서귀포 자택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이 시의 제목도 여기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40] 이중섭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를 가리킨다. 사실 이 작품은 이중섭이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그리움으로 죽어가며 그렸던 작품이다.[41] 둘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시간은 겨우 4개월에 불과했다.[42] 큰형은 생후 몇개월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작은형은 2016년에 모친보다도 6년 먼저 숨졌다. 세계에서 평균수명이 가장 긴 국가답게 일본에서는 이렇게 노인 아들이 90대~100세 노모보다 먼저 죽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수명이 조금 더 길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