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7 15:00:17

김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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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병연
金炳淵
파일:김병연 표준영정.jpg
김병연의 표준영정.
출생 1807년 4월 22일[1]
조선 경기도 양주목
(現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사망 1863년 3월 29일 (향년 55세)
조선 전라도 동복현
(現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본관 신 안동 김씨[2]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성심(性深)
이명(怡溟)·지상(芝祥)·난고(蘭皐)
일명 김난(金鑾, 金蘭)
가명 김삿갓, 김립(金笠)
종교 유교 (성리학)
부모 부친 - 김안근(金安根, 1783 ~ 1813)
모친 - 함평 이씨 이유수(李儒秀)의 장녀
형제자매 형 - 김병하(金炳河, 1804 ~ 1828)
남동생 - 김병호(金炳浩, 1808 ~ 1819)[병],
김병두(金炳浢, 1809 ~ 1810)[병]
부인 장수 황씨(長水 黃氏)
자녀 슬하 3남
장남 - 김학균(金學均, 1824 ~ ?)[5]
차남 - 김익균(金翼均, 1831 ~ ?)
3남 - 김영규(金英圭, 1842 ~ ?)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방랑의 계기2.3. 왜 하필 '삿갓'을 썼을까?2.4.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리고 디스 시문2.5. 사망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가장 유명한 양반 출신 재야 시인. 순조 7년에 태어나 철종 14년까지 산 인물이다.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고 호는 지상이다. 김삿갓은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삿갓을 쓰고 다니며 방랑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사실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핵심가문인 신 안동 김씨, 노론 장동 김씨 일가였다. 단, 김조'순'과 김익'순'(덤으로 벽파였던 김달'순')은 항렬이 같지만 18촌 형제라 실상은 서로 남남인 관계이다. 후술하겠지만 장동 김씨 가문 내에서도 김익순의 분파는 무신 집안이었다. 김병연은 장동 김씨 중 휴암공파로, 파조인 휴암공 김상준은 장동 김씨의 핵심인 문정공파의 시조인 김상헌(조선)과 사촌 지간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김삿갓이란 이름은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 "김립(金笠)", 바로 말해 김삿갓이라 대답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떠돌아 홀로 다니는 독고다이.

김병연이 '김삿갓'이 된 직접적 원인은 그의 할아버지인 무신 김익순(1764 ~ 1812)에게 있다. 그가 고작 5~6살이던 1811년 신미년부터 다음해 임신년 봄까지 일어난 홍경래의 난 때, 당시 선천도호부의 수령이던 종3품 선천도호부사(宣川都護府使)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붙잡힌다. 그는 홍경래에게 구걸하며 항복해 가족들은 모두 목숨은 부지했으며, 김삿갓의 삶은 이런 파란만장한 배경에서 전개된다.

실록을 살펴보면 그 과정이 복잡하다.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곽산(郭山)에서 출전했던 장령(將領)이 보고하기를,'15일 이른 아침 곽산에서 출발하여 신시(申時)에 선천부(宣川府)에 이르렀더니, 모여 있던 적도들은 관군이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서 이미 모두 무너져 흩어졌고 고을 아래 사는 백성들은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았기에 대군(大軍)이 우선 잠시 본부(本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의 첩보(諜報)를 받아 보았더니, '본부(本府)의 영병장(領兵將) 허항(許沆)과 김견신(金見臣) 등이 서림성(西林城)에서 철산(鐵山)으로 진병(進兵)하였더니, 1대(隊)의 적도들이 소문을 듣고 흩어졌으며, 운암성(雲暗城)에 모여 있던 적들은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허물어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진에 머물고 있는 장령(將領)들의 보고를 받아 보았더니,'선천(宣川)의 전 부사(府使) 김익순(金益淳)이 적괴(賊魁)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진의 앞에 왔으므로, 순무 중군(巡撫中軍)이 잡아들여 공초(供招)를 받은 뒤 칼을 씌워 영문(營門)으로 압송하였습니다(후략)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1월 17일(신묘) 4번째 기사

이 기사를 본다면 김익순이 항복한 죄가 있으나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한 만큼 동정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원래 조정에서도 사형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홍경래의 참모 김창시의 목을 잘라서 온 것은 오히려 포상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이미 이괄의 난 때 이괄의 부하였던 기익헌, 이수백이 이괄의 목을 베어 와서 유배 좀 갔다가 용서를 받았고 심지어 기익헌은 그 후로도 하위 군관을 돌면서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산 전례가 있었다.[6]
(전략)“적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본받지 않은 채 흉적의 선봉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항서(降書)를 보냈고, 군관(軍官)의 가짜 첩문을 태연히 받았으며, 인과(印顆)와 부신(符信)을 명령대로 싸보냈습니다. 그리고 날뛰는 마음을 품고 만나기를 청하여 공손히 문안 인사를 나누고, 대청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말미를 받고 돈과 쌀을 받았으니, 나라를 배신하고 적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죽음을 면할 계책을 내어 적의 수급(首級)을 사서 수기(手記)를 꾸며 주었으니, 흉악하고 패려한 뱃속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모반 대역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9일(신사) 1번째 기사

문제는 김익순이 살기 위해 항복한 것이나 홍경래가 내린 벼슬을 받은 건 강요에 의한 것이니 그렇다 쳐도..
평안 병사가 대역 부도 죄인(大逆不道罪人) 조문형(趙文亨)을 효수하였다고 아뢰었다. 조문형이 애초 적도가 김창시(金昌始)의 수급(首級)을 베어오자 죄인 김익순(金益淳)이 천금(千金)을 주겠다는 수기(手記)로 그 수급을 억지로 팔게 하고는 와서 바쳤는데, 도의 조사에서 그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7]
《순조실록》 15권,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3월 19일(신묘) 1번째 기사

선처를 구했으면 넘어갈 수도 있었던 걸 수급을 돈 주고 산 뒤 자기가 자른 것으로 속여서 허위보고를 올리는 엄청난 짓을 했다는 것이니, 그야말로 기군망상(欺君罔上, 임금을 속임)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임금을 작정하고 속이면 곱게 죽여주는 것(사약)이 은사가 될 지경이니, 본인이 처벌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손까지 연좌됨이 당연하였다. 공노비 제도가 폐지된 이후라 가문 전체가 노비로 전락하는 건 면할 수 있었겠지만 16세 이상 남성들은 사형될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가문이 당시 온 나라를 쥐고 흔들던 신 안동 김씨인데다가 강요로 반란에 가담한 점. 그리고 김창시의 수급으로 사기를 친 게 적극적으로 뭔가 얻으려는 게 아니라 처벌을 면하려는 목적이었다는 점 때문에 동정의 소지가 남아 있다고 보아 본인만 참수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양반 신분을 박탈하고 지방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멸문지화를 면할 수 있었다. 김병연의 아버지 김안근은 수치심으로 30세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2. 방랑의 계기

야사에 따르면 그가 성장하여 16세가 되었을 때, 과거를 본 적이 있다고 하며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 8권에도 소개되었다.

해당 과거는 중앙에서 임금이 주재하는 대과가 아니라 거주하는 지역의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시"로 대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봐야 할 시험이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그 날의 시제가 김익순을 논박하라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김익순의 잘못을 이리저리 적어 제출하였다. 그 때 썼다는 시에 따르면 "선대왕이 보고 계시니 넌 구천에도 못 가며,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라. 네 치욕은 우리 동국 역사에 길이 웃음거리로 남으리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여간 글솜씨는 있어서 족보에 '문명(文名, 글을 잘하여 드러난 명성.)이 있었다.'라고 쓰여 있다. 이제 급제해서 즐겁게 돌아와서 자랑하다가 어머니에게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데… 하필이면 문제에 나온 그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화병으로 죽게 할 정도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전국구 역적인데다 자신은 그 비밀도 모르고 얼씨구나하고 자기 할아버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답안지를 적어냈다.

멘붕한 김병연은 무려 4년간 폐인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다가 20살 되던 해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그 폐인처럼 있던 시기에 혼인했는데, 아내 장수 황씨 황철주(黃哲周)의 딸(1806년생, 무덤의 위치는 모름)이 절세미녀라 소문이 자자했던지라, 이것도 조용히 방구석에서 지내려던 김삿갓에게는 여간 스트레스가 미치지 않았나 싶다.

다만 다른 설에는 김삿갓은 이미 자신의 조부가 반역으로 처형된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조선에서 과거시험을 보려면 증조부부터 자신까지의 친가 3대+외조부까지 조상 4대의 이름을 답안지에 모두 적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과연 김삿갓이 조부가 누군지 몰랐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8] 저 김익순이라는 사람을 그냥 자기 조부와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당시 김병연의 모친인 함평 이씨는 어린 자식들이 역적 김익순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잘사는 좋은 집안이었다지만, 김익순의 행적은 당시 가문에서도 대치욕이었기에 "조부의 성명과 같은 다른 사람일 뿐이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근데, 저 김삿갓이 보았다는 그 과거가 정말로 "과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냥 작문을 좋아하는 사또가 연 글짓기 대회였다는 전승도 있고, 친구들끼리 시짓기 도박을 해서 돈을 딴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후자의 경우 돈푼이나 따려고 조상을 욕했던 게 된 것이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만 강효석(姜斅錫)이 정리한 야사집인 "대동기문"에 실린 정확한 내용은 "사실 김삿갓이 썼다고 알려진 시는 노진이란 자가 지은 김삿갓 조부 디스시"로,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영월 과거장에서 김삿갓이 직접 쓴 시로 와전되었다는 것이 현재로선 정설이다. 김삿갓이 급제를 했다는 것은 전설로만 내려올 뿐 명확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당시 평안도에 시 짓는데 이름을 날리던 노진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김삿갓과는 거의 라이벌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나 실력은 노진이 약간 그에 못미쳤다고 한다. 그는 평소 김삿갓이 역적의 손자인 주제에 근신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며 술이나 퍼마시고 내키는 대로 시를 짓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떠돌아다니던 김삿갓이 오랜만에 평안도에 들어오자 김삿갓에게 망신을 줘서 쫓아낼 생각으로 조부의 허물을 끄집어내 시를 한 수 지었으니, 그 제목이 '김익순의 죄가 하늘까지 미쳤음을 꾸짖고 가산[9] 군수 정시[10]유일하게 항거한 수령이다. 김익순을 비롯한 둘은 항복하고 나머지 다섯은 도망쳤는데 이 덕인지 정시는 당시 항거한 대가로 목이 잘렸지만 반란 진압 후 병조판서에 추증된다. 이 사람이 말한대로 김익순의 안티테제라 할 만하다.]의 충절어린 죽음을 논하다(嘆金益淳罪通于天 論鄭嘉山忠節死/탄김익순죄통우천 논정가산충절사)'였다.

김삿갓은 술을 퍼마시고 대취한 상태에서 그 시를 또박또박 낭독한 뒤 '그 놈 시 한 번 잘 지었구나!'라고 말하고는 피를 토하면서 평안도를 떠났고, 그 후 일생동안 관서 땅은 단 한 치도 밟지 않았다고 한다.

또다른 설로는 어떻게 출세를 해보려고 같은 문중인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리거나, 자신의 신분을 시골 양반으로 속이고 양반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만 자신의 신분이 들켜 양반들이 왕따를 시킨데다가 사촌이 과거를 봐서 합격했지만 김익순의 자손이란 이유로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김삿갓이 "난 출세는 못하겠구나"라 생각하고 스스로 유랑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근데 상식적으로 보면 당시의 태세를 풍자하고 비판하던 김삿갓이 반역자 취급을 받은 할아버지가 있어서/혹은 그런 조부를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일평생 방랑만 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그가 늘그막까지라도 안동 김씨 세도가를 기웃거렸다면 철종 시절 안동 김씨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군수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점을 종합해볼때 (물론 죄다 설이라 확실한건 알 수 없지만) 자의든 타의든 결국 김병연은 당시의 조선왕조와 안동 김씨.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의 행각에 회의를 품고 방랑생활을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홍경래의 난도 사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원인 중 하나였다.

애초에 김익순은 매관매직으로 선천 부사직을 얻은 뒤 비슷한 식으로 자리를 얻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뇌물을 회수하려고 폭정을 일삼았으며, 홍경래 난 당시에는 반군에게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였고, 또한 처벌을 면하겠답시고 왕을 상대로 대놓고 사기를 치는 엄청난 짓을 했다. 즉 김삿갓은 처음에는 단순히 할아버지가 항복한 뒤 처벌을 면하려고 왕에게 사기치고 사형당한 정도로 알았으나, 나중에 행적을 제대로 파보니 정말 부끄러워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라 자손으로써 나름 속죄의 의미로 아예 밖에 나서지 않기로 한 것이다.

2.3. 왜 하필 '삿갓'을 썼을까?

첫 번째 설론 22세까지는 그냥 이곳저곳 다니는 방랑생활을 했다가, 어느 날부터 자신은 더 이상 하늘을 볼 낯짝이 없다는 이유로 몸 전체가 그늘지는 거대한 삿갓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 이후 김병연은 김삿갓으로 불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본명보단 김삿갓(김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당시 삿갓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적인 패션 아이템(?)이었다는 것이다. 낚시하던 노인네가 주로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김삿갓의 삿갓은 민중과 함께하려는 그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출처: 이응수의 '풍자시인 김삿갓'.)

다음은 위와 관련해서 김삿갓 본인이 쓴, 참고할 만한 시 한 편이다. (편역본 출처: 양동식의 '길 위의 시'.)
나와 삿갓

浮浮我笠等虛舟
내 삿갓은
정처 없는 빈 배

一着平生四十秋
한 번 쓰고 보니
평생 함께 떠도네

牧竪輕裝隨野犢
목동이 걸치고
송아지 몰며

漁翁本色伴沙鷗
어부는 그저
갈매기와 노닐지만

醉來脫掛看花樹
취하면 걸어두고
꽃 구경

興到携登翫月樓
흥이 나면 벗어 들고
달 구경

俗子衣冠皆外飾
속인들의 의관은
겉치레, 체면치레

滿天風雨獨無愁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내사 아무 걱정 없네

2.4.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리고 디스 시문

김삿갓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야말로 백두산을 제외한 조선팔도 이곳 저곳을 누볐으며, 때로는 한곳에 머물며 훈장 노릇을 하여 후학을 기르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높은 문장으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악덕과 부정부패, 조선 사회에 존재하던 폐해 따위를 비판하여 듣는 이의 동조를 이끌어내었으며,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노래로 풀어내어 부르는 것으로 명망이 있었다고 한다. 김삿갓의 시는 위트와 뼈대가 있는 언어유희가 넘쳐난다. 당시 한문은 세로쓰기로 쓰였음을 감안하고 읽자.
  • 마음 쓰는 폭이 좁은 친구의 파자를 풀어서 파자로 반박을 한 일화.

    김삿갓이 친구[11]네 집에 놀러 갔는데

    안주인이 "人良卜一(인량복일)하오리까?"하고 묻자 (다른 버전으로는 人良且八(인량차팔)이 있다.)

    그 친구가 "月月山山(월월산산)하거든."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丁口竹夭(정구죽요)로구나 이 亞心土白(아심토백)아."[12]

    하고 가 버렸다.

    이를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人良 卜一 = 食(밥 식) + 上(윗 상) = 밥을 올리다 아니면 食(밥 식) + 具 (갖출 구) = 밥을 내놓다
    月月 山山 = 朋(벗 붕) + 出(날 출) = 친구가 나가다
    丁口 竹夭(혹은 天) = 可(옳을 가)[13] + 笑(웃을 소) = 가소롭다. 즉, 우습다.
    亞心 土白 = 惡(나쁠 악) + 者(놈 자) = 나쁜 놈
    犬者 (이미 개새끼란 의미지만..) 禾重 = 猪(돼지 저) + 種(씨 종) = 돼지 새끼
    따라서, 아래와 같은 내용이 된다.
    김삿갓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안주인이 "식사 올리오리까?"하고 묻자

    그 친구가 "저 친구가 가거든."하고 답했다.

    그러자 김삿갓이 화를 내며

    "웃기고 자빠졌네나쁜 자식(혹은 돼지 새끼)아."

    하고 가 버렸다.

    위 시의 경우 人良卜一이 아니라 上人良이라고 쓰여 있는 판본도 있다. 사실상 여러 판본을 통틀어 이본이 없는 것은 月月山山이 유일하다. 어떤 판본에서는 '정구죽천'을 김삿갓이 아니라 머슴이 외치기도 한다. 김삿갓이 밥을 얻어먹는 것에 대한 성공 여부도 판본마다 다르다. 한편 이 이야기의 주인공 자체가 김삿갓이 아니라 임진왜란 후의 네임드 문관 둘이라는 판본도 있다. 어찌되었던 내용은 위에 설명한 것과 비슷하다.

  • 사멱난관(혹은 사멱난운)
    許多韻字何呼覓 많고 많은 운자들 중에 하필 멱자 부르는가

    彼覓有難況此覓 첫 멱자도 어려웠거늘 이번 멱자 어이할까

    一夜宿寢懸於覓 하룻밤 묵을 수 있을지가 멱자에 달렸는데

    山村訓長但知覓 산동네의 서당 훈장은 멱자 밖에 모르는가

    마음 씀씀이가 고약한 시골 훈장이 한 끼를 청하러 찾아온 김삿갓을 내쫓기 위해, 실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글자인 '찾을 멱()'[14]자 4개로 운을 떼어 시를 짓게 했을때 그가 지은 시이다. 김삿갓 이전에는 이 사멱난운을 통과한 사람이 전무했다고 한다. 잘 보면 멱이라는 글자의 뜻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한 거라 멱이 아닌 다른 글자여도 되니 약간 치사한 수이긴 하나 기발하긴 기발하다고 할 수 있다. 절묘하게 시골 훈장에게 한 방 먹이기도 했고. 훈장은 그의 시에 감탄해서 제대로 식사대접을 하며 하룻밤 지내게 해주고 약간의 여비도 들려주었다고 한다.

  • 다음은 금강산에 가서 저녁에 한 사찰에 들렀을 때 절에 있던 선비와 승려가 자기들끼리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김삿갓을 우습게 대하다가, 김삿갓의 말솜씨에 눌려 그 선비가 김삿갓을 내쫓기 위해 싯구로 우위 가리기를 청했다가 역으로 망신을 당한 일화다.
    절에 있던 선비: 자, 내가 먼저 운을 띄울 테니 어디 한번 답해 보시오.

    김삿갓: 좋습니다. 운을 띄워 보시오.

    선비: 타!

    김삿갓: 언문 풍월이오?

    선비: 당연하지.

    김삿갓: 그거야 간단합니다.

    (속으로 "네놈이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선비: 그럼 해 보시오.

    김삿갓: 사면 기둥 붉게 ![15][16]

    선비: 또 타!

    김삿갓: 석양 행객 시장![17]

    선비: 또 타!

    김삿갓: 네 절 인심 고약

    운을 띄우자마자 바로 대답하는 김삿갓을 보고 선비와 승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가면 갈수록 듣기 거북한 말이 튀어 나오니 운을 더 띄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김삿갓은 "지옥 가기 딱 좋"[18]라고 대답하기 위해 선비가 '타'라고 한 번 더 띄우기를 기다리고 있자 결국 선비가 GG쳤다. 판본에 따라선 승려만 등장하기도 한다. 맹꽁이 서당에선 승려만 등장하며 '네 절 인심 고약타'까지 나오자 승려는 GG 치고 김삿갓이 왜 더 안 부르냐고 하자 속으로 '한번 더 부르면 '지옥 가기 딱 좋타'가 나오겠지...'라고 생각한다.

  • 어느 서당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밥을 얻어먹고자 근처에서 놀던 애한테 허락을 구하러 보냈는데, 훈장은 얼굴도 안 들이밀고 그 애를 시켜서 야박하게 문전박대하니 분기탱천하여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내 진즉 서당인 줄은 알았지만

    방안에 귀한 분들만 계실 줄이야!

    생도는 모두 열명도 못되건만

    선생은 와서 인사도 안하시는군!

    해석만 보면 그냥 점잖게 까는 것 같지만, 실제 이 문장의 음을 소리내어 읽으면 이렇다.

    서당내조지요,

    방중존물이라.

    생도제미이고.

    선생내불알이라.

    오늘날에 봐도 상당히 저속한 단어들을 사용했는데, 당시 19세기 조선의 언어생활과 이 시를 쓴 김병연은 양반이었음을 생각해보면 그 때 김삿갓은 훈장의 푸대접에 굉장히 화가 났었던 것 같다. 사실 이건 허목의 시를 패러디한 거다. 보지화양동 불알송선생 참조.

    물론 민중들의 대사[19]에서 욕설이 난무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과격한 표현은 감정과 생각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써 그다지 드문 표현은 아니었지만, 이 시에서 파격적인 특징은 시를 지은 사람도 양반이고, 시에서 풍자하는 대상도 서당의 훈장이니 역시 양반이라는 것이다. 김삿갓이 평민이기만 했어도 멍석말이가 한 판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문학적으로는 양반임에도 민중의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더하여 이 시는 조선시대의 욕과 비속어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데, 오늘날도 그렇지만 욕이나 비속어가 기록된 기록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과거의 비속어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딱 하나 기록된 것이 있는데 인조가 민회빈 강씨를 개새끼라고 칭한 욕설이다. 그 외에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하교'라고 에둘러 기록해놓거나 세종대왕정창손을 비난할 때 쓴 '용속한 선비'가 비속어를 좀 다듬어놓은 게 아닐까 추측되는 것 정도. 게다가 '좆물'을 '尊物'로 쓴 걸 보면 당시에도 음절의 끝소리 규칙(평폐쇄음화)과 비음화가 있어 [좆물→졷물→존물]의 음운 변동이 일어났음을 알게 해 준다.

  • 그리고 방랑중 돈이 떨어진 김삿갓은 임시로 글을 가르쳐 돈을 벌려 했는데,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는 의미로
    自知면 晩知고 補知면 早知라

    혼자서 알면 늦게 알게 되고 도움받아 알려 하면 빨리 알게된다.

    라고 써 붙였다. 내용만 본다면 홍보용으로 적합한 내용이지만 한자의 음만 읽으면,
    自知면 晩知고 補知면 早知라

    자지면 만지고 보지면 조지라

    라는 더럽게 저속한 섹드립이 된다.

  • 여성 거문고 연주자를 대놓고 성희롱하는 시도 지었다.
    爾年十九齡 이년구령: 너의 나이 열아홉에

    乃早知瑟琴 내조지슬금: 일찍이도 거문고를 탈 줄 알고

    速速拍高低 속속박고저: 박자와 고저 장단을 빨리도 알아서

    勿難譜知音 물난보지음: 어려운 악보와 음을 깨우첬구나

  • 어떤 여성을 상대로 비처녀 논쟁도 했다.
    (김삿갓)

    毛深內闊 모심내활

    必過他人 필과타인

    터럭 깊고 안쪽 넓어

    누가 먼저 지나간 듯?[20]

    그런데, 상대 여성도 보통내기가 아닌지라 다음 시로 응수했다고 한다.
    (여성)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류불우장

    後園黃栗不蜂坼 후원황률불봉탁

    개울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길어지고

    뒷마당 알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오

    해석하면 나이를 먹고 성숙해지면 알아서 크고, 넓어진다는 뜻이다.

  • 김삿갓의 "연유삼장(嚥乳三章)"을 소개한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소재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다.

    1장 一章

    父嚥其上 婦嚥其下 부연기상 부연기하

    上下不同 其味則同 상하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위를 삼키고, 며느리가 그 아래를 삼키니

    위와 아래는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2장 二章

    父嚥其二 婦嚥其一 부연기이 부연기일

    一二不同 其味則同 일이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둘삼키고, 며느리가 그 하나삼키고

    하나와 둘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3장 三章

    父嚥其甘 婦嚥其酸 부연기감 부연기산

    甘酸不同 其味則同 감산부동 기미즉동

    시아비가 그 단것을 삼키고, 며느리가 그 신 것을 삼키니

    단것과 신것은 같지 않으나 그 맛은 같더라.

    이런 시를 쓴 이유는 김삿갓이 떠돌아다닐 적에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찾아간 집의 주인의 며느리가 유종(유방에 맺히는 종양)을 앓아 젖을 빨아야 되기 때문에 재워줄 수 없다하여 이 시를 읊어 놀렸다는 설과, 아비 父가 아니라 사내 夫를 써서 방랑 중 건달패들과 함께 놀다가 패거리들이 원하는 음담패설 시를 지어 웃겨주었다는 설이 있다. 사내들 중 하나가 아내가 유종을 앓아 젖을 빨아줘야 한다는 걸 놀림받고 있던 걸 기억하고 지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69 자세로 비틀었다.
    이 시는 봉알선생의 우리 욕 기행에서도 황봉알이 소개한 바 있다.

  • 또한 김삿갓은 이런 재치로 처녀를 놀린 적도 있다. 하루는 김삿갓이 나룻배를 탔는데 그 배의 사공이 처녀였다. 이에 김삿갓은...
    김삿갓: 여보 마누라. 노 좀 잘 저으소

    사공: 어째서 내가 댁의 마누라요?

    김삿갓: 내가 당신 배에 올라탔으니 내 마누라지.

    이 말에 처녀 뱃사공도 지지 않고 응수하기를...
    사공: 우리 아들, 잘 가렴.

    김삿갓: 아니, 내가 어찌 그대의 아들인고?

    사공: 내 뱃속에서 나왔으니 내 아들 아닌감!

    ...라고 맞응수하자 김삿갓도 사공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는 서로 엄청 웃었다는 일화다.

  • 함경도에서 지역 양반들이 함께 노는데 끼려다가 푸대접만 받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기도 했다. 위의 시들에 비해 유명한 편은 아니었으나, 2024학년도 수능특강에 수록되어 나름대로의 유명세를 얻었다.
    日出猿生原 일출원생원.

    猫過鼠盡死 묘과서진사.

    黃昏蚊簷至 황혼문첨지.

    夜出蚤席射 야출조석사.


    해뜨면 마당에 원숭이 나고

    고양이 지나가면 쥐새끼 죽고

    해지면 처마에 모기가 닿고

    밤되면 자리에서 벼룩이 쏜다.

    역시나 언어유희가 잘 두드러지는 작품. 각각 성이 원생원 = 원숭이, 서진사 = 쥐, 문첨지 = 모기, 조석사 = 벼룩으로 치환된다는 언어유희를 이용한 것이다. 이 한시가 품은 뜻을 모를 리가 없는 양반들은 그 시를 읽고 화를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어느 절에 갔더니, 절에 있던 승려와 선비가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만 보고 하대를 하고 푸대접을 하는 등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 이에 지필묵을 갖다 달라고 하고 시를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僧首團團汗馬囊 승수단단한마랑

    儒頭尖尖坐狗腎 유두첨첨좌구신

    聲令銅令零銅鼎 성령동령영동정

    目若黑椒落白粥 목약흑초락백죽


    둥글둥글 스님머리 땀찬 말X알

    뾰족뾰족 선비머리 앉은 개X지

    구리솥에 구리방울 떨군 목소리

    하얀죽에 검은후추 빠진 눈동자

  • 경기도 개성에 가서 어느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지려 했으나, 주인이 '집에 불을 피울 장작이 없다'는 핑계로 문을 닫으며 쫒아냈다. 그러자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조롱했다.
    邑名開城何閉城(읍명개성하폐성)

    山名松岳豈無薪(산명송악기무신)


    읍 이름 개성인데 어찌 대문 닫아걸며

    산 이름 송악인데 어찌 땔감 없다하나

    개성의 한자를 그대로 직역하면 성을 연다는 뜻이고,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松岳山)은 '소나무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따온 것.

  •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도 썼다.
    宣化堂上宣火黨 선화당선화당.

    樂民樓下落民淚 낙민루낙민루

    咸鏡道民咸驚逃 함경도함경도.

    趙冀永家兆豈永 조기영조기영.


    선화당 위 베풀어지는 화적의 무리

    낙민루 아래 떨어지는 백성의 눈물

    함경도 백성 모두 놀라 달아나는데

    조기영 놈의 집안 어찌 오래가리오?

    당대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1781~1867) 의 가렴주구를 폭로한 시로 선화당, 낙민루, 함경도, 조기영의 한자 훈을 바꿔서 기가 막힌 시를 지었다. 조기영은 풍양 조씨로 대사헌, 예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헌종 7년(1841년) 함경도에 관찰사로 부임했다. 함경도에 파견되기 전에는 평안남도 성천 부사, 충청도 관찰사를 맡았는데, 이 당시만 해도 선정을 베풀었던 유능한 목민관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당시 풍양 조씨 역시 세도가였으니만큼, 실상과는 달리 조기영에게 유리하게 왜곡하여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영어권에도 비슷한 맥락의 언어유희로 Buffalo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명사로는 들소이지만 고유명사로는 버펄로 시, 동사로는 '위협하다'는 뜻이 있다. 그래서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 buffalo라는 문법적으로 오류가 없는 문장도 만들 수 있다. 대충 해석하자면 (한 무리의) 버펄로 시 출신 들소에게 위협당하는 (다른) 버펄로 시 출신 들소가 (또 다른) 버펄로 시 출신 들소를 위협한다라는 뜻이 된다. 해석 참고

  • 걸식 도중 쉰밥을 얻어먹고 분노하여 이런 시도 지었다.
    二十樹下三十客 이십수하삼십객

    四十村中五十食 사십촌중오십식

    人間豈有七十事 인간기유칠십사

    不如家歸三十食 불여가귀삼십식


    스무(스물) 나무 아래에 서러운(서른) 나그네

    망할(마흔) 놈의 마을에서 쉰(쉰) 밥이네

    사람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선, 설익은)[21] 밥 먹느니만 못하구나[22]

  • 또한 시 중에는 시(是)와 비(非) 단 2글자로 지은 시도 있다. 제목도 시시비비가(是是非非歌). 허황된 이론을 가지고 옳다 아니다 하며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부류를 풍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으며,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음이 아니다.

    그른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이 그른 것이 아니며,

    옳다는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함이 도리어 이 그른 것을 옳다 함이다.

    놀랍게도 200년 뒤의 서양인인 도널드 럼즈펠드는 이 시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궤변을 늘어놓는다. 일명 "There are known knowns" 답변. Known knowns/Unknown unknowns라는 개념 자체는 첩보 분야에서 이미 어느 정도 보편화된 개념이었지만,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 필요할 때 unknown unknowns라는 말을 꺼낸 것 자체가 매우 부적절하게 받아들여져 많은 비판을 받았다.

  • 회갑축시
    披坐老人非人間(피좌노인비인간)

    疑是天上降神仙(의시천상강신선)

    膝下七子皆盜賊(슬하칠자개도적)

    偸得天桃獻壽宴(투득천도헌수연)


    저기 앉은 늙은이 사람 아니니

    천상에서 내려 온 신선 같구나

    슬하 일곱 아들들 다 도둑이니

    천도복숭아 훔쳐와 잔치 빛낸다.

    한 시골 노인의 회갑연에서 지은 시. 말석에서 푸대접을 받자 즉석으로 축시를 짓는다 하여 써내려갔다. 첫 소절을 보고 그 뜻을 알아차린 가족들과 하객들이 화가 치밀어 몰매를 쳐서 쫓아내려 하자 두번째 소절로 그들을 감탄시킨다. 세번째 소절을 써내려간 후 좌중이 눈치만 보고 있자 맛 좋은 술을 청한 후 시를 마무리하여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혹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소절을 바꾼 버전도 유명하다. 즉, 노인은 사람이 아니고 아들들은 도둑놈이라고 해서 대노하게 만든 다음 뒤의 두 구절로 감탄하게 했다는 것.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렇게 나왔다.
    이 시는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나온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이 아니로구나), 즉 '이곳은 신선이 사는 곳이다'라는 구절을 오마주하였다고 한다. 김삿갓의 시에 감탄한 가족들과 노인은 여러날동안 그를 대접했지만 그가 떠나기로 결심하자 더 있어달라고 사정하고 기어이 삿갓이 떠나게 되자 여비를 두둑하게 주며 삿갓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 시가 아닌 말장난 중에도 이런 것도 있다. 어느 머슴이 헐레벌떡 뛰어가길래 김삿갓이 잡고 "어딜 그리 급하게 가냐"고 하니 "사람이 죽어 부고를 쓰러 간다"고 했다. 김삿갓이 "내가 글을 알고 있으니 써주겠다"고 했는데, 쓴 것은 유유화화(柳柳花花)(버들 유에 꽃 화.). 글을 모르는 머슴은 "고맙다"고 하고 그것을 받아갔다. 그런데 국어로 그대로 직역하면 '버들버들꽃꽃', 그러니깐 버들버들 떨다가 꼿꼿해졌다. 즉, 생판 모르는 남의 죽음을 모욕한 것이 된다.

아무튼 김병연은 유유자적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10년 단위로 집에 들어와서 자신의 아내와 아들과 딸들을 보고 또 나가고 그런 모양이다. 대표적으로 32살 때인 1838년 음력 9월 21일에 아내가 죽자 집에 돌아와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에 경주 최씨 최흥주(崔興柱)의 딸과 다시 결혼했다. 최흥주는 1817년에 태어나 1863년 음력 6월 18일에 죽었다. 묘는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들인 차남 김익균이 "그만 여행하고 집에 돌아오라"는 편지를 수십통이나 베끼어 아버지가 갈 만한 마을마다 이를 부탁하고 맡긴 모양이다. 그런 편지를 아무 탈 없이 받은 걸 감안하면 그의 엄청난 명망이 짐작된다. 그리고 아들과 집안 사람들이 몇 번 귀향을 권하였으나, 그 때마다 심부름을 보내는 둥 따돌리고는 도망쳤단다. 그렇게 살다가 김병연은 마흔 줄에 들어 떠돌아 다니는 생활이 힘에 부친다는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려고 왔는데, 가정의 일을 소홀히 하여 가족들로부터 냉대받는 것이 다시 그를 바깥에서의 생활로 발길을 돌리게 했다.

2.5. 사망

그는 말년에 접어들어 건강이 갈수록 나빠졌고 외지인 전라도 동복현(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그와 알고지내던 지인 안 초시라는 사람의 집을 방문했을때 쓰러졌고, 안 초시의 사랑방에서 누워 치료를 받다가 숨지는 것으로 방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숨을 거두기 전에 그가 곁에 있던 안 초시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하다.
"안 초시, 춥구려. 어머니가 보고 싶소. 저… 등잔…불을 좀… 꺼 주시오…"

김삿갓의 어머니는 후에 친정으로 돌아가 말년을 보냈는데 김삿갓은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서 소식만 묻고 바로 가는 일을 여러번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뒤늦게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은 아들 김익균이 직접 안 초시에게 가서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데리고 왔다고 한다.[23] 자신의 입장에서는 방랑생활이 몸에 배었을지 몰라도, 가족 입장에서는 훌륭한 가장은 아니었던 셈. 그의 묘지는 고향인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다.

3. 평가

전체적으로 문학 관련 쪽으로 뛰어났으며 글솜씨와 시를 쓰는 능력도 탁월했다. 이대로 관리가 되었더라도 괜찮았겠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그는 가문을 잘못 타고났었다.

할아버지를 욕했다는 죄책감과 할아버지의 부정적 면모들로 인해 그는 자신이 안동 김씨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 하며 살아가야 했으며 진정한 친구도 별로 없이 떠돌며 외롭게 56년의 인생을 살아가야 했다.

결론적으로 그가 다른 가문 사람이었다면 그는 분명 문학 관련 쪽에서 좀 더 업적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랑이라는 핑계로 집안을 버리고 가정도 팽개친 건 결코 옳지 못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4. 여담

  • 김삿갓의 손자인 김영진이란 사람[24]이 15세에 출가하여 에서 승려로 있었는데 절에 다니던 궁녀를 통해 그걸 알게 된 임금이 일부러 궁궐로 불러서 김익순의 죄를 사면해주고 환속을 시켜 관직을 내려주었다. 이후 김영진은 망국 후에 양조장을 차려 큰 부자가 되었으나 자신이 번 돈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다가 정작 본인이 가난해졌다고 한다. 그래도 덕분에 김부자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사실인즉 가문의 힘으로 복권된게 아닌가 한다. 이 때는 이미 고종 즉위 이후라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이미 끝난 상황이었지만 가문의 힘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고 이유야 어떻건 두령의 목을 잘라왔으니 가문의 힘을 쓰면 복권이 가능하기는 했다. 또 당시에는 거지들이 김삿갓 흉내를 내면서 구걸하는 일과 그의 흉내를 내며 삿갓을 팔았던 삿갓팔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덕분에 별의별 짝퉁들이 어설픈 흉내를 내고자 시도 썼으나 역시 짝퉁들이라 실력은 영 아니었다고 한다.
  • 문중에 김삿갓이 남긴 시와 글이 있었지만 6.25 전쟁을 거치는 중 훼손되어 폐기 크리.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명령에 따라 마을을 비웠는데 마침 장마철이라 돌아왔을 무렵에는 김삿갓의 유물에 곰팡이가 피어서 썩어버렸다고 한다. 동복면에는 마을 부흥 차원에서 김삿갓이 돌아갈 때 머물던 집, 기념비, 관련 공원 등이 존재하나 역시 남은 유물이 거의 없어 볼 것이 별로 없다.
  • 왠지 은거기인이나 도사틱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사실은 일생을 주유한 방랑자였다. 비슷한 인물로 해학으로는 정수동과 정만서, 실존 인물이 아닌 이로는 봉이 김선달, 시대가 겹치는 인물로는 고산자 김정호가 있다. 문학계에서 김삿갓은 재치있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고 평해진다.
  • 이름의 특성 때문인지 국어문학 시간에 김삿갓에 관련된 것이 나오면 일부러 "김삿갓이" 이런 식으로 노려서 강조해서 읽는 사람도 있다. 만약 낄낄댄다면 뭔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강원도 영월군에는 김삿갓면이라는 행정구역명이 있는데 2009년부터 하동면에서 변경된 것이다. 오지라 피서 목적의 펜션 등이 많은데 상호에 김삿갓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점포가 많다. 영월에는 자매품으로 한반도면과 무릉도원면이 있는데 김삿갓면과 같은 공식 행정구역명이다.
  • 1996년 보해양조[26]에서 김병연을 모델로 한 소주를 출시했으며, '소주 위의 소주'라는 광고 문구를 내걸고 프리미엄 소주를 표방하며 감미료로 을 집어넣고 기존의 투명한 소주병이 아닌 새카만 색의 전용 소주병을 사용했다. 당시 소비자 가격은 무려 1,400원. 당시 일반 희석식 소주 1병은 500원 이하였다.(출시기사). 의외로 인기를 끌자 진로의 '참나무통맑은소주', 두산경월(현 롯데칠성음료)의 '청산리벽계수' 등이 발매되면서 프리미엄 소주 시장을 이끌었지만 1997년 외환 위기의 철퇴를 맞은 뒤 사라졌다. 근데 그래봤자 희석식 소주. 지금은 김삿갓 소주 광고가 있는 오래된 간판을 간간히 볼 수 있다.
  • 대전지방법원에서는 판결문에 김삿갓의 <난고평생>을 인용하여 판결하기도 하였다.
  • 멜랑꼴리를 그리는 작가 비타민이 뜬금없이 그에 관한 일화를 종종 올리는 걸 볼 때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것 같다.
  • 한국 힙합에서 가사에 자주 거론되는 한국사 인물 중 한명이다.[27] 김삿갓을 래퍼에 비유한 가사를 많이 볼 수 있다.

5. 대중매체에서

  • <성황당>,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정비석(1911~1991)이 소설 <김삿갓>을 쓴 바 있다. 그래도 TV CM이 출판 당시 전파를 타기는 했다. 지금이야 거의 없지만 1980년대만 해도 유명하거나 저명한 작가가 쓴 소설들의 TV CM이 이따금 나오고는 했었다.
  • 작가 이문열은 그의 일생을 <시인>으로 소설화시켰다. 이문열 최고의(혹은 마지막) 걸작으로 작가의 주변 문단이나 문학적 생애를 집대성했다.
  • 1980년대 후반 KBS에서 만든 교통안전 홍보 애니메이션 <안전운전 365일>에서도 김삿갓이 나오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에서 김삿갓을 노인들이 "여보시오. 삿갓 양반."이라고 불렀다. 성우는 정기항. 우습게도 MBC는 당시 공익광고 교통안전홍보 애니메이션으로 어린 왕자를 썼다.
  • 가수 홍서범이 1989년 발매한 1집 음반에 이 인물의 인생사를 다룬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김삿갓(노래) 문서 참조. 여담으로 이 노래는 대한민국 최초의 랩 노래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또한 이 때문인지 벌거벗은 한국사 김삿갓 편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29]
  • 윤승운 화백은 역사적 사료 하나 없던 1980~1990년대에 김삿갓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깊다. 김삿갓을 다룬 적이 2번이다. 첫째는 <맹꽁이 서당> 8권 순조 편에서 인물 하나를 다루는데 분량이 무려 188쪽 중 82쪽이다. 느낌상 왕 같은 인물을 포함한다고 해도 김삿갓은 <맹꽁이 서당> 최다 출연자일 것이다. 마지막에 김삿갓이 죽기 전 곁에 있던 안 참봉(실제로는 안 초시)에게 "어머니가 보고 싶소."라는 말을 하자 안 참봉이 "누가 안 그렇겠소..." 라고 대답해주고 마지막 말인 등잔을 꺼 달란 말을 남기고 사망하자 안 참봉이 "이보게, 삿갓! 삿갓! 잘 가시게...!"라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이 굉장히 슬프다.

    둘째는 만화광장에 연재한 <김삿갓 일대기>인데 성인 대상 작품으로 의외로 수작이다. 단행본은 연재 때문에 못다한 김삿갓의 후손들 이야기도 넣었는데 손자는 일제강점기에 합방 은사금 수령도 거부한다. 불과 150~200년 전의 인물이기 때문에 김삿갓의 증손자가 1970년대까지 살았다고 한다. 압권은 소주병이 가득한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의 무덤 앞에서의 대사 "저는 만화를 그리는 윤가입니다", "옹야, 만화 잘 그리그라". 이 만화를 보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도 김삿갓 무덤을 둘러보고 연구하던 사람도 있었던걸 알 수 있다.

    어린이 버전으로도 상당히 두껍고 김삿갓의 시를 다룬 해설까지 있어 대단히 괜찮은 책이 있다. 바로 <방랑시인 김삿갓>(1990년) 이 책만 보아도 '웬만한 김삿갓의 야사나 시는 다 안다' 싶을 수준의 수작. 물론 섹드립이 들어간 시는 없는데 의도적으로 싣지 않았을 것. 그나마 딱 하나, 위의 말 불알 개 자지 운운하는 시를 1개 싣기는 했는데 흑백으로 나온 초판에서부터 '말 XX 개 XX'로 내용은 통짜 검열을 해서 보여주고, 저속한 말을 썼다는 해설만 나온다.
  • 스핀오프작으로 <도둑과 시인>이라는 작품도 있는데 현대문학상 수상작. 작중 초기 김삿갓은 언어유희의 달인이지만 실제로 김삿갓의 작품사에서 이런 언어유희는 극히 일부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시풍을 써낸 시기를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시절'로 간주한다. 이 작품에서는 김삿갓이 방랑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김삿갓이 조부인 김익순의 정체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시험장에서 문제가 출제되자 갈등 끝에 자포자기 격으로 김익순을 비판하는 글을 쓴 뒤 방랑하게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나오는 이화룡(야인시대)은 김삿갓을 존경한다고 한다.[30] 이유가 뭔가 하면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이렇게 자유로운 삶을 동경해서 그런 듯 하다.
  •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주인공 이영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한다. 이름은 김병연인데 거의 이름으로는 불리지 않으며 이영과 김윤성에게는 난고[31]라고만 불린다. 후에 김병연이 김삿갓으로 불리게 되는 과정이 역사와는 다르게 그려지지만 참 아련하기 짝이 없다.
  • 2016년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일단 본명으로 등장하지만 웹소설과는 달리 처음부터 엄청 큰 삿갓을 쓰고 다닌다. 별명은 삿갓을 쓸 때 제일 멋있어서 갓병연.
  • Project Moon의 게임 Library of Ruina에서 김병연을 모티브로 한 김삿갓일반 초대장 손님으로 등장했으며 후속작 Limbus Company에서도 등장한다. 한국의 범죄 조직인 검계를 모티브로 한 조직 '검계'의 수장인 것과 검계를 만든 사람이라는 것이 특징. 현실의 김삿갓은 검계랑은 관련 없는 사람이지만 검계가 삿갓을 착용하고 다닌 것도 맞고, 김삿갓도 호신을 위해 검을 갖고 다녔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니 이를 엮은 듯. 그래도 출신지였던 S사에서의 본인과 검계의 지위가 위태로워진 것, 터전을 버리고 이곳저곳 떠돌아 다녔다는 것 등 김삿갓의 일생을 반영한 부분도 적지 않다.

6. 관련 문서



[1] 음력 3월 13일.[2] 휴암공파 24세손 병(炳)○ 항렬.(족보)[병] 병으로 요절.[병] [5] 형 김병하(金炳河)의 양자로 출계.[6] 반면 이수백은 유배에서 풀려난지 3년 후(유배에서 풀려나는데 7년 걸렸으니 이괄의 난으로부터 10년 후다.)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이문웅(李文雄)·이문위(李文偉) 형제 및 박지병(朴之屛)·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藩) 형제에게 살해당했는데 사후에 그의 인간쓰레기 행적이 밝혀지며 암튼 살인죄로 다스려져야 했던 사건이 조금 봐줘서 모두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나마도 저 다섯명 중 두 명이 벼슬길에 오른걸 보면 나중에 사면해준 모양이다.[7] 즉, 여기서 언급하는 '적도'-조문형-김익순 순으로 거래가 이어졌다는 얘기다.[8] 역사스페셜 김삿갓편에서도 이와 관련된 얘기가 나온다. 시인이자 대학교수도 역임했었던 정대구 박사(우리나라 최초의 김삿갓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는 "아버지 누구, 할아버지 누구, 외할아버지 누구 이걸 해서 사주단자 앞에 딱 써놓고 이거(과거)를 하거든요. 이런 가문의 사람입니다 하고. 그러니까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은 의례 자기 아버지 이름, 할아버지 이름은 알아야 된다 이거예요. 더군다나 김삿갓처럼 영민한 아이가 과거를 봤는데 자기 할아버지 이름을 몰랐겠어요." 이렇게 평했다.[9] 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 현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10] 홍경래의 난 당시 홍경래에게 점령된 여덟 고을의 수령 중[11] 친구가 아니라 그냥 밥동냥 얻어먹으려고 들른 생판 모르는 양반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슨 친척이 보낸 사람인 마냥 사기를 쳐서 들어가더니만, 막상 집주인을 마주보니 사주 팔러 온 점쟁인 척 하고는 밥을 얻어먹으려 했다고 한다.[12] 다른 버전으로는 "丁口竹天(정구죽천)이구나 이 犬者禾重(견자화중)아!"가 있다.[13] '~~할만하다'란 뜻이 되기도 한다. 사실 이 뜻으로 쓰이는 것이 '옳다'란 의미로 쓰이는 것과 거의 비등비등하다.[14] 서울특별시 남산의 옛 이름인 '목멱산(木覓山)'의 '멱'자가 바로 이것.[15] 혹은 '벌거타'(벌겋다)라고 표기된 판본도 있다.[16] 사방이 온통 노을빛으로 물들어 붉게 보이는 것을 불타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즉, 저녁 때가 됐다는 뜻이다.[17] 여기서 '석양 행객'은 자신을 가리킨다. 직역하면 '해 질 무렵에 길을 가는 나그네'란 뜻.[18] 당시의 한글 표기법은 중철 표기법, 예를 들자면 '사람을'을 '사람믈'로 쓰는 것과 같다.[19] 예를 들면 봉산탈춤이라던지.[20] 이문열황제를 위하여에 그대로 패러디된다.[21] 기본형은 '설다'로 '덜 익은'의 뜻이 되는 올바른 표기법은 '선'이 된다.[22] 윤승원이 그린 만화에서도 이 시가 나오는데, 이 쉰밥을 준 사람을 뺑덕어멈이라고 묘사한다. 이후 위의 시를 남기고 가니, 오히려 '이 거지야, 쉰 밥도 아깝다.'며 악을 쓴다.[23] 맹꽁이 서당에서 묘사하길 익균은 장성후 여러차례 아버지를 찾아 나섰고 실제로 만난적도 몇번 있으나 그때마다 도망쳤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안 초시를 찾아가 아버지의 무덤에서 곡을 한후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24] 둘째 손자로 차남 김익균의 차남이며 장남이던 형 김택진은 동생 뒷바라지를 하며 막노동꾼으로 살았다.[25] 화순동복중학교가 김삿갓의 소재로 되어 있다.[26] 실제로 보해양조는 김삿갓이 숨을 거둔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를 기반으로 한 기업이다.[27] 대표적인 인물로는 문익점이 있는데,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것 처럼, 자신이 본토의 것을 한국으로 들여온 장본인이라는 식으로 사용된다. 다만 요즘은 너무 유치한 라인이라는 평이 많다.[28] 이후 노사모 회장을 역임하며 서프라이즈에서 칼럼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한창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2005년에 방북하여 군사정권 시절 <김삿갓 북한 방랑기> 작가로 반공 분위기에 동조했던 것을 회고한 바 있다. #[29] 주제에 맞게 흰 한복 차림에 소품으로 삿갓도 준비해서 출연했다. 홍삿갓[30] 2부 후반에서 이기붕(야인시대)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면서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이 방랑시인 김삿갓이라고 얘기를 한다.[31] 蘭皐. 실제 김병연의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