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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문하시중 강감찬 姜邯贊 | |
<nopad> 장우성, 정부표준영정 5호, 1974년{{{#!folding [ 다른 이미지 펼치기 ] | |
출생 | 948년 12월 27일[1] (음력 정종 3년 11월 19일) |
고려 관내도 금주 낙성대 (現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 |
사망 | 1031년 9월 15일[2] (향년 82세) (음력 덕종 즉위년 8월 20일) |
작위 | 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 → 천수현 개국자(天水縣開國子) → 천수군 개국후(天水郡開國侯) |
시호 | 인헌(仁憲) |
본관 | 금천 강씨(진주 강씨) |
이름 | 은천(殷川) → 감찬(邯贊, 邯瓚) |
학력 | 문과 장원 급제 |
《고려사》 권94, <열전>7 강감찬 |
낙성대 강감찬 기마상 |
[clearfix]
1. 개요
고려의 문관이자 장군.현종을 보좌하였으며 제3차 여요전쟁에서는 상원수로서 고려군을 총지휘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3]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4]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衿川)[5]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2. 경력
고려 서북면 행영 군단 | |
상원수(上元帥) | |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강감찬 | |
원수(元帥) | |
대장군(大將軍) 강민첨 | |
판관(判官) | |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 |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 |
기타 지휘관 | |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 | 시랑(侍郞) 조원 |
휘하 장병 | |
20만 8300명 | |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지휘하며 남침하자 고려는 서북면 행영[6]을 조성하고, 강감찬을 행영의 도통사로 삼았다. 이어 20만 대군을 소환하여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 지금의 군단장과 같은 직위를 맡겼다.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여요전쟁 승리 후 직위 | ||
공신호 | 추충협모안국공신 (推忠協謀安國功臣) | 현종이 봉한 공신호. |
검교직 | 검교태위(檢校太尉) |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린 명예직을 의미한다. 태위는 삼공직 중 가장 높다. |
직위 | 서경유수(西京留守)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 서경유수는 서경의 장관이다.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이자 행정부 부총리에 해당한다. |
작위 | 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 | 천수현은 봉지(封地), 개국은 미칭으로 개국남은 남작. |
은퇴 후 직위 | ||
공신호 |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 덕종이 봉한 공신호. |
문산계 품계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특진(特進) | 개부의동삼사는 종1품 최고위 품계. 특진은 정2품 품계. 문산계 중에서 두 번째로 높다. |
검교직 | 검교태부(檢校太傅) | 태부는 삼사 중 두 번째 직위이다. |
검교태사(檢校太師) | 태사는 삼사 중 가장 높은 직위로 '천자의 스승'이란 의미의 지위였다. | |
직위 | 문하시중(門下侍中) | 문하시중은 중서문하성의 장관(문하성의 장관)[A]으로 실무직이므로 사실상 총리에 해당한다. |
시중(侍中) | 문하시중의 약칭이다. | |
작위 | 천수현 개국자(天水縣開國子) | 천수현은 봉지, 개국은 미칭으로 개국자는 자작. |
천수군 개국후(天水郡開國侯) | 봉지가 천수군으로 승격됐다. 작위도 후작으로 진작되었다. | |
사후 추증 | ||
시호 | 인헌(仁憲) | 문종이 추증함. |
향직 품계 | 대승(大丞) | 덕종이 추증함. 3품 1등위 향직 품계. |
수직 | 수태사(守太師) | 수직은 행수법에 따른 것으로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으면 붙는다. 강감찬은 종1품 개부의동삼사 및 정2품 특진이지만 태사는 정1품이다. |
직위 | 중서령(中書令) | 중서령은 중서문하성의 장관(중서성의 장관)[A]이나 명예직에 불과하다. 고위급 왕족이나 공신만 임명된다. |
3. 생애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 강감찬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이다.[9] 《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姜邯寶)로 기록되어 있는데, 찬(贊)의 오기로 보인다.[10]그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병마도원수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11]
강감찬의 5대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에서 시흥군(始興郡)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12] 강궁진(姜弓珍)이었다. 강감찬 열전에 따르면, 강궁진의 고조부 강여청이 신라 말 시흥군(始興郡)으로 이주했고, 강여청의 자손들은 금주(衿州)에 자리잡은 걸로 보인다.
여러 설화에서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 한다.[13] 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14]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15]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이다.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하며, 983년(성종 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 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16] 그런데 983년 이후 1009년(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17]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길이 트였는데, 개경 주변에 나성을 쌓는 논의가 나올 때 강감찬이 일전에 논의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1010년(현종 1년) 요나라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하는 제2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주전론을 외치던 문관과 무관들, 심지어 항전을 주장해 온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진다. 도망갔던 신하들이 모두 처벌되었는데 강감찬은 따로 처벌받은 기록이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냥 현종의 명을 받아 다른 임무를 띠고 파견을 갔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서 1011년(현종 2년)에 국자좨주가 되었다가 곧바로 한림학사승지와 좌산기상시를 겸하였다. 그리고 1012년(현종 3년)에는 동북면행영병마사로 파견되어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는데 이 때 감찰어사 이인택이 탄핵을 했으나 되리어 이인택이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만큼 현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014년(현종 5년)에는 중추사가 되어서 사직단 수축을 주장하였고, 1016년(현종 7년)에는 이부상서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강감찬은 1018년(현종 9년) 5월에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하게 되었는데 그가 중앙 고관직을 받음과 동시에 서경유수를 겸했던 것을 보면 거란의 대규모 침입에 대해 확실하게 대비하기 위한 인물로 낙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사시랑 평장사에 임명되었을 때 현종이 직접 임명교서를 써 주었는데, 여기에 이렇게 썼고 사람들이 이를 매우 큰 영예로 여겼다고 한다. 현종이 이렇게 친히 교서를 써서 신하의 공적을 찬양한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는 것은 양규와 강감찬 둘 뿐이다.[18]
경술년에 오랑캐의 전란이 있어서 적들이 한강(漢江) 변까지 깊숙이 침범해 왔다. 당시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야만인[19]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여기서 현종의 표현은 공자가 관이오를 찬양한 논어 헌문편의 표현인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는 공자의 말에서 그대로 인유한 것이라서 현종이 강감찬을 얼마나 각별히 여겼는지를 잘 알 수 있다.《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그리고 10월 서북면행영도통사가 되어 사실상 군사의 전권을 받게 된다. 그해 12월 거란의 소배압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는 제3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상원수가 되어서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이때 고려군 사령부의 무관들은 성공적인 기선 제압, 거란군의 전격전을 대비한 청야전술과 유격 전술,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망치와 모루 전술까지 철저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입을 해 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귀주대첩 기록화(좌), 강감찬에게 금꽃을 꽂아주는 현종(우). |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1019년(현종 10년) 4월 강감찬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물러나지 못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11월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2월에 공신호를 받게 된다. 그러다 1020년(현종 11년) 6월에 치사하게 된다. 그렇게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인 1021년(현종 12년) 수도 개경의 흥국사에 석탑을 세웠는데 아래와 같은 글귀를 새겼다.[20]
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해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 천희(天禧)[21] 5년 5월.
이후에는 조정에서 물러나 기록이 없다가 1030년(현종 21년) 문하시중으로 승진하였다고 나온다. 아무래도 이 때 문하시중이 된 것은 치사 이후 조정 문헌에는 기록이 없다는 점과 당시 80이 훌쩍 넘은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실제 문하시중 직책을 수행했다기보다는 강감찬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031년(덕종 원년) 8월에 사망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나이 84세였으며 현종이 죽은 지 3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사후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저서로는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강감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위치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이다.
강감찬이라는 유명한 장군의 무덤이 실제인지도 잘 모르고 추정으로 되는 상황에 대해 금천 강씨에서는 인조 때의 민회빈 강씨와 관련된 강빈 옥사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강빈의 아버지인 우의정 강석기는 강감찬의 17대 손으로 강빈 역시 강감찬의 후손이었는데 그녀는 시아버지인 인조로 인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고 그 형제들도 모조리 장살되거나 유배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강석기의 친척들은 멸문지화를 모면하기 위해 성씨를 바꾸거나 조상의 묘에 성묘도 안 하는 과정에서 강감찬의 묘까지 실전되고 말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중의 주장일 뿐 근거는 전혀 없으며 문중에서도 실제로 이 묘가 강감찬의 묘가 맞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무엇보다 순종 치세 때의 《승정원일기》에는 강감찬의 묘를 보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기록이 멀쩡히 등장한다. 국역본만 보면 '찾아 보수하라'는 대목을 '실전된 묘를 수소문하라'는 의미로 착각할 수 있는데 원문을 보면 방문(訪問)이며 단순히 지방관이 방문하여 시설을 정비하고 제사지내라는 의미이다. 강감찬은 조선에서도 명신으로 받아들여져 선조와 광해군 때 "강감찬의 묘 관리에 신경을 쓰고 나무를 심어주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보인다. 묘에 대한 건 아니지만 숙종 때도 강감찬의 사우(祠宇)에 액호를 내렸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으므로 강감찬은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충신으로 나라에서 기렸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강감찬의 묘가 있는 마을에는 발견 이전부터 유명한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왔으며 그 무덤 주변 역시 영험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한다. 금천 강씨 후손들은 이같은 구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해서 강감찬 묘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재 위원들이 지석이 너무 망실되어서 판독이 어렵다는 이유로 해당 무덤이 강감찬 묘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고 문화재 지정도 보류했다. 조선 왕조에서 관리받던 시기에는 분명 존재했을 분묘와 석물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 모두 1964년 이후 제작되었다. 강감찬의 진짜 묘가 아닐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며 지자체에서도 문화재 지정은 하지 않았고 청원군에서 강감찬 묘에 지내는 제례 비용을 문중에 대주기만 하다가 2014년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이 되어서 현재는 청주시 흥덕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4. 평가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앞에서 언급했듯 <문곡성 강림 설화>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북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
라며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이다.[22]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다. 즉,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고려사》에는 그에 대해,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
라며 칭송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이었다는 소리이다.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이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이 때문에 한국의 곽자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려 시대 당시 60에 가까운 나이까지 장원 급제 이후 고려사에 등장이 없다. 이는 환갑이면 이미 살만큼 살았다는 당시 수명 기준으로 굉장히 늦은 등장인데 이후 현종의 즉위와 함께 출세길이 열리고,[23] 3차에 걸친 여요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말년에도 문하시중의 직위와 후작위를 받으며 개성에 나성 건축을 주도하는 등 활약했다. 이미 생전에 문하시중이라는 최고위 관직, 후작이라는 사실상 왕족과 개국공신을 제외하면 받을 수 있는 최고위 작위, 권력, 인망 등 모든 것을 누렸다. 그러나 일반적인 권신들과 다르게 숙청되지 않고 평안한 말년까지 보냈으며 사후에도 구국의 영웅으로 배향을 받고, 고려 이후에도 강감찬의 평가는 낮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충신이 있게된 배경 또한 고려 현종같은 고려 대표 명군이 있기에 가능했다.
또한 강감찬이 승리로 매듭지은 귀주 대첩 이후 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북송, 요나라와 더불어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 동안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 업적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5. 기타
- 강감찬은 문관 출신으로 정식 무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없다. 84년 간의 긴 일생 동안 갑주를 입은 건 제3차 여요전쟁 때의 3개월 남짓이었지만, 귀주 대첩의 의의가 엄청나다보니 항상 장군처럼 묘사된다.
은천초등학교의 모습 |
-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당시는 고려 금주) 출신 인물이라 관악구에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인헌중학교·인헌고등학교, 초명을 딴 은천초등학교가 있다. 2008년 관악구가 행정동 명칭을 변경하면서 강감찬 장군의 시호·초명·출생지를 딴 인헌동·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했다. 관악구 낙성대동의 낙성대역의 부역명으로 '강감찬'이 붙어있다. 이곳의 마을버스 회사명도 각각 은천운수, 인헌운수다. 매년 10월에는 강감찬 축제를 열고 있다.
파일:external/wmk.kr/F93102005_0_0_0_0_0_0.jpg |
전쟁기념관에 있는 흉상 |
낙성대공원의 기마상 |
- 강감찬 동상은 용산기지의 전쟁기념관, 낙성대공원 등에 있다. 한때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에도 강감찬 동상이 있었으나 2007년에 이전되었다. 강감찬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수원에 강감찬의 동상이 들어선 사연은 1971년 박정희 집권 당시 대통령이 "각 시군에 위인의 동상을 건립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팔달산의 동상이 이전된 뒤 그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성신사가 복원되었다.
강감찬함(DDH-979) |
- 대한민국 해군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DDH-II)의 5번함은 강감찬 장군의 함자(銜字)를 따서 강감찬함(DDH-979)이라 명명되었다.
인헌무공훈장 |
- 무공훈장 중 인헌무공훈장은 강감찬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되었다.
- 재상까지 지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배우자와 아들에 대한 기록도 없다. 배우자는 성씨조차도 남아 있지 않고, 아들로는 강행경(姜行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열전에 적혀 있지만,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은 이름만 언급된 수준이다.
5.1. 강감찬 축제
2023년 포스터 | 2022년 포스터 | ||
2021년 포스터 | 2020년 포스터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letter-spacing: -0.3px" | 파일:2017년 강감찬 축제 포스터.jpg | ||
2019년 포스터 | 2017년 포스터 | }}} |
파일:charater_2.png | ||||
서울 관악구에서 만든 강감찬 캐릭터 |
2022년 강감찬 축제 |
- 시보격고: 북을 치며 모이시오라고 외친다.
- 전폐례: 초헌관이 폐백을 올리고 향불을 붙인다.
- 초헌례: 초헌관이 술을 올린다.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 아헌례: 아헌관이 술을 올린다.
- 종헌례: 종헌관이 술을 올린다.
- 음복례: 초헌관이 음복주와 조육을 먹는다.
- 망예례: 초헌관이 폐백과 축문을 사당 옆에서 불사른다.
- 예필: 제례가 종료되었음을 알린다.
- 일반분향: 안국사 앞에 분향, 헌화한다.
2023년 강감찬 축제 |
5.2. 강감찬 설화
- 소년 시절, 자신의 얼굴이 곱상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천연두를 얽게 해서 얼굴을 마구 긁어 곰보가 되는데 성공했다는 설화도 있다. 그러고 장부의 얼굴이 되었다며 만족했다고. 물론 과거 천연두는 생명에 관계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질병이었기에, 고의적으로 천연두를 앓았다는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실제였을 수도 있는데, 당시의 천연두는 난치병이어서 심하게 앓으면 죽지만, 가볍게 앓으면 면역이 생겨 다시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고대 인도에서는 면역을 유도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의 팔이나 종아리 등에 상처를 내고 천연두 환자의 피고름을 살짝 발라 일부러 감염시켰다가 면역만 갖고 넘어가게 하는 인두법을 개발했고, 이것이 중국과 중세 유럽으로도 넘어갔다. 그러나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아서 인두법은 계속 논쟁이 거듭되다가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우두 바이러스에서 가져온 종두법을 개발하여 더 안전한 접종법을 정착시켰고, 1980년 완전 박멸이 선포되어 현재까지 인류가 박멸한 유일한 질병으로 남아 있다.
-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과 대화면 사이에 건천이 있는데, 강감찬이 목이 말라 시내물을 떠달라고 동네 주민에게 부탁하자 주민이 이를 거절했고, 야박한 물인심에 화가 난 강감찬이 부적을 떠내려보내어 물을 마르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 장인어른을 골탕먹인 민담도 전해지는데 마치 후대의 권율과 이항복 사이의 일화를 보는 듯할 정도로 유사하다. 강감찬이 혼인을 하고, 처가에 갈 때마다 장인에게 매번 큰절을 올려야 하는 것이 번거로웠다. 그래서 한 번은 처가에 가서 큰절을 올리는데 강감찬은 장인의 바로 앞까지 가서 장인의 코에 얼굴이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머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깜짝 놀란 장인이 "내 콧등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다음부터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게"라고 말했는데, 강감찬은 다음에 처가에 갔을 때 장인에게 절을 올리지 않았다. 괘씸하게 여긴 장인이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따지자 강감찬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장인어른께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라고 하셨기에 문 밖에서 절을 올리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장인의 말을 잘 들은 것 뿐이며, 만약 그렇다고 장인 앞에서 한 번 더 절을 올리면 죽은 사람에게 절을 올리는 예법이 된다는 걸 노린 것이다. 이 민담의 결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강감찬의 이런 재치있는 대답을 들은 장인은 크게 웃으면서 앞으론 굳이 자신에게 매번 억지로 절을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는 결말이 그나마 알려져 있다.
- 개구리 퇴치 설화는 여러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개구리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서 관내 백성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자 강감찬이 이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강감찬이 이걸 어떻게 퇴치했는지는 지방 구전마다 다르다. 부적을 썼다는 전승도 있고 "니들 계속 울어대면 내가 도술로 이 연못의 물을 몽땅 없애버리겠다"는 협박문을 개구리에게 내보였다는 전승도 있다. 혹은 약을 풀어서 개구리들이 잠을 자게 했다는 전승 또한 있다. 몇몇 위인전에선 이걸 섞어서 수하들에게 약을 풀게하고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부적을 쓰고는 그걸 태워 뿌리며 위의 대사를 읊었다는 식으로 다 합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주민들 몰래 밤에 부하들을 시켜 대나무 장대로 연못을 마구 휘저어 개구리들이 울어댈 틈을 주지 않았다는 전승도 있다.
- 호랑이 퇴치 설화도 존재한다. 지금의 서울시인 남경[24]의 판관에 재직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강감찬이 한 노승을 불러 오게 했는데 그가 오자 "너의 무리를 이끌고 북쪽 땅으로 가거라!"라고 일갈했다. 그 노승이 바로 둔갑한 우두머리 호랑이였던 것이다. 호랑이들의 수가 많음을 알고 있었던 강감찬이 우두머리에게 3일간의 유예 기간을 주고 떠나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떠나기 하루 전에 우두머리가 암컷 호랑이 한 마리를 데리고 강감찬에게 왔다. 보아하니 그가 데려온 암컷 호랑이가 이미 새끼를 밴 상태로 곧 있으면 새끼를 낳을 때가 되어 당장 떠날 수 없게 되어 그녀가 새끼를 낳고 몸조리를 하는 즉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강감찬은 처음엔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 암컷 호랑이만큼은 새끼를 낳고 떠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호랑이들은 서둘러 북방으로 전부 달아났고, 임신한 암컷 호랑이는 새끼들을 낳은 뒤 서둘러 북방으로 갔다.
- 어린 시절 학식이 풍부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된 적이 있는데, 그곳의 아전들이나 향리들은 새로 온 원님이 나이도 젊은 것을 보고 그를 비웃었다. 그러자 강감찬은 이들을 불러놓고 동헌 뜰의 수수를 가리키며 "저기 수숫대를 모두 그대들 소매에 넣어 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수숫대가 사람 옷의 소매 속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걸 본 강감찬이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넣지 못하면서 감히 20년도 넘게 자란 나를 소매 안에 넣고 흔들려 했단 말인가!"라고 일성대갈을 날리자 아전과 향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 어린 시절에 한 혼례식에 갔다가 신랑을 봤는데, 그 신랑이 매우 미남이어서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강감찬은 이 신랑이 인간이 아닌 것을 알아채고, 활과 화살을 가진채 이 부부의 첫날밤 신방을 급습했으며 어른들에게도 신랑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자 신랑은 당황해서 멧돼지로 변신해서 도망쳤으나 강감찬의 화살에 쓰러졌다. 신부의 아버지가 저 신랑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강감찬은 "신랑이 고기 반찬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과 그림자에 꼬리가 달려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25]
- 이런 일화도 있다. 말단 지방관 시절, 한 마을의 혼례식에서 난리가 났는데, 신부가 두 명이나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즉 신부의 외모를 한 똑같은 여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는 건데, 쌍둥이였을 리는 없고 어느 한 쪽이 둔갑한 요괴였던 것이다. 이에 강감찬은 개 한 마리를 풀어 신부를 조사했는데, 한 명에게는 친근하게 들이댔지만 다른 한 명은 무서워했는데, 강감찬은 개가 무서워한 신부의 발바닥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러자 그 신부는 여우로 변해 피를 토하다 죽었다. 즉 100년 묵은 여우가 신부로 둔갑했던 것이다.
- 심지어 염라대왕을 불러냈다는 구전 설화도 있다. 강원도에서 채집된 설화로 이 설화에 의하면 강림도령은 본래 강감찬의 부하였다. 강감찬의 집 밑에서 술 장사를 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남편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집에서 잘 자라던 아들 둘이 갑자기 죽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한 집에서 어린아이를 둘이나 잡아간 염라대왕이 야속해서 집에서 심부름 하는 강림도령을 불러 자신이 염라대왕에게 쓴 편지를 주며 말하기를 "어느 곳 다리 밑에서 숨어있으면 사인교(四人轎)[26]가 하나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사인교의 문을 열고 이 편지를 넣어라."라고 했다. 강림도령은 시키는 대로 그 다리 밑에 숨어있었는데 새벽이 되자 가마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강림도령은 놓칠세라 쫓아 달려가 가마의 문을 열고 편지를 넣자 염라대왕이 강감찬을 찾아왔다. 부른 이유를 묻자 강감찬은 한 집에 사는 아이들을 하루 저녁에 둘이나 잡아 갔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무랐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그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엿장수의 아이 둘이 한 짓인데 그 아이들은 술장사하는 집에서 기숙하다가 술장사하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해 원수를 갚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강감찬은 염라대왕을 나무란 것을 사죄하자 염라대왕은 심부름을 잘하는 강림도령을 탐내어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강감찬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미 늦어 강림도령은 벌써 죽어있었다. 즉 염라대왕이 데리고 간 것이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엿장수 아들을 죽이고 수족과 같았던 강림도령마저 죽게 만든 술장사 내외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서 술장사 내외에 의해 죽었다는 엿장수 아이들의 시신을 찾고, 술장사 내외에게 큰 벌을 주었다.
- 벼락을 부러뜨렸다는 설화도 있다. 전쟁 중에 벼락에 맞아 병사들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걸핏하면 벼락 맞아 죽게 되어서야 쓰겠냐고 염려하며 벼락칼을 분질러 없애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던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하늘에서 벼락칼이 내려와서 강감찬을 치려고 했다. 강감찬은 얼른 벼락칼을 잡아서 분질러 버렸다. 그랫더니 그 후부터는 벼락 치는 횟수도 적어지고 벼락칼도 반이 잘려 버린 터라 얼른 나왔다가 얼른 들어가게 되므로 사람들이 훨씬 덜 벼락 맞게 되었다고 한다. 강감찬이 죽은 뒤 다시 문곡성의 원신으로 돌아가자 그의 앞에 뇌신이 나타나 반 토막 난 벼락칼을 고쳐 달라고 따졌다. 문곡성은 그 이후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벼락칼을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직선으로 잇기가 불가능했고, 간신히 엇갈리게 접합시켜 지금의 벼락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 별의 정기를 타고 난 인물이라 그런지 다양한 설화가 전국 곳곳에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장군이라는 이미지로 남은 것과는 달리 민간 설화나 야사에서는 지략, 담력, 도력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으며 심지어는 암행어사 비슷한 것을 했다는 설화도 있다. 관련 설화를 모아 보면 어쩐지 단순한 지략가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도인처럼 묘사되고는 하는데 별 생각없이 설화를 보면 거의 '강감찬 퇴마록'이라고 봐도 지나치지가 않다. 《고려사》 <열전>에서도기발한 지략이 많았다.
는 평가가 있는 것에 비춰 보면 당시 민간에서도 지혜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강감찬이 요물들을 퇴치하거나 설복시키는 설화들은 고려의 지방 행정 정비와 중앙 집권 확립을 은유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호랑이, 멧돼지, 귀신 등 백성들을 괴롭히는 요물들은 사실 지방의 호족이나 향리를 상징하며, 강감찬이 지방관으로써 이들의 전횡을 엄히 다스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권위를 세웠고, 나아가 지방 행정 정비와 중앙 집권 확립에 공헌했다는 것이다. 마침 강감찬이 활약한 성종~현종 시대는 고려의 지방 행정 체계와 중앙집권화가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5.3. 이름
5.3.1. '강한찬' 주장
그의 이름은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이라 읽는 것이 맞다는 가설이 있다. 이 주장의 요지는 '강감찬'의 감(邯)이 이전에는 '한'으로 읽혔으나 일제의 영향으로 '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중국 전국시대 7웅 중의 하나인 조나라의 수도 邯鄲은 '한단'으로 읽는 것을 들며, 또 다른 근거로 《초한지》에 나오는 진(秦)나라 말기의 명장 장한(章邯)의 이름도 '한'이라고 읽는 것이 거론된다. 또다른 근거로는 邯의 표준 중국어 발음이 hán밖에 없으며, 일본어 발음은 '감'과 유사한 gan(ガン, 오음) 또는 kan(カン, 한음)이라는 가설이다. 이 설을 따르는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시종일관 '강한찬'으로 표기한다.그러나 이 설에는 허점이 있는데, 邯의 한자음은 애초부터 두 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논란은 邯의 독음이 과거에 어떻게 실현되었는지에 대한 논란과도 결부된다. 두 독음 중 하나는 匣모寒운(胡安切, 音寒)에서 유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匣모談운(胡甘切, 音酣)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한자음은 운미(-n, -m)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두 운미가 -n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m으로 끝나는 한자음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일본 한자음이 만들어질 당시에 ハ행은 p 소리를 가졌으며, 匣모는 ガ행(g-) 또는 カ행(k-)으로 받아들였으므로 ハ행으로 시작하는 한자음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m 운미가 남아 있는 광동어에서는 邯 자의 한자음을 hon4과 ham4의 두 가지로 제시한다.# 심지어 匣모談운에 대응되는 ham4은 章邯이라는 인명에 쓰인다는 설명이 있으므로, 장한의 이름을 '한'이라고 읽는다는 근거는 오히려 역으로 '장한'이라는 이름이 잘못되었으며, '장함' 내지는 속음에 따라 '장감'이 맞는 게 아니냐고 받아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한국 한자음에서는 匣모를 대체로 ㅎ 또는 ㄱ으로 받아들이며,[27] ㄱ으로 받아들인 한자음은 속음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28] 전근대 한자사전인 《전운옥편》에서 邯 자의 한자음으로 '한'과 '함'을 제시했고, 邯 자와 동음 관계에 있는 酣 자의 한자음을 '함俗감'으로 제시한 것을 고려할 때, '감'이라는 독음이 邯 자의 독음 중 '함'의 속음일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는 姜邯贊을 '강함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강한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강함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서구(西歐)'나 '구라파(歐羅巴)'를 '서우'나 '우라파'로, '대만(臺灣)'을 '대완'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뿐이다.
강감찬의 '감'이 일본 제국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는 일제강점기 이전의 기록을 통해 판단할 수 있다. 정조[29] 때 집필된 《조야회통》이나 숙종 때 집필된 《조야기문》등의 서적에서도 姜邯贊은 '강감찬'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감찬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어떻게 발음했을지 몰라도, 조선시대에는 이미 '강감찬'으로 발음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姜邯贊을 '강한찬'으로 읽었다는 증거가 새로 발견되거나 금천 강씨 종친회에서 '강한찬'으로 읽어 달라고 정정하지 않는 이상 강감찬을 '강한찬'이라고 개칭해야 할 이유는 없다. 현재 邯의 독음으로 쓰이는 '한'과 '감'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강감찬이 생존했을 당시 강감찬의 '감'이 어떤 운모와 함께 실현되었는지로 결정되지만 지금에 와서 이를 알아낼 방도는 없기 때문이다.
5.3.2. 찬(贊)과 찬(瓚) 이설
'찬'에 대해서도 한자 표기가 조금 엇갈린다. 간단히 말하면 '찬'의 부수인 '구슬 옥' 변이 있냐 없냐 차이이다.오늘날에는 《고려사》의 표기를 따라 姜邯贊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姜邯瓚이라고 쓴 것도 발견된다. 위에도 있는 강감찬이 흥국사에 세운 탑에 쓰여진 탑명에는 姜邯瓚이라고 쓰고 있다. 조선 시대 《정조실록》을 보면 위의 흥국사 탑을 거론하면서 예조판서 민종현이 이런 상소를 올렸다.
"송경(松京: 개경) 흥국사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公私)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從之。 又啓言: “松京興國寺舊址有一塔, 塔面有陰記, 卽姜邯賛所書, 而其名以瓚字書之, 與公私書籍所載者不同。 蓋石刻之可信, 比諸登榟之本, 不啻懸隔。 自今以後姜邯賛名字皆以瓚字書之恐好矣。” 從之。
《정조실록》정조 20년 7월 21일.
姜邯贊이라는 표기는 조선 시대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의 표기이고, 강감찬이 세운 흥국사 석탑에는 姜邯瓚이라고 쓰여 있으니 석각이 목각 판본에 비해 믿을 만하다는 의미로 후자의 이름을 택하자고 건의하고 있는 것이고 정조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 무렵부터 논란이 된 이야기인지 정조 때의 한치윤도 《해동역사》에서 이 탑명을 근거로 들어從之。 又啓言: “松京興國寺舊址有一塔, 塔面有陰記, 卽姜邯賛所書, 而其名以瓚字書之, 與公私書籍所載者不同。 蓋石刻之可信, 比諸登榟之本, 不啻懸隔。 自今以後姜邯賛名字皆以瓚字書之恐好矣。” 從之。
《정조실록》정조 20년 7월 21일.
"《고려사》에서는 '구슬 옥' 변을 빼고 그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 흥국사 탑에 쓰인 것이 정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했다.흥국사탑은 북한에 있어 지금은 확인할 수 없으나, 명문은 남아 있다.
菩薩戒弟子 平章事 姜邯瓚 奉爲 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時天禧五年五月日也.
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고, 먼 곳과 가까운 곳(주변국)도 언제나 편안하기 바라며 공경히 이 탑을 세워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하나이다.
천희 5년(1021년) 5월 어느 날에.
링크
時天禧五年五月日也.
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고, 먼 곳과 가까운 곳(주변국)도 언제나 편안하기 바라며 공경히 이 탑을 세워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하나이다.
천희 5년(1021년) 5월 어느 날에.
링크
6. 대중매체
한국 역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구국영웅이고, 학교 교과서에도 다루어진 여요전쟁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라 충분히 많이 다뤄질만한 인물임에도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고려사 자체가, 특히 고려 초기의 기록이 많이 없어서 잘 드러낸 드라마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32] 드라마 문서에도 나오지만, 처음에 그는 드라마 주인공이 '강감찬'인 줄 알았고,[33] 강씨 문중이나 강부자의 눈치를 봤다고 밝히기도 했다. 천추태후가 주인공이니 비중은 미묘했고[34] 드라마에서는 경주원군(왕욱, 김호진 역)의 동무로 나오며, 전쟁 때나 갑주를 입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부채를 손에 쥐고 있다. 여담으로 신정황태후 황보씨에게 소개할 때, "지난 날 황주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금주 강궁진 공의 아들"이라고 해서 한동안 조정에 뜻이 없다가 중반에 서희와 황주 집안의 청으로 인해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1, 2, 3차 여요전쟁 사이 활약한 장면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작중에서 탐정 역할을 자주 수행하곤 한다.
- 네이버 웹툰 《칼부림》의 고일권 작가가 관악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제작한 단편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링크
제목은 《별을 품은 아이》로 카카오페이지의 웹툰 《관악 창작만개》에서 여요전쟁을 다룬 4화가 연재되었고, 이어서 여요전쟁을 대비하는 5화가 추가로 연재되었다.
- 소설가 차무진이 쓴 장편소설《여우의 계절》에서는 원숭이 탈을 쓴 노인으로 나온다.
- Why? 한국사 전쟁 귀주 대첩 파트에서 등장. 미화된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평범한 노인으로 등장한다.
- 박시백의 고려사 2권에서 등장한다. 초판 1쇄에 그려진 특전그림에서 대거란전쟁의 영웅들이라는 제목 아래에 양규, 김숙흥과 같이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작화나 양규와 김숙흥의 설명에서도 아담한 체구에 일흔이 넘은 노인이라는, 사서에 기록된 모습으로 나온다.
- 2023년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배우 최수종이 연기[35]했다. 고려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자 작품의 주역인 현종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스승 역할로 묘사된다고 한다. 강감찬(고려 거란 전쟁) 문서 참조.
[1] 율리우스력 12월 22일[2] 율리우스력 9월 9일[3] 족보 상 아버지 강궁진이 존재하므로 강궁진을 중시조로 본다. 아들의 위명에 가려져있지만 강궁진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삼한벽상공신이며 충분히 중시조로 대접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파'는 강감찬의 시호를 땄다. 귀주 대첩에서 강감찬을 보좌했던 원수 강민첨은 진주 강씨 은열공파의 파조이다.[4] 당시는 고려 금주.[5] 금주(衿州)는 훗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주'(州)가 들어간 고을 이름을 대거 '천'(川) 또는 '산'(山)으로 개칭함에 따라 '금천'(衿川)으로 개칭되었다. 오늘날 관악구 옆에 있는 금천구의 '금천'이 바로 이것이다.[6] 행영(行營)은 '임시로 만들어진 군단'을 의미한다.[A] 명칭상 중서성의 장관이 중서령, 문하성의 장관이 문하시중, 상서성의 장관이 상서령으로 이들은 모두 3성(三省)의 종1품 장관직이다. 다만 고려는 중서성과 문하성을 단일기구인 중서문하성으로 운영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등으로 운영되었던 당나라의 3성 6부제가 고려에서는 2성 6부제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A] [9] 고려시대 사람들 중 이름을 바꾼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서염윤 → 서희, 이인저 → 이규보, 최난 → 최충헌, 박서 →박문성, 정몽란 → 정몽룡 → 정몽주 등이 있다.[10] 원래 한자라는 글자가 비슷하게 생긴 글자도 많아서 한자 문화권의 옛날 사람들도 많이 헷갈려해서 한자로 된 옛 문헌에서 인명이나 지명 오기는 생각보다 많이 발견된다. 심지어는 자기 이름도 틀리게 쓰는 사례도 심심찮게 발견될 정도.[11] 흔히 알려진 금천 강씨는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이기 때문에 붙인 분파의 이름이다. 금천 강씨는 진주 강씨의 5대파(은열공파,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공파, 인헌공파) 중 인헌공파를 말한다. 그러므로 금천 강씨는 진주 강씨와 다른 성씨가 아니라 진주 강씨의 세파 중 하나이다.[12]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공신.[13] 많은 민간 전승에서 여우는 조화를 부리는 영물이면서 사악한 악물이거나 대부분을 인간을 괴롭히는 요물이었던 것으로 보아 본처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14] 전설에 따르면 중국의 사신이 별을 보면서 길을 걷던 중 우연히 별 하나가 떨어지는 걸 보고 서둘러 달려가는데, 이때 강감찬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강감찬이 성인이 되어 하인과 옷을 바꿔 입고 사신을 맞이했는데,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그동안 문곡성께서 어디로 갔나 걱정했는데 바로 이 곳에서 현신하셨사옵니까!"라며 절을 했다. 문곡성 설화가 있는 유명인으로는 북송 인종 때의 명판관 포증이 있다. 다만 두 사람의 생존 기간이 겹치기 때문에 둘 다 문곡성일 수는 없다.[15] 혹은 음양가에서 길흉을 점칠 때 쓰는 9성.[16] 강감찬을 뽑은 지공거는 이몽유였다.[17] 여러모로 당나라 최고의 명장이자 행운아였던 곽자의와 비슷한 점이 많다. 60세가 다 되어서야 두각을 나타낸 점, 국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점, 80세가 넘도록 장수하며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극치에 이르렀다는 점 등이다. 다만 《고려사》에 없는 26년 동안의 공백을 메꿀만한 기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등의 조선 시대 야사집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주로 여러 지방 관직을 전전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강감찬은 그야말로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거의 만능 해결사에 기지가 넘치는 인물이다.[18] 양규 항목에도 있지만, 이런 임명교서는 왕이 직접 쓰는 게 아니라 왕의 명령서를 전담하던 한림원에서 작성한다. 하지만 양규와 강감찬은 현종이 그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일부러 직접 쓴 것이고, 고려사 원문에서도 양규와 강감찬의 교서는 둘 다 왕이 손수 썼다(王手書)고 분명히 강조되어 있다.[19] 원문은 좌임인(左袵人)으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것은 오랑캐의 복식으로 여겼다.[20] 석탑은 오늘날에도 개성에 남아 있으며 북한에서 국보 문화유물 제132호로 지정했다고 한다.[21] 천희는 송나라 진종이 1017년부터 1021년까지 5년간 사용했던 연호이다. 당시 고려가 송이 아닌 거란에 사대하고 있었다지만 전쟁 등으로 인해 거란과의 관계가 멀어졌을 때에는 자율적으로 송의 연호를 쓰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22] 여담이지만 두 세대 후에 북송 인종 때의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린 포청천도 이 '별의 화신'이었다는 설화가 있다. 다만 항간에 강감찬이 포청천의 환생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오히려 포청천이 강감찬의 손자뻘 나이이다. 그리고 또 조선의 퇴계 이황에게도 이 별의 화신이 내려와서 촉나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일화도 있다.[23] 다만 당시 고려 상황상 기록이 없다 뿐이지 한직에만 있다가 황혼기에 벼락출세를 한 것은 아닐 것이며,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이전에도 주변에선 고평가를 받던 인물일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인물을 중용할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인데다가 일단 삼한벽상공신 가문 출신이니 인맥 자체는 두터웠을 것이다.[24] 다만 당시에는 아직 '남경'으로 승격하기 이전이었다. 당시 명칭은 양주였다. 남경으로의 승격은 강감찬 사후 36년 후인 1067년에야 이루어졌다.[25] 전래동화에 따라 멧돼지가 아니라 여우로 묘사되어있는 책도 있다.[26] 네 사람이 드는 가마[27] 한글 창제 당시의 원칙적 한자음 표기법을 정리한 "동국정운"에 따르면 'ㆅ'으로 써야 하나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28] 예: 暇, 憾, 匣 등[29] 원본에는 저자가 기록되지 않았으나 연려실기술에 정조 시기 인물인 김재구의 저술로 기록.[30] 주현, 박근형, 김자옥, 남성우(강조 역)등이 출연하였으나, 주현과 남성우를 제외하고는 배역을 알 수 없다.[31] 1972년 KBS 드라마 <임진왜란>에서는 이순신 역.[32] 전작인 대조영에서는 작중 설정 상 거란족인 설인귀를 맡았는데 본편에는 거란족의 나라인 요나라를 흠씬 두들겨팬 인물을 맡은 것이다. 다만 설인귀가 거란족이라는 것은 실제 역사에는 전혀 없는, 작품의 창작 설정이다.[33] 사실 강감찬이 대중적 인지도로 보나 실제 행적으로 보나 이 시대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주인공급으로 나오는게 당연하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34] 애당초 강감찬 자체가 현종 치세에만 활약한 인물로, 나이와 별개로 현종 이전에 비중이 거의 없다.[35] 대조영에서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태조 왕건에서는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 통일을 했으며,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 유민들을 포용한 태조 왕건을 맡았다. 공교롭게도 위에 언급된 이덕화와는 <대조영>에서 라이벌로 만나면서 드라마 방영을 앞두고 진행했던 유튜브 스트리밍에서는 대놓고 관련 드립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