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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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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면 행영도통사 상원수
강감찬
姜邯贊

Gang Gam-chan
파일:강감찬 표준영정.jpg
강감찬 표준영정
파일:f0041956_4d21a032192b4.jpg
황의돈의 중등 조선역사(1924)에서 나온 강감찬의 초상화[1]
<colbgcolor=#fedc89><colcolor=#000> 시호 인헌공(仁憲公)
작위 천수현 개국남(天水縣 開國男)
천수현 개국자(天水縣 開國子)
천수현 개국후(天水縣 開國侯)
본관 진주 강씨(晉州 姜氏)
이름 감찬(邯贊, 邯瓚)
초명 강은천(姜殷川)
신장 151cm
출생 948년(정종 3년) 12월 22일
고려 광주 금주 낙성대[2]
사망 1031년(덕종 1년) 9월 9일 (향년 82년 8개월 18일)
《고려사》 권94, 열전7 강감찬
고려 중서문하성 문하시중
《第 10 代》
현종 21年 ~ 현종 22年
제10대 1030 ~ 1031

1. 개요2. 역임 관작3. 생애4. 평가5. 기타
5.1. 강감찬 설화5.2. 강감찬의 묘5.3. 이름
5.3.1. 강한찬?5.3.2. 姜邯贊과 姜邯瓚5.3.3. 영문 이름
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군이었고, 죽어서는 전설이 되었다.
네이버 캐스트-강감찬, 귀주대첩의 신화를 쓰다.
고려시대의 전쟁영웅. 여요전쟁 당시 거란의 대군을 몰살해버린 귀주 대첩을 주도한 문신(文臣)으로,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 구국영웅이자 정치적으로도 고려의 리즈 시절을 이끈 현종의 치세에 큰 도움을 준 명재상이였다. 또한 고구려을지문덕, 조선이순신 등과 비견되는 명장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또한 서희, 최영,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위인으로도 거론되는 한편 세종대왕, 이순신과 더불어 서울이 낳은 위인이기도 하다.[3]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주로 거란을 물리친 장군으로 알려져 무신으로 오해받지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나중에 문하시중에 오른 문관이다. 강감찬은 정식 무관직에 봉해진 적이 없고 여요전쟁 때 받은 상원수 직은 임시 군단의 지휘관이라 비상설직이므로 품계가 있는 공식 무관직이 아니다.[4]

생전 받은 작위남작에서 진작된 후작(侯爵)이다. 분봉된 봉지는 천수현(天水縣). 아마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후작일 듯.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5]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6]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7]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 강감찬이란 이름은 개명이름[8]으로 언제 개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姜邯寶)로 기록되어 있다.

2. 역임 관작

고려의 서북면 행영 군단
상원수(上元帥)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 行營都統使) 강감찬
부원수(副元帥)
대장군(大將軍) 강민첨
판관(判官)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
기타 지휘관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 시랑(侍郞) 조원
휘하 장병
208,300 명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지휘하며 남침하자 고려는 서북면 행영[9]을 조성, 강감찬을 행영의 도통사로 삼는다. 이어 20만 대군을 소환하여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해 지금의 군단장과 같은 직위를 맡긴다.
여요전쟁 승리 후 강감찬의 직위.
<colcolor=#000> 공신호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현종이 봉한 안국공신호.
검교직 검교태위(檢校太尉)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린 명예직을 의미한다. 태위는 삼공(三公) 직 중 가장 높다.
직위 서경유수(西京留守) -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서경유수는 서경 분사의 장관이다.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
작위 천수현 개국남(天水縣 開國男) 천수현은 봉지(封地), 개국은 미칭이다.
은퇴 후 강감찬의 직위.
<colcolor=#000> 공신호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덕종이 봉한 봉상공신호.
문산계 품계 특진(特進) 정 1품 품계. 문산계 중에서 두번째로 가장 높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특진(特進) 개부의동삼사는 종 1품 최고위 품계로 강감찬은 두 품계를 겸했다.
검교직 검교태부(檢校太傅) 태부는 삼사(三師) 직 중 가장 낮은 직위이다.
검교태사(檢校太師) 태사는 삼사(三師) 직 중 가장 높은 직위로 '천자의 스승'이란 지위.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문하시중중서문하성의 실질적 장관이다.
시중(侍中) 아마 문하시중을 이르는 듯하다.
작위 천수현 개국자(天水縣 開國子) 천수현은 봉지(封地), 개국은 미칭이다.
천수군 개국후(天水郡 開國侯) 봉지가 천수군으로 승격됐다. 작위도 후작으로 진작.
강감찬의 사후 직위.
<colcolor=#000> 시호 인헌공(仁憲公) 문종이 추증함.
향직 품계 대승(大丞) 덕종이 추증함. 3품 1등위 품계.
수직 수태사(守太師) 수직은 행수법에 따른 것으로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으면 붙는다. 강감찬은 종 1품[10] 겸 정 2품[11]이지만 태사는 정 1품이다.
직위 중서령(中書令) 중서문하성의 명목상 장관인 명예직이다. 고위 왕족이나 공신만이 봉해진다.

3. 생애

그의 선조는 고구려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12]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13] 강궁진(姜弓珍).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에 경주 지역[14]에서 금천으로 이주하였고 거기서 강감찬을 보았다.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15]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16]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落星垈)이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하며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17] 이 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 그런데 983년 이후 1009년(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18] 그 후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길이 트였는데 1010년(현종 1) 거란요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그 후 하공진으로 하여금 요성종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했으며 이후 한림학사 · 승지 · 중추원사 · 이부상서 · 서경유수 · 내사시랑평장사에서 문하시중까지 올라가 승승장구했고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해서 함경도 쪽으로 파견되어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늦게 출세하고 능력도 늦게 발휘된 전적을 보면 대기만성형 인물에 가까웠던 것 같다. 1019년(현종 10) 거란의 제3차 침입 당시 서북면행영도통사였던 강감찬은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고려의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이때 고려군 사령부의 무관들은 성공적인 기선 제압, 거란군의 전격전을 대비한 청야전술유격전,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포위섬멸전까지 철저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입해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거란의 제3차 침입이 종전된 1020년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데 토사구팽을 염려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74살이나 되는 고령에 전쟁터를 다녀왔으니 건강 문제였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19] 다만 훌륭한 왕들이 그렇듯 현종은 강감찬에게 지팡이선물로 주고 3일에 1번만 출근토록 명했다.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며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1021년 개경 흥국사에 석탑을 세웠는데 아래와 같은 글귀를 새겼다.[20]
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해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 천희(天禧) 5년 5월.

1030년 개경의 주위에 나성을 두르라는 간언을 올렸고[21]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문하시중이 되었는데 현종은 강감찬이 문하평장사에 임명될 때 거란의 제2차 침입 당시 몽진을 주장한 것[22]을 언급하며 "그 때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23]라고 공을 평가했다. 1031년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 개국후(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 開國侯)에 봉해졌으며 1031년 8월에 향년 84세로 사망했는데 현종이 세상을 뜨고 3개월 뒤의 일이었다. 사후 내사령[24] 유진[25]의 전례를 따라 조정에서 제사지내주었고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 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4. 평가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앞에서 언급했듯 문곡성 강림 설화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이와 관련한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라고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도 있다.[26]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라 알려졌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는데 개경에 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고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고려사에는 그에 대해 평소에는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사람들이 평소에는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 이었다는 소리.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이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

또한 강감찬이 승리로 매듭지은 귀주 대첩 이후 북송, 요나라, 고려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에 이르는,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게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평화가 이어진 시기는 사실 찾아봐도 거의 없는 편인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동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 거란군을 귀주대첩으로 크게 물리친 덕택에 거란은 정복전쟁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고, 북송, 거란, 고려, 서하의 평화 속의 균형 체제는 훗날 금나라가 흥기하여 요와 북송을 잡아먹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단순히 구국의 영웅 이상인,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셈.[27]

5. 기타

국립전쟁기념관에 있는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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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공원의 기마상
  • 강감찬은 문관 출신으로 정식 무관직을 제수한 적이 없다. 84년간의 일생 동안 갑주를 입은 건 거란의 제3차 침입 때의 3개월 남짓이었지만 귀주 대첩의 의의가 엄청나다보니 항상 장군처럼 묘사된다.
  •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28] 출신 인물이라 관악구에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인헌중학교·인헌고등학교[29], 초명을 딴 은천초등학교가 있다. 2008년 관악구가 행정동 명칭을 변경하면서 강감찬 장군의 시호·초명·출생지를 딴 인헌동·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하였다. 관악구 낙성대동의 낙성대역의 부역명으로 '강감찬'이 붙어있다.
  • 한때 경기도 수원 팔달산에도 강감찬 동상이 있었다. 강감찬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수원에 강감찬의 동상이 들어선 사연은 1971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각 시군에 위인의 동상을 건립하라"라는 밀어붙이기 식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결국 팔달산의 강감찬 동상은 2007년 이전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성신사가 복원되었다.
  • KDX-2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의 제5번함인 DDH 979는 장군의 함자(銜字)를 따서 '강감찬함'이라 명명되었다.
  • 무공훈장 중 인헌무공훈장은 강감찬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되었다.

5.1. 강감찬 설화

  • 소년 시절 너무 잘생겨서 고민하다가 스스로 천연두를 얽게 해서 추남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과거 천연두는 생명에 관계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질병이었기에, 고의적으로 천연두를 앓았다는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위인치고는 풍채가 떨어지는 그였기에 그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하려 한 야사가 덧붙은 모양. 다만 실제였을 수도 있는데, 당시의 천연두는 난치병이어서 심하게 앓으면 죽지만 가볍게 앓으면 면역이 생겨 다시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중세 유럽이나 중국에서는 면역을 유도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의 팔이나 종아리 등에 상처를 내고 천연두 환자의 피고름을 슬쩍 발라 일부러 감염되게 한 후 넘어갔다고 한다. 약독화된 바이러스에 신체를 노출시킴으로써 원시적 형태의 백신 접종 효과를 꾀한 것으로 인두법(人痘法, Variolation)이라고 하는데, 아마 이런 이야기가 야사로 남은 듯하다.
  • 강감찬이 젊었을 때 어느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아전이나 향리들은 새로 온 수령의 풍채가 볼품없고 나이도 젊은 것을 보고 그를 비웃었다. 그러자 강감찬은 이들을 불러놓고 동헌 뜰의 수수를 가리키며 "저기 수숫대를 모두 그대들 소매에 넣어 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수숫대가 사람 옷의 소매 속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걸 본 강감찬이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넣지 못하면서 감히 20년도 넘게 자란 나를 소매 안에 넣고 흔들려 했단 말인가!"라고 일성대갈을 날리자 아전과 향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고 한다.
  • 장인어른을 골탕먹인 민담도 전해진다. 강감찬이 혼인을 하고 처가에 갈 때마다 장인에게 매번 큰절을 올려야 하는 것이 번거로웠다. 그래서 한 번은 처가집에 가서 큰절을 올리는데 강감찬은 장인의 바로 앞까지 가서 장인의 코에 얼굴이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머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깜짝 놀란 장인이 "내 콧등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다음부터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게"라고 말했는데, 강감찬은 다음에 처가에 갔을 때 장인에게 절을 올리지 않았다. 괘씸하게 여긴 장인이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따지자 강감찬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장인어른께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라고 하셨기에 문 밖에서 절을 올리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장인의 말을 잘 들은 것 뿐이며, 만약 그렇다고 장인 앞에서 한 번 더 절을 올리면 죽은 사람에게 절을 올리는 예법이 된다는 걸 노린 것이다. 이 민담의 결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강감찬의 이런 재치있는 대답을 들은 장인은 크게 웃으면서 앞으론 굳이 자신에게 억지로 절을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는 결말이 그나마 알려져 있다.
  • 개구리 퇴치 설화는 여러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데, 개구리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서 관내 백성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자 강감찬이 이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강감찬이 이걸 어떻게 퇴치했는지는 지방 구전마다 다르다. 부적을 썼다는 전승도 있고 "니들 계속 울어대면 내가 도술로 이 연못의 물을 몽땅 없애버리겠다"는 협박문을 개구리에게 내보였다는 전승도 있다. 혹은 약을 풀어서 개구리들이 잠을 자게 했다는 전승 또한 있다. 몇몇 위인전에선 이걸 섞어서 수하들에게 약을 풀게하고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부적을 쓰고는 그걸 태워 뿌리며 위의 대사를 읊었다는 식으로 다 합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주민들 몰래 밤에 부하들을 시켜 대나무 장대로 연못을 마구 휘저어 개구리들이 울어댈 틈을 주지 않았다 카더라는 전승도 있다.
  • 호랑이 퇴치 설화도 존재한다. 지금의 서울시인 남경[30]의 판관에 재직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강감찬이 한 노승을 불러 오게 해서 강감찬에게 오자 "너의 무리를 이끌고 북쪽 땅으로 가거라!"라고 일갈했다. 그 노승이 바로 둔갑한 우두머리 호랑이였던 것. 호랑이들의 수가 많음을 알고 있던 강감찬이 우두머리에게 3일간의 유예 기간을 주고 떠나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떠나기 하루 전에 우두머리가 암컷 호랑이 한마리를 데리고 강감찬에게 왔다. 보아하니 그가 데려온 암컷 호랑이가 이미 새끼를 밴 상태로 곧 있으면 새끼를 낳을 때가 되어 당장 떠날 수 없게 되어 그녀가 새끼를 낳고 몸조리를 하는 즉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강감찬은 처음엔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 암컷 호랑이만큼은 새끼를 낳고 떠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호랑이들은 서둘러 북방으로 전부 달아났고 임신한 암컷 호랑이는 새끼들을 낳은 뒤 서둘러 북방으로 갔다.
  • 어린 시절에 한 혼례식에 갔다가 신랑을 봤는데, 그 신랑이 매우 미남이어서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강감찬은 이 신랑이 인간이 아닌 것을 알아채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이 부부의 첫날밤 신방을 급습했으며 어른들에게도 신랑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자 신랑은 당황해서 멧돼지로 변신해서 도망쳤으나 강감찬의 화살에 쓰러졌다. 신부의 아버지가 저 신랑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강감찬은 "신랑이 고기반찬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과 그림자에 꼬리가 달려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이런 일화도 있다. 말단 지방관 시절, 한 마을의 혼례식에서 난리가 났는데, 신부가 두 명이나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 즉 신부의 외모를 한 똑같은 여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는 건데, 쌍둥이였을 리는 없고 어느 한 쪽이 둔갑한 요괴였던 것이다. 이에 강감찬은 한 마리를 풀어 신부를 조사했는데, 한 명에게는 친근하게 들이댔지만 다른 한 명은 무서워했는데, 강감찬은 개가 무서워한 신부의 발바닥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러자 그 신부는 여우로 변해 피를 토하다 죽었다. 즉 백년 묵은 여우가 신부로 둔갑했던 것.
  • 심지어는 염라대왕을 불러냈다는(...) 구전 설화도 있다. 강원도에서 채집된 설화로 이 설화에 의하면 강림도령은 본래 강감찬의 부하였다. 강감찬의 집 밑에서 장사를 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남편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집에 잘 자라던 아들 둘이 갑자기 죽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한 집에서 어린아이를 둘이나 잡아간 염라대왕이 야속해서 집에서 심부름 하는 강림도령을 불러 자신이 염라대왕에게 쓴 편지를 주며 말하기를 "어느 곳 다리 밑에서 숨어있으면 사인교(四人轎)[31]가 하나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사인교의 문을 열고 이 편지를 넣어라."라고 하였다. 강림도령은 시키는 대로 그 다리 밑에서 숨어있었는데 새벽이 되자 가마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는데 강림도령은 놓칠세라 쫓아 달려가 가마의 문을 열고 편지를 넣자 염라대왕이 강감찬을 찾아왔다. 부른 이유를 묻자 장군은 한 집에 사는 아이들을 하루 저녁에 둘이나 잡아 갔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무랐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그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장수의 아이 둘이 한 짓인데 그 아이들은 술장사하는 집에서 기숙하다가 술장사하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해 원수를 갚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강감찬은 염라대왕을 나무란 것을 사죄하자 염라대왕은 심부름을 잘하는 강림도령을 탐내어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장군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미 늦어 강림도령은 벌써 죽어있었다. 염라대왕이 데리고 간 것이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엿장수 아들을 죽이고 수족과 같았던 강림도령마저 죽게 만든 술장사 내외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서 술장사 내외에 의해 죽었다는 엿장수 아이들의 시신을 찾아 술장사 내외에게 큰 벌을 주었다.
  • 별의 정기를 타고 난 인물이라 그런지 다양한 설화전국 곳곳에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장군이라는 이미지로 남은 것과는 달리 민간 설화나 야사에서는 지략, 담력, 도력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으며 심지어는 암행어사 비슷한 것을 했다는 설화도 있다. 관련 설화를 모아 보면 어쩐지 단순한 지략가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도인처럼 묘사되고는 하는데 별 생각없이 설화를 보면 거의 '강감찬 퇴마록'이라고 봐도 지나치지가 않다. <고려사> 열전에서도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는 평가가 있는 것에 비춰 보면 당시 민간에서도 지혜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다. 강감찬이 요물들을 퇴치하거나 설복시키는 설화들은 고려의 지방 행정 정비와 중앙 집권 확립을 은유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호랑이, 멧돼지, 귀신 등 백성들을 괴롭히는 요물들은 사실 지방의 호족이나 향리를 상징하며 강감찬이 지방관으로써 이들의 전횡을 엄히 다스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권위를 세웠으며 나아가 지방 행정 정비와 중앙 집권 확립에 공헌했다는 것이다. 마침 강감찬이 활약한 성종~현종 시대는 고려의 지방 행정 체계와 중앙 집권화가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5.2. 강감찬의 묘

강감찬의 라 추정되는 위치는 의외의 장소에 있는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32]로 묘가 발견된 해가 1963년으로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금천 강씨에서는 조선 인조 때의 민회빈 강씨와 관련된 강빈 옥사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999년 진주 강씨 회보에 실린 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강빈의 아버지인 우의정 강석기는 강감찬의 17대 손으로 강빈 역시 강감찬의 후손이었는데 강빈은 비정한 시아버지 인조로 인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고 그 형제들도 모조리 장살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말로 다하지 못할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강석기의 친척들은 멸문지화를 모면하기 위해 성씨를 바꾸거나 조상의 묘에 성묘도 안 하는 과정에서 강감찬의 묘까지 실전되고 말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디까지나 문중의 주장일 뿐 근거는 전혀 없으며 금천 강씨 문중에서도 실제로 이 묘가 강감찬의 묘가 맞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강빈의 옥사는 어디까지나 강빈과 주변인이 참화를 입은거지 진주 강씨 인헌공파 전체와 그들과 혼맥, 학맥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해를 입은게 아니다. 특히 성씨를 바꾸었다는 부분은 왕씨 제거레퍼런스삼아 과장한 티가 너무 많이 난다.

무엇보다 순종 대 <승정원일기>에 강감찬의 묘를 보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기록이 멀쩡히 등장한다.순종 3년 1월 6일 승정원일기 묘의 위치를 아니까 정비하고 제사지낼 것 아닌가? 국역본만 보면 '찾아 보수하라'는 대목을 '실전된 묘를 수소문하라'는 의미로 착각할 수 있는데 원문을 보면 방문(訪問)이며 단순히 '지방관이 방문하여 시설을 정비하고 제사지내라'는 의미이다. 강감찬은 조선에서도 명신으로 받아들여져 선조 때와 광해군 때에 선조와 광해군 모두 "강감찬의 묘 관리에 신경을 쓰고 나무를 심어주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보이며[33] 위에서 보듯 멸망 직전인 순종 대도 묘를 정비하고 제사지내게 했다. 조정의 눈이 두려워 묘를 찾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국가에서 정비를 해줄 정도니 당연히 그에 관한 행정 기록이나 참여한 제3자들이 여럿 있을텐데 강씨 후손 일부가 숙청되었다고 단기간에 통째로 망실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 실전되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있다. 삐딱하게 바라보면 불민한 후손들이 겨우 몇 십 년 사이에 조상 묘를 잃어버려 놓고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관리해준 조선 왕실에 책임을 전가하는 불썽사나운 모습이다. 갑신정변 등으로 신분 제도가 철폐되면서 실제로 강씨가 아닌 사람들이 구한말의 혼란기에 금천 강씨 문중으로 편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34]

오늘날 강감찬의 묘가 있는 마을에는 발견 이전부터 '유명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왔으며 그 무덤 주변 역시 영험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한다. 금천 강씨 후손들은 이같은 구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해서 강감찬 묘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재 위원들이 "지석이 너무 망실되어서 판독이 어렵다"는 이유로 해당 무덤이 강감찬의 묘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고 문화재 지정도 보류했다. 조선 왕조에서 관리받던 시기에는 분명 존재했을 분묘와 석물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 모두 1964년 이후 제작되었다. 강감찬의 진짜 묘가 아닐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며 엄밀히 말해 이 묘는 강감찬 묘가 아니라 전(傳) 강감찬 묘다. 지자체에서도 문화재 지정은 하지 않았고 청원군에서 강감찬 묘에 지내는 제례 비용을 문중에 대 주기만 하다가 2014년 7월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이 되어서 현재는 흥덕구에서 이 묘를 관리하고 있다.

5.3. 이름

5.3.1. 강한찬?

邯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설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이라 읽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은 일본식 한자 독음이라고 하며, 한국어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이 아니라 '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의 수도 邯鄲은 '한단'으로 읽으면서 姜邯贊의 邯은 '감'으로 읽는 것이 오류라는 것. 또 다른 근거로 초한지에도 나오는 진(秦)나라의 장군 장한(章邯)의 이름도 '한'이라고 읽는다는 것도 근거로 거론된다. 또 邯의 표준 중국어 발음이 hán밖에 없으며, 일본어 발음은 '감'과 유사한 gan(ガン, 오음) 또는 kan(カン, 한음)이라는 것도 근거로 거론된다.

그러나 원래 자의 주요 한자음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匣모寒운(胡安切, 音)에서 유래한 것, 다른 하나는 匣모談운(胡甘切, 音酣)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한자음은 운미(-n, -m)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두 운미가 -n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m으로 끝나는 한자음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일본 한자음이 만들어질 당시에 ハ행은 p 소리를 가졌으며, 匣모는 ガ행(g-) 또는 カ행(k-)으로 받아들였으므로 ハ행으로 시작하는 한자음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m 운미가 남아 있는 광동어에서는 邯 자의 한자음을 hon4과 ham4의 두 가지로 제시한다.# 심지어 匣모談운에 대응되는 ham4은 章邯이라는 인명에 쓰인다는 설명이 있으므로, 장한의 이름을 '한'이라고 읽는다는 근거는 오히려 역으로 '장한'이라는 이름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받아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한국 한자음에서는 匣모를 대체로 ㅎ 또는 ㄱ으로 받아들이며, ㄱ으로 받아들인 한자음은 속음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35] 전근대 한자사전인 전운옥편에서 邯 자의 한자음으로 '한'과 '함'을 제시했고, 邯 자와 동음 관계에 있는 酣 자의 한자음을 '함俗감'으로 제시한 것을 고려할 때, '감'이라는 독음이 邯 자의 속음일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는 姜邯贊을 '강함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강한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강함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서구'(西歐)를 '서우'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뿐이다.

결정적으로, 일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20세기 서적은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집필된 <조야회통>이나 <조야기문> 등의 서적에서도 姜邯贊은 '강감찬'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감찬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어떻게 발음했을지 몰라도, 조선 시대에는 이미 '강감찬'으로 발음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姜邯贊을 '강한찬'으로 읽었다는 증거가 새로 발견되거나 금천 강씨 종친회에서 '강한찬'으로 읽어 달라고 정정을 요구라도 하지 않는 이상 강감찬을 '강한찬'이라고 불러 줘야 할 이유는 없다. 또한 적어도 일제에 의해 '강감찬'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5.3.2. 姜邯贊과 姜邯瓚

'찬'에 대해서도 한자 표기가 조금 엇갈린다. 간단히 말하면 '찬'의 부수인 구슬옥변이 있냐 없냐 차이다.

오늘날에는 고려사의 표기를 따라 姜邯이라고 쓴 게 일반적이지만 姜邯이라고 쓴 것도 발견된다. 위에도 있는 강감찬이 흥국사에 세운 탑에 쓰여진 탑명에는 姜邯瓚이라고 쓰고 있다. 조선시대 정조실록을 보면 위의 흥국사 탑을 거론하면서 예조판서 민종현이 이런 상소를 올렸다.
"송경(松京: 개경) 흥국사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從之。 又啓言: “松京興國寺舊址有一塔, 塔面有陰記, 卽姜邯賛所書, 而其名以瓚字書之, 與公私書籍所載者不同。 蓋石刻之可信, 比諸登榟之本, 不啻懸隔。 自今以後姜邯賛名字皆以瓚字書之恐好矣。” 從之。
《정조실록》 정조 20년 7월 21일.
姜邯이라는 표기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의 표기이고, 강감찬이 세운 흥국사 석탑에는 姜邯이라고 쓰여 있으니 석각이 목각 판본에 비해 믿을 만하다는 의미로 후자의 이름을 택하자고 건의하고 있는 것이고 정조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 무렵부터 논란이 된 이야기인지 정조 때의 한치윤도 <해동역사>에서 이 탑명을 근거로 들어 "고려사에서는 구슬옥변을 빼고 그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 흥국사 탑에 쓰인 것이 정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흥국사탑은 북한에 있어 지금은 확인할 수 없으나, 명문은 남아 있다. 링크 하지만 대부분 姜邯으로 기록되고 여기서만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구슬옥변은 노년에 붙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5.3.3. 영문 이름

관악구에서 지정한 공식 영문 이름은 'Gang Gamchan' 이다.

6. 대중매체에서

우리 역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구국영웅[36]이고 현종[37]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라 충분히 많이 다뤄질만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 1974년 KBS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배우 주현[38]이 연기했다.
  • 네이버 웹툰 <칼부림>의 고일권 작가가 관악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제작한 단편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제목은 <별을 품은 아이>로 카카오페이지의 웹툰 <관악 창작만개>에서 총 4화로 연재되었다.
  • 2022년 3월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태종 이방원>의 후속 드라마로 2023년 하반기에 <고려 거란 전쟁>이란 제목으로 다룰 예정이다.#

[1] 현재 북한에 있으나 현존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2]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3] 물론 고려 시대 당시의 '서울'은 개경이었고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북 일대를 양주 목멱양 → 남경이라 불렀다. 강감찬이 태어난 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는 원래 고려의 광주 금주(지금의 경기도 시흥) 고을에 속해 있었다.[4] 반대로 군단 부원수였던 강민첨은 정식 무관직인 종3품 대장군과 정3품 상장군을 거친 진짜 장군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중군사 서희와 원수 김부식이 있는데 이들이 받은 중군사와 원수 직도 비상설 지휘관직이기 때문에 정식 무관이 아니다. 대원수 윤관 또한 마찬가지지만 지군국중사라는 독자적인 직위를 제수한 적이 있어 조금 예외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권율이 문관 출신 도원수로서 조선군 전군을 총괄한 것과 유사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려와 달리 조선 시대에는 무관들도 종2품 이상으로 승품이 가능했다. 이는 순수 검투사와 다름없는 사람들을 무인으로 뽑은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무인에게 전술, 전략은 물론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까지도 요구했기 때문.[5] 귀주 대첩에서 강감찬을 보좌했던 부원수 강민첨은 진주 강씨 은열공파조다.[6] 당시는 고려 광주 금주.[7] 금주(衿州)는 훗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주(州)'가 들어간 고을 이름을 대거 '천(川)'으로 개칭함에 따라 '금천(衿川)'으로 개칭되었다. 오늘날 관악구 옆에 있는 금천구의 '금천'이 바로 이것이다.[8]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름을 바꾼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서염윤→서희, 이인저→이규보, 최난→최충헌, 정몽란→정몽룡→정몽주 등.[9] 서북면은 말 그대로 고려의 서북 지역을 의미한다. 행영(行營)은 임시로 만들어진 군단을 의미한다.[10] 개부의동삼사.[11] 특진.[12] 흔히 알려져 있는 금천 강씨는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이기 때문에 붙인 분파의 이름이다. 금천 강씨는 진주 강씨의 5대파(은열공파,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공파, 인헌공파) 중 인헌공파를 말한다. 그러므로 금천 강씨는 진주 강씨와 다른 성씨가 아니라 진주 강씨의 세파 중 하나이다.[13]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공신.[14] 고구려 멸망 이후 강씨 집안이 북방에서 남쪽인 진주로 남하한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이 일족의 사람 강진이 진주 지역의 진양후로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15] 전설에 따르면 중국의 사신이 별을 보면서 길을 걷던 중 우연히 별 하나가 떨어지는 걸 보고 서둘러 달려가는데 이때 강감찬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강감찬이 성인이 되어 하인과 옷을 바꿔 입고 사신을 맞이했는데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그동안 문곡성께서 어디로 갔나 걱정했는데 바로 이 곳에서 현신하셨사옵니까!"라고 절을 했다. 문곡성 설화가 있는 유명인은 포증이 있다.[16] 혹은 음양가에서 길흉을 점칠 때 쓰는 9성[17] 강감찬을 뽑은 지공거는 이몽유이다. 금천 강씨 족보에 따르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태사 - 문하시중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기록으로 고증해보면 생전 문하시중을 역임했고 사후 태사에 추증되었으니 완전히 틀린 기록은 아니다. 다만 족보는 역사적 사료로써의 가치가 낮은 편이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조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18] 여러모로 곽자의와 비슷한 점이 많다. 60세가 다 되어서야 두각을 나타낸 점, 국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점, 80세가 넘도록 장수하며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극치에 이르렀다는 점 등이다. 다만 《고려사》에 없는 26년 간의 공백을 메꿀만한 기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등의 조선시대 야사집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주로 여러 지방 관직을 전전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강감찬은 그야말로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거의 '만능 해결사'에 기지가 넘치는 인물.[19] 사실 이 정도의 전쟁 지휘는 예나 지금이나 순식간에 수명을 깎아 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무이기는 하다. 몸도 몸이지만 머리를 쓸 일도 많고 목숨이 달린 일이니 심적으로도 부담감이 심했을 듯.[20] 석탑은 오늘날에도 개성에 남아 있으며 북한에서 국보 문화유물 제132호로 지정했다고 한다.[21] 이 때 사람들을 동원해 사람들에게 양산을 주고 양산을 펼친 사람들을 도열시켜 가면서 성곽을 어떻게 세울지를 구상했다고 한다.(고려사열전 왕가도)[22] 몽진을 주장한 이후로 강감찬의 기록이 보이지 않아서 강감찬도 다른 신료들처럼 현종 곁을 안지키고 도망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강감찬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거물이 현종을 내팽개친 경력이 있었다면, 이는 주홍글씨로 남을 것이며 지금의 강감찬 포지션은 지채문이 차지하여야 맞는 상황이 된다. 따라서 다른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몽진을 주장할 정도였다면 싫든 좋든 전선에 나가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을 수도 있다.[23] 원문은 '좌임(左衽)'이라고 되어 있는데 '왼쪽으로 옷깃을 여민다'는 뜻이다. 원래 이 표현은 '피발좌임(被髮左衽)'이라 하여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뜻하는 말이다. 공자춘추시대의 명재상 관중을 평가한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에서 유래한다.[24] 중서문하성의 명목상 최고위직으로 직명이 내의령 → 내사령 → 중서령 순으로 바뀌었다.[25] 대호족인 충주 유씨 가문 출신이다.[26] 여담이지만 두 세대 후에 송나라의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린 포청천도 이 별의 화신이었다는 설화가 있다. 다만 항간에 강감찬이 포청천의 환생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오히려 포청천이 강감찬의 손자뻘 나이이다. 그리고 또 이황과 촉나라 책 이야기도 있고.[27] 강감찬 외에도 한국사의 구국의 영웅이 동아시아 전체 차원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사례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을지문덕은 자신의 승리로 중국의 어느 통일제국을 무너뜨렸다. 이순신도 결과적으로는 일본을 200년간 지배한 정권의 창립을 가져왔기 때문이다.[28] 당시는 고려 양광도 금주.[29] 인헌고등학교 사상 강요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학교.[30] 다만 당시에는 아직 남경으로 승격하기 이전이다. 당시 명칭은 양주. 남경의 승격은 강감찬 사후 36년 후인 1067년에야 이루어진다.[31] 네 사람이 드는 가마[32] 본래 청원군 지역이었으나 2014년 7월 1일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되어서 청주시 소속이 되었다.[33] <선조실록> 선조 36년(1603년) 9월 9일, <광해군일기> 광해군 2년(1610년) 2월 6일. 다만 선조와 광해군의 지시는 강감찬 뿐만 아니라 김유신, 김양, 정몽주 등 이전 왕조 명신들의 묘에 신경을 더 많이 쓰라는 의미로 내린 것이다.[34] 금천 강씨 문중에서 가장 유명한 강감찬의 묘를 찾아내는 퍼포먼스를 취해서 나중에 편입된 출처가 불분명한 후손들이 자신들을 금천 강씨의 온전한 후손으로 주장한다는 것이라는 의견이다.[35] 예: , , [36] 이순신 다음가는 라인으로 을지문덕과 이 분을 꼽을만하다.[37] 이 정도의 임금이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세종대왕 다음가는 느낌의 성군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분 인생도 참으로 스펙타클하기도 해서 어떻게 극본을 써도 역사왜곡이 아닐 수준이다.[38] 1972년 KBS 드라마 <임진왜란>에서는 이순신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