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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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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예종·인종의 장인 이자겸 李資謙 | |
작위 | 소성후(邵城侯) 한양공(漢陽公) 조선국공(朝鮮國公) |
추증 | 검교태사(檢校太師) 한양공(漢陽公)[1] |
본관 | 인천 이씨[2] |
국적 | 고려 |
부모 | 부친 경원백 이호 (慶源伯 李顥) 모친 통의국대부인 김씨[3] (通義國大夫人 金氏) |
형제자매 | |
부인 |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 최씨[6] |
자녀 | |
생몰연도 | 1050년대[12] ~ 1127년 1월 19일[13] |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이자겸(李資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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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앙이 궁궐에서 일어나 대역죄인이 부도하니, 충신과 의사들 덕분에 의로움을 들어 해악을 없앴도다."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 인종이 마침내 이자겸을 체포하고 한 말. 사람들은 감격해 만세를 외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 인종이 마침내 이자겸을 체포하고 한 말. 사람들은 감격해 만세를 외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고려 중기의 권신. 대표적인 외척 세도가 집안인 인천 이씨 출신으로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참설을 최초로 퍼뜨린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十八子는 이자겸의 성씨인 李의 파자이다.
2. 생애
2.1. 득세 이전
순종의 처남 시절 직위 | ||
직위 | 합문지후(閤門祗候) | 이 당시 이자겸은 세력이 약한 외척이었다. |
할아버지 이자연[15]은 현종 때 과거에서 장원 급제를 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문종 때 크게 활약해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에게 시집가는 쾌거를 이룬다.[16] 이자겸의 고모 셋이 왕과 혼인한 것이다.
이자겸의 여자 사촌 중 셋이 선종과 혼인해 헌종과도 외척 관계를 만든다.
아버지 상주국(上柱國)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는 이자연의 6남이여서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다. 아들로 이자겸, 이자량이 있으며 딸로 순종의 후궁 장경궁주가 있다.
이자겸은 이자연의 손자, 장경궁주의 형제로서 관직에 쉽게 올라갔지만 장경궁주가 간통 혐의로 폐출당하면서 그 역시 관직에서 쫓겨나고 만다.
게다가 헌종의 병환으로 인해 보위가 휘청거렸고 선종의 비이자 이자겸의 사촌인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가 이자겸의 조카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만들려고 계림공 왕희[17]과 대립하던 중 선수를 친 계림공 일파에 의해 살해당하는 바람에 조정으로 다시 돌아오기 어려워졌다.
예종의 장인 시절 직위 | ||
직위 | 참지정사(參知政事) -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 참지정사는 중서문하성의 서열 3위급 직위. 상서좌복야는 상서성의 장관. |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 중서문하성의 2등급 차관. | |
훈위 | 주국(柱國) | 2등급 훈위. |
문산계 품계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종1품 최고위 품계. |
수직 | 수사도(守司徒) | |
수태위(守太尉) | ||
공신호 | 익성공신(翼聖功臣) | 익성공신호. |
동덕추성좌리공신(同德推誠佐理功臣) | 좌리공신호. | |
작위 |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 | 분봉된 소성군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
2.2. 하늘을 찌르는 세도
예종 시책문[19]에 기록된 이자겸의 관작 | ||
직위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겸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 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 판상서이부사는상서성 이부의 장관. 서경유수사는 서경 조정의 최고 장관. |
수직 | 수태보(守太保) | 삼사(三師) 중 가장 낮은 직위. |
공신호 | 익성동덕추충좌리공신 (翊聖同德推忠佐理功臣) | 좌리공신호. |
훈위 | 상주국(上柱國) | 최고위 훈위. |
작위 |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 | 소성의 백작. |
향직 품계 | 삼중대광(三重大匡) | 1품 1등위 명예 품계. |
문산계 품계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종1품 최고위 실질 품계. |
인종의 장인 및 외조부 시절 직위 | ||
직위 | 중서령(中書令) - 영문하상서도성사(領門下尙書都省事) - 판이병부(判吏兵部) - 서경유수사(西京留守事) | 중서령은 고위 왕족이나 공신만 봉해지는 명예직. 영문하상서도성사는 문하성과 상서성을 모두 아우르는 명예직. 판이병부는 이부와 병부의 장관. 서경유수사는 서경 조정의 최고 장관. |
수직 | 수태사(守太師) | |
공신호 | 협모안사공신(恊謀安社功臣) | 안사공신호. |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 | 익명공신호. | |
작위 | 소성후(邵城侯) | 소성의 후작. |
한양공(漢陽公) | 한양의 공작. | |
조선국공(朝鮮國公) | 조선국의 공작. | |
자칭 | 지군국사(知軍國事) | 윤관이 받은 지군국중사 직위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칭한 것으로 인종의 윤허는 받지 못했다. |
관저 | 의친궁 숭덕부 중흥택 (懿親宮 崇德府 重興宅) | 중흥택은 원래 개명택으로 이자겸의 조상이 살던 곳이다. |
예종 사후에 자신의 외손자인 연소한 태자(훗날 인종)를 즉위하게 하고 부(府)를 설치하여 이름을 숭덕부(崇德府)라 칭해 요속[20]을 두었다. 고려에서 부는 왕자나 왕비만 두는 것인데, 이 단계에서 이미 일반적인 신하의 지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하겠다. 이자겸은 인종 즉위 후에는 중서령 겸 영문하상서도성사라는 관직에 올랐는데 특히 영문하상서도성사는 그 이전에는 기록을 볼 수 없는 사실상 이자겸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상국급 관직이다.[21][22][23] 혼자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최고 관직을 독식한 것이다. 이자겸의 작위는 처음에는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에서 소성후(邵城侯), 한양공(漢陽公)이었는데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조선국공(朝鮮國公)[24]으로 올렸다. 당시는 공식 국명이 고려이고 조선은 여러 별칭 중 하나인데다 국공이라는 작위 자체는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 의미심장한 작위명이다. 조선은 당시에는 주로 서경, 즉 평양 일대를 따로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했으므로 오등작 제도에 따라 서경 일대를 형식상의 봉지로 하사하는 의미의 분봉 작위.
여기에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왕후로 삼게 하여 왕의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했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재산을 부정 축재하는데,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는 이자겸의 둘째 딸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인종의 이모가 된다. 아무리 고려 시대가 근친혼에 덜 엄격했던 사회라고 해도 3촌 간의 혼인은 고려 초에도 흔하지 않았던 만큼 당연히 반대가 어마무시했지만 이자겸 본인의 권력으로 묵살되었다.[25][26][27] 한편 일곱 아들들도 이 덕분에 높은 벼슬에 올랐다. 장남 이지미는 추밀원 부사, 차남 이공의와 3남 이지언과 4남 이지보는 각각 형부, 공부, 호부의 시랑과 낭중 벼슬을 맡았다. 조선으로 따지면 참판, 지금의 차관직에 오른 것이다. 5남 이지윤은 전중내급사, 6남 이지원은 합문지후, 7남 의장은 수좌[28]에 오르게 되었다.[29] 거기에다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군부의 핵심 인사로 떠오른 척준경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동시에 자신의 6남 이지원을 척준경의 사위로 맞게 했으며 이를 통해 권력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관직을 팔아 자기의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30] 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31]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
『고려사』 권127 반역열전 이자겸 편
스스로 국공(國公)[30] 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31]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
『고려사』 권127 반역열전 이자겸 편
《고려사》반역열전 이자겸 편의 일부 글이다. 이자겸은 오랫동안 자신의 재물을 축적하는데 열중했고 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개경의 백성들이 이자겸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자겸은 권세가 가장 강했을 때는 스스로를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칭하고[32] 조선국공이 되어 지위를 태자와 같게 하였다. 이 외에도 세도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군주의 생일이 아닌 이자겸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려 했다. 그 이름도 국왕과 태자의 생일에만 붙이는 절(節)을 붙여 인수절(仁壽節)이라 정했을 정도다. 김부식이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33] 이자겸과 그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인수절을 운운하며 위세를 과시했으며 전문(箋文)[34]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예종 때에 식읍을 하사받았는데, 조정의 허락도 없이 자기 식읍의 주부(注簿) 소세청(蘇世淸)을 사사로이 송나라에 보내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쳐 논란을 일으켰다.[35] 외교 활동을 독자적으로 꾀한 것 자체가 국왕을 국왕으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36]
당시 국력이 급성장한 금나라(여진족)에서 고려에게 자신들에 대한 사대를 요구하자 이자겸은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거란족)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며 사대 정책을 펴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척준경도 동조했는데 단순히 이자겸의 주장에 묻어갔을 가능성과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37] '전쟁보다는 사대가 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일 가능성이 공존한다.
2.3. 이자겸의 난과 최후
자세한 내용은 이자겸의 난 문서 참고하십시오.1126년 2월 25일에 인종에 의해 일어난 친위 쿠데타로 내전이 벌어졌고, 이자겸은 패하면서 12월 5일에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가 7개월 만에 사망했다.
3. 의문
주동자로 지목된 이자겸이 고작 유배로만 끝난 것을 들어 그가 정말 반역을 꾀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시각도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이 반역의 뜻을 품은 건 인종의 친위 쿠데타를 진압한 이후인데 항간에 십팔자위왕이라는 참설이 퍼지자 그가 반역을 꾀했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인종은 이자겸 척살 시도가 실패하자 두려워하는 마음을 못 이기고 이자겸에게 순순히 선양할 생각이었지만 이자겸 쪽에서 자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며 확실하게 거절했다.[38] 그런데 난데없이 '십팔자위왕'의 소문이 나오며 이자겸이 인종을 죽이고 왕위를 뺏으려 했고(라는 식의 기록이 적히고) 얼마 안 가서 이자겸은 연경궁 사태로 유배되게 된다. 실상 하술할 독살 시도 기록을 제외하면 이자겸의 난에서 이자겸은 딱히 한 게 없고 인종의 친위 쿠데타 1차 시도가 실패했다가 2차 시도 끝에 성공한 것에 불과하다.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록은 그의 딸인 인종비가 독극물이 든 떡을 까마귀에게 먹였더니 까마귀가 죽었다는 기록과 독이 든 그릇을 엎질렀다는 기록밖에 없다.[39] 인종을 중흥택에 이어 연경궁에 감금한 이자겸은 자신의 넷째 딸인 인종의 후궁을 시켜 인종을 독살하려 한다. 처음에는 독이 든 떡을 진상했으나 넷째 딸이 몰래 인종에게 알렸고 인종은 떡을 까마귀에게 던졌는데 보란듯이 떡을 먹은 까마귀는 쓰러졌다. 2번째로는 넷째 딸을 직접 시켜 독이 든 술을 올렸는데 딸은 술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지며 술을 바닥에 흘려버려서 결국 2번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이 두 일화 역시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자겸의 딸마저도 아버지의 거사 참여를 거부한 일화는 이자겸의 민심 장악이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사실 이자겸의 입장에서 실제로 쿠데타를 일으킬 거라면 애매하게 독살을 시도할 게 아니라 건장한 하인 몇 명을 보내면 땡이었고 실제로 척준경과 틀어질 때까지만 해도 당시 이자겸의 행적을 보면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냥 그런대로 살자'는 식으로 왕을 상대로 간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양반이 척준경이 치러가기 직전도 아니고 척준경에게 다 털리고 벌받을 때가 되어서야 난데없이 쿠데타 계획했다는 소리나 들었으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무엇보다 실제로 쿠데타를 준비한다기에는 당시 이자겸의 권력에 비해서 너무 준비가 느린 등 의문점이 많다. 결국 확실한건 모종의 이유로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고 인종이 척준경을 이자겸 처리하는데 썼다는 것 정도. 1126년 3월~5월 20일까지는 완전한 세력을 구축했지만 2달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척준경과의 연합이 깨져버린 게 가장 크다.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연합이 깨진 가장 큰 이유는 민심이 이자겸-척준경 연합을 싫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와 너희 등은 모두 왕신(王臣)이다. 이제 땔감을 지고 궁을 태우려 하는 짓은 신자(臣子)의 의(義)가 아니다."
홍입공(洪立功)이라는 무신이 있었다. 원래 직위는 유한경이라는 장군 밑에 소속된 중랑장(中郞將)이었는데 유한경은 이자겸파였고 이자겸은 홍입공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승진시켜 준 뒤 척준경에게 보낸다. 척준경이 개경 궁궐을 불지르려 할 때 홍입공을 보내 땔감을 가져오게 시켰다. 홍입공은 조용히 이를 따랐으나 나성 밖으로 나갔을 때 자신의 군졸에게 위의 말을 한다. 이 말에 설득된 홍입공의 군졸들은 땔감을 버리고 선의문을 통해 들어가 인종에게 가는데 인종을 만난 홍입공은 대열을 갖춰 절한다. 누군지 의아해한 인종에게 홍입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기뻐한 인종은 그들에게 자신의 숙위를 맡긴다. 이 일화는 《고려사》 반역열전 이자겸 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인종의 정당성을 위해 조작된 일화일 수도 있다. 허나 동시에 이자겸파 내에서도 궁에다 불을 지르는 건 심했다는 의견이 많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정리하면 고려의 상징과 같은 본궐을 연소시킨 건 당대나 지금이나 욕을 먹을 일이다.
척준경은 기어코 본궐에다가 불을 질러 다 태워먹었는데 본궐이 커서 인종이 피신한 산호정까지 불이 닥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인종을 죽일 뻔했다.[40] 이 사건은 여파가 컸는데 비록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시하려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양자간에 서로 탓을 돌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당황한 척준경은 분노해서 두문불출했고 하야까지 선언하는데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와 이지보가 척준경과 화해하려 했지만 척준경은 도리어 난의 주동자를 이자겸으로 몰아갔다. 척준경의 말을 보면 욕을 먹을대로 먹으니 역으로 억울한 감이 있는 듯하다. 척준경 입장에서는 아무리 자신이 권신이 됐더라도 아들, 동생, 부하가 다 죽었는데 복수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시점을 계기로 이자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척준경은 이자겸과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전일의 난은 모두 너희 등이 한 짓이다. 왜 내 죄만 죽어 마땅하다 하는가?"
척준경이 이지미와 이지보의 수하에게. 고려사 반역열전 이자겸 편.
척준경이 이지미와 이지보의 수하에게. 고려사 반역열전 이자겸 편.
4. 여담
- 이자겸은 붙잡혔으나 왕의 장인에다 외조부라는 이유로 죽이지는 못했고 전라남도 영광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비굴하지 말자는 각오로 염장한 참조기에게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는데, 이런 한자 식의 어원설이 대체로 그렇듯 신빙성이 높지는 않으나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져있다.#
- 이자겸 때문에 인천 이씨가 그대로 몰락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으로 인천 이씨가 여전히 언급되는데 실제로 이자겸계 외의 인천 이씨는 같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천 이씨가 상당히 타격을 입은 사건은 이징옥이 일으킨 이징옥의 난이다. 그래도 일단 그 때에 비해 세가 확실히 줄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인데 200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약 68,000명이 사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과거 화려하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줄어든 수이다. 같은 조사에서 김해 김씨가 4,125,000명이 보고된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자겸 때문에 너무 많이 몰락해버린 바람에 조선 후기 이후에 시작된 족보 세탁 바람이 불었던 시기에도 관심을 받지 못한 양반 가문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전체에서 문과 급제가 9명밖에 안 된다면 양반이라고 하기도 뭣한 가문이다.
- 웅진출판사의 "한국의 역사" 만화에서는 권력을 휘어잡은 이자겸이 지나가면서 손짓을 한번 하자 날아가던 새들이 비 오듯 우수수 떨어지고, 동네 똥개들도 짖다가도 높으신 분인 걸 알고 설설 기며 모시는 모습으로 그 하늘 높은 권세를 묘사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져 있는데, 관직을 상징하는 감투를 아들들에게 사이좋게 나눠 가지라면서 휙휙 던져주는데, 아들들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면서 감투를 차지하고, 7남 의장이 의기양양하게 수좌를 맡으면서 불교계까지 손아귀에 넣게 되자 그걸 본 스님들이 "이러다가 자기 집 강아지한테도 벼슬을 내릴 판국"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린다.
- 송나라의 관리였던 서긍(徐兢)이 사신단을 따라 고려에 방문하여 견문록인 《고려도경》을 남겼는데 이자겸에 대하여 '풍채가 맑고 온화한 인물'이었다고 평하였다. 최소한 서긍의 묘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흔히 사악한 권신이라는 악명과는 다르게 단정한 외모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간신이 매력적이라니 의외일 수 있지만 이는 매체에서 좀 잘못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사실 권력있는 간신들은 원래 겉보기에는 매력적인 것이 보통이다. 안 그러면 권력을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다.[41] 남들에게 듣기 안좋은 소리를 해서 정적을 끌고 다니는 비호감 성향의 호전적인 인물은 오히려 유학에서 말하는 충신의 전형적인 모습에 가깝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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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70000,#fedc89> 22·23·24권 | 25·26·27권 | 28·29·30·31·32권 | ||||
고종 | 원종 | 충렬왕 | ||||
<rowcolor=#670000,#fedc89> 33·34·35권 | 36권 | 37권 |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
<rowcolor=#670000,#fedc89> 38·39·40·41·42·43·44권 | 133·134·135·136·137권열전 | 45·46권 | ||||
공민왕 | 우왕 · 창왕 | 공양왕 |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 지(志) ] |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 ||||||
[ 표(表) ] | ||||||
86·87권 「연표(年表)」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후비·종실·공주 열전(列傳)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88권 「후비1(后妃一)」 89권 「후비2(后妃二)」 | ||||
90권 「종실1(宗室一)」 91권 「종실2(宗室二)」·「공주(公主)」 | ||||||
태조 | ||||||
신혜왕후 유씨 · 장화왕후 오씨 ·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신성왕태후 김씨 · 정덕왕후 유씨 · 헌목대부인 평씨 · 정목부인 왕씨 · 동양원부인 유씨 · 숙목부인 · 천안부원부인 임씨 · 흥복원부인 홍씨 · 후대량원부인 이씨 · 대명주원부인 왕씨 · 광주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 · 동산원부인 박씨 · 예화부인 왕씨 · 대서원부인 김씨 · 소서원부인 김씨 · 서전원부인 · 신주원부인 강씨 · 월화원부인 · 소황주원부인 · 성무부인 박씨 · 의성부원부인 홍씨 · 월경원부인 박씨 · 몽량원부인 박씨 · 해량원부인 | ||||||
태자 왕태 · 문원대왕 왕정 · 증통국사 · 대종 왕욱 · 안종 왕욱 · 왕위군 · 인애군 · 원장태자 · 조이군 · 수명태자 · 효목태자 왕의 · 효은태자 · 원녕태자 · 효성태자 왕림주 · 효지태자 · 태자 왕직 · 광주원군 · 효제태자 · 효명태자 · 법등군 · 자리군 · 의성부원대군 · 안정숙의공주 · 흥방궁주 · 대목왕후 · 문혜왕후 · 선의왕후 · (정덕왕후 소생 공주) · 순안왕대비 · (흥복원부인 소생 공주) · (성무부인 소생 공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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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 ||||||
93권 | ||||||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 ||||||
94권 | ||||||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 ||||||
95권 | ||||||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 ||||||
96권 | ||||||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 ||||||
97권 | ||||||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 ||||||
98권 | ||||||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 ||||||
99권 | ||||||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 ||||||
100권 | ||||||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 ||||||
101권 | ||||||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 ||||||
102권 | ||||||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 ||||||
<rowcolor=#670000,#fedc89> 103권 | 104권 | |||||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 |||||
105권 | ||||||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 ||||||
106권 | ||||||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 ||||||
<rowcolor=#670000,#fedc89> 107권 | 108권 | |||||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 |||||
109권 | ||||||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 ||||||
<rowcolor=#670000,#fedc89> 110권 | 111권 | |||||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 |||||
112권 | ||||||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 ||||||
113권 | ||||||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 ||||||
114권 | ||||||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115권 | 116권 | 117권 | |||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 ||||
<rowcolor=#670000,#fedc89> 118권 | 119권 | 120권 | ||||
조준 | 정도전 |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 }}} | |||
121권 | ||||||
<rowcolor=#670000,#fedc89> 「양리(良吏)」 | 「충의(忠義)」 | |||||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 |||||
<rowcolor=#670000,#fedc89> 「효우(孝友)」 | 「열녀(烈女)」 | |||||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 |||||
122권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방기(方技)」 | 「환자(宦者)」 | 「혹리(酷吏)」 | |||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 송길유 · 심우경 | }}} | |||
123권 「폐행1(嬖幸一)」 | ||||||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 ||||||
124권 「폐행2(嬖幸二)」 | ||||||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 ||||||
125권 「간신1(姦臣一)」 | ||||||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 ||||||
126권 「간신2(姦臣二)」 | ||||||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rowcolor=#670000,#fedc89> 127권 「반역1(叛逆一)」 | 128권 「반역2(叛逆二)」 | 129권 「반역3(叛逆三)」 | |||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 }}} | |||
<rowcolor=#670000,#fedc89> 130권 「반역4(叛逆四)」 | 131권 「반역5(叛逆五)」 | |||||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 |||||
132권 「반역6(叛逆六)」 | ||||||
신돈 | ||||||
133·134·135·136·137권 | ||||||
신우(우왕) (신창(창왕)) | }}}}}}}}}}}} |
[1] 인종은 이자겸을 처 최씨와 함께 영광으로 유배보내었다. 이자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3년 후 이자겸의 처를 소환하였다. 그로부터 한참 뒤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리기를,"옛날 정(鄭) 장공(莊公)은 강씨(姜氏)를 성영(城穎)에 안치하면서, 맹서하기를, ‘황천(黃泉)에 가지 않는 한 만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얼마 뒤 뉘우치고 처음처럼 다시 모자(母子)관계를 회복하였다. 또 진(秦) 시황제는 옹(雍)에 있던 모친을 모셔 옮겨 함양(咸陽)으로 들어가게 하고, 다시 감천(甘泉)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 두 임금은 어미의 구악을 잊고 자식으로서의 효도를 다하였니 짐은 매우 흠모하고 있다. 지금 장인은 비록 죽었지만 친족을 친애하는 뜻은 끝내 지울 수 없다. 검교태사 한양공(檢校太師 漢陽公)으로 추증하고 부인 최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책봉한다."라고 하였다.[2] 현재는 인천 이씨. 예전에는 경원 이씨, 인주 이씨 라고도 불렀다. 인천의 과거 지명이 경원(慶源), 인주(仁州)였기 때문이다.[3] 평장사 김정준의 딸[4] 고려 순종의 후궁[5] 강릉 김씨 김인존의 부인[6] 해주 최씨 최사추의 차녀. 이자겸과 함께 관작이 박탈되어 유배되었으나 이자겸 사후 소환되어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책봉되었다.[7] 법명, 헌화사(玄化寺) 승려[8] 평산 박씨(平山 博氏) 박경인의 아들 박효렴(朴孝廉)의 부인[9] 예종의 제2비[10] 인종의 제1비이자 폐비[11] 인종의 제2비이자 폐비[12] 할아버지인 이자연이 1003년생이고 외손자인 인종이 1109년생이며 아버지인 이호가 이자연의 6남으로 늦게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은 것을 감안하면 1050년대 근처나 늦게 잡으면 1060년대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13] 음력 1126년 12월 5일[14] 이자겸의 고조할아버지이자 이자연의 할아버지는 인천 이씨의 시조인 이허겸(李許謙)이다.[15] 그에 대한 남은 기록은 이자연 묘지명, 고려사가 있다.[16] 각각 순종, 선종, 숙종의 모후인 인예왕후, 조선국양헌왕의 모비 인경현비, 인절현비[17] 이후 숙종[18] 경화왕후 이씨[19] 실물은 사라졌으나 동문선 제28권에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20] 僚屬, 딸린 무리.[21] 영문하상서도성사는 영문하성사와 영상서도성사를 합쳐 불렀던 관직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영문하성사는 실직인 문하시중보다 상위의 직책이었고, 영상서도성사도 명예직인 상서령과 동급의 직책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해당 직책들은 이자겸 집권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오로지 이자겸만을 위해 만들어진 관직명이었다.[22] 예종 붕어-인종 즉위 이전까지 영문하성사와 영상서도성사 관직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종2품인 지문하성사와 지상서도성사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인종 시기 이자겸이 맡은 해당 두 관직을 합쳐 지문하상서도성사라 일컫었는데, 훗날 고려사 편찬 시 오기로 인해 지문하상서도성사를 영문하상서도성사로 표기하였다는 분석이 있다. 다만 이자겸은 예종 시기 이미 지문하성사보다 위인 동중서문하평장사와 지상서도성사보다 위인 상서좌복야를 맡았으니 관직이 다운그레이드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예 관직명 앞에 최고위직을 의미하는 '영' 자를 붙여 새로운 상국급 관직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23] 이렇다면 송나라의 서긍이 이자겸을 중서령이 아닌 상서령으로 기록한 것도 관직의 혼동으로 인해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국성(왕씨) 제후가 맡는 상서령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영상서도성사는 사실상 상서령과 마찬가지인 관직이기에 서긍이 이자겸을 상서령으로 보고 고려도경에 기록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물론 해당 시점에서 이자겸은 사실상 상국의 위치에 있었기에 그가 중서령인지 상서령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기는 했다.[24] 이자겸의 난 이후 박탈당하고 사후 한양공작으로 다시 추증됐다.[25] 이자겸이 첩을 두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오직 한 명의 부인인 최씨에게서만 많은 자녀를 둔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중 예종의 비가 된 문경태후(순덕왕후)는 아들 인종과의 나이 차이는 불과 15살밖에 나지 않는다. 이자겸은 문경태후의 동생들이자 가장 나이가 어린 두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이게 했는데, 정확한 생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 인종과의 나이 차이는 크게 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26] 아무리 이자겸이 당시 최강의 권신이고 나이 어린 두 딸과 인종의 나이 차이가 크지 않다고 해도 인종과 같은 항렬(사촌뻘)이 아닌 이모(삼촌뻘)를 왕비로 들인 것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만약 이자겸이 본인의 아들들(이지미, 이지보 등)의 딸, 즉 친손녀 중 인종과 나이대가 맞는 여식을 왕비로 들였다면 비판의 목소리는 적었을 것이며 권세를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27] 이자겸이 자신의 친손녀를 인종의 왕비로 들이지 않고 굳이 어린 딸들을 왕비로 들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그에게 친손녀가 아예 없었거나, 친손녀가 있었지만 이미 다른 문벌귀족 자녀들에게 출가해버린 상태일 수도 있고, 혹은 당시 인종의 나이보다도 한참 어린 친손녀들이었기에 궁에 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오히려 자신이 얻은 어린 두 딸이 인종과 비슷한 나이대여서 이자겸 본인으로서는 친손녀를 왕비로 들이는 것보다 자신의 딸이 더욱 안성맞춤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28] 고려의 모든 승려를 관장하는 승통 다음 가는 자리로 대부분 승통은 왕족 출신의 승려들이 올랐다.[29] 굳이 현대의 대한민국 정부 체제에 비유하면 아들들이 대한민국 대통령 비서실장, 법무부/국토교통부/기획재정부 차관, 대통령비서실 의전과장, (국교의) 교구 대주교 직 등 요직이라는 요직들을 줄줄이 꿰찬 격이다.[30] 고려 오등봉작제 중 최고 작위[31] 절일로 천자 및 직계 가족의 생일에만 붙이는 명칭[32] 군권을 왕 대신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자겸은 지군국사가 되기위해 인종을 불러다가 "언제 몇 시에 날 책봉하라"고 했지만 결국 책봉되지는 않았다. 왕조차도 마음대로 다룬 그의 권세를 알려주는 일화다.[33] 김부식이 아뢰었다. “생일을 절이라 일컬음은 예로부터 없던 바, 당현종 때에 비로소 황제 생일을 일컬어 천추절로 삼았으니, 신하(人臣)의 생일을 절을 칭함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富軾 言 "生日稱節 自古所無 唐玄宗時 始稱皇帝生日 爲千秋節 未聞人臣有稱節者." 《고려사》 권제98, 3장 앞쪽, 제신열전 11 김부식 편[34] 태자와 제후에게 신하가 올리는 글이다. 천자는 표문(表文)이라 한다.[35] 링크에서 재인용.[36] 물론 이러한 독자 외교 활동은 왕권이 강했던 예종 때까지는 꿈도 못 꾸는 이야기였고, 외손자인 인종이 즉위하면서부터 고삐가 풀리면서 막나가게 된 것이었다.[37] 치킨 호크 문서에 나오듯이, 참전 경험이 있는 인사가 오히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대외 온건책을 주장하는 사례는 흔하다.[38]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의 예법 특성상 준다고 한 번만에 덥석 받기도 좀 뭣했을 것이다. 최대한 모양새 좋게 받고자 예의상 한 번쯤 사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공수의 기지도 있었다.[39] 흉조인 까마귀라는 존재의 사용과 이와 비슷한 기록이 고려 현종과 관련된 기록에도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창작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40] 산호정까지 불이 번지지 않았지만 불안감을 느낀 인종은 본궐을 떠나려 했다.[41] 무신정변의 시발점인 정중부 역시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좋아 겉보기에는 존경스러워 보이는 인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괜히 구밀복검이란 말이 있는게 아니다.[42] 대표적으로 꼬장꼬장하게 할말 다하고 다녔지만 천하의 명신으로 불렸던 원앙이나 위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