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70000> 고려 정윤 황태자 · 왕태자 · 왕세자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fd400> 태조 (정윤) | 광종 (정윤) | 경종 (정윤) | 성종 (후계자) |
왕무 (혜종) | 왕주 (경종) | 왕치 (성종) | 왕송 (목종) | |
현종 | 문종 | 선종 | 숙종 | |
왕흠 (덕종) | 왕훈 (순종) | 왕욱 (헌종) | 왕우 (예종) | |
예종 | 인종 | 의종 | 명종 | |
왕해 (인종) | 왕현 (의종) | 폐 왕기(효령태자) | 폐 왕오(강종) | |
왕태손 폐 왕씨 | ||||
명종 | 신종 | 희종 | 강종 | |
왕태제 왕탁 (신종) | 왕영 (희종) | 폐 왕지(창원공) | 왕철 (고종) | |
고종 | 원종 | 충렬왕 | 충선왕 | |
왕정 (원종) | 왕거 (충렬왕) | 왕장 (충선왕) | 왕감 (광릉군) | |
왕태손 왕거 (충렬왕) | ||||
충숙왕 | 우왕 | 공양왕 | ||
왕정 (충혜왕) | 왕창 (창왕) | 왕석 (정성군) | }}}국왕}}}}}} |
정성군 관련 틀 | |||||||||||
|
<colbgcolor=#670000><colcolor=#ffd400> 고려 공양왕의 왕세자 정성군 | 定城君 | |||
출생 | 1370년 | ||
미상 | |||
책봉 | 1389년 | ||
사망 | 1394년 5월 25일[1] (향년 24세) | ||
강원도 삼척부 고돌산 (現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2]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고려 왕세자 | ||
1389년 ~ 1392년 7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670000><colcolor=#ffd400> 본관 | 개성 왕씨 | |
휘 | 서(瑞) → 석(奭) | ||
부모 | 부왕 공양왕 모후 순비 노씨 | ||
형제자매 | 2남 3녀 중 장남 | ||
배우자 | 세자빈 인천 이씨[3] | ||
종교 | 불교 | ||
봉호 | 정성군(定城君) | ||
시호 | 미상 |
[clearfix]
1. 개요
고려의 마지막 왕세자. 공양왕의 아들이다.2. 생애
고려의 왕족 정창부원군 왕요와 그 아내 노씨의 아들로 태어나 정성군(定城君)에 봉해진다. 처음 이름은 왕서(王瑞)이었는데 나중에 왕석(王奭)으로 개명한다.부친이 이성계, 심덕부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자 1389년 세자로 책봉된다. 1390년 서연이 열려 사부(師傅)와 시학(侍學)이 임명되고 후계자로서 유교 교육을 받는다. 당시 교사진에는 문하평리 조준, 우사의 이서 등 후일 이름을 날리는 대학자들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세자는 불교에도 심취했는데, 1391년 2월 4일 회암사의 불사에 가서는 부모와 함께 밤새워 예불을 드린다거나 그 다음날은 승려에게 베 1,200필을 시주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1391년 2월 20일에 세자빈이 간택된다. 정당문학 이원굉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으니 왕이 교지를 내려 예물을 하사하고 백관이 하례한다. 한편 부왕 공양왕이 한양으로 천도를 결심한지 1년이 되어가는데 다시 개경으로 환도가 결정된다. 세자는 24일 양릉(陽陵)[4]을 참배하고 효신전(孝愼殿)[5]에 제사를 드려 개경 환도를 알린다. 3월에 봉숭도감이 설치되고 왕석은 세자 책봉례를 따르게 되는데, 공양왕이 예법에 맞지 않게 책봉례를 강행하려 했기에 성균관대사성 김자수가 이를 문제삼는다. 결국 책봉례는 8월로 미뤄진다. 8월 15일 공양왕이 찬성사 설장수를 통해 세자에게 책인을 전하고 예식의 뒤에는 잔치를 벌인다. 그리고 8월 25일 태묘를 참배해 세자 책봉을 알린다.
세자가 명나라에 입조하는 문제로도 정신이 없었다. 6월부터 혹시 명나라에서 세자를 꾸짖지 않을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배경은 이렇다. 이 해 4월에 명나라는 공양왕 즉위 후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고려에서 말 1만필을 팔도록 요구했는데 고려에서는 마릿수를 맞추지 못하고 6월 1,500필만을 보낸다. 이 때 명나라에 세자를 보냈다가 기한에 못 맞춘 것에 대한 질책을 듣게 되면 세자로서는 답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도평의사사에서 다시 논의한다. 입조하는 사절단에 양을 거래할 상인들이 참여하게 되는데 허응 등 사대부들은 9월에 상소를 올려 상인들을 일행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또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
세자는 결국 하정사로 문하찬성사 설장수 등과 9월부터 명나라로 떠나 12월에 수도 응천부에 이른다. 신년을 하례하고 금직문기의복(金織文綺衣服)을 하사받는 등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다. 통사 이현(李玄)이 먼저 1392년 3월 10일에 개경에 도착해 세자의 귀국 예정일을 보고하며 26일에는 세자도 돌아온다. 세자는 개경 서대문 밖까지 나온 백관의 영접을 받고 수일동안 날마다, 내전에서만 다섯 차례의 연회로 환영받는다. 세자는 황제로부터 받은 금은을 국고에 환원하는데, 고려사 열전에는 일부를 빼돌려 몰래 포를 사서 애첩에게 줬다고도 한다.
4월에는 적경원(積慶園)과 효신전을 참배한다. 한편 황주에서 자신을 맞이했다가 뒷날 사냥중 낙마해 부상을 입은 이성계를 문병하기도 한다. 1392년 7월 마침내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태조로 즉위하니 세자는 부친을 따라 원주로 유배보내진다. 왕이 바뀐 뒤 도평의사사에서 명나라에 보낸 글에서는 "어리석고 무지하여 주색이 방종하며 여러 소인을 모아 충직한 이들을 모해했다"[6]고 평한다. 명나라 측에서는 이런 문서를 받고 세자가 무사히 돌아가지 못했다고 이해했는지 명사에는 세자가 돌아가기도 전에 왕이 바뀌었다고 서술한다.
부친이 공양군이 된 뒤에는 1394년(태조 3) 3월 14일 삼척으로 옮겨졌으며 4월 17일 부친, 동생과 함께 교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