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1:00:59

인천 이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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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인천 이씨의 종문.png
仁川 李氏
인천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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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191919>인천광역시
비조 김수로(金首露)
시조 이허겸(李許謙)
집성촌 충청북도 영동군
충청북도 보은군
충청남도 청양군
전라남도 보성군
전라남도 장흥군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경상남도 함안군
경상남도 합천군
인구 83,996명(2015년)[1]
링크 인천이씨대종회
1. 개요2. 시조3. 분가4. 역사
4.1. 고려 초기까지4.2. 고려의 최고 문벌4.3. 현재
5. 분파6. 인물7.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인천광역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시조 허기당나라 황제에게 이씨 사성을 받으면서 이허기라 개명했고 그의 10세손 이허겸이 집안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손자이자 고려 최고의 명재상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자연 때 비로소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이 됐다.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한마디로 고려 문종 이래 100여년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세 가문. 조선의 국성이었던 전주 이씨 가문에서 조선 왕가로 일어선 뒤에 격을 더 높이기 위해 당시 최대 명문가인 가계를 일부 도용했는데, 그게 바로 인천 이씨 가문이다.[2] 일본 역사학자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심도 있게 연구한 가문이기도 하다.

시조 묘소가 인천광역시에 있다. 인천은 신라시대 때 율진군 소성현(栗津郡 邵城縣)이었는데, 고려시대 현종이 양광도 수주 소성현(兩江道 樹州 邵城縣)으로 고쳤다. 이자연의 딸인 인예태후 덕분에 소성현은 경원군(慶源郡)[3]으로 승격되었고, 손녀인 문경태후 때 다시 인주(仁州)로 승격해 수주(樹州)와 떨어진다. 공양왕 때 수주는 경원부(慶原府)로 승격된다. 이후 조선시대 태종이 전국에 주(州)로 끝나는 지명들이 너무 많다고 하여 일부는 바꾸게 했고 그래서 지금의 지명인 인천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경원', '인주' 이씨라고도 불렸다.[4] 그래서 가끔 본 위키나 다른 문서에 경원 혹은 인주 이씨라 적혀있는 경우가 있는데 전부 인천 이씨라고 보면 된다.[5]

고려 시대때 약 80년간 대대적으로 10여 명의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며, 고려 10대 갑족(甲族)이기도 하다. 한국의 가장 유력한 가문의 호칭인 삼한갑족(三韓甲族) 중 하나이다.

현재는 대구광역시[6]경상남도[7], 전라남도 지역에 비교적 많이 사는 편이다.

2. 시조

시조는 고려 현종상서좌복야를 지낸 이허겸(李許謙)이다.[8] 고려 중엽에 왕실과의 척연(戚緣)을 배경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그 중추적 인물은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이다. 그의 딸 셋이 모두 문종의 왕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하고 최고 직위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올랐다. 그의 맏딸 인예왕후(仁睿太后)의 소생들인 순종·선종·숙종이 차례대로 왕위를 이었고, 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도 인예왕후의 소생이다.

3. 분가

분가로는 조선 초 유명한 무신 이징옥의 양산 이씨[9][10]가 있다. 이징옥의 형 이징석 후손들은 양산 이씨 가계를 이었으나, 역모로 몰린 이징옥의 후손은 경주에 숨어살다 순조 때 사면복권된 후로 인천 이씨로 다시 편입됐다.[11] 인천 이씨 대종회 일부에서 주장하기로는 흥양 이씨와 함안 이씨도 인천 이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하나, 명백한 근거는 없다. # 흥양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러면 인천 이씨도 경주 이씨에서 분적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흥양이씨와 경주이씨 간의 관계, 흥양이씨와 인천이씨 간의 관계). 함안 이씨는 인천 이씨에서 분적했다는 사실을 연대적 오류를 들며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인천 이씨와 함안 이씨에 공통으로 나오는 이방실 장군은 여주 이씨 경주파(진사공파)[12] 5세로 이름이 거꾸로 나온 실방(實芳)으로 적혀 있다.

4. 역사

4.1. 고려 초기까지

이자연(李子淵)은 인주(仁州)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의 대관(大官)으로 사신의 명을 받들고 당(唐)나라에 들어갔을 때, 천자가 그를 가상히 여겨서 이씨 성을 하사하였고, 〈그〉 자손들이 소성현(邵城縣)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인주이다. 이허겸(李許謙)이라는 자는 소성백(邵城伯)으로 봉해졌으며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이한(李翰)을 낳았다. 이한은 이자연·이자상(李子祥)을 낳았는데, 이자상은 상서우복야로 추증되었다. 이자연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정종(靖宗) 초에 급사중(給事中)에 보임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고려사 열전 권제8 제신 이자연

인천 이씨는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로 전한다. 수로왕의 장남은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아 김씨가 되고, 차남과 삼남은 어머니 허황옥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 이씨는 허씨에서 갈린 분적종(分籍宗)이다. 허황옥의 23세손 허기(許奇)가 신라 경덕왕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는데, 때마침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고(755년) 이때 당나라 현종을 호위한 공으로 당나라 황제의 성인 이씨사성받았다. 당시 그는 이씨와 허씨를 합쳐 '이허'를 성씨로 사용하였는데, 그의 10세손 이허겸(李許謙)이 바로 인천 이씨의 시조이다.[13] 고려사 후비열전에 따르면 원성왕후의 외조부인 이허겸은 고려 현종 15년에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에 추증되면서 소성현(邵城縣)에 식읍(食邑) 1천 5백 호를 하사받았는데, 그곳이 현재의 인천이며 이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며 관향으로 삼았다.

4.2. 고려의 최고 문벌

후에 〈이자연에게〉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중서령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개국공(開府儀同三司 守太師 兼中書令 監修國史 上柱國 慶源郡開國公) 식읍(食邑) 3,000호를 더해주었다. 죽은 후 시호를 장화(章和)라 하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아들 이호(李顥)는 경원백(慶源伯)을 추증 받았고, 이정(李頲)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으며 죽으니 시호를 정현(貞憲)이라 하였다. 이의(李顗)·이전(李顓)은 모두 재상에까지 올랐다.

〈이자연의〉 세 딸이 모두 문종에게 시집가니 첫째가 인예태후(仁睿太后), 둘째가 인경현비(仁敬賢妃), 셋째가 인절현비(仁節賢妃)이다.

이호의 아들은 이자겸(李資謙)·이자량(李資諒)인데, 이자겸은 「이자겸전(李資謙傳)」에 있다. 이정의 아들은 이자인(李資仁)·이자의(李資義)인데, 이자의는 「이자의전(李資義傳)」에 있으며, 증손은 이혁유(李奕㽔)이다. 이의의 아들은 이자현(李資玄)·이자덕(李資德)이며, 이자상(李子祥)의 아들은 이예(李預)·이오(李䫨)이다.
고려사 열전 권제8 제신 이자연

고려 전기에 대를 이어 세력을 점차적으로 키운 문벌 귀족 중에서도 최고 권력을 가진 가문이 바로 인천 이씨였다. 고려 시대 당시에 인천 이씨 가문과 대적할 수 있는 집안이 없었을 정도. 유일하게 하나 있다면 왕실일 정도로 한 때에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집안이였다.
파일:경원 이씨와 왕실의 혼인 관계.jpg

[14]

이 성씨의 시조인 이허겸부터 고려 초기의 권세가로 세력을 떨쳤고, 손자인 이자연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의 현손자 이자의계림공 왕희와 대립하다가 암살당하면서 한동안 위기를 맞았지만, 또 다른 현손이자겸이 가문의 수장이 된 후 권세가 극에 달했다. 이에 이자겸은 자기 스스로 국공에 올라 왕현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었고, 심지어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칭했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자겸이 꾸준히 자기 집안의 딸들을 왕비로 들이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자겸의 난으로 가문이 망했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14세기에도 고려 최고의 귀족 가문 목록인 재상지종에 명시되어 있는 등, 고려가 망할때까지 조선 초기 태종~세종 때까지도 여전히 이름 날리던 명문가였다[15]. 오히려 인천 이씨가 결정적으로 몰락한 계기는 이징옥의 단종 복위 운동, 이른바 이징옥의 난 때문이다.

조선시대 때는 문과 급제자가 아홉 명이 있었다.[16] 고려 문종의 부인이 인천 이씨이며, 조선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파평 윤씨의 어머니가 인천 이씨이다.

이 집안에서 본격적으로 왕과 사돈관계를 맺기 시작한 이자연[17]은 당시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도 아니고, 과거 문과로 시험쳐서 관직에 들어서 최고위 관직인 문하시중까지 오른 실력파 인재였다.

기타 주요 인물로는 고려 무신 집권기 초기의 문학자로 파한집 등을 저술한 한림원학사를 지낸 이인로, 여말선초에 형조판서, 대사헌, 참찬의정부사를 지낸 공도공 이문화 등이 있다. 이문화는 세조정희왕후의 외조부다.

4.3. 현재

고려 시대에 비하면 2015년 기준 전국 인구 조사에서 전국에 약 83,855명이 사는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과거 리즈 시절을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적어진 숫자. 이씨 성 치고는 드물게, 알려진 출신 유명 인물이 많지 않다.

아마도 고려 중기(이자의, 이자겸)부터 조선 초기(이징옥)에 걸쳐 본가나 방계에 걸쳐 여러차례 역모 사건에 휘말린 결과로 가세가 크게 위축된 것이 원인으로 파악된다. 특히 조선초기 세조연간에 일어난 이징옥의 난이 결정적이었고 단종복위운동에도 연관이 되어 낙향한 이[18]도 있다.

또 다른 가문 몰락의 원인으로는 조선왕조의 의도적인 견제를 꼽는 경우도 있다. 조선의 왕가인 전주 이씨의 원래 시조는 이광희였는데 조선 건국이후 이광희 위로 이한, 이자연, 이천상의 3대가 추가되었는데 이들은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조선 건국이후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행위로 학자들은 고려 당대 최대의 명문가였던 인천 이씨의 2세 이한,3세 이자연,이자상 부자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본다. 이자상의 이름만 비슷한 이천상으로 바꾸고 같은 벼슬을 지낸 것으로 조작하여 전주 이씨 족보에 등재하였다. 조선왕조 입장에선 이러한 약점을 최소한으로 노출시키기 위하여 인천 이씨 가문을 의도적으로 배제할 이유가 충분하였다.

또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무너져 가는 고려 왕조의 위신을 살리기 위해 인주을 다시 경원부로 승격시켰고, 세자 석의 비를 인천 이씨[19]로 삼았는데 조선 조정입장에서는 인천 이씨가 고려왕조의 마지막 외척가문이었다는 점과 고려를 상징하는 가문이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과거 급제자조차도 통틀어 겨우 9명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문이 크게 쇠락하였다.

대신 모계쪽으로는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의 모친이 인천 이씨이고, 조선 중기 유명한 유학자 남명 조식의 모친이 인천 이씨[20]이다.

시조인 이허겸의 묘려(墓閭)인 원인재가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2동에 있다. 그 바로 옆에 있는 위치한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수인선 원인재역이 여기서 이름을 땄다.

5. 분파

  • 시중공파 (侍中公派): 시조의 8세 이작신(李作臣)
  • 공도공파 (恭度公派): 이문화(李文和)[21]
  • 쌍명재파 (雙明齋派): 시조의 7세 이인로(李仁老)[22]
  • 충강공파 (忠剛公派): 이징옥(李澄玉)

6. 인물

<rowcolor=#fff> 이름 생몰년 비고
20세 이전
이한(李翰) ? ~ ? 2세. 고려의 문신.
이자연(李子淵) 1003 ~ 1061 3세. 고려의 문신.
이정(李頲) 1025 ~ 1077 4세. 고려의 문신.
인예왕후(仁睿太后) ? ~ 1092 4세. 고려의 왕비.
이예(李預) ? ~ ? 4세. 고려의 문신.
이오(李䫨) 1042 ~ 1110 4세. 고려의 문신.
이자인(李資仁) ? ~ 1091 5세. 고려의 문신.
이자의(李資義) ? ~ 1095 5세. 고려의 문신.
원신궁주(元信宮主) ? ~ 1095 5세. 고려의 후궁.
사숙태후(思肅太后) ? ~ ? 5세. 고려의 왕비.
연덕궁주(延德宮主) ? ~ 1139 5세. 고려의 후궁.
복창원주(福昌院主) ? ~ 1195 5세. 고려의 후궁.
이자현(李資玄) 1061 ~ 1125 5세. 고려의 문신.
이자덕(李資德) 1071 ~ 1138 5세. 고려의 문신.
이자겸(李資謙) ? ~ 1095 5세. 고려의 문신.
이자량(李資諒) ? ~ 1123 5세. 고려의 문신.
이식(李軾) 1090 ~ 1151 6세. 고려의 문신.
이지미(李之美) ? ~ ? 6세. 고려의 문신.
이지보(李之甫) ? ~ ? 6세. 고려의 문신.
문경태후(文敬太后) 1094 ~ 1118 6세. 고려의 왕비.
의장(義莊) ? ~ ? 6세. 고려의 승려.
이인로(李仁老) 1152 ~ 1220 쌍명재공파 7세. 고려의 문신.
이장용(李藏用) 1201 ~ 1272 9세. 고려의 문신.
이원굉(李元紘) ? ~ ? 시중공파 12세. 고려의 문신.
이징옥(李澄玉) 1399 ~ 1453 충강공파 16세. 조선의 반란자.
30세 이전
이두황(李斗璜) 1858 ~ 1916 공도공파 28세. 친일파
이희석(李喜錫) 1892 ~ 1950 공도공파 30세. 독립운동가
이규석(李圭錫) 1897 ~ 1950 공도공파 30세. 독립운동가
31세(祥/禧)
이수정(李洙貞) 1890 ~ 1934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이상주(李相周) 1937 ~ 2023 충강공파 교수, 대학총장
32세(柄/根)
이태준(李泰俊) 1883 ~ 1921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이태길(李泰吉) 1920 ~ 2014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33세(熙/煜)
이경희(李慶熙) 1880 ~ 1949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이장희(李章熙) 1900 ~ 1929 공도공파 시인
34세(在/埈)
이우환(李禹煥) 1936 ~ 공도공파 미술가
35세(夏/殷)
36세(鉉/鍊)
이명흠(李明欽) 1949 ~ 공도공파 장흥군수
37세(洙/泰)
이홍빈(李洪彬) 1923 ~ 1975 공도공파 독립운동가. 족보명 영빈(永彬).
이영권(李永權) 1934 ~ 공도공파 정치인
이승우(李承雨) 1959 ~ 공도공파 소설가

7. 같이보기

  • 인천광역시
  • 고려 시대
  • 문벌귀족
  • 이자겸의 난
  • 안동 김씨 - 고려시대에 인천 이씨 문벌귀족이 있었다면 조선시대에 대응되는 척족은 안동 김씨가 있다. 이자연은 정조의 충신 김조순에 비견되는 명망과 훌륭한 인품을 가진 문종의 충신이었으나, 후손들이 국정 농단한 것까지 똑같다.[23] 다만 이자겸의 난에 해당하는 사건은 안동 김씨에 없었다.


[1] 인천 이씨 83,855명 + 인주 이씨 141명[2] 1388년 위화도 회군 이전에 세워진 이자춘신도비에서는 전주 이씨의 역사를 고려 초기의 아간(6등급) 이광희(李光禧)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광희 이하로는 실존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이광희의 위로 이한-이자연-이천상의 3대가 추가되는데, 《인천 이씨 족보》에서 퍼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자연은 이한의 아들이고, 시중을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 《인천 이씨 족보》에서 이자연의 동생으로 '이자상'(李子祥)이 있는데 《전주 이씨 족보》에 이자연의 아들로 이천상(李天祥)이 있으며, 이름은 다르지만 복야를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3] 경사의 근원지라는 의미다.[4] 본관 이칭은 경원 이씨(慶源 李氏) → 인주 이씨(仁州 李氏) → 인천 이씨(仁川 李氏) 순으로 바뀌었다. 인천의 과거 지명이 경원, 인주이다.[5] 경주 김씨를 월성 김씨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지역명이 바뀌면서 바뀐 것이다.[6]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과 동서변지구에 인천 이씨의 집성촌이 있었다. 현재 동서변동은 택지지구로 개발되었고, 연경북동 역시 개발되어 거진 초토화됐으나, 여전히 주변에는 인천 이씨가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있다.[7] 경상남도 창녕군의 가항리 인근에 시중공파를 중심으로 한 인천 이씨 집성촌이 있다. 또한 창원시 진해구(舊 진해시)를 중심으로 공도공파 공수송파후손들이 꽤 있다. 의령군에도 인천 이씨 집성촌이 있다.[8] 고려 때 현종의 장인이 된 김은부의 장인이기도 하다.[9] 양산 이씨도 한자가 다른 두 가문이 있는데, 앞서 언급한 梁山으로 쓰는 가문이 있고, 陽山으로 쓰는 가문이 있다. 후자인 경우는 공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며, 양산은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을 가리킨다.[10] 가락종친회에서 언급이 되지 않는 성(姓), 본관(本貫)이다.이징옥의 조부때에 양산 이씨로 분가한 바 당시엔 분가한지 얼마되지 않아 사실상 인천 이씨로 간주된 것으로 보인다[11] 인천 이씨 대동보 1982년판에는 나타나지 않고, 2009년판에 충강공파의 이름으로 등장한다.[12]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 선생이 속한 계파로, 그는 경주파 11세이다.[13] 기(奇) - 검(儉) - ○ - ○ - 파(波) - ○ - 귀(貴) - ○ - 준(浚) - 겸(謙). 인천 이씨 대동보(1982, 열람 시 로그인 필요)[14] 심지어 문종의 모친인 원혜왕후의 외조부가 인천 이씨의 시조인 이허겸이다.[15] 정희왕후의 외조부인 이문화는 태종때 재상을 그 아들 4명이 정2품 이상, 그 중 3명은 판서를 지냈다[16] 대과 급제자를 말하는 것임, 진사시, 생원시는 예외.[17] 이자겸의 조부. 이자연은 딸 셋을 문종과 결혼시켰는데, 이 중 장녀가 인예왕후다.[18] 남명 조식의 외가[19] 정당문학을 지낸 이원굉의 딸[20] 부친은 이국으로 조선초 유명한 무장이며 영의정을 지낸 최윤덕의 손자사위이다. 사육신 사건에 최윤덕의 아들들이 연루되며 처가인 통천 최씨 가문이 멸문직전에 이르자 일가를 이끌고 낙향하였다[21] 고려의 권신인 이자연의 동생인 이자상의 현손, 이자상>이예>이공수>이지저, 이문화는 이지저의 6대손임[22] 이자상>이오(이예의 동생)>이언림>이백선>이인로[23] 비슷한 예로 해주 최씨풍양 조씨에 비유할수 있다. 1위 가문인 인천 이씨와 안동 김씨가 무너지자 1위로 등극한 가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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