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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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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벌귀족의 생활을 그린 '아집도(雅集圖)'. 고려 후기 제작. (호암미술관 소장)

1. 개요2. 정의3. 흥성했던 배경4. 권력 기반5. 몰락6. 가문들

[clearfix]

1. 개요

문벌귀족()은 고려 전기에 중앙 정계를 장악했던 문관 귀족 계층으로, 고려의 건국 및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편입된 지방 호족이나 신라 후기의 6두품 계통의 유학자 가문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과거제와 음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중앙 정계에 관료를 배출하며 무신정변 전까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2. 정의

과거 시험을 통해서만 대를 이은 권력을 보장받을 수 있던 조선양반과는 달리, 과거에 더해서 음서, 공음전을 통해 부와 권력을 합법적으로 세습할 수 있었기 때문에[1] 이들을 신라나 기타 외국의 귀족들처럼 '귀족'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양반과는 구분하는 것이다.[2] 그 중에서도 역사학계에서 주목하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고관을 배출한 가문, 특히 5품 이상의 관료를 3대 이상 배출한 가문[3]을 문벌귀족으로 특정한다.

이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는 아직도 논쟁이 많다. 아래의 내용은 주로 귀족사회론의 주장으로, 이들은 고려를 신라의 관점에서 보아 귀족 중심의 폐쇄 사회로 본다.[4] 반면 관료사회론도 있는데, 이들은 고려를 조선의 관점에서 보면 음서, 공음전 등이 가진 세습적 기능은 과장되었고 사실은 비 문벌귀족에도 열려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유승원의 주장에 따르면 음서는 관리에 대한 일종의 보상, 공음전은 잠시 시행되었던 제도로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며 문벌 귀족도 약간의 이점만을 가진 집단이었다고 한다.[5] 음서, 공음전에 대한 해석도 어떤 이론을 따르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실제로 한국사 중등교육과정의 경우 2015 개정 교과서부터는 귀족이라는 단어는 빠지고 문벌이라는 단어로만 통용되고 있다. 일단은 모두 경험적 증거가 부족하기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6]

3. 흥성했던 배경

고려는 기본적으로 빠른 기간 내에 지방 호족들을 수십번의 정략결혼으로 묶어내고 협조를 받아 통일을 한 대가로[7] 초기 고려의 왕권은 강하지 않고 지방의 호족이 강성했다. 중앙집권적 국가라기보단 왕건이 군사력과 결혼정책으로 통합한 호족 연합 국가로 봐도 될 정도였다. 그러기에 각 태자의 어머니 호족가문별로 나뉘어 다툼과 권력쟁탈이 심해서, 혜종, 정종 시기에 혼란이 발생했고 광종 시기 호족들을 나름 억압/숙청을 해서 왕권을 세운다고 했지만 경종이 즉위하면서 과거 시험으로 새로 들어온 호족+기존 중앙정치에서 활동하던 호족들이 중앙의 관직과 결혼을 통해 하나가 되어 생긴 것이 문벌귀족[8][9]이다.

그들 입장에서 피바람이 몰아친 광종의 치세가 끝나고 경종이 즉위가 시작된 후 다시 권력을 되찾은 그들은 성종 시기 최승로의 5조 정적평, 시무 28조 같은 전대왕들의 비판 및 그들 중심 체제를 정당화, 수단화시키는 정책들을 내놓으면서 광종 시대를 비판하고 정권을 틀어쥔다.[10] 이들은 목종, 현종대의 혼란과 여요전쟁에도 굴하지 않고 권력을 지켜나가 덕종~정종 이후, 문종부터는 고려의 일부 시기를 빼고는[11] 무신정권이 일어날 때까지 모두 확고해진 문벌귀족이 왕권보다 강력히 득세하던 시대였다. 이렇듯 문벌귀족의 시초는 태조부터였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문벌귀족이 활개치는 시대는 정확히 말하면 문종부터인데, 왜냐하면 문벌귀족의 쌍칼 가운데 음서는 성종 대에 들어왔지만 공음전이 완벽하게 제도화되는 것이 경종, 현종을 거쳐서 문종 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정 관료 뿐 아니라 군사지휘권을 쥐고 나라를 다스렸다. 강동6주로 유명한 서희, 동북9성 윤관도 문관 시험을 통해 등용된 사람이다. 이것은 이전에도 있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실무는 무관들이 했다. 애시당초 어느정도 군사적 능력이 되는 문신을 지휘관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실전부대는 이들이 지휘했기 때문에 여요전쟁에서의 그 승리들이 온 것이다. 총사령관인 강감찬 같은 이들의 역할은 목표를 제시하며 자신들이 필요하다 싶은 영역에서 나서는 것이고(당장 진군로 상의 지방 유력자 같이 중앙군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선 전문직 계층보다는 중앙의 높으신 귀족의 한마디가 더 위력적이다.) 무관들은 이를 등에 업고 군 병력을 지휘 목표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더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 문관의 최고관직은 종1품 문하시중이다. 그런데 무관은 아무리 올라가도 정3품 상장군이 끝이었다.[12] 예를 들어서 강감찬의 경우는 귀주대첩 한참 전에 정2품 내사문하성 소속 내사시랑평장사를 거쳤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건 순수 무관으로서는 아무리 큰 공을 세우더라도 근접하는 것도 불가능한 직책이다.

어떻게 보면 광종 이후의 왕들은 평가가 대단히 어려운데, 왜냐하면 워낙 문벌의 세가 강해져서 왕들이 자의적으로 뭘 했는지 알아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종 이후에는 사실상 왕과 귀족의 연합정치라고 봐야 할 정도의 상황이 되며, 국왕들은 왕권 강화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실패한 경우가 많다. 경종대에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면서 토지 수조권을 지급받게 되면서 제도적으로 보장된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성종 시절 관제가 정비되면서 음서제를 비롯 여러 혜택들이 늘어나 이후 신라 6두품 출신이나[13] 경기 인근 호족 등에서 학문을 익힌 자들이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외의 지방 향리나 향, 소, 부곡 출신들도 원칙적으로는 과거에 응시하고 합격할 수는 있었으나 귀족과 좌주-문생 관계를 맺거나 혼맥에 끼지 못하면 요직에 오르기는 힘들었다. 또한 음서 출신으로 5품 이상 고위직에 올라 음서를 통해 지위를 세습하는 사람들도 조선에 비해 많았다. 그리고 시험관인 귀족 본인이 자신의 지인을 뽑기 쉬웠고, 좌주가 사학 출신인 경우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유리하였기에 과거도 귀족들에게 장악되어 갔다. 개경 사학들은 주로 귀족 자제들이 다녔고, 이러면서 국자감이 쇠퇴하여 문종이나 숙종, 예종 등의 국왕들은 국자감 중흥에 힘써 이를 억제하려 하였다. 예종대 한안인이나 인종대 묘청, 정지상 등이 향리 출신으로 국왕의 친위 세력이 되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귀족 세력에 밀려 살해되거나 숙청당하였고, 인종대 김부식, 윤언이 등을 중심으로 귀족 정치는 지속되었다.

반면에 아무 것도 안하고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 속에서 문벌귀족인 재상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구경만 하다 끝난 왕들도 몇몇 있는데, 역사를 기록한 이들이 결국 문벌귀족들이 속한 계층의 후계라 이런 왕들에 대한 평가가 괜찮게 나온다. 그 이유는 일단 역사를 기록한 이들도 문신이고, 현대인들이 강한 왕권을 긍정적인 현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과 달리 왕과 귀족의 공치라는 것은 조선시대 초기 사대부들과 사림들의 이상에 가까웠다. 애초에 문벌귀족과 고려 후기 사대부는 중간에 무신정권과 권문세족이라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세력들이 끼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상당히 연결고리가 강하다.[14] 문벌귀족들이 유학을 강조한 것도 그렇다. 시무 28조를 써서 올렸던 최승로라든지.[15]

4. 권력 기반

문벌귀족은 음서를 통해 권력을, 공음전을 통해 경제력을 세습하면서 성장하였고, 앞서 언급한 재상지종들은 왕족과 인척 관계를 맺으면서 그 특권을 공고히 했다. 특히 '이자겸의 난'으로 유명한 이자겸의 가문인 인천 이씨는 고려 문종 대부터 꾸준히 집안의 딸들을 왕비로 들이며 성장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당장 문종의 비 3명, 순종의 비 1명, 선종의 비 3명, 예종의 비 1명, 인종의 비 2명이 인천 이씨 가문에서 나왔다. 11대 문종부터 17대 인종까지 8명의 왕 중에서 인천 이씨 집안 딸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14대 헌종과 15대 숙종 2명 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가문들은 혼맥으로 이어져 있어서, 6촌 이내 결혼 금지령까지 나왔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자겸의 난 이후 문벌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묘청 등의 서경파를 중심으로 서경 천도 운동이 벌어졌다. 문벌귀족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기득권을 지키고자 당연히 서경으로의 천도를 반대했고, 처음에는 서경파의 손을 들어주던 인종이 마지막에는 결국 서경으로의 천도 계획을 취소하였다. 이에 서경파가 반발하며 벌어진 것이 '서경 천도 운동'이다. 그러나 이 난은 결국 문벌귀족의 대장이나 다름 없었던 경주 김씨 김부식에게 진압되며, 문벌귀족의 위치는 공고화 되는 듯 했다.

5. 몰락

시스템상 하극상이 일어나기 힘든 구조인 데다, 세습성과 진입 허들이 높다는 점으로 인해 아무리 늘어나는 것을 통제하려 해도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고 또한 땅을 주는 제도의 특성상 나중에는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 군인전의 몰수와 문/무관 간에 토지 지급량 차별화 등 무신들의 토지 등을 빼앗기도 했으며, 이런 상황속에서 국가의 토지는 점점 줄어들어 세수가 줄어들고 군대는 약해지고 중앙 정부의 영향력은 약해지면서 전국의 토지와 경제력은 점점 문벌 귀족 가문들 손에 들어갔으며, 문벌이 아닌 족벌과 지역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또한 그들간에도 더 많은 권력과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 그 과정에서 문벌귀족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등장했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문벌 귀족들에게 진압당한다.

거기에 숭문경무 정책으로 차별당하고 있는 판에 국자감 내의 강예재[16]를 폐지하는 등 계속되던 천대에 결국 무신들이 분노가 폭발하여 의종무신들의 난이 일어났고 이때 문벌귀족들은 상당수가 끔살되었다. 이때 문벌귀족들은 대타격을 입은 데다가 무신들이 재산을 마구 빼앗는 바람에 경제력도 크게 상실하였다.

하지만 무신들이 처음엔 문신들을 끌어내렸지만 살아남은 일부는 무신정권 시대에도 계속 근근히 명맥을 유지했고, 이의방이 죽고 정중부가 독주하게 되면서 문신들도 중용되기 시작했다.[17] 특히 이 때 무신들과 혼인을 맺어가면서 사실상 세를 유지했기에,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세를 유지하면서 몰락하지 않았다고 봐야한다. 최충헌의 우봉 최씨 집안의 경우 명문가였던 만큼 외척이었던 장흥 임씨[18]를 비롯한 여러 문벌가문과 혼인을 맺고 통교하면서 이들의 지지를 얻어 정국을 운영했으며 살아남은 귀족들은 특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19] 그러다가 무신정권이 몰락하면서 권문세족으로 변화한다. 이후 원 간섭기의 '재상지종' 가문들에도 다수가 전래의 문벌 가문들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 이후로도 명문가로서 세력을 유지했다. E.와그너 등의 미국 학자들은 이런 것을 들면서 조선의 사대부 계층이 고려의 양반 귀족들과 단절적이라는 한국 사학계의 기존 학설을 논박하기도 했다.

문벌귀족 입장에서는 엄청난 사태인 무신 집권 시대를 연 보현원의 난의 시발점이 된 사건 중 하나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정중부수염을 태운 것이었다. 어찌보면 자신들이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무신정변을 진압할 기회는 있었는데 만약에 김돈중이 감악산으로 가지 않고 황궁으로 가서 태자한테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진압하자고 했으면 무신정권은 탄생조차 못했을 것이다. 또한 개경의 문벌귀족들[20] 또한 살아남아서 그들이 계속 권력을 잡았을 것이고 무신정변은 정중부 또는 이의방의 난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6. 가문들

문벌귀족이 가장 득세했을 때에는 각자 자기 가문을 삼한갑족, 해동갑족, 대족, 대성(大姓)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딱히 특정된 분류나 명칭은 없었다. 고려 후기 충선왕은 동성금혼령을 선포하고 복위 교서엔 종친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으로 구성된 재상지종(宰相之宗)을 정했다.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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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규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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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집 증보문헌비고엔 류(柳), 이(李), 김(金), 최(崔)씨를 고려의 귀종(貴種)이라 했다.

이하는 문벌귀족 가문. 재상지종에도 속하는 10개 가문은 볼드체 표시.[21]

[1] 다만 고려 문벌귀족들이 과거시험을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과거 급제는 할 수 있으면 가능한 하려고 했다. 고려시대에도 조선처럼 음서를 개무시하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음서보단 과거시험 급제자를 더 좋게 쳐줬다. 그렇게 시도해보고 시험을 누대에 걸쳐 통과하지 못하면 조선 양반은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고려 문벌귀족은 정 안 되겠으면 음서를 써서 세습 가능한 것이다.[2] 사실 귀족은 후대에 유럽의 귀족 이론과 용어를 빌려서 붙인 것이다. 고려시대에 귀족이란 말이 쓰인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시에 '세족' 또는 '관롱집단', '문벌' 등의 표현을 썼다. 그 성격도 서양권의 귀족과 완전히 1:1 대응은 되지 않는 단어지만 최대한 비슷한 용법으로 쓰였다[3] 소수설에서는 2품 이상이라고 규정하나, 그렇게 따지면 너무 범위가 줄어드는 문제가 있다. 실제 관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단계(즉 1급 집단, 2급 집단)라는 설도 있다.[4] 물론 신라보다 그 폐쇄의 정도는 줄어들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정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체제라는 주장이다.[5] 유승원(1997), '고려사회를 귀족사회로 보아야 할 것인가', 역사비평, 봄호.[6] 이상은 모두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7] 후삼국시대가 사실상 후백제의 존속기간과 같기 때문에, 후백제의 건국으로 신라가 분열된지 약 36년만에 통일이 이뤄졌다.[8] 한자표기는 文閥貴族. 門閥貴族이라고도 하지만 공식적 표기는 文閥貴族이다.[9] 다만 문벌귀족을 형성한 사람들 대다수는 광종 때 과거에 급제를 한 사람들이 많거나 그 이전에 고려에 귀화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이들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 문벌귀족이다.[10] 그런데 광종을 비판한 이들 역시 대다수가 광종 때 문과에 급제했거나 광종 때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사실 광종 때는 서경 쪽의 호족들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신라의 6두품 출신들도 새로운 개경 세력이 되어서 정권을 잡았지만 당시 정권을 잡은 개경세력의 실세는 쌍기 등의 귀화인이었다. 그리고 신라의 6두품 출신들 역시 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일조했지만 광종의 호족 숙청 당시 최행귀 등이 죽으면서 피해를 입었다.[11] 숙종에서 예종에 이르는 시기는 고려사에서 광종 집권시기와 더불어서 보기 드물게 왕권이 강하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빼야한다.[12] 심지어 문관들이 상장군, 대장군, 장군, 중랑장, 낭장을 차지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13] 그래서 고려시대 문벌귀족들은 그들의 대선배라고 할 수 있는 설총, 최치원을 고려의 후작으로 추증하고 문묘에 종사하였다.[14] 다만 문벌귀족과 권문세족,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연결고리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1 #2[15] 알고 보면 문벌귀족은 관료 출신이나 학자 출신이 많았다는 거다.[16] 무학재로 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무신 교육기관으로 봐도 무방하다.[17] 정중부는 문신들을 일부만 죽이고 대부분 살려두자는 온건파였고, 이의방은 문신들을 몰살하자는 강경파였으며 대다수의 문신들은 이의방 일파의 손에 살해됐다.[18] 인종의 왕후인 공예태후의 가문.[19] 이의방과 이의민과는 달리 정중부, 경대승, 최충헌 모두 문신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벌귀족들의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20] 무신정변으로 완전히 멸족되어버린 문벌귀족 가문도 포함[21] 순서는 서열과 관계 없음.[22] 신라 왕족 가문이다. 몽골의 침입 때 경주 김씨에서 전주 김씨가 분적하였다. 전주 김씨는 충렬왕의 외척 가문으로 김봉모의 장남 김태서를 시조로 한다. 김태서의 장남은 김약선으로 원종의 장인이고, 차남은 김기손, 3남은 김경손이다.[23] 조선 연산군임사홍의 풍천 임씨 가문과 한자는 같지만 본관이 다르다. 무인시대 드라마에도 나온 공예태후 임씨의 가문으로, 고려 의종, 명종, 신종의 외가이다. 무신정권기 전에 활동했던 임원후 때 번성했으나 의종이 외척들을 배척하면서 기세가 한풀 꺾였다.[24] 고려시대 귀족 가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이다. 역사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인물인 이자겸의 가문이다. 고려 문종 이래 100여년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세 가문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많은 왕비를 배출 한 가문이기도 하다.[25] 고려 현종의 장인인 김은부의 가문. 그런데 그 위상이 김은부의 처가인 인천 이씨 가문으로 바톤 터치 되면서 다소 사그라든 위세. 인천 이씨와 더불어 고려시대에 많이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다. 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가 안산 김씨 가문이다.[26] 인천 이씨 시조 이허겸의 사위. 훗날 그의 아내의 조카인 인천 이씨의 이자연이 김은부의 정략결혼을 그대로 벤치마킹한다.[27] 딱 100년에 걸친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홍규(초명은 홍문계)의 가문이다. 홍규는 원래 임연의 사위였다가, 1270년 거사 이후 재혼한 듯하다. 홍규와 부인 광산 김씨 사이에서 명덕태후[33]가 태어났다.[28] 조선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 한 가문이다. 무려 다섯이 파평윤씨 가문 출신이다. 모두 윤관의 직계후손들이다. 고려시대 당시 타 가문들과 달리 자주적 정신을 지향했다고 한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2005, pp. 391-392[29] 인천 이씨 이자겸의 처가이며, 최온의 후손인 최사추의 딸이 인천 이씨 가문에 출가하여 문경태후를 낳기도 하였다. 문경태후는 후에 인종을 낳게 된다. 인천 이씨 가문과 더불어 역사 교과서에 항상 실리는 문헌공 최충의 가문이다[30] 현재의 동주 최씨.[31]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유명한 그 최영 맞다. 하지만 실은 이 말은 최영 장군이 말한 것이 아니라 최영 장군의 아버지의 유언이다.[32] 현재 양천 허씨.


[33] 공민왕의 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