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18:27:18

전시과

1. 개요2. 내용3. 변천사4. 문제점과 쇠퇴5. 의의6. 지급된 토지의 종류

1. 개요



고려시대에 실시되었던 토지제도로, 직역하면 '밭(田)과 땔감(柴)을 나눠주는 규정(科)'이라는 뜻이다.

문무 양반 관료들 및 병사 등 직역 부담자들에게 일정한 토지의 세금징수권을 나눠줘서 급여로 삼는 규정이었다. 조선시대과전법과 유사하나, 과전법은 경기 일대로 한정했으나 전시과는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그리고 전지(田地)[1]만 주어지는 과전법과 달리 전시과는 시지(柴地)[2]가 주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2. 내용

문무 관료에게 나눠주어 급여로 삼는 규정이라고 써놓으니 관료가 된 사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 같지만, 실제로는 고려호족들의 연합체로 시작한 국가로써 후삼국 분열기 동안 생겨난 호족들을 제거할 수 없었다. 때문에 호족 군벌에서 고려 귀족으로 전직(?)한 이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그대로 보존해줄 필요가 있었는데, 그 결과 나온 것이 이 전시과 제도다.

전시과는 국가에서 땅을 나눠준게 아니라, 기존 호족들이 각지에서 점령하여 가지고 있던 영지를 그대로 전시과로 설정했다. 그리고 그 호족을 그대로 관료로 임명해서 가지고 있던 영지를 전시과로 지급하는 것이다. 즉, 실질적인 토지의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지방에 자기 영지를 가지고 있던 호족은 그대로 중앙 정계로 진출해서 관료가 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관료제에 편입된 귀족들은 죽으면 전시과를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려의 관료제는 음서를 통한 세습이 매우 많았으며, 전시를 세습하는 제도들도 열려 있었기 때문에 전시 역시 세습되기 쉬웠다.

관료의 급여 말고도 각 지역의 관청에도 공해전(公廨田)과 공수시지(公須柴地)가 설정되어서 관청의 행정비용을 처리하는데 사용되었다.

3. 변천사

전시과 제도의 시작은 경종 1년(976년)에 제정된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이다. 이 시정전시과는 기존 호족들과의 타협과 그들을 중앙정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 사용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실직을 맡은 직관(職官) 외에도 명목 상의 관직만 있고 실제 업무는 없는 산관(散官)들에게도 전시과를 지급했으며, 인품(人品)이라는 모호한 기준에 따라서도 전시를 지급했다. 이런 복잡한 제도로 그들의 영지를 그대로 보존해줬다.

목종 1년(998년)에 전시과가 개정되는데, 실제 관직을 중심으로 18등급으로 구분하여 토지를 지급하는 체제가 구축되었다. 또한 마군(馬軍)이나 보군(步軍) 같은 병사들에게도 군인전(軍人田)을 지급하였다. 인품 기준은 삭제되었고, 산관들의 경우 직관에 비해 몇 등급 낮게 전시를 지급하였다. 또 유외잡직(流外雜職)이라고 하여 서리, 아전들에게도 전시를 지급하였다. 관료제가 더욱 공고해졌고, 지방의 소규모 토호인 서리 아전들 역시 국역으로 끌어들이는 조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라고 부른다.

다음 개정은 덕종 3년(1034년)이었다. 하지만 상세한 사항이 전해지지 않고 어차피 최종개정은 아닌 덕에 별달리 다뤄지지는 않는다(...).

전시과의 마지막 개정은 문종 30년(1076년)의 경정전시과(更定田柴科)이다. 개정전시과와 개정 방향성은 유사하다. 산관들에 대한 전시 지급이 아예 사라졌고, 한인(閑人)과 잡류(雜類)라는 직분[3]에 대해서도 전시를 지급하게 되었다. 향직(鄕職) 들에 대해서도 전시를 지급하게 된다.

4. 문제점과 쇠퇴

고려의 귀족사회는 전시과의 세습을 끝없이 요구했고, 공음전시(功蔭田柴)와 구분전(口分田)이라고 하여 세습이 가능한 전시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 겹쳐 점점 더 많은 인구를 명목상의 관료계급에 편입하고 전시과에 편입하다보니, 전시는 순식간에 고갈되었다. 그 결과 이미 전시과로 설정된 땅에 또 전시가 설정되어서 한 땅에 여러명의 관료가 수조를 해가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한 토지에 5~6명의 주인과 한 해에 5~6번 거두는 것에 곤란을 겪게 되니, 부모는 얼고 굶주려도 봉양할 수 없고, 아내와 자식은 헤어져 흩어져도 보전할 수 없습니다. 어디다 호소할 곳이 없어 유망하게 되니, 호구(戶口)가 하나같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고려사> 녹과전 中
한 토지에서의 징수가 이에 두세 번에 이르러 민(民)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나, 나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원통함과 분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고려사> 전시과 中
하나의 토지[田]에 2~3명의 주인이 있어 각각 그 조(租)를 징수하여 민심을 해치고 있는데, 소재지의 관청과 안렴(按廉)이나 찰방(察訪)이 꾸짖어 금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슬프게도 이 외로운 사람들이 누구에게 의지하며 또 누가 이들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고려사> 권근의 상소 中
전지(田地)에서 조(租)를 거두는 사람들이 매년 한 토지에서 4~5번 거두어, 백성(百姓)들로 하여금 생업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한 것이 자못 많습니다. -<고려사> 정리도감의 건의서 中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이 되었냐 하면, 그냥 해결이 안됐다. 안된채로 고려는 반신불수 같은 토지 제도로 300여년을 계속 가다가 망했다. 1076년 마지막 개정에서 1170년 무신정권이 열리기까지 94년 동안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가 무신정권이 열리고 나선 아예 권력자들의 토지 탈점과 농장 형성 등으로 전시과를 통한 토지제도 운용 자체가 형해화 된다. 게다가 몽골 제국의 침입까지 겹쳐 결국 전시과는 그런게 있었지 수준으로 전락하고 고려는 그냥 이렇다할만한 수조와 봉급 제도 하나 없이 유력자들이 사병으로 얼렁뚱땅 굴러가는 나라가 된다. 그러다가 함경도를 영지로 가진 군벌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을 세우게 된다.

5. 의의

초기의 전시과는 기존 호족층을 포섭하기 위한, 형식으로는 왕이 주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존 호족층의 영지를 그대로 보장하는 제도로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 전시과, 음서제를 통해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세습하여 고려 특유의 귀족제사회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나마 나라의 모든 토지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하여 왕 직할 토지, 즉 공전의 확장이 가능했다. 또 고려 시대에 정비된 관료제 하에, 중앙 집권이 점차 강화되며 사전을 보유하던 귀족층의 자리는 점점 좁아져 갔다.

비교사적으로는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유사하다. 직분을 맡은 인물에게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지급하여 봉급으로 삼는다는 개념과, 그것이 실제로는 위에서 아래로 분배하는 것이 아닌 이미 지방에 실질적으로 세력이 있는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분배한다는 점에서 매우 닮았다.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론을 따른다면 고려를 중세로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서유럽의 봉건제는 영주가 법적으로 토지를 소유하며 직접 지배관리경영했으며 농노 사이에 사적인 지배 예속 관계가 성립하지만, 고려의 전시과는 수조지를 법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국가의 전조를 일정 기간 취득할 뿐이라는 점에서 달라 유럽의 봉건제적인 영주로 보면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봉건제 항목에서도 쓰여 있지만 유럽의 봉건제 상에서도 법적으로는 관료로써 농민을 사적 예속 관계가 아닌 국가 공법 상으로 지배한 경우(백작)이나, 명목상의 토지 소유권자는 국왕으로 각지의 영주는 명목상 토지대여자인 경우(노르만 영국)등 지역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다른 일이 많았기 때문에 무조건 다르다고 할 일도 아니다.

게다가 고려는 농민층이 분화되지 않고 공동체 사회로 존재했으며, 토지의 소유권 개념이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각 농민 하나하나가 땅문서를 가지고 여긴 내 땅 저긴 네 땅 하고 나누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작 신라 시대 비문이나 토지 문서에는 이런 개념이 있었던걸로 보이는데 고려 시대에는 그런 증거가 없다(...). 결국 소유권과 수조권을 철저히 나눠 구분해서 영주가 아니라 관료라는 주장을 하기에는, 전제가 될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 개념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며,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개념이 형해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고려시대에는 후기로 갈수록 관료들이 받은 전시를 사적 소유지라는 뜻의 사전(私田)이라고 부르고 수조를 해가는 관료를 전주(田主)라고 불렀다. 전시과는 실질적으로 귀족들의 개인 보유 영지가 되어 갔으며, 토지를 사유한 농민들에게서 수조권을 가지는게 아니라 다만 (현대적인 개념들로 서술하자면)국가로부터 면세를 받은 대규모 토지 보유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6. 지급된 토지의 종류

  • 과전: 문무관리에게 역의 대가로 지급한 토지. 수조권만 받는 토지로 지급받은 관리가 죽으면 국가에 반납하는 게 원칙이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 구분전: 하급관리, 또는 군인의 유가족에게 생계유지를 위해 지급한 토지.
  • 한인전: 6품 이하의 하급관리 자제들 중 관직에 나가지 못한 자들에게 지급해 준 토지. 지급 결수는 17결.
  • 공음전: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지급해 준 토지. 세습이 가능한 영업전에 속하며 2분의 1세를 징수했다.
  • 공전: 국가가 수조권을 갖는 토지로, 경작하는 농민들은 4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 관청의 비용 충당을 위한 공해전, 왕실경비를 충당하는 내장전, 왕자와 왕족에게 지급되었던 궁원전, 학교 경비 충당을 위한 학전, 국경지대 군대의 경비 충당을 위한 둔전이 있었다.
  • 사원전: 절에 지급하는 토지로 면세를 받았다.
  • 외역전: 지방의 향리들에게 지급하던 토지로 향직이 세습되므로 사실상 세습되는 토지였다.
  • 군인전: 중앙군인 2군 6위에 근무하는 직업군인에게 지급한 토지. 자손이 군역을 세습할 경우에만 세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에 반납하고 구분전을 지급했다.
  • 별사전: 승려나 지관 개인에게 지급된 토지.
  • 식읍: 보너스 개념의 수조권인데 식읍에는 지역 노동력 징발권까지 있었다. 워낙 어마어마한 권한이기에 전시과 시행 이후에는 어지간한 공신, 실권자가 아닌 이상에야 받은 적이 없다.

[1]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2] 땔감을 얻을 수 있는 땅. 즉, 산(山)을 의미한다.[3] 두 직분이 정확히 무슨 직분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견해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