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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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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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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의 알카사르[1]마상창시합을 담은 그림
언어별 명칭
영어 Middle Ages, Medi(a)eval Period
그리스어 Μεσαίωνας
네덜란드어 Middeleeuwen
노르웨이어 Middelalderen
독일어 das Mittelalter
덴마크어 Middelalderen
라트비아어 Viduslaiki
라틴어 Medii Aevi
러시아어 Средний возраст
루마니아어 Evul mediu
룩셈부르크어 Mëttelalter
리투아니아어 Viduramžiai
이탈리아어 Medio evo
프랑스어 Moyen Âge
스페인어 edad media, tiempo medieval
한자 中世

1. 개요2. 정의와 범주3. 유럽의 중세
3.1. 시대적 구분3.2. 시대상
3.2.1. 배경3.2.2. 농업3.2.3. 경제3.2.4. 정치3.2.5. 관직과 행정3.2.6. 문화
3.2.6.1. 문학3.2.6.2. 복식3.2.6.3. 식문화3.2.6.4. 건축3.2.6.5. 유희3.2.6.6. 음악
3.2.7. 교육 및 학문3.2.8. 사회3.2.9. 의학과 위생3.2.10. 과학 기술
3.3. '암흑시대'라는 오해와 반론3.4. 참고 자료3.5. 관련 요소3.6.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
3.6.1. 기사문학3.6.2. 중세 판타지?3.6.3. 라이트 노벨3.6.4. 문학3.6.5. 영화3.6.6. 게임3.6.7. 애니메이션3.6.8. 드라마
4. 유럽 밖의 중세
4.1. 동아시아의 '중세' 개념 대입 시도 및 관련 논쟁
4.1.1. 한국사의 경우
4.2. 기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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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middle age)는 유럽사에서 고대근대의 사이의 시기를 가리킨다.

학문적으로는 일반적으로 5세기부터 15세기를 의미하지만, 여타 다른 시대구분과 마찬가지로 중세시대에 관해 학자마다 의견이 다소 갈린다(하술 참조). 중세를 다시 중세 전기/중세 과도기/중세 말기로 구분하기도 하며, 중세의 다음 시기를 지칭하는데 근대 초기를 대체하여 근세가 쓰이기도 한다.[2] 고대-중세-근대-현대로 이어지는 시대 구분론은 대중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동양사에 기계적으로 대응시키기는 어렵고, 아예 학계에서는 유럽 이외에 중세의 개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3](→ '정의와 범주' 문단 참고).

2. 정의와 범주

흔히 알려진 'Medieval Age(Era)' 혹은 'Middle Age'는 18세기 무렵부터 유럽의 지식인층이 역사 구분을 하면서 나온 개념이다. 이들에게 회고가 가능한 가장 오래된 시기이자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시기는 그리스-로마 시대(특히 고전시대)였고, 반대편의 끝에 있는 것은 르네상스 혹은 17세기 이후 근대 국가가 성립하면서 나타난 'Modern Age'(지금은 '근대'로 번역하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현대')[4]였다. 따라서 그리스-로마 시대를 '고대', 르네상스 혹은 17세기 이후를 '근대'라고 지칭하고, 그 나머지 가운데를 '중세'로 뭉뚱그린 것이다. 이 때문에 중세의 특징은 사실상 확실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며, 시대별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멈췄으면 '고대', '중세', '근대'는 매우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남았겠지만, 18세기는 근대인, 특히 계몽주의 지식인이 보기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미신적 요소와 비합리적 관행이 아직 남아 있는 시대였다. 이 때문에 계몽주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그러한 미신과 비합리성의 기원이라고 믿어졌던 중세를 멸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이런 시각은 현재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다.[5] 후술하겠지만 이는 시대별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닌 것도 많으므로 비판적 수용이 필요한 관점이며, 단순히 기계적인 구분을 위한 '중세' 용어의 사용과 시대상을 평가하려는 가치를 담은 '중세'라는 용어가 혼재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대', '중세', '근대'의 구분은 서구권에서 비유럽 지역을 정복하고 종속시키면서 보편적인 역사 구분으로 퍼져 나갔고, 특히 카를 마르크스의 5시대 발전론(원시 공산주의 시대-고대 노예제-중세 농노제-근대 자본주의-미래의 공산주의 사회)과 사회진화론(그것이 계몽주의적인 형태이든, 제국주의적인 형태이든)이 퍼져 나가면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그 개념을 받아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국사중국사 등, 비유럽권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 혹은 그에 비견할 만한 집권 세력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럽의 '고대'와 '근대'에 비견할 만한 시대가 합의되지 못한 채 강제된 서구식의 근대를 맞이하였다. 따라서 '고대'-'중세'-'근대'의 개념에 대해서는 탈근대 움직임이 대두하는 1970~1990년대까지도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현재 그러한 시대 구분법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시되면서 시대 구분 자체에 염증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학자도 늘어났지만, 반대로 세계사적인 관점의 설명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고전후 시대라는 표현이 제안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편의상 중세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한국중세사학회의 구분을 본다면 고려를 중세사로 다루고 있다. 중국에서는 진시황에서 시작되는 통일제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위진남북조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오호십육국·남북조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수당 제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당말송초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등등 수많은 의견이 분분하다.[6] 그러나 어느 쪽이든, 현재 사학계에서 유럽식의 중세(Medieval Age/Era)와 비유럽 지역의 편의상의 '중세'가 마르크스 등의 주장처럼 같은 사회문화사적 기반을 두지 않는다는 점은 대체로 합의가 되어 있다.

3. 유럽의 중세

엄밀히는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지만, 일반적인 중세 유럽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 이로 인한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에 따라 상업과 교통, 그리고 경제적 의미의 도시가 붕괴하면서 농업이 중시되기 시작하고, 통일적이었던 서유럽의 고대사회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폐쇄적 자급자족 체제로 전환된다.
  • 이민족으로부터 자기 방어 능력을 갖춘 기사 등이 영주로 등장했다. 이들은 상위의 계층에 대해 쌍무적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장원이라는 자급자족적 단위를 거느리면서 유럽 내에서 분권적인 질서를 구축한다.
  • 장원의 아래에 고대의 노예나 소농 등이 특정 지역에 묶이면서 만들어진 농노 계층이 등장하게 된다.
  • 교황권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게르만족들을 포교함으로써 결국 교황이 서유럽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파일:external/imagecache5d.allposters.com/13-1353-DUYS000Z.jpg

    교황 레오 3세카롤루스 대제 대관식

    여기에 힘입어 한때 교황이 직접 서유럽의 황제를 임명하는 사건까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이 출현하게 되었고 서방교회의 수장인 교황과 동방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의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그 결과로 동서 교회 대분열이 일어나 서유럽은 교황청 중심의 가톨릭, 동유럽은 동로마 제국과 개별 국가체제에 밀착한 정교회로 분리되게 된다.
  • 흑사병의 창궐로 유럽의 인구가 대폭 감소하여 노동력이 중요해지면서 농노들의 자치가 인정되었고 이로 인해 장원이 붕괴되고 도시가 부활하게 된다.
  •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서유럽의 국가들은 보다 중앙 집권적인 왕권의 확립 등으로 동로마 제국이 중심이 되는 구도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어 십자군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아비뇽 유수로 교황권도 서서히 몰락하고, 마침내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하면서 서유럽에 비해 인본주의가 싹튼 선진문화인 비잔틴 문화는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를 꽃피움으로써 중세는 해체 국면을 맞게 된다.[7]
  • 과학의 발달과 아메리카의 발견 등으로 기존의 신학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중세 질서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절대 교황권' 또한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 더는 존재할 수 없는 과거의 관념으로만 남게 되었다.

위 사례들은 우리들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이미지이긴 하나, 중세 1000년에 걸쳐 일어난 일들 중 몇몇 사건들만을 추려낸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중세를 이해하거나 특징을 추려내는 건 힘들다. 예를 들어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과 황제의 대립 중 일부분에 불과하며, 유명한 십자군 전쟁조차 200년에 걸쳐 10차례 벌어졌고 그 양상도 제각각 달랐다. 중세 초기인 400년대의 유럽과 비교해서 말기인 1400년까지 갈 것도 없이 중세 중기인 1000년대까지만 와도 아예 시대 상황이 딴판이 되는지라, 이 시기를 뭉퉁그려 중세라 칭하는 것에 대한 회의도 생겨나는 판이다.

비교하자면, 유럽의 중세 초기에 백제신라가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중세 말기는 여말선초 시대와 대략적으로 겹친다. 이렇게 광범위한 시대를 '중세'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고대 역시 굉장히 광범위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고대 오리엔트,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를 따로 인식하는 편이다. 이와 비교할 시 중세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3.1. 시대적 구분

유럽에서의 중세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대체로 476년부터 1453년이나 1492년이라는 의견이 대세이긴 하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담론이 등장하면서는 중세의 시기에 대해서도, 그리고 중세의 성격과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략적으로 중세의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다만, 요즈음의 역사에서의 시대구분은 시대구분이 상당히 자의적이라는 비판에 의해 시대구분을 역사가의 소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즉, '어제까지는 고대였지만 오늘부터는 중세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세를 정확히 어느 시점이 시작점이고 어느 시점이 끝나는 지점인지에 대한 담론은 크게 유의미하지 않다.

다만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기독교 문화로 전환되어가는 4~5세기의 일련의 과정을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것으로, 중세 온난기가 끝나고 소빙하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의 흑사병, 오스만 제국의 발호, 르네상스, 신대륙 발견 등의 14~15세기 간의 일련의 사건들을 중세에서 근대 내지는 근세로 넘어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단지 그 구체적 기준을 잡는 것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 '중세' 담론이 가장 뚜렷한 유럽 역사에서도 중세의 시작과 끝을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이미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전부터 이미 로마와 게르만족의 문화는 뒤섞이고 있었고, 중세에 게르만족에 의해 나타났다고 여겨졌던 요소들이 (주로 프랑스 아날 학파 사학자들의) 최근 연구로 고대 로마에도 존재했었고 그것이 게르만족만의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굳이 시작을 말하자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황제를 몰아내고 동로마에 서로마 황제의 휘장을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본다.

중세는 1000년에 가까운 긴 세월이라 요즘에는 중세를 다시 구분해 크게 초기, 중기(전성기), 말기로 보고 있다. 이는 중세라는 시대가 변화하지 않았던 고정의 시대라는 관념을 타파하고, 역사상의 변화라는 것이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급격히 변하여 시대가 어느 순간 바뀌기 시작한다는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 중세 말기(Late Middle Ages)
    보통 14세기 초부터 15세기 말까지를 잡는다.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이 몰락하여 오스만 제국의 성장과 더불어 사실상 도시국가로 전락하고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곧 그리스도교 세계의 위기감을 조성하였고 그 대상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무역금지를 조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 위해 대항해시대가 도래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인본주의가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되었다. 한편 서유럽에서는 프랑스 왕국에 대한 잉글랜드 왕국이 왕위 계승 문제를 대두하여 백년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결과는 프랑스 왕국의 승리로 프랑스 왕국이 강대국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며 또한 프랑스 왕의 권력이 상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년전쟁이 발생하기도 전인 1309년에 아비뇽 유수가 발생하여 교황권이 약화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초기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중심으로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에게 빼앗긴 그리스도교 세계를 되찾는 다는 목적의 레콩키스타가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국가였던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이 혼인동맹을 맺고 이후 두 국가가 동군연합으로 묶여져 새로운 강대국스페인 왕국이 등장함과 더불어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농민에 대한 탄압과 더불어 성직자의 부패로 인해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되고 이 여파로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내부분열이 일어나 황제 중심의 가톨릭vs개신교 선제후국을 중심의 연합으로 분열하게 된다. 황제의 처신을 통해 제국은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사실상 황제가 제국 내의 일부 권역에서 세력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

3.2. 시대상

3.2.1. 배경

기원후 2세기 말부터 로마 제국의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사후에 두 세기를 지켜온 안정과 평화는 정치적 혼란, 내전, 도시의 쇠퇴, 이로 인한 경제파탄에 자리를 내주었다. 제국의 변경에서 250년경부터 시작된 이민족의 공격과 침입은 또다른 위험이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정치와 경제는 활력을 잃었으며 생활수준도 전반적으로 열악해졌다. 상류계급의 생활수준은 특히 현저하게 낮아졌다. 경제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노예노동의 부적절한 공급과 역병, 전쟁, 출산율 하락에 기인하는 전반적인 인구감소였다. 경제상황의 악화는 진지한 학문연구에 절대전제조건인 여가를 빼앗아버렸다. 로마제국의 서부지역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부의 학문과 동부의 학문 사이에 교류가 점차 감소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3세기 말과 4세기에 로마제국은 행정적으로 동부와 서부로 양분되었으며, 두 지역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서부의 라틴 세계는 더이상 예전처럼 활기차게 동부의 그리스 세계와 교류 할 수 없게 되었다.

3세기 때의 이러한 위기로 말미암아 로마 서부 지역은 급격히 황폐화되었다. 이미 제국의 경제적 중심지는 동부의 그리스, 오리엔트였으며 이들 지역을 속주로 보유한 동로마 제국은 풍요로운 경제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비교적 수월하게 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반면 서로마 제국은 경제파탄, 내전, 야만족의 침략 등으로 인해 완전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동서제국 분할 이후의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로 몰려 있었다.

이 와중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것은 야만족들의 침략이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대부터 시작된 야만족들의 침략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전부터 끊임없이 제국의 국경선을 침략하던 게르만족은 말할 것도 없고 훈족까지 침략해 제국 내부를 마구 유린하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의 지원을 얻기도 하고 야만족들과 연합하기도 하는 등 이 상황을 타개해 보기 위해 나름 노력했으나 이미 흘러간 대세를 다시 바꾸기는 어려웠다. 급기야 게르만족은 로마의 영토를 차지해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5세기 초 서로마의 속주인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지방에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수에비족, 고트족, 앵글로색슨족, 반달족 등이 잇달아 침략해 정착함에 따라 서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일대만을 다스리는 미약한 정권으로 몰락했다.

결국 서기 476년 게르만족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서로마를 멸망시켰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서유럽 세계에는 여러 게르만족 국가들이 들어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3.2.2. 농업

중세 초기의 경우 로마 제국 때 이룩한 농경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지만, 6세기경부터 서서히 농경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 기술 항목에 카루카라는 신식 쟁기가 북유럽에서 처음 발명된 것과 마구가 개량된 것이 바로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였다, 그리고 게르만족들이 실시하고 있던 개방경지제가 보편화되고 있었으며, 1000년경 중기 이후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 인구가 급증했고, 상업이 부활해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이루어져, 본격적인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형성되었다.[14] 이 생산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그 이전 로마 시대보다 더 증산된 생산량이었다.[15] 그러나 중세 후반에는 흑사병의 타격에 의하여 인구가 감소했다.

중세 시대에 곡물생산량이 증대된 것은 2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수도원 운동으로 인해 각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농지개량법을 연구하여 보급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로마 시대 이후 2번째로 급격한 기온상승이 일어나 서유럽 전역에서 곡물재배가 활발해졌던 것이다. 아예 그린란드에서는 무려 7세기 초까지 밀을 길렀다.

하지만 후기에 기온이 떨어지면서 극단적 기근이 찾아온다. 페스트와 더불어서 당시 유럽 인구의 태반을 날려버린 계기가 되는데, 전반적으로 남부와 중남부가 페스트의 영향이 강했다면 그 위로는 대기근의 영향이 더 강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생산량이 줄어드는 2가지 이유는, 온도 하락과 함께 인구 격감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앞서 언급된 농업 기술력 발달이다. 그래서 중세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1~13세기 사이 유럽인들의 유골을 분석해보면, 오히려 중세 후반인 14세기 이후의 사람들보다 영양상태와 체격조건이 좋았다고 한다.

페스트가 지난 후의 후유증은 농업 방식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인구수가 줄면서 자연스럽게 죽은 자들의 재산들이 전부 산자들의 몫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1인당 농경지의 비율도 증가하게 되는데, 추수기가 되면 더 넓어진 농경지의 곡식을 빨리 추수해야 했기에 기존의 남성 인력들만으로 감당이 되지 않자 여성들도 추수 작업에 동참했다. 남성들이 큰 낫을 휘둘러 추수 작업을 시작하면 여성들이 미처 추수되지 못한 곡식들을 작은 낫으로 마저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참고로 이 시기에 서유럽과 북유럽 일대를 중심으로 목축업이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12세기가 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키울 수 있는 가축의 수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 애당초 기후 자체가 지중해성 기후였던 남유럽 지역과는 달리 나머지 지역들은 서안 해양성 기후냉대 습윤 기후이기에 목축업에 유리한 면이 있었고, 특히 서유럽의 경우 근대를 거치면서 낙농업이 발달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특히 14세기가 되면서 발트해 연안에서 대량으로 곡식들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곡식의 공급이 과잉이 되면서 목축업의 비율이 증가하게 된다.

3.2.3. 경제

상업적인 측면에선 서로마 제국 말기의 상황보다 더 나빠졌다. 특히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었고, 서로마 제국의 경우 아예 이민족들에 의해 영토가 점차 점령당하다가 결국 망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동로마 제국의 경우 어느 정도 혼란기를 넘길 찰나에 이슬람의 발호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이슬람 해적들이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이 파급은 서유럽에까지 미쳐 무역이 중단되다시피 했으며, 나중엔 바이킹 같은 해적들 때문에 더 막장이 되었다.[16]

더구나 서유럽의 경우 별로 좋을 게 없었다. 단적으로, 지방 영주들은 지방 간 무역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무역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라기보다 경쟁자를 자신의 영토의 특산으로 부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17], 지방 간 이동할 통로에 관문을 빽빽히 설치해서 세금을 장난 아니게 때렸다. 이로써 지방 간 무역이 수축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화폐의 가치가 하락한 것도 한몫했다.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한 것도 있지만 로마시대 때부터 꾸준히 사용되어 온 데나리(denarii)의 은 함유량이 점차적으로 떨어지다가 14세기 즈음 가면 구리 화폐가 되어버렸다. 화폐의 은함유량은 해당 화폐의 신뢰성을 뜻하는 것인데 로마시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신뢰할 만했던 것이 종래에는 도저히 은화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경까지 가버린 것이다. 이것이 결국 상업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때문에 이 화폐도 결국 그나마 남아있던 교역이나 급료 지불 등 제한적이게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역이나 상업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흔히 무시되던 중세 초기에도 지중해 지역 내의 무역망은 소멸하지는 않았다. 주교구를 중심으로 대도시 자치 공동체가 생성된 이탈리아 지역은 도시로써 기능을 유지한 곳이 많았고, 이들은 이슬람과의 지중해 무역을 지속하여 미약하게나마 수출로 유럽으로 금을 유입시키거나 반대로 이슬람의 사치품을 수입해왔다.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이 있던 아헨과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잠시 교류하기도 했다. 파피루스도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재배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세의 전성기인 12세기에 이르면 자치 공동체인 코뮌들이 들어선 도시들을 중심으로 상업이 화려하게 부활한다. 특히 저지대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목류는 북유럽,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에 수출되면서 북유럽의 원자재, 이슬람의 금과 사치품을 서유럽으로 유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신성로마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 과정에서 알프스를 넘나드는 도로가 개척되어서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북 지역의 무역로인 소금길과 상파뉴 무역로가 생겨난다. 이를 통해 도시의 실권을 장악한 상공 엘리트가 '부르주아'로 성장하였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도시문화와 학문을 꽃피웠다. 이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12세기 르네상스'. 소금길, 길드의 탄생, 원격지 무역의 발달이 대두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들은 12세기 이후 유럽의 경제발전을 '상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 북이탈리아, 보르도, 플랑드르 등 상업이 극히 발달한 지역은 이미 지역 내 자체 생산되는 식량으로는 도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해서 국제 교역망의 식량 수입에 의존해야했다. 보르도의 경우 포도주 제조를 위한 포도 플렌테이션이 생겨 자체 식량 생산은 거의 없었다.

14세기 초 흑사병 대유행을 지나 중세 말기가 되자, 유럽의 상업은 더욱 발전한다. 농업용 토지의 개발과 경영도 소유자와 경영자가 분리되는 기업형 영농이 출현했고, 광업과 제조업 분야 역시 기업형 조직에 의해 관리된다.

상업이 발전하고 화폐 경제가 살아나자 세금도 부활했다. 봉건주의의 관습 아래에서 세금은 토지세보다는 간접세 위주로 발전했는데, 그 덕분에 창문, 화로, 문짝, 신발, 술, , 우물, 결혼 등 세금을 때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18] 대개 평민들은 수입의 절반이 이런저런 이유로 세금으로 걷혔다.

귀족들은 평상시에 세금을 안 냈는데, 사실 정작 중세 동안에는 북유럽을 제외하고는 귀족에 대한 면세 특권 자체는 없었다. 게르만의 관습 상 토지를 보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세금이란 토지세가 아니라 병역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만이 아니라 자유민들도 토지 보유에 대한 직접적인 세금은 없고, 병역과 노동력을 통한 부역이 직접적인 의무였다.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서 유력자들에게 의탁한 농노들이나 현물이나 공조를 통한 세금이 존재했다. 따라서 귀족이 세금을 안냈다고 말하기보다는, 애초에 유럽에서는 토지에 대한 직접세 개념이 희박했으며, 귀족이 담당한 의무는 참전의 의무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때문에 잉글랜드 같이 전국적인 토지세가 일찍부터 도입된 지역이 아니라면 왕이나 황제조차도 다른 유력 영주 제후보다 특별히 경제적 우위를 가지긴 어려웠고, 직할령의 농노들에서 걷은 세금이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교회에서 걷은 십일조를 자신의 금고에 넣어서 돈을 확보했다.

교회의 경우는 영주나 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고, 위에 서술했다시피 오히려 자신들이 따로 거뒀는데, 빈민 구제를 비롯한 요즘의 사회 복지 부분을 실질적으로 담당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화되어 정부가 세금을 거두고 분배까지 담당하는 현대국가와 달리 이 시기는 정부의 기능이 궁정과 영주, 교회 사이에 분권되어있던 시대였다. 이 역할은 일부 지방에선 근대까지 유지되었다. 그레고어 멘델 브루노 수도원장이 교회 세금 징수안에 세금이 너무 무겁다며 땡깡을 부린것은 욕심때문이 아니라 당시 그 수도회에서 학교에 교사를 파견하고,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이 밖에도 많은 복지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것도 화폐 유통이 극히 부족했던 11세기까지 일이고, 중세 성기를 거치며 화폐 유통이 늘고 상업이 발전하자 군주들은 금전의 필요성이 커졌고, 그에 따라 점점 여러 목적의 특수세나 간접세가 신설되었다가 그것이 자체로 세금으로 자리잡는다. 이렇게 생겨난 직접세 중에 제일 대표적인 예시는 타유taille 라는 세금이었는데, 이것은 원래 '공조, 부조, 헌납' 정도의 의미로 주군이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할 때 봉신들이 주군을 위해 부조하는 개념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주로 왕이 사로잡혀 몸값을 낼 때, 주군의 자식이 결혼을 할 때 등에 메겨지는 것이었으나 어느새 그 자체로 세금으로 자리잡는다. 또 상기한 창문세, 화로세, 우물세 등은 도시에게 자치 특권 계약을 할 때 도시 공동체에게서 세금을 걷기 위한 계약이었으며, 귀족들에게서는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의 세금인 방패세가 매겨진다.

중세 중기부터 경제가 발전, 화폐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금융업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1156년부터 제노바 공화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외환 조약이 채결되었을 정도였다. 이때 금융업을 주도하는 주체가 둘로 나눠졌다는 전자는 이탈리아 상인들로 이들은 10세기서부터 합자회사 형식의 상회을 설립해 지중해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고, 이후 유럽 각지에 지점들을 설치하면서 해당 지점들이 위치한 국가들에 외환을 꿔줬다.[19] 후자는 유대인으로 이들은 중세시대 들어서 서유럽 내에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당시 그리스도교 내에서 죄악시하던 고리대금업에 종사해야 했다.

또한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에 사라졌던 요식업과 숙박업 또한 중세 중기가 되면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다만 이때 요식업과 숙박업은 조선 후기에 활성화 된 주막처럼 한 곳이 겸업하는 것이 보통으로 inn과 tavern이 대표적인 중세 유럽의 레스토랑겸, 선술집이자 숙박업소였다.

중세 중기말에서 중세 말기(13-15세기) 사이에 유럽인들의 소득은 급격한 증가를 보았다. 화폐경제 발달로 농민의 부역이 줄어들고 소작농이 해방되어 대거 자작농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의 소득은 물론 도시 노동자들의 소득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이윤을 올린 것은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었다. 15세기 피렌체 시민들이 결혼할 때 가져오는 평균 지참금은 100 플로린, 현 가치로 8000만~1억 원에 해당할 정도다.

그외의 중세 유럽의 경제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문서들과 대조해서 볼 것을 추천한다.

3.2.4.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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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관직과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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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중세 초기 서유럽권 관직의 작위화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작위/유럽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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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중세 초기 프랑크 왕국의 행정과 관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메로베우스 왕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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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중세 후기 주요국들의 중앙 및 지방행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백년전쟁/행정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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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의 행정은 당시 건재한 동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다른 문화권, 특히 한·중·일 등의 한자 문화권과 비교하면 전문적인 관료조직과 관료들이 전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암흑 시대로 알려진 중세 초기만 하더라도 서로마의 관료제가 상당히 남아있었다. 서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 같은 여러 야만인 왕국들은 로마 시절의 제도를 거의 온전히 보존해 그대로 써먹었고, 프랑크 왕국 역시 온전히는 아니지만 로마 시절의 행정구역은 그대로 복원했고 제도 역시 게르만식 전통과 결합해 나름대로 보존과 재사용에 성공했다.

서유럽에선 게르만계 지도자들이 로마를 모방하면서 황제의 고위 행정관을 지칭하는 코메스(Comes largitionum), 한 영역의 지배자를 독스가 그대로 게르만계 국가들 중 고트족들의 두 개의 왕국들프랑크 왕국메로베우스 왕조에 도입되었으며, 800년대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 변경지대를 관리할 목적으로 변경주(Mark)를 만들어 변경주를 통치할 관리로 Mark Graf를 두었으며, 더 멀리 가면 이전 왕조였던 메로빙거 왕조 때는 궁재를 두고 있었다.

이밖에도 브리튼 제도에서는 10가구를 관리할 목적으로 성인 남성에게 치안 의무를 부여하였고, 다시 100가구씩 묶어 범죄자를 추적하고 체포하며 마을 전체의 말과 무기의 관리를 담당하는 자경대장(Constable)[20]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경대장들의 통제하는 100가구씩 묶은 단위를 Hundred라고 불렀고, 이것이 여럿 모인 행정단위가 오늘날의 주(County)에 해당하는 샤이어(Shire)였는데, 샤이어를 담당하던 관리가 오늘날 보안관의 기원이었던 샤이어 리브(Shire Reeve)로 약칭으로 리브로 불렸으며, 그 위로 엘더맨(Ealdorman)이 있는데 지방장관으로 번역된다. 보통의 봉건 영주와 비슷한 직위지만, 가문에 상속되는 타국의 봉건제와 달리 샤이어무트에서 선거제로 선출 후 왕에 의해 형식적인 승인을 받거나(머시아의 경우) 왕에 의해 테인들 중에 임명되는(웨섹스의 경우) 직위라는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 당시 문맹자의 비율이 높았고, 특히 지배층들 또한 문맹인 경우가 허다했기에 행정 실무를 전담한 것은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암흑 시대로 알려지던 중세 초기의 유일하게 글을 읽고 쓸줄 알았던 이들이 지식인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일반적인 행정 실무인 출생신고, 사망신고, 교회와 관련된 교육 및 복지 행정 등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는 중세가 끝난 후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진 후에도 근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도시가 성정한 후 도시 인구 또한 자연스럽게 증가함에 따라 행정 또한 인구수에 맞춰 분할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에 따라 도시 내의 구역 또한 교회를 중심으로 하게 되어 근대 이전까지 도시의 구역명을 교구명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가 되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은 생산량이 풍부한 지역에 각각 팔츠라 불리는 행궁격의 궁정을 두어 일정 시기마다 다른 팔츠로 이주했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로 들면서 이러한 행정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1세기가 되면서 법학을 전공으로 하는 볼로냐 대학교 설립과 함께 로마법 부흥이 시작되면서 유럽 각지의 사람들이 로마법을 배우기 위해 볼로냐 대학교로 몰려들어 법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법률가로 활동하거나 왕에 의해 세속인 출신의 관리가 되어 행정가로서 활동했다. 또 이 즈음부터 점진적으로 관료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는 세속군주들과 로마 교황과의 대립이 있던 시기로 아이러니하게도 중세적 관료제의 발달을 불려오게 되었다. 우선 관료제가 먼저 정비된 곳이 바로 교황령으로 교황을 비롯한 지도층이 세습이 아닌 선출 및 종신 임용직이었기에 교황과 그 아래의 추기경, 대주교, 주교 등으로 구성된 피라미드 형태의 정부 조직을 구성해 어느 정도 관료제가 형성될 수 있었다.

특히 교회법의 집대성인 그래티안 교령집의 저자인 볼로냐의 수도자이자 법학자였던 그래티안은 교회를 구성하는 성직자들이 단순한 연공서열이 아닌 실적과 성과에 따라 경력이 관리되어져야 하며 성직자로서 서품하는 것 역시 능력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고난 후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성직자는 구두가 아닌 문자화된 지시에 따라 일을 수행하여야 되며 법적인 훈련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 당시에 교회조직의 영향력은 지대했으며 이것은 또한 행정관료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래티안의 이러한 주장들은 1231년에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발표된 포고령의 내용과 아주 흡사한데 이것은 알게 모르게 근대행정관료제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후 교황령 뿐만 아니라 프랑스영국 등에서도 관료제도를 재정비하기 시작했고,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도 군주의 직활지를 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관직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대체로 아래와 같이 고위 관직들을 설치했다. 그밖에도 헝가리 왕국처럼 봉건제가 미발달된 국가에서는 별도의 관료제가 형성되는 곳도 있었다.
  • 챈슬러(Chancellor)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신성 로마 제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폴란드, 베네치아, 시칠리아, 포르투갈 카스티아, 아라곤, 헝가리 등에 설치된 고위 관직으로 영어에선 재상 혹은 총리로 번역되나 실재로 영어권에서 현대의 총리직보다는 사법권을 전담했으며,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나마 신성 로마 제국과 덴마크, 노르웨이, 폴란드에서 그나마 현대의 총리직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지만 첸슬러들의 임무는 주로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고, 대체로 성직자들이 독점했다. 참고로 신성 로마 제국은 해당 직책으로 각각 성직 선제후인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들이 각각 공통으로 독일 왕국의 제국 재상과 이탈리아 왕국의 제국 재상, 부르군트 왕국의 제국 재상으로 겸임했다.
  • 체임벌린(Chamberlain)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신성 로마 제국, 세르비아, 동로마 제국, 카스티야, 포르투갈, 교황령 등에 설치된 고위 관직으로 프랑스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동로마 제국, 카스티야, 포르투갈에선 궁정 업무를 총괄하는 관직 중 하나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 세르비아에선 재정 업무를 관장했다.
  • 콘스테이블(constable)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카스티야, 포르투갈, 아르메니아, 조지아, 동로마 제국, 스웨덴, 덴마크 등에 설치된 고위 관직으로 현대 영어에선 순경으로 표기되나 중세때만 하더라도 마샬과 함께 왕의 마굿간을 감독하면서 왕의 기병대의 지휘관이기도 했기에 무관장이나 기병대장으로 표기되며 예루살렘 왕국 항목에서는 집정관으로 표기되어 있다.
  • 마샬(marshal)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21], 신성 로마 제국, 카스티야, 포르투갈, 나바라 등의 설치된 고위 관직으로 군대의 원수직이 마샬에서 유래되며, 콘스테이블과 업무가 겹치지만 서열상으로 아래이다.

재정 업무에선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의 재무상(Lord High Treasurer), 위에 상술한 스웨덴, 신성 로마 제국과 세르비아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Grand chambrier과 세네샬,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스튜어트(steward) 해당되는 Drost 등이 있었고, 시칠리아에서는 Luogotenenza del regno가 있었고, 이밖의 나라들은 스튜어트들이 재정을 담당했는데, 스튜어트들은 왕의 사유 장원들을 관리하던 관직으로 장원에서 나온 소득 또한 스튜어트들의 감독하에 있었다.

다만 위의 관직들말고도 국가별로 다양한 관직들을 신설해 운영했다. 특히 13세기경 반상비적인 해군을 만들면서 해군을 총지휘할 지휘관인 제독직이 이때에 생겨난 직책이었다. 그외에도 여러 관직들이 독자적으로 신설되었다.#

다만 이 당시의 관리들은 전부 고대 로마처럼 공사가 구분된 이들이 아닌 군주의 하인과 같은 존재들이었으며, 무엇보다 고위 관료들로 갈수록 세습 내지는 매관매직과 같은 엽관제로 운영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능력 있는 이를 기용하더라도 그것은 군주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한편 12세기가 되먼서 봉건영주, 주교의 통치에서 벗어난 자유도시가 생겨나 시정참사회를 중심으로 한 코뮌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시정참사회는 도시법의 제정과 집행뿐만 아니라 도시의 행정을 총괄했다. 참사회원의 수는 도시마다 수 명에서 40명 사이였다.

시정참사회가 자유도시의 통치 기구였던만큼 시정참사회의 수장이 시장직을 겸직했는데 근현대와 달리 시장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었다.# 이러한 시장직은 국가별로 부르는 명칭이 달랐으며, 봉건제가 뿌리 깊이 내린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북부와 중부에서는 포데스타(podesta)로 불렸다.

12세기가 되면서 공화정을 채택하던 도시국가나 자유도시들이 점차 생겨나면서 별도의 행정제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 산 마리노와 함께 다른 공화국들보다 수세기전에 건국되었으며, 국가원수인 도제는 초기엔 세습제에 가깝게 선출되다가 이후 확실하게 연륜있는 인사를 선출하는 형태가 자리잡게 되었지만 여전히 종신제였다. 이에 베네치아는 도제의 권력을 견제하고 만일 도제가 사망한 후 차기 도제를 선출하는 기간동안 발생하는 행정적 공백을 매꾸기 위한 목적이나 회계 감사 등으로 여러 정부 조직등을 신설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경우에도 별도의 관직이 있었다. 포사드니크(посадник), 티샤츠키(Тысяцкий)로 포사드니크는 흔히 시장으로 변역되나 이는 노브고로드·프스코프 공화국 한정으로 원래는 크냐지의 보좌직으로 크냐지의 개인 영지의 관리 및 사병 집단인 드루지나의 관리와 법률, 외교 등의 업무를 보조했다. 티샤츠키는 천인대장으로 번역되며 본래 도시나 마을의 민병대의 수장이었으며 자신들보다 상급인 20명의 사령관을 의미하는 소트니크(Сотник)에게 복속되어 있었으나, 나중에는 법률 및 상업 관리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러한 관직들은 군주제가 자리잡은 러시아 공국들에서 군주가 임명하는 것이 아닌 민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기원은 9세기에서 10세기에 시작되었으며, 본래 크냐지 또한 민회에서 선출된 직책에서 기원되었다. 러시아 전역이 봉건적 세습 군주제가 일반화되어가는 와중에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선 민주공화제를 실시해 크냐지와 대주교를 비롯해 그 예하의 관직들이 선출직으로 바뀌어 16세기까지 이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러시아 제국 초기까지 이어졌다.

3.2.6. 문화

3.2.6.1. 문학
중세는 그리스 문화에 말할 수 없이 감사해야 한다. ... 그러나 그리스 문화도 똑같이 중세에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에티엔 질송(Etienne Gilson)[22], Geist der mittelalterlichen Philosophie(Wien 1950), 459쪽
상세내용

일단 한가지 확실한 건 중세시대가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문화 사이에 라틴어와 라틴문학을 전수한 전수자의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가 시대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라틴어문학 보존작업인 카롤링거 르네상스 덕분이었다. 인쇄술이 전무했던 탓에 손수 그 많은 책을 베껴가며 보존했는데, 초기에는 카롤링거 왕가에서, 후기에는 수도원들이 이 일을 해냈으며, 이후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세속인 출신의 필경사들이 등장했지만 중간에 좀 첨삭이 있기도 하였고, 결국 인쇄술이 발달할 때까지 저본 논쟁도 조금씩 벌어지게 된다.

그리스어 문화 또한 고대 문명의 산물이자 철학의 중심으로 보존하기는 했으나 나중에 레콩키스타가 정복한 톨레툼의 도서관에서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자세한 내용은 서적《번역은 반역인가》를 참고할 것.

또한 이 시기에 단테 알리기에리신곡,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 구전설화인 롤랑의 노래등 다양한 지식계층을 위한 문학이 발전했으며, 다성음악이 발명되고, 사라질 뻔했던 연극이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연극의 경우는 종교적인 입장에서 글도 못 읽고 교회에서 얘기해줘봤자 알아들을 리가 없는 우민들을 교육하기 이보다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성경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든 유랑 연극단들이 지방 곳곳에 퍼져 교리를 전하였고, 실제로 이는 교회의 입지기반을 튼튼히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다만 이러한 문학의 흐름을 주도한 자들은 보통 음유시인들과 연대기 작가들이었다. 특히 음유시인들은 국가별, 시의 유형별로 달랐다. 프랑스에선 남부의 트루바두르# 북부의 트루베르#, 독일에선 12~14세경의 미네징거###, 14세기 이후는 마이스터징거###들이 중세 유럽의 문학을 선도해 갔다.

또한 중세 초인 7세기에 아일랜드수도자들이 띄어쓰기 법을 도입했으며, 중반인 12세기에 필기체인 고딕체로 알려진 블랙 레터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3.2.6.2. 복식
디시인사이드 게임 속 중세의 옷
동로마 제국 복식 1/2동로마 제국 복식 2/2
중세 초․중기 서유럽 복식 1/2중세 초․중기 서유럽 복식 2/2
중세 후기 서유럽 복식 1/2중세 후기 서유럽 복식 2/2

아래에 후술되어 있지만 흔히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다는 대다수의 서양 판타지의 복식 묘사나 웹툰에서 표현된 이미지 등을 보면 근·현대적인 이미지에 가깝게 묘사되는데 실제 중세 유럽의 복식 문화와는 전혀 다른 근대 복식 문화다. 실제 중세 유럽의 복식 문화는 중세 초만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복식 문화와 게르만의 복식 문화가 융합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어 가는 당시 유럽의 복식 문화는 이미 그리스·로마의 복식과 게르만족들의 복식이 융합되어 가고 있지만 이미 토가를 점차 착용하지 않는 비율이 높아지는 등 전반적으로 게르만식 복식문화의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였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함께 튜닉의 밑단이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어졌다.

이는 동로마 제국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서유럽과는 달리 동방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고대 로마의 복식과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동로마의 복식 문화는 키예프 루시를 거쳐 동슬라브인들이 주축인 러시아 공국들로 전파되었고, 서유럽에도 일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동서 대분열을 거친 후 중세 중기가 되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복식 자체가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이는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확연해지기 시작했다. 서유럽의 경우 비단이 다시 수입과 함께 동로마를 통한 교류 등으로 남유럽에서 생산되기 시작해 의상이 화려해지기 시작했으며, 남성용 튜닉의 밑단이 짧아졌으며, 또한 중세 초까지 그나마 넓었던 바지인 브레가 현제의 사각 팬티 수준으로 짧아지고, 양말 격이었던 호스가 점차 길어져 팬티스타킹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쇼스로 변하게 된다.

동로마의 경우 이미 중세 초부터 아랍과 페르시아, 그리고 현재의 발칸 지역에 정착한 마자르족과 같은 중앙 아시아에서 온 유목민들과 접촉하면서 점차 복식에도 영향을 받기 시작해 10세기 중반에 궁정 의상에 호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10세기 중반 이러한 경향은 증세 중기인 11세기에 들어서면서 더 심화되어 복식의 동방적 색체가 더 강해지게 되었다.11세기 중반 11~12세기, 이후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오스만 투르크의 세력이 커지면서 멸망하기 전까지 투르크의 영향을 받은 복식들을 입었다. 황제들이 머리에 쓰고 다닌 모자 또한 몽골-투르크식 모자였다.황혼기 동로마 제국 말기 모자들

이는 동로마와 지리적 및 종교적으로 가까운 동유럽권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헝가리와 불가리아의 경우 본래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민족들로 이들 또한 호복을 입었고, 유럽으로 이주했다. 헝가리의 경우 피지배 계급 내에서 전통 의상을 고수한 반면 지배층 내에서 서유럽과 동로마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통 의상 대신 당시 튜닉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식 복식이나 그 영향을 받아 변형된 복식을 입기 시작했다.출처 불가리아의 경우 정교회로 개종해 동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배층 내에서 전통적인 면이 강해 여전히 호복을 입었다.

하지만 14세기 중반 발칸 반도로 진출한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하면서 불가리아의 복식은 투르크의 영향을 받았다.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의 정교회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로 발칸 반도로 이주한 후 정교회로 개종한 후 동로마 제국의 복식 및 동쪽과 북쪽의 헝가리 등의 영향으로 카프탄을 받아들이는 등 영향을 받아 전통 복식을 바탕으로 가 15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면서 튀르크 복식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14세기 중반 이전까지의 불가리아·세르비아 상류층 복식

러시아의 경우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처럼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복식이 동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중동 및 중앙아시아와 인접한 지역이었기에 12세기부터 카프탄과 복식이 퍼지기 시작해 13세기 중반부터 보편적이기 시작했다. 이후 농민 및 농노들은 남성은 전통 슬라브식인 루바슈카, 여성들은 사라판을 입었고,귀족과 성직자들을 비롯한 중·상류층들은 전통 슬라브식 복식과 동로마로 부터 유래된 예복과 몽골-튀르크식 복식인 카프탄 등이 표트르 1세의 서구화 개혁 전까지는 혼재되었다.

한편 아일랜드의 경우 유럽 본토는 물론이고 옆의 브리튼 섬은 물론이고 한때 서유럽 각지에 건재하고 있던 다른 켈트족들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복식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정체되었다. 아일랜드의 복식은 남녀 공통으로 레인(leine)을 입었는데 여성들의 경우 보통 브리튼, 유럽 본토의 여성용 튜닉과 마찬가지로 밑단이 발목까지 내려온 것을 입었다.

남성용 레인은 짧을수록 사회에서 입고 있는 사람의 지위가 낮고, 반대로 길수록 고귀한 신분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다만 신분이 낮거나 높으거나 공통점으로 바지를 입지 않았는데 이는 아일랜드에 거추하는 케트족들이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켈트족들과 차별되는 복식 문화였다. 이러한 풍습은 17세기 잉글랜드 연방의 지배기까지 이어졌다. 아울러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지방의 전통복식인 킬트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관련 링크
3.2.6.3. 식문화
실제로 질적으로 당연히 현대보다야 질박하지만 그래도 산업 혁명 시기급으로 중하층민을 보호할 수단이 싹 사라지지 않았던지라 그럭저럭 잘 먹었고 양은 채울 수 있었다. 식문화는 변변치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상당한 양의 요리책들이 저술되기도 했고 영주들도 놀고 먹는 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23] 요리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종류의 향신료가 유럽에 소개되었고 이후 대항해시대를 이끈 유럽의 향신료 열풍의 기폭제가 된다. 이때 18세기가 될때까지 유럽의 음식들은 상당히 달고 짜게 조리가 되었다.

크게 나뉘어 보면 십자군 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눠지며 본격적으로 국가별로 요리 문화가 먼저 시작된 곳은 이탈리아 요리로 당시 지중해 무역을 통해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요리 문화를 일부 받아들여 분화 및 정립되며 이후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 요리, 영국 요리 등 유럽의 요리 문화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 요리 역시 13세기 중반부터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몽골의 영향으로 증류주만두를 받아들여 보드카펠미니가 만들어졌다.

지역마다 민족마다 음식문화가 당시에도 많이 혼합된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로마 제국에서 유입된 을 비롯한 라틴 음식 문화[24]게르만족고기,유제품 중심 식사가 많이 혼합되어 있다. 특히 이 시기는 계란 조리법이 발달해 대부분의 조리법이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중 오믈렛, 팬케이크 등이 대표적인 계란 조리법이고, 커스타드 또한 고대 로마 시대부터 만들어져 이어진 조리법이었으며 스튜 역시 중세가 기원인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중부 유럽에서 보양식으로 많이 먹었던 맥주 수프 또한 중세 시대때 만들어진 음식으로 보고 있다. 그 밖에도 타르트, 키슈, 크레이프, 마카롱, 진저브레드, 와플, 크레이프와 같은 디저트들도 이때 중세를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아몬드 밀크 같은 식물성 음료도 이때 생긴 것들이다.

심지어 와인에다가 향신료를 타서 마셨는데, 이러한 방식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려 올라가며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였던 히포크라테스 또한 약으로 처방까지 했기에 14세기에 와인에다가 향신료를 타서 마시는 방식을 히포크라테스의 술이라는 의미로 히포크라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뱅쇼 등의 몰드 와인의 기원이 되었다.#

상류층조차 테이블 매너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인식이 있으며, 가벼운 역사 교양서나 유튜브 지식채널 등에서 그럴듯하게 각종 사료를 인용하며 이런 주장을 펼치지만 대개는 맥락을 무시한 잘못된 인용이다. 예를 들어 15세기 스코틀랜드 시인 알렉산더 바클레이의 풍자시 <홀에서의 식사(Eating in Hall)>는 중세의 연회에서 벌어지는 난투극과 테이블 나이프 칼부림을 묘사한 기록으로 자주 인용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이 시는 '먹는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나이프로 옆사람의 손가락을 자르고, 그것을 쇠고기로 착각해서 집어먹는' 정신나간 아귀의 연회를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식탐에 대한 극도로 날이 선 풍자이지 사실에 대한 진지한 기술로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 전혀 아니다. 이렇듯 부정적인 묘사는 전후맥락을 무시한 채 맹목적으로 믿는 반면 13세기 중반의 독일 시인 탄호이저의 <궁정 예법(Hofzucht)> 등 식사예절을 다룬 중세의 수많은 서적들은 별다른 근거 없이 '저런 예절들이 강조된다는 것은 반대로 많은 귀족들이 현실에서 그것을 안 지킨다는 증거다'라는 아전인수식 논리로 오히려 테이블 매너가 나빴음을 증명하는 확고한 증거처럼 사용한다.

"포크 같은 식기류를 왜 안 쓰냐"고 궁금해할지도 모르는데, 중세 초의 서유럽에서는 게르만족의 영향을 받아 이미 잘려져 나온 음식을 가급적 손으로 먹었고 식기를 써도 숟가락이나 나이프를 썼다. 다만 수식으로 식사를 했기에 중·상류층 사이에서 손의 청결도가 중요해 만찬 시 남들이 보는 앞에서 하인이 떠온 세수대야에 손을 씻은 다음에 먹었고, 식사 중 귀를 후비거나 머리를 만지는 것도 식사 예절에 어긋난 것으로 규정했다. 11세기 이후부터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포크가 유입되면서 포크를 사용하는 문화가 전파되었지만, 그 속도가 급진적이지 않아서 상당 기간 동안 서유럽 각국에서는 포크 없이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일이 많았다.[25]

물론 서민(농노)들은 그런 거 없고 단지 얼마 안 되는 고기[26]를 양배추나 순무 같은 채소들과 함께 수프스튜형태로 푹 끓여먹어야만 했다.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국물요리를 좋게 말해서 서민적, 나쁘게 말해서 상놈들이나 먹는 요리로 취급(특히 프랑스에서)하는 이유가 바로 중세시대의 영향이란 설이 있다.# 요리인류에서 참고할 만한 주장이 나오는데, 이 시기 귀족들은 불 냄새 밴 고기는 평민들이나 먹는 것이라는 이유로 직화구이 고기를 피했다고 한다. 변변한 조리도구가 없는 평민층이 고기를 구워 먹게 되면 불로 바로 익혀 먹는 반면 귀족층은 다양한 조리도구를 이용해 여러 방식으로 요리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귀족층은 고기를 구울 때에는 불에서 1m가량 떨어진 곳에 쇠꼬챙이에 꿴 고기를 두어 그 열로 간접적으로 굽는 방식을 이용했다.[27]
중세시대 사람들이 오염되거나 부패한 음식을 자주 먹었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 중세인들이 이를 피하려고 예방책을 강구한 증거가 있다. 그러므로 좋지 않은 음식의 맛을 감추려고 향신료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Peter Hammond 지음, 홍성표 옮김, 『서양 중세의 음식과 축제』, 청주, 도서출판 개신(충북대학교 출판부), 2003, p.90~91.
중세 유럽인들이 사랑하던 향신료의 경우, 식품 저장 기한을 늘리기 위한 용도로 활용했다는 것은 낭설이며, 다양한 맛을 추구하던 중세인들의 욕망이 향신료에 대한 집착을 불러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향신료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풍미가 유럽인들의 혀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래서 중세의 부유층들은 목돈을 주고서라도 향신료를 구하려 했고 여기에는 십자군 전쟁이 촉발시킨 동방 무역의 활성화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당대의 향신료는 건강에 좋다는 믿음이 있어서 많은 이들이 찾았으며 와인에 후추의 열매와 계피, 정향 등을 넣어 끓인 것을 약처럼 마시거나 의사들이 향신료를 약품 조제에 활용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경우,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향신료와 감미료를 퍼부은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아래의 최하단의 링크에 있는 동로마 제국 식문화에서도 나와 있지만 동로마를 포함해 유럽의 그리스도교 문화권 내에서는 앙트르메라는 일종에 눈으로 즐기는 연출 요리가 존재했다. 본래 그 유래는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경에 나온 앙트르메는 초기에 상석에 있는 사람들만 먹을 수 있던 음식으로 색과 향을 더한 소맥과 콩죽, 그리고 생선을 말려서 만든 젤라틴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손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여흥 과시물로 변질되면서 흔히 중세 유럽의 연회상에 등장한 멧돼지의 머리 구이, 공작··백조 통구이 요리가 이때를 기점으로 나타났다. 이후 더 대담한 연출로 성의 모형과, 와인이 뿜어 나오는 분수, 투구를 쓴 닭, 살아있는 새들을 가둔 단단한 케이크[28], 배에 탄 기사의 상, 성녀의 상 등이 만들어져 연회상에 올라왔다. 번외로 설탕을 녹인 시럽을 굳혀 만든 각종 모형들도 앙트르메로 올라왔다.

중세 유럽의 식문화에 대해 자세한 내용들은 알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들로 참고하면 된다.
3.2.6.4. 건축
로마네스크 양식 및 고딕 양식도 이때의 산물. 고딕 양식은 해당 항목 참조. 참고로 건축학에선 고트족과 상관이 없는 작명. "전통적인 건축학 입장에서 보면 꽤 파격적이다."라는 의미에서 "야만인" 고트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다만 이때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하게 되어 일시 건축학이 퇴보 되기도 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콘크리트를 한 차례 개발해 판테온이나 수도교, 아파트(인술라) 등 여러 건축물을 만들 때 쓰다가 서로마 제국 멸망을 전후해 기술이 한 번 잊혀져버린 것이다.[32] 콘크리트가 다시 발명된 건 근대에 포틀랜드 시멘트를 발명하면서였다. 결국 초기 중세 유럽인들은 쉽게 무너지는 벽돌로 건물을 만들었고 섬세함도 비교적 뒤떨어졌다.

10~11세기 고딕 양식이 서서히 들어오기 전에는 많은 건물들이 돌만 좀 쌓아올리다가 얼굴 내밀만한 창문 하나 정도 만들고 지붕은 기둥이나 그런 게 지탱해서, 벽의 구성이 자유로워진 게 아닌 두껍고 투박한 벽이 모든 것을 지탱해야 했으니. 또한 로마 건축물이 남은 곳에서 사람들이 돌을 마구마구 빼와서 건축자재로 써서 유적이 많이 소실되기도 했다.[33]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건축은 성당이나 일부 성이나 궁전, 공공 건물에만 반영되었고 앞서 상술되듯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했고, 특히 알프스 이북의 경우 아예 제반 기술이 붕괴되었기에 벽돌 만드는 방법마저 실전되었다. 초기 알프스 이북의 경우 사회 인프라 시설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대부분 목재로 해결해야 했고 심지어 성마저 11세기까지는 목재로 지어졌다. 이때 가옥은 나무로 된 틀, 욋가지에 흙을 바른 벽, 그리고 짚 등으로 이어진 지붕으로 2가지 형태로 지어졌다. 하나는 길이 20~50피트(6.1~15.24m), 폭은 15피트(4.572m)의 가옥과 길이 6m, 폭이 3m인 원형 오두막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어진 가옥들은 썩 튼튼한 건물들이 아니었기에 도둑들이 간단하게 벽을 부수고 들어오기도 했고, 단칸방이라 한 가족들이 한방에서 모여서 생활했고, 대체적으로 축사까지 겹쳐있는 형식이라 기르던 가축들과 함께 살기까지 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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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가정집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서 도시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 내에서 하프 팀버(팀버프레임)라는 목조골조 사이에 진흙이나 벽돌로 채우는 반목조 양식의 건축술이 등장해 서유럽중부유럽 등지에서의 가옥양식으로 크게 유행했다. 한편 알프스 이남의 경우 벽돌조의 가옥이 크게 유행했다. 뿐만 아니라 지붕에서도 차이가 나기 시작했는데 북유럽과 중부 유럽의 경우 주로 박공 지붕이 주류였고, 남유럽은 평지붕이 주류였다. 다만 동로마 제국러시아 지역을 제외하곤 유럽 각지의 도시 주택은 건물 폭이 좁으면서 대신 길이가 긴 이른바 세장형(細長型) 주택이 공통된 현상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인슐라처럼 일층엔 상업이나 작업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이층 이후로 전부 생활 공간으로 오늘날의 타운하우스처럼 수직형 공간이었다.

그 외에도 각박한 시대인지라 탑처럼 생긴 주택도 유행했는데 탑상 주택, 또는 탑주택이라 불렸고, 서유럽 전반에도 널리 퍼져 있었지만 동유럽의 코카서스 지방에도 탑상 주택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에 이러한 탑상 주택들이 많이 있었는데 주로 도시로 이주한 귀족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과장을 보텐다면 한 도시에 평균 100여 개의 탑상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전부 다른 귀족들에게 질세라 경쟁적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탑상 주택이 나타날 때가 12세기 중부 이탈리아의 도시 내부는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기에 같은 도시, 같은 도시내의 구역을 차지한, 각기 이해관계가 일치한 귀족들이 모여 계약을 맺은 콘소르테리아를 중심으로 한 블록 전체를 둘려싸는 형상으로 크고 작은 탑상 주택을 철책을 두르듯이 집합시켜 방어의 효과를 높였고, 각 탑상주택은 발코니로 연결되어 있어 발코니에서 공동체의 적에 대한 감시와 공격을 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러한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중정을 두었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비상시에는 중정 쪽으로 돌출된 회랑을 통해 피신했고, 이밖에도 우무르 부뚜막, 땔감 창고 등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 교회를 세웠다,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높은 탑을 세워 꼭대기에 투석기를 설치하고 궁수들을 배치했다.

대체로 탑상 주택의 벽은 두텁고,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고, 일층은 보통 아치로 된 한두 개 정도의 출입구가 있었고, 각 층마다, 작은 개구부를 한두 개 정도 설치되어 있어 폐쇄적인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배열도 불규칙한 경우가 많았다. 일층은 금고와 무기를 보관하는 방이 있었고, 이층은 거실 및 식당이 그 상층부에는 침실이 있었다. 부엌은 보통 맨 위층에 자리했는데, 굴뚝도 없는 화덕이 설치되어서 요리를 할 때면 온 실내에 연기가 가득 차였다고 한다. 지하에는 와인 창고와 조명용 기름을 만드는 작업장을 두었다. 그 외에도 외부에는 상점을 세놓았고, 내부에는 고용인의 주거 공간과 작업장 등을 설치했다.

이러한 탑상 주택은 처음의 실용적 용도와는 다르게 시간이 가면서 가문의 위신을 위한 사치재가 되었다. 이스터 섬모아이나 현대의 마천루처럼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과시적인 용도로 지어졌다. 13세기 말 도시 내부가 안정을 되찾는 곳들이 많아지면서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 정부가 들어섰다. 새 정부는 귀족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시키거나 정치의 참여를 제한시키면서, 사적으로 짓는 탑이나 탑상주택의 세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지나치게 높아진 이들의 탑을 일정한 높이까지 줄여버렸다. 현대의 탑상주택의 어느 정도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는 곳으로 블로냐와 산 지니마노다. 탑상 주택의 높이는 최대 90m에 이르렸다고 한다.

이밖에도 아케이드 주택이란 유형도 있었는데, 주로 광장과 큰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2층을 집 앞 보도 위까지 도출시킨 뒤 도출 부분을 아케이드로 처리한 유형으로 도출 부분을 보도 끝에서 아치로 받쳤는데 도일한 방식으로 지어진 주택들이 줄지어 서서 아케이드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아케이드 주택은 2층을 지탱하는 천장이 보행로를 덮어 보행자가 돌출 부분 밑을 터널처럼 통과하는데, 이경우 어둡고, 습해지며 보안에도 불리한 단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장점이 많았다. 우선 아케이드 주택은 주로 상가 주택으로 지어졌다. 중세 유럽의 도시 주택들은 세장형 형태의 단독 주택이 주류로 상가주택 또한 단독 주택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1층이 상가나 공방으로 사용되었다면 2층부터가 건물 주인의 사적 공간이었다,

이는 인구밀도가 높은 비좁은 중세 도시에서 최대한 쾌적하게 살기 위해 건폐율 높은 합벽(combined wall) 구조와 함께 2층을 보도 위로 도출 시켜 건물 주인 일가의 사적 공간의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도시적 측면에서 두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전자의 경우 1층 상가와 보행자에게 안전 덮개를 제공했는데, 만일 비가 왔을 때 비바람으로 부터 보행자와 상가를 보호해줬을 뿐만 아니라 우천시에도 쇼핑을 할 수 있어 상업적으로 매출 증대에도 도움이 되었고, 이는 세수증대로도 이어졌다.

후자의 경우 아치가 일렬로 이어져 있어 도시 경관을 구성하는 특이한 조경 요소가 되기도 했다.앞서 언급한대로 중세 유럽의 도시는 대체로 고려와 조선의 읍성과 비교하면 도시 내부의 면적이 좁으면서 인구밀도가 고밀도 수준이었다. 때문에 후기로 접어들면서 건물끼리 맞다는 합벽 구조로 건폐율이 높아졌다. 아케이드 주택은 도시 내의 열악한 과밀상황을 조형적으로 활용해 도시 경관을 특이하게 연출했다.

서로마가 붕괴되면서 귀족들의 도시 저택인 도무스 또한 사라지면서 왕과 고위 성직자들을 제외한 중세 귀족들이었던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에 장원 주택이나 성관에서 살다가 중세 중기가 되면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상공업의 부흥가 함께 프랑스에선 왕권 강화와 함께 관료제를 실시하면서 소수의 약소 귀족들이 도시로 이주 및 도시의 상인들이 부호로 성장하면서 다시 도시 저택들이 다시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각각 호텔과 팔라쪼로 불렸다, 초기엔 그저 새장형 주택 그 자체이거나 약간 규모를 크게 한 것 밖에 없었으나 점차 규모가 더 큰 저택으로 변하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의 팔라쪼는 안뜰이 사각형의 중정이 있는 ㅁ자 구조의 건물로 이후 중세 후기에 발생한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았고, 과밀한 도시 내부의 특정상 후원이 없는 경우가 보편적이었으나 프랑스의 호텔의 경우 16세기 이전까지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고, ㄷ자 구조인데다가 귀족들의 권력이 시민들을 압도했기에 건물 규모에 비해 넓은 후원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35]

관련 이미지, 이미지 2, 15세기 중세 유럽의 도시 주거, 중세 유럽의 목조 농가, 중세 파리의 도시 저택(불어주의)
3.2.6.5. 유희
중세 엔터테인먼트 및 게임
Medieval Games and Recreation
유흥여가에 있어 귀족들은 파티나 연극 관람 또는 체스같은 격식 차린 게임을 즐겼으며 기사들은 마상창시합이나 결투를 즐겼던 반면 생존하기 위해 난폭하게 살았던 하층민들은 럭비와 비슷한 과격한 몸싸움이 많은 구기 스포츠 또는 길거리에서 패싸움을 하거나 싸움구경을 즐겼다. 그리고 이 사이에 낀 중류층들은 축제에서 놀고 마시는 것과 회극단이나 광대들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물론 교회에서는 모두 다 방탕하다고 실컷 까댔으며 귀족들조차 난폭하고 사나운 야만인들이 할 짓거리라며 무시했다. 여담으로 잉글랜드 왕국요먼 계층의 남성 한정으로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다른 유희를 금지한 체 활쏘기만 장려되기도 했다.

도박의 경우에도 교회에서는 성직자들로 하여금 제제했지만 일반 도시민들의 욕구까지는 막질 못했다. 주사위 놀이는 기본이요, 경주견 달리기 등과 같은 다양한 도박들이 유행했으며 훗날 카지노라는 단어도 귀족들이 도박을 즐기는 유흥장에서 비롯된 단어다.[36]

이밖에도 숨바꼭질, 술래잡기, 시소, 목마 걷기(Walking on Stilts), 수영, 낚시, 진지 빼앗기 놀이(Prisoner’s Base), 사방치기, 눈을 감은 상태에서 술레잡기를 하는 까막잡기(Hoodman’s Blind (Blind Man’s Bluff), 눈을 상태에서 종소리만으로 술레를 잡는 징글링(Jingling), 굵은 매둡으로 만든 고리 던지기(Quoits), 줄다리기, 나무 블럭 빼기(Pick up sticks), 틱택토(Tic tac toe), 체커, 백개먼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축구테니스의 기원도 중세 중기인 12세기와 13세에서 기원되으며, 골프 역시 중세 말기인 15세기 스코틀랜드에서 기원되었다. 볼링 역시 중세 시기에 있었으나 이때는 유희보다는 종교적 성향이 짙었다.
3.2.6.6.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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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교육 및 학문


모든 지식인들이 교회로 몰린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신학 이외의 학문이 탄압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정도 과장된 이야기이다. 중세 교회는 지금 생각하는 이미지보다 관대하였다. 하지만 많은 학문들이 신학 위주로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스콜라 학파가 있다.[37] 일부 고대 그리스 철학의 경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권장되었으나 에피쿠로스처럼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철학자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고대인의 산물이라고 숭배 받았던 고대 그리스 철학과 달리 고대 게르만 학문과 켈트 학문의 경우 야만스럽다는 이유로 종종 폄하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한편 교회의 입장과는 별개로 당시 지식인들의 성향은 상당히 진보적인 면도 있었다.

한편 일부 교수의 경우 신학의 진리와 철학의 진리는 다르다는 이른바 '이중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충돌을 일으키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탄압받게 된다.[38]

서기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서로마 제국 내의 모든 교구수도원초등학교 정확히 사원 학교와 수도원 학교를 설립할 것을 지시했다. 다만 이때의 교육 대상들은 주로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카롤루스 대제 이전인 597년 브리튼 제도에서 켄터베리에서 킹스 스쿨이 설립되었으며, 세속인들도 대상으로 하는 초·중등교육 기관은 12세기부터 설립되기 시작해 독일에서 습자학교, 영국에선 조합학교 등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세속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또한 그리스도교가톨릭 교회의 영향 아래에 있었으며, 교사들은 주로 가톨릭의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볼로냐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살라망카 대학교, 코임브라 대학교, 카를로바 대학교,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서구권 최초의 대학이 세워진 것도 중세 시대 때이다. 특히 농업이 발전하면서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마침 당대 최고라고 평가받던 논리학자이자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가 교수진의 일원이었기에, 당시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의 학구열은 엄청났다.
"파리 대학교는 전 세계를 위하여 빵을 굽는 오븐과 같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300년 후에는 유럽 전역에 60여 개의 대학이 생겨났다. 1350년에는 독일에만 25만여 명(!)의 대학생이 있었으며, 15세기 중반에는 빈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쾰른 대학교 등에 등록한 학생 수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대학생 수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기본적으로 3학4과를 배웠으며 그 외에 가장 인기 있는 학문은 신학이 아니라 법학이었다. 국가가 정립되고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왕실 내외의 복잡한 법 문제를 해결해 줄 전문인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던 것. [39]

당시 대학교에서 그 외에 메이저 학과로 소문난 분야들은 라틴어, 고전문학, 유클리드 등의 그리스 수학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되기 위한 커트라인은 최소 12세(!) 이상이었으며, 농민 출신이라 해도 다 받아주었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의 기회 자체가 상당히 균등하게 주어졌던 것. 다만, 이때의 대학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과는 거리가 멀고 교사/학생 길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해서 교수는 장인, 학생의 경우 도제에 가까운 편이었다.

이탈리아는 가장 먼저 대학들이 세워졌으며 유럽 전역의 가장 우수한 학생들은 이탈리아로 유학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볼로냐 대학교는 법학자 이르네리우스 하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전성기에는 외국인 유학생만 1만 명을 넘을 정도로 거대했다. 파도바 대학교는 볼로냐의 일부 학생과 교수진이 분리되어 별도로 창설한 학교인데 13세기에 이미 1만 8천 명의 학생이 있었다.

중세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는 뿌리깊은 편견도 있는데, 사실 중세인들은 지구가 명백히 둥글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알리기에리, 로저 베이컨 등 수많은 중세 지식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그들의 저술 속에 명백하게 남겨 놓았다.

또한 일부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들은 근대 과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제로는 중세시대의 연구와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고 보기도 한다. 중세의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면서 뛰쳐나와 새로 과학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3.2.8. 사회

  • 사회 구조
    대체적으로 도시가 아닌 농촌사회가 기반으로, 장원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농노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정작 "봉건제(feudalism)"라는 용어는 중세 시대에 사용되지 않았다. 이 용어는 16세기 법률가들이 만들어 냈고, 18세기에 구체제를 비판한 몽테스키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실제 중세시대에 사용된 용어들은 봉건 계약이나 봉건적 의무가 아닌 "관습", "권리", "자유"에 초점을 맞췄다. 마그나 카르타 체결로 이어진 잉글랜드의 제1차 남작 전쟁과, 이후의 제2차 남작 전쟁에서도 반군들은 봉건적 가신이 아니라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land)를 자칭했으며, 봉건적 권리라기보다는 "고대 관습(ancient customs)"과 "국법(law of the land)"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옹호했다.

    그리고 중세 시대 영주와 가신의 관계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했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 단일하고 획일적인 "봉건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1차 자료에 따르면 충성 서약은 표준화된 봉건적 의무보다는 구체적이고 협상된 관계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권은 중세 시대 내내 중요했으며, 왕들은 봉건 중개자를 통해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 계층의 신민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카스트 제도를 연상하게 하는 소위 '봉건 피라미드'는 중세 시대의 개념이 아니었다. 중세 사회는 이 모델이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유동적이었다. 농민들 중 상당수[40]는 실제로 농노가 아닌 자유 토지 소유자였고, 많은 경제 거래는 특히 도시화가 진행된 지역들과 이탈리아에서 봉건적 봉사 의무가 아닌 화폐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Feudalism" was once accepted by academic and popular historians alike as a defining, if not the defining, feature of medieval society. For military historians, the High Middle Ages, the period from around 1000 to 1300, was once the age of the feudal knight. This is no longer the case. Today scholars who study the Middle Ages avoid the term like the plague. (One can almost imagine the cry "Bring out your dead constructs!") If they use it at all in their writings or classrooms, it is usually to dismiss it. Feudalism has joined the "Dark Ages," "the right of the first night," and Viking horned helmets in the myriad ranks of myths of the Middle Ages. In historiographical terms, this happened fairly recently.



    "봉건제"는 한때 중세 사회의 본질적인 특징, 아니면 적어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학계와 대중 역사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 군사 역사가들에게 1000년에서 1300년까지의 중세 시대는 한때 봉건 기사의 시대였다.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오늘날 중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마치 전염병처럼 그 용어를 피한다. (누군가 "죽은 구조물들을 끌어내라!"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들이 저술이나 강의에서 그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대개 그것을 일축하기 위해서다. 봉건제는 “암흑시대”, “초야권”, 바이킹의 뿔 달린 투구와 함께 중세에 대한 수많은 신화의 반열에 합류했다.

    -Richard P. Abels, The Myths of Feudalism and the Feudal Knight
  • 농민의 신분 하락
    중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농부들의 신분은 천민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그 위치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미 중세 초인 8세기부터 기사들의 원류인 ministerialis보다 높은 신분이었지만 봉건제와 장원의 확대로 예속인인 농노의 비율의 증가와 함께 기사들이 점차 장원주가 되면서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했으며, 또한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도시가 다시 부흥했고, 시민들을 형성하고 있던 상인과 수공업자들에게 무시받는 처지가 되었다. 악당의 뜻인 빌런과 난폭하다는 뜻의 바이올런스도 원래 의미 역시 도시민들이 농민들을 난폭하고 사나운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면서 부르는 멸칭이었다.

    사실 유럽 말고도 한국사에도 이와 유사한 전개로 후기에 상업의 발달과 함께 읍성, 읍치의 경제력이 상승하고 반대로 눙민들의 경제력은 하락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당시 보부상들이 조선군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을 공격했으며, 당시의 읍성에 살던 읍민들 또한 농민군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1895년에 나주 읍성이 농민군의 공격을 받을 때 유림뿐만 아니라 나주의 읍민들 또한 수성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만 중세 중기에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북해와 접하는 프리슬란트와 엘베강 하구, 12세기까지 독립을 유지하던 아이슬란트, 14세기까지 유지되던 스칸디나비아의 고틀란트 일대에서 농민들 스스로가 공화적 형태의 자치를 시작했다. 이들은 주변의 군주들과 주교들과 분쟁을 벌였고, 스위스의 서약 동맹 주축 또한 스위스의 도시들과 농촌 지구간의 동맹에서 비롯되었다.

    되려 중세시대는 산업 혁명 시기와 비교했을 때 노동시간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산업시대부터 가스등이나 전구가 사용되면서 야간에도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중세시대에 양초 같은 조명은 비싼 물품이었고, 해 지면 일 못 하기는 동서양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다. 대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침 먹고 날이 충분히 밝아지자마자 일을 시작해 해가 질 때까지 일해야 했지만, 일요일 휴일은 항상 보장되었고 휴가도 일요일을 제외하고도 1년에 8주 정도가 보장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교회법, 관습법 등이 농노를 가혹한 노동에서 지켜줬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정반대로 산업 혁명 때는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학대를 눈뜨고 당해야 했었다. 또 중세 때는 공휴일 개념으로 그리스도교의 축일(주님부활대축일, 주님성탄대축일) 때도 쉬었다고 한다.
  • 마녀사냥
    많은 사람들이 중세하면 마녀사냥을 떠올리는데, 정작 '흔히 생각하는' 마녀사냥은 근세에 벌어진 일이다. 종교재판에 대한 가장 잔혹한 안내서인 크라머와 슈프렝커의 '마녀의 망치' 또는 '마녀의 추'는 중세 말기인 1486년에 나왔고, 르네상스 시기부터 화형과 더불어 마녀들에 대한 가장 무자비한 박해가 이루어졌다.
  • 여성의 인권
    로마 제국 시대에 탄압받았던 독신주의 여성 신자들이 수녀회를 결성하여 제도화되었고, 여성에 대한 종교적 보호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등 여성의 지위는 고대보다 크게 진보했다. 또한 은퇴한 매춘부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구휼 정책들이 가톨릭 교회를 통해 시작되었다. 게다가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켈트나 게르만의 전통에 따라 영주의 아내로서 과부가 된 사람은 일부 영주영지 지배권이나 재산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41] 영주 부재시 저택과 장원책임을 도맡을 정도로 사생활은 남녀가 비슷했다. 교육 수준 또한 크게 높아졌는데 볼로냐 대학교, 파도바 대학교 등은 13세기부터 이미 여성 교수 임용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실제 서유럽에서 여성의 지위는 라틴, 게르만, 켈트 어느 문화권이든 당대 비그리스도권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고할 것.
  • 서구식 성씨의 시작점
    서구식 성씨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시기로 성씨가 본격적으로 언급된 시기는 10세기 동로마 제국으로 아르메니아계 군사 귀족 가문들이 토착 귀족들과 구분하기 위해 성씨를 사용한 것이 시초로 이후 중세 중기 이후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으며, 영국의 경우 1086년 노르만계 귀족들과 젠틀리 계층에서부터 성씨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도 성씨를 만들어 사용하자 브리튼 제도를 제외한 유럽의 귀족들은 언어별로 드 혹은 데(De), 폰(Von), 등으로 자신들과 평민들을 구별시켰다. 그리고 중세 중기를 기점으로 봉건적 신분 질서에 따라 네가지로 나눠진다. 1. 윗대 선조의 이름을 성씨로 하는 가족성, 2. 대대로 가업으로 하는 직업에서 유래된 직업성, 3. 대대로 살고 있는 지명에서 따온 지명성, 4. 별칭에서 유래된 별칭성이다. 이중 1. 2번째는 귀족보다는 평민의 비율이 높았다.[42] 3, 4번째가 평민보다는 귀족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또한 여성이 결혼 후 남편의 성씨를 따르는 부부동성 또한 성씨가 사용되기 시작하는 중세 중기로 추정되며 중세 후기로 가게 되면 관습적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 교회
    사회에서 교회가 가지는 위상이 현대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기에, 이 부분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상당히 부당한 비판이다. 우선 중세의 교회는 현대의 교회와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걸 알아둬야 한다. 현대의 교회는 순수하게 종교 집단의 의미를 지니며,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활동 수도회 소속이 아닌 다음에야 종교 이외의 분야에 관여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광경이다. 그러나 중세의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을 넘어서 교육, 행정, 학문, 사회복지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 기관에 가까웠고 이는 일부 지역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43] 따라서 중세의 교회가 교무금(십일조)을 걷는 것은 세금을 거두어서 공공 사업에 쓴다는 의미로 이해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먹는 신부 놈들이 돈을 뜯어가네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44]
같은 원리로 '중세의 교회에서는 천동설을 정설로 가르쳤다'는 명제는 '교과서에 천동설이 정설로 적혀있었다.' 정도의 의미로 봐야지, '교리적 차원에서 천동설을 진실이라 가르쳤다.'로 봐서도 안된다. 국가가 현대와 비슷하게 각종 공공사업 대부분을 떠맡는 모습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모습이다. 물론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재판을 받은 갈릴레이의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판한 것도 우르바노 8세교황이라 출판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교황청에서 허가까지 받았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45]기는 해도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피해를 본건 사실이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에 대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1992년에 인정하기는 했다.
비록 교황권이 강하던 시기였던건 맞지만 그 교황권도 교황이 세속적인 간섭을 너무 행한 나머지 줄어들었으며, 줄어든 교황권과 중앙집권화의 약화가 단적으로 나타난 사태가 바로 아비뇽 유수대립교황의 발생이다. 교황은 분명 그리스도교를 기반으로 한 중세세계의 질서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중부 이탈리아의 대영주이기도 했다. 즉 중세에 교황권이 무작정 우위에 섰다는 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 종교적 자선 단체에 의한 사회·복지 인프라 구축
    위의 교회와 연계된 내용으로 동양에 비해 신분제가 강했던 중세 유럽이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의 개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에 부를 쌓은 자본가들의 호응을 받던 청부설을 주장한 개신교 이전의 그리스도교(가톨릭)을 믿던 부호들은, 초세기에 유대교와 갈라진 후 확립된 청빈적 가르침에 따라 부를 늘리는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자선을 통해 덕을 쌓아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려는 풍조가 강했다.[46] 이에 사후 유증을 통해 재산을 사회의 빈민 계층에 대한 복지 차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47]
이러한 과정을 시행하는 것이 바로 종교(그리스도교)적 가치에 의해 가톨릭 교회를 통해 설립된 자선단체로 병원, 구빈원, 요양원, 고아원, 작업장 등을 운영했다.
다만 중세의 복지는 전체 빈민을 구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사회 지도층들은 빈민을 두 분류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순례자들이었고, 후자는 걸인과 고아, 과부, 독거 노인들로이었으며, 주로 후자에 구휼이 집중되어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 인구수가 증가했지만 부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걸인의 수가 증가했는데 이러한 걸인들이 무리지어 여러 도시로 전전하면서 구걸 행위를 하는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여러 규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하층민에게 교율과 함께 복지의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교회와 협력하기 시작했고, 중세가 지난 후이기는 하나 네덜란드 공화국과 같은 개신교 국가들 또한 19세기 초까지 길드가 폐지될 때까지 길드에 의해 복지가 관리되었다.
또한 이시기부터 교회가 공동묘지 역할을 하게되었다. 일단 중세로 접어들면서 그리스도교가 전파됨에 따라 본당 사목구를 중심으로 도시나 마을 등이 형성된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동네 성당/교회에서 장례 예식을 치르고 바로 옆 묘지에 묻혔다. 지금도 유럽 동네들을 돌아다니다보면 마을 중심에 위치한 성당이나 예배당을 중심으로 공동묘지가 포진되어있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며, 묘지의 관리는 보통 교회측에서 맡았다.
다만 신분이나 사회적 위치 등에 따라 매장 위치가 다르다. 일반인의 경우 대개 상술한 대로 성당 옆의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왕족 및 귀족과 같은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은 영묘봉안당의 형식으로 성당 바닥이나 지하에 관만 안치되었으며, 대표적인 영묘 역할을 한 성당으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프랑스의 생 드니 대성당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우편 시스템의 한축을 담당했다.[48] 프랑스를 근거지로 하는 시토회의 경우 6,000개 이상의 수도원들을 연결하는 연결망을 바탕으로 우편 서비스를 제공했다.
  • 법률
    11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간단하지만 불안전하고 분산되어 있던 기본의 교회법과 게르만법을 대신해 이탈리아 북부 도시인 볼로냐를 중심으로 이르네리우스와 같은 법학자의 주도하에 로마법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볼로냐 대학교의 법학과 커리큘럼은 크게 교회법과 로마법인 시민법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특히 중세 중기는 서유럽에 각종 법률서가 집필된 시기로 먼저 볼로냐의 수도자이자 법학자였던 그래티안에 의해 교회법의 집대성인 그래티안 교령집이 집필되었고, 13세기 작센에선 작센 내의 게르만법을 집대성한 작센 슈피겔이 집필되었으며, 이밖에도 이베리아 반도의 그리스도교 국가들#,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에서도 자체적인 법률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는 서로마 붕괴 후 사라졌던 변호사와 같은 법률 계통의 직업 등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중세 후반이 되면서 변호사들 중 일부가 왕이나 국가를 대리해 기소권을 행사하는 검찰이 갈라져 나오기 시작한다.관련 링크
또한 상업 및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무역에 관한 관례와 규칙이 생겨났고, 이를 종합한 상법과 해상법이 등장해 상인들 사이의 국제법을 정착한다. 당시 상법의 내용은 정기시장의 교역날짜, 교역절차, 시장관리, 화폐유통, 도량형 표준, 시장 법원관리, 시장 중의 은행법규, 상인조직, 계약, 치안관리, 등을 담고 있었고, 해상법은 선박관리, 화물적재, 사고보장, 해운 보험 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특허권이 특허법으로서 법에 편입된 시기도 바로 이시기로 1474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시스템의 특허 조례를 만들었다.
한편 11세기 이후의 영국에서는 현대의 법률 제도인 배심원제와 영장 기소제와 보통법과 형평법이 등장했다. 배심제도는 본래 프랑크 왕국의 것으로 본래 신명재판을 통해 판경을 내리는 방식과 달리 왕실의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을 조사할 때는 선서의 방법을 쓰지 않고 법관의 주도하로 지식인들을 모아 그들에게 진상을 설명하게 하는 방식을 고안했는데, 나중에 신분이나 조세에 관련된 개인 재판에도 사용되었으며 이때는 재판 당사자의 이웃 중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 이웃조사단이란 임시 조직을 구성하게 했다.
이후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해 영국왕에 취임하면서 프랑스의 이웃조사단 제도를 이용해 영국 전역의 토지상황을 제대로 조사했고, 이후 1164년 헨리 2세가 클라랜든 칙령을 통해 법정 내에서의 배심단 제도를 확립해 순회재판 때 현지 주민 12명을 배심단으로 구성하게끔 하였다.
아울러 영장 기소제 역시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가 영국 내의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지방법원을 보존하고 지방관습법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하면서 국왕의 명의로 재판을 할 것을 요구해 원고가 법원에 기소를 할 때 반드시 국왕의 대법관에게 영장을 신청하면서 성립되었다. 보통법 또한 법관들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순회재판을 하느라 각지의 재판에 참여하면서 각지의 관습법에 관해 잘 알게 되어, 런던으로 돌아와서 다른 지법에 파견된 법관들과 함께 사건에 대해 토론하면서 각지의 관습법을 소개해 전국의 법을 조금씩 통일해 나간 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12~13세 양모업과 상업무역이 왕성해지면서 재산에 얽힌 갈등이 빈번해 점차 보통법의 한계가 드러나 다시 관습법으로 회귀하지만, 14세기 대법관의 양심과 정의에 기초한 형평법이 등장하고 이후 15세기에 대법관과 그 조수가 함께 정식으로 형평법원을 구성하게 된다.
프랑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필리프 2세가 즉위하기 전 상공업이 부흥하면서 사회가 다양화되가기 시작했고, 또한 오래전부터 카패 왕조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왕권 강화와 맞물려 영주 세력을 견제할 차원으로 필리프 2세가 즉위한 후 프랑스 각지에 위치한 왕령지에 각각 법관들을 파견해 북프랑스 일대에는 시민 출신인 바이이(Baillis:대관)와 남프랑스 일대에는 기사 계급으로 구성된 세네샬(Sénéchal:지사)을 파견했다.이들은 파견된 지역의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이 시기에 한계가 있었으나 무죄추정의 원칙이 로마법과 게르만족의 관습법 등을 통해 존재하고 있었다.
  • 도시의 확대
    구 로마의 변경 도시인 을 제외하면 독일 도시들은 인구 성장률이 낮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독일의 식민지 개척 운동이나 도시화 과정에서 기세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4세기 동안 2,500개의 도시가 건설되었고, 그때 정립된 도시정부 체제는 실질적으로 19세기까지 유지되었으며, 본래 도시 경계는 변경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역사 속의 도시』 1권 中. 루이스멈퍼드 저.

    상업의 발달로 인해 도시들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 도시들은 각자 영주와 국왕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아 운영되었다. 또한 인구 또한 늘어남에 따라 대규모 개척사업등이 이루어 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동방식민운동이 있다. 그밖에 자세한 내용은 참고하는 것이 좋다.
  • 유대인에 대한 차별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이 시기부터 심해졌다. 유대인들을 이교도라고 부르는 것은 물론이고 서유럽이나 비잔틴 제국에서는 유대인들을 산채로 불태우는 등 중세에는 유대인들이 대우가 안좋았다.

3.2.9. 의학과 위생


중세에 대한 폄훼 과정에서 제일 큰 오명을 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의학과 위생이 끔찍한 수준이었다고 회자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동시대 타 지역에 비해서 특별히 뒤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중세 의학에서 가장 흔한 형식의 치료는 약물요법이었다. 이런 약초들의 종류와 각각의 사용법의 경우 지역의 문화나 토속 종교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중세의 의사들은 4체액설에 대입시켜 나름대로 다시 재구상해 체계를 갖추었는데 이를 doctrine of signatures 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골무꽃 씨앗은 두통 치료제로, 폐병풀 잎은 결핵 치료에, 좁쌀풀은 눈 관련 질병 치료애 사용했으며 울타리쐐기풀을 소독제의 용도로 사용했다. 적절한 약물을 결정하고 약을 짓는 능력은 약효에 대한 지식과 함께, 대부분 의료행위자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이었다. 단일 약재가 처방될 때도 있었고 여러 약재가 혼합 처방될 때도 있었다. 약재의 성분은 대부분이 약초였지만 동물이나 광물이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6세기가 되자 이런 약초학의 발전에 따라 치료 물질, 즉 재료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고대 그리스 문헌들[49]을 번역했으며, 볼로냐 대학교 등 대학들도 식물학을 직접 개발하고 연구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했는데, 이때 인쇄술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어쨋든 이렇게 식물에 대한 원전 텍스트와 이를 응용하는 약물학이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묶임으로써 식물 연구가 급속히 발전했고, 의학과 철학, 약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후일 근세마녀사냥의 영향을 받아 살짝 주춤하기도 했지만…

한편 이런 연구를 널리 보급한건 당연하지만 수도원이었다. 수도원들은 대규모의 허브 정원을 설치하는 등 약초학이 널리 퍼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원래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병은 신의 벌 또는 악마가 주는 고통이기 때문에 회개만이 치유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하는데, 교회에서는 이것을 ‘궁극적 치료자는 신이지만 인간은 의료행위를 통해 인간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석해 의학에 정당성을 실어 주었으며, 결정적으로 편견과 달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질병의 원인에서 자연적인 원인을 배제하지 않았기에[50] 교회는 히포크라테스 4체액설을 옹호했으며, 특히 수도원은 약초 및 식물에 관련한 문헌들을 엄청나게 기록하거나 번역하고,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하고, 또 이런 번역한 것들을 퍼트리는 역학을 수행했다. 특히 치료행위의 경우 베네딕트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외과수술도 매우 초보적이지만 이루어졌는데, 10세기경 고대 영어로 작성된 잉글랜드의 의학서 Bald's Leechbook에는 창자가 비어져 나온 상처를 수술하기 전 약초를 우려낸 물에 손을 담그라든가, 비단실로 수술 부위를 봉합한 다음 계란 흰자로 만든 연고를 바르는 등 체계적인 외과수술 방법이 정리돼 있다.

이후 중세 후기가 되면서 이런 작업들이 성당으로 이관되었으며, 앞에서도 말했듯 대학에서도 이를 제도화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근대적 의학이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는데, 일례로 영혼과 육체에 관한 논쟁은 뜬금없게도 해부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갈레누스의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외과 의학도 발전했다. 또한 당대 최고 인기 학문인 천문학-점성술도 의학 이론으로 동원되었으며, 이런 여러 계통과 학파들이 경합하며 경쟁적으로 다른 이론으로 병리학을 설명하려 했다. 또 이론과 별개로 경험적 지식도 축적되어서, 흑사병 시기에는 도시에서 빠져나가 전원 지대로 피난하는 것이나 가축의 도시 출입을 막거나 40일간 해외에서 온 배를 격리하는 등의 방역도 시도되었다. 흑사병의 증세를 살펴 가래톳 흑사병과 폐렴성 흑사병이 다름을 이미 파악한 의사도 존재했다. 가끔 보면 자칭 역사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중세 때는 의료행위를 불경하게 여겼기 때문에 의사들을 다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개소리다.

한편, 정신병에 대한 치료는 통일되지 않고 의사별로 제각각이었는데, 어떤 의사는 마녀나 악마가 정신병을 일으킨다고 믿어 기도와 퇴마를 통해(…) 치료하려고 한 반면, 어떤 의사는 정신병은 악령이 몸에 씌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악령을 나가게 하기 위해 두개골을 절개해서[51] 어떤 악령이라도 나가게 만듦으로써 치료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중세 의학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거짓만은 아니었던 셈인데, 다만 당시에도 이런 방식을 쓰는 의사는 드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의사는 4체액설에 따라 정신병을 해석하려 하였으며, 장기의 오작동이나 체액의 불균형을 원인으로 꼽고는 했다. 그중 흑담액이 과도하게 나와서 정신병이 일어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헌다.

목욕 문화가 실전되었느니 도시에 상하수도가 없었느니 하는 낭설도 돌지만, 전부 거짓.[52] 사람들이 죄다 목욕을 안한 사회였으면 목욕을 자주 안한 수도자가 금욕주의를 철저히 지켰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목욕을 안하는 것이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욕을 즐겼다는 것이다.[53] 또 수도원, 도시, 성체 등 독립적인 건물이면 으레 수도교가 존재했다. 또 중세인들은 빗물이 제일 순수한 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빗물을 받아 모아 상수로 쓰는 시설도 설치되었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만 봐도 수도교가 달려 있다. 중세인들은 위생 관념이 있을만큼 있었고,[54] 위생과 병이 상관관계가 있음을 충분히 알았으며 도시가 오염되면 특히 위험하단 것은 잘 알고 있어서 도시 공동체는 도시의 위생 관리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참고중세시대에는 로마의 수도관, 목욕탕, 수세식 화장실이 없을까?[55] 다만 비위생이 병을 일으키는 원리가 파악되었던 것은 아니고 나쁜 냄새가 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는데[56], 악취가 세균으로 인한 부패로 발생하는 것을 감안하면 엄밀하게는 틀려도 결과론적으로 일리는 있는 이해를 가졌던 셈이다. 세균학이 태동해서 과학적인 의학이 시작되고 근대적 위생 관념이 생겨난 것은 중세가 대충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19세기의 일이다.

물론 이러한 의학이나 위생 관념이 대다수의 사람에게 돌아간 혜택은 아니고, 도시가 많은 부유한 지방 위주의 일인데다가 극적으로 중세 유럽인들의 수명을 늘리지도 못했다. 다만 이러한 한계는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적이었기에, 특별히 중세 유럽의 의학이 기괴하거나 뒤떨어졌다고 보는 시각은 지양해야 한다. 동아시아도 지네, 전갈, 말벌 등을 약재로 사용했고 수은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해서 사람 잡던게 전근대 의학이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더럽다는 묘사가 빠지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 정작 원주민들은 '쟤들이야말로 더럽다'고 씹었다는 일화가 꽤 있다.

다만 외과술은 여전히 정체 상태였다. 고대서부터 외과의의 신분은 내과의보다 한 단계 낮았으며, 무엇보다 해부학적 지식이 근·현대와 비교하면 일천한 수준으로 13세기부터 대학에 의과가 생겼음에도 정식과목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외과술은 전문의가 아닌 이발사망나니들이 전담했다. 사족이지만 성직자들도 근·현대의 선교사들처럼 1163년 까지 의료행위를 했으나 이후 교황청에 의해 외과술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4세기 화약이 전파되면서 외과술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해, 몸에 박힌 화살촉을 손 쉽게 제거하는 도구, 상처 등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거나 끓는 기름을 붓는 방식 대신 압박 혹은 혈관결착과 같은 합리적인 기술로 바뀌게 되었고, 지혈제 또한 덜 독한 약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신마취제가 발명되는 19세기까지 아편과 같은 마약이나 아니면 흡입 마취제에 의지해야 했으며, 사망률 또한 상당히 높았다.

3.2.10. 과학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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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암흑시대'라는 오해와 반론

JTBC 차이나는 클라스 - "암흑시대는 독일과 일본에 의해 씌워진 프레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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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초 로마네스크 건축 (제르미니 데 프레) 12세기 고딕 건축 (샤르트르 대성당)
9세기 교회 건축과 12세기 교회 건축.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세도 이전의 시대에 비해 차근히 발전해온 시대이지, 퇴보한 시대가 아니다. 고대 로마와 비교하든, 서유럽의 중세초기로 한정하든, 학자들은 ‘퇴보’란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래에서 Tristan Hughes가 설명하듯, 20세기부터 학자들은 중세 초 서유럽에 대해서도 암흑이라느니 퇴보라느니 하는 말을 거부한다.[57]

대다수의 서양 판타지물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58]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주는 경우도 많고, 서양에서는 서양 판타지 팬이 아니라도 기사, 갑옷, 공성전 등을 좋아하는 밀덕, 역사덕후들이 갖는 중세 로망도 많다.

오히려 이와 대비되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오해가 강하게 자리잡혔다. 그리고 픽션이라도 그런 중세의 현시창 분위기를 더 크게 어필하면 다크 판타지물이 된다. 즉 중세시대와 중세시대 픽션은 환상적인 이미지와 어두운 이미지가 공존하는 셈인데, 어느 방향이든 인기와 인지도는 많고 논란도 많은 메이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암흑시대의 의미는 '교회의 억압에 의해 모든 것이 퇴보한 어둠의 중세시대'로 통용되는데, 여기서 2가지 논의점이 발생한다.
1) 정말로 모든 것이 퇴보된 암흑시대인가?
2) 퇴보되었다면, 그게 종교(그리스도교-가톨릭) 때문인가?

일단 결론을 내리자면 둘 다 아니다. 당시를 살아가던 농노나 평민들도 자기네 시대가 암흑과 같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퇴보된 시대도 아니었고, 중세의 가톨릭 교회는 서로마 멸망 후 혼돈의 카오스인 시대 상황에서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중들에게 중세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편견이 박혀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세라는 역사학적 개념이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중세의 이미지는 14~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역사 속에서 인간성이 존중되고 인간 본연의 창조적 힘이 발흥되어 문화가 만개했던 행복의 시대를 그리스·로마시대라고 생각했으며, 그 유산인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해 그러한 시대가 다시금 도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중세를 '중간시대, 쓰레기인 추악한 시대'라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고전과 당대라는 2개의 참된 시대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 시기는 그에 의하면 소거되어야 할 쓰레기였다. 이렇듯 중세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까기 위한 목적으로 페트라르카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중세라는 용어는 그 후에도 여러 인문주의자들에게 사용되면서 점차 일반화되었다. 이때까지는 중세라는 표현은 물론 어떤 특정한 시대를 지칭한다거나 명확한 시대구분 없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편의적 사용이었다. 이러한 편의적 사용을 주교이자 교황청의 사서였던 죠반니 안드레아가 고대-중세-근현대라는 3시대 구분법에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시대구분 형태로 자리잡았다. 1469년 교황청 사서 조반니 안드레아는 중세란 표현이 '낡은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근대인'들의 구분을 하는 기점이라고 설명했다.

스위스 출신의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르네상스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부터 중세를 폄하하는 경향이 더 번성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 자체는 조르조 바사리 같은 르네상스 운동의 주역들로부터 사용된 것이지만, 그 용어를 '시대' 개념으로 정립한 것은 부르크하르트였다.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를 고대문화의 부활이자 근현대의 출발점이요, 중세와의 급격한 단절로 해석했다. 이런 주장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의 추종자이자 동시대인이었던 존 시몬즈는 두 시대를 다음과 같이 확연히 대조시켰다.
중세 시대의 정신 상태는 교의(敎義), 권위, 스콜라주의와 같은 교회의 우상들 앞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엎드려 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마침내 인간의 노력을 위한 시간이 도래하였던 것이며, 그 이래로 인간이 여전히 참여하는 진보가 계속되었다. 르네상스의 역사는 인간 정신이 쟁취한 의식적 자유의 역사다.
이렇듯 수백 년 동안 까이고 또 까이던 중세는 19세기 말에 몇몇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재평가를 시작했고, 20세기 초부터는 역사학계에도 본격적으로 재평가의 바람이 불었다.

게르만계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특징이 사실은 중세에도 있었음을 밝혔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나 마술 등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태도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는 연구도 나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도 나왔다.[59]

현재에 와서는 르네상스는 특정한 '르네상스 정신'을 갖추었다고 해석되지는 않는다. 즉 르네상스 시대는 고전에 대한 어떤 새로운 정신의 시대라기보단 그냥 간단하게 '근대 초'라는 것이다. 또한 대다수의 학자들은 르네상스를 새로운 시대라기보다는 중세 문명의 성숙이자 완성으로 보고 있다. 또한 '암흑시대'라는 부정적 의견은 전문 역사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에는 거의 폐기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중세는 서양사의 한 시대에 붙인 이름일 뿐이고, 이 시대는 서구 문화에 독특하고도 중요한 공헌을 추가했으며, 그 공헌은 공정하고도 편견 없는 연구와 평가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세의 부정적인 특징인 가난, 무지, 전쟁, 종교/정치적 박해 등은 마키아벨리와 종교전쟁, 마녀사냥의 시대인 16세기에 더 심해졌다고 보고 있다.

19세기에 르네상스를 서술한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기 사람들이 황금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여 지금까지도 그런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는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화가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 민중들의 고통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일반 대중들이 종교의 생활규범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는 세속화(secularization)는 19세기의 일이었으며, 공중 차원에서의 세속윤리(secular ethics) 담론의 본격적인 진행은 사실상 현대의 시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페즈는 르네상스 시기가 경제 침체기였다고 보았다. 사턴과 손다이크는 르네상스 시기에 과학혁명이 지연되었다고 보았다.

서유럽의 중세초는 동양사로 치면 중국의 삼국시대와 오호십육국 시대를 연상하면 쉽다. 한나라 정치 질서의 붕괴는 당대인들의 삶에 심각한 고통을 주었으며, 많은 도시들이 초토화되고 인구의 감소와 경제적 혼란을 불렀다. 그러나 이건 '문명의 퇴보'가 아니다. 위촉오이든 서진이든 기존 한나라의 문명을 그대로 계승했으며, 심지어 오랑캐라고 폄하 당하는 침투 왕조들도 기존 중국의 문명과 통치 엘리트 집단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았다.
서유럽의 상황도 그러했다. 정치 질서의 붕괴는 분명 고통스러운 재앙이었으나, 게르만 왕국들은 서로마의 통치 엘리트들과 문명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았다. 문명은 단절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중세 초는 유럽의 전통적인 '암흑시대' 담론으로 보기보단, 차라리 동양사에서 쓰는 '난세'라는 말이 훨씬 적절할 것이다.

물론 '문명 퇴보'는 아닐지언정 서유럽이 난세를 맞은 건 맞다. 단 이 역시도 중세 초기의 몇 세기에 한정된다. 어쨌든 그래서 동로마는 제국의 신앙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하느님은 어느 분이신가?',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등에 주목하여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발전시킨 반면, 서방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로마가 붕괴되고 난세가 펼쳐진 세계를 보면서 그 자신도 시련을 겪어야 했고, '인류의 문명은 영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죄악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등의 사유를 발전시켰다.[60]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도 유럽인들은 조금씩 난세를 안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질서를 바로 잡은 곳이 서유럽에선 교황청이었으며, 8세기까지는 종말론을 체감할 만했던 서유럽에서도 9~10세기에는 지역별로 비교적 안정적인 정권이 수립되어, 11세기 무렵부터는 대부분의 외침을 단절시키고 오히려 정치·문화적인 권역을 확장시켰다.

요한 하위징가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와는 비교하면서 중세 후기(14-15세기) 프랑스어권을 연구하여 이 시대 프랑스어권은 재생의 시대라기보다 비관주의와 데카당스의 시대를 거쳤다고 보았다.
중세시대는 겨울이 아니다. 중세는 마치 분명 저물어 가지만,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운 붉은 석양을 남기는 가을처럼 아름다운 시대였다.
하위징가 '중세의 가을' 中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근의 세계 사학계에서의 대세는 중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학자들도 로마 붕괴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이로 인한 도시 파괴 등까지 부정한 적은 없으며, 기존에 고대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담아 '퇴보'라 싸잡아 말하던 것에 대하여 상기했던 대로 역사적 연구를 통해 명암을 확실히 조명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61] 또한 상술했듯 아무리 혼란이 있었다 해도 무려 천 년이 넘는 중세 시기가 싸잡혀 암흑시대로 규정당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오늘날 중세사학계에서는 중세 '초'에 대해서도 암흑시대란 말을 쓰지 않는다. 더욱이 기존의 중세에 대한 편협한 관점을 자정하는 것이 비판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미 고대 시대부터 신분제는 고착되었고 노예와 약탈 경제가 주축이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외면하고 있다.
In fact, it was a time where literature was encouraged and highly-valued, especially by the upper-echelons of Early Middle Age society.
사실, 특히 초기 중세 사회의 상류층에 의해서 문예는 장려되고 높이 평가되었다.

The term ‘the Dark Ages’ gained greater usage during the 18th century Enlightenment ...
"암흑 시대"라는 용어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다 ...

During the 20th century, many historians have rejected the term, arguing that there is a sufficient amount of scholarship and understanding of the Early Middle Ages to make it redundant. However, the term is still used in popular culture and regularly referred to.
20세기 동안, 많은 역사가들은 이 용어를 거부했다. 초기 중세에 관한 학술과 이해는 이 용어를 폐기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It will take time for the term the ‘Dark Ages’ to fully fall out of use but it is clear that it is an outdated and pejorative term for a period where art, culture and literature flourished across Europe.
"암흑 시대"라는 용어가 완전히 사라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예술, 문화, 문예가 유럽에서 번창하던 시대에 대해서 이 용어가 구식이고 경멸적이라는 건 분명하다.
-Tristan Hughes #[62]

3.4. 참고 자료

이 문서는 반달리즘식 수정이 자주 이루어지므로 위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공신력 있는 자료들을 몇가지 소개한다. 서적의 경우 도서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네이버 지식 사전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 요한 하위징어 『중세의 가을』
  • 자크 르 고프 『중세를 찾아서』, 『서양 중세 문명』 등
  • 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 중세사』
  • 로널드 넘버스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 주디스 코핀, 로버트 스테이시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 마시모 피글라우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中 미신에서 자연철학으로, 자연철학에서 현대과학으로
  • 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근대 유럽을 만든 중세의 모든 순간들』
  • 페리 앤더슨 『고대에서 봉건제 국가로의 이행』,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63]
  • 『자연과학의 이해』
  • 움베르토 에코(기획) 『중세』 시리즈[64]
  • 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서양 중세사
  • 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서양의 장원제』,『기적을 행하는 왕』
  • 역사 유튜버 함께하는 세계사중세 사람들의 모든 것 몰아보기

3.5. 관련 요소


30년 전쟁의 경우 에누리 없이 근세에 일어난 사건이다.[66]

3.6.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

실제 중세가 소재일 경우엔 주로 기사가 말을 타고 다니거나 영주나 성직자로부터 가호를 받고 적과 맞서 싸우는 내용으로 등장한다. 묘사되는 적은 주로 바이킹이나 이슬람 세력, 몽골군 등 중세 유럽을 휩쓴 이방인들이다.

그 외 서양 판타지 장르 대부분의 배경으로 자주 선정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기사가 등장하지만 더 나아가 마법사가 드래곤, 요정같은 가상종의 등장도 빼놓을수 없다.[67]

암흑의 시기라는 인식 때문인지 이방민의 침략과 흑사병으로 고생하는 장면은 필수요소. 그 외 거지가 왕을 구하거나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기사나 귀족으로 신분급상승을 한다거나..

3.6.1. 기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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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6.2. 중세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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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라는 용어의 오남용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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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라이트 노벨

일본의 라노벨 작가인 하세쿠라 이스나의 작품인 늑대와 향신료, 늑대와 양피지,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또한 판타지에 실제 중세사와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작품의 배경이 11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작가 스스로 13권 후기에 40에서 50권 사이의 중세 유럽에 대한 자료를 모아 해당 작품을 썼다고 인증한 바가 있어 본 문서와 같이 대조해보며 읽어 볼 만하다. 또한 책벌레의 하극상은 판타지 세계관으로 고증이 많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중세 시대에 기반한 세계관과 종교의 설정이 뚜렷하여 칭찬받는다.

3.6.4. 문학

3.6.5. 영화

3.6.6. 게임

3.6.7. 애니메이션

3.6.8. 드라마

  • 미디벌 오디세이 시리즈 - 미국의 드라마로 총 시즌 7까지 나왔으며 고대 로마의 멸망부터 르네상스 이후 시기까지 다루었다.
  • 왕좌의 게임 시리즈 - 유럽의 중세시대를 어느 정도 모티브로 하고 있다.

4. 유럽 밖의 중세

'중세'의 비유럽사에는 적용하기 어려우며, 유럽이 아닌 지역에 '중세'가 존재하였는지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는 애초에 시대구분론이 서양사 중심의 세계사가 형성된 탓이 크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를 타파하고 발전한 농노제도라는 경제시스템은 전세계 보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유럽이라는 특수한 지역의 특수성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하지만 제국주의 진영에서 사회진화론을 밀고, 이후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마르크스의 5단계 발전설을 밀면서 엄청나게 긴 시간동안 이러한 설[71]이 퍼지게 된다.

대체적으로, 유럽 외부의 중세를 설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 고대 세계에서, 특히 특정 중심 지역에서 발달한 제국의 통일적 통치 구조가 붕괴하거나 유명무실화하여, 통일적 통치 질서가 무너진다.
    • 유럽 중세의 로마 제국의 쇠퇴에 대응한다.
    • 교토학파 관점에서 중국의 후한 말, 도쿄학파 관점에서 중국의 안사의 난 이후, 인도의 굽타 제국의 쇠퇴 및 붕괴, 한국에서의 통일신라의 쇠퇴 및 붕괴, 일본에서의 율령제 국가의 통치력 약화, 이란 및 이라크·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사산 왕조의 쇠퇴 및 붕괴 등에 대응된다.
    • 한국의 경우 시작부터(...) 통일신라와 발해라는 양축이 존재하는 남북국시대 구조였고 고려라는 단일 국가로 통일되므로 오히려 굳이 굳이 따지면 다른 지역과는 방향을 역행하는 셈이 된다. 그나마 잔존 문헌의 압도적인 불균형과 고려의 영토 대부분이 통일신라를 계승한 것이라는 현실적 요소 때문에 아래 요소를 대입할 때는 발해는 빼고 대체로 통일신라에 대응시켜 보는 편.
  • 반면 고대 세계의 중심부와 교역 및 국제 관계 등을 맺어 발달한 주변부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이 대두되며 통일 국가의 손길을 물리치며 독립적 또는 반독립적 상태에 접어든다. 이는 때때로 아래의 변경을 넘어 침투한 이민족 왕조와 엄밀히 구분할 수 없다.
    • 유럽 중세의 군인 황제 시대사두정치,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분열 등에 대응시킬 수 있다.
    • 교토학파 관점에서 중국의 후한 말 이후 군웅할거남조문벌귀족화된 호족의 강세, 도쿄학파 관점에서 절도사의 난립, 인도의 라지푸트 왕조들의 건립, 한국에서의 호족과 사찰 세력·도적의 발흥, 일본에서의 장원공령제사무라이 계층의 성립 등에 대응된다. 중동 역사에서도 메디나메카 등 이후 무함마드의 세력이 처음 확보해 근거로 삼은 지역은 이전의 동로마와 사산 왕조가 대결하던 세계 질서에서 주변부였다.
    • 도쿄학파 관점에서 본 중국에는 송의 통일 이후 이에 정확히 대응시켜 볼 존재가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요나라, 금나라, 서하 등의 외부 왕조를 억제하지 못했을 뿐 오히려 송 대 국내에서는 지방의 직할 통치와 황제 독재권이 강화되어 봉건 질서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명나라와의 연속성 또한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 한국의 경우 고려시대 지방 호족의 자치 조직에 지방관이 개입하기 힘들었으며 속군·속현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 3경제가 운영되어 특히 서경이 독립적 의식을 많이 가졌던 점 등이 '봉건적' 요소로 언급되기는 하나 국가가 조각조각 난 다른 사례들에 비해서는 내세우기 쉽지 않은 편이며, 그 문제가 대부분 해소된 조선 건국 이후에는 짜맞추기조차 힘들다. 한편 최광수의 난, 이연년 형제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 등에서 보이는 삼국 부흥 운동의 성격이 통일 국가 질서와 어긋나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하나 이 또한 굉장히 일시적이며 명목뿐인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받는다.
  • 또한 변경 지대에서는 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력이 재정 부담으로 인해 약화되거나 내전 등에 소모되며 이민족으로 여겨지던 세력이 강성해지거나 새롭게 유입되며, 이는 앞서 언급했듯 이미 문제가 노출되던 고대 국가의 변경 안보와 재정의 악화에 음의 피드백으로 작용하게 된다.
    • 유럽의 게르만·마자르·바이킹·불가르, 하자르, 페체네그, 쿠만-킵차크 연맹, 몽골 등 러시아 초원을 거쳐 온 유목 민족의 침입 및 이슬람교 세력의 침입으로 인한 알안달루스 등 유럽 내 이슬람 정권 형성 등에 대응될 수 있다.
    • 교토학파 관점에서 중국의 5호(胡) 세력, 도쿄학파 관점에서 거란여진·서하, 인도의 에프탈 및 이슬람교계 세력 등에 대응될 수 있으며, 정통 칼리프 시대 이후의 이슬람교 세계는 베르베르와 범(凡)튀르크 세력 등의 다양한 세력을 받아들여 성립했다.
    • 한국의 경우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을 이에 대응시킬 수는 있으나 이들은 이후 한국사와는 별도의 길을 걷게 되므로 애매하다. 오히려 한국사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존재라면 패서 지역의 고구려계 호족을 언급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 일본의 경우 지리적 특성상 이에 대응되는 존재가 없다. 에미시에 대한 원정은 오히려 통일 국가 시대였던 8~9세기 무렵에 대체로 완료되었다.
  • 이로 인해 통일된 국가 질서가 무너지고 보편적인 하나의 관념으로 구성된 '세계' 내에서 다수의 국가가 존재하게 되며, 고대 국가의 직할 통치 제도보다 포괄 범위는 넓으나 통합의 강도는 느슨한 봉건적 질서가 형성된다.
    • 유럽의 로마 제국 붕괴 이후 다축 구조 및 봉건제에 대응된다.
    • 교토학파 관점에서 중국의 오호십육국시대남북국시대, 도쿄학파 관점에서 송나라요나라·금나라·원나라의 남북 대립 구도, 인도에서의 굽타 왕조 붕괴 이후 분열기, 한국의 후삼국시대, 일본에서의 겐페이 합전·남북조시대·센고쿠 시대 등에 대응될 수 있다. 이슬람교 세계의 경우에도 정통 칼리프 시대 이후의 분열은 이에 대응시켜 볼 수 있으며 오스만 제국사파비 왕조 이전까지의 '분열'이라는 요소는 꽤 중시되는 편.
    • 다만 한국의 경우 후삼국시대가 길지 않고 얼마 안 가 고려로 통일되며, 통치 질서도 완연한 군현제가 되어 이것을 중세의 기준으로 보기는 애매하다. 중국의 경우도 교토학파 관점에서는 막부제를 이와 같이 볼 여지가 적지 않으나 도쿄학파 관점에서 특히 송나라를 이렇게 볼 수는 없으며 요나라·금나라의 이중 통치 제도를 이렇게 보기도 애매한 편.
  • 이러한 혼란 속에서는 계층 구조가 혼란할 수밖에 없으므로, 상류층에 대해서는 고대의 획일적 계층 구조보다는 비교적 유연한 계층 구조가 형성된다.
    • 유럽의 봉건제 사회 구조 및 기사 계층의 부각에 대응된다.
    • 교토학파 관점에서 중국의 장군 제도의 서열화 및 도독의 출현 등과, 무관 및 군호(軍戶)의 관료 질서 내에서의 비중이 굉장히 거쳐 패부(覇府)의 찬탈이 나타나기까지 하는 상황에 대응시킬 수 있다. 인도에서도 이슬람교의 유입으로 인한 힌두교 카스트 제도의 약화와 봉건 국가 제도의 성립를 언급할 수 있으며 그 밖에도 대표적으로 노예 왕조가 따로 언급할 만한 사례이다. 이슬람교 국가에서도 아미르, 가지, 베그(베이) 등의 단어는 봉건제적 질서를 잘 반영하며 술탄 또한 근원은 칼리프에 대해 봉건적 질서 아래 수위권을 인정한 군주의 칭호였다. 한국에서도 골품제가 완전히 붕괴한 것은 결국 신라 정권의 질서가 쇠퇴하고 붕괴했기 때문이었으며, 일본의 사무라이 계층 또한 고대의 닫힌 계급제에 비해서는 출신이 다양해진 편.
    • 단 이러한 설명의 기저에는 대부분 군사적 요소에 의한 기존 계급제의 붕괴가 전제 조건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한국사적 관점에서나 도쿄학파 관점에서 본 중국에서 계급 질서의 약화 사례로 들 수 있는 과거제와 다른 지역의 '중세적' 계급 구조는 여러 모로 틀을 달리 보아야 한다. 교토학파 관점에서는 이 과거제가 '근세적'이라는 설명을 붙이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라 이걸 '중세적'으로 묶어버리는 건 학설이 완전히 다름을 고려해도 뒷목 잡을 요소이기도 하고.
  • 한편 외부 세계로부터 노예를 수입하던 거대 국가의 존재가 사라져 노예 제도는 쇠퇴하나, 자유민은 국가로부터 직접적인 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봉건적 질서 아래 토지에 신속되는 구조가 강화된다.
    • 유럽의 장원제 및 농노제에 대응된다. 이 문단 내 서술 비중은 적은 편이나 억지로라도 중세를 대입하려 한다면 '고대~근세 동안 한 차례로 정리할 수 있는 통일 국가 → 분열 → 재통일'이 명확한 경우를 제외하면 오히려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부분인데, 논점이 마르크스 경제학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교토학파 관점에서 중국에서 군사적으로는 세병제(병호제)·둔전제, 민간에서는 장원제·부곡제 등에 대응되며 북위~당나라의 균전제 또한 한계가 명확한 것으로서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나, 도쿄학파 관점에서는 고대 국가의 통일적 토지 제도로서 균전제가 무너진 것을 중시하며 중국의 송나라 이후 강화된 지주-전호 제도에 상당한 경제외적 강제가 동반되었음을 강조하여 중세적 토지 제도에 대응시켜 본다. 범(凡)중동 권역에서는 대표적으로 셀주크 제국의 이크타 제도가 언급되며, 일본에서도 장원공령제의 하부에 존재하던 게닌을 농노에 대응시켜 보기도 한다.
    • 한국의 경우 1960년대 이후 김석형 등의 학설에 의해 양반 지배 질서 아래 다수의 노비가 존재한 개념을 농노에 대응시켜 보기도 하나,[72] 통일신라시대 민정문서에서 노비의 비율이 고작 5.4%로 확인된 이후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처럼 농노제에 대응될 수 있는 다수의 노비가 있었음을 입증할 자료가 발굴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끝내 다수의 학자들이 한국사에 역사 5단계 발전설을 대입하기를 포기하게 만든 중세 논쟁의 핵심 아킬레스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일원적인 정치 질서가 붕괴하고 외부로부터의 세력 유입이 활발해지는 만큼, 종교 질서 또한 고대 제국의 세속주의적인 문화와는 달라지며 비교적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진다. 이러한 종교는 이념상 다양한 사상의 유입으로 포괄성과 통일성을 중시하지만, 동시에 정치 질서가 분열해 있는 현실에 따라 그러한 대립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옹호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일부 경우에는 종교가 세속 권력에 대항하거나, 아예 세속 권력과 결합하여 자치적 질서를 누린다.
    • 유럽에서의 기독교 질서 확산 및 교황 수위권 확립에 대응된다.
    • 교토학파 관점에서 중국에 대한 불교의 유입과 도가도교로의 전환 이후 교단화·유교 질서의 쇠퇴, 인도에서 불교의 쇠퇴와 이슬람교의 유입 및 브라만교의 힌두교로의 전환과 베단타 학파의 성립 등 종교 학풍의 고도화, 중동 지역에서의 이슬람교 질서의 성립, 한국에서 통일신라 후기 화엄종계 통일 질서와 대비되는 지방에서의 선종의 융성, 일본에서의 신불습합의 심화와 잇코잇키 등 자치 세력의 등장 등에 대응된다.
    • 다만 도쿄학파 입장에서는, 굳이 끼워맞추자면 성리학을 대응시킬 수는 있겠으나 이를 다른 지역/시대의 종교의 중요성에 비기기에는 미묘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도쿄학파 입장에서 중시해야 할 종교적 계기는 차라리 회창폐불 이후 불교를 필두로 하는 이방 종교의 쇠퇴일 텐데, 다른 지역의 경향성과는 아예 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 한국에서도 선종에 대해서는 오히려 신라 말에도 국왕이 적극적으로 이를 수입하려 했다는 의견이 이제는 자리를 넓힌 상태이며 고려 통일 이후에는 양대 교단 중 하나가 되어 오히려 의천의 교선통합 운동이나 지눌에 의한 조계종의 통일질서 형성 등이 두드러지는 편이다.
  • 이러한 중세적 문화는 권력의 틀을 벗어난 서민 문화가 성장하면서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 어느 쪽이든 중시하는 것은 상업의 발달이며, 그것이 이후 서술하는 서민 문화의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도쿄학파 관점에서 중국에서 서유기삼국지연의 등 서민 문학의 성립·출판 인쇄의 확산, 인도에서 직물업의 발달과 상업 문화의 발달, 한국에서 민화·민요·판소리 등 서민 문화와 실학의 발달, 일본에서 조닌 문화의 발달 등에 대응된다.
    • 물론 한국의 경우 이 요소는 빨라도 17세기 후반 이후에 부각되어 다른 지역보다 유독 늦으며 실학의 경우도 오히려 근래에는 양반들의 성리학적 질서의 연장선에서 보는 시각이 늘어 서민 문화라고 볼 수 있을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노비의 대대적 확산과 양반 문화의 형성으로 인한 반상제 신분 질서의 강화에 의한 것.
  • 결국 최종적으로는 중세적 분열 시대가 정치적으로 종결되고 일대의 세계를 통합하는 근세 제국이 성립하며 대체로 이러한 봉건적 통치 질서가 종말을 맞는다.
    • 유럽사에서 주요 역내 국가의 왕권 발달 및 근세적 국가 성립에 대응한다. 가장 모범적으로 꼽히는 것은 튜더 왕조통일된 스페인 왕국의 성립.
    • 단, 중세와 근대 사이에 근세와 같은 단계를 설정한 경우에만 해당. 그게 아니라면 얄짤 없이 근대 산업 혁명 이전[73]까지 중세에 포함시킨다. 그나마 그게 아니라면 시기를 꽤 늦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한 주권 국가 개념의 성립을 역으로 비유럽권의 통일적 제국 성립에 대응시켜 볼 여지가 있는 편.
    • 도쿄학파 관점에서 명나라의 성립, 인도에서 무굴 제국의 성립, 중동에서 오스만 제국의 중동 서부~마그레브 역내 통일(및 술탄-칼리프제의 성립)과 사파비 왕조의 성립, 일본에서 에도 막부의 성립 등에 대응된다.
    • 교토학파의 관점에서 본 중국의 경우 송 대 이후 지주-전호제가 봉건적으로 토지에 예속된 것이 아닌 근세적인 계약 관계라고 주장하는 한편 송 대 이후 상업 및 서민 문화의 발전을 중시하는 사회경제 및 문화적 관점이므로, 주요 기점을 안사의 난~송 대로 잡기는 하나 송의 통일 왕조의 성립이라는 사건을 절대적으로 중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 한국의 경우 일찍이 10세기부터는 특별히 통일 국가 질서가 붕괴한 적이 없었으므로 이에 대응시켜 볼 명확한 구분점이 없다. 억지로나마 편의적인 서술을 위해서 구분점을 잡는다면 임진왜란병자호란,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을 많이 언급하기는 했으나 국가 체제의 충격에 비해 16세기와 비교할 때 17세기의 사회 변화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담론이 주류가 되면서 그것조차 애매해진 편.

이상과 같이 유럽사에 개략적으로 대응시켜 볼 수 있지만, 이미 이 서술에서 많은 반례를 제시했듯이 완전히 일관적으로 유럽에 대응시켜 보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 느끼겠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은 거의 건건이 반례가 나올 정도로 경향성을 완전히 거스른다고도 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라는 점이 국내에서 중세 논쟁이 합의를 위한 시도조차 없는 채로 파행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마 유사점이 많다는 일본의 경우에도 눈에 튀는 요소가 더러 있다.

4.1. 동아시아의 '중세' 개념 대입 시도 및 관련 논쟁

아시아권을 통합해서 등장한 것은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이다. 주로 사회주의[74] 쪽에서 주로 시작한 이 논쟁은 아시아의 특수성과 역사발전 단계이론이라는 단선적 발전사가 조화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다. 여기에 바르가, 칸토르비치, 비트포겔 등의 특수성 긍정론과 블라디미르 레닌의 국가론에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단선적 발전론이 충돌하면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후 전개와 자세한 것은 외부 참고.

중국은 삼국시대 혹은 오호십육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고, 서민 문화가 성장한 북송은 근세로 보고 당나라 말기까지(보다 현대적인 시각) 혹은 한족에 의한 통일 왕조가 재건된 명나라대까지를 중세의 끝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사의 후한-삼국-서진 교체기, 당-송 교체기, 명-청 교체기, 아편전쟁 전후 시기를 중국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시기로 보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유파에 따라 후한-삼국-서진 교체기부터 당-송 교체기까지를 중세로 보는가 하면, 당-송 교체기부터 명-청 교체기까지를 중세로 보기도 하며, 후한-삼국-서진 교체기부터 명-청 교체기까지, 혹은 후한-삼국-서진 교체기부터 아편전쟁 전후 시기까지를 중세로 간주하기도 한다. 한편 구미의 학계에서는 고대, 중세, 근세 개념을 적용하지 않고 대체로 중국사를 선진 시대, 진의 전국 통일부터 당-송 교체기 이전, 당-송 교체기 이후부터 청 말기, 신해혁명 이후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일본헤이안 시대후기 11세기에 등장한 장원공령제의 모습이 유럽의 장원제와 상당 부분 흡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시기부터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에도시대 이전까지를 중세로 파악하는 시각이 강하다.

사실 이는 서유럽 식으로 보면 다 이상한 방식이기는 하다. 근세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에서 에도 막부 시대를 설명하려고 '근대적 요소는 있는데 근대는 아니고, 그니까 근대의 근에 중세의 세 합해서 근세' 해서 나온 개념이고, 왕조별 구별에 대해서는 현재 부정적인 것이 일반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아시아의 중세란 '근세적' 요소가 성숙되어가는 시기로 어렴풋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4.1.1. 한국사의 경우

한국사에서도 중세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상당히 민감하게 논의되던 주제였다. 일반적으로는 고려시대를 중세에 포함시키고, 시작점을 고려의 건국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나 연구사적으로 이에 대한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하한선에 대해서는 어느 연구자에 대해 어떻게 묻는지에 따라 답이 완전히 달라지는 주제이다.

한국에서 이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으로 중세가 '전근대적'이고 '열등한' '봉건 시대'라는 이미지를 덮어쓰는 동시에, 식민사학의 비하적 시각에 따라 한국에 '중세'가 없었다는 이른바 '중세 부재론'이 한국 사학자들을 크게 자극하면서 출발했다. 게다가 '중세'의 실존을 밝혀내는 동시에 이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한국사가 세계사의 발전에 뒤처지지 않았음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근세'라는 구분을 끼워넣어야 한다는 민족적 감정의 문제가 끼어들어 이야기가 굉장히 복잡해졌다. 오히려 '근세'를 뺄 경우 한국 사학계의 시대 구분은 후삼국시대까지 고대 - 고려~조선 대부분 기간 동안 중세 - 개항 이후 근대라는 굉장히 깔끔한 구분으로 수렴하지만,[75] 민족주의 역사학의 발전 과정에서 그 문제를 쉽게 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는 유럽의, 더 나아가서 일본의[76] 중세 논쟁과도 또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나 정작 그 '중세 부재론' 자체가 엉성하기 짝이 없게 짜맞춘 것에 불과한 것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지워져 갔고, 자료가 축적되면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관점이 갖는 모순과 약점 또한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반 세기에 가까운 논쟁을 거친 끝에 현재로서는 더 이상 생산 양식과 같은 명확한 구분 기준을 세워야 한다며 '고대', '중세'에 집착하는 연구 경향은 없다시피 하며, 고대-중세 교체론이나 중세-근세(근대) 교체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신진 연구자는 없다시피 하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쇠퇴 이후로 '근대'는 그나마 거의 의견이 통일되어 있기는 하나 이는 연구자가 특별히 고집을 부리지 않는 한 거의 개항을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서 외부로부터의 근대 세계의 힘이 밀고 들어왔다는 요소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며, 그 시점에 조선의 내부에서 어느 시점에 중세가 끝나고 근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합의되었기 때문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77]

결국 현재 한국사학계의 흐름은 '고대와는 확실히 다르긴 한데, 근대적(또는 근세적)이지 않은 것'을 지칭하는 말로 '중세'를 사용하는, 유럽에 비견한다기보다 가장 원초적인 관점에서 '고대와 근대(또는 근세)의 중간'이라는 의미로 중세를 쓰는 것에 가깝다. '근세'의 개념 또한 조선 건국 이후 500년 가까운 시간을 근세로 규정하거나, 아예 근세 개념을 쓰지 않고 개항 이전을 모조리 '중세'라고 하는 담론이 모두 공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만하면 대충 참조한 선행 연구가 무엇인가 보다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시비를 걸지는 않는 수준까지 문제가 소강되었다. 그나마도 현재는 단순한 왕조 구분법에 밀려 쓰이는 빈도가 굉장히 낮아진 상황이다.

어쨌든 연구사적으로 결국 시대의 구분인 만큼 중세가 '언제 시작하는지', 또 '언제 끝나는지'의 문제가 있어 왔던 것인데, 대략적인 동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정체성론의 일환으로 조선에는 아예 중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중세 부재론'). 그에 따르면 조선에는 일본의 장원제와 달리 봉건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은 고대적 전제 국가의 통치 아래 놓여 있었고 일본은 그런 중세로조차 넘어가지 못했던 조선에 아예 근대를 이식해 주었다는 시혜론을 펼친 것이다.
  • 이에 대해 일본의 정체성론에 대항하려는 1930년대 백남운 등 사회경제학파가 반론을 제시하려 노력하였다. 백남운은 삼국 간의 전쟁이 끝나면서 노예 공급이 끝나고 노예제 사회가 농노제 사회로 전환되어 조선시대까지 봉건제 사회가 유지되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시아적 봉건제'라는 말을 사용하며 고중세 한반도의 상황이 사실 유럽의 전형적인 마르크스 경제학의 시대 구분론과는 일정하게 다른 궤도에 있음을 에둘러 언급했지만, 일제에 맞선다는 시대 정의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기이므로 결국 마르크스 경제학에 입각한 역사 발전을 주장하는 틀 안에 이를 어떻게든 포함시키려 애쓴 것이다.
  • 이 논의는 북한학계에서 1950년대 이후 김석형 등의 논의로 계승, 발전되었다. 김석형은 특히 외거 노비의 삶에 주목하여, 이들이 '노예'로 규정되기에는 자율적인 삶을 살아갔으므로 이들은 인신 단위로 구속된 것이 아닌 토지에 종속된 농노의 단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는 봉건 시대에 속하고, 조선 후기에는 노비제가 해체되는 반봉건적 발전 단계를 거치고 있었으므로 한국 또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론에 따른 궤도를 자체적으로 밟아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 이 논의는 당시로서 굉장히 센세이셔널한 것으로서, 오히려 학술적으로 겨우 정립 단계에 있었던 한반도의 역사학계의 담론이 수출되어 일본의 게닌(下人, 사무라이 계층에 딸린 예속적 농민)을 재평가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등 큰 충격을 주었다.
  • 그런데 이 개념에 대해 굉장히 큰 반례가 되는 사례가 1933년 이미 발견되어 있었다. 신라 민정문서에 나타난 인구 비율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 노비의 인구 비중은 전체의 5.4%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밖의 인구 구분은 남자와 여자의 연령 등급 구분일 뿐이어서, 국가에서 '농노'에 대응시킬 만한 별도의 계급을 설정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당시 마르크스 경제학 개념에서 노예제 사회의 노예든 농노제 사회의 농노든 '사회 기반'으로서 그 비중이 30%에는 다다랐다고 여겨졌으므로, 이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정면으로 상충하는 존재였다. 결국 민정문서는 현재까지도 마르스크 경제학 관점에서는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았다.[78]
  • 한편, 남한에서는 이병도를 위시한 초기 역사학자들이 대체로 왕조 구분법을 선호했기 때문에 고대 - 중세 - 근대 구분법 자체가 그다지 주류가 아니었다. 다만 이를 대입한다면 신라시대까지를 중세, 고려시대를 중세, 조선시대를 근세로 잡는 것이 대체적인 흐름이었던 듯하다.[79]
  • 다만 1960~1970년대 이후 일부 연구자에 의해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입각해 조선 후기 발전을 해명하려는 자본주의 맹아론적 접근이 나타났다. 이 또한 조선 후기를 근대로 규정하는 단계까지는 아니었지만, '반봉건적'인 움직임이 여럿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로 조선 후기를 설명했다. 4차 교육과정 이후 교과서에 '근대 사회의 태동'을 논하며 조선 후기의 변화상이 들어가게 된 것은 이러한 학계의 동향 때문이다.
  • 이후 마르크스 경제학의 본산이었던 사회주의권이 무너질 무렵이 되어서, 안병직·이영훈 등에 의해 김석형의 농노론과 자본주의 맹아론 모두가 박살이 나버리게 된다. 근본적인 변화는 1970년대까지 한국사의 기본적인 관점이 정립된 역사학계에서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를 갖게 되면서 1980년대 후반 이후 양반가의 사회경제 활동과 관련된 문서가 대량으로 수집되어 정리되었는데, 그러한 문서들 속에서 조선 후기 노비의 생활상과 인구 비중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조선 후기 노비의 비중은 30%를 넘지 않는 사례를 찾기가 힘들었으며, 심지어 특정 문서에서는 70%에 달하기까지 했다. 이 경향이 일관적으로 해체 단계에 들어선 것은 18세기 후반, 앞서 말한 30% 이하의 비중으로 떨어짐이 확실해지는 것은 19세기에야 나타난 현상이었다.
  • 또한, 15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변화는 앞의 시대와도 연결되지 않았다. 고려 말의 노비 소유는 많아야 10% 전후에 불과한 것이어서, 역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따라서는 노비제로도 농노제로도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비의 확대는 조선 특유의 현상이었기 때문에, 마르크스 경제학 입장에서 보면 노비를 노예로 규정하면 한국은 조선시대에야 고대 수준에 다다랐다는 식민사학보다도 더한(...) 결론이 도출되고, 농노로 규정하면 그럼 고대 노예제 사회는 대체 어디 갔냐는 기가 막힌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 거기다가, 질적으로도 양반가 노비의 생활상이 밝혀지면서 '노비는 인신이 아니라 토지에 귀속된 것으로 노예보다 농노에 가까운 존재'라는 김석형의 전제 자체가 깨졌다. 자세히 말하면, 납공(納貢) 노비의 경우 사실상 자유인에 가깝거나 심지어 노비가 노비를 거느리는 기묘한 형태까지 보이기도 했으나, 특히 입역(立役) 노비의 경우 토지 기반을 갖지 못한 채 양반의 의사에 따라 임의로 여성이 첩실로 들여져 가정이 해체되는 등 양반이 굉장한 강압을 행사할 수 있었음을 보이는 사례가 확인되어[80] '토지에 종속된 농노이며 인신 예속이 아니었다'고 말하기 어려워진 것이다.[81]
  • 이렇게 되자, 조선 후기에 노비와 노예가 명확히 구분된다는 전제가 흔들리는 동시에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임이 거의 당연시된 사회임이 밝혀졌으므로, 제임스 팔레와 같은 학자는 "너희들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른다면, 조선이 고대 노예제 사회라는 비판을 어떻게 피할 거냐?"[82]라는 강도 높은 비판을 던지기도 했다.
  • 이에 대해 한국 사학계의 반론은 노비는 '특정 시대론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를 보였으며 이에 대해 개별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장 위의 제임스 팔레의 논의에 대해 이영훈은 인구 다수의 비중을 차지할지언정 납공 노비와 입역 노비의 삶은 크게 달랐고, 납공 노비 내에서도 다양한 유형이 존재하여 어떤 경우에는 노비 또한 자유인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며 반박했다.[83] 결국 어쩌다 보니 노비의 삶을 연구한 결과 조선의 시대구분론은 꽤 포스트모더니즘스러워져 버린 것으로, 애초에 그 놈의 민정문서 때문에 끼워맞추기도 힘든 마르크스 경제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 한편 사회주의권의 문헌 수입이 자유로워진 1990년대에 고대사 연구자들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경향을 받아들여 고·중세 구분을 새로이 해보자는 담론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고대와 질적으로 다른 사회'라는 의미 이외에 큰 근거와 의미를 가진 논의는 도출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현재까지도 신라 민정문서의 수량통계를 깨부술 만한 다른 사례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기에 마르크스 경제학의 시대 구분은 봉인되다시피 했으며, 어떠한 경제적 기반에 대한 논의는 근거가 없으니 더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는 이렇게 달라졌다고 본다'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고무줄식 분류가 되는 경향을 피할 수 없었다.
    • 그나마 토지 공유제와 토지 사유제에 대한 논의는 의미 있게 발전을 했으나, 이때 토지 사유제가 확인된다고 하여 중국에서와 같이 지주-전호제를 설정하는 안 또한 특별히 근거가 있다고 보기 힘들었다. 삼국사기고려사는 철저히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 쓰인 문헌이라 지역의 농민들이 어떤 사회경제적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알려주는 내용은 지극히 드물다. 게다가 역사 발전의 과정을 설정해 논하기에는,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서도 가장 중요한 문서인 신라 민정문서는 아직도 연대에 대해 합의된 안이 없어 연구자에 따라 60년씩, 심하게는 120년씩 비정하는 연대가 널뛰기를 하는 판. 학계에서 고대-중세 구분에 대한 합의를 하기 전에 민정문서 연대에 대해서부터 합의를 해야 하는 지경이다.[84]
    • 예컨대 과거 이 문서에 언급되었던 6세기 구분론은 최광식이 천신(天神) 신앙이 불교로 대체되었다고 하여 주장되는 식인데,[85] 이것도 철저히 종교적인 의미에 한정된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 의미를 한국사 자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이것을 세계사 보편적인 중세론과 합치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 한편, 자본주의 맹아론이 '중세'와 '근세' 사이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언급했던 임진왜란-병자호란 전후의 사회상도 양반가와 관련된 문서가 정리되면서 재검토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17세기 동안, 특히 양란을 거친 17세기 전반에 일어난 사회 변화가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양반가의 토지와 노비 소유는 계속해서 증가했으며, 17세기 말이 되어서야 양반가의 토지 소유가 상속에 의한 분할로 감소하기 시작하나 노비 인구 비중은 그럼에도 거의 한 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줄지 않았다. 이렇게 토지와 노비의 동향이 따로 노는 모습이 보이자[86] 노비는 '토지에 예속된' 농노로 보기 더더욱 어려워졌다. 노비가 토지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면 결국 인신 구속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개념에서 '노예적인' 존재라는 개념이 되는데, 19세기나 되기 전까지 한국사가 고대 노예제 사회였다는 설을 도대체 한국사학계의 누가 받아들이겠는가.[87]
  • 결국 이 결과 20세기 전반~중반 동안 한국 사학계에서 매달렸던 마르크스 경제학적 구분에 따라서는 고대 노예제 사회도, 중세 농노제 사회도 논할 수 없게 되었고, 일부 연로한 학자들이 엄밀하고 강경한 주장을 피하면서 관성에 의해 '봉건 사회'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사학계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개념의 시대 구분은 버려졌다. 그나마 노비제의 해체와 관련하여 근대적 발전을 논할 수라도 있는 하한선과는 달리 중세의 상한선은 아무도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이제 고대와 중세의 구분에 대한 합의된 기준 자체가 사라졌는데, 뭔가 새로 집을 짓기에는 자료는 여전히 민정문서 빼고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 이 꼴이 나버리자, 결국 유럽 중세론과는 거울에 비춘 듯 반대의 방향을 걸어오던 한국사에 대해 대체 중세를 설정할 수 있기나 하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지경이 되었다. 한국사가 세계사적으로 보편적 의미에서 '중세적'이라는 요소는 연구자들 스스로가 직접 해보면서 깨달았듯이, 싹싹 긁어서 겨우 짜맞추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그것을 반론할 마땅한 논리도 없었다. 애초에 후삼국시대 딱 반 세기를 제외하고 한국에는 유럽이나 일본에 비교할 만한 봉건 영주라고 할 존재도 없었고, 그 누구도 그로부터 중세를 논하지 않는 한나라군국제에 비견할 수준의 봉건적 제도조차도 없었기에 '봉건제'라는 개념부터 원래의 뜻을 벗어나 왜곡해 빌려 쓴 것에 불과했다.
  • 당연히 식민사학의 '중세 부재론'도 이 시점에서는 굳이 반론을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이야기가 되었다. 왜 국가가 쪼개져서 봉건 영주들이 설치고 다녀야만 국가가 발전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럴싸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식민사학에 대해 다른 차원에서 맞서는 과정에서, 그 동안의 역사 연구를 통해서 그러지 않아도 한국 역사가 발전을 할 수 있었음은 충분히 잘 논증되어 있었다.
  • 다행히도, 한국은 역사의 중심이 된 왕조가 대체로 장기 지속되어 왕조 구분법을 쓰는 것이 크게 어색하지 않다. 때문에 애초에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이 그러던 대로 대부분의 경우에는 왕조 구분법으로 회귀하고 구태여 구분을 해야 한다면 고려 이전은 고대, 고려 이후 어느 시점까지는 중세라는 구분을 따르게 되었다. 이 가운데 고려와 조선 사이의 변화를 중요하는 입장은 '근세'를 따로 설정하고, 연속성이 강하다고 보면 두 왕조 모두 기본적으로 '중세'라고 말하는 정도이다. 그 밖에 조선시대를 나누어 조선시대 내에서 '중세'와 '근세'를 나누어야 한다면, 임진왜란을 택하기보다는 적어도 17세기 후반 이후의 변화를 지목하는 빈도가 늘었으되, 이 또한 과거의 '자본주의 맹아론'처럼 극적인 변화를 말하기는 어려워졌다는 정도.
  • 그 밖에, 유럽 중세와 연대가 비슷해지도록 한국 중세의 연대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논의는 논할 가치도 없다. 애초에 중세가 세계사적으로 꼭 거쳐야 하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마르크스 시대와 달리 다양한 연대측정법으로 고고학적 연대가 명확해져 기원전 1900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문명 시대가 열린 에게 문명에 비해서 상나라조차 기원전 1600년 무렵에나 세워져 수백 년 늦게 시작했음이 확실해졌으므로, 기원전 2333년 건국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에야 동아시아 문명의 주변부에서 출발했던 한국 역사의 초기 발전이 로마 제국의 발전 및 쇠퇴보다 늦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결국 현재로서는 '고대', '중세', '근세'를 유럽사처럼 엄밀하게 적용하려는 개념 자체가 약하며, 그 기준도 명확하달 것이 없다. 일단 하여튼 왕조 구분법과 짜맞춘 구분 중에서 고려시대를 중세에 포함시켜 보는 데는 딱히 이견이 없으므로 고려시대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속 편하게 '중세사'라고 칭한다는 정도... 애초에 그런 시대 구분을 명확하게 하려는 노력 자체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시피 한 마르크스 경제학에 입각한 것인데, 그 어떤 논의도 일단 1980년대 이후의 연구 동향은 별도로 치더라도 민정문서 하나도 제대로 커버를 못 쳤기 때문에 부활할 가능성은 낮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사 연구 경향이 세분화되어 연구자들의 논문에서 이런 거대 담론 자체가 거의 논해지지 않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88] 이러한 거시적 시대 구분론이 다시 논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현재 학계에서 '중세사'로 스스로의 연구 분야를 규정하는 연구자가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는 한국중세사학회에서는 고려시대를 중심으로 하되 통일신라와 조선 전기까지를 아우르는 시간적 범위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 국정 교과서에서는 3차 교육과정까지 왕조 구분법에 가깝게 서술하다가, 4차 교육과정 이후 '근대 사회의 태동'이라는 단락에 17세기 이후의 사회 변화를 서두로 끼워넣었다. 이후 7차 교육과정에서는 아예 고대 - 중세 - 근세와 근대 사이에 17세기 이후의 상황을 서술하는 근대 태동기라는 단락을 만들어 넣었으나 사실상 이후에는 버려지다시피 한 관점이 되었다. 애초에 교과 '한국사'가 '국사'의 편협함을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등장했을 정도로 7차 교육과정 국사는 자본주의 맹아론적 서술에 경도되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기 때문. 학계에서도 이 정도로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연구자는 손에 꼽는다. 이후 한국사 교과에서는 전근대에 대한 서술 자체가 크게 축소되어 고대 - 중세 - 근세 - 근대 구분법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는데, 경위가 거시기하기는 하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시대구분법을 쓰지 않는 것이 학계의 동향에 가깝다.
  • 서울대학교 쪽에서는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세로 보는 경향이다.[89]
  • 연세대학교는 중세를 중세Ⅰ, 중세Ⅱ로 나눠서 중세Ⅰ을 고려 시대, 중세Ⅱ를 조선 전기(임진왜란 전)로 보고 조선 후기(임진왜란 후)를 근대로 구분한다.
  • 고려대학교 쪽에서는 한국사에서의 중세, 근세 개념을 아예 부정하고 왕조구분법으로 쓴다.

4.2. 기타 지역

(러시아가 유럽이냐 아시아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신나게 싸우는 논쟁거리지만) 러시아의 경우, 중세란 표현 자체를 쓰지 않는다. 9~13세기, 몽골 침공 이전을 고(古) 러시아라고 부른다. 국내 서적에서는 고대 러시아라고 종종 번역하는데 그보다는 고조선/조선 구분의 古에 더 가깝다. 이 시기는 서유럽의 중세와 겹친다.

인도의 경우, 굽타 왕조에프탈의 침입으로 붕괴된 시기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아 무굴 제국에 의한 통합을 중세의 끝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중동아프리카의 경우 이슬람교의 등장 자체가 워낙 큰 전환점이다보니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와 시리아, 이란, 레바논,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라크 등에서는 이슬람 제국의 정복 된 시점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며, 이후 9세기경부터 분권적 질서가 나타났다가, 오스만 제국이 다시 한번 통일 제국을 재건하게 되고, 사파비 제국이 수립되었을때를 중세가 대체적으로 끝났다고 본다.



[1] 저 세고비아의 알카사르는 훗날 디즈니의 신데렐라 성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흔히 노이슈반슈타인 성만이 참조됐다고 알려졌지만 세고비아 알카사르의 외형도 함께 참고했다고.[2] 근세는 일본 역사학계에서 조어한 개념으로, 이를 서양사학 연구에 사용하는 학계 역시 동아시아 국가의 서양사학계이다.[3] 유럽에 한해서만 중세를 논하는 것이 너무 유럽 중심적이라고 비판하는 측도 있기 때문.[4] 사실 '현대'라는 용어가 정착한 것은 정말 얼마되지 않았다. 1980년대 정도까지는 '최근세'라고 하여 '근대'이기는 하지만 가장 최근의 지엽적인 시기를 지칭하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지금도 '현대'를 편의상의 용어로 볼 뿐 학술 용어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고.[5] 애초에 이런 구분을 한 르네상스시기가 과거 찬란했던 문화의 부활이라는 인식이었으며, 그 과거문화가 사라진 중간 시대는 미개한 문화로 폄하하여 구분하게 되면서 찬란한 과거, 미개한 중간, 찬란한 과거의 부활로 구분한것이다. 물론 이는 역사적 사실관계를 면밀히 따진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느정도 계몽주의자들의 목적에 따른 왜곡이 첨가되어 있는부분으로 마치 공자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포장했으나, 실제 주나라가 공자의 묘사대로라기 보다는 그냥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활용한 편집된 이미지의 국가 같은 것처럼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고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6] 물론 현재 중국의 중세는 주로 위진남북조~원까지로 보는 시각이 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7] 정확히는 이슬람 세력은 고대 그리스 및 로마 문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이를 연구하고 도서화된 것이 서유럽으로 건너가 재번역되면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가 다시 서유럽에 전해졌다.[8] 통념적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구분법 중 하나이기는 하나, 로마 제국의 서부 상실, 그리스도교의 성행, 봉건 제도의 부상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인 사건을 가지고 시대를 구분할 수 있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다만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서로마의 붕괴로 인해 서유럽에 여러 혼란이 야기 되고 다시 교황권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으로 질서가 재편되었단 점에서 서로마의 멸망은 적어도 동로마의 멸망보단 확실하게 역사적인 변곡점이 될 수 있다.[9] 앙리 피렌의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앙리 피렌은 중세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인식했고, 중세의 시작점을 476년보다 뒤로 설정했다는 의의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부적절하다. 8세기까지도 도시, 상업, 시장경제 등에서 고대적 요소가 잔존했다고 하나 로마 말기에 이미 도시와 상업과 시장경제는 쇠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 세력의 팽창이 유럽 전체를 농업 문명 사회로 바꾸었다는 그의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10] 그러나 이것은 테오도시우스의 그리스도교 국교화가 더 의미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약간 퇴색된다.[11] 일반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이 중세의 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그 이후를 근세라고 평하기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학자들마다 논의가 다양하며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없다. 주로 15세기로 뭉뚱그려 표현하며 더 나아가서 아래와 같이 산업시대 이전까지도 중세라고 보기도 한다.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기준은 극히 애매하며 동로마가 멸망한 전투인 콘스탄티노플 전투와 동시기 서유럽에서 일어난 백년전쟁은 전쟁사적으로, 무기사적으로도 큰 변곡점이 되었지만 그외적인 부분으로는 딱히 변화한게 없다.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16세기 절대왕권과 중상주의로 인한 변화가 더 크며 인식의 변화를 추구한 르네상스 역시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큰 범위에서 일어난 사건이기에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기준은 콕 찝어서 표현하기 애매하다.[12]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인본주의가 완성되었으며 이 영향으로 루터와 칼뱅과 같은 인물들에 의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30년 전쟁을 통해 유럽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30년 전쟁은 유럽 최초의 국제전임과 동시에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권 다툼이었다. 한편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가 교황의 눈치를 안 보고 신교 국가의 편을 들었단 것은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종교적 영향력이 감소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13] 자크 르 고프를 비롯한 아날학파는 장기지속적인 중세를 주장했다. 이들은 이전까지 중세 사회 변혁의 계기로 취급받던 르네상스나 흑사병을 중세와 이후 시대를 구분하는 단절의 계기가 아니라 중세의 장기지속적 현상 중 하나로 보았다. 15~16세기의 대르네상스 전후로도 유럽인들은 빈번히 고대 황금시대로의 회귀를 추구했고, 흑사병은 14세기 이후 18세기 초까지 창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럽 사회의 중세적·봉건적 심성(망탈리테)이 기존 중세라 불리던 시간을 넘어 산업화 시기까지도 잔존해 있었다고 보며, 중세 중 특정한 시기만 골라잡아 중세라 정의해놓고 암흑기 혹은 낭만적인 시대로 치부하는 시각을 거부한다.[14]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커진 계기이기도 하다. 로마 때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있었지만, 중세에는 그런 거대 제국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던 것. 물론 실제로 커지기도 했지만.[15]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 중세 유럽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이 로마 시대에 어떤 취급을 받던 곳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로마 시대에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나 그리스, 이집트 등은 중세에도 멀쩡히 부유한 지역으로 살아남아 막강한 국력과 영향력을 과시했다.[16] 다만 항해술에 뛰어난 바이킹은 약탈뿐만 아니라 무역에도 종사했으니 무역 활동이 아예 없었다고 보긴 힘들다.[17] 부정하기도 어려운 것이, 무역의 이상은 Win-Win이다. 자신과 상대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 함께 부유해지는 것. 여기서 상대도 부유해진다부분을 용납하지 못한 거다. 그리고 실제로 이상은 이상일 뿐이다. 서로가 양보해서 각자 조금씩의 이익을 얻자는 쪽과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자는 쪽 중 단기적인 선택의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지는 명확하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상대도 하고 있다는 점과 상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신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하니 그냥 무역을 안 하고 말겠다는 것이다. 결국 내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보호무역이다.[18] 물론 이건 유럽 전역에서 다 때린 게 아니고, 화로는 러시아나 프랑스가 유명했고, 창문은 영국 등 각자 특유한 세금이 있었다.[19] 1340년 백년 전쟁이 시작된 당시 피렌체의 상인귀족 가문들이었던 바르디 가와 페루치 가의 은행들은 영국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에게 각각 90만 플로린과 60만 플로린을 대출해줬지만 에드워드 3세가 이자를 상환하지 못함에 따라 파산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이 두가문과 사업적으로 연결고리가 있던 유럽 전역에 있던 수 백 여명의 사업가들마저 연쇄적으로 파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관련 영상[20] 자경대장으로 불리지만 사실 고대 로마 시대 때 황제의 말들을 관리하던 직책에서 유래되었다.[21]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각각 얼마샬과 나이트 마샬이 있었다.[22] 프랑스의 스콜라학 연구자.[23]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파티는 단순한 유흥을 떠나 권력 확인의 수단이었다.[24]피자, 파스타는 이탈리아에만 국한되었고, 가룸은 아예 실전되었다.[25] 동로마, 이탈리아에서나 유행하는 계집애 같은 까탈스러운 문화라고 폄훼한 기록이 상당하다. 심지어 성경까지 끌어와서 '신이 내려주신 식기가 있거늘 감히 악마나 쓸 법한 삼지창을 사람 입에 쑤셔박다니!' 같은 식으로 깐 적도 있다. 포크가 구미권 전역에서 대중화된 것은 중세를 한참 넘어선 18세기가 되면서 부터였다.[26] 그것도 귀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내장이나 다리 같은 잡다한 부위들.[27] 이 문서에 몇번 언급되었다시피 귀족들의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들은 귀족이 실용적인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해도 여유와 돈이 남아도는, 서민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걸 표현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다.[28] 왕좌의 게임 시즌 4 2화에 조프리 바라테온의 결혼식에 나온 그 비둘기가 튀어 나오는 케이크의 모티브다.[29] 17:06에서 21:03까지 중세 파트[30] 8:42에서 13:12까지는 중세 파트[영문주의] [32] 동로마 제국에서조차도 고대 서로마 전성기의 콘크리트 건축 기술력은 잊혀졌다.[33] 그런데 근대 이전에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과거에는 만리장성 등의 유적의 석재 등을 빼와 주변 주민의 주택을 짓는 일이 흔했었다. 피라미드 역시 표면의 석재를 빼가서 현재의 계단형 모습이 형성된 것이고 콜로세움도 성지로 지정되기 이전에 빼간 석재들 때문에 남은 부분은 전체의 1/3에 불과하다.[34] 프랑스의 경우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시골집들을 볼 수 있었다.장 자크 상페의 풍자 만화 참고로 우리나라도 현재까지 함경도와 강원·경상도 산간 지방에 이러한 구조의 민간 가옥들이 있다.함경도 전통가옥[35] 대표적인 중세 당시의 팔라쪼로는 팔라쪼 스피니 펠로니팔라쪼 다반차니, 호텔은 센스 대주교 저택클루니 호텔로 현존하는 중세 호텔이다.[36] casino는 이탈리아어로 집을 뜻하는 "까사(Casa)"와 작다, 귀엽다를 뜻하는 "이노(Ino)"를 합쳐 만든 단어로 귀족들의 간이 놀이방을 의미했다.[37] 물론,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도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하느님 중심의 세계관에 의거한 관점이었다.[38] 물론 여기에 대해서 결과적으로는 과학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39] M.H.Shank 저작 참조.[40] 13세기 잉글랜드의 경우 거의 절반[41] 이런 귀족 여성의 통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남자다움을 지닌 여성'이란 변호가 생겨났다. 여기서 남자다움은 현재 통용되는 의미와 좀 많이 다르다.[42] 다만 2번째의 경우 마샬이나 스튜어트처럼 한 귀족 가문이 오랫동안 세습한 직책명에서 유래된 성씨들도 있다.[43] 위에서 언급했듯 그레고어 멘델 대수도원장이 수도원 세금징수 정책과 싸운 이유가 각종 일은 다 시키면서 세금을 지원해주기는 커녕 또 걷어간다는 이유에서다.[44] 참고로 말하자면 교무금 자체는 현대 가톨릭 교회에도 존재하며, 신자의 의무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내지 않는다고 강요하거나 닦달하지는 않고, 신자 개개인의 자율에 맡긴다. 액수도 꼭 10분의 1을 내는 것은 아니고,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 낸다.[45]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가톨릭 교회가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한건 그가 지동설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부터 지동설을 온갖 궤변을 써가며 옹호해서 중립적으로 다루지 못한 데다가, 교황을 모티브로 한 듯한 캐릭터가 멍청하고 헛소리만 내뱉는 역할로 나왔기 때문이다.[46] 신약 성서에 부에 대한 경계를 가르치는 구절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를 찾은 한 부자가 있다.[47] 다만 무조건 종교집단의 주도 하에 복지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이 링크에서 참고할 것.[48] 다른 한축은 편력하는 상공업자들이었다.[49]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 지식인들의 영향도 받았다.[50] 개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단적으로 흑사병의 경우 물론 신이 원인이지만 병은 결국 자연적인 일이고 그 자연적인 원인을 일으키는게 신이라고 보는게 교회의 입장이었다. 즉 신성 말고 자연적인 원안도 인정했다는 것.[51] 천두라고 하는데, 고대 종교나 민간 의학에서 많이 쓰이던 방식이었다. 멀리갈것 없이 화타를 보자. 이런 방식이 쓰이기도 했다는건 중세 의학이 (초기에는) 이교나 고대 민간의학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는것을 의미한다.[52] 오물을 집 밖에서 길거리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이는 로마 시대 하층민 주거지에도 존재했던 관습이다.[53] 다만 중세 후기 흑사병이 돌자 목욕탕이 흑사병의 원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쇠퇴하긴 했지만 중세 말기쯤에 쇠퇴했지 대부분의 중세 시대 땐 목욕이 일상적이였다. 그리고 이 낭설도 아예 허구는 아니었는데 지금과 달리 로마시대부터 목욕탕은 생각보다 그리 위생적이지 않았고 사람이 몰리는 장소였기에 전염병에 취약했다.[54] 영국의 리처드 2세가 "Statuto quo nul ject dung"(분뇨를 함부로 버리지 말 것)이라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중세인들도 오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 매우 비위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55] 학술자료를 캡처한 자료가 있어 부득이하게 링크했지만, 댓글의 내용은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중세의 수도 시설은 로마의 기술이 거의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 중세 성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도시 인구가 더욱 증가한 16세기에야 수도와 목욕 시설이 급감하기 시작한다.[56] 흔히 악취설(miasma theory)이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역병 의사의 특이한 복장도 이러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57] "During the 20th century, many historians have rejected the term, arguing that there is a sufficient amount of scholarship and understanding of the Early Middle Ages to make it redundant." #[58] 사실 배경보다는 모티브가 많다. 서양 판타지무협물처럼 실제 역사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모티브를 따온 가상세계가 클리셰고, 역사물이 아닌 판타지인데 실제 역사의 중세가 배경인 경우는 중세기반 가상의 세계보다 꽤 적은 편. 그래도 많은 서양 판타지물이나 기사 얘기가 중세를 모델로 삼은 사실은 유명해서 중세하면 판타지를 떠올리긴 충분하다. 이 경우 서로마가 붕괴되어 개막장 난세가 펼쳐진 중세 초기보다는, 체제가 안정되고 상업이 융성하던 중세 말기에서 모티브를 주로 따온다.[59] 중세와 르네상스를 칼같이 나누고, 안 좋은 것은 전부 중세로 떠넘긴 다음 르네상스를 숭상하는 태도는 18세기의 소위 '플라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맹목적 안티크리스트 정서에서 처음 시작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식이다. 중세의 전유물이라고 흔히 간주되는 마녀사냥, 혹은 이단심문 또한 그 전에는 암암리에 산발적으로 벌어지다가 르네상스의 절정기인 15세기경부터 본격화된 측면이 있다.[60] 이로 인해 <신국론>이라는 명저가 저술되었고, 원죄에 대한 신학도 발전했다.[61] 가령 중세 초 도시들의 인프라가 후퇴한 건 사실이지만, 사회의 부(富)는 오히려 촌락까지 확산되고, 가족 단위로 토지를 소유한 소농의 비율이 올라가고, 농민의 구매력이 상승하는 모습 또한 보여줬다. 또한 서로마의 붕괴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서방의 국제 교역망에 타격을 주었으나, 서방 경제는 교역망들이 지역화(localization)되면서 결국 활로를 찾았다. 당연히 이는 고대인과 중세인의 지능 차이가 아니라, 거대 제국의 붕괴에 자연히 뒤따르는 삶의 모습들이다. 20세기 오스트리아 역시도 제국 붕괴 후 경제 쇼크를 겼었다.[62] 위 인용문에선 그냥 Europe이라 언급하지만, 출처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건 프랑크, 앵글로색슨 등 서방권이다. 즉 비잔티움 이야기가 아니다.[63] 저자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이 짙게 녹아있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을 서유럽 외에 곧이 곧대로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등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참고로 『상상의 공동체』라는 저서로 국내에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형이 바로 이 사람이다.[64] 총 4권의 시리즈로 되어있다.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만큼 백과사전 식으로 빽빽히 구성되어 있으며 가격이 비싼 게 아쉬운 점이다.[65] 단, 마녀사냥은 중세에도 간간이 있었지만 중세 이후인 초기 근대(근세)에 가장 성행했다.[66] 고대-중세-근대로 구분하는 분류법을 쓸 경우에도 서구에서는 1500년대 부터는 Ealry mordern, 즉 조기 근대라고 한다. 이 개념을 번안한 것이 근세라는 단어다.[67] 물론 중세 말고도 고대나 근세, 근대등의 판타지물도 간혹 있지만 모든 시대의 판타지물을 합쳐도 중세 판타지물의 수를 넘지 못한다.[68] 중세 끝무렵인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69] 십자군 전쟁기 중세[70] 꽤나 골때리는 암울한 설정의 게임으로, 흑사병으로 중세 유럽 인구의 95%가 사망해버려 한 줌 남은 생존자들이 다시 모여 안전하고 풍요로운 정착지를 건설해나가야 한다는 설정이다.[71] 이 두 가지는 엄밀하게 말하면 대립은커녕 양립했고, 지금은 통합되었다고 봐야한다. 현대의 시대구분론은 마르크스의 경제체제적 구분에서 '공산주의는 현대'라는 부분을 뺀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통설이 된 몇 가지 예 중 하나이다.[72] 오히려 이 개념은 위에서 언급한 일본에서 게닌을 농노로 설명하는 학설로, 식민지배가 끝난 이후 역사학의 정립 초기에 있었던 한반도(북한) 역사학 수준을 고려하면 '역수입'되었다.[73] 현대 역사학에서 근대의 기점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의 발달이다.[74] 애초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란 표현 자체가 마르크스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거쳐서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 때문에 역사를 잘게 쪼개서 억지로 자본주의를 거쳐야 되느냐 아니면 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가도 되느냐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75] 더 뭉뚱그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삼국사기 보는 사람' - '고려사조선왕조실록 보는 사람' - '공사관 문서와 신문 보는 사람'(...)으로 더 깔끔하게 정리된다. 반쯤은 농담이지만, 한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통적인 의미에서 '봉건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후삼국시대가 일반적으로 고대로 다루어지는 데는 이 영향을 배제하기도 어렵다.[76] 일본의 경우는 사실상 에도 막부를 근세로 지칭하는 것으로 오차 범위가 수십 년을 넘지 않아 학자 사이에 큰 논쟁이랄 것이 없으며, 질적인 차이를 배제하고 단순히 시간적으로 유럽의 '초기 근대(Early Modern Era)'와도 거의 1 대 1로 대응되어 굉장히 편의성이 높은 용법이다.[77] 이후 서술에서도 대강 암시되지만 물론 이것이 정체성론과 같이 조선 내부에서 발전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전에 단순히 암흑시대와 가깝게 여겨졌던 세도정치기에 대해서도 내적으로 과세 구조 등에 많은 변화가 있어 이러한 사회 변화가 이후 호포제 개혁 등과 연속된다거나, 경강상인의 근대와의 연속성이나 홍삼 교역 등 세도정치기에도 상업 측면의 성숙을 논할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함이 논해졌다. 다만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 또한 질적으로 서양의 근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부정하는 연구자는 이념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다.[78] 이전에 이 문서에서는 노비 인구 비중이 5.4%에 불과하므로 고대 노예제 사회가 아니라 중세 농노제 사회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으나 이 또한 그다지 근거랄 것은 없다. 애초에 농노제 사회의 핵심은 당연히 노예가 없는 것이 아니라 농노가 확인되는 것이다.[79] 한국사 연구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1960년대 이래 현재까지 수십 개의 한국사 개설서가 나왔다. 하지만 대체적인 경향을 말한다면, 시대구분 문제에 관한 한 신라시대 말까지를 고대, 고려시대를 중세, 조선시대를 근세, 19세기 후반 대원군(大院郡)의 집정 혹은 개항 아니면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를 근대로 기술(記述)한 점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 이기동(1995), 「韓國史 時代區分의 여러 類型과 問題點」, 『韓國史時代區分論』, 소화, 87쪽.[80] 납공 노비와 입역 노비는 이 무렵 정리되어 학계에서 외거 노비와 솔거 노비라는 단어를 대체한 단어이다. 이른바 '솔거 노비' 중에서도 공물을 바칠 뿐 인신 구속을 당하지 않는 사례가 확인되어 이들을 따로 분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주로 공노비에 대해 쓰이는 경향이 있으나 사노비의 경우 '봉족 노비', '선상 노비' 등 복잡한 개념이 자꾸 도입되었기 때문에 '솔거 노비'-'외거 노비' 구분이 기피되었고 논의가 지나치게 해체 경향으로 가다보니 오히려 편의상 공노비 쪽의 개념을 다시 빌려오게 된 것.[81] 다만 이 앞뒤의 서술에서도 암시되는 것이지만 노비의 삶의 형태는 스펙트럼이 아주 넓은 다양한 형태였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외부에 거주하며 양반의 농지를 경작하는 형태가 대부분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양반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불러들여져 입역 노비로 전환될 수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이런 사례 때문에 노비를 노예와 농노 둘 중 하나로 나누어 보려는 시도는 굉장한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82] 기사도 그렇듯 흔히 이 맥락의 후반만 잘려 제임스 팔레는 조선이 고대 노예제 사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는 말이 퍼져 있으나, 실제 문맥은 이것에 가깝다. 제임스 팔레는 이 이후 남북전쟁 전후 미국 또한 노예가 인구의 40%를 차지했으나 그 누구도 고대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며, 한국 역사학자들에게 마르크스 경제학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노비 비중이 높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숨기지 말고 객관적인 역사 연구를 진행할 것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포인트는 한국사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공세에 있었다.[83] 2000년대 이후, 특히 2010년대 이후 이영훈이 제시하는 주장은 오히려 그 스스로의 이런 행보와도 충돌할 정도로 많이 변화했음을 언급하여 둔다. 1980~1990년대 이영훈의 연구는 한국 사회경제사를 연구할 때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관문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2010년대 이후의 글은 정치적인 문제를 빼더라도 학계에서 그때만큼 면밀히 논해지지 않으며,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알려진 그의 수량경제사적 연구도 처음 학계에 던진 충격과 달리 20~30년이 지난 지금은 학부 수준에서도 배우는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반론 내지 제3의 담론 또한 이제는 드물지 않아진 상태이다.[84]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 민정문서 연대에 대한 양대설인 695년설과 755년설 사이에 한국 고대 토지 제도 가운데 드물게 이름이 전해지는 정전제(丁田制, 722년)가 걸린다. 결국 연대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민정문서에 국가 주도의 토지 제도인 정전제가 반영되었는지 아닌지가 갈리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합의된 의견이 없는 것이다.[85] 전덕재(1993), 「한국고대사연구회 제6회 합동토론회 '한국사의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 참관기」, 『한국역사연구회회보』 15.[86] 이 기형적인 현상은 기본적으로 노비가 군역에서 면제된다는, 15세기 후반 이후 노비가 폭증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한 요소에서 비롯한다. 곧 17세기 말 이후에는 독립적인, 또는 반독립적인(예컨대 새경의 형태) 경제 기반을 가진 노비 또한 양반가의 노비로 이름을 올림으로써 세금을 피해 갔기 때문에 양반가의 토지는 줄어들어도 노비의 수는 유지되었던 것이며, 이 때문에 17세기 후반 이후 '도망 노비'의 사례 또한 생각보다는 장벽이 낮은 형태로(독립적인 경제 기반이 있으니 신분을 세탁하기만 하면 독립할 수 있고, 조선시대 수준에서 문서 행정의 약점은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헐렁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빈번하게 나타나게 된다. 한편 국가는 세수를 확보해야 했으므로, 특히 18세기 동안 과세 제도를 토지 중심으로 바꾸어 나가고 노비에게도 이런 저런 과세 부담을 지우면서 노비 신분을 굳이 유지해야 할 동기를 떨어뜨렸다. 이 결과 19세기에는 노비 수가 현저히 줄어들게 된 것.[87] 다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시대 개념을 완전히 폐기했다는 전제 하에, 단순히 노비의 성격을 논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노예적'-'농노적'의 개념을 인용하는 경제사학자가 아직 존재하기는 한다.[88] 이 정도의 거대 담론을 논문에서 논하는 분야는 여성사 정도에 한정된다.[89] 국사학과의 주도적 견해. 역사교육과는 오히려 연세대와 비슷한 경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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