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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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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유럽의 중세
3.1. 시대적 구분3.2. 시대상
3.2.1. 배경3.2.2. 농업3.2.3. 경제3.2.4. 정치
3.2.4.1. 전기3.2.4.2. 중기3.2.4.3. 후기
3.2.5. 관직과 행정3.2.6. 문화
3.2.6.1. 문학3.2.6.2. 복식3.2.6.3. 건축3.2.6.4. 유희3.2.6.5. 음악
3.2.7. 교육 및 학문3.2.8. 식문화3.2.9. 사회3.2.10. 의학과 위생3.2.11. 기술
3.2.11.1. 민간 기술3.2.11.2. 군사 기술
3.3. '암흑시대'라는 오해와 반론3.4. 참조 자료3.5. 관련 요소3.6.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
3.6.1. 기사문학3.6.2. 중세 판타지?3.6.3. 라이트노벨3.6.4. 문학3.6.5. 영화3.6.6. 게임3.6.7. 애니메이션
4. 유럽 밖의 중세

1. 개요

/ Middle Ages, Medieval Period

이탈리아어로는 Medio evo, 프랑스어로는 Moyen Âge, 스페인어으로는 edad media, tiempo medieval, 독일어로는 das Mittelalter.

유럽사에서 고대근대의 사이의 시기. 중세의 다음 시기를 지칭하는데 근대 초기를 대체하여 근세가 쓰이기도 한다.

중세는 다시 중세 전기, 중세 과도기, 중세 말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2. 특징

흔히 알려진 'Medieval Age(Era)' 혹은 'Middle Age'는 18세기 무렵부터 유럽의 지식인층이 역사 구분을 하면서 나온 개념이다. 이들에게 회고가 가능한 가장 오래된 시기이자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시기는 그리스-로마가 존재했던 시대(특히 고전시대)였고, 반대편의 끝에 있는 것은 르네상스 혹은 17세기 이후 근대 국가가 성립하면서 나타난 'Modern Age'(지금은 '근대'로 번역하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현대')[1]였다. 따라서 그리스-로마 시대를 '고대', 르네상스 혹은 17세기 이후를 '근대'라고 지칭하고, 그 나머지 가운데를 '중세'로 뭉뚱그린 것이다.

여기에서 멈췄으면 '고대', '중세', '근대'는 매우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남았겠지만, 18세기는 근대인, 특히 계몽주의 지식인이 보기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미신적 요소와 비합리적 관행이 아직 남아 있는 시대였다. 이 때문에 계몽주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그러한 미신과 비합리성의 기원이라고 믿어졌던 중세를 멸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이런 시각은 현재까지도 강하게 남아있다.[2] 후술하겠지만 이는 시대별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닌 것도 많으므로 비판적 수용이 필요한 관점이며, 단순히 기계적인 구분을 위한 '중세' 용어의 사용과 시대상을 평가하려는 가치를 담은 '중세'라는 용어가 혼재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대', '중세', '근대'의 구분은 서구권에서 비유럽 지역을 정복하고 종속시키면서 보편적인 역사 구분으로 퍼져 나갔고, 특히 칼 마르크스의 5시대 발전론(원시 공산주의 시대-고대 노예제-중세 농노제-근대 자본주의-현대 혹은 근미래의 공산주의 사회)과 사회진화론(그것이 계몽주의적인 형태이든, 제국주의적인 형태이든)이 퍼져 나가면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그 개념을 받아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한국사중국사 등, 비유럽권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 혹은 그에 비견할 만한 집권 세력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럽의 '고대'와 '근대'에 비견할 만한 시대가 합의되지 못한 채 강제된 서구식의 근대를 맞이하였다. 따라서 '고대'-'중세'-'근대'의 개념에 대해서는 탈근대 움직임이 대두하는 1970~1990년대까지도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현재 그러한 시대 구분법에 대해 많은 비판이 제시되면서 시대 구분 자체에 염증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학자도 늘어났지만, 반대로 세계사적인 관점의 설명을 포기할 수는 없기에 고전후 시대라는 표현이 제안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편의상 중세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한국중세사학회의 구분을 본다면 고려를 중세사로 다루고 있다. 중국에서는 진시황에서 시작되는 통일제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위진남북조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오호십육국·남북조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수당 제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당말송초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설 등등 수많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현재 사학계에서 유럽식의 중세(Medieval Age/Era)와 비유럽 지역의 편의상의 '중세'가 마르크스 등의 주장처럼 같은 사회문화사적 기반을 두지 않는다는 점은 대체로 합의가 되어 있다.

3. 유럽의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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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는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지만, 일반적인 중세 유럽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 게르만족의 유입 이후 이슬람 세력, 마자르족 등으로 대표되는 이민족이 침입해 온다.
  • 이로 인한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에 따라 상업과 교통이 붕괴하면서, 통일적이었던 서유럽의 고대사회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폐쇄적 자급자족 체제로 전환된다.
  • 이민족으로부터 자기 방어 능력을 갖춘 기사 등이 영주로 등장했다. 이들은 상위의 계층에 대해 쌍무적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장원이라는 자급자족적 단위를 거느리면서 유럽 내에서 분권적인 질서를 구축한다.
  • 장원의 아래에 고대의 노예나 소농 등이 특정 지역에 묶이면서 만들어진 농노 계층이 등장하게 된다.
  •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질서 아래에서 모든 학문이 포괄되어 움직이면서, 고대의 인본주의가 쇠퇴하는 한편 형이상학적인 신학이 발달한다. 이것은 후에는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 교황권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게르만족들을 포교함으로써 결국 교황이 서유럽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힘입어 한때 교황이 직접 서유럽의 황제를 임명하는 사건까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이 출현하게 되었고 서방교회의 수장인 로마 총대주교(교황)과 동방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의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그 결과로 동서 교회 대분열이 일어나 서유럽은 교황중심의 가톨릭과 동유럽은 정교회로 분리되게 된다.
  •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도시의 등장, 서유럽의 국가들은 보다 중앙 집권적인 왕권의 확립 등으로 동로마 제국이 중심이 되는 구도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어 십자군 전쟁으로 동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아비뇽 유수로 교황권도 서서히 몰락하고, 마침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유럽에 비해 인본주의가 싹튼 선진문화인 비잔틴 문화는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를 꽃피움으로써 중세는 해체 국면을 맞게 된다.
  • 과학의 발달과 아메리카의 발견 등으로 기존의 신학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중세 질서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절대 교황권' 또한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 더는 존재할 수 없는 과거의 관념으로만 남게 되었다.

위 사례들은 우리들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이미지이긴 하나, 중세 1000년에 걸쳐 일어난 일들 중 몇몇 사건들만을 추려낸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중세를 이해하거나 특징을 추려내는 건 힘들다. 예를 들어 카노사의 굴욕은 교황과 황제의 대립 중 일부분에 불과하며, 유명한 십자군 전쟁조차 200년에 걸쳐 10차례 벌어졌고 그 양상도 제각각 달랐다. 중세 초기인 400년대의 유럽과 비교해서 말기인 1400년까지 갈 것도 없이 중세 중기인 1000년대까지만 와도 아예 시대 상황이 딴판이 되는지라, 이 시기를 뭉퉁그려 중세라 칭하는 것에 대한 회의도 생겨나는 판이다.

비교하자면, 유럽의 중세 초기에 백제신라가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중세 말기는 여말선초 시대와 대략적으로 겹친다. 이렇게 광범위한 시대를 '중세'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고대 역시 굉장히 광범위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고대 오리엔트,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를 따로 인식하는 편이다. 이와 비교할 시 중세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3.1. 시대적 구분

유럽 중세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대체로 476년부터 1453년이나 1492년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담론이 등장하면서는 중세의 시기에 대해서도, 그리고 중세의 성격과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대략적으로 중세의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다만, 요즈음의 역사에서의 시대구분은 시대구분이 상당히 자의적이라는 비판에 의해 시대구분을 역사가의 소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중세를 정확히 어느 시점이 시작점이고 어느 시점이 끝나는 지점인지에 대한 담론은 산업시대와 같이 크게 유의미하지 않다.

이처럼 사실 '중세' 담론이 가장 뚜렷한 유럽 역사에서도 중세의 시작과 끝을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이미 게르만족의 대이동 이전부터 이미 로마와 게르만족의 문화는 뒤섞이고 있었고, 중세에 게르만족에 의해 나타났다고 여겨졌던 요소들이 (주로 프랑스 아날 학파 사학자들의) 최근 연구로 고대 로마에도 존재했었고 그것이 게르만족만의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굳이 시작을 말하자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황제를 몰아내고 동로마에 서로마 황제의 휘장을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본다.

중세는 1000년에 가까운 긴 세월이라 요즘에는 중세를 다시 구분해 크게 초기, 중기(전성기), 말기로 보고 있다. 이는 중세라는 시대가 변화하지 않았던 고정의 시대라는 관념을 타파하고, 역사상의 변화라는 것이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급격히 변하여 시대가 어느 순간 바뀌기 시작한다는 기존의 관념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 중세 초기에 대해선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관점과 게르만족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로마 제국의 중심으로 중세 초기를 바라봤을 땐 로마 제국이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고 기독교를 공인하고 심지어 국교로 삼아 기존 다신교 중심의 제국을 기독교 중심의 제국으로 재편하는 4세기부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11세기 후반까지를 일컫는다. 중세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긴 기간으로 동로마 제국이 전 유럽에서의 패권을 유지한 시기이다. 반면 게르만족의 중심으로 중세 초기를 바라봤을 땐 서로마 제국 멸망을 중심으로 5세기부터 10세기 후반까지를 일컫는다. 주요한 사건으로는 이슬람의 대두,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원정, 카롤루스 대제프랑크 왕국과 베르됭 조약으로 서, 중, 동으로 분열, 바이킹 침략 등이 있다. 이 시기는 잦은 전란으로 온갖 것이 파괴되는 일이 빈발하던 시절이라, 흔히 암흑시대로 알려진 중세의 이미지는 이때에 가깝다. 실제로도 남아있는 사료의 양이 워낙 적어서, 학계에서도 이 시기를 연구하기 힘들다며 암흑시대라 부르는 것이다. 이 시기는 기독교켈트 신화, 북구 신화가 혼재되어 있던 시대로, 널리 알려진 아서 왕성배 전설, 디트리히 폰 베른, 베오울프, 시구르드성 조지 등 신화적인 중세 서사시는 모두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중세 중기만 되어도 현실적인 정치, 사회상에 밀려 신화적인 이야기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 중세 말기(Late Middle Ages) - 보통 14세기 초부터 15세기 말~16세기 초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이 몰락하여 지역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간간히 비추고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성장과 더불어 십자군이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실상 도시국가로 전락하고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곧 기독교 세계의 위기감을 조성하였고 그 대상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무역금지를 조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새로운 무역로를 찾기위해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인본주의가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되었다. 한편 서유럽에서는 프랑스 왕국에 대한 잉글랜드 왕국이 왕위 계승 문제를 대두하여 백년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결과는 프랑스 왕국의 승리로 프랑스 왕국이 강대국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며 또한 프랑스 왕의 권력이 상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년전쟁이 발생하기도 전인 1309년에 아비뇽 유수가 발생하여 교황권이 약화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초기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중심으로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에게 빼앗긴 기독교 세계를 되찾는 다는 목적의 레콘키스타가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국가였던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이 혼인동맹을 맺고 이후 두 국가가 동군연합으로 묶여져 새로운 강대국스페인 왕국이 등장함과 더불어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한편 신성로마제국 내부에서는 농민에 대한 탄압과 더불어 성직자의 부패로 인해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해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내부분열이 일어나 황제 중심의 가톨릭vs개신교 선제후국을 중심의 연합으로 분열하게 된다. 하지만 황제의 처신으로 인해 제국은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지만 사실상 황제가 제국 내의 일부 권역에서 세력을 펼칠 수 없게 되었다.

3.2. 시대상

3.2.1. 배경

기원후 2세기 말부터 로마 제국의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사후에 두 세기를 지켜온 안정과 평화는 정치적 혼란, 내전, 도시의 쇠퇴, 이로 인한 경제파탄에 자리를 내주었다. 제국의 변경에서 250년경부터 시작된 이민족의 공격과 침입은 또다른 위험이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정치와 경제는 활력을 잃었으며 생활수준도 전반적으로 열악해졌다. 상류계급의 생활수준은 특히 현저하게 낮아졌다. 경제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노예노동의 부적절한 공급과 역병, 전쟁, 출산율 하락에 기인하는 전반적인 인구감소였다. 경제상황의 악화는 진지한 학문연구에 절대전제조건인 여가를 빼앗아버렸다. 로마제국의 서부지역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부의 학문과 동부의 학문 사이에 교류가 점차 감소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3세기 말과 4세기에 로마제국은 행정적으로 동부와 서부로 양분되었으며, 두 지역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서부의 라틴 세계는 더이상 예전처럼 활기차게 동부의 그리스 세계와 교류 할 수 없게 되었다.

3세기 때의 이러한 위기로 말미암아 로마 서부 지역은 급격히 황폐화되었다. 이미 제국의 경제적 중심지는 동부의 그리스, 오리엔트였으며 이들 지역을 속주로 보유한 동로마 제국은 풍요로운 경제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비교적 수월하게 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반면 서로마 제국은 경제파탄, 내전, 야만족의 침략 등으로 인해 완전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동서제국 분열 이후의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로 몰려 있었다.

이 와중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것은 야만족들의 침략이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 대부터 시작된 야만족들의 침략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전부터 끊임없이 제국의 국경선을 침략하던 게르만족은 말할 것도 없고 훈족까지 침략해 제국 내부를 마구 유린하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의 지원을 얻기도 하고 야만족들과 연합하기도 하는 등 이 상황을 타개해 보기 위해 나름 노력했으나 이미 흘러간 대세를 다시 바꾸기는 어려웠다. 급기야 게르만족은 로마의 영토를 차지해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5세기 초 서로마의 속주인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 지방에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수에비족, 고트족, 앵글로색슨족, 반달족 등이 잇달아 침략해 정착함에 따라 서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일대만을 다스리는 미약한 정권으로 몰락했다.

결국 서기 476년 게르만족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제국을 멸망시켰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서유럽 세계에는 여러 게르만족 국가들이 들어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3.2.2. 농업

중세 초기의 경우 로마 제국 때 이룩한 농경술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지만, 6세기 경부터 서서히 농경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 기술 항목에 카루카라는 신식 쟁기가 북유럽에서 처음 발명된 것과 마구가 개량된 것이 바로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였다, 그리고 게르만족들이 실시하고 있던 개방경지제가 보편화되고 있었으며, 1000년경 중기 이후에는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 인구가 급증했고, 상업이 부활해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이루어져, 본격적인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형성되었다.[7] 이 생산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그 이전 로마 시대보다 더 증산된 생산량이었다.[8] 그러나 중세 후반에는 흑사병의 타격에 의하여 인구가 감소했다.

중세 시대에 곡물생산량이 증대된 것은 2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 하나는 수도원 운동으로 인해 각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농지개량법을 연구하여 보급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로마 시대 이후 2번째로 급격한 기온상승이 일어나 서유럽 전역에서 곡물재배가 활발해졌던 것이다. 아예 그린란드에서는 무려 7세기 초까지 밀을 길렀다.

하지만 후기에 기온이 떨어지면서 극단적 기근이 찾아온다. 페스트와 더불어서 당시 유럽 인구의 태반을 날려버린 계기가 되는데, 전반적으로 남부와 중남부가 페스트의 영향이 강했다면 그 위로는 대기근의 영향이 더 강했다. 심지어 영국 왕이 걱정을 할 정도까지 간다. 르네상스 시대에 생산량이 줄어드는 2가지 이유는, 온도 하락과 함께 인구 격감에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앞서 언급된 농업 기술력 발달이다. 그래서 중세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11~13세기 사이 유럽인들의 유골을 분석해보면, 오히려 중세 후반인 14세기 이후의 사람들보다 영양상태와 체격조건이 좋았다고 한다.

페스트가 지난 후의 후유증은 농업 방식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인구수가 줄면서 자연스럽게 죽은자들의 재산들이 전부 산자들의 몫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1인당 농경지의 비율도 증가하게 되는데, 추수기가 되면 더 넓어진 농경지의 곡식을 빨리 추수해야 했기에 기존의 남성 인력들만으로 감당이 되지 않자 여성들도 추수 작업에 동참했다. 남성들이 큰 낫을 휘둘려 추수 작업을 시작하면 여성들이 미쳐 추수되지 못한 곡식들을 작은 낫으로 마저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참고로 이시기에 서유럽과 북유럽 일대를 중심으로 목축업이 융성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12세기가 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키울 수 있는 가축의 수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 애당초 기후 자체가 지중해성 기후였던 남유럽 지역과는 달리 나머지 지역들은 서안 해양성 기후냉대 습윤 기후이기에 목축업에 유리한 면이 있었고, 특히 서유럽의 경우 근대를 거치면서 낙농업이 발달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특히 14세기가 되면서 발트해 연안에서 대량으로 곡식들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곡식의 공급이 과잉이 되면서 목축업의 비율이 증가하게 된다.

3.2.3. 경제

상업적인 측면에선 로마 제국 말기의 상황보다 더 나빠졌다. 특히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되었고, 서로마 제국의 경우 아예 이민족들에 의해 영토가 점차 점령당하다가 결국 망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동로마 제국의 경우 어느 정도 혼란기를 넘길 찰나에 이슬람의 발호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이슬람 해적들이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이 파급은 서유럽에까지 미쳐 무역이 중단되다시피 했으며, 나중엔 바이킹 같은 해적들 때문에 더 막장이 되었다.[9]

더구나 서유럽의 경우 별로 좋을 게 없었다. 단적으로, 지방 영주들은 지방 간 무역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무역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라기보다 경쟁자를 자신의 영토의 특산으로 부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10], 지방 간 이동할 통로에 관문을 빽빽히 설치해서 세금을 장난 아니게 때렸다. 이로써 지방 간 무역이 수축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화폐의 가치가 하락한 것도 한몫했다.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한 것도 있지만 로마시대 때부터 꾸준히 사용되어 온 데나리(denarii)의 은 함유량이 점차적으로 떨어지다가 13세기에 들어서는 구리화폐가 되어버렸다. 화폐의 은함유량은 해당 화폐의 신뢰성을 뜻하는 것인데 로마시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신뢰할 만했던 것이 종래에는 도저히 은화라고 부를 수도 없는 지경까지 가버린 것이다. 이것이 결국 상업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때문에 이 화폐도 결국 그나마 남아있던 교역이나 급료 지불 등 제한적이게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역이나 상업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흔히 무시되던 중세 초기에도 지중해 지역 내의 무역망은 소멸하지는 않았다. 주교구를 중심으로 대도시 자치 공동체가 생성된 이탈리아 지역은 도시로써 기능을 유지한 곳이 많았고, 이들은 이슬람과의 지중해 무역을 지속하여 미약하게나마 수출로 유럽으로 금을 유입시키거나 반대로 이슬람의 사치품을 수입해왔다.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이 있던 아헨과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잠시 교류하기도 했다. 파피루스도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재배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세의 전성기인 12세기에 이르면 자치 공동체인 코뮌들이 들어선 도시들을 중심으로 상업이 화려하게 부활한다. 특히 저지대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목류는 북유럽,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에 수출되면서 북유럽의 원자재, 이슬람의 금과 사치품을 서유럽으로 유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신성로마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 과정에서 알프스를 넘나드는 도로가 개척되어서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북 지역의 무역로인 소금길과 상파뉴 무역로가 생겨난다. 이를 통해 도시의 실권을 장악한 상공 엘리트가 '부르주아'로 성장하였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도시문화와 학문을 꽃피웠다. 이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12세기 르네상스'. 소금길, 길드의 탄생, 원격지 무역의 발달이 대두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들은 12세기 이후 유럽의 경제발전을 '상업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 북이탈리아, 보르도, 플랑드르 등 상업이 극히 발달한 지역은 이미 지역 내 자체 생산되는 식량으로는 도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해서 국제 교역망의 식량 수입에 의존해야했다. 보르도의 경우 포도주 제조를 위한 포도 플렌테이션이 생겨 자체 식량 생산은 거의 없었다.

14세기 초 흑사병 대유행을 지나 중세 말기가 되자, 유럽의 상업은 더욱 발전한다. 농업용 토지의 개발과 경영도 소유자와 경영자가 분리되는 기업형 영농이 출현했고, 광업과 제조업 분야 역시 기업형 조직에 의해 관리된다.

상업이 발전하고 화폐 경제가 살아나자 세금도 부활했다. 봉건주의의 관습 아래에서 세금은 토지세보다는 간접세 위주로 발전했는데, 그 덕분에 창문, 화로, 문짝, 신발, 술, , 우물, 결혼 등 세금을 때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11] 대개 평민들은 수입의 절반이 이런저런 이유로 세금으로 걷혔다. 그중 가장 타격이 컸던 것은 가장이 죽었을 때 영주가 돈을 떼가고, 교회에서 집의 가장 좋은 가축을 한 마리 가져갔다고 하니(사망세), 쟁기끌 소가 없어지거나 하는 사태로 인해 몇년 안 있어 집안이 망하여 소작농이 되곤 하니, 평민 전체가 결국 소작농이 되는 경제학적으로 봐서 결코 좋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귀족들은 평상시에 세금을 안 냈는데, 여기엔 봉건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 정작 중세 동안에는 귀족에 대한 면세 특권 자체는 없었다. 게르만의 관습 상 토지를 보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세금이란 토지세가 아니라 병역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만이 아니라 자유민들도 토지 보유에 대한 직접적인 세금은 없고, 병역과 노동력을 통한 부역이 직접적인 의무였다.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서 유력자들에게 의탁한 농노들이나 현물이나 공조를 통한 세금이 존재했다. 따라서 귀족이 세금을 안냈다고 말하기보다는, 애초에 유럽에서는 토지에 대한 직접세 개념이 희박했으며, 귀족이 담당한 의무는 참전의 의무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때문에 봉건제가 철저히 유지된 시절 동안에는 왕이나 황제조차도 다른 유력 영주 제후보다 특별히 경제적 우위를 가지긴 어려웠고, 직할령의 농노들에서 걷은 세금이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교회에서 걷은 십일조를 자신의 금고에 넣어서 돈을 확보했다.

교회의 경우는 영주나 왕에게 세금을 내지 않고, 위에 서술했다시피 오히려 자신들이 따로 거뒀는데, 빈민 구제를 비롯한 요즘의 사회 복지 부분을 실질적으로 담당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화되어 정부가 세금을 거두고 분배까지 담당하는 현대국가와 달리 이 시기는 정부의 기능이 궁정과 영주, 교회 사이에 분권되어있던 시대였다. 이 역할은 일부 지방에선 근대까지 유지되었다. 그레고어 멘델 브루노 수도원장이 교회 세금 징수안에 세금이 너무 무겁다며 땡깡을 부린것은 욕심때문이 아니라 당시 그 수도회에서 학교에 교사를 파견하고,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이 밖에도 많은 복지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것도 화폐 유통이 극히 부족했던 11세기까지 일이고, 중세 성기를 거치며 화폐 유통이 늘고 상업이 발전하자 군주들은 금전의 필요성이 커졌고, 그에 따라 점점 여러 목적의 특수세나 간접세가 신설되었다가 그것이 자체로 세금으로 자리잡는다. 이렇게 생겨난 직접세 중에 제일 대표적인 예시는 타유taille 라는 세금이었는데, 이것은 원래 '공조, 부조, 헌납' 정도의 의미로 주군이 갑자기 큰 돈이 필요할 때 봉신들이 주군을 위해 부조하는 개념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주로 왕이 사로잡혀 몸값을 낼 때, 주군의 자식이 결혼을 할 때 등에 메겨지는 것이었으나 어느새 그 자체로 세금으로 자리잡는다. 또 상기한 창문세, 화로세, 우물세 등은 도시에게 자치 특권 계약을 할 때 도시 공동체에게서 세금을 걷기 위한 계약이었으며, 귀족들에게서는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의 세금인 방패세가 매겨진다.

중세 중기부터 경제가 발전, 화폐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금융업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1156년부터 제노바 공화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 외환 조약이 채결되었을 정도였다. 이때 금융업을 주도하는 주체가 둘로 나눠졌다는 전자는 이탈리아 상인들로 이들은 10세기서부터 합자회사 형식의 상회을 설립해 지중해 무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고, 이후 유럽 각지에 지점들을 설치하면서 해당 지점들이 위치한 국가들에 외환을 꿔줬다.[12] 후자는 유대인으로 이들은 중세시대 들어서 서유럽 내에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당시 기독교 내에서 죄악시하던 고리대금업에 종사해야 했다.

또한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에 사라졌던 요식업과 숙박업 또한 중세 중기가 되면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다만 이때 요식업과 숙박업은 조선 후기에 활성화 된 주막처럼 한 곳이 겸업하는 것이 보통으로 inn과 tavern이 대표적인 중세 유럽의 레스토랑겸, 선술집이자 숙박업소였다.

중세 중기말에서 중세 말기(13-15세기) 사이에 유럽인들의 소득은 급격한 증가를 보았다. 화폐경제 발달로 농민의 부역이 줄어들고 소작농이 해방되어 대거 자작농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의 소득은 물론 도시 노동자들의 소득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이윤을 올린 것은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었다. 15세기 피렌체 시민들이 결혼할 때 가져오는 평균 지참금은 100 플로린, 현 가치로 8000만~1억 원에 해당할 정도다.

그외의 중세 유럽의 경제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대조해서 볼 것을 추천한다.

3.2.4. 정치

중세 유럽의 정치는 흔히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동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봉건제로 축약할 수 있다고 생각되나 사실 시대별 지역별로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우선 서유럽을 기준으로 왕권 및 중앙 정부와 영주를 비롯한 지방 정부, 교회 권력, 도시 공화국, 외교로 나눠진다. 우선 서로마 제국이 서서히 붕괴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서로마 제국의 영토들은 무정부 상태에 진입하고 만다. 게다가 7~8세기 거쳐 이슬람 세력이 육상과 해상을 통해 유럽 대륙을 위협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이 한동안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3.2.4.1. 전기
4~11세기 사이인 중세 전기의 정치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왕권의 경우 중세 초기 상당히 불안정했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특유의 정치 구조 덕에 겉으로 안정적으로 보일지라도 황제가 틈을 보이거나 무능하면 정변이 빈번하게 발생해 왕조가 자주 전복되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 옛 영토를 각기 차지 하고 있던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눠져 있어 여러 부족 단위의 왕국을 세웠고, 다시 내부로 여러 씨족으로 나눠져 있었기에 부족장이 왕이 되고, 그 아래의 씨족장들이 귀족 계층이 되었다. 다만 귀족 계층은 게르만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때까지 게르만족이 진출하지 않은 옛 서로마 제국 영역 안에 파견되었던 총독이나 로마인이나 로마인으로 동화된 켈트족 유력자들이 잔존하고 있었다. 프랑크 왕국처럼 잔존한 서로마 제국으니 잔당 세력을 공격해 흡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면 서고트 왕국의 경우 영토 안에 있던 모든 로마인들을 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쨋든 영토의 크기가 당연하게도 작은 소국인 것은 기본이었고, 게르만족 사회의 정치적 관념이 그대로 유지되어, 구체적인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왕권이 약했고, 무엇보다 게르만족의 오랜 전통이었던 분할 상속법에 따라 왕이 죽은 후 여러 왕자들에 의해 왕국이 여러 갈레로 분할되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크 왕국은 개국 이래로 팽창주의 정책을 펄쳐 서고트 왕국을 남프랑스 일대에서 축출하는 등 강력한 모습과는 별개로 왕권이 지방 유력자들의 협력 없이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고, 이때문에 지방분권화로 지방 유력자들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심지어 어린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해져 자연스럽게 궁재를 세습하던 가문이 작정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나마 프랑크 왕국은 상대적으로 나은 수준으로 서고트 왕국랑고바르드 왕국은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귀족들에 위해 왕위가 위협을 받거나 분할 상속으로 인해 여러번 왕국이 분할되다가 다시 유혈 속에 통합되거나 랑고바르드 처럼 아예 공위 시대가 될 정도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심지어 서고트 왕국은 관료제와 로마법과 게르만법을 융합한 독저적인 법전을 만들어 완비해가는 과정에서 왕과 귀족들, 말기에 아리우스파를 누르고, 국교가 되 가톨릭과 유대인들간의 대립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넘어온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다만 722년 아스투리아스 산맥의 코바동가 마을 근처에서 펠라요가 이끄는 서고트 왕국의 잔여 세력들이 이슬람군을 기습 섬멸한 후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우고, 약 800년 가까이 진행되는 레콩키스타의 문을 열게 되었다.

8세기 후반 카롤루스 왕조의 개조였던 피피누스 3세의 아들이었던 카롤루스 대제가 800년 로마에 방문한 후 교황 레오 3세로 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아 서로마 황제로 즉위하게 되지만 이로 인해 11년 동안 동로마 제국과 충돌하는 결과로 이어지다가 비잔티움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바실레우스라는 칭호를 받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자치권이 그대로 유지 되고 있었으나 차이점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지방의 귀족들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신들로 채웠다는 점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크고 사실상 유일한 제국인 상황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역시나 게르만족 특유의 분할 상속으로 인해서 꾸준히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카롤루스 대제를 이어 받았던 루도비쿠스 1세는 아들들과의 여러 마찰을 제위 내내 겪었고 결국 그의 사후는 아들들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고, 이는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이루는 계기가 된다.
그러던 중 789년을 기점으로 스칸디나비아와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노르드, 데인족들로 구성된 바이킹들이 브리튼 제도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의 해안과 하천 일대의 지역들을 습격해 약탈 및 해당 지역 점거하기 시작하면서 유럽 국가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히 칠왕국의 경우 웨식스를 제외한 여섯 왕국들이 바이킹들에 의해 무력화되고 당시 강국이었던 머시아마저 동쪽은 바이킹들의 차지가 되었고, 나머지 서쪽으로 그대로 웨식스의 종속국으로 전락되고 만다.

872년 하랄 1세 하르파그리에 의해 노르웨이가 명분상 통일이 되지만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실제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해안가에 국한되어 있었다. 925년 알프레드 대왕의 손자인 애설스탠에 의해 바이킹들에 의한 데인로를 끝내고, 잉글랜드를 통일하며, 936년 고름 1세가 덴마크를 통일했고, 10세기말 스웨덴 또한 에리크 6세에 의해 통일이 된다.
한편 바이킹들에 의한 혼란기를 수습하지 못한 카롤루스 왕조의 왕권은 약화해져 서프랑크 왕국의 경우 봉신들에 의해 몇차례 왕위를 찬탈당하다가 987년을 끝으로 단절되면서 카롤루스 왕조의 시대가 막이 내려 서프랑크 왕국의 여러 제후들이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를 국왕을 선출해 카페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동프랑크의 경우 그 보다 반세기 앞서 동쪽에서 밀려오는 마자르족에 침략에 시달리다가 카롤루스 왕조의 왕통이 끊어지면서 역시나 제후들에 의해 하인리히 1세를 선출하면서 오토 왕조가 개막되었다.

하지만 이 일들을 계기로 프랑스와 독일의 왕권은 약해지는 결과로 입증되고 말았다. 귀족들 중 한명을 대표자로서 선출된 것인 만큼 귀족들을 대상으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데에 제약이 생겼기고 만다. 특히 카페 왕조의 초대왕으로 즉위한 즉위한 위그는 남아있는 카롤링거 가문을 몰락시키면서 권모술수를 사용한 탓에 지지하던 영주들마저 그에게 등을 돌렸고, 왕령지 또한 현재의 일드 프랑스를 중심으로 월경지 수준으로 산개되어 있기에 왕권이 취약했다.
사족으로 중프랑크는 초대왕인 루타리우스의 봉어 이후 다시 분열되다가 결국 왕위를 승계할 후계자들도 빨리 죽게되면서 영토가 동·서 프랑크 왕국에 의해 분열되는 형식으로 해체되고 이후 이탈리아는 오랜 분열기를 가지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봉건제가 형성되기 시작하며 동시에 관직이었던 공작후작, 백작 등이 세습화되기 시작해 유럽식 귀족 작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때 기사 제도도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이당시 기사들은 기도하는 자인 성직자 계급과 농사를 하는 사람인 농부보다 밑에 있던 자들로 이때까지만 해도 귀족 신분이 아니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의 서로마 제국의 계승권은 독일 왕국의 오토 왕조의 오토 1세가 제관을 받게 되면서 독일로 넘어가게 되며, 9세기를 기점으로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시작으로 독일 동쪽에 위치한 마자르 대공국이 독일 지역을 침공하지 않는 대신 군주가 직접 가톨릭으로 귀의하기 시작하는 것과 함께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일대와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 또한 부족 사회에서 군주제 국가로 발돋음하면서 각각 가톨릭과 정교회로 개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로의 개종은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일부 왕실 일원과 야를 세력의 반발과 함께 반란으로 이어져 한동안 왕권을 위협할 정도였으나 10세기가 될 무렵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의회와 같은 의결 및 심의 기구의 기초가 생기기도 했다. 이는 당시 원로원이 있던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게르만/노르만, 슬라브 모두가 팅그(thing), 두마 혹은 베체라 불리는 평의회가 있었다. 두 평의회 모두 기본적으로 싸울 능력을 갖춘 자유민 남성들만 참석이 가능했다. 우선 게르만족의 팅그 혹은 알싱크의 경우 게르만족들이 서로마 제국 곳곳에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후에 크게 변천을 겪게 된다. 잉글랜드의 경우 7세기 경에 기존의 팅그가 위테나예모트로 바꿔졌으며, 기독교화가 진행되면서 주교 또한 웨나예모트의 일원을 참석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선 754년 제국의회의 전신이었던 제국회합이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했고, 카롤루스의 프랑크 제국이 그의 손자들 대에서 셋으로 분할되면서 궁극적으로 독일의 전신이었던 동프랑크 왕국이 제국회합의 정통성을 거머쥐게 된다. 슬라브족의 경우 루스계 바이킹이었던 류리크가 세운 키예프 공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바이킹을 구성하던 노르드족들 또한 평의회인 팅그가 있었기에 슬라브족들의 평의회인 베체와 섞이게 된다. 이밖에도 930년 건국된 아이슬란드 연방은 알팅그를 정치주체로 하는 여러 부족들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였다.

이밖에도 아일랜드스코트랜드에서도 각각 부족 국가가 세워졌고, 이중 스코트랜드 지역에서 아일랜드에서 넘어온 게일인과 원주민들인 픽트족들이 융합하면서 10세기에 스코틀랜드 왕국이 세워졌다. 다만 아일랜드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실패한다. 또한 앵글로·색슨의 침공때 유일하게 침공을 면한 웨일스 지방은 십여개 이상의 소국으로 존재했으며, 이후 중세 중기가 되기까지 귀네드, 룽 구이 아 하브렌, 포이스, 구엔트, 데허이바르스의 다섯 국가로 통합되지만 끝내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지증해 도서 지역들 또한 정치적 변동이 심했다. 코르시카의 경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 이미 반달 왕국의 영토였다가 522년 동로마 제국령으로 편입되었으며, 사르데냐, 시칠리아 또한 오도아커르 왕국, 동고트 왕국의 영토로 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토 수복 전쟁을 거쳐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 말기에 닥치 전염병과 7세기 중반 사산 왕조와의 전쟁 9세기 전후로 남쪽으로 이슬람의 발호와 함께 카르타고와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이 넘어갔고, 북으로는 루스인 및 현재의 발칸 지역에 대한 슬라브인, 마자르 및 불가리아인들의 침락을 받았고, 바이킹 역시 지중해에 진출하면서 큰 위협이 되었다. 이는 코르시카와 시칠리아가 이슬람 세럭의 점령되어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유일하게 사르데냐만큼 기독교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때 사르데냐는 주디카티라는 일종의 4개의 독립국가들로 나눠져 '판사'라는 의미를 지닌 주디체 혹은 유디케(judike)들이 군주들이 지배했는데, 이들의 승계는 다른 유럽 국가의 군주제처럼 가문의 승계에 의한 것도 있지만 간혹 민주적으로 일종의 의회격인 코로나 데 로구에 의해 선출될 가능성도 있었다.#

현재의 체코와 슬라비아 지역으로 이주한 동슬라브계 부족들은 622년까지 아바르족들에게 지배를 받다가 623년 모라비아와 슬라비아 서부, 저지대 오스트리아와 슬로바키아를 포함한 지역 내에서 프랑크인 상인이었던 사모를 중심으로 한 왕국을 세워 아바르족에게서 독립했고, 이후 영토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체코의 서부인 보헤미아와 엘베 강 유역의 소르비아와 카탈리아 등을 점유했고, 631년 프랑크 국왕이었던 다고베르트 1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견고할 것만 같았지만 658년 사모의 죽음과 함께 왕국이 해체된다.

이후 800년대 사라진 사모 왕국의 중심지인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모라바 공국이 세워지고 이후 스바토플루크 1세때 칭왕까지 하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907년 마자르인들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된다. 이떼 보헤미아 지역이 신성 로마 제국에 공작령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발칸 지역은 5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확고한 영토였으나 6~8세기 동로마 제국 내의 정세가 이 되면서 이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지면서 발생한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여러 슬라브족들과 불가르족, 그리고 마자르족들이 발칸으로 향해 대대적으로 남하하였다.

이로 인해 불가르족들이 먼저 발칸 반도에 정주해 점차 같이 발칸에 정주한 슬라브족들을 복속시켜가며 불가리아 제1제국 세운 후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편 자치 도시의 경우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백년 전 먼저 공화제로 건국되었던 산 마리노처럼 도시 국가로 독립할 여건이 되었으나 도시의 유력자들이 도시 밖에 있단 자신들의 소유인 대농장과 그곳에 딸려 있던 요새로 피신하는 것을 택하는 등 큰 공백이 생겼다. 본래 서로마 재국이 붕괴되기 이전까지만 공화정부터 시작한 이래로 고위 관리들을 명예로운 경력이라 무임금에 기초한 선출직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자치 도시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자치 도시 내의 자산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시의 고위 관리로 선출되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면서 이러한 메리트가 사라지면서 유력자들은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포기한체 도시 밖으로 피신하게 되자 그빈자리를 교회가 대신 매꾸기 시작했다.교회는 십일조 등의 다양한 경로로 얻은 교회 자금을 바탕으로 도시 내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도시의 통치권은 주교들이 갖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마 또한 로마 총대주교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교회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게르만족 군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게 되나 도시의 경우 라벤나 총독부의 함락 이후 우연치 않게 독립한 베네치아를 제외하면 주교의 통치를 받게 되며, 주교좌가 도시에 설치되었기에 12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도시는 주교가 통치하는 곳으로 인식하게 된다.
외교적으로 중세 초기인 5~11세기까지만 해도 서유럽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던 상태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게르만족계 국가들도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그대로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성립된 오도아케르의 왕국 또한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콘스탄티노풀로 보낸 후 동로마 제국에게 왕국으로 인정받았으며, 동로마 제국과 인접한 나라들도 동로마 황제에게 자세를 낮추는 대신 동로마 황제는 이들에게 바실레우스 칭호를 허락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런 동로마 황제의 권위에 의구심을 갖는 국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8세기를 기준으로 카롤루스 왕조 하의 프랑크 왕]의 서유럽 제패와 함께 피핀 3세의 기증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교황령이 성립이 되면서 정치 지형에 변화가 생긴다.

우선 콘스탄티누스 1세의 콘스탄티노풀 천도 이후 5세기를 전후로 삼위일체를 정통 교리로 삼은 기독교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풀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로 교리 문제 등으로 분열해가고 있었다. 더욱이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로마를 장악한 로마 총대주교를 비롯한 서방 교회의 성직자들이 무정부상태가 된 자치 도시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동방 교회뿐만 아니라 동로마 황제하고도 점차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그러다 8·9세기에 걸쳐 두 차레의 성상 파괴 운동과 그리고 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하는 등[13] 로마가 위치한 중부 이탈리아로 진출한 야욕을 보이자 로마 총대주교였던 자카리아는 당시 메로비로스 왕조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새로운 프랑크의 국왕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하게 해 랑고바르드 왕국이 점령하고 있던 라벤나 총독부까지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부터 빼았아 라벤나 총독부를 로마 총대주교에게 넘기면서 754년 자카리아의 후인 총대주교였던 스테파노 2세가 피핀 3세를 정식으로 프랑크의 국왕으로 인정해줬고, 이에 대한 답례로 피핀 또한 두번째 기증을 하면서 교황령이 성립된다.

교황령을 바탕으로 9세기 중반에 걸쳐 동방 교회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급기야 800년 카롤루스 1세를 로마로 초청해 서로마 황제의 제관받아들이면서 811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칭하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정도였다.이후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동로마 제국 또한 샤를마뉴에게 그냥 바실레우스 칭호를 인정할 수준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며 이슬람 세력과도 대립과 공존이라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하는 등 국제정세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카롤루스 사후 손자대에 프랑크 왕국은 세개로 분열한 후 북쪽으로 바이킹과 동쪽으로 마자르족들의 침략을 받게 되며 남쪽으로 이슬람 해적들에게 시달리는 상황이 더 심화되며 동로마 제국 또한 발칸반도로 진출한 슬라브족들과 불가르족들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고, 특히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자신을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자칭하는 등 유일한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위협받게 된다.
3.2.4.2. 중기
중기인 11세기가 되면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기독교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등 가독교화 되가고 있었고, 유럽 내의 정치 상황 또한 점차 봉건적인 성향을 띄기 시작하고 있었다.또한 이시기는 점차 세속 정치와 교회 간의 충돌이 빈번해지던 시기로 이시엔 이미 교황 자체가 세습만 하지 않을 뿐이지 세속 군주화 되가던 시기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십자군 전쟁이 발생하던 시기이도 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동방과의 무역이 활성화 되면서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다시 정체되었던 도시가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이제 시민 스스로가 왕과 영주, 그리고 교회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자립해나가려는 시기이기도 했다.

11세기를 전후로 가톨릭 영향하의 서유럽의 왕정국가들의 왕권은 상당히 취약했고, 반대로 지방 영주들의 권력은 상당히 강해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군주를 선출하면서 성립된 왕조였기에 제후들의 변덕에 언제 다른 왕을 세우는 것이 위협이었고, 이에 로마 황제들이 정제와 부제를 둔 예에 따라 자신의 아들을 공동왕으로 선출하게끔 해 왕위를 교체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시켰다. 그리고 여러 방면에 거쳐 왕권 강화가 시행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카페 왕조가 성립된 후 왕령지를 확대하거나 확장왕 루이 6세부터 본격적으로 왕으로서의 제대로 된 통치를 시작해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실시, 단순히 전투와 무력 투쟁을 통해 봉건적인 제후와 귀족들을 제압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왕국의 여러 인민들을 실질적인 국왕의 신민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는 손자인 필리프 2세때 돼서야 결실을 맺어 외적으로 영국 왕실로부터 노르망디와 앙주, 아키텐을 빼앗는데 성공하며, 내적으로 지방의 영주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치 도시들을 조성하고, 대학 교육을 이수한 관료 집단과 직속 기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경우 이미 중세 초가 끝날 무렵부터 오토 1세부터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처음에 친인척들을 등용해 제후들을 견제하려 했으나 오히려 친인척들이 제후들과 결탁하면서 실패가 되자 비세습적인 성직자들에게 주목해 제국교회정책을 실시해 고위 성직자들을 등용하는 방침으로 왕권을 강화해갔다. 이로 인해 한때 황제의 권력이 교황마저 갈아치울 수준으로 강해졌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하인리히 4세 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러한 반전으로 하인리히 4세는 어떻게든 서임권 투쟁에서 밀리려고 하지않았다.

흔히 잘 알려진 카노사의 굴욕 역시 실상 하인리히 4세의 복수로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하인리히 4세는 새 교황 우르반 2세, 파스칼 2세가 배후로 있는 것으로 추정된 두 아들들과 귀족들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급사하게 되었고, 뒤를 이어 즉위한 하인리히 5세 또한 어떻게든 서임권을 넘기려고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 1122년 보름스에서 칼리스토 2세와의 협약을 통해 서임권을 포기해야 했다.이후 하인리히 5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봉어하면서 잘리어 왕조 또한 단절되면서 주플린부르크의 로타르 3세가 다음 황제로 선출되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의 경우 마케도니아 왕조가 말기에 접어드는 시기로서 콘스탄티노스 8세의 데릴사위였던 로마노스 3세가 의문사 당한 후 제위가 불안정졌고, 급기야 테오도라 여제를 끝으로 왕조가 단절된 후 두카스 왕조가 들어선 후 30년 가까이 혼란기에 빠지다가 알렉시우스 콤니누스가 제위를 찬탈한 후 혼란이 수습된다.

다만 영국의 경우 경우 대륙과 달랐다.일단 영국은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윰에 의해 정복당한 후 윌리엄 1세로 즉위한 후 끝까지 반항하는 앵글로색슨계 귀족들을 무력으로 억눌려가며 인구 및 토지장부인 둠즈데이 북을 편찬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일구어내려 했고, 이후 그의 삼남인 헨리 1세가 외동아들인 윌리엄이 1120년 해상사고로 사망한 후 하인리히 5세의 황후였던 마틸다를 남기고 사망한 후 조카 스티븐과 마틸다 사이의 수년에 걸친 내전을 지난 후 마틸다의 아들이자 앙주 백작인 조프루아의 아들이었던 헨리 2세 정식으로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후 당시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의 왕비였으나 그와 이혼한 아키텐의 여공작이었던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결혼하면서 막대한 왕령지를 획득한다.

하지만 노르만-앙주 왕조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았다. 바로 두 가문이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다는 봉건적 특징이 아킬레스 건이었다. 이때문에 외교상으로 영국 왕실과 프랑스 왕실은 빈번하게 갈등관계를 유지했고, 결국 헨리 2세의 막내 아들이었던 이 영국 국왕으로 즉위한 후 벌어진 왕귀 계승과 관련된 분쟁을 이용해 필리프 2세가 존 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법정에 출두할 것을 요구했고, 이것을 존 왕이 무시하면서 이를 명분 삼아 그동안 헨리 2세까지 넓혀왔던 잉글랜드 왕가의 왕령지를 공격해 병합시켰고, 존 왕이 말년에 벌인 실책으로 인해 마그나카르타라는 초유의 결과를 맞게 되었고, 그나마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개입으로 무효가 되지만 헨리 3세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으로 왕권이 무력화되고 큐리아 레지스를 개편해 현재 영국 의회의 전신인 모법 의회가 만들어 졌으며, 이후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1세가 시몽 드 몽포르를 상대로 친위 쿠테타에 성공한 후에도 모범 의회는 계속 존속되었다. 그밖에도 외정으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지방을 병탄한다.

그외의 국가들도 중세 중기는 왕과 지방영주들간 대립의 시기였다.폴란드 왕국헝가리 왕국, 덴마크 왕국, 노르웨이 왕국, 스웨덴 왕국 등이 영국 프랑스, 독일과 마찬가지로 11세기 말부터 12세기경까지 왕과 영주들, 혹은 왕위 계승과 관련되거나 영주들간의 내전이 발생했고,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는 한세기 가까이 내전 수습과 다시 내전 재개를 반복했고, 헝가리는 1038년 이슈트반 1세의 붕어 후 이슈트반 1세의 외조차인 베네치아의 페테르와 헝가리 전통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어버 샤뮤엘 사이에 8년간 왕위를 두고 벌어진 내전 끝에 이슈트반 1세의 혈족이었던 아르파드 왕조가 왕좌를 굳건히 한 후 동로마 제국과의 불침 약조를 깨고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해 1102년에 왕가가 단절된 크로아티아 왕국을 합병한다.

특히 아래에 후술되어 있지만 헝가리 왕국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각각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종속화를 강요받았으며, 동모라 제국의 경우 콤니노스 왕조 마누일 1세때 당시 헝가리 국왕이었던 벨라 3세와 마누일 1세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마리아 콤니니와 혼인시켜 벨라 3세를 자신의 후계로 삼아 합법적으로 헝가리를 병탄하려 했으나 아들인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나면서 해당 계획은 취소된다.

반면 폴란드의 경우 내전의 빈도가 심했다. 심지어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부터 다시 왕 대신 공작으로 불려야 했으며, 심지어 블레스와프 3세가 서거하면서 남긴 유언으로 폴란드를 4개의 공국으로 분할시켜 각각 아들들에 물려주는 대신 고공위를 만들어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에게 물려주었으나 오히려 다른 세명의 아들들이 형과 함께 고공 자리를 두고 또 다시 내전을 벌이게 된다. 이 분열은 13세기 중반 실롱스크 공 헨리크 1세가 크라쿠프를 차지하여 폴란드 대공이 되었고, 1238년 그의 아들 헨리크 2세가 실롱스크 공작위와 폴란드 대공위를 이어받은 후 점차 폴란드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 하나 몽골의 침입을 받아 헨리크 2세가 전사함에 따라 해당 통합은 1세기 가까이 지연되고 만다.

정치 철학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12세기 로마법의 부흥과 함께 기존의 관습법이었던 게르만법과 함께 법에 의한 통치가 동시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아울러 법 철학에 따른 군주의 권력을 어떻게 뒤받침할 것이고, 어디까지 정할지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래에 후술된 외교 부분에 언급된 내용들을 참고하면 된다.
그 중에서 12세기 영국의 성직자이자 프랑스의 샤르트르의 주교직을 역임했던 숄즈베리의 존은 진정한 군주와 폭군을 가르는 기준을 자유의 유무에서 있다고 봤고, 자신의 저서에 '군주란 법과 인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존재다. 폭군은 오로지 법이 폐기되고, 인민이 노예가 되는 것만을 바라는 존재다.'라고 피력했다.# 당시 존의 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 카지미에시 3세처럼 지배층의 횡포에 일반 평민들을 보호해주는 등 개념있는 군주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이밖에도 수도원이나 동로마 제국 및 이슬람 세력과의 교류 등으로 다시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이 부활하면서 지식인 한정으로 전체군주제를 혐오하는 사상을 물려받아 자국내의 정치가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는 체제라고 생각했다.관련 링크 또한 사회계약론과 유사한 사상 또한 등장하기도 했다.관련 링크

그 밖의 사례로는 중세 중기 초부터 시작한 동방식민운동이 있는데, 초기 동방식민운동은 상속받을 땅이 없던 신성 로마 제국의 영주들의 차남 이하의 아들들이 직접 영지를 개척할 목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개척지를 점령한 후 현지의 토착 슬라브인들을 농노화시켰지만 이내 소수의 영주들의 힘만으로 이들을 굴복시키는 것에 한계가 오자 결국 본토인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통치에 뒤받침할 목적으로 평민들의 이주를 장려했고, 기간이 있고, 한정적이지만 이주민들이 정착지에 잘 정착할 수 있게끔 배려했다.

중세 중기가 시작되던 11세기 당시의 교회의 권력은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국가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안전성에서 취약했다, 특히 오토 왕조의 오토 3세가 교황을 자신의 측근으로 대체시키려한 시도가 있는 등 교황의 권위가 크게 위협을 받았다. 특히 이시기부터 성직자들의 지배 계층화와 함께 부패와 자정이 반복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11세기 중후반 하인리히 3세가 어린 아들인 하인리히 4세를 남기고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교황의 권력을 압박하던 황권에 공백이 생기면서 각종 개혁과 함께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교황/역사를 참고
중기가 되면서 교회의 통치를 받던 도시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우선 1035년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였던 밀라노에서 코뭔 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밀라노는 밀라노 대주교의 통치를 받던 도사였으나 이당시만 하더라도 성직자들이 독신이 아닌데다가 족벌주의까지 횡행하자 결국 1057년 파타리아 운동과 함께 교회 권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다만 이때는 그저 교회 개혁과는 연개된 저항 운동인 탓에 자유 도시나 코뭔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 유럽의 외교는 동시기의 동북아시아의 한자 문화권과 전혀 다른 국제 질서를 형성되기 시작했다. 우선 황제 칭호가 주변 국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서유럽에선 9세기경 잉글랜드를 병합한 덴마크의 크누트가 황제를 자칭했으며, 이후 11세기 카스티아의 국왕인 알폰소 6세가 전 스페인의 황제를 자칭했으며, 동유럽에선 10세기 불가리아 또한 카이사르에서 따온 차르를 쓰며 동로마 제국과 대립하는 등 로마 황제의 권위가 무시당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영국과 스페인의 경우 단발적으로 그쳤지만 이후 유럽의 분열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한 것이 다름아닌 법률 체계가 공고하게 했다. 바로 교회법과 관습법, 그리고 로마법이었다. 교회법은 로마법과 기독교 교리에 맞게 만들어진 법으로서 신 아래 평등하다는 교리 등이 접목되어 있으며, 제3차 십자군 원정 이후 육로로 통한 귀환 중 신성로마제국에 구금된 리처드 1세가 자신에게 봉신관계를 강요하는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고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게르만법은 관습법으로서 주로 게르만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주로 채택하고 있었다. 게르만족들은 로마제국이 건재한 당시까지 통합하지 못하고 할거 상태였고, 이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들어가 나라를 세운 후에도 마찬가지로 관습법 또한 부족별로 달랐다. 관습법은 봉건제가 등장하면서 봉건제가 결합해 쌍무적 계약하에 군주라도 봉신에 대한 불간섭 원칙이 고스란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관계에서도 적용이 되었다.

로마법의 경우에도 공화정 이후 만들어진 법으로서 서로마 제국 붕괴후 무명무실해지다가 12세기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로마법 부흥이 시작되면서 황제의 종주권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세 이전 로마법에 대한 해석들 중에서 황제 또한 그 권위를 법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주장이 있었고,동로마 제국에서도 법의 제정에 대해서도 황제를 포함한 그 누구라도 궁극적으로 법이라는 이유를 들며 황제의 권위를 졸대적이지 못하게 했다.
또한 이시기 권위의 상승이론과 하강이론이란 것이 이때 등장했다. 두 이론은 모두 로마법에 근거한 것으로 12세기 블로냐 대학의 유명한 법 이론 교수였던 아조가 주장한 것으로 권위의 상승이론은 게르만족과 연계된 것으로 권위가 밑으로 위로 올라가는 즉 권위의 근원이 정치공동체에게 있다는 사상이며, 권위의 하강이론은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즉 권위의 근원이 신에게 있다는 것으로 사실상 왕권신수설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법적 이론에 맞물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권위는 인정받되 점차 제국 밖에 위치한 프랑스, 잉글랜드, 스페인 제국(諸國) 등의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9세기 경 국경을 맞대던 폴란드 왕국헝가리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점차 로마 제국의 발상지였던 이탈리아 반도에 집중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며 이는 교황령과의 분쟁으로도 이어지는 결과로 맺어지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이밖에도 제각기 달라져가는 언어·문화 등을 한데 묶기에도 신성 로마 황제들은 물론이고 로마 황제로서의 전통성을 갖고 있던 동로마 황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기독교의 동서 대분열 시기를 거치며 가톨릭이 주류인 서유럽권과 정교회가 주류인 동유럽권으로 나눠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서유럽의 봉건제가 정착하게 되면서 각 국가 내의 지방별로 고유의 방언과 함께 정체성까지 확립되어가던 시기였고, 이는 본격적으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등장하는 근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이 시기는 혼인 동맹이 빈번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단순하 국가간의 결속력을 위한 목적이 아닌 혼인한 가문 중 하나가 단절 시에 계승권을 주장해 그 영토를 합병할 목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위의 세속 정치에서 언급된 영국의 노르만-앙주 왕조의 혼인 동맹 방식은 반세기만에 프랑스 내에 영국 왕실의 직활령을 단숨에 늘려놨다.

또한 이 시기부터 외교관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먼저 등장한 것은 현재 중세 유럽사 서적에 간혹 보이는 일명 문장관으로 불리는 전령(Herald)으로 이들은 11세기부터 등장했으며, 이들은 왕실과 영주들의 문장을 해석 및 어떤 가문인를 분류하는 것이 주업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급 외교사절로서 상대 군주에서 주군의 선전포고와 같은 기본적인 외교 활동을 대리했다.

그러다가 12세기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에서 영사가 등장했다. 본래 고대 로마시대때 로마의 식민지에 파견된 치안 판사에서 유래되었으며, 12세기에 다시 지중해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이탈리아의 도시마다 지중해의 항구도시에 조계지를 할양받아 그곳에서 단체로 모인 후 교역에 종사하지만 조계지 내의 상인들 간의 분쟁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를 중재할 목적으로 영사를 파견하게 되면서 현재의 영사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3.2.4.3. 후기
중세 후기는 중세적 헤게모니들이 점차 사라져 가던 시기였다. 우선 서유럽 내에선 신성 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의 권력이 동시에 약해진 시기였으며, 동로마 제국 또한 이시기에 확실하게 쇠퇴하면서 멸망을 향하고 있었다.

이시기는 유럽 각지에 다양한 구조의 의결기구들이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완전히 자리잡은 시기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삼부회와 함께 폴란드의 세임등이 이때 생겨났으며, 헝가리와 보헤미아나 칼마르 동맹의 릭스로드 등이 있다. 해당 의결기구들은 참석인들의 신분에 따라 두가지로 나눠졌다. 전자는 영국의 의회와 프랑스의 삼부회,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테스,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처럼 성직자와 귀족, 부호에서 소지주까지 망라한 평민 출신인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와 후자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귀족제 의회로 나눠졌다.

후자의 경우 대개 전자를 제외한 유럽의 국가 모두가 채택하고 있었고, 러시아 공국들 또한 공화정으로 전환한 노브고로드를 제외하면 점차 그냐즈를 비롯한 보야르들의 권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민회 자체가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때의 의결기구들은 대체로 왕권을 견제하는 목적이나 아니면 거수기 기구와 같은 목적을 지녔다. 전자는 신분제 의회를 채택하던 영국과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 신성 로마 제국과 귀족제 의회를 채택한 국가들이었고, 후자는 프랑스의 삼부회가 대표적이다.

외교적으로 14세기 르네상스가 꽃피우기 시작하던 이탈리아에서 대사가 등장했다. 이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정치적으로 혼란기 진입하던 시기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나 소국들은 서로를 견제할 목적으로 다양한 외교 전략을 구사했는데, 대사 제도 또한 이에 대한 일환으로서 영사와 마찬가지로 타국에 채류하면서 겉으로 친교 곤계를 유지하나 실상은 해당 국가의 내부 기밀 등을 수집하려는 목적이 강했었다. 이러한 대사 제도 또한 영사 제도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전쟁 이후 16세기 유럽 국가들 사이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수정 작성중

3.2.5. 관직과 행정

중세 유럽의 행정은 당시 건재한 동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다른 문화권, 특히 한·중·일 등의 한자 문화권과 비교하면 전문적인 관료조직과 관료들이 전무했다.정확히는 관료 조직으로서의 개념이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암흑 시대로 알려진 중세 초기만 하더라도 서로마의 관료제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서유럽에선 게르만계 지도자들이 로마를 모방하면서 황제의 고위 행정관을 지칭하는 코메스(Comes largitionum), 군대 사령관을 뜻하는 독스가 그대로 게르만계 국가 특히 프랑크 왕국에 도입되었으며, 800년대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 변경지대를 관리할 목적으로 변경주(Mark)를 만들어 변경주를 통치할 관리로 Mark Graf를 두었으며, 더 멀리 가면 이전 왕조였던 메로빙거 왕조 때는 궁재를 두고 있었다.

이밖에도 브리튼 제도에서는 10 가구를 관리할 목적으로 성인 남성에게 치안 의무를 부여하였고, 다시 100가구씩 묶어 범죄자를 추적하고 체포하며 마을 전체의 말과 무기의 관리를 담당하는 자경대장(Constable)[14]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경대장들의 통제하는 100가구씩 묶은 단위를 Hundred라고 불렀고, 이것이 여럿 모인 행정단위가 오늘날의 주(County)에 해당하는 샤이어(Shire)였는데, 샤이어를 담당하던 관리가 오늘날 보안관의 기원이었던 샤이어 리브(Shire Reeve)였다.

하지만 이 당시 문맹자의 비율이 높았고, 특히 지배층들 또한 문맹인 경우가 허다했기에 행정 실무를 전담한 것은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암흑 시대로 알려지던 중세 초기의 유일하게 글을 읽고 쓸줄 알았던 이들이 지식인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일반적인 행정 실무인 출생신고, 사망신고, 교회와 관련된 교육 및 복지 행정 등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는 중세가 끝난 후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진 후에도 근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도시가 성정한 후 도시 인구 또한 자연스럽게 증가함에 따라 행정 또한 인구수에 맞춰 분할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에 따라 도시 내의 구역 또한 교회를 중심으로 하게되어 근대 이전까지 도시의 구역명을 교구명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가 되었다.

또한 이시기는 영구적인 수도가 존재하지 않던 시기로 왕들은 생산량이 풍부한 지역에 각각 팔츠라 불리는 행궁격의 궁정을 두어 일정 시기마다 다른 팔츠로 이주했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로 들면서 이러한 행정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1세기가 되면서 법학을 전공으로 하는 블로냐 대학이 설립과 함께 로마법 부흥이 시작되면서 유럽 각지의 사람들이 로마법을 배우기 위해 블로냐 대학으로 몰려들어 법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법률가로 활동했지만 왕에 의해 세속인 출신의 관리가 되어 행정가로서 활동했다. 또한 이시기 본격적으로 미약하고 점진적으로 관료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는 세속군주들과 로마 교황과의 대립이 있던 시기로 아이러니하게도 중세적 관료제의 발달을 불려오게 되었다. 우선 관료제가 먼저 정비된 곳이 바로 교황령으로 교황을 비롯한 지도층이 세습이 아닌 선출 및 종신 임용직이었기에 교황과 그 아래의 추기경, 대주교, 주교 등으로 구성된 피라미드 형태의 정부 조직을 구성해 어느 정도 관료제가 형성될 수 있었다.

특히 교회법의 집대성인 그래티안 교령집의 저자인 볼로냐의 수도자이자 법학자였던 그래티안은 교회를 구성하는 성직자들이 단순한 연공서열이 아닌 실적과 성과에 따라 경력이 관리되어져야 하며 성직자로서 서품하는 것 역시 능력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고난 후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성직자는 구두가 아닌 문자화된 지시에 따라 일을 수행하여야 되며 법적인 훈련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 당시에 교회조직의 영향력은 지대했으며 이것은 또한 행정관료제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래티안의 이러한 주장들은 1231년에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발표된 포고령의 내용과 아주 흡사한데 이것은 알게 모르게 근대행정관료제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후 교황령 뿐만 아니라 프랑스영국 등에서도 관료제도를 재정비하기 시작했고,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도 군주의 직활지를 통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관직들을 만들기 시작했고, 대체로 아래와 같이 고위 관직들을 설치했다.

챈슬러(Chancellor):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신성 로마 제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폴란드, 베네치아, 시칠리아 포르투칼 카스티아, 아라곤, 헝가리 등에 설치된 고위 관직으로 영어에선 총리로 번역되나 실재로 영어권에서 현대의 총리직보다는 사법권을 전담했으며,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나마 신성 로마 제국과 덴마크, 노르웨이, 폴란드에서 그나마 현대의 총리직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지만 첸슬러들의 임무는 주로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고, 대체로 성직자들이 독점했다. 참고로 신성 로마 제국은 해당 직책으로 각각 성직 선제후인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들이 각각 공통으로 독일 왕국의 제국 재상과 이탈리아 왕국의 제국 재상, 부르군트 왕국의 제국 재상으로 겸임했다.

체임벌린(Chamberlain):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신성 로마 제국, 세르비아, 동로마 제국, 카스티아, 포르투칼, 교황령 등에 설치된 고위 관직으로 프랑스와 잉글랜드, 스코트랜드,동로마 제국, 카스티아, 포르투칼에선 궁정 업무를 총괄하는 관직 중 하나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 세르비아에선 재정 업무를 관장했다.

콘스테이블(constable):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카스티아, 포르투칼, 아르메니아, 조지아, 동로마 제국, 스웨덴, 덴마크 등에 설치된 고위 관직으로 현대 영어에선 순경으로 표기되나 중세때만 하더라도 마샬과 함께 왕의 마굿간을 감독하면서 왕의 기병대의 지휘관이기도 했기에 무관장이나 기병대장으로 표기되며 예루살렘 왕국 항목에서는 집정관으로 표기되어 있다.

마샬(marshal):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트랜드[15], 신성 로마 제국,카스티아, 포르투칼, 나바라 등의 설치된 고위 관직으로 군대의 원수직이 마샬에서 유래되며, 콘스테이블과 업무가 겹치지만 서열상으로 아래이다.

재정 업무에선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의 재무상(Lord High Treasurer), 위에 상술한 스웨덴, 신성 로마 제국과 세르비아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Grand chambrier,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스튜어트(steward) 해당되는 Drost 등이 있었고, 시칠리아에서는 Luogotenenza del regno가 있었고, 이밖의 나라들은 스튜어트들이 재정을 담당했는데, 스튜어트들은 왕의 사유 장원들을 관리하던 관직으로 장원에서 나온 소득 또한 스튜어트들의 감독하에 있었다.

다만 위의 관직들말고도 국가별로 다양한 관직들을 신설해 운영했다. 특히 13세기경 반상비적인 해군을 만들면서 해군을 총지휘할 지휘관인 제독직이 이때에 생겨난 직책이었다. 그외에도 여러 관직들이 독자적으로 신설되었다.#

다만 이당시의 관리들은 전부 고대 로마처럼 공사가 구분된 이들이 아닌 군주의 하인과 같은 존재들이었으며, 무엇보다 고위 관료들로 갈 수록 세습 내지는 매관매직과 같은 엽관제로 운영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능력 있는 이를 기용하더라도 그것은 군주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한편 12세기가 되먼서 봉건영주, 주교의 통치에서 벗어난 자유도시가 생겨나 시정참사회를 중심으로 한 코뮌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시정참사회는 도시법의 제정과 집행뿐만 아니라 도시의 행정을 총괄했다. 참사회원의 수는 도시마다 수 명에서 40명 사이였다.

시정참사회가 자유도시의 통치 기구였던만큼 시정참사회의 수장이 시장직을 겸직했는데 근현대와 달리 시장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었다.# 이러한 시장직은 국가별로 부르는 명칭이 달랐으며, 봉건제가 뿌리 깊이 내린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한 북부와 중부에서는 포데스타(podesta)로 불렸다.

12세기가 되면서 공화정을 책택하던 도시국가나 자유도시들이 점차 생겨나면서 별도의 행정제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 산 마리노와 함께 다른 공화국들보다 수세기전에 건국되었으며, 국가원수인 도제는 초기엔 세습제에 가깝게 선출되다가 이후 확실하게 연륜있는 인사를 선출하는 형태가 자리잡게 되었지만 여전히 종신제였다. 이에 베네치아는 도제의 권력을 견제하고 만일 도제가 사망한 후 차기 도제를 선출하는 기간동안 발생하는 행정적 공백을 매꾸기 위한 목적이나 회계 감사 등으로 여러 정부 조직등을 신설하기 시작했다.

3.2.6. 문화

3.2.6.1. 문학
상세내용

문화의 부흥에 대해서는 암흑기다 아니다 하는 이견이 많은데, 일단 한가지 확실한 건 중세시대가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문화 사이에 라틴어와 라틴문학을 전수한 전수자의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가 시대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라틴어문학 보존작업인 카롤링거 르네상스 덕분이었다. 인쇄술이 전무했던 탓에 손수 그 많은 책을 베껴가며 보존했는데, 초기에는 카롤링거 왕가에서, 후기에는 수도원들이 이 일을 해냈으며, 이후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세속인 출신의 필경사들이 등장했지만 중간에 좀 첨삭이 있기도 하였고, 결국 인쇄술이 발달할 때까지 저본 논쟁도 조금씩 벌어지게 된다.

다만 라틴 문학을 보존하긴 했으나 그리스어 문화는 보존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나중에 레콩키스타를 통해 정복한 톨레툼의 도서관에 있는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자세한 내용은 서적 《번역은 반역인가》를 참고할 것.

또한 이 시기에 단테 알리기에리신곡,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 구전설화인 롤랑의 노래등 다양한 지식계층을 위한 문학이 발전했으며, 다성음악이 발명되고, 사라질 뻔했던 연극이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연극의 경우는 종교적인 입장에서 글도 못 읽고 교회에서 얘기해줘봤자 알아들을 리가 없는 우민들을 교육하기 이보다 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성경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든 유랑 연극단들이 지방 곳곳에 퍼져 교리를 전하였고, 실제로 이는 교회의 입지기반을 튼튼히 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다만 이러한 문학의 흐름을 주도한 자들은 보통 음유시인들과 연대기 작가들이었다. 특히 음유시인들은 국가별, 시의 유형별로 달랐다. 프랑스에선 남부의 트루바두르# 북부의 트루베르#, 독일에선 12~14세경의 미네징거###, 14세기 이후는 마이스터징거###들이 중세 유럽의 문학을 선도해 갔다.

또한 중세 초인 7세기에 아일랜드수도자들이 띄어쓰기 법을 도입했으며, 중반인 12세기에 필기체인 고딕체로 알려진 블랙 레터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3.2.6.2. 복식
디시인사이드 게임 속 중세의 옷
동로마 제국 복식 1/2동로마 제국 복식 2/2
중세 초․중기 서유럽 복식 1/2중세 초․중기 서유럽 복식 2/2
중세 후기 서유럽 복식 1/2중세 후기 서유럽 복식 2/2

아래에 후술되어 있지만 흔히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다는 대다수의 판타지, 양판소, 로판등의 복식 묘사나 웹툰에서 표현된 이미지 등을 보면 근·현대적인 이미지에 가깝게 묘사되는데 실제 중세 유럽의 복식 문화와는 전혀 다른 근대 복식 문화다. 실제 중세 유럽의 복식 문화는 중세 초만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복식 문화와 게르만의 복식 문화가 융합된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중세 중기로 들면서 현대인의 패션 감각과는 동떨어진 형태로 18~19세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어 가는 당시 유럽의 복식 문화는 이미 그리스·로마의 복식과 게르만족들의 복식이 융합되어 가고 있지만 이미 토가를 점차 착용하지 않는 비율이 높아지는 등 전반적으로 게르만식 복식문화의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였다. 특히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튜닉의 밑단이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어졌다.

이는 동로마 제국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서유럽과는 달리 동방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고대 로마의 복식과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동로마의 복식 문화는 키예프 루시를 거쳐 동슬라브인들이 주축인 러시아 공국들로 전파되었고, 서유럽에도 일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동서 대분열을 거친 후 중세 중기가 되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복식 자체가 완전히 갈라지게 된었다. 이는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확연해지기 시작했다. 서유럽의 경우 비단이 다시 수입과 함께 동로마를 통한 교류 등으로 남유럽에서 생산되기 시작해 의상이 화려해지기 시작했으며, 남성용 튜닉의 밑단이 짧아졌으며, 또한 중세 초까지 그나마 넓었던 바지인 브레가 현제의 사각 팬티 수준으로 짧아지고, 양말 격이었던 호스가 점차 길어져 팬티스타킹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쇼스로 변하게 된다.

동로마의 경우 이미 중세 초부터 아랍과 페르시아, 그리고 현재의 발칸 지역에 정착한 마자르족과 같은 중앙 아시아에서 온 유목민들과 접촉하면서 점차 복식에도 영향을 받기 시작해 10세기 중반에 궁정 의상에 호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10세기 중반 이러한 경향은 증세 중기인 11세기에 들어서면서 더 심화되어 복식의 동방적 색체가 더 강해지게 되었다.11세기 중반 11~12세기, 이후 후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오스만 투르크의 세력이 커지면서 멸망하기 전까지 투르크의 영향을 받은 복식들을 입었다. 황제들이 머리에 쓰고 다닌 모자 또한 몽골-투르크식 모자였다.황혼기 동로마 제국 말기 모자들

이는 동로마와 지리적 및 종교적으로 가까운 동유럽권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3.2.6.3. 건축
로마네스크 양식 및 고딕 양식도 이때의 산물. 고딕 양식은 해당 항목 참조. 참고로 건축학에선 고트족과 상관이 없는 작명. "전통적인 건축학 입장에서 보면 꽤 파격적이다."라는 의미에서 "야만인" 고트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다만 이때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하게 되어 일시 건축학이 퇴보 되기도 했다. 10~11세기 고딕 양식이 서서히 들어오기 전에는 많은 건물들이 돌만 좀 쌓아올리다가 얼굴 내밀만한 창문 하나 정도 만들고 지붕은 기둥이나 그런 게 지탱해서, 벽의 구성이 자유로워진 게 아닌 두껍고 투박한 벽이 모든 것을 지탱해야 했으니. 또한 로마 건축물이 남은 곳에서 사람들이 돌을 마구마구 빼와서 건축자재로 써서 유적이 많이 소실되기도 했다.[16]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건축은 성당이나 일부 성이나 궁전, 공공 건물에만 반영되었고 앞서 상술되듯 로마식 석공술이나 시멘트 제조법이 전해오지 못했고, 특히 알프스 이북의 경우 아예 제반 기술이 붕괴되었기에 벽돌 만드는 방법마저 실전되었다. 초기 알프스 이북의 경우 사회 인프라 시설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대부분 목재로 해결해야 했고 심지어 성마저 11세기까지는 목재로 지어졌다. 이때 가옥은 나무로 된 틀, 욋가지에 흙을 바른 벽, 그리고 짚 등으로 이어진 지붕으로 2가지 형태로 지어졌다. 하나는 길이 20~50피트(6.1~15.24m), 폭은 15피트(4.572m)의 가옥과 길이 6m, 폭이 3m인 원형 오두막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어진 가옥들은 썩 튼튼한 건물들이 아니었기에 도둑들이 간단하게 벽을 부수고 들어오기도 했고, 단칸방이라 한 가족들이 한방에서 모여서 생활했고, 대체적으로 축사까지 겹쳐있는 형식이라 기르던 가축들과 함께 살기까지 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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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가정집
그러다가 12세기에 들어서 도시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 내에서 하프 팀버(팀버프레임)라는 목조골조 사이에 진흙이나 벽돌로 채우는 반목조 양식의 건축술이 등장해 서유럽중부유럽 등지에서의 가옥양식으로 크게 유행했다. 한편 알프스 이남의 경우 벽돌조의 가옥이 크게 유행했다. 뿐만 아니라 지붕에서도 차이가 나기 시작했는데 북유럽과 중부 유럽의 경우 주로 박공 지붕이 주류였고, 남유럽은 평지붕이 주류였다. 다만 동로마 제국러시아 지역을 제외하곤 유럽 각지의 도시 주택은 건물 폭이 좁으면서 대신 길이가 긴 이른바 세장형(細長型) 주택이 공통된 현상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인슐라처럼 일층엔 상업이나 작업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이층 이후로 전부 생활 공간으로 오늘날의 타운하우스처럼 수직형 공간이었다.

그 외에도 각박한 시대인지라 탑처럼 생긴 주택도 유행했는데 탑상 주택, 또는 탑주택이라 불렸고, 서유럽 전반에도 널리 퍼져 있었지만 동유럽의 코카서스 지방에도 탑상 주택이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에 이러한 탑상 주택들이 많이 있었는데 주로 도시로 이주한 귀족들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과장을 보텐다면 한 도시에 평균 100여 개의 탑상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전부 다른 귀족들에게 질세라 경쟁적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탑상 주택이 나타날 때가 12세기 중부 이탈리아의 도시 내부는 황제파와 교황파로 나누어져 싸우고 있었기에 같은 도시, 같은 도시내의 구역을 차지한, 각기 이해관계가 일치한 귀족들이 모여 계약을 맺은 콘소르테리아를 중심으로 한 블록 전체를 둘려싸는 형상으로 크고 작은 탑상 주택을 철책을 두르듯이 집합시켜 방어의 효과를 높였고, 각 탑상주택은 발코니로 연결되어 있어 발코니에서 공동체의 적에 대한 감시와 공격을 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러한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중정을 두었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비상시에는 중정 쪽으로 돌출된 회랑을 통해 피신했고, 이밖에도 우무르 부뚜막, 땔감 창고 등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 교회를 세웠다, 탑상 주택의 집합체 중심에 높은 탑을 세워 꼭대기에 투석기를 설치하고 궁수들을 배치했다.

대체로 탑상 주택의 벽은 두텁고,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고, 일층은 보통 아치로 된 한두 개 정도의 출입구가 있었고, 각 층마다, 작은 개구부를 한두 개 정도 설치되어 있어 폐쇄적인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 배열고 불규칙한 경우가 많았다. 일층은 금고와 무기를 보관하는 방이 있었고, 이층은 거실 및 식당이 그 상층부에는 침실이 있었다. 부엌은 보통 맨 위층에 자리했는데, 굴둑도 없는 화덕이 설치되어서 요리를 할 때면 온 실내에 연기가 가득 차였다고 한다. 지하에는 와인 창고와 조명용 기름을 만드는 작업장을 두었다. 그 외에도 외부에는 상점을 세놓았고, 내부에는 고용인의 주거 공간과 작업장 등을 설치했다.

이러한 탑상 주택은 처음의 실용적 용도와는 다르게 시간이 가면서 가문의 위신을 위한 사치재가 되었다. 이스터 섬모아이나 현대의 마천루처럼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과시적인 용도로 지어졌다. 13세기 말 도시 내부가 안정을 되찾는 곳들이 많아지면서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 정부가 들어섰다. 새 정부는 귀족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시키거나 정치의 참여를 제한시키면서, 사적으로 짓는 탑이나 탑상주택의 세우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지나치게 높아진 이들의 탑을 일정한 높이까지 줄여버렸다. 현대의 탑상주택의 어느 정도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는 곳으로 블로냐와 산 지니마노다. 탑상 주택의 높이는 최대 90m에 이르렸다고 한다.

이밖에도 아케이드 주택이란 유형도 있었는데, 주로 광장과 큰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2층을 집 앞 보도 위까지 도출시킨 뒤 도출 부분을 아케이드로 처리한 유형으로 도출 부분을 보도 끝에서 아치로 받쳤는데 도일한 방식으로 지어진 주택들이 줄지어 서서 아케이드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아케이드 주택은 2층을 지탱하는 천장이 보행로를 덮어 보행자가 돌출 부분 밑을 터널처럼 통과하는데, 이경우 어둡고, 습해지며 보안에도 불리한 단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장점이 많았다. 우선 아케이드 주택은 주로 상가 주택으로 지어졌다. 중세 유럽의 도시 주택들은 세장형 형태의 단독 주택이 주류로 상가주택 또한 단독 주택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1층이 상가나 공방으로 사용되었다면 2층부터가 건물 주인의 사적 공간이었다,

이는 인구밀도가 높은 비좁은 중세 도시에서 최대한 쾌적하게 살기 위해 건폐율 높은 맞벽구조와 함께 2층을 보도 위로 도출 시켜 건물 주인 일가의 사적 공간의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도시적 측면에서 두 가지로 도움이 되었다, 전자의 경우 1층 상가와 보행자에게 안전 덮개를 제공했는데, 만일 비가 왔을 때 비바람으로 부터 보행자와 상가를 보호해줬을 뿐만 아니라 우천시에도 쇼핑을 할 수 있어 상업적으로 매출 증대에도 도움이 되었고, 이는 세수증대로도 이어졌다.

후자의 경우 아치가 일렬로 이어져 있어 도시 경관을 구성하는 특이한 조경 요소가 되기도 했다.앞서 언급한대로 중세 유럽의 도시는 대체로 고려와 조선의 읍성과 비교하면 도시 내부의 면적이 좁으면서 인구밀도가 고밀도 수준이었다. 때문에 후기로 접어들면서 건물끼리 맞다는 맞벽 구조로 건폐율이 높아졌다. 아케이드 주택은 도시 내의 열악한 과밀상황을 조형적으로 활용해 도시 경관을 특이하게 연출했다.

서로마가 붕괴되면서 귀족들의 도시저택인 도무스 또한 사라지면서 왕과 고위 성직자들을 제외한 중세 귀족들이었던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에 장원 주택이나 성관에서 살다가 중세 중기가 되면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상공업의 부흥가 함께 프랑스에선 왕권 강화와 함께 관료제를 실시하면서 소수의 약소 귀족들이 도시로 이주 및 도시의 상인들이 부호로 성장하면서 다시 도시 저택들이 다시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각각 호텔과 팔라쪼로 불렸다, 초기엔 그저 세장형 주택 그자체이거나 약간 규모를 크게 한 것 밖에 없었으나 점차 규모가 더 큰 저택으로 변하기 시작하는데, 이탈리아의 팔라쪼는 안뜰이 사각형의 중정이 있는 ㅁ자 구조의 건물로 이후 중세 후기에 발생한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았고, 과밀한 도시 내부의 특정상 후원이 없는 경우가 보편적이었으나 프랑스의 호텔의 경우 16세기 이전까지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고, ㄷ자 구조인데다가 귀족들의 권력이 시민들을 압도했기에 건물 규모에 비해 넓은 후원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18]

관련 이미지, 이미지 2, 15세기 중세 유럽의 도시 주거, 중세 유럽의 목조 농가, 중세 파리의 도시 저택(불어주의)
3.2.6.4. 유희
중세 유럽 귀족들의 유희

유흥여가에 있어 귀족들은 마상창시합이나 매 사냥, 파티를 즐겼던 반면 하층민들은 가끔 가다 있는 순회극단이나 광대들의 공연을 관람하거나 축제에서 놀고 마시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물론 교회에서는 모두 다 방탕하다고 실컷 까댔다.

도박의 경우에도 교회에서는 성직자들로 하여금 제제했지만 일반 도시민들의 욕구까지는 막질 못했다. 주사위 놀이는 기본이요, 경주견 달리기 등과 같은 다양한 도박들이 유행했으며 훗날 카지노라는 단어도 귀족들이 도박을 즐기는 유흥장에서 비롯된 단어다.[19]

에서도 억압이 심했다는 선입견과 달리 매춘이 묵인되는 등 할 건 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덕성에서의 경직은 실제로는 종교개혁기에 심화되는 측면이 강했다. 장 칼뱅이나 올리버 크롬웰 같은 16세기의 인물들의 행적이 중세에 고스란히 덮어씌워졌다는 것.
3.2.6.5.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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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교육 및 학문


모든 엘리트들이 교회로 몰린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신학 이외의 학문이 탄압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정도 과장된 이야기이다. 중세 교회는 지금 생각하는 이미지보다 관대하였다. 하지만 많은 학문들이 신학 위주로 돌아갔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스콜라 학파가 있다.[20] 고대 그리스 철학의 경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권장되었으나 에피쿠로스처럼 교회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철학자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종종 폄하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한편 교회의 입장과는 별개로 당시 지식인들의 성향은 상당히 진보적인 면도 있었다.

한편 일부 교수의 경우 신학의 진리와 철학의 진리는 다르다는 이른바 '이중진리'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충돌을 일으키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탄압받게 된다.[21]

서기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서로마 제국 내의 모든 교구수도원초등학교 정확히 사원 학교와 수도원 학교를 설립할 것을 지시했다. 다만 이때의 교육 대상들은 주로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카롤루스 대제 이전인 597년 브리튼 제도에서 켄터베리에서 킹스 스쿨이 설립되었으며, 세속인들도 대상으로 하는 초·중등교육 기관은 12세기부터 설립되기 시작해 독일에서 습자학교, 영국에선 조합학교 등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세속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또한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 있어으며, 교사들은 주로 기독교의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볼로냐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케임브리지 대학교등이 세워진 것도 중세 시대때이다. 특히 농업이 발전하면서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마침 당대 최고라고 평가받던 논리학자이자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가 교수진의 일원이었기에, 당시 파리 대학의 학구열은 엄청났다.
"파리 대학은 전 세계를 위하여 빵을 굽는 오븐과 같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300년 후에는 유럽 전역에 60여 개의 대학이 생겨났다. 1350년에는 독일에만 25만여 명(!)의 대학생이 있었으며, 15세기 중반에는 빈, 하이델부르크, 쾰른 등지의 대학에 등록한 학생 수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대학생 수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기본적으로 3학4과를 배웠으며 그 외에 가장 인기 있는 학문은 신학이 아니라 법학이었다. 국가가 정립되고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왕실 내외의 복잡한 법 문제를 해결해 줄 전문인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던 것. [22]

당시 대학교에서 그 외에 메이저 학과로 소문난 분야들은 라틴어, 고전문학, 유클리드 등의 그리스 수학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생이 되기 위한 커트라인은 최소 12세(!) 이상이었으며, 농민 출신이라 해도 다 받아주었다.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의 기회 자체가 상당히 균등하게 주어졌던 것. 다만, 이때의 대학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학문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과는 거리가 멀고 교사/학생 길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해서 교수는 장인, 학생의 경우 도제에 가까운 편이었다.

이탈리아는 가장 먼저 대학들이 세워졌으며 유럽 전역의 가장 우수한 학생들은 이탈리아로 유학가는 것이 관행이었다. 볼로냐 대학은 법학자 이르네리우스 하에서 큰 명성을 얻었으며 전성기에는 외국인 유학생만 1만 명을 넘을 정도로 거대했다. 파도바 대학은 볼로냐의 일부 학생과 교수진이 분리되어 별도로 창설한 학교인데 13세기에 이미 1만 8천 명의 학생이 있었다.

중세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는 뿌리깊은 편견도 있는데, 사실 중세인들은 지구가 명백히 둥글다고 믿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단테 알리기에리, 로저 베이컨 등 수많은 중세 지식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그들의 저술 속에 명백하게 남겨 놓았다.

또한 일부 과학사학자, 과학철학자들은 근대 과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제로는 중세시대의 연구와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고 보기도 한다. 중세의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면서 뛰쳐나와 새로 과학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3.2.8. 식문화

식문화는 변변치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상당한 양의 요리책들이 저술되기도 했고 영주들도 놀고 먹는 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23] 요리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종류의 향신료가 유럽에 소개되었고 이후 대항해시대를 이끈 유럽의 향신료 열풍의 기폭제가 된다. 이때 18세기가 될때까지 유럽의 음식들은 상당히 달고 짜게 조리가 되었다.

크게 나뉘어 보면 십자군 전쟁이전과 이후로 나눠지며 본격적으로 국가별로 요리 문화가 분화되기 시작해 먼저 이탈리아 요리가 분화 및 정립되며 이후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 요리, 영국 요리 등 유럽의 요리 문화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민족마다 음식문화가 당시에도 많이 혼합된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로마 제국에서 유입된 을 비롯한 라틴 음식 문화[24]게르만족고기,유제품 중심 식사가 많이 혼합되어 있다. 특히 이시기는 계란 조리법이 발달해 대부분의 조리법이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중 오믈렛, 팬케이크 등이 대표적인 계란 조리법이며, 커스타드 또한 고대 로마 시대부터 만들어져 이어진 조리법이었으며, 스튜 역시 중세가 기원인 것으로 보이며, 중부 유럽에서 보양식으로 많이 먹었던 맥주 수프 또한 중세 시대때 만들어진 음식으로 보고 있다. 그밖에도 타르트, 키슈, 크레이프, 마카롱, 진저브레드와 같은 디저트들도 이때 중세를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아몬드 밀크같은 식물성 음료도 이때 생긴 것들이다.

심지어 와인에다가 향신료를 타서 마셨는데, 이러한 방식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려 올라가며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였던 히포크라테스 또한 약으로 처방까지 했기에 14세기에 와인에다가 향신료를 타서 마시는 방식을 히포크라테스의 술이라는 의미로 히포크라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뱅쇼 등의 몰드 와인의 기원이 되었다.#

다만 술 마시고 깽판 부렸다는 기록이 상당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테이블 매너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프 같은 걸 먹을 땐 아예 그릇을 돌려가며 들이켰다고 한다.막걸리 마시듯 사발을 양손으로 들고 먹었다. 그것도 귀족들이. "포크 같은 식기류를 왜 안 쓰냐"고 궁금해할지도 모르는데, 이 당시에는 포크가 없었고, "하느님이 내려준 음식을 도구를 써서 먹는 건 불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급적 손으로 먹었고 식기를 써도 숟가락이나 썼다.[25] 다만 수식으로 식사를 했기에 중·상류층 사이에서 손의 청결도가 중요해 만찬 시 남들이 보는 앞에서 하인이 떠온 세수대야에 손을 씻은 다음에 먹었고, 식사 중 귀를 후비거나 머리를 만지는 것도 식사 예절에 어긋난 것으로 규정했다.

물론 서민(농노)들은 그런 거 없고 단지 얼마 안 되는 고기[26]를 양배추나 순무 같은 채소들과 함께 수프스튜형태로 푹 끓여먹어야만 했다.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국물요리를 좋게 말해서 서민적, 나쁘게 말해서 상놈들이나 먹는 요리로 취급(특히 프랑스에서)하는 이유가 바로 중세시대의 영향이란 설이 있다.# 요리인류에서 참고할 만한 주장이 나오는데, 이 시기 귀족들은 불 냄새 밴 고기는 평민들이나 먹는 것이라는 이유로 직화구이 고기를 피했다고 한다. 변변한 조리도구가 없는 평민층이 고기를 구워 먹게 되면 불로 바로 익혀 먹는 반면 귀족층은 다양한 조리도구를 이용해 여러 방식으로 요리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귀족층은 고기를 구울 때에는 불에서 1m가량 떨어진 곳에 쇠꼬챙이에 꿴 고기를 두어 그 열로 간접적으로 굽는 방식을 이용했다. 어느 세월에 익히려고 그러는 걸까 그러니까 귀족이지[27]

아래의 최하단의 링크에 있는 동로마 제국 식문화에서도 나와 있지만 동로마를 포함해 유럽의 기독교 문화권 내에서는 앙트르메라는 일종에 눈으로 즐기는 연출 요리가 존재했다. 본래 그 유래는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경에 나온 앙트르메는 초기에 상석에 있는 사람에게만 주던 먹을 수 있던 음식으로 색과 향을 더한 소맥과 콩죽, 그리고 생선을 말려서 만든 젤라틴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손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여흥 과시물로 변질되면서 흔히 중세 유럽의 연회상에 등장한 맷돼지의 머리 구이,공작··백조 통구이 요리가 이때를 기점으로 나타났다. 이후 더 대담한 연출로 성의 모형과, 와인이 뿜어 나오는 분수, 투구를 쓴 닭, 살아있는 새들을 가둔 단단한 케이크[28], 배에 탄 기사의 상, 성녀의 상 등이 만들어져 연회상에 올라왔다. 변외로 설탕을 녹일 시럽을 궅혀 각종 모형들도 앙트르메로 올라왔다.

중세 유럽의 식문화에 대해 자세한 내용들은 알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들로 참고하면 된다.

3.2.9. 사회

  • 농민의 신분 하락
    중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농부들의 신분은 천민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그위치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미 중세 초인 8세기부터 기사들의 원류인 ministerialis보다 높은 신분이었지만 봉건제와 장원의 확대로 예속인인 농노의 비율의 증가와 함께 기사들이 점차 장원주가 되면서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했으며, 또한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도시가 다시 부흥했고, 시민들을 형성하고 있던 상인과 수공업자들에게 무시받는 처지가 되었다. 빌런의 원래 의미 역시 도시민들이 농민들을 멸시하면서 부르는 멸칭이었다.
사실 유럽 말고도 한국사에도 이와 유사한 전개로 후기에 상업의 발달과 함께 읍성, 읍치의 경제력이 상승하고 반대로 눙민들의 경제력은 하락했다.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당시 보부상들이 조선군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을 공격했으며, 당시의 읍성에 살던 읍민들 또한 농민군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1895년에 나주 읍성이 농민군의 공격을 받을때 유림뿐만 아니라 나주의 읍민들 또한 수성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마녀사냥
    많은 사람들이 중세하면 마녀사냥을 상상하는데, 정작 '흔히 아는' 마녀사냥은 근세에 벌어진 일이다. [32] 종교재판에 대한 가장 잔혹한 안내서인 크라머와 슈프렝커의 '마녀의 망치' 또는 '마녀의 추'는 말기인 1486년에 나왔고 르네상스 시기부터 화형과 더불어 마녀들에 대한 가장 무자비한 박해가 이루어졌다. 각종 중세시대 고문 도구들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고문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도리어 비교해서 보면 현대 냉전 시대에 더 정교해지고 야만스러워진 면이 없지 않다.[33]
  • 여성의 인권
    로마 제국 시대에 탄압받았던 독신주의 여성 신자들이 수녀회를 결성하여 제도화되었고, 여성에 대한 종교적 보호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등 여성의 지위는 고대보다 크게 진보했다. 또한 은퇴한 매춘부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구휼 정책들이 가톨릭교회를 통해 시작되었다. 게다가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켈트나 게르만의 전통에 따라 영주의 아내로서 과부가 된 사람은 일부 영주영지 지배권이나 재산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34] 영주 부재시 저택과 장원책임을 도맡을 정도로 사생활은 남녀가 비슷했다. 교육 수준 또한 크게 높아졌는데 볼로냐 대학, 파도바 대학 등은 13세기부터 이미 여성 교수 임용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실제 서유럽에서 여성의 지위는 라틴, 게르만, 켈트 어느 문화권이든 당대 비기독교권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고할 것.
  • 사회구조
    대체적으로 도시가 아닌 농촌사회가 태반으로 장원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농노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봉건제도와 농노제도는 분명 민주적이지 못한 제도였지만, 사실 로마시대나 그 이후 근대까지 노예들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과연 중세가 유달리 민주적으로 퇴보했는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되려 중세시대는 산업 혁명 시기와 비교했을 때 노동시간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산업시대부터 가스등이나 전구가 사용되면서 야간에도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 중세시대에 양초 같은 조명은 비싼 물품이었고, 해 지면 일 못 하기는 동서양 막론하고 마찬가지였다. 대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아침 먹고 날이 충분히 밝아지자마자 일을 시작해 해가 질 때까지 일해야 했지만, 일요일 휴일은 항상 보장되었고 휴가도 일요일을 제외하고도 1년에 8주 정도가 보장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교회법, 관습법 등이 농노를 가혹한 노동에서 지켜줬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정반대로 산업 혁명 때는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학대를 눈뜨고 당해야 했었다.
또 중세 때는 공휴일 개념으로 기독교의 축일(주님부활대축일, 주님성탄대축일) 때도 쉬었다고 한다.
  • 교회
    사회에서 교회가 가지는 위상이 현대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기에, 이 부분에서도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상당히 부당한 비판이다. 우선 중세의 교회는 현대의 교회와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걸 알아둬야 한다. 현대의 교회는 순수하게 종교 집단의 의미를 지니며,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활동 수도회 소속이 아닌 다음에야 종교 이외의 분야에 관여한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광경이다. 그러나 중세의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을 넘어서 교육, 행정, 학문, 사회복지 등등을 모조리 담당하는 공공 기관에 가까웠고 이는 일부 지역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35] 따라서 중세의 교회가 교무금(십일조)을 걷는 것은 세금을 거두어서 공공 사업에 쓴다는 의미로 이해 해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먹는 신부 놈들이 돈을 뜯어가네라고 이해 해서는 안 된다.[36]

    같은 원리로 '중세의 교회에서는 천동설을 정설로 가르쳤다'는 명제는 '교과서에 천동설이 정설로 적혀있었다.' 정도 의미로 봐야지, '교리적 차원에서 천동설을 진실이라 가르쳤다.'로 봐서도 안된다. 국가가 현대와 비슷하게 각종 공공사업 대부분을 떠맡는 모습은 근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모습이다. 물론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재판을 받은 갈릴레이의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판한 것도 우르바노 8세교황이라 출판해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교황청에서 허가까지 받았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37]기는 해도 가톨릭교회에 의해서 피해를 본건 사실이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에 대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1992년에 인정하기는 했다.

    비록 교황권이 강하던 시기였던건 맞지만 그 교황권도 교황이 세속적인 간섭을 너무 행한 나머지 줄어들었으며, 줄어든 교황권과 중앙집권화의 약화가 단적으로 나타난 사태가 바로 아비뇽 유수대립교황의 발생이다. 교황은 분명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중세세계의 질서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였지만, 그와 동시에 중부 이탈리아의 대영주이기도 했다. 즉 중세에 교황권이 무작정 우위에 섰다는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 종교적 자선 단체에 의한 사회·복지 인프라 구축
    위의 교회와 연계된 내용으로 동양에 비해 신분제가 강했던 중세 유럽이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의 개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유대교와 갈라진 후 확립된 청빈적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를 믿는 부호들은 부를 늘리는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자선을 통해 덕을 쌓아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려는 풍조가 강했다.[38] 이에 사후 유증을 통해 재산을 사회의 빈민 계층에 대한 복지 차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39]
이러한 과정을 시행하는 것이 바로 종교(기독교)적 가치에 설립된 자선단체로 병원, 구빈원, 요양원, 고아원, 작업장 등을 운영했다.
다만 중세의 복지는 전체 빈민을 구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사회 지도층들은 빈민을 두 분류로 구분했는데 전자는 순래자들이었고, 후자는 걸인과 고아, 과부, 독거 노인들로 구성되었고, 후자에 구휼이 집중되어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 인구수가 증가했지만 반면에 부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걸인의 수가 증가했는데 이러한 걸인들이 무리지어 여러 도시로 전전하면서 구걸 행위를 하는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여러 규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부터 교회가 공동묘지 역할을 하게되었다. 일단 중세로 접어들면서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라 본당 사목구를 중심으로 도시나 마을 등이 형성된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동네 성당/교회에서 장례 예식을 치르고 바로 옆 묘지에 묻혔다. 지금도 유럽 동네들을 돌아다니다보면 마을 중심에 위치한 교회나 성당을 중심으로 공동묘지가 포진되어있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며, 묘지의 관리는 보통 교회측에서 맡았다.
다만 신분이나 사회적 위치 등에 따라 매장 위치가 다르다. 일반인의 경우 대개 상술한 대로 성당 옆의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왕족 및 귀족과 같은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은 영묘봉안당의 형식으로 성당 바닥이나 지하에 관만 안치되었으며, 대표적인 영묘 역할을 한 성당으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프랑스의 생 드니 대성당 등이 있다.
  • 법률
    법률 쪽으로는 이탈리아 반도를 제외한 서유럽에선 신학과 연관된 교회법게르만족의 관습법으로 결투 재판으로 알려진 게르만법이 서유럽 사회를 지배했고 반대로 동유럽과 이탈리아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편찬한 로마법 대전을 기반으로 법률체계가 우수했다.

    • 그러다가 11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간단하지만 불안전하고 분산되어 있던 기본의 교회법과 게르만법을 대신해 이탈리아 북부 도시인 볼로냐를 중심으로 이르네리우스와 같은 법학자의 주도하에 로마법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볼로냐 대학교의 법학과 커리큘럼은 크게 교회법과 로마법인 시민법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특히 중세 중기는 서유럽에 각종 법률서가 집필된 시기로 먼저 볼로냐의 수도자이자 법학자였던 그래티안에 의해 교회법의 집대성인 그래티안 교령집이 집필되었고, 13세기 작센에선 작센 내의 게르만법을 집대성한 작센 슈피겔이 집필되었으며, 이밖에도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 스칸디나비아의 국가들#에서도 자체적인 법률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는 서로마 붕괴 후 사라졌던 변호사와 같은 법률 계통의 직업 등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상업 및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무역에 관한 관례와 규칙이 생겨났고, 이를 종합한 상법과 해상법이 등장해 상인들 사이의 국제법을 정착한다. 당시 상법의 내용은 정기시장의 교역날짜, 교역절차, 시장관리, 화폐유통, 도량형 표준, 시장 법원관리, 시장 중의 은행법규, 상인조직, 계약, 치안관리, 등을 담고 있었고, 해상법은 선박관리, 화물적재, 사고보장, 해운 보험 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특허권이 특허법으로서 법에 편입된 시기도 바로 이시기로 1474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최초로 현대적인 시스템의 특허 조례를 만들었다.
한편 11세기 이후의 영국에서는 현대의 법률 제도인 배심원제와 영장 기소제와 보통법과 형평법이 등장했다. 배심제도는 본래 프랑크 왕국의 것으로 본래 신명재판을 통해 판경을 내리는 방식과 달리 왕실의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을 조살 할 때는 선서의 방법을 쓰지 않고 법관의 주도하로 지식인들을 모아 그들에게 진상을 설명하게 하는 방식을 고안했는데, 나중에 신분이나 조세에 관련된 개인 재판에도 사용되었는데 이때는 재판 당사자의 이웃 중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 이웃조사단이란 임시 조직을 구성하게 했다.
이후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해 영국왕에 취임하면서 프랑스의 이웃조사단 제도를 이용해 영국 전역의 토지상황을 제대로 조사했고, 이후 1164년 헨리 2세가 클라랜든 칙령을 통해 법정 내에서의 배심단 제도를 확립해 순회재판 때 현지 주민 12명을 배심단으로 구성하게끔 하였다.
아울러 영장 기소제 역시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가 영국 내의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지방법원을 보존하고 지방관습법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하면서 국왕의 명의로 재판을 할 것을 요구해 원고가 법원에 기소를 할 때 반드시 국왕의 대법관에게 영장을 신청하면서 성립되었다. 보통법 또한 법관들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순회재판을 하느라 각지의 재판에 참여하면서 각지의 관습법에 관해 잘 알게 되어, 런던으로 돌아와서 다른 지법에 파견된 법관들과 함께 사건에 대해 토론하면서 각지의 관습법을 소개해 전국의 법을 조금씩 통일해 나간 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12~13세 양모업과 상업무역이 왕성해지면서 재산에 얽힌 갈등이 빈번해 점차 보통법의 한계가 드러나 다시 관습법으로 회귀하지만, 14세기 대법관의 양심과 정의에 기초한 형평법이 등장하고 이후 15세기에 대법관과 그 조수가 함께 정식으로 형평법원을 구성하게 된다.
프랑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필리프 2세가 즉위하기 전 상공업이 부흥하면서 사회가 다양화되가기 시작했고, 또한 오래전부터 카패 왕조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왕권 강화와 맞물려 영주 세력을 견제할 차원으로 필리프 2세가 즉위한 후 프랑스 각지에 위치한 왕령지에 각각 법관들을 파견해 북프랑스 일대에는 시민 출신인 바이이(Baillis:대관)와 남프랑스 일대에는 기사 계급으로 구성된 세네샬(Sénéchal:지사)을 파견했다.이들은 파견된 지역의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이시기에 한계가 있었으나 무죄추정의 원칙이 로마법과 게르만족의 관습법 등을 통해 존재하고 있었다.
  • 도시의 확대
    구 로마의 변경 도시인 을 제외하면 독일 도시들은 인구 성장률이 낮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독일의 식민지 개척 운동이나 도시화 과정에서 기세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4세기 동안 2,500개의 도시가 건설되었고, 그때 정립된 도시정부 체제는 실질적으로 19세기까지 유지되었으며, 본래 도시 경계는 변경되지 않고 존속되었다.



    『역사 속의 도시』 1권 中. 루이스멈퍼드 저.

    상업의 발달로 인해 도시들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 도시들은 각자 영주와 국왕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아 운영되었다. 또한 인구 또한 늘어남에 따라 대규모 개척사업등이 이루어 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동방식민운동이 있다. 그밖에 자세한 내용은 참고하는 것이 좋다.

3.2.10. 의학과 위생


중세에 대한 폄훼 과정에서 제일 큰 오명을 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의학과 위생이 끔찍한 수준이었다고 화자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동시대 타 지역에 비해서 특별히 뒤떨어진다고 할 순 없었다.

중세 의학에서 가장 흔한 형식의 치료는 약물요법이었다. 이런 약초들의 종류와 각각의 사용법의 경우 지역의 문화나 토속 종교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중세의 의사들은 4체액설에 대입시켜 나름대로 다시 재구상해 체계를 갖추었는데 이를 doctrine of signatures 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골무꽃 씨앗은 두통 치료제로, 폐병풀 잎은 결핵 치료에, 좁쌀풀은 눈 관련 질병 치료애 사용했으며 울타리쐐기풀을 소독제의 용도로 사용했다. 적절한 약물을 결정하고 약을 짓는 능력은 약효에 대한 지식과 함께, 대부분 의료행위자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목록이었다. 단일 약재가 처방될 때도 있었고 여러 약재가 혼합 처방될 때도 있었다. 약재의 성분은 대부분이 약초였지만 동물이나 광물이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6세기가 되자 이런 약초학의 발전에 따라 치료 물질, 즉 재료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고대 그리스 문헌들[40]을 번역했으며, 볼로냐 대학교 등 대학들도 식물학을 직접 개발하고 연구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했는데, 이때 인쇄술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어쨋든 이렇게 식물에 대한 원전 텍스트와 이를 응용하는 약물학이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묶임으로써 식물 연구가 급속히 발전했고, 의학과 철학, 약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한편 이런 연구를 널리 보급한건 당연하지만 수도원이었다. 수도원들은 대규모의 허브 정원을 설치하는 등 약초학이 널리 퍼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원래 기독교 교리에서 병은 신의 벌 또는 악마의 고통이기 때문에 회개만이 치유로 이루어질수 있다 하는데, 교회에서는 이것을 ‘궁극적 치료자는 신이지만 인간은 의료행위를 통해 인간을 치료할수 있다’라고 해석해 의학에 정당성을 실어 주었으며, 결정적으로 편견과 달리 기독교에서는 질병의 원인에서 자연적인 원인을 배제하지 않았기에[41] 교회는 히포크라테스 4체액설을 옹호했으며, 특히 수도원은 약초 및 식물에 관련한 문헌들을 엄청나게 기록하거나 번역하고,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하고, 또 이런 번역한 것들을 퍼트리는 역학을 수행했다. 특히 치료행위의 경우 베네딕트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광범위 하게 이루어졌다. 외과수술도 매우 초보적이지만 이루어졌는데, 10세기경 고대 영어로 작성된 잉글랜드의 의학서 Bald's Leechbook에는 창자가 비어져 나온 상처를 수술하기 전 약초를 우려낸 물에 손을 담그라든가, 비단실로 수술 부위를 봉합한 다음 계란 흰자로 만든 연고를 바르는 등 체계적인 외과수술 방법이 정리돼 있다.

이후 중세 후기가 되면서 이런 작업들이 성당으로 이관되었으며, 앞에서도 말했듯 대학에서도 이를 제도화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근대적 의학이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는데, 일례로 영혼과 육체에 관한 논쟁은 뜬금없게도 해부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고, 갈레누스의 해부학을 바탕으로 한 외과 의학도 발전했다. 또한 당대 최고 인기 학문인 천문학-점성술도 의학 이론으로 동원되었으며, 이런 여러 계통과 학파들이 경합하며 경쟁적으로 다른 이론으로 병리학을 설명하려 했다. 또 이론과 별개로 경험적 지식도 축적되어서, 흑사병 시기에는 도시에서 빠져나가 전원 지대로 피난하는 것이나 가축의 도시 출입을 막거나 40일간 해외에서 온 배를 격리하는 등의 방역도 시도되었다. 흑사병의 증세를 살펴 가래톳 흑사병과 폐렴성 흑사병이 다름을 이미 파악한 의사도 존재했다. 가끔 보면 자칭 역사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중세때는 의료행위를 불경하게 여겼기 때문에 의사들을 다 죽였다는 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상식적으로도 개소리이다.

한편, 정신병에 대한 치료는 통일되지 않고 의사별로 제각각이었는데, 어떤 의사는 마녀나 악마가 정신병을 일으킨다고 믿어 기도와 퇴마를 통해(...) 치료하려고 한 반면, 어떤 의사는 정신병은 악령이 몸에 씌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악령을 나가게 하기 위해 두개골을 절개해서[42] 어떤 악령이라도 나가게 만듦으로써 치료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중세 의학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거짓만은 아니었던 셈인데, 다만 당시에도 이런 방식을 쓰는 의사는 드물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의사는 4체액설에 따라 정신병을 해석하려 하였으며, 장기의 오작동이나 체액의 불균형을 원인으로 꼽고는 했다. 그중 흑담액이 과도하게 나와서 정신병이 일어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헌다.

목욕 문화가 실전되었느니 도시에 상하수도가 없었느니 하는 낭설도 돌지만, 전부 거짓.[43] 사람들이 죄다 목욕을 안한 사회였으면 목욕을 자주 안한 수도자가 금욕주의를 철저히 지켰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목욕을 안하는 것이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욕을 즐겼다는 것이다.[44] 또 수도원, 도시, 성체 등 독립적인 건물이면 으레 수도교가 존재했다. 또 중세인들은 빗물이 제일 순수한 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빗물을 받아 모아 상수로 쓰는 시설도 설치되었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만 봐도 수도교가 달려 있다. 중세인들은 위생 관념이 있을만큼 있었고,[45] 위생과 병이 상관관계가 있음을 충분히 알았으며 도시가 오염되면 특히 위험하단 것은 잘 알고 있어서 도시 공동체는 도시의 위생 관리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참고중세시대에는 로마의 수도관, 목욕탕, 수세식 화장실이 없을까?[46] 다만 비위생이 병을 일으키는 원리가 파악되었던 것은 아니고 나쁜 냄새가 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는데[47], 악취가 세균으로 인한 부패로 발생하는 것을 감안하면 엄밀하게는 틀려도 결과론적으로 일리는 있는 이해를 가졌던 셈이다. 세균학이 태동해서 과학적인 의학이 시작되고 근대적 위생 관념이 생겨난 것은 중세가 대충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19세기의 일이다.

물론 이러한 의학이나 위생 관념이 대다수의 사람에게 돌아간 혜택은 아니고, 도시가 많은 부유한 지방 위주의 일인데다가 극적으로 중세 유럽인들의 수명을 늘이지도 못했다. 다만 이러한 한계는 전근대 사회에서 일반적이었기에, 특별히 중세 유럽의 의학이 기괴하거나 뒤떨어졌다고 보는 시각은 지양해야 한다. 당장에 동아시아도 지네, 전갈, 말벌 등을 약재로 사용했고 수은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해서 사람 잡던게 전근대 의학이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더럽다는 묘사가 빠지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 정작 원주민들은 '쟤들이야말로 더럽다'고 씹었다는 일화가 꽤 있다.

다만 외과술의 경우 여전히 정체 상태였다. 고대서부터 외과의의 신분은 내과의보다 한단계 낮은 하층 신분이었으며, 무엇보다 해부학적 지식이 근·현대와 비교하면 일소한 수준으로 13세기부터 대학에 의과가 생겼음에도 정식과목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외과술은 전문의가 아닌 이발사망나니들이 전담했다. 사족이지만 성직자들도 근·현대의 선교사들처럼 의료행위를 했었으나 1163년 외과술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4세기 화약이 전파되면서 외과술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해, 몸에 박힌 화살촉을 손 쉽게 제거하는 도구, 상처 등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거나 끓는 기름을 붓는 방식 대신 압박 혹은 혈관결착과 같은 합리적인 기술로 바뀌게 되었고, 지혈제 또한 덜 독한 약제로 바뀌었으나 전신마취제가 발명되는 19세기까지 아편과 같은 마약이나 아니면 흡입 마취제에 의지해야 했으며, 사망률 또한 상당히 높았다.

3.2.11. 기술

중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다른 문명권보다 각종 기술들을 재발견하거나 발명하기 시작했다. 본래 현대 기준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기술력들은 상당한 수준이었으나 당시 지리·환경적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이 당시 발명된 몇몇 기술들이 보편화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헤론에 의해 발명되었으나 정작 당시 석탄과 같은 고열량을 낼 수 있는 연료를 채굴하지 못했으며, 가성비 또한 노예인력에 비해 비싸면서 사장되었다. 다만 물레방아(수차), 크레인, 크랭크와 같은 단순한 원리의 기계 기술들은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동로마 제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과거 로마 제국에서 사용된 기술들이 실전되었으나 암흑기를 벗어나면서 차츰 고대 로마 제국의 기술들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이미 수도원에는 성서를 비롯한 각종 기독교 관련 서적들도 보관되어 있었으나 그밖에도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서적들도 필사된 채로 보관되어 오고 있었다. 이밖에도 동로마 제국, 중동 지역과 교역하거나 아니면 중동을 거쳐 중국의 기술들이 들어오면서 기술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중세 유럽의 기술 발전은 대개 6세기를 기준으로 향상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기계론적 세계관의 맹아가 싹틀기 시작했다.# 기술은 보통 민간 기술과 군사 기술로 나눠져 발전했다.

아래의 내용의 상당 부분은 영문 위키피디아의 <medieval technology>에서 기반한다.
3.2.11.1. 민간 기술
  • 농업
    쟁기의 발전(6세기에서 9세기)
    6세기까지 사용된 유럽의 쟁기는 아드(Ard)라고 불리는 원시적인 쟁기로 목재로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단순하면서도 가벼운 편으로 대체로 땅이 무른 남유럽 일대에서 많이 애용되었다. 하지만 땅이 척박한 북유럽에선 사용하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6세기 이후 카루카(Carruca))라 불리는 새로운 쟁기가 등장했다.
카루카는 기존의 아드보다 무거웠지만 대신 무거운 무게와 함께 땅을 갈게 만드는 철로 만든 수평 날이 추가 되었으며, 덴마크의 카루카의 경우 바퀴가 달려 있었다.때문에 북유럽의 척박한 땅을 갈기에 적합했고, 무엇보다 이랑과 고량을 낼수 있어 배수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공기가 통할 수 있어 한시적으로 기름진 옥토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무거운 무게로 인해 방향 전환이 힘들다는 단점이 있어 이때를 기점으로 유럽의 농토는 정사작형에서 직사각형의 농지로 바뀌게 된다.
마구의 발달(6세기에서 9세기)
항목에서 참고
편자(9세기)
편자 항목 참고
와인 압축기(Winepress)(12세기)
이미지
와인 압축기는 고대에 지중해 연안과 포도 생산지에서 이미 만들어진 기계이나 12세기 당시 와인 주조권을 갖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 등지의 수도원 등에서 와인을 더 빨리 생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와인 압축기는 급속이나 오크나무로 만든 통에 포도를 넣고 그 다음 수동으로 움직이는 수직으로 압축하는 기계로 포도즙을 짜냈다.
하지만 와인 압축기는 개인이 만들어 사용하기엔 너무 비싸으며 무엇보다 당시엔 포도씨를 빼지 않고 그대로 넣는 경우가 많아 발로 으깨 것과 달리 포도씨까지 으껴버렸기에 압축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맛이 써 웬만하면 그냥 발로 으껴서 포도즙을 짜낸 것을 선호했다.
  • 건축 및 토목
    펜덴티브 구조(pendentive)(6세기)
    삼각형 모양의 구조체로 삼각궁륭으로도 불린다. 본래 3세기 전에 실험적으로 만들어졌으나 하기아 소피아의 돔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면서 비잔틴 건축과 이후 그 정수를 이어받은 오스만 건축 양식의 주요 특징이 된다.
아르테시안 웰(Artesian well)(1126년)
자분대수층을 시추한 일종의 우물로 대수층이 있을만한 자리에 속이 빈 철 막대를 박아 물을 시추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며 수도자들에 의해 최초로 이방식으로 시추된 마을의 이름인 아르투아에서 이름을 따왔다.
중앙 난방을 통한 바닥 난방(bilegger))(9세기)
중세 초 알프스 고산지대에서 만들어진 난방 시스템으로 자세한 원리는 온돌 항목을 참고
리브 볼트(ribe vualt)(12세기)
궁륭에 늑골 역할의 구조물을 덧덴 것으로 교차형 등의 다양한 구조 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고딕 건축 양식이나 볼트를 참고
첨두 아치(pointed arch)(12세기)
리브볼트와 함께 고딕 양식의 특징 중 하나인 건축 구조 중 하나로 자세한 것은 아치를 참고
굴뚝(12세기)
최초의 굴뚝은 820년 스위스의 수도원에서 나타났으나 제대로 된 굴뚝은 벽난로와 함께 등장했다.
분절형 아치교(segmental arch bridge)(1345년)
분절형 아치교는 훙수가 났을 때 교각이 침수되어 물살에 침식·훼손되는 것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고대 로마시대때 현재의 터키 남부에 위치한 리미라에 분절형 아치교가 있으나 중세 유럽의 최초로 지어진 분절형 아치교는 피렌체의 폰테 베키오로 보고 있다.
크레인(crane)(11세기 중엽)
크레인은 고대 중동 지방에서 발명된 건축 기계로 이후 남유럽으로 전파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때 높은 위치에서 무거운 건축 자채들을 옮기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당시만 하더라도 크레인은 단순한 목재로 만들어졌으면 사람의 힘으로 밧줄이 연결된 도르래로 가동되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크레인을 움직이기 위해선 라틴어로 마그나 로타(magna rota)라는 트레이드휠 크레인이 개발되었다. 로마의 신형 크레인은 옆으로 거대한 쳇바퀴를 외륜 내지는 한쌍 달아 놓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굴리는 형식으로 가동되었다.
크레인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서유럽에서 잠시 명맥이 끊기지만 12세기경 다시 서유럽에서 상·공업의 부흥과 함께 거대 건축물인 고딕 건축 양식이 등장하면서 대형 성당과 성 등을 건축하기 위해 다시 도입되었으며, 이밖에도 항구에서 화물의 적채와 하역을 위해 대형 크레인을 하나 정도 설치했다.그단스크의 항구 크레인
이후 1420년 피렌체에서 그동안 미완이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짓기 위해 필리포 브르넬레스키에 위해 기존의 크레인보다 더 높은 높이로 건축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카스텔로라는 황소 한마리로 움직이는 신형 크레인이 만들어졌다.
수레(wheel barrow)(1170년대)
수레는 고대부터 존재했으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사용된 수레가 어떠한 형태의 수레였는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중세시대에 쓰인 수레는 대체로 외륜 수레가 많았다. 외륜 수레는 2륜 수레에 비해 안정적이지는 못하지만 평평하지 못한 지형에서 하중 균형이 벗어날때 기동성이 높으며, 하중의 중착을 더 잘 제어할 수 있었다.
이중 돔(1420년대)
1296년 착공 이후로 미완이었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기 위해 돔 건설의 설계자로 당첨된 필리포 브르넬레스키에 의해 발명된 건축 구조로 자세한 내용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참고할 것.
  • 예술
    유성 물감(oil paint)(1125년)
    유성 물감은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물감으로 이 역시 고대부더 사용되었으나 만드는 기록만 있을 뿐 안정성과 가성비 문제로 인해 실용화되지 못했으며, 1125년 수도자들에 의해 성화나 목조 조각상에 칠할 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해 1410년 플랑도르의 화가였던 얀 반 아이크에 의해 안정성이 높은 오일 혼합물이 만들어졌다.
  • 시계
    모래시계(9세기에서 1338년)
    모래시계는 고대 중동과 이집트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실증하는 유물이 전무하며 현존하는 유물은 전부 중세 유럽의 것들로 9세기 프랑스샤르트르 대성당의 사제인 라우트프랑이 만들았다는 설이 있고, 1338년 시에나 출신의 화가 형제인 로젠체티 형제가 시에나 시청사에 그린 벽화 중 하나인 좋은 정부에서 모래시계를 든 여인에서서 찾을 수 있다. 모래시계는 상하 전환에 따라 떨어지는 모래 알갱이로 통해 시간을 측정해 현재의 시계와 달리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없으나 기계식 시계롸는 달리 오차가 없기 때문에 많이 해시계와 물시계와 함께 애용되었다.
기계식 시계(13세기에서 14세기)
기계식 시계는 멀리 잡으면 13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기계식 시계는 기존의 시계들에 비해 분이란 개념이 있었지만 당시의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현대의 시계와 비교해도 오차가 심한 편이었고, 다른 시계에 비해 개인이 갖고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컸기에 주로 시계탑을 만들어 정상부에다가 설치해 공공용으로 사용했다.
기계식 시계는 개인이 사용하기에 큰 크기와 그리고 30분 가량 오차가 심했지만 그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기계적 세계관이 싹트는 것과 함께 다른 시계에 없던 분의 개념을 갖고 있는 점 때문에 상인들 사이에서 선호되었으며, 이밖에도 도시에 대한 자부심, 실용적 기계에 대한 관심이 결합되어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전 유럽적으로 애용되기 시작했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1510년경 독일에서 개인용 시계가 발명된 이후 단점들을 개선해갔다.
  • 역학
    크랭크
    크랭크 또한 고대 크리스 로마부터 수차를 가동시키기 위한 부품으로 사용되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한동안 잊혀지다가 9세기경 문헌상으로 각종 설계안에서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서유럽 일대에서 상용화하기 시작했다.크랭크의 사용 범위는 수차를 가동시키기 위한 부품뿐만 아니라 강철 활체로 바꿔진 석궁을 장전하기 위한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스프링(15세기)스프링은 탄력성의 법픽을 이용한 구조체로 선사시대때부터 탄력을 이용한 무기나 물품 등이 만들어졌으며, 15세기 자물쇠의 푸품으로 사용될 목적으로 코일 스프링이 만들어진다. 자세한 것은 판타지를 여행하는 현대인에서 참고할 것.
  • 제철
    제철 기술의 발달
    중세 유럽의 제철 기술은 시대별로 초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줄로 풀무를 이용한 화로에서 철을 생산했으나 생산량은 1~15kg 밖에 생산되지 못했으며 탄소 함유량도 낮은 연철로 나왔기에 따로 목탄불에 달구면서 표면침탄시키고 따로 가열해야 했으며, 주로 접쇠법의 일종인 패턴웰딩 방식으로 강철 제품을 생산해야 했다.
중기에 들어서 수차와 연결된 풀무로 통해 공기를 불어 넣는 강제과급하는 방식과 최대 300kg급까지 키운 발전된 괴철로로 연철을 샌산하여 패턴웰딩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수차와 연결된 대형 망치로 두들겨 강철화 시켰고, 이때의 철 생산량은 전기에 비해 수백kg이나 증가하게 되었다.
중세 후기인 1350년대로 들어서자 용광로와 함께 철을 용해시키는 제강법이 등장하면서 강철의 생산이 증가하게 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물레방아에 연결된 풀무와 페턴 웨딩이 사라진다. 다만 자력으로 초강법을 얻는 것은 실패해 18세기 영국이 식민통치를 하던 인도에서 초강법을 획득한 후 유럽 전역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 수차
    수차는 상기한 대로 고대부터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세 시대로 들어서면서 일반에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기독교 전파와 장원제와 봉건제의 등장으로 인해 노예의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은 기존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려고 하기 시작했다.[48] 이에 대한 대안이 바로 수차와 풍차였다.
수차와 풍차는 6세기 경 아일랜드에서 위에서 물을 붓는 방식으로 가동되는 상괘식이 등장 한 것 외엔 초기에 단순히 곡식의 도성과 물을 빼내거나 붓는 용도로만 사용되었으나 9세기부터 프랑스에서 축용을 위한 용도의 수차가 개발됨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선박형 수차(Ship 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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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로마시 공성전에서 동로마군의 포위로 인해 고트족들이 로마시 주변의 수차들을 파괴하면 밀가루를 현지에서 조달하려는 동로마군 입장에서 난황을 겪게 되자 당시 동로마군의 지휘관이었던 벨리사리우스가 고안한 수차였다고 한다.
공성전이 끝난 후 선박형 수차는 서유럽으로 전파되었고, 동로마 제국의 주적이었던 이슬람 제국 또한 선박형 물레방아를 사용했다. 이미지를 보면 알지만 수차를 강가 위에 띄우는 형식도 있지만 그냥 두 척 이상의 나룻배에 물레방아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조석 수차(Tidal Mill)(6세기)
이미지영문주의
통상의 수차와 달리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한 수차로 해안가에 지어졌다고 생각되지만 석호에 뚝을 만들거나 내륙에 저수기를 축조한 후 저수지 옆에 만들어졌으며, 고대 로마 때부터 만들어진 수차지만 이 역시 보편화된 때가 중세였다.
상괘식 수차(Overshot Watermill)(6세기)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수차로 유속이 느린 하천에서 제 성능을 내기 어려운 기존의 하괘식 방식의 수차의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위에서 물을 붓는 방식으로 가동되었다.
맥아 수차(Malt Mill)(6세기)
맥아를 삗기 위한 수차로 770년대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이하 수차들은 곡식을 도정하기 위한 수차들이었으나 정작 농민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는 당시 영주들이 물레방아의 경영자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이들을 세리로 삼아 사실상 장원 내의 농노들에게 강제적으로 물레방아를 이용하게 만들어 도정한 곡식의 일정부분을 물레방아 업자에게 줘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농노들도 물레방아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몰래 맷돌을 사용해 곡식을 도정했고, 영주는 영주들 대로 맷돌을 압수하려고 했다.
축융 수차(Fulling Mill)(1080년대)
이미지1이미지2
모직물의 축융[49] 작업을 위한 수차,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무두질용 물레방아(Tanning Mill)(1134년)
관련 영상 2:55부터 보는 것을 추천
가죽의 무두질 작업을 하기 위한 수차로 역시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대장간용 수차(Forge Mill)(1200년대)
이미지1이미지2관련 영상 0:26부터 볼 것을 추전
말 그대로 대장간의 제철 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수차로 철의 단조를 위한 망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연삭용 수차(Tol-Sharppening Mill)(1203)
영문 주의31분 50초부터 볼 것을 추천한다.
대장간용 수차의 일종으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수력으로 가동되는 그라인더가 설치되어 있었다.물론 수력으로 가동된 방식 발고도 크랭크를 돌리는 형식으로 가동하는 방식이나 패달로 가동하는 방식이 있었다.
대마용 수차(Hamp Mill)(1209년)
삼의 박피 과정에 사용된 수차로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풀무용 수차(Bellows Mill)(13세기 중·후반)
이미지1이미지2
풀무용 물레방아는 물레방아에 초대형 풀무를 연결해 수력으로 풀무를 가동시켜 괴철로에 공기를 주입시켰다. 1269년, 1283년 각각 슬로바키아와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제지용 수차(Paper Mill)(12세기)
관련 영상
수력으로 종이를 제작하기 위한 수차로 12세기 전후 스페인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무어계 이슬람 시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종이는 원산지인 중국과 달리 면섬유지로 야마포, 넝마와 같은 헝겊으로 만들어졌기에 인력이 아닌 수차와 연결된 압축기로 통해 만들어 졌다.

이후 1189년 프랑스로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1276년 이탈리아, 1336년 독일의 마인츠, 1498년 영국에 수력에 가동되는 제지공장이 들어서는 등 다른 기독교 국가들도 제지용 수차를 만들어 종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지용 수차 덕에 유럽은 타문명권과 달리 그나마 상대적으로 종이를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50]
제재소용 수차(Sawmill)(14세기)
관련 영상
수력으로 목재를 단순 가공하는 목적의 수차로 이미 고대 로마시대부터 수력으로 가동되는 재제소가 있었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잊혀진 기술이 되다가 다시 이슬람 세력과의 교류 등으로 다시 유럽에 소개되었다.
광물 파쇄용 수차(Ore-Crushing Mill))(13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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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력으로 가동되는 물망치로 이용해 철광석 등의 금속 원석들을 파쇄하기 위한 수차로 독일에서 만들어졌다.
용광로용 수차(Blast Furnance Mill)(1384년))
기존의 괴찰로를 대체한 대형 용광로에 위에 언급한 수차와 연결된 대형 풀무를 설치해 보다 더 많은 철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으며, 백년 전쟁이 졸결된 이후인 15세기 중반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수차의 활용은 다리를 세울 때도 사용되었다. 교각을 착공하기 전 우선적으로 교각의 틀을 만들기 위해 하천의 높이 보다 더 긴 여러 개의 나무 말뚝을 교각의 형태에 맞게 박은 다음 그 옆으로 수차를 가설해 틀 안에 고여있던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풍차(11세기)
7세기경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져 이후 10세기경 이슬람 세력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로 통해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자세한 내용은 풍차 항목을 참고할 것.
  • 항해
    나침반
    유럽의 나침반은 언제 어느 경로로 전해졌는지 불분명하다. 대체로 12세기 경으로 보고 있지만 11세기경에 바이킹들이 천연자석을 이용한 표자석 형태의 방향지시기를 사용한 기록도 있어 확실치 않다. 다만 12세기에 프랑스의 천문학자였던 피에르 드 마리쿠스에 의해 천체를 관측하여 방향을 판독하는 천측나침반이 발명되었고, 14세기에 지중해 일대에 건식 나침반이 발명되었다.
선미 방향키(rudder))(12세기)
고대부터 12세기 이전까지 동서 막론하고 방향키는 단순한 노에 지나지 않앗다. 하지만 12세기 발트해 일대에서 오늘날의 것과 유사한 외형의 핀틀(pintle)과 거드전(gudgeon)을 통해 배의 선미에 부착된 방향키가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타륜이 없었기에 여전히 맨손으로 방향을 제어해야 했다.
  • 인쇄·용지 및 문서
    종이(12세기)
    종이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유럽으로 유입이 되었다. 하지만 원산지였던 중국과는 달리 유럽의 종이는 주재료가 아마포, 넝마 등의 헝겊으로 만들어진 면섬유지이기에, 동양처럼 수제가 아닌 수차에서 나오는 수력을 이용한 압축기가 있던 제지소에서 만들어졌다, 다만 헝겊이 아닌 일반적인 식물성 재료로 만든 종이로 대마로 만든 대마지가 있었다.
안경(1280년)
고대에 안경을 대신해 시력보조 기구로 석영과 녹주석을 가공한 독서석(reading ston)을 이용했으나 1280년 현재의 중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일대에서 최초로 안경을 발명되었다. 하지만 이당시의 안경은 블록랜즈로 된 것으로 오목앤즈는 중세가 끝나는 15세기까지 발명되지 못했다.자세한 것은 안경 항목을 참고.
인장반지(sealring)(5세기)
인장반지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에서 계속 사용되었으며, 이후 중세 중기부터 다시 유럽 전역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동양의 도장과 달리 반지 형태이며, 인주로 찍는 방식이 아닌 밀랍을 녹인 후 그 위에 찍어 누르는 형식이었고, 주로 문서 밑단이 아닌 별도로 약간 굵은 실을 부착한 상태로 문서를 두루마리처럼 돌돌말거나 접는 등의 방식으로 밀봉한 후 인감을 찍는 방식으로 마무리 했다. 그밖에도 금인칙서라 하여 별도로 중요한 문서 등에 밀랍 대신 황금을 사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도장, 반지, 어부의 반지 항목을 참고.
회전 책갈피(Rotating bookmark))(13세기)
말그대 회전하는 책갈피로 책의 페이지의 열 등의 정확한 부분을 찾기 위한 회전식의 문자열로 된 것이 특징으로 가죽 및 종이로 만들어졌다.
워터마크(1282년)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페브리아노에서 방명된 기법인 필리그라나(Filigrana))에서 유래되었다. 필리그라나는 완성된 직후의 종이 뒷면에 양각 문양을 찍어서 만들어냈으며, 공문서의 위조를 막는데 활용되었다.
깃털펜(6세기)
6세기경 고대부터 사용했던 갈대펜의 대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깃털펜 항목을 참고할 것.
제본 방법의 진보
고대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을 비롯한 서양의 제본 방식은 동양과 별반 차이가 없는 두루마리 형태였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동양은 세로쓰기의 표기법이 주류였던 반면 서양의 경우 가로쓰기와 같은 표기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가 기원후 2세기 현대적인 네모난 책인 코덱스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현대 이전까지 동양과 유럽의 제본 방식이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동양의 경우 제본의 마무리 과정 중 하나로 표지를 종이로 하는 반면 유럽의 경우 가죽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동양식 전통 제본유럽의 전통식 제본
7세기까지의 제본 과정 중 바인딩 방식은 고리 형태의 캅틱 바인딩으로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애용한 방법으로 이후 9세기부터 책 가장자리에 한줄의 고리 엮음 방식이 등장했고, 보드를 가공한 표지가 추가된다.
  • 과학 및 학술 지식
    임페투스 가설
    임페투스 가설은 고대 그리스부터 존재했던 철학에 가까웠던 자연물리학의 이론으로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후 잊혀졌지만 그나마 붕괴를 면한 동로마 제국과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한 중동에임페투스 가설을 연구한 학자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1세기 이슬람 학자였던 이븐 시나 역시 임페투스 가설을 연구하면서 임페투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임페투스 가설은 이후 서유럽으로 소개되어 14세기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장 뷔리당에 의해 한층 체계적으로 연구되었다.
자성에 대한 최초의 논문(13세기)
자성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쓴 사람은 프랑스의 자연물리학자였던 페트루스 페레그리누스 드 마리코트로 고대부터 연구되던 전자기 연구에 보더 더 확충시켰으며, 건식 나침반이 발명될 계기가 되었다.
아라비아 숫자(13세기)
자세한 내용은 아라비아 숫자와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를 참고
  • 의복
    단추(13세기)
    단추 또한 고대부터 있던 물건이었으나 이때까지의 단추는 옷을 여미기 의한 것이 아닌 일종의 장신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옷을 여미기 의한 용도의 진정한 단추는 13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19세기까지 단추는 금·은·보석과 같은 값비싼 재료들이나 공정을 통해 만들어졌기에 상당히 비싼 사치품에 속해 있어 평민들에게 금지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16세기경 부터 군복에 뼈로 만든 단추가 달린 상의가 나오게 되지만 전체 계층에 가리지 않고, 사용하기까지는 18세기 중엽 독일의 웨스퍼가 개발한 금속 단추 제조 기술과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의 대량 생산을 기다려야 했다.

베틀(11세기)
유럽의 베틀은 전통적으로 신석기 시대때 중부 유럽에서 만들어진 수직형 배틀(warp-weighted loom)이었다. 이후 중동을 거쳐 drawloom이 들어왔고, 이후 태피스트리가 성행함에 따라 기존의 베틀보다 더 개량된 배틀(haute-lisse loom))과 하네스를 조절하는 발판형 페달이 달려 있는 직조기(basse-lisse loomm)가 만들어졌다.
비단(6세기)
비단이 유럽에 알려진 것은 기워전 1세기 당시의 로마 공화정때였으나 이당시 한나라에 의해 비단을 만들 주재료인 누에나방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금지되었기에 중국이 비단 공급을 독점하고 있었다.누에나방이 해외로 유출되어 유럽에 최초로 비단이 생산되 곳은 동로마 제국이었다.이후 11세기에서 12세기 경 이탈리아에 전파되어 제노바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루카 공화국이 비단 생산지가 되었다.
이후 15세기경 스페인과 프랑스에도 누에나방과 제조법이 전파되어 스페인에선 발렌시아그라나다 지방, 프랑스에서 리옹이 비단을 생산하는 곳으로 변모했다.참고로 비단을 제조하는데 수차가 사용되었다.
물레(13세기 이후)
물레는 인도에서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 기타
    체스(1450년에서 1475년 사이)
    체스가 언제 유럽으로 전래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체스의 원형이 되는 샤트란지가 유럽으로 들어온 때가 12세기 경으로 동로마 제국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대의 체스의 기초가 등장한 때는 15세기 말의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유리
유리는 기원전 15세기의 고대 이집트부터 시작되어 로마시대때까지 생산되었다. 당시 유리는 고대 이집트는 불에 탄 식물의 재와 석영, 로마는 나트론과 모래를 통해 만들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후 유리를 생산하는데 원자재의 공급이 줄어든 것과 제조 기술의 쇠퇴로 이어져 수백년 동안 서유럽은 유리 제품을 제활용만 해야 했다.
그러다가 11세기 초 중부 유럽에서 자체적으로 포레스트 글라스(forest glass))라는 새로운 유리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유리는 제조시설이 숲에 위치하고 있었고, 주 재료가 탄 나무재와 모래/석영으로 만들어졌다.
스테인드 글라스(10세기 이전)
스테인드 글라스는 고대부터 발명된 것으로 이집트와 로마에서도 생산이 되었고, 기원후 1세기를 기준으로 교회 건축의 장식으로 수용되었다.이후 기독교가 가톨릭과 정교회로 분열이 된 후 가톨릭아 국교였던 이베리아, 이탈리아 반도 일대, 및 서·북·중부 유럽 일대의 교회에서 사용되었으며, 11세기가 되면서 고딕 양식의 건축이 등장하면서 고딕 양식의 성당에 많이 사용된다.
원형 숫돌(Grinder ston)(834년)
원형 숫돌은 9세기 초반 네덜란드 일대에서 발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203년 수차를 이용한 수동식이 등장하다가 1340년 두개의 크랭크로 움직이는 방식이 등장하게 되고, 다시 1480년 페달이 추가되는 형식으로 성능이 개선되었다.
증류주(12세기)
증류 방식은 고대부터 지중해와 중동에 걸쳐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증류 방식에 대해 실전이 되다가 십자군 전쟁 당시 유럽으로 귀환한 십자군들이 증류기(Retore)를 갖고 들어오면서 술의 증류 작업이 추가가 되면서 도수가 높은 술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자석(12세기)
자성을 띄는 돌을 발견한 고대부터 동서양의 학자들 모두가 자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중세 유럽에선 나침반이 들여온 이후 나침반의 바늘로 만들어서 사용했으나 한편으로 자석 가루가 처녀성을 감별하는 효능이 있다는 미신도 있었다.
유리 거울
유리 거울은 1세기 당시 고대 로마 시대때 만들어젺으나 중세시대 언급된 시기는 1180년 영국의 신학자였던 알렉산더 넥컴에 의해 언급되었다. 다만 현대의 유리 거울에 근접한 제작 기법은 15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발명되어 2세기 가까이 제작 비법을 독점해 왔다.
해부도(1345년)
중세 최초의 해부도는 이탈리아의 의학자인 귀도 드 비게르노에 의해 만들어졌다. 실제 해부를 바탕으로 그린 것인지 사람의 내장 또한 어느 정도 상세하게 그러져 있다.
검역(1377년)
검역의 개념은 고대서부터 있어왔으나 중세 최초의 검역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였던 라구사의 중심 도시였던 두브로브니크에서 흑사병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처음 실시되었으며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격리 일수가 40일로 지정되었다.
쥐덫(1170년)
쥐덫은 프랑스의 음유시인(트루바르트)인 크레티엔 드 트로이에의 연예시인 이베인 사자의 기사에서 언급되었다.
3.2.11.2. 군사 기술
중세 유럽의 군사 기술은 동시기에 평화기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동양과 달리 군사 기술이 평이하게 달랐다. 우선 로마제국의 쇠퇴기와 서로마 제국의 붕괴기를 거치면서 퇴보하였고, 동양과 비교하면 군사 편제서부터 봉건제 등으로 인해 동원력이 약해지면서 단순한 편제를 하고 있었고, 군사학적으로도 무경칠서가 존재하던 동양과 달리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전 서로마 제국의 귀족이었던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저술한 군사학 논고 하나 외에 없었다.

하지만 중세 중기를 거치면서 이슬람과과 교류 및 지역별로 독자적으로 군사 기술을 발달해가기 시작했고, 이러한 군사 기술의 발전은 후일 16세기를 기점으로 군사 기술이 동양을 초월하게되는 양분이 된다.
  • 갑옷
    중세 유럽의 갑옷은 대체로 신분과 재력별로 구분된다. 동서 막론하고 병장기 중 갑옷 만큼은 대체로 가성비 싼 것을 제외하면 자비로 구입하는 것이 현실로 대체로 병졸의 경우 철갑으로 무장하지 못한 것이 허다했다. 때문에 병졸들의 갑옷은 갑옷은 대체로 지급품인데다가 금속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보편적이었다.
반면 금속제 갑옷은 시대별로 세가지로 나눠진다. 중세 초기만하더라도 대체로 반팔 티셔츠 형태로 쇠사슬로 만들어지거나 가죽끈으로 엮은 여러개의 철편으로 만들어진 갑옷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가 되면서 후자가 점차 도퇴되기 시작하고 전자가 주류가 되면서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후 13세기부터 중세 후기인 14세기부터 15세기 초반꺼지 제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점차 판금으로 갑옷을 만드는 이행기(Trasition Period))에 진입하면서 몸통을 제외한 전체 부위가 판금화를 거치게 된다. 다만 몸통에 입는 흉갑의 경우 판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동양의 두정갑 동일한 구조의 갑옷들이 1410년 판금갑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1420년대가 되면서 판금갑의 초기형의 등장하게 되며 이 때를 기준으로 점차 판금갑이 대세가 되기 시작되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남부 독일에서 각각 밀라노 양식, 고딕 양식 등이 등장하게 되며, 또한 철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일반 병졸들도 돈만 넉넉하게 있다면 판금으로 만들어진 투구와 흉갑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자세한 발전사는 서양 갑옷을 참고할 것.
사족이지만 판타지 등의 매체의 영향으로 일반 병졸들도 가죽 갑옷을 입고 다녔다는 통념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통념과 달리 상당히 왜곡된 부분들이 많다.
갬비슨(Gambeson)(10세기)
실제 중세 유럽의 일반 병사들이 보편적으로 착용한 겁옷으로 조선시대 지갑과 같은 원리로 여러겹의 천을 겹쳐서 만든 갑옷으로 본래 고대 스키타인들의 발명품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 리넨 갑옷이란 이름으로 전파된 바가 있었다.

중세시기 오래된 갬비슨은 10세기의 것이 유일하지만 그 이전 시대에 다영한 형태로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갬비슨은 금속제 갑옷을 입을 수 없던 일반 병사들에게 유일한 방어구였으나 동시에 기사들에게는 갑옷 안에 입는 내갑의로도 중요한 갑옷으로 화살촉이 갑옷을 관통할 때 치명상을 피하거나 아니면 둔기에 의한 충격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착용하였고, 플레이트 아머의 시대가 도래한 후에도 애용이 되었다.
잭체인(Jack chain)(15세기)
잭체인은 냉병기 전술이 절절인 시기에 발면된 방어구로 판금 갑옷이 유행한 시기에 등장했다. 당시 백병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급소로는 머리와 몸통 부위였으나 그 다음으로 조심해야 했던 부위가 바로 무기와 방패를 들고 있던 팔 부위였지만 팔 보호대였던 암 하네스가 비싼 부위였기에 이에 저렴한 가성비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사슬갑옷(5세기)
사슬갑옷 항목을 참고할 것.
러멜러 아머(5세기)
러멜러 아머 항목을 참고할 것
베흐체리츠와 칼란타르(13세기)
몽골 제국의 러시아 침략 후 전래된 갑옷으로 유럽 내에서 러시아 공국들만 사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고할 것.
트랜지셔널 아머(12세기)
트랜지셔널 아머를 참고할 것
플레이트 아머(1420년대)
플레이트 아머를 참고할 것
  • 방패
    로마 제국 후기에 들어서면서 게르만족들이 군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면서 로마군의 방패는 직사각형의 방패인 스쿠툼에서 이민족들의 원형 내지는 타원형의 방패로 전환되었고, 이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유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갑옷의 발달과 함께 카이트 실드와 히터 실드 등의 다양한 방패가 나오기 시작하나 14세기 말 화약의 전래와 함께 갑옷 또한 극단적으로 방호력이 상승하게 되면서 방패의 입지가 줄어들어 소형화가 진행되어 이후 총기를 비롯한 화약무기가 완전히 보편화된 18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전장에서 퇴출이 된다.
라운드 실드(5세기)
상술한 대로 라운드 실드는 로마군 말기 스쿠툼을 대체한 방패로 서유럽 일대에서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여러 게르만계 국가들도 카이트 실드가 등장하기 전까지 라운드 실드를 애용했다. '
카이트 실드(9세기경)
가오리연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방패로 자세한 내용은 카이트 실드 항목을 참고할 것.
히터 실드(10세기경)
카이트 실드의 개량형으로 자세한 내용은 히터 실드 항목을 참고할 것.
파비스(13세기)
현재 이탈리아의 중부 주인 토스카나 지방에서 만들어진 대형 방패로 자세한 것은 파비스 항목을 참고할 것.
타지(13세기)
17세기까지 사용된 소형 방패로 자세한 내용은 타지 항목을 참고할 것.
버클러(13세기)
17세기까지 사용된 소형 방패로 백병전 등의 접전에서 가볍게 움직이기 위해 방패들 중 가장 작았다. 자세한 것은 버클러 항목을 참고할 것,
  • 냉병기
    중세 시기는 유럽의 냉병기가 갑옷의 발전과 함께 발전해가던 시기였다. 투사 무기를 제외한 냉병기들은 고대부터 도검류와 창류, 둔기류 등으로 세분화되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로마식 무기와 북쪽의 게르만/노르만족 양식의 무기들로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갑옷의 발달 등으로 인한 여러 요인들로 인해 점차 중세 고유의 양식들이 등장, 고대의 냉병기들을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도검류
도검류는 양손검한손검, 단검으로 분류된다. 전근대까지 동서 막론하고 검은 검병을 제외한 모든 병과에 거쳐 부무장의 위치에 있었다. 일단 중세 중기까지는 양손검은 동로마군이 쓰던 롬파이아를 빼면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는 이당시 검술의 전술 자체가. 검과 방패를 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4세기 트랜지셔녈 아머의 유행과 함께 방패를 사용하는 것이 점차 사라지제 되면서 양손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되면서 양손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단검의 경우 주로 한손검 다음으로 중세시기 유럽 각지의 군대에서 부무장으로 애용한 무기로 기사라도 한손검 외에도 별도로 차고 다녔다. 단검의 용도는 주로 근접전 와중에 한손검을 분실할 시에 그 대용품으로 사용되어 갑옷으로 보호하기 힘든 부위의 급소를 노리는데 사용되거나 전투 후 살 가망이 없는 자들의 목숨을 끊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부무장으로 한손검을 마련하기 힘든 가난한 병사들이 둔기류 다음으로 차고 다닌 무기이기도 했다.
단검
색스(seax)(5세기)
앵글로색슨족들의 단검으로 전체 길이가 미터법 기준으로 50~100센티미터 사이로 다양했고, 10세기까지 사용되었다.
안테니 대거와 링 대거(antennae dagge&ring dagaer)(13세기)
14세기 전반까지 서유럽 전역에서 사용된 단검으로 안테니 대거는 자루 끝에 초승달 형대의 품멜이 달팽이의 촉각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며 링 대거는 안테니 대거의 발전형으로 보인다. 최대 전체 길이가 30 센티미터 최대 무게는 0.25 킬로그램으로 자루 밑에 안테니 대거는 초승달 모양, 링 대거는 작은 고리가 달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발럭 나이프(ballock knife)(12~13세기 사이)
이름의 유래는 칼날 밑이 남성의 고환과 같다는 의미로 붙여진 단검으로 최대 전체 길이가 30센티미터, 최대 무게는 0.3 킬로그램으로 14세기 전반까지 기사들이 부무장으로 사용되어 키드니 대거라고 불렸는데, 이는 전투가 끝난 후 빈사 상태의 적이나 아군이 고통스럽게 죽어가지 않기 위해 안락사를 목적으로 사용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배즐러드(13세기)
현재의 스위스의 도시 바젤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검으로 최대 전체 길이가 50센티미터로 손잡이 부분이 H자 형태인 것이 특징이며, 전장에서 식사용 나이프로도 사용되었다.
런들 대거(14세기)
기사들과 맨앳암즈들이 즐겨 사용한 단검으로 상세 내용은 런들 대거를 참고할 것.
이어드 대거(eared dagger)(14세기)
15세기까지 사용된 단검으로 본래 동방에서 유래된 단검으로 칼자루 끝이 귀모양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최대 전체 길이가 30 센티미터, 최대 무게는 0.4 킬로그램이다.
친퀘디아(cinqudea)(15세기)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사용된 단검으로 17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최대 전체 크기가 60 센티미터, 최대 무게로는 0.9 킬로그램로 칼끝으로 갈 수록 칼날 폭이 좁혀지는 것이 특징이다.
망고슈(15세기로 추정)
프랑스어로 왼손이란 뜻의 단검으로 명칭의 유래답게 왼손으로 사용된 단검으로 영어로는 패링 대거(parring dagger)로 불렸으며, 전투용보다는 결투용으로 만들어진 무기로 쌍검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한손검과 함께 사용되었다.
스틸레토(15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사용된 무기로 망고슈와 마찬가지로 결투용 무기이다.
한손검
스파타(5세기)
로마군 기병대에서 사용했던 도검류로 로마 제국 후기에 들면서 입대하는 군인의 수가 감소, 이를 대신한 게르만족을 대체함에 따라 로마군의 전술이 변하면서 글라디우스가 퇴출되면서 후기 로마군의 대표적인 도검류가 되었다.서로마 제국 붕괴 후 한동안 쓰이다가 아밍소드가 등장하는 11세기에 퇴출된다.
바이킹 소드(8세기)
바이킹들이 만든 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바이킹 소드 항목을 참고할 것.
아밍소드(11세기)
중세 중기 대표적인 군용검, 자세한 내용은 아밍소드 항목을 참고할 것.
펄션(11세기)
유렵식 외날 도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펄션 항목을 참고할 것.
메서(14세기)
14세기 독일 지역에서 애용된 외날 도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메셔 항목을 참고할 것.
양손검
롱소드(13세기)
중세 중기가 끝나갈 무렵 등장한 양손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롱소드 항목에서 참고할 것.
바스타드 소드(15세기)
롱소드의 일종으로 손잡이가 한손으로도 들 수 있겠끔 되어있다. 자세한 내용은 바스타드 소드에서 참고할 것.
클레이모어(15세기)
중세 스코트랜드에서 사용된 양손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클레이모어에서 참고할 것.
에스터크(14세기)
프랑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찌르기 전용의 양손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에스터크 항목에서 참고할 것.
쯔바이핸더(15세기)
독일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양손검으로 자세한 내용은 쯔바이핸더 항목에서 참고할 것.
플랑베르주(15세기)
칼날이 물결 형태처럼 된 양손검으로 자세한 것은 플랑베르주 항목에서 참고할 것.
이밖에도 스패인과 아일랜드, 덴마크 등에서도 제각기 양손검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중 덴마크의 양손검은 크로스 가드의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었다.
폴암
중세 유럽의 보병들은 대체로 궁병을 제외하면 주무장이 창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창이란 무기 자체가 다른 무기에 비해 가성비가 저렴한 양산형 무기인데다가 근접 병기 중 공격범위가 넓었고, 상대적으로 배우기가 쉬었다. 중세 중기까지는 방패와 함깨 1.8미터 정도 단창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중심이었으나 중세 후기가 됨에 따라 방어구가 점차 발달하면서 기존의 창으로 드랜지셔널 아머나 플레이트 아머를 제압하는데 불리하자 그 대안으로 폴암류가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폴암은 대개 농기구 내지는 공구에서 기원하는 장병기들을 통칭하며, 익숙한 농기구 및 공구에서 기원한 장병기들이 많기 때문에 농민이나 시민 출신의 병사들이 손십게 익힐 수 있던 무기였다. 하지만 폴암은 창에 비해 무겁기 때문에 점차 보병들 사이에서 방패를 버리는 병사들이 보변화되기 시작하나 폴암만으로 플레이트 아머를 상대하는데 역부족이었다.
창(5세기)
자세한 내용은 창 항목에서 참고.
파이크(13세기말)
파이크는 13세기 말 스코트랜드 독립 전쟁 당시 영국 기병대에 대적할 목적으로 스코트랜드군이 처음으로 채택했고, 이후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에서 독립하려는 스위스군들이 채택해 이후 스위스 용병들을 통해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 문화권을 제외한 유럽 전역으로 전파된다.
알슈피스(Ahlspiess)(15세기)
영어로는 올 파이크(Awl Pike)로 불리는 창으로 창날 길이가 80~100 센티미터, 전체 길이가 2.5~3 미터로 awl은 영어로 송곳을 뜻하는 만큼 창날이 송곳으로 되어 있다. 알슈피스는 플레이트 갑옷의 틈새를 노릴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랜스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사용된 기병창으로 자세한 내용은 랜스 항목에 참고할 것.
스피툼·란세어(13세기)
스피툼은 13세기에 출현한 폴암의 일종으로 일반적인 창에 비해 넓으면서 세가닥으로 나눠진 창날이 특징으로 찌르기보다는 내려쳐 배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스피툼과 란세어 항목을 참고할 것.
데인액스(9세기)
바이킹들이 사용한 전투 도끼로 일반적인 도끼에도 속하지만 자루의 길이가 0.9미터에서 1.2미터가 보통이지만 의장용은 이보다 더 길었기에 사실상 폴암으로도 분류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데인 엑스 항목을 참고할 것.
폴액스(14세기)
데인엑스의 발전형으로 자세한 내용은 폴액스 항목을 참고할 것,
글레이브(13세기)
자세한 내용은 글레이브 항목을 참고할 것.
포차드(11세기)
글레이브와 동일한 폴암으로 동일한 외형 때문에 외관상 착각하기가 쉽다.
부주(vouge)(13세기)
부주는 13세기에 등장한 폴암의 일종으로 초창기의 할버드에 해당되는 무기로 프랑스식과 스위스식으로 나눠졌으며, 이중 스위스식이 할버드로 발전했다.
할버드(14세기)
자세한 내용은 할버드 항목을 참고할 것,
(13세기)
중세 영국 보병들이 사용한 폴암으로 자세한 내용은 빌 항목을 참고할 것,
웰시 혹(welsh hook)(13세기)
웨일스 지방에서 만들어진 폴암으로 나무가지를 치던 공구에서 파생된 것과 영국 보병들이 쓰던 것으로 유럽 본토에서 귀차르므(guisarme)라고 불렸다. 전체 길이가 210~270 센티미터로 창날의 형태는 갈고리란 이름에 어울리게 갈고리 형태로 반대면에 ㄴ자 형태의 스파이크가 달려있는 형태다.
루체른 헤머(lucerne hammer)(15세기)
워해머의 폴암 버전으로 최대 길이가 240cm로 자루가 길고, 끝에 스파이크 형태의 창날이 달린 것만 빼면 워헤머와 유사한 외형으로 기사들이 하마 전투에서 중무장의 적과 싸우기 위한 무기 중 하나였더, 독일 지역에서 만들어졌으며, 이후 스위스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사용되었다.
밀리터리 포그(military fork)(15세기)
농기구인 쇠스랑에서 기원한 폴암으로 전체 길이가 2~2.5미터 정도로 창날이 두 개로 갈라진 것이 특징으로 19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쇠스랑에서 기원한 무기인 만큼 농민 출신의 병사들이 많이 애용한 무기였고, 농민 반란 등에서도 자주 쓰인 무기 중 하나였다.
(13세기 이후로 추정)
추수때 사용되는 낫을 말 그대로 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른 폴암류처럼 13세기 이후에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자세한 내용은 낫 항목을 참고할 것.
타격무기
타격무기는 둔기도끼로 나눠진다. 도끼의 경우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무기로 야만족의 무기라는 인식도 있지만 둔기와 함께 플레이트 아머와 같은 갑옷으로 무장한 상대와 상대하는데 효과적인 무기로 창과 폴암에 등재된 데인 액스와 폴 액스 또한 원칙적으로 도끼에 속한 무기이기도 하다.
둔기의 경우 마찬가지로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무기로 중세 중기로 들어서면서 갑옷이 중무장화됨에 따라 점차 도끼와 함께 갑옷에 효과적인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세 후기에 발생한 농민반란에서 농민병들들이 기사들을 상대할 때 도끼와 함께 둔기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중장병들에게 대항했으며, 형태에 따라 여러 분류로 나눠졌다.
둔기류
곤봉(9세기)
가장 원시적인 무기로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때 노르망디 군에 소속된 바이외의 주교인 오도가 잉글랜드 군과의 난전에서 곤봉을 모습이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그려져 있다.
메이스(12세기)
12세기에 사슬 갑옷이 보편화되면서 백병전에서사슬 갑옷에 대항할 목적으로 둔기의 사용 빈도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사슬 갑옷의 사슬을 부슬 목적으로 플랜지드 메이스(Flanged Mace)라는 여러개의 철편을 부착한 둔기가 등장한다.
모닝스타(12세기)
메이스와 달리 머리 부분이 여러개의 철침이 부착된 둔기로 목적은 동일했지만 사용하는 주체는 일반 보병들이 었다.
플레일(12세기)
서양식 편곤으로 편곤과 마찬가지로 농기구인 도리깨에서 기원되었다. 14세기경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농민반란 당시 많은 농민들이 중무장한 왕과 영주들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대항하면서 들었던 무기 중 하나이며 이외로 기사들을 비롯한 기병들도 마상에서 플레일을 사용했으나 15세기부터 보병들 사이에서 파이크가 보편화됨에 따라 더 이상 군용 무기로 사용되지 않게 된다.
워해머(14세기)
말그대로 군용망치로 자세한 것은 워해머 항목을 참고할 것.
도끼류
배틀액스(5세기)
베틀액스는 오랫 동안 게르만·노르만계 부족들이 즐겨 사용한 무기들 중 하나였고, 특히 바이킹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무기이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배틀액스 항목을 참고할 것.
  • 기병
    박차(spur)(11세기)
    서부극 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늘 신고 다니는 장화에 달고 있는 쇠붙이가 박차다. 박차는 본래 고대 켈트인들이 발명한 것이지만 11세기 노르만인들에 의해 기병대의 장비로서 채용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박차는 제대로 된 승마술과 그리고 말과의 교감이 성립이 된다면 발로 신호를 내려 말을 제어할 수 있었다.
마갑(시기 불명)
마갑은 고대 중동에서 타고 있는 군마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갑옷의 일종으로 중세 유럽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불명이지만 초기엔 두꺼운 면직물로 마갑을 만들다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판금으로 된 마갑이 출현했다.
군마
관련 링크
중세 유럽의 군마는 평균 크기가 당시의 말의 유해에서 측정된 수치에 따라 142cm로 이보다 더 큰 크기로는 영국 리즈에 위치한 군사 박물관인 로얄 아머리에 전시된 마갑을 통해 측정된 169cm 등이 있었으며[51], 말의 사육 환경 및 조련과 용도에 따라 네 분류로 나눠져 데스트리어(destrier), 코서(couser), 펠프리(palfray), 라운시(rouncy)로 나눠지며 모두 품종이 아닌 용도에 따른 명칭이다.
데스트리어는 네 종류의 군마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군마로 말 중에서 가장 대형 종의 수컷만을 선별해 망아지 시절부터 사육하면서 조련시켰고, 때문에 가격 또한 상당히 비싸 아래에 후술될 코서에 2배 라운시에 10배의 가격이었다. 때문에 전장에서 타고 다니는 것보다는 토너먼트에서 타고 다니는 것이 보편적이었다.당대 회화 자료를 보면 목을 뱀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코서는 데스트리어 다음으로 선호된 군마로 데스트리어에 비해 경량급 군마이며, 제대로 조련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 때문에 데스트리어보다 제대로 된 군마로서 기사와 같은 중장 기병들을 태우고 적의 대열을 향해 돌격하는 등의 활약을 했다. 그밖에도 사냥이나 토너먼트에도 동원되었다.
라운시는 웹상에서 짐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엄연한 군마의 일종으로 승용마로도 이용되었으며, 코서보다 더 저렴해 대체로 가난한 기사들이 타고 다니기도 했으나 14세기 이후 지세가 험한 토지를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승용마로 굳어지게 된다.
펠프리는 군마이지만 주로 승용마로 이용된 말로 통상의 군마들은 전투 전까지는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기에 보통 전장으로 이동할 때는 펠프리를 타고 다녔다.매끄럽게 걷는 훈련을 받았기에 고급 승용마로 유명했다.
  • 투석기
    투석기는 화약이 보편활 될때까지 사용한 공성무기로서 유럽에서도 고대서부터 사용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고된 이후 목책으로 지어진 성채가 보편적이었기에 강력한 투석기가 불필요했으나 이후 바이킹과 마자르 족 등의 약탈 등으로 인해 석축으로 된 성채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아울러 11세기 중반에 십자군 전쟁으로 중동의 건축 공법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석재 성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강한 투석기가 필요해지게 되었다.
노포(5세기)
고대 로마시대와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그다지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이는 발리스타의 부품들이 복잡했는데, 서로마 제국이 쇠락해지고, 종국에 해체되기까지 경제가 크게 악화되면서 이를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이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12세기 경 투석기가 서유럽에 전래되면서 더 이상 전쟁에서 사용되지 못하게 된다.
오나게르(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만들어진 투석기로 투석기라기 보다는 발리스타에 가까운 것으로 6세기경까지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오나게르 항목을 참고할 것,
망고넬(6세기경)
중국의 투석기를 개량한 것으로 자센한 내용은 망고넬 항목을 참고할 것,
트레뷰셋(12세기경)
망고넬을 개량한 것으로 최후의 투석기이다. 자세한 것은 트레뷰셋 항목을 참고할 것.
  • 화약 무기
    대포(1320년대)
    최초의 출현시기를 두고 여러 이설이 있지만 가장 오래된 가설로 1324년 메츠 공방전에 처음 등장했다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언급이 있다.
리볼데퀸(1339년)
17세기 이전까지 사용된 다연장 총으로 1339년 영국의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때 영국군이 최초로 사용했다.
핸드 캐논(1320년대)
핸드 캐논은 서양식 총통의 일종으로 화포와 함께 중동을 거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 투사 무기
    (5세기)
    자세한 내용은 활 항목을 참고할 것.
장궁(5세기)
일반적인 활과 함께 장궁 또한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투사 무기로서 이후 고대까지 게르만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십자궁(12세기)
자세한 내용은 십자궁 항목을 참고할 것.
투창(5세기)
투창은 전세계적으로 고대서부터 사용된 투사 무기로 유럽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특히 남유럽에 속한 이베리아 반도는 지역 특성상 주요 투사 무기로 선호되었다.
프랑시스카(6세기)
9세기까지 사용된 프랑크족들의 투척 무기로 도끼로 분류되지만 주용도가 투척용이기에 투사 무기로 분류되며 자세한 것은 프랑시스카 항목을 참고할 것.
투석구(5세기 중엽)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12세기까지 사용되었다.
  • 방어 시설
    성채의 진보(11세기)
    중세 초기의 성은 로마의 석재나 벽돌로 벽을 쌓는 방식이 실전되거나 아니면 로마 제국 밖에서 국가를 형성했기에 보통 흙을 단난히 다진 토대 위로 목조로 만든 벽으로 된 요새, 모트 & 베일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11세기가 되면서 투석기의 등장과 공성 전략 또한 다양해지면서 수비측 또한 성채를 석재로 쌓기 시작하고, 수성 전략에 맞는 다양한 시설물들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바겐부르크(14세기경)
중부 유럽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바겐부르크는 후스 전쟁당시 후스파들이 이용한 간이 방어 시설로 주로 야전에서 많이 애용되었다.
  • 군사 제도
    중세는 고대과 근·현대 사이의 과도기적 시기로 군사 제도 또한 과도기적 제도로 운영되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동로마가 통치하던 지역들을 제외한 구 서로마령에서는 제국이 해체되면서 레기온 체계 또한 완전히 붕괴되면서 그 서로마령에 각자도생식으로 세워진 게르만족 왕국에 이어져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사회 구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봉건제와 함께 기사들 위주인 기병대가 위주였고, 전시에 자신의 장원에서 징발한 징집병들을 이끌고 전장에 합류했다. 또한 상술한 병기들조차 고대에는 거의 없던 것들이었으며, 이에 따라 전술과 병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병연합 전술(중세 후기)
제병연합은 7세기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마우리키우스의 저서 《전략서(Στρατηγικόν, Strategikon)》에 언급될 정도로 중세 초에 그 개념은 있었으나 그다지는 보편적이지는 않았으며,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1116년 필로밀리온 전투 등에서 간혹 사용된 전술이었으나 14세기경 발생한 백년전쟁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연속적으로 사용하다가 16세기 초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한 에스파냐 왕국의 장군인 곤살로 데 코르도바가 제병연합 전술을 바탕으로 한 편제인 테르시오를 창설한 동유럽을 러시아와 발칸 반도를 제외한 유럽 각지로 전파된다.
현재의 군사 계급과 군대 편제의 기원은 서양으로 그 시발점은 중세이다. 중세 초에 먼저 생긴 군사 계급명은 원수로 알려진 마샬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현재는 순경으로 불리는 콘스테이블 즉 무관장으로 본래는 왕의 마굿간을 관리하던 관직들에 지나지 않았으나 중세 중기가 되면서 점차 늘어나는 전쟁으로 왕이 친정하지 않을 때 대신 왕의 군대를 지휘, 혹은 왕의 친정시 근왕군의 기병대의 지휘관을 겸하면서 군사 계급화되었다.특히 콘스테이블의 경우 무관장 외에도 기병대장으로도 불렸다.
이후 중장과 대위가 중세 중기를 전후로 생겼다. 우선 장군의 어원은 13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프랑스어 capitaine général에서 유래되었으며, 중장(Lieutenant General) 또한 이시기쯤에 생겼으며, 부장군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상술한 대무관장과 원수의 부관격인 계급이었으나 이마저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대위(Captain)의 경우 14세기 초 필리프 4세때 전쟁시 지방의 영주들을 동원할 때 이들에게 부여된 칭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칭호를 부여받은 영주들 중 영지의 생산력만으로 생계 등을 유지하지 못한 이들이 사설 용병대를 만들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용병대장=캡틴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후 용병을 중심으로 한 유사 상비군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군사 계급으로 편입되었다.
중위(Lieutenant)는 중세 후기에 등장한 군사 계급으로 용병대의 규모가 커지고, 캡틴이 해야 할 일들이 늘어나면서 보좌직으로 신설된 직책에서 시작되었으나, 명칭은 중세 초인 10세기 말에 신설된 Lieutenant du roi에도 있을 정도로 유래가 깊었다.
소위의 경우 중세가 지난 후에야 생겼으나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12세기부터 기수(Ensign)가 소위 역할을 대신 수행했다. 하사관 계급에 속하는 상사를 뜻하는 서전트하사 또한 중세에 생긴 계급이었다.

3.3. '암흑시대'라는 오해와 반론

JTBC 차이나는 클라스 - "암흑시대는 독일과 일본에 의해 씌워진 프레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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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초 로마네스크 건축 (제르미니 데 프레) 12세기 고딕 건축 (샤르트르 대성당)
9세기 교회 건축과 12세기 교회 건축.

중세는 고통스러웠으나 문명은 진보했고, 이를 버티고 진보시켜줄 원동력으로서 기독교가 있었다. 그리고 르네상스를 탄생시켰다. 대다수의 판타지물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52]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주는 경우도 많고, 서양에서는 판타지 팬이 아니라도 기사, 갑옷, 공성전 등을 좋아하는 밀덕, 역사덕후들이 갖는 중세 로망도 많다.

오히려 이와 대비되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오해가 강하게 자리잡혔다. 그리고 픽션이라도 그런 중세의 현시창 분위기를 더 크게 어필하면 다크 판타지물이 된다. 즉 중세시대와 중세시대 픽션은 환상적인 이미지와 어두운 이미지가 공존하는 셈인데, 어느 방향이든 인기와 인지도는 많고 논란도 많은 메이저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암흑시대의 의미는 '교회의 억압에 의해 모든 것이 퇴보한 어둠의 중세시대'로 통용되는데, 여기서 2가지 논의점이 발생한다.
1) 정말로 모든 것이 퇴보된 암흑시대인가?
2) 퇴보되었다면, 그게 종교(기독교) 때문인가?

일단 결론을 내리자면 둘 다 아니다. 당시를 살아가던 농노나 평민들도 자기네 시대가 암흑과 같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퇴보된 시대도 아니었고, 중세의 가톨릭교회는 서로마 멸망 후 혼돈의 카오스인 시대 상황에서 고대 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대중들에게 중세와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박혀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세라는 역사학적 개념이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중세의 이미지는 14~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역사 속에서 인간성이 존중되고 인간 본연의 창조적 힘이 발흥되어 문화가 만개했던 행복의 시대를 그리스·로마시대라고 생각했으며, 그 유산인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해 그러한 시대가 다시금 도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중세를 '중간시대, 쓰레기인 추악한 시대'라고 거침없이 표현했다. 고전과 당대라는 2개의 참된 시대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 시기는 그에 의하면 소거되어야 할 쓰레기였다. 이렇듯 중세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까기 위한 목적으로 페트라르카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중세라는 용어는 그 후에도 여러 인문주의자들에게 사용되면서 점차 일반화되었다. 이때까지는 중세라는 표현은 물론 어떤 특정한 시대를 지칭한다거나 명확한 시대구분 없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한 편의적 사용이었다. 이러한 편의적 사용을 주교이자 교황청의 사서였던 죠반니 안드레아가 고대-중세-근현대라는 3시대 구분법에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시대구분 형태로 자리잡았다. 1469년 교황청 사서 조반니 안드레아는 중세란 표현이 '낡은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근대인'들의 구분을 하는 기점이라고 설명했다.

스위스 출신의 역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부터 중세를 폄하하는 경향이 더 번성했다. '르네상스'라는 용어 자체는 조르조 바사리 같은 르네상스 운동의 주역들로부터 사용된 것이지만, 그 용어를 '시대' 개념으로 정립한 것은 부르크하르트였다.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대를 고대문화의 부활이자 근현대의 출발점이요, 중세와의 급격한 단절로 해석했다. 이런 주장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의 추종자이자 동시대인이었던 존 시몬즈는 두 시대를 다음과 같이 확연히 대조시켰다.
중세 시대의 정신 상태는 교의(敎義), 권위, 스콜라주의와 같은 교회의 우상들 앞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엎드려 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마침내 인간의 노력을 위한 시간이 도래하였던 것이며, 그 이래로 인간이 여전히 참여하는 진보가 계속되었다. 르네상스의 역사는 인간 정신이 쟁취한 의식적 자유의 역사다.
이렇듯 수백 년 동안 까이고 또 까이던 중세는 19세기 말에 몇몇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재평가를 시작했고, 20세기 초부터는 역사학계에도 본격적으로 재평가의 바람이 불었다.

게르만계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특징이 사실은 중세에도 있었음을 밝혔다. 또 르네상스 시대에는 점성술이나 마술 등 비이성적, 비과학적인 태도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는 연구도 나왔다. 중세와 르네상스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어렵다는 주장도 나왔다.[53]

현재에 와서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적, 이념적 변화 정도로 여기는 견해가 많다. '암흑시대'라는 부정적 의견은 전문 역사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에는 거의 폐기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중세는 서양사의 한 시대에 붙인 이름일 뿐이고, 이 시대는 서구 문화에 독특하고도 중요한 공헌을 추가했으며, 그 공헌은 공정하고도 편견 없는 연구와 평가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세의 부정적인 특징인 가난, 무지, 전쟁, 종교/정치적 박해 등은 마키아벨리와 종교전쟁, 마녀사냥의 시대인 16세기에 더 심해졌다고 보고 있다.

19세기에 르네상스를 서술한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기 사람들이 황금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묘사하여 지금까지도 그런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는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화가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들이 민중들의 고통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은 중세의 암흑기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열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일반 대중들이 종교의 생활규범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는 세속화(secularization)는 19세기의 일이었으며, 공중 차원에서의 세속윤리(secular ethics) 담론의 본격적인 진행은 사실상 현대의 시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페즈는 르네상스 시기가 경제 침체기였다고 보았다. 사턴과 손다이크는 르네상스 시기에 과학혁명이 지연되었다고 보았다.

다만, '사료가 부족하여 시대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제한적 의미의 암흑시대는 여전히 학계에서도 통용되고 있으며, 중세 초기(476~1050년경)의 경우에는 여기에 해당하므로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이 시기는 비기독교 세력의 잦은 침략과 경제망의 붕괴 등, 냉정하게 말해 좋게 보는 것이 힘든 시기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은 가히 포스트 아포칼립스 수준으로, 인류 멸망 시나리오를 방불케 한다. 21세기 기준으로 비유하면 외계생명체가 뉴욕과 LA, 그리고 유럽의 주요 국가들과 도시들을 점령함으로써 서구 문명을 붕괴시킨 수준의 충격이었다. 중세 초기의 신학만 보더라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동로마는 제국의 신앙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하느님은 어느 분이신가?',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등에 주목하여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발전시켰다. 반면 서방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로마가 붕괴되고 난세가 펼쳐진 세계를 보면서 그 자신도 시련을 겪어야 했고, '인류의 문명은 영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죄악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등의 사유를 발전시켰다.[54] 서로마 멸망은 당시 서유럽의 모든 것이 붕괴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기술, 문화, 교류의 붕괴, 군벌 형성, 해적 창궐, 실전된 상/하수도, 무역, 건축, 의료, 교육 등.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도 유럽인들은 조금씩 발전을 추구하려 하였다. 그리고 질서를 바로 잡은 곳이 서유럽에선 교황청이었으며, 8세기까지는 종말론을 체감할 만했던 서유럽에서도 9~10세기에는 지역별로 비교적 안정적인 정권이 수립되어, 11세기 무렵부터는 대부분의 외침을 단절시키고 오히려 정치·문화적인 권역을 확장시키면서 '문명권'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당대 기준으로는 꽤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였다. 물론 이렇게 일괄하는 것 또한 너무 단순한 것이지만, 특히 11세기 이후를 '암흑시대'로 지칭하는 것은 해당 시대의 보편적인 문명 발전 정도를 고려하면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라고 할 만하다.

요한 하위징가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와는 비교하면서 중세 후기(14-15세기) 프랑스어권을 연구하여 이 시대 프랑스어권은 재생의 시대라기보다 비관주의와 데카당스의 시대를 거쳤다고 보았다.
중세시대는 겨울이 아니다. 중세는 마치 분명 저물어 가지만, 마지막으로 그 아름다운 붉은 석양을 남기는 가을처럼 아름다운 시대였다.
하위징가 '중세의 가을' 中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근의 세계 사학계에서의 대세는 중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세가 정말 좋은 시기였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전까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던 시기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게 적절하다. 어디까지나 근대로 넘어간다고 하여 중세보다 확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종합하면 중세는 이전의 판단에서 암흑기로 간주했던 것보다는 나은 시대였고 근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안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마냥 살기 좋은 시대는 아니었지만, 문명과 문화는 그때에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자신의 저서 <중국통사>에서 작금의 중세 재평가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는 분명히 어느 문명에서도 중세는 중세 나름대로 인간 지혜의 진보, 발달을 볼 수 있으며 그 점에 한해선 중세가 고대보다 우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세가 암흑시대라는 설을 일방적으로 미망(迷妄)이라고 팽개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중세에 들어서부터 고대에 육성되었던 진화 현상이 정체되고 퇴화, 역행하는 경우가 일부 나타난 것은 역사적 사실로서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데 고대에 융성해지려 했던 화폐경제의 쇠퇴, 자연경제의 재생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더욱이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고대에 비교적 자유로워지려 했던 인간관계가 중세에 들어서자 귀천貴賤의 계급이 고정되어 신분제 사회의 출현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생긴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중세란 시대는 결코 무한정 예찬할 수 있는 진보적인 시대가 아니고, 명암이 교차된 복잡한 성격을 지닌 시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세 재평가 사학자들은 로마 붕괴 이후 정체, 퇴보 현상까지 부정한 적이 없으며, 암흑시대가 '모든 것이 퇴보한 어두운 시대'로 쓰여왔으며 이는 부당하다고 주장했을 뿐, 상기했던 대로 역사적 연구를 통해 명암을 확실히 조명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상술했듯 아무리 퇴보가 있었다 해도 무려 천 년이 넘는 중세 시기가 싸잡혀 암흑시대로 규정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 더욱이 기존의 중세에 대한 편협한 관점을 자정하는 것이 비판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미 고대 시대부터 신분제는 고착되었고 노예와 약탈 경제가 주축이었다는 사실은 완전히 외면하고 있다.

3.4. 참조 자료

이 문서는 반달리즘식 수정이 자주 이루어지므로 위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공신력 있는 자료들을 몇가지 소개한다. 서적의 경우 도서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네이버 지식 사전
  •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 요한 하위징어 『중세의 가을』
  • 자크 르 고프 『중세를 찾아서』, 『서양 중세 문명』 등
  • 로널드 넘버스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 주디스 코핀, 로버트 스테이시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 마시모 피글라우치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中 미신에서 자연철학으로, 자연철학에서 현대과학으로
  • 페르디난트 자입트 『중세, 천년의 빛과 그림자: 근대 유럽을 만든 중세의 모든 순간들』
  • 페리 앤더슨 『고대에서 봉건제 국가로의 이행』,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55]
  • 『자연과학의 이해』
  • 움베르토 에코(기획) 『중세』 시리즈[56]
  • 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서양 중세사
  • 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서양의 장원제』,『기적을 행하는 왕』

3.5. 관련 요소


30년 전쟁의 경우 에누리 없이 근세에 일어난 사건이다.[57]

3.6.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

3.6.1. 기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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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중세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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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라이트노벨

일본의 라노벨 작가인 하세쿠라 이스나의 작품인 늑대와 향신료, 늑대와 양피지,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또한 판타지에 실제 중세사와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작품의 배경이 11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작가 스스로 13권 후기에 40에서 50권 사이의 중세 유럽에 대한 자료를 모아 해당 작품을 썼다고 인증한 바가 있어 본 문서와 같이 대조해보며 읽어 볼 만하다.

3.6.4. 문학

3.6.5. 영화

3.6.6. 게임

3.6.7. 애니메이션

  • 원탁의 기사 타올라라 아서
  • 리틀 엘 시드의 모험
  • 로빈 후드의 대모험

4. 유럽 밖의 중세

'중세'의 비유럽사에는 적용하기 어려우며, 유럽이 아닌 지역에 '중세'가 존재하였는지도 학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는 애초에 시대구분론이 서양사 중심의 세계사가 형성된 탓이 크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를 타파하고 발전한 농노제도라는 경제시스템은 전세계 보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유럽이라는 특수한 지역의 특수성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하지만 제국주의 진영에서 사회진화론을 밀고, 이후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마르크스의 5단계 발전설을 밀면서 엄청나게 긴 시간동안 이러한 설[61]이 퍼지게 된다.

대체적으로, 유럽 외부의 중세를 설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다.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까지 고대, 남북국시대부터 중세로 보거나, 혹은 남북국시대까지 고대, 고려시대부터 중세로 보는 두 설로 나뉜다. 과거에는 고려시대부터 중세라는 것이 다수설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 남북국시대를 중세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학설이 많아지고 있다.[63] 새로운 학설에 보수적인[64] 고등학교 교과서 차원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중세라고 가르치는 중이다.

한국사에서도 중세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떡밥이다. 중세의 시작점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 민정문서의 내용으로 보아 통일신라는 한 지역에서 노비가 전체 인구의 4%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대 노예제 사회가 아님이 확실하므로 삼국통일부터는 중세로 봐야 한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중세가 끝나는 시점은 근세를 제외한 3분법의 경우 고려와 개화기 이전의 조선을 합쳐 중세라고 일컫는 것이 우세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편의상에 의한 암묵적 합의. 고려를 중세로 보는 시각은 대체로 동일하나 조선을 중세로 볼 것인지 근세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떡밥이었으며, 마르크스 사관에 기반한 민중사학에서는 중세의 기원을 신라의 삼국통일과 신문왕의 개혁으로, 심하게는 562년 가야 멸망까지 끌어올리기도 한다.[65]신라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하거나 가야 멸망을 중세의 기점으로 볼 경우 유럽의 중세 시기와 잘 일치된다는 것도 중세의 기원을 끌어올리는 여론이 세를 얻어가는 원인이다. 메이저인 서울대학교 쪽에서는 고려를 중세, 조선을 근세로 보는 경향이고[66] 이에 대항하는 고려대학교 쪽에서는 한국사에서의 중세, 근세 개념을 아예 부정하고 왕조구분법으로 쓴다. 혹은 근세를 임진왜란 이후로 보기도 한다. 연세대학교는 중세를 중세Ⅰ, 중세Ⅱ로 나눠서 중세Ⅰ을 고려 시대, 중세Ⅱ를 조선 전기(임진왜란 전)로 보고 조선 후기(임진왜란 후)를 근대로 구분한다.

2021년 기준으로는 사학계에서는 조선을 고려와 같이 중세로 정의하는 논문이 많아지고 있다. 만일 고려가 중세고 조선이 근세라면 왕조 교체기에 뚜렷한 변혁이 있었다는 말인데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문서에서도 설명하는 것처럼 트렌드는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점점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 반응이 바로바로 업데이트되지 않고 반응이 늦는 교과과정에서는 그냥 중세는 고려고 근세는 조선이라고 한다.

(러시아가 유럽이냐 아시아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신나게 싸우는 논쟁거리지만) 러시아의 경우, 중세란 표현 자체를 쓰지 않는다. 표트르 대제를 기준으로 그 전을 고대 러시아라고 부른다.

인도의 경우, 굽타 왕조에프탈의 침입으로 붕괴된 시기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아 무굴 제국에 의한 통합을 중세의 끝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중동의 경우 이슬람교의 등장 자체가 워낙 큰 전환점이다보니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9세기경부터 분권적 질서가 나타났다가, 오스만 제국이 다시 한번 통일 제국을 재건하게 되며 중세는 대체적으로 끝났다고 본다.

아시아권을 통합해서 등장한 것은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이다. 주로 사회주의[67] 쪽에서 주로 시작한 이 논쟁은 아시아의 특수성과 역사발전 단계이론이라는 단선적 발전사가 조화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말이 많았다. 여기에 바르가, 칸토르비치, 비트포겔 등의 특수성 긍정론과 블라디미르 레닌의 국가론에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단선적 발전론이 충돌하면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후 전개와 자세한 것은 외부 참고.

중국은 삼국시대 혹은 오호십육국시대를 중세의 시작으로 잡고, 서민 문화가 성장한 북송은 근세로 보고 당나라 말기까지(보다 현대적인 시각) 혹은 한족에 의한 통일 왕조가 재건된 명나라대까지를 중세의 끝으로 보고 있다.

일본헤이안 시대후기 11세기에 등장한 장원공령제의 모습이 유럽의 장원제와 상당 부분 흡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시기부터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에도시대 이전까지를 중세로 파악하는 시각이 강하다.

결국 동아시아의 중세란 '근세적' 요소(과거제, 세련된 정치 문화)가 성숙되어가는 시기로 어렴풋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사실 이는 서유럽 식으로 보면 다 이상한 방식이기는 하다. 근세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에서 에도 막부 시대를 설명하려고 '근대적 요소는 있는데 근대는 아니고, 그니까 근대의 근에 중세의 세 합해서 근세' 해서 나온 개념이고, 왕조별 구별에 대해서는 현재 부정적인 것이 일반적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리 방법을 못찾았는지 근대 이전의 경우에는 고대와 중세라는 표현을 사실상[68] 배제하고 왕조구분론으로 교과서가 구성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사의 경우에는 고조선, 초기 삼국의 발전, 삼국시대, 통일신라발해, 고려, 조선 이런 형식으로 단락이 구성된다.


[1] 사실 '현대'라는 용어가 정착한 것은 정말 얼마되지 않았다. 1980년대 정도까지는 '최근세'라고 하여 '근대'이기는 하지만 가장 최근의 지엽적인 시기를 지칭하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지금도 '현대'를 편의상의 용어로 볼 뿐 학술 용어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고.[2] 애초에 이런 구분을 한 르네상스시기가 과거 찬란했던 문화의 부활이라는 인식이었으며, 그 과거문화가 사라진 중간 시대는 미개한 문화로 폄하하여 구분하게 되면서 찬란한 과거, 미개한 중간, 찬란한 과거의 부활로 구분한것이다. 물론 이는 역사적 사실관계를 면밀히 따진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느정도 계몽주의자들의 목적에 따른 왜곡이 첨가되어 있는부분으로 마치 공자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로 포장했으나, 실제 주나라가 공자의 묘사대로라기 보다는 그냥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활용한 편집된 이미지의 국가 같은 것처럼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는 고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국가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3] 통념적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구분법 중 하나이기는 하나, 로마 제국의 몰락, 기독교의 성행, 봉건 제도의 부상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인 사건을 가지고 시대를 구분할 수 있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4] 앙리 피렌의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앙리 피렌은 중세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인식했고, 중세의 시작점을 476년보다 뒤로 설정했다는 의의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부적절하다. 8세기까지도 도시, 상업, 시장경제 등에서 고대적 요소가 잔존했다고 하나 로마 말기에 이미 도시와 상업과 시장경제는 쇠퇴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 세력의 팽창이 유럽 전체를 농업 문명 사회로 바꾸었다는 그의 주장은 적절치 못하다.[5] 그러나 이것은 테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국교화가 더 의미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약간 퇴색된다.[6] 자크 르 고프를 비롯한 아날학파는 장기지속적인 중세를 주장했다. 이들은 이전까지 중세 사회 변혁의 계기로 취급받던 르네상스나 흑사병을 중세와 이후 시대를 구분하는 단절의 계기가 아니라 중세의 장기지속적 현상 중 하나로 보았다. 15~16세기의 대르네상스 전후로도 유럽인들은 빈번히 고대 황금시대로의 회귀를 추구했고, 흑사병은 14세기 이후 18세기 초까지 창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럽 사회의 중세적·봉건적 심성(망탈리테)가 기존 중세라 불리던 시간을 넘어 산업화 시기까지도 잔존해 있었다고 보며, 중세 중 특정한 시기만 골라잡아 중세라 정의해놓고 암흑기 혹은 낭만적인 시대로 치부하는 시각을 거부한다.[7]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커진 계기이기도 하다. 로마 때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있었지만, 중세에는 그런 거대 제국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졌던 것. 물론 실제로 커지기도 했지만.[8] 딱히 이상할 것은 없는 것이 중세 유럽의 중심지였던 서유럽이 로마 시대에 어떤 취급을 받던 곳인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로마 시대에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나 그리스, 이집트 등은 중세에도 멀쩡히 부유한 지역으로 살아남아 막강한 국력과 영향력을 과시했다.[9] 다만 항해술에 뛰어난 바이킹은 약탈뿐만 아니라 노예 무역에도 종사했으니 무역 활동이 아예 없었다고 보긴 힘들다.[10] 부정하기도 어려운 것이, 무역의 이상은 Win-Win이다. 자신과 상대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 함께 부유해지는 것. 여기서 상대도 부유해진다부분을 용납하지 못한 거다. 그리고 실제로 이상은 이상일 뿐이다. 서로가 양보해서 각자 조금씩의 이익을 얻자는 쪽과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자는 쪽 중 단기적인 선택의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지는 명확하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상대도 하고 있다는 점과 상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신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하니 그냥 무역을 안 하고 말겠다는 것이다. 결국 내것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보호무역이다.[11] 물론 이건 유럽 전역에서 다 때린 게 아니고, 화로는 러시아나 프랑스가 유명했고, 창문은 영국 등 각자 특유한 세금이 있었다. 그렇다고 평민들한테 매기는 징세과목은 결코 적다는 것은 아니다.[12] 1340년 백년 전쟁이 시작된 당시 피렌체의 상인귀족 가문들이었던 바르디 가와 페루치 가의 은행들은 영국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에게 각각 90만 플로린과 60만 플로린을 대출해줬지만 에드워드 3세가 이자를 상환하지 못함에 따라 파산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이 두가문과 사업적으로 연결고리가 있던 유럽 전역에 있던 수 백 여명의 사업가들마저 연쇄적으로 파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3] 이때 베네치아는 석호 한가운데 있었기에 랑고바르드의 침공에서 벗어났으나 로마와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과 단절되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지도자를 선출하게 된다.[14] 자경대장으로 불리지만 사실 고대 로마 시대때 황제의 말들을 관리하던 직책에서 유래되었다.[15]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는 각각 얼마샬과 나이트 마샬이 있었다.[16] 그런데 이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까지도 만리장성 등의 유적의 석재 등을 빼와 주변 주민의 주택을 짓는 일이 흔했다. 피라미드 역시 표면의 석재를 빼가서 현재의 계단형 모습이 형성된 것이고 콜로세움도 성지로 지정되기 이전에 빼간 석재들 때문에 남은 부분은 전체의 1/3에 불과하다.[17] 프랑스의 경우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시골집들을 볼 수 있었다.장 자크 상페의 풍자 만화 참고로 우리나라도 현재까지 함경도와 강원·경상도 산간 지방에 이러한 구조의 민간 가옥들이 있다.함경도 전통가옥[18] 대표적인 중세 당시의 팔라쪼로는 팔라쪼 스피니 펠로니팔라쪼 다반차니, 호텔은 센스 대주교 저택클루니 호텔로 현존하는 중세 호텔이다.[19] casino는 이탈리아어로 집을 뜻하는 "까사(Casa)"와 작다, 귀엽다를 뜻하는 "이노(Ino)"를 합쳐 만든 단어로 귀족들의 간이 놀이방을 의미했다.[20] 물론, 많은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도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하느님 중심의 세계관에 의거한 관점이었다.[21] 물론 여기에 대해서 결과적으로는 과학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22] M.H.Shank 저작 참조.[23]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파티는 단순한 유흥을 떠나 권력 확인의 수단이었다.[24]피자, 파스타는 이탈리아에만 국한되었고, 가룸은 아예 실전되었다.[25] 이 부분에 대한 고증묘사가 잘 된 영화로는 킹덤 오브 헤븐이 있다. 해당 항목 참조.[26] 그것도 귀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내장이나 다리 같은 잡다한 부위들.[27] 이 문서에 몇번 언급되었다시피 귀족들의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들은 귀족이 실용적인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해도 여유와 돈이 남아도는, 서민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걸 표현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다.[28] 왕좌의 게임 시즌 4 2화에 조프리 바라테온의 결혼식에 나온 그 비둘기가 튀어 나오는 케이크의 모티브다.[주의] 식수의 경우 2000년대 자료라서 당시 정수하는 법을 몰라서 그냥 술을 물 대신 마셨다는 내용이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30] 17:06에서 21:03까지 중세 파트[31] 8:42에서 13:12까지는 중세 파트[32] 잔 다르크가 마녀로 몰려 죽은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중세에도 여성을 마녀로 몰아 죽이는 일이 없진 않았을 테지만, 근세에 벌어진 마녀사냥은 사람들이 단체로 마녀를 집중적으로 죽이는, 즉 학살에 가까운 마녀사냥이다. 일반적으로 마녀사냥은 중세부터 근대까지 잔혹하게 치러졌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근세 한정으로 잔혹하게 치러졌다.[33] 중국의 포로 세뇌, 소련 KGB의 각종 고문 기법, 미국 CIA의 MK울트라 프로젝트 같은 예가 그것.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시기에는 요도에 볼펜 심을 쑤셔넣는 고문까지 있었다.[34] 이런 귀족 여성의 통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남자다움을 지닌 여성'이란 변호가 생겨났다. 여기서 남자다움은 현재 통용되는 의미와 좀 많이 다르다.[35] 위에서 언급했듯 그레고어 멘델 대수도원장이 수도원 세금징수 정책과 싸운 이유가 각종 일은 다 시키면서 세금은 지원해줄지언정 또 걷어간다는 이유에서다.[36] 참고로 말하자면 교무금 자체는 현대 가톨릭교회에도 존재하며, 신자의 의무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내지 않는다고 강요하거나 닦달하지는 않고, 신자 개개인의 자율에 맡긴다. 액수도 꼭 10분의 1을 내는 것은 아니고, 형편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 낸다.[37]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가톨릭교회가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한건 그가 지동설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부터 지동설을 온갖 궤변을 써가며 옹호해서 중립적으로 다루지 못한 데다가, 교황을 모티브로 한 듯한 캐릭터가 멍청하고 헛소리만 내뱉는 역할로 나왔기 때문이다.[38] 신약 성서에 부에 대한 경계를 가르치는 구절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를 찾은 한 부자가 있다.[39] 다만 무조건 종교집단의 주도 하에 복지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자세한 내용은이 링크에서 참고할 것.[40]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 지식인들의 영향도 받았다.[41] 개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단적으로 흑사병의 경우 물론 신이 원인이지만 병은 결국 자연적인 일이고 그 자연적인 원인을 일으키는게 신이라고 보는게 교회의 입장이었다. 즉 신성 말고 자연적인 원안도 인정했다는 것.[42] 천두라고 하는데, 고대 종교나 민간 의학에서 많이 쓰이던 방식이었다. 멀리갈것 없이 화타를 보자. 이런 방식이 쓰이기도 했다는건 중세 의학이 (초기에는) 이교나 고대 민간의학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는것을 의미한다.[43] 오물을 집 밖에서 길거리에 버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이는 로마 시대 하층민 주거지에도 존재했던 관습이다.[44] 다만 중세 후기 흑사병이 돌자 목욕탕이 흑사병의 원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쇠퇴하긴 했지만 중세 말기쯤에 쇠퇴했지 대부분의 중세 시대땐 목욕이 일상적이였다. 그리고 이 낭설도 아예 허구는 아니였는데 지금과 달리 로마시대부터 목욕탕은 생각보다 그리 위생적이지 않았고 사람이 몰리는 장소였기에 전염병에 취약했다.[45] 영국의 리처드 2세가 "Statuto quo nul ject dung"(분뇨를 함부로 버리지 말 것)이라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중세인들도 오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 매우 비위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46] 학술자료를 캡처한 자료가 있어 부득이하게 링크했지만, 댓글의 내용은 대체로 사실이 아니다. 중세의 수도 시설은 로마의 기술이 거의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 중세 성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고, 도시 인구가 더욱 증가한 16세기에야 수도와 목욕 시설이 급감하기 시작한다.[47] 역병 의사의 특이한 복장도 이러한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48] 다만 노예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19세기 들어서이며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중세 유럽에선 여전히 노예제가 잔존했는데, 주로 겔리선의 노잡이들이 노예들로 구성되었으며, 속설과 달리 같은 종파의 기독교인이라도 노예로 삼은 기록이 남아 있다. 자세한 것은 노예제 항목을 참고.[49] 비누 용액과 알칼리 용액을 섞은 것에 사로 겹쳐진 양모를 적셔 압력을 가하는 작업. 양모는 섬유의 수축이 심하기 때문에 축융 작업으로 미리 최대한 수축시켜놓아서 섬유를 치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놓아야한다.[50]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 생산 이전까지 종이는 여전히 비싼 편이었다.[51] 참고로 동시기 동북아에서 최고로 서역산 말 말고도 다음으로 치던 몽골 초원의 말들은 120cm 내외였고, 한반도산 말의 경우 이보더 더 작은 117cm 정도이다.[52] 사실 배경보다는 모티브가 많다. 판타지는 무협물처럼 실제 역사시대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모티브를 따온 가상세계가 클리셰고, 역사물이 아닌 판타지인데 실제 역사의 중세가 배경인 경우는 중세기반 가상의 세계보다 꽤 적은 편. 그래도 많은 판타지물이나 기사 얘기가 중세를 모델로 삼은 사실은 유명해서 중세하면 판타지를 떠올리긴 충분하다. 이 경우 서로마가 붕괴되어 개막장 난세가 펼쳐진 중세 초기보다는, 체제가 안정되고 상업이 융성하던 중세 말기에서 모티브를 주로 따온다.[53] 중세와 르네상스를 칼같이 나누고, 안 좋은 것은 전부 중세로 떠넘긴 다음 르네상스를 숭상하는 태도는 18세기의 소위 '플라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맹목적 반기독교 정서에서 처음 시작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식이다. 중세의 전유물이라고 흔히 간주되는 마녀사냥, 혹은 이단심문 또한 그 전에는 암암리에 산발적으로 벌어지다가 르네상스의 절정기인 15세기경부터 본격화된 측면이 있다.[54] 이로 인해 <신국론>이라는 명저가 저술되었고, 원죄에 대한 신학도 발전했다.[55] 저자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만큼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이 짙게 녹아있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을 서유럽 외에 곧이 곧대로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등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참고로 『상상의 공동체』라는 저서로 국내에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형이 바로 이 사람이다.[56] 총 4권의 시리즈로 되어있다. 수백 명의 학자들이 참여한 만큼 백과사전 식으로 빽빽히 구성되어 있으며 가격이 비싼 게 아쉬운 점이다.[57] 고대-중세-근대로 구분하는 분류법을 쓸 경우에도 서구에서는 1500년대 부터는 Ealry mordern, 즉 조기 근대라고 한다. 이 개념을 번안한 것이 근세라는 단어다.[58] 중세 끝무렵인 르네상스 이탈리아이기에 이견의 여지는 있다.[59] 십자군 전쟁기 중세[60] 꽤나 골때리는 암울한 설정의 게임으로, 흑사병으로 중세 유럽 인구의 95%가 사망해버려 한 줌 남은 생존자들이 다시 모여 안전하고 풍요로운 정착지를 건설해나가야 한다는 설정이다.[61] 이 두 가지는 엄밀하게 말하면 대립은커녕 양립했고, 지금은 통합되었다고 봐야한다. 현대의 시대구분론은 마르크스의 경제체제적 구분에서 '공산주의는 현대'라는 부분을 뺀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통설이 된 몇 가지 예 중 하나이다.[62] 현대 역사학에서 근대의 기점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의 발달이다.[63] 한국사의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 참관기,전덕재[64] 당연히 어느 학설이 새로 나오고 대세가 된다고 해서 교과서가 막 바뀌고 예전과 답이 달라지면 혼란이 생기기 때문에, 교과서는 대체로 가장 늦게 바뀐다.[65] 이것의 시초는 일본의 정체성론에 대항하려는 백남운 등 사회경제학파의 담론이다. 김석형 등의 학자는 아예 외거 노비농노와 유사한 단계로 파악해 중세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는데, 현재에는 많이 기가 죽은 이론이기는 하나 일본의 게닌(下人, 사무라이 계층에 딸린 예속적 농민)에 대한 재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등 많은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66] 국사학과의 주도적 견해. 역사교육과는 오히려 연세대와 비슷한 경향이다.[67] 애초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란 표현 자체가 마르크스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거쳐서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 때문에 역사를 잘게 쪼개서 억지로 자본주의를 거쳐야 되느냐 아니면 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가도 되느냐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68] 여기서 사실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시대구분론으로서 '고대', '중세'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단적으로 '고대국가'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이 단어가 시대구분으로서 고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모로 대충 얼버무린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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