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13:19:49

세병제

1. 개요2. 특징
2.1. 위나라2.2. 오나라2.3. 촉한
3. 장점4. 단점5. 평가6. 유사 제도7. 관련자료

1. 개요

世兵制

중국 삼국시대에 실행한 제도. 이후 남북조시대까지 쭉 이어지다가 부병제로 변화했다. 삼국의 호적 자료에서는 모두 병적, 민적, 이적(吏籍, 향리 계층)이 분화된 것이 나타난다. '병호제'도 사실 이것과 같은 말이다. 다만 오나라의 제도는 이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2. 특징

2.1. 위나라

세병제는 병역을 특정한 계급의 의무로 삼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병사 카스트'를 만든 것이다. 세병들의 가정은 병호(兵戶)나 사가(士家)라고 불렸으며 일반적으로 세병제에서 병호는 민호(民戶)와는 따로 관리되었다.

병호는 일종의 차별을 받았는데 의무적으로 집단으로 거주해야 했으며 혼인도 같은 병호들끼리만 해야 했다. 병호가 죄를 지으면 민호보다 더 엄격하게 다스렸고 병호에 속한 병사가 배신을 하거나 투항을 하면 가족에게까지 죄가 미치는 연좌제가 실행되었다.

의무적으로 병호의 남성은 병사가 되어야 했다. 아버지가 일정한 나이까지 복무하고, 아들이 의무를 이어서 실행하고, 손자가 또 의무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병역의 의무대물림하는 방식이다. 대신 나라에서는 병호에게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내려줘서 생활을 보장한다. 위나라에서는 둔전 개간과 결합하여 유랑민들을 세병제로 끌어들여 많은 병력을 손쉽게 확보했다.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병호를 확보하게 된다.
  1. 반란군이 항복하거나 유랑민을 체포.
  2. 둔전 구역에 땅을 주고 정주시킴.
  3. 가정을 꾸리게 만들어 병호로 삼음. 그러려면 병사들에게 결혼할 여자를 줘야 하는데 민호가 순순히 여자를 내주지 않아 납치하는 경우까지도 있었다. 단,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 세병제를 시행한 위나라의 경우 병호에게 물리는 세금 부담이 지나치게 과중했기 때문에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고 평가될 뿐 다른 왕조들에서는 오히려 우대받은 경우도 많고, 공을 세울 경우 신분 상승 기회도 충분히 주어졌다. 당시 땅 한 뼘도 없던 빈농들에게 있어 국가가 토지를 주고 세습까지 보장해 주는 것은 목숨 걸고 싸워 줄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4. 병호로부터 지속적으로 병력을 조달.
  5. 병호의 지위는 세습되므로 환경이 좋을 경우 병호가 자체적으로 증가함. 다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전쟁의 피해 등으로 인해 수가 줄면 줄었지 늘어나지는 않으므로 1번 과정으로 돌아감.

2.2. 오나라

손권오나라에서는 세병제에 더해서 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가 실행되었다. 이는 병호를 식읍처럼 신하들이 병호를 세습할 수 있으며 평시에도 병호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다. 사실상 사병으로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인은 손책이 지나치게 일찍 죽어서 이 때문에 손권은 기반을 마련하기도 전에 덜컥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 탓에 오나라는 일종의 여소야대 같은 상황이 벌어져서 신하들의 힘이 월등히 강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조여포를 죽일 때(198년) 이미 40살이 넘었으며 유비 역시 관도대전 시점(200년)에서 거의 40줄인데에 비해 손권은 형 손책이 사망한 시점(200년)에 고작 18살에 불과했다. 사실 조조유비손권이 아니라 그 아버지인 손견에 나이를 비비는 세대들이다. 조조손견은 불과 1살 차이밖에 안 난다. 손권이 이렇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오나라는 군주의 통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당시의 오나라는 미개척지가 많았기 때문에 개척지를 늘리는 데 유용했지만, 대신 전투력과 통솔력이 떨어지고 공식적으로 사병을 거느리게 되니 호족들의 세력이 커져서 국가의 중앙집권 능력이 저하했다. 당장 해당 병호를 이끄는 장군을 함부로 교체할 수 없으며, 어떤 장군이 병사하거나 전사하면 그 아들을 해당 장군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 될 지경이었다.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지 다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 말자. 능통이 병사한 뒤 그의 군대는 낙통이 맡게 되었고, 감녕이 병사한 뒤에는 반장이 그의 군대를 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봉같은 경우, 말단 시절에 소속이 감녕, 반장, 육손 등으로 계속 바뀌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유능하고 경험이 많다는 것 외에도 군주가 지휘관을 지명할 수 있는 부대에서 승진해 올라왔다는 점이 정봉이 가진 또다른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슷한 예로, 중세 유럽에서도 봉신 혹은 그 수하 출신보다 직속 부대 출신 기사를 지휘관으로 선호했다. 이 때문에 한종 같은 아주 나쁜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당이 죽자 한종이 자기 병호를 죄다 위나라에 헌납해버렸다.

그리고 오나라의 이런 이상한 병호제도로 인해 합비 공방전에서는 서로 손발이 안 맞아 장료에게 복날 개패듯 얻어 터지기가 일쑤였다. 강력한 군주 1명의 통제하에서 움직이지 않고 여러 장수들이 자기가 더 잘났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대로 지휘를 하니 참패는 당연했다.

2.3. 촉한

제갈량은 100일 단위로 2교대제를 실행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설이 있다. 호적의 연구로 보아, 촉한은 세병제가 아니라 징병제를 실시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3. 장점

  • 모병제와 비교해 볼 때, 토지만 할당해두면 병사들에게 봉급은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국가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많은 병사를 부릴 수 있다.
  • 병사들이 세습하여 장기간 전투 기술을 습득하므로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하는 것보다 병력의 질이 높아진다.
  • 농사일 자체가 병사로 활동할 체력을 기르는 것이고, 병호제에서는 같이 농사짓는 사람도 병호이므로 병사간의 유대감도 상대적으로 높다.
  • 당장 전쟁에서 필요한 병사를 차출할 때 아직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병호가 남아있을 때까지는 병력 충원이 수월하다. 즉, 사소한 손해를 메꾸기 위해 민심이 악화되는 가두모집 같은 것을 안 해도 된다.
  • 병사 각자가 전장에서 인명 피해를 입으면 가족의 생업이 끊길 위험이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농병일치제와 달리, 안심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되어 사기가 높아진다.

4. 단점

  • 민호의 인적 자원을 직접 징병하는 징병제와 비교해 볼 때, 병호의 수에는 한도가 있으므로 같은 인구라면 병호제는 병호의 숫자가 곧 총 병력이 되며 더 늘리기는 어렵다. 이렇게 병력 숫자에 일정한 제한이 생긴다. 실제로는 조조를 제외하면 대체로 병호제에만 의존하지 않고 임시로 병력을 모병하거나 고용하는 방법도 많이 썼다.
  • 참패로 몇 만 명씩 죽고 하면 병호의 인적 자원이 빠르게 고갈돼버린다. 가장이 죽은 셈이므로 병사들의 전사에 병호의 가정은 크게 동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사라진 병호의 피해를 쉽게 대체하기도 힘들다. 당장 가장이 죽었는데 농사 짓는 것이 어려울 것은 기정사실이므로 정상화는 죽은 병사의 아들이 가장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장성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복구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된다. 게다가 병호에서 태어난 자식이 꼭 아들이라는 법도 없고 만일 딸만 있다면 그 병호는 그냥 없어진다.
    • 병호제에만 의지할 경우 병호에서 끌어낸 병사가 싹 궤멸하면, 민호가 아직 남아 있더라도 안하던 병력 징집을 갑자기 재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손 쓸 방법이 없게 된다. 게다가 강제 징병은 어떻게든 하더라도 그 질이 크게 떨어지고, 장기간 복무가 불가능한데다가 국가가 모든 장비와 식량을 대주어야 하므로 제대로 운용하기 어렵다.
  • 아무리 먹고 살 수 있을 수준의 토지를 받는다고 해도 병호에게는 부담이 너무 심하고, 사회적으로도 차별 계급이 돼버리므로 병사들에 대한 시선이 나빠진다. 그나마 일반 농민들처럼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대신 전쟁 나가면 죽을 수도 있고 죄를 지었을 때 벌도 더 심하게 받고 연좌제까지 걸리니 죽을 노릇이다. 위나라가 유부녀 납치질(…)을 해가면서 병호에 여자들을 채워넣어야 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걸 무조건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그렇다고 병호의 대우를 상승시키면 무력과 높은 대우를 동시에 받는 일종의 '무사 계급'이 나타나서 사회가 전복될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부분은 위나라에게나 해당되는 사항이다. 이후에 포상제도가 마련되고 승진도 가능해지면서 복무기간의 지원책도 마련되어 사실상 장기 복무하는 직업군인 취급되었다.
  • 병력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복무기간이 평생인 징병제나 마찬기지이다. 이 때문에 병력 개개인의 복무염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근대에도 복무 염증과 염전사상은 있었고, 전쟁이 없더라도 도적떼랑 싸우다 죽든 오고가다 병 걸려서 죽는 사망률이 현대보다 훨씬 높다보니 복무 혐오도 컸다. 정말 굶어죽을 판이 되면 모를까, 그럭저럭 사는 농민쯤 되면 밥 굶어서라도 군대 빠질 뇌물 마련하려고 몸을 비트는 게 현실이었다. 당연히 병호를 선정할 때도 본인 동의 없이 강제로 선정할 때가 많았다.

5. 평가

세병제는 당장 써먹을 군대를 조달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큰 피해를 입은 후 군대를 재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상과는 달리 대규모 편성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다. 전쟁이 발생하여 병력 수요가 증가하고 대규모 유민이나 반군이 대거 항복해올 때야말로 대규모 신규 편성에 적합하였다. 실제로 조조가 황건적의 포로 30만 명을 받아들여 편성된 것이 바로 조조의 청주병이고 이들이 세병제의 시초가 되었다.

반면 인구 과밀 현상이 일어나 병호에게 지급할 땅이 부족할 경우에는 병호를 늘리기 어렵고, 앞서 언급했듯이 병호의 지위가 급락하면서 오히려 병사의 질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따라서 전란이 장기간 지속되고 인구가 크게 감소한 시대(ex. 삼국시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당 말기 오대십국시대, 몽골 침략기, 명청교체기 등)에 가장 적합하고, 반대로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인구가 급증한 시대에는 적절성이 떨어지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6. 유사 제도

이후 중국에서는 위 세병제의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대우를 크게 개선한 부병제가 도입되었으나, 당나라군에서 보듯이 세병제에서 본질적으로 바뀐 점이 별로 없었다. 점차 당나라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급여되는 토지가 감소하면서도 각 병사의 부담이 과중하게 되어 당나라 중기에 가서 붕괴되었고, 절도사 체제가 자리잡았다. 송나라 시대에는 전반적으로 모병제가 자리잡았으나, 명나라 초기에 다시 세습되는 병호제로 전환했다. 또한 청나라팔기제 역시 세병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외 국가의 경우, 현대 미얀마군의 시스템이 현대화된 세병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농지 대신 군대가 운영하는 여러 사업체에 취직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민간경제와 격리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미얀마군 병사들과 그 가족들은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있고 미얀마 일반 시민들과 관점이 매우 다르다. 그나마 민간과의 교류가 어느정도 있는 한국군이나 미군과는 달리 이쪽은 아예 미얀마군이라는 별개의 병영국가를 형성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7. 관련자료

바이두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