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0:54:06

모더니즘

1. 개요2. 역사적 배경
2.1. 종교 개혁
2.1.1. 기업가의 출현
2.2. 산업 혁명
2.2.1. 제국주의의 발흥2.2.2. 물질문화 기반의 대중문화
2.3. 시민혁명
2.3.1. 부르주아 사회2.3.2. 대중문화
2.4. 세계 대전
2.4.1. 세계 중심의 이동2.4.2. 이성에 대한 회의
2.5. 미국 대중문화의 등장
2.5.1. 상품문화 등장2.5.2.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장
2.6. 결론
3. 철학4. 미술5. 문학6. 영상7. 음악8. 건축9. 디자인
9.1. 1900-1950
9.1.1. 바우하우스9.1.2. 이탈리아 디자인
9.2. 1950-2000
10. 이후11. 한국에서

1. 개요

Modernism

서양에서 모던(Modern)은 중세 이후부터 현대까지를 지칭한다.[1] 한자문화권에서 모던을 근대 또는 현대로 번역하면서 모더니즘을 한국어로는 근대주의() 혹은 현대주의(代主義)로 번역한다. 철학사와 예술사에서 말하는 모더니즘은 근대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19세기~20세기 초중반 사이의 사조만을 일컫는다.

모더니즘의 특징은 과학에 기반한 자연주의, 객관성 중시, 인간의 경험이성에 대한 신뢰, 개인주의에 기반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사회정치 체제, 자유주의, 시장경제, 급격한 산업화 등이 있다. 모더니즘의 정신을 따르던 이들을 모더니스트라고 한다. 반면에 20세기 중후반부터 모더니즘에 반발하여 나타난 반과학적, 주관적, 반이성적, 집단주의적, 사회주의적 시류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2][3]

그러나 15세기까지는 중세, 17~20세기 중반은 모더니즘, 그 이후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확실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4] 모더니즘 시대의 주요 인물 중에서도 중세적인 강렬한 신앙을 가진 인물이 많았고, 모더니즘의 절정기인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이미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분류해도 될만한 사람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칸트(1724~1804)와 같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다 갖추고 있던 인물도 있었다.[5]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떠오른 20세기 후반과 그 이후에도 여전히 주류 사회는 모더니즘에 기반해서 돌아가고 있다.

어떠한 분야에 있어서 매우 급진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자들을 아방가르드라고 하는데, 20세기 초의 모더니스트들은 대부분 아방가르드였기에, 사실상 아방가르드는 이 시대의 모더니스트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한국에서 미술분야의 용어인 전위예술은 아방가르드들의 모더니즘 미술을 뜻하는 말. 아방가르드는 프랑스 군대의 앞에 섰던 전위대(avant-garde)에서 온 말이다.

2. 역사적 배경

모더니즘의 시작을 언제부터로 보느냐에는 이견이 많다. 한 예로, 회화 분야 쪽에서는 인상주의를 현대미술이 시작되는 계기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음악 분야 쪽에서는 기능화성을 부정한 무조음악이 출현한 표현주의를 현대음악의 시작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연극도 비슷해 1910년대 독일에서 기존의 사실적인 무대형식, 전통적인 드라마를 부정한 연극이 등장한 것을 현대연극의 시작으로 본다. # 사진, 영화분야는 다른 분야보다 그 시작을 말하기가 쉬운데, 당연히 최초로 사진이 발명된 때인 1830년대를 그 시작으로 본다. #

역사학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대해 한동안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이 채용되었던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중세나 근대 자체에만 관심을 가졌기에 두 시대가 겹치는 시기에 대해 연구가 부족하여, 자본주의 다음에 공산주의가 올 당위성을 증명한다며 각 시대가 넘어가는 원리를 '과학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연구가 채용될 수 밖에 없었다.[6] 하지만 1990년대부터 중세-근대 교체기가 역사학의 블루 오션이라는 것을 깨달은 여러 서양 역사학자들이 자료 분석에 나섰고, 그 결과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이 실제 사료 속의 데이터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도 오래된 책 또는 2000년대나 그 이전에 대학교를 다녔던 선생님들은 여전히 예전 학설을 가르치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예를 들어 '인클로저 운동이 농민을 도시로 내쫒았다'라거나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 국가의 출현를 부른다'는 설명이 있다면 이미 주류 역사학에서 폐기되고 있는 학설이다. 심지어 이 문서에서도 바로 다음 문단을 포함한 역사적 배경 설명의 상당수가 낡은 학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략 사회문화사적으로 보면 19세기부터(즉 1800년 이후부터) 모더니즘의 토양이 갖춰진 셈이다. 대체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학자들은 그 배경으로 크게 다섯 가지를 꼽는다. 종교 개혁, 산업 혁명, 시민 혁명, 세계 대전, 미국 대중문화의 성장과 확산이 그것이다. 이 다섯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보면 어느정도 모더니즘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개혁은 자본가 세력이 주류 권력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산업혁명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시민혁명은 일반 대중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 대전은 유럽 중심의 세계 질서가 미국으로 옮겨가도록 만들었고, 사상가들이 이성 중심의 사회질서에 회의를 가지도록 만들었다. 미국 대중문화의 성장과 확산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소비 중심의 대중문화를 만들었다. 즉, 이 다섯 사건은 오늘날의 사회 환경을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2.1. 종교 개혁

16~17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에 호응한 건 흔히 부르주아라고 불리는 서유럽과 북유럽의 상공업 종사자들이었다. 이전의 가톨릭은 봉건시대 왕족과 귀족을 지지세력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 츠빙글리,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개신교회는 점차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성경해석은 상공업자들과 노동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것은 노동과 상거래 행위를 통한 이윤 추구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노동행위를 넘어 직업에 소명의식을 갖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특히 개혁파 신학은 노동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신성한 의무로 해석하였다. 그동안 구교(카톨릭)적인 이해에서는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교회와 관련된 것은 신성시 하였지만 그 외의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에서의 상공업은 발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개신교(개혁파)는 인간의 모든 활동과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신학적 원리로 이해하고 실천하였다. 따라서 근면한 삶과 노동에 의한 부의 축적은 하나님 앞에 정당한 활동이 되었다. 그러나 부의 축적과 나눔을 통한 사랑의 실천적인 문제에서는 개인의 신앙과 실천에 따라 개인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성경에 근거한 우상숭배 배척과 그로 인해 생긴 단순한 교회건축 양식은 이후 다른 디자인, 건축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종교 개혁의 예술적 흐름이 북부 르네상스로 불리게 되는 이유이다.

2.1.1. 기업가의 출현

이전 유럽 사회에서는 돈에 집착하는 걸 좋게 보지 않는 풍조가 있었고, 돈에 목숨거는 자들은 가진 것없이 차별받는 유대인들 뿐이었다.[7]

그러나 돈버는 것과 근면성실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생기면서 상인들이 이제 종교적 신심을 가지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신대륙 발견과 결합하면서 제국주의 식민경영으로 이어졌다.[8] 그리고 이후 발명된 증기기관과 결합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2.2. 산업 혁명

18세기 중엽 벌어진 산업 혁명은 이런 개신교계 상공인들이 주축이 돼 '돈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벌 수 있을까?' 연구를 하다 이뤄진 결과이다. 특히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데, 이게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크게 사회적 배경, 기술적 배경, 자연적 조건을 들 수 있다.

사회적 배경을 보면 영국에서 지주계급이 발달한 것이 큰 영향을 줬다. 다른 유럽의 봉건제 토지제도에서는 영주가 농노들을 맘대로 쫓아낼 수도 없고, 챙겨줘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중산층을 이루고 있었던 지주 계급 요먼리(yeomanry)와 대지주 계급 젠트리(gentry)가 땅을 사적으로 소유하여 자본주의적인 재산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미개척지였거나 공유지였던 땅에 울타리를 둘러 사유화를 실시했다. 이를 인클로저 운동이라고 부른다. 이때 직물 산업이 급성장해 섬유의 수요가 폭증해 목화 혹은 양털의 가치가 오르자, 지주들은 양을 키우는 목장을 늘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전에 그 땅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은 농촌에서 쫓겨나게 됐다. 이 사람들은 먹고 살 거리를 찾기 위해 도시로 모여들었고, 때마침 수요가 늘어난 공업에 맞춰 저임금 노동자가 된다. 그리고 영국 요리의 저주가 시작된다. 농담이 아니라 이 새로 나타난 노동자 계층은 이전 전통과 단절되게 되었고, 극심한 노동강도를 견디는데 바빠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낼 여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전 농촌 사회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민속공예를 만들고 사육제(카니발) 같은 축제를 스스로 열어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었던 것에 비해, 새로 나타난 노동자 계층은 기업이 만든 제품을 소비하고, 그걸 자신들의 문화라 착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기술적 발달은 이런 사회현상을 부채질했다. 크게 농업 혁명, 면직물 공업 기계화, 제철 공업의 발전이 이를 가능케 한 물질적, 산업적 배경이었다. 농업 면에서는 클로버와 순무를 키워 땅의 지력을 회복시키는 4윤작법이 개발되면서, 남는 땅을 양을 키우는 등의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게 되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게 됐다.

면직물 공업 면에서는 인도에서 면화가 들어오면서 모직물 공업을 면직물 공업이 대체하게 된다. 이미 영국은 이전부터 모직물 공업에 치중한 상태였고, 면화에서 씨를 빼는 작업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됐다. 앞서 말한 저임금 도시 노동자들이 이런 일을 맡게 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래도 공급량을 맞출 수 없게 되자, 상공업 계층에서는 이를 기계로 보충해보려고 시도했고, 성공했다.# 방적기와 방직기가 발명되면서 제품 단가가 떨어지게 됐고, 영국 면직 산업은 큰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반대급부로 노동자들의 임금도 떨어졌다. 오죽하면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을까. 러다이트 운동을 단순히 반진보적 반기술주의적 짓거리 정도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 사람들의 생계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로봇이 발달한 미래엔 우리가 이런 짓을 하고 있을지도. 미래에도 로봇이 하지 못하는 일을 인간이 찾아서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에 기대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저 손 놓고 인간 사회의 몰락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제철 공업 면에서는 코크스와 새로운 제철기술이 마련되면서, 영국의 철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해주었다. 덕분에 이후 산업 혁명의 전개에 필요한 막대한 철을 공급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철이 다시 기계재료로 들어가고, 기계 기술은 더 발전하는 순환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났던 건 자연적 배경 덕분이기도 했다. 일단 석탄이 풍부했다. 석탄은 연료로 중요했는데, 이를 캐고 나르기 위해 증기기관이 발명되기도 했다. 영국 지형은 산이 없이 평탄해 철도를 놓기에도 좋았다. 그리고 증기선이 다닐 해상교통 환경도 좋았다.

2.2.1. 제국주의의 발흥

이런 요인들로 인해 영국은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전세계에 열악한 노동환경과 식민지 팽창을 낳는다. 영국은 인도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면화 등을 수입하고, 자국 저임금 노동자들과 아프리카 노예를 데려와 노동을 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면직물 등의 생산품을 다시 식민지에 팔았다. 프랑스, 독일 등 다른 후발주자 국가들도 이를 따라했고, 식민지라는 자원공급처이자 시장을 놓고 서로 경쟁하다보니 세계 대전까지 일으킨다.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셈.(후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는 경제적인 이득은 커녕 오히려 손해만 봤으며, 정치적 요인 때문에 독립시키지 않은것에 가깝다.)

그리고 불만이 극도로 쌓인 노동자들(프롤레타리아)은 노동운동을 벌이고, 마르크스 사상이 이에 영향을 주면서 공산주의까지 이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뭐든지 적당히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셈. 기업가, 자본가들이 적당히 했다면 공산주의가 생겨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살길을 모색하다가 생겨난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고.. 물론 사회적 윤리의식은 해당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위반에 대한 불이익이 크지 않고 사회 구성원 각각의 정의감이란 것도 관점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윤리적 선을 넘어서라도 이득을 취하겠다는 자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오게 마련이고 이렇게 한두명이 좋지 않은 일을 해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된다는 인식이 퍼져버리면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모든 사람이 좋던 싫던 살아남기 위해 악행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정부의 규제라고 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상대적으로 정부 규제 창설에 너그러운 것이 바로 이 때문.

2.2.2. 물질문화 기반의 대중문화

사실상 산업혁명으로 물질문화가 발전한 것이 대중문화의 시작 배경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모더니즘에서 굉장히 심각하게 지적되는 부분이다. 이후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질이 나아지긴 했지만, 기성제품의 선택지가 조금 늘어났을 뿐, 일반 대중이 자기만의 취향을 가지고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조삼모사의 상황인 것. 사실상 어떤 제품이나 콘텐츠를 결정하는건 기업이지 서민 소비자가 아닌데, 소비자들은 자기가 문화를 만들고 향유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와 비교해 보면 현대사회의 문화는 어찌보면 다음과 같은 사이클인 셈. '산업화로 문화가 저질이 되었다 →그런데 (이전 시대나 다른 나라 문화를 모르는) 대중은 정작 이 문화가 빈궁한 줄 모른다(도리어 자기들이 진보했다고 착각한다) → 막장 문화는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오늘날 예술계 종사자들은 정말 이 부분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에 관해서는 밑에서 더 자세히 설명한다.

2.3. 시민혁명

크게 영국의 명예혁명(1688), 미국 독립 전쟁(1776), 프랑스 혁명(1789) 이 3대 혁명을 학교에서는 배우지만, 가장 격렬하고 인상 깊은 건 역시 프랑스 혁명이다.
  • 프랑스혁명(1789년 7월 14일)
  • 제1제정(1804년~1814년) - 나폴레옹
  • 부르봉 왕정복고(1814년~1830년)
  • 7월 왕정(1830년~1848년)
  • 제2공화국(1848년~1852년)
  • 제2제정(1852년~1870년) - 나폴레옹 3세
  • 제3공화국(1870년~1940년)
프랑스 혁명은 앞서 설명한 요소들이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즉 부르주아[9]인 상인 계층이 기업가로 발전하고, 역시 부르주아지인 공인 계층이 산업혁명으로 힘을 키우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유산계급인 부르주아들이 구체제 하에서 자신들의 현 상황이 어떤지 자각하고 자기 권리를 챙기게 되면서 혁명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지식인층이 가세해 이론적 기반을 세워주고 선동해줌으로써(!) 일반 서민들이 혁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게 가능했던 건 앞서 설명한 큰 두 가지 요소 외에도 르네상스나 활판 인쇄술 발명도 큰 영향을 끼쳤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식자층이 늘어나고, 인쇄물을 통해 의사소통하고 단결할 수 있게 되면서 부르주아지의 발언권이 세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발언을 무시하려고 하다가 혁명이 터진거지만.[10]

이후 프랑스 사회는 급속히 산업화 과정을 겪는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기술 발전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사진(1830년대)과 영화(1900년대)가 발명되고, 미국에서 전신기술 등이 들어온 것이 이 시기 이후이다. 그리고 프랑스 역시 영국처럼 제국주의 식민지화에 나선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와 중동을 원정했고, 나폴레옹 3세 시기에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베트남 등)를 식민지로 삼고 원료 산지 및 상품을 내다 팔 시장으로 삼게 된다.

2.3.1. 부르주아 사회

혁명 이후 유산계급인 부르주아가 사회 전면에 나서게 된다. 오늘날 기업가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때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다. 중요한 점은, 부르주아가 대중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주아는 일반 노동자 서민들(프롤레타리아)을 선동해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지만, 왕정이 타파된 뒤 사회가 서민중심의 사회는 결코 아니었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캐치프레이즈만 믿고 그 이후 사회는 모두가 자유롭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 보면 안된다는 말.

사실 과거 왕족-중인-서민의 혈통 중심 계급질서가 잘사는 사람-못사는 사람의 돈 중심 계급질서로 재편된 것에 불과하다. 상류층-중산층-하류층 구분도 결국 따지고 보면 돈으로 따지는 것이다. 중산층이 잘 살아야 한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현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으면서도 사회를 안정되게 유지하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다. 못 가진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면 적당히 먹고 살만하게 만들어서 '중간을 두텁게 만드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중간층은 극빈층의 일탈행위를 방지하고, 설령 그런 일탈행위가 일어나도 사회붕괴로 이어지지 않도록 방지해주는 완충역할을 한다. 그래서 중산층이 중요한 거다.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는 잘사는 사람에게만 자유롭고, 잘사는 사람들끼리만 평등한 사회에 가깝다. 프랑스에서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우애따윈 없었다. 실제로는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보장하려 했고, 못사는 사람들은 계속 선거권 등 권리를 쟁취하려 했다.

이런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월가 점령 시위 같은 예도 넓게 보면 이런 권리 챙겨먹기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어떤 지배집단도 시간이 지나면 썩게 마련이라, 나중에는 피지배집단과 소통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노는 결과를 낳게 된다. 소련이나 중국 같은 공산권 국가도 마찬가지다. 다만 문제는 그 정도의 차이로 나타났을 뿐이다.

2.3.2. 대중문화

대중문화는 사실상 부르주아, 즉 유산계층을 타겟으로 하고 만들어진 문화이다. 돈 안 써도 되는 대중문화가 있던가? 대중문화 자체가 왕정붕괴 이후 기존 왕족이나 귀족이 향유하던 문화가 적당히 보급형으로 변형되고 양산화된 것이다. 왕정이 무너지자, 장인들이나 예술가들은 부르주아 층을 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기존 왕정/귀족 전담 요리사들은 레스토랑에서, 왕정 음악가나 연극인들은 극장이나 오페라관에서, 건축가들은 먹고 놀고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극장, 오페라관, 병원, 도서관, 기차역, 관공서를 지어서 말이다. 이 당시만해도 모든 옷들은 다 주문맞춤제작이었고 말이다. 오늘날처럼 치수가 정해져 있는 기성품이 나와서 그걸 골라 입는 것이 아니었다.

혁명 이후 초창기까지만 해도 일반 서민들을 위한 여가시설이나 놀이공간 같은 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시장 정도가 서민들의 공간이였다. 레 미제라블을 떠올려보자. 오늘날처럼 길거리에 상점간판이 늘어서있지 않다. 농촌이야 말할 것도 없고. 1년에 몇 번 하는 축제(부활절 전의 사육제(카니발)이나 추수감사절)가 그들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래도 민속학적 측면에서, 자기들이 알아서 만들고 알아서 즐겼다는 점에서 보면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도 점차 도시화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파리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은 런던보다 파리였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에서 대중문화가 더 눈에 띄게 발달한 건 동시대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 재위기였고, 이시기 영국 문화는 다분히 금욕적이었기 때문이다.[11] 물론 라파엘전파 미술과 공예운동도 있었지만, 인상주의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그 결과 소위 '대중(mass)'이 생겨나게 되었다. 덩어리(mass)라는 이름이 의미하듯, 대중은 익명성을 전제로 한다. 개성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빌딩 안에서 길거리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들을 다 알고 있진 않듯이, 한 사람 하나하나가 규정되고 파악되면 그건 대중이 아니다. 그건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사회환경이 익숙한 것이 되었지만, 불과 200년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다. 미국도 20만 이상의 도시가 10개 이상이 된 건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사회학적으로 이는 기존 가족 중심 문화가 붕괴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건 대한민국에서도 쉽게 체험할 수 있다. 수십 년 전 한국 농촌에서는 같은 씨족가문끼리 집성촌을 이뤄 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서울은 전혀 모르는 천만명의 사람들이 아파트에 벽을 사이에 두고 모여 산다.

당연히 이는 이때 도래한 벨 에포크의 문화에도 영향을 끼치게 됐다. 중상류층 부르주아들은 도시를 거닐면서 구경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문화평론에서는 이를 일명 산책자(플라뇌르, flaneur)라고 부른다. 거북이를 끌며 산책하는 사람이라 불릴 정도로 이들은 여유가 많았고, 도시 풍경과 행인들을 구경하는 걸 즐겼다. 르누아르의 그림에 나오는, 한가롭게 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때의 모습이다. 동시에 에드가 드가가 그린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을 보면, 그런 부르주아 산책자가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또는 툴루즈 로트렉 그림에 나오는 퇴폐적인 분위기를 보자. 현대의 향락적인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2.4.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은 근대 유럽이 일궈놓은 사회구조의 부조리와 모순이 극단으로 치달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유럽 각국 열강은 제국주의 질서에 편승하려고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려 했고, 이 과정에서 이미 식민지를 차지한 국가(영국, 프랑스 등)과 후발주자들(이탈리아, 독일 등)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게 된 자세한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배경 문서를 참고할 것. 즉, 이미 산업화를 이루고 식민지를 많이 확보한 영국과 프랑스에 제정 러시아가 가세한 삼국 협상 측과,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 연합 측이 서로 싸웠다. 세부적인 내용은 제외하고 보면, 전쟁은 기관총과 참호전으로 엄청난 인명 살상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국력이 쇠약해진데 반해, 미국은 전쟁 물자를 팔아 세계질서에서 주요한 위치로 점차 부상하게 된다.

이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야만에서 벗어난 문명국을 자처하던 유럽이 그 어떤 야만인들보다더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으로 낙관하던 시대 분위기는 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나고 만다.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자원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지옥이었으며, 1차 대전 이후로 유럽문화는 상당부분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허나, 그러한 반성에도 상황은 악화되고,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제2차 세계 대전은 구체적으로 대공황이 원인이 되어 벌어졌다 할 수 있다. 대공황이 벌어지자 영국과 프랑스는 블록 경제를 가동시켜 식민지와 자국 안에서만 경제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식민지가 적었던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을 창당하고 이탈리아 정권을 장악했고, 히틀러도 1차 세계 대전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데 앙심을 품고 있던 독일 국민들을 선동해 나치 정권을 세운다. 이후 독일 제 3제국은 마지노선을 우회해 프랑스를 침공하고 괴뢰정권인 비시 정권을 세우지만, 이후 소련미국 양쪽과 싸우게 되면서 결국 GG. 한편 이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이로 인한 결과는 해당되는 문서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참혹함 그 자체였다. 홀로코스트로 수백만의 유대인이 죽은 것만 봐도 그렇다. 아시아도 예외가 아닌데,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 종군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되면서 잔혹한 일을 겪었고, 베트남에서는 수백만명이 아사하는 참사가 벌어졌으며, 필리핀에서는 마닐라 대학살, 중국에서는 난징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 시기 문화는 그야말로 광기와 우울 그 자체였다. 연합국 측이든 추축국 측이든 그 식민지 국가들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대다수의 대중들, 국민들은 정부의 선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따라 이 광기의 행렬에 동참하거나 방조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전에 이룬 풍부한 문화는 큰 손상을 입게 된다. 철학과 예술에 국한해 보면, 나치 같은 경우 아리아인의 우수성 운운하며 가부장적 질서 중심의 사회를 만들려 했다. 마초적인 형상의 조각상을 만들거나 남자는 근면하게 일하고 여자는 내조봉사해야한다는 식으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유포시켰다. 그리고 이에 반대되는 예술은 퇴폐미술로 낙인 찍어 파괴했다. 그러나 이렇게 탄압하면서 정작 괴링 같은 작자들은 예술작품을 약탈해 모으려 했다.

이로 인해, 이 시기에 수많은 철학자들, 특히 발터 베냐민이나 한나 아렌트 같은 유대계 철학자들은 미국으로 망명해야 할 처지였으며[12], 예술가들도 망명하거나 다다이즘의 경우처럼 현실과 상관없어 보이는 쪽만 버티는데 그쳤다. 유대계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이 시기 문화는 이전의 관용적이고 다양성을 허용하는 문화에서 퇴보해 매우 보수적으로 바뀌었으며, 이로 인해 피카소 같은 작가들도 이 시기에는 고전적인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2.4.1. 세계 중심의 이동

세계 대전은 유럽 중심의 세계 질서가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냉전질서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 미국은 자국의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CIA를 동원하여 한반도, 남미, 이란 등 각지에서 각종 공작을 감행했다. 물론 이는 소련 KGB도 마찬가지였다.

2.4.2. 이성에 대한 회의

이 이후로 상당수의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이성 중심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독일, 프랑스 등 직접 전쟁을 경험한 국가들의 사상가들의 경우 반성, 속죄, 회복 등을 어찌 이룰지 고민하게 되었다. 철학에서는 실존주의가 가장 대표적. 그러나 이는 일부 사상가들에 국한되었고, 대다수 일반 시민들은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바빴다. 전후세대는 미국에서 유입된 상업문화에 호응하여 더 이상 심각한 고민을 하려 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68운동처럼 기성질서에 반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이 역시 대학생 층에 국한된 감이 없지 않다. 대다수 대중들은 방송과 쇼핑을 즐기기에 바빴다.

영미권 사상가들은 유럽 대륙권보다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체험한 사람이 소수였다. 일본에 핵을 투하했다는 자괴감이 있긴 했지만, 이는 곧 미국 예외주의로 대체되었고, 그 바탕에는 기술과 과학만 발전하면 인류는 행복해진다고 믿는 기술맹신주의가 깔려 있었다. 이는 영미권 국가들에서 분석철학실용주의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을 겪을 때마다 잠시 언론에서 언급될 뿐, 대다수 미국 시민들은 쇼핑과 방송을 즐겼다. 일부 사상가들은 이를 개인주의가 팽배한 것으로 보고 개탄했으나, 일반인들이야 그러든 말든 뭐 어쩌라고 정도로 취급하는 듯.

2.5. 미국 대중문화의 등장

영국 문화를 받아들여 실용주의 노선이 강했던 미국은 신대륙의 풍부한 자원을 활용해 압도적인 대량생산 체제를 열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US 스틸의 피츠버그 공장의 철강 생산량이 독일 전체의 철강 생산량을 능가하였다. 미국 물질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강준만주제가 있는 미국사 시리즈네이버캐스트를 참고하자.

특히 프레드릭 테일러 같은 이는 모든 체제 전체가 기계와 같이 효율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지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벌어진 일을 직접 실행하려 한 인물. 이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미국은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요소(개신교 정신에 입각한 근면성실, 기계화와 대량생산, 환락적 도시 대중문화)를 가장 극단적으로 집약시켜 자본주의로 만들어낸 예이다. 철도, 자동차, 전신, 전화, 축음기, 영사기는 이런 환경에서 생겨난 것이다. 토머스 에디슨 같은 인물도 어찌보면 이런 환경이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13] 나아가 최근의 텔레비전 방송, 게임, 인터넷 문화 역시 미국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고 있다. 텔레비전은 영국 BBC가 시초지만, 그 누구도 미국 방송시장을 세계 1위 시장으로 보지 영국 등 다른 국가를 1위로 보지 않는다.

2.5.1. 상품문화 등장

과거라면 농사지을 낫을 사기 위해선, 동네 아는 대장간에 가서 아는 대장장이에게 잘 부탁한다며 부탁했을 거고, 곡식을 빻으려면 물레방앗간에 가서 잘 부탁한다며 부탁했을 거다. 즉 모든 게 1:1 주문제작(order-made)이었다는 거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직접 대면하고 대화하면서 물건을 맞추고 사갔다는 것이다. 이는 예술도 마찬가지였다. 귀족문화의 예술이라면 의뢰자나 후원자가 의뢰하고, 장인이나 예술가는 이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교황과 이런 식으로 밀당하며 작업을 했다. 민속문화의 예술이라면 자수든 가구 조각이든 자기가 만들고 자기나 가족이나 지인들이 입는게 정상이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사대부들은 자기 스스로 집을 설계하고 자기 취향과 줏대에 맞춰서 인부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주문했다. 근대 일본의 경우 귀족학원에 다니는 여식들이 배우는 교과목에 건축이 있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만화 신부 이야기에서 처럼 살았기는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 이런 생산방식의 단점은 번거롭다는 거지만, 장점은 자기가 직접 하니 자기가 자기 취향을 너무나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됐다. 이제는 미리 만들고 판다. 즉 기성품(ready-made)에 사람이 맞춰 살게 된 것이다. 자기가 자기 취향을 알고 그에 맞게 살려면, 청소년기부터 그런 교육이 자연스럽게 되어 몸에 배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사회는 그렇지 않다. 예술은 더 말할 이유도 없고. 자기가 만들 수 있는데도, 필요한 것을 남에게 의지하고 구매하는게 당연하고,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처럼 여기게 됐다. 사실은 공장에서 양산한 저질품인데도, 마치 장인이 만든 것처럼 여기고, 나아가 그게 자기에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기업은 당연히 그런 사회를 조장한다. 그래야 돈이 되기 때문이다. 소위 모더니즘이라고 불린 19세기 중반-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별다른 디자인 없이 틀에 찍힌 듯 상품을 제작해 팔았다. 이후 역설적이게도 상품을 잘 팔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게 필요하다는걸 기업들이 깨닫고 디자인 산업을 키우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다양성은 이전 시대보다 뒤떨어진다. 문제는 대중들은 이전 시대의 문화가 어땠는지 피상적으로(광고 보듯이) 유형화해서 받아들이는데 그치기 때문에, 현시대의 문화가 이전시대보다 빈약하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최근 사회를 연구하는 심리학 분야에서는 오늘날 사회가 풍요롭고 역동적으로 발전한 게 아니라, 도리어 단조롭고 지루하게 퇴보했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회색빌딩, 슈퍼마켓에 쌓여있는 공산품, 반복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묘사하는 사회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흔히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표현이 이에 들어맞는다. ('물질적' 풍요속의 '정신적' 빈곤) 사실 정말 오늘날 상품문화에 종속된 사회에서 우리들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상담을 받고 항정신성 의약품을 소비하진 않을 것이다. 명백히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홈쇼핑에 중독된다던지, 비만에 걸린다든지, 각종 기괴한 강박증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들이 현대 이후에 늘어났다는 연구자들의 연구는 많이 있다. 그게 단조로운 도시 환경 때문인지, 개성없이 획일화된 상품 때문인지, 대화를 자주 하지 않는 사회분위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2.5.2.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장

단조롭고 지루한 도시생활을 견디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등장했다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화, 산업화 되면서 이런 즐길거리는 더욱 늘어났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세계 규모의 스포츠 축제, 축구, 야구, 농구 같은 프로 스포츠 리그가 생겨난 것도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대중들, 특히 서민층은 이런 스포츠에 열광했다. 스포츠 선수들이 하는 동작들, 행동들은 별다른 선행지식 없어도 매우 쉽게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산업도 마찬가지로 쉽게 발전했다. 음악 역시 별다른 선행지식이 없어도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월드 같은 놀이공원이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판타지 속 왕자나 공주가 되고 싶은 환상은 동화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기 때문이다.[14]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산업사회 초기에는 없던 것이었다. 중세에는 그냥 삼삼오오 모여 노는 게 전부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놀이는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끝나서 산업이라 할 수 없었다. 프로선수 같은 게 있지도 않았고 말이다. 일부 귀족들이나 테니스 같은 운동을 즐겼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돈이 된다는 걸 파악하자, 이것이 산업이 되었다. 기업야구 같은 것을 생각해보자. 초기 스포츠는 지역자치단체이나 회사에서 팀을 짜서 지원해주고 이웃 단체나 회사와 대항전을 갖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본래는 같이 단합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취지였고 말이다. 그러나 스포츠가 산업화되면서, 역설적으로 스포츠는 '하는 것'에서 '보는 것'이 됐다. 비슷한 예를 스타크래프트 같은 E스포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에는 스포츠가 서툴러도 그냥 모여 노는 것이었다면, 이제 스포츠는 경쟁의 수단이 됐다. 뛰어난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 나아가 일반인을 가르는 게 일상이 됐다. 그냥 놀면 되는데도, 괜히 프로선수와 자신을 비교하는게 일상이 된 것이다. 그리곤 좋은 운동화나 장비를 착용하면 나도 프로선수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당연히 기업에겐 이게 좋은 수입원이 되는 것이다.

음악 산업도 비슷하다. 역설적이게도 뮤직비디오나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소위 '보는 음악'이 나오게 된 것도, 그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음원을 파는 것보단 그 가수가 입었던 옷, 착용했던 액세서리, 그 가수가 공연할 때 나왔던 무대 장치를 넌지시 보여주고 팬들이 사게 만드는 것이 더 수익이 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고 즐긴다는 본래 취지와는 크게 상관 없거나, 오히려 반대되는 짓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기초는 '사실은 쓸데없는 것에 돈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단순한 환상을 만족시켜주는데 주안을 두었다. 초기 영화는 단순한 눈요기거리 영상이었다. 에디슨이 만든 영화는 몇 분 동안 무희가 춤을 추거나 차력사가 쇼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관람자는 현미경보듯 기계에 눈을 가져다 대고 영상을 즐겼다. 그러나 이내 사람들은 이런 니켈로디언 류의 영화에 싫증을 냈다. 이내 등장한 것이 오늘날의 영사(projection) 방식 영화였다. 이는 등신대 실물크기의 영상을, 나아가 사람보다 커다란(스펙타클한) 영상을 만들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에 편집기술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시각적 지각 방식이 연구되면서, 그럴듯하게 화면을 편집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법이 개발되었다. 사실 그냥 정지이미지일 뿐인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사람들의 환상을 만족시켜줬고, 오늘날 헐리우드는 콘텐츠 산업의 정점으로 우뚝 서있게 됐다.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연속극도 영화로, 트랜스포머처럼 장난감 완구류도 영화로, 캐리비안의 해적처럼 놀이기구도 영화로, 심지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같은 게임도 영화로 만들어진다. 이는 가만히 앉아서 환상을 즐길 수 있다는 영화의 강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놀이공원은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보여준 환상을 물질적인 현실세계에 끌어내렸다. 놀이공원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단순한 환상을 만족시켜주려 만들어낸 장치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걸 시뮬라시옹이라고 깠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에서 피터팬이나 후크선장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나와 흉내내는걸 깠다. 보드리야르가 이게 문제라고 본 이유는, 사람들의 현실감각이 무뎌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행복한 기억을 추구하는 건 좋지만, 그게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벌어져서는 안 되고, 삶에 기여하는 의미 없이 관습적으로 소비되는 것도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디즈니랜드에서 잠시 행복한 시간을 가진 뒤, 과연 나에게 남는 건 뭘까? 차라리 그냥 상상으로 남기는게 더 낫지 않을까? 게다가 관습적으로 소비하는 것과 나름의 판단력을 가지고 소비하는 것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도 문제다. 놀이공원에 가서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겉으로 쉽게 드러날까?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전하면서, 대중들은 과연 이 콘텐츠가 가치있는지, 이 콘텐츠가 나에게 맞는지 고민하게 됐다. 유행이 생겨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다수 대중들은 자신만의 취향이나 줏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남들이 재밌다 하는 것을 따라 짧게 즐기고 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결과 남보다 해당 분야를 좀 더 많이 즐겨본 사람, 소위 말하는 평론가나 전문가가 생겨나게 됐고, 대중은 자기 취향이나 판단을 남에게 위탁하는 일이 벌어지게 됐다. 게다가 자칫 돈을 썼다가 재미없는 것을 고르게 되면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에 개인의 사고와 판단의 자유마저 학계 권위자에게 빼앗기는, 혹은 고용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아지게 됐다.[15] 이는 상품, 나아가 정보량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재밌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워지면서 더 심해졌다. 언론은 이런 배경 하에서 발전했다. 신문이나 잡지가 성장한 것도, 해당 분야의 전문인들을 초빙해 그 분야에 대한 신뢰성 있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언론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는 특히 대중음악이나 영화 분야에서 스타 시스템을 도입하자 더욱 심해졌다.

2.6. 결론

모더니즘은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왕과 귀족으로 이뤄진 상부구조를 자본가들이 대체하는 과정에서 발달한 개념이다. 왕과 귀족을 지지하던 카톨릭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두개의 세력으로 나뉘게 됐지만 신흥세력인 개신교에 힘을 실어줄 계층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개신교회는 점차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개신교 특히 개혁파 신학은 노동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신성한 의무로 해석하였다. 그동안 구교(카톨릭)적인 이해에서는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교회와 관련된 것은 신성시 하였지만 그 외의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에서의 상공업은 발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개신교(개혁파)는 인간의 모든 활동과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신학적 원리로 이해하고 실천하였다. 따라서 근면한 삶과 노동에 의한 부의 축적은 하나님 앞에 정당한 활동이 되었다. 그러나 부의 축적과 나눔을 통한 사랑의 실천적인 문제에서는 개인의 신앙과 실천에 따라 개인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농민들의 농사중심 경제체제'가 '자본가들의 공장중심 경제체제'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지주들이 공장의 수요에 맞춰 양털을 생산한 것이 그 예이다. 이에 따라 농민들도 공장을 통해 경제활동을 하게 됐지만, 과도한 노동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생산된 것들로 식생활과 문화를 대체해야했다.이런 상황은 산업혁명이 진행될수록 더욱 심해졌다. 이로서 근현대의 문화는 기업이 제시하는 한정된 콘텐츠를 소비자가 구매하는 상업문화로 바뀌게 된다. 이 상업문화는 후에 미국에서 상품문화와 엔터테인먼트사업으로 나뉘어 나타나게 된다.

산업혁명으로 자본가들의 위상이 높아졌다면 인쇄술의 발달로 지식인 계층이 늘어났는데,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지식인의 원조를 받아 시민혁명을 일으킨다. 지식인의 선동으로 일반시민들도 이 혁명에 동참했기 때문에 왕과 귀족을 몰아내고 자본가들이 상부구조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부구조의 구성원과 계급이라는 용어만 바뀌었을 뿐, 사회는 돈으로 구분되는 계층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불평등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산업혁명의 발달로 저임금 노동자가 중요해지자 식민지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는데, 식민지 쟁탈전을 계기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세계대전이 남긴 영향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첫째, 세계의 중심이 유럽대륙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졌다. 이 중 미국은 경제력의 발전으로 위에서 이야기한 상품문화와 엔터테인먼트사업이 극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 둘째, 전쟁으로 인해 경제력과 문화가 피폐된 상황이었기에 자유로움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예술가들이 설 곳을 잃었다. 이로 인해 예술과 사상은 실존주의적인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는 상업문화를 즐기던 전후세대에게 예술이 괴리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 셋째, 상업문화의 발달은 소비자의 선택이 제한적임을 뜻하며 엔터테인먼트산업은 모든 문화를 '보는 것'으로 관점을 바꿔 버렸다. 이는 소비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졌기에, 소비자를 대신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각종 문화 전문가들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전문가들도 엔터테인먼트화 되어 스타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3. 철학

이러한 사회적 영향하에 1900년대 초부터 모더니즘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장식적이고 화려하기만 했던 과거와 단절하고 기능적 순수함을 추구하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가진 문화와 사회를 창조하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라는 모습을 창조한 주요한 원동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모더니즘은 20세기 유럽 사회 전반을 뒤덮을 정도로 복잡한 사상이었으며 그로 인해 분야별로 다른 특성을 가진 결과들이 나타났다. 그러한 모든 것들의 공통점에는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정신=모더니즘이 숨어있다. 산업혁명 이후 발달되어가는 기계와 산업구조로 인해 사회의 모습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와 정신을 창조하려고 한 것이다.

이를 촉발시킨 가장 큰 촉매가 바로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었다. 유물사관에서는 인간은 물질의 강력한 영향을 받는 존재이며, 새로운 문물이 발명되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시대니까 문화 역시 과거와는 달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소쉬르에서 시작된 구조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각 분야의 새로운 원리, 구조와 법칙을 제시하는 것도 모더니즘 시기의 특징이다. 대표적으로는 르 코르뷔지에의 현대 건축의 5원칙 등. 때문에 모더니즘 자신은 그 이전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나타내면서도 강력한 원칙을 통해 이후의 것들을 자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구속하려고 하는 특징을 보인다. 훗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것을 오만함이라고 깐다.

모더니즘의 근간은 근대성이며 근대성의 핵심은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때문에 근대사회과학에서 기초가 되는 철학은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론[16]이다. 왜 2차대전이 모더니즘의 종언이고 이성주의의 최후라고 하는가 하면 이 전쟁에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도 아니고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 즉 2차대전을 가르켜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의문이 제기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평하게 됐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모더니즘의 시대적 종언이라고 보는 평이 생긴 것이다.

4. 미술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모더니즘/미술 문서 참고.

5. 문학

문학에서의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모더니즘/문학 문서 참고.

6. 영상

문학&영상: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스토리 텔링에 있어서 일관성을 버리고 무의식적이고 파편화된 흐름을 추구하게 된다. T. S. 엘리엇의 시나 안달루시아의 개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시인 이상의 시도 모더니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고전 영화가 굉장히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서, 유럽의 경우 쉽게 알기 힘들정도로 이야기를 꼬아놓고 상징적인 화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에 기인한다.

세계 각국의 영상 매체 중 하나인 애니메이션의 제작 과정에서도 대부분의 작품에서 묘사된 전개, 배경, 연출 기법에 있어 모더니즘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7. 음악

8.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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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나 발터 그로피우스 등으로 대표되는 지극히 기능 위주의 건축을 확립한다. 과거의 장식적이고 형식 위주의 유럽건축의 전통을 끊고, 무장식과 순수한 외관 등을 지향하는 건축이 완성된다.[17] 이는 곧 국제주의 양식으로 발전되며, 20세기의 전세계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떨친다. 외관이 철과 유리로만 이루어진 고층빌딩[18]이나 콘크리트만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건축물들은 여기서 나왔다. 현대의 한국에서도 가장 흔한 건축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1기 신도시들이 거의 이런 형식으로 지어졌다. 아파트나 무장식적인 네모백이 건물들은 결국 여기서 갈라져 나온 것들.

반대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알바 알토의 작품들처럼 '자연친화적인 모더니즘 건축'이 등장하기도 했다. 위의 코르뷔지에, 반데어로에, 그로피우스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심미성을 중시하며 덜 기능적이지만 미니멀리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알바 알토의 디자인은 목조 느낌과 곡선을 살리는 스타일이라 직선적이고 차가운 르 코르뷔지에의 디자인과 크게 대비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9. 디자인

디자인과 건축의 분야에서는 "less is more"라는 명 문구로 요약된다.

9.1. 1900-1950

9.1.1. 바우하우스

디자인에서도 이전 시대의 현란한 장식 등을 버리고 순수한 기능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면 디자인에 있어서는 장식을 버리는 동시에 의미 전달을 위한 가독성과 단순한 형태와 비례를 통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추구한다. 대표적인 디자이너인 얀 치홀트가 있다. 그리고 입체를 디자인 함에 있어서도 기능을 해치지 않으면서 단순한 형태와 물질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바우하우스 등이 대표적. 물론 바우하우스는 모던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9.1.2. 이탈리아 디자인

9.2. 1950-2000

9.2.1. 브루탈리즘

10. 이후

모더니즘 자체는 1960년대 이후 점차 수그러지는 추세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22분에 종말을 맞이했다는 사실상의 소멸 선고까지 받았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마저 소멸을 선고 받은 지금에도 모더니즘의 영향력은 충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는 근본적인 면에서 20세기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만큼 당분간은 모더니즘의 영향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소매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브랜드이자 세계 시가총액 선두권 업체인 애플이나 구글만 해도 less is more라는 명제를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준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모더니즘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11. 한국에서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건축이나 디자인 분야의 모더니즘은 정점을 찍었다. 이때 정점을 찍은 건축, 디자인 분야에서의 모더니즘은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아파트 문화나 공산품 등이 다 모더니즘의 영향이니까. 음악이나, 영화 같은 영상분야에서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문학, 연극, 미술 등의 분야에서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의 모더니즘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로 나뉘는데, 일제강점기에는 발전하기 어려운 환경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어 대중에게 전파되기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 들어선 정권들 대부분이 대중에게 철학이나 예술 등을 교육하는데 소홀했던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유명한 작가로 이상, 이중섭, 박수근 등이 있다.


[1] 近代는 modern을 번역하면서 나온 단어이지만 서양의 모던과 동양의 근대는 범위의 차이가 있다. 모던은 중세 이후부터 근세, 근대, 현대 모든 시대를 포함하는 개념이고 근대는 현대는 배제한체 넓게는 근세를 포함하거나 좁게는 근세도 배제한 개념으로 서로 나타내는 범위가 다르다.[2]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자신은 과학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반과학적이라고 분류된다.[3]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공산주의와는 다른 형태로 온건한 마르크스주의의 색채를 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거두인 질 들뢰즈자크 데리다 등이 마르크스주의에 상당히 호의적이기는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체제를 한번에 뒤엎자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최소한 대학교의 인문학사회학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20세기 후반에는 이미 공산주의 국가들의 참혹한 실패와 몰락으로 인해 공산주의 혁명를 추종하는 지식인이 거의 없어지기도 했다.[4] 유럽의 역사를 구분할 때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를 근대에 포함시키지만, 유럽의 근대적인 사회문화 특성은 17세기 말에 들어서야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기 때문에 모더니즘을 말할 때에 르네상스 시대를 빼는 경우가 많다.[5] 칸트는 근대의 시작을 함께 하면서 이성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라고 볼 수 있지만, 객관적 관찰에 의한 과학적 사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로 기울어서 훗날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할 토양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한 칸트는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 깊게 탐구했지만, 한편 인간이 이성을 통해서 현실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칸트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여기기도 한다.[6] 의외로 냉전이 끝나기 전의 서구권에서도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학설이 채용되었는데, 서양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책을 쓰려면 어쨌던 누군가의 연구를 사용해야 했고 워낙 중세-근대 교체기의 연구가 적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컸다.[7]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이나 크리스마스 캐롤의 스크루지 영감이 탐욕스럽게 묘사되는 것도 이러한 인식에 기인한다.[8] 식민지 경영은 스페인이 먼저 했지만, 이들은 플렌테이션 농업(상업작물을 중심으로 대량재배하는 농업)을 중심 산업으로 삼았고, 산업혁명의 기반산업이 될 면직산업을 하지는 않았다. 특히 스페인은 카톨릭을 고수했고, 개신교 지역인 네덜란드 자치도시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스페인에 산업혁명을 이끌 상공인 계층이 적어졌다.[9] 부르주아는 부르주아 계급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10] 다만 프랑스 혁명은 다분히 우발적으로 이뤄진 요소도 많았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라던가. 덕분에 이후 다시 왕정이 돌아오고 독재정이 들어서고 엎치락 뒤치락하게 된다.[11] 다만 이 금욕적이란 게 건전하게 금욕적이진 않았다. 겉으로는 건실한 척 하면서, 밑으로는 소녀 성매매가 넘쳐나고, 애들을 훈육하기 위해 굶기고 쓰레기 음식을 먹인다던지 하는, 오늘날로 치면 막장 짓거리가 넘쳐났기 때문.[12] 다만 벤야민은 망명하지 못하고 자살했다.[13] 참고로 에디슨이 자기가 만든 영사기 등 저작권을 거는 바람에 초기 영화 제작자들은 간섭을 피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로 갔고, 그 결과 헐리우드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에디슨이 더 악착같이 저작권 관리를 했다면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만들어지는데 큰 방해가 됐을지도 모른다. 물론 볕이 좋아 필름노출시간이 짧아도 된다는 이유도 컸지만.[14] 그런데 본래 동화 원작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동화와는 다르다는 걸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래 동화에는 잔인하고 선정적인 요소가 나온다. 본래 이런 동화들은 집안에서 상속권 등 어떤 권리를 얻기 힘든 이들(맏이가 아니거나, 가난하거나)의 바람을 반영한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왕자, 공주, 부자 등)과 만나 결혼해 잘 살고 싶다거나,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상류층 왕족, 귀족)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거나.[15] 최근에는 이 역할을 별점평가 통계, 사용자별 맞춤 추천 시스템과 같은 기계로 전환하고 있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16] 합리적인 개인들의 의사 결정이 사회 전체의 행동을 만든다.[17] 아돌프 로스의 장식과 범죄에서 영향을 받음.[18] 미스 반 데어 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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