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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e New Freedom우드로 윌슨이 1912년 대선을 앞두고 내세운 정치적 슬로건이다. 우드로 윌슨의 정책을 통칭해 부르는 명사로 종종 사용된다.
"신 자유" "새로운 자유"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2. 배경
본래 민주당은 금융 기반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버번 민주당과 진보주의를 지지하는 남부와 서부의 인민주의자로 양분되어있었다. 우드로 윌슨은 학자 시절 재정보수주의를 지지했으며 버번민주당에 속했다. 그러나, 1896년 대선을 기점으로 민주당 내에서 보수파는 확연히 그 세를 잃게 되며,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이끄는 포퓰리스트들이 당의 주류를 차지했다. 우드로 윌슨 역시 뉴저지 주지사로 당선되고 이후 대선 후보직에 오르면서 자신의 보수적인 견해를 일부는 유지하면서도 일부는 수정하는 방식으로 브라이언의 진보주의를 받아들였는데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뉴 프리덤이었다.1912년 대선은 4파전이었는데, 보수파의 태프트, 진보파의 루스벨트, 사회주의자 데브스 그리고 브라이언의 지지를 받은 윌슨이었다. 윌슨은 진보파 루스벨트와 자신을 차별화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루스벨트의 "뉴 내셔널리즘"과 반대되는 "뉴 프리덤"을 주창했다. 윌슨은 루스벨트의 뉴 내셔널리즘이 집단주의,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뉴 프리덤은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의 자유는 독점기업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3. 주요 정책
3.1. 연방준비법
본래 중앙은행의 설치는 알렉산더 해밀턴, 헨리 클레이가 주장하던 보수적 의제였으나, 1870년대 도금 시대의 도래 이후 본위제 논쟁이 거세짐에 따라 소액화폐의 발행을 지지했던 농민들의 의지를 반영해 여러 진보주의자들이 중앙은행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재정보수주의자 출신이기도 한 우드로 윌슨은 보수와 진보의 의견을 고루 모아 해밀턴-클레이가 과거 구상했던 강력한 중앙은행의 기능을 복구하려고 하였으며 그것의 결신이 연방준비제도이다.연방준비제도는 1830년대 제2미국은행의 폐쇄 이후 처음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된 중앙 은행이었으며, 특히 미국 정부가 달러의 가치를 보증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졌다. 연방준비제도의 설치로 달러의 힘이 강해지자 미국은 본격적인 금융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윌슨의 측근이었던 윌리엄 깁스 매커두의 현명한 재정 정책으로 영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3.2. 자유무역
자유무역은 예나 지금이나 민주당의 오랜 정책이었다. 이때 미국의 무역은 철저한 보호무역이었으며 관세가 40%에 달했다. 1883년, 아서 대통령은 너무 높은 관세를 인하하고자 했으나 공화당 내 반대파의 반발로 무산되었다(1883년 잡종관세법). 그러나 윌슨은 과감하게 40%에 달하는 관세를 26%로 인하했는데, 이는 미국 농민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를 언더우드 관세법이라고 한다. 이는 1857년 이후 처음으로 관세가 인하된 것이라고 한다.자유무역 정책으로 부족해진 세수는 수정헌법 16조를 통한 소득세의 신설로 해결되었다. 윌슨은 최고 소득세율을 15%로 끌어올리면서 세수를 충당하고 부를 재분배하였다.
3.3. 독점기업 규제
윌슨의 "뉴 프리덤"은 모든 사람이 정부의 최소한의 개입으로 성공할 수 있는 그의 경제적 이상을 담은 정책이었다. 그는 영세 기업을 위한 경제적 자유를 믿었다. 그가 생각한 영세 기업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위협은 바로 대기업의 독점이었다. 윌슨과 그의 법무장관 브랜디스는 정부가 개개인이 경쟁할 수 있도록 개입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윌슨은 독점이 아닌 경쟁이 미국에 있는 모든 노동자, 농민, 기업인에게 이익을 주고,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게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이를 위해 해야하는 일은 경쟁을 방해하는 독점을 차단하고, 규제하고, 연방 거래 위원회(FTC)를 통해 영세 기업인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워런, "Prosperity, Peace and Respect: How Presidents Manage the People'S Agenda" (2011)
1890년 존 셔먼이 제정한 셔먼 반독점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나 루스벨트가 처음으로 독점 기업을 해체하며 진가를 발휘했다. 그럼에도 법에는 엉성한 부분이 많았고, 윌슨은 대통령의 정책과 상관 없이 안정적으로 독점 기업을 해체하고 영세 기업을 보호할 수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며 1912년 대선에서 독점법을 개정하겠다고 선언했다.엘리자베스 워런, "Prosperity, Peace and Respect: How Presidents Manage the People'S Agenda" (2011)
1914년, 클레이튼 반독점법이 통과되고, 동년에 독점 기업을 감시, 규제하는 연방거래위원회(FTC)가 설치되면서 윌슨의 독점기업 규제법이 결실을 맺게 된다. 이 법은 셔먼 반독점법의 기능을 강화하고 더 체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의 집행에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하면서 기업가들의 이익도 충분히 보장하였다. 또 반독점법을 동원해 노동조합을 탄압하던 뿌리깊은 꼼수를 방지하기 위해 노동자 및 농민 조합에는 반독점법을 적용할 수 없도록 하였다.
3.4. 노동권 개선
윌슨은 본래 노동권 개선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영향으로 재임 기간 동안 계속 노동권을 개선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대표적으로 아동노동을 규제한 키팅-오언 아동노동법이 윌슨 행정부 때 통과되었으며, 러들로 학살 등 노동쟁의가 계속되자 철도노동자에 국한한 것이긴 하지만 이들에게 하루당 8시간 노동, 주당 40시간 노동을 강제한 애덤슨법을 통과시켰다. 이보다 앞선 1914년에는 라폴레트-피터스 법으로 D.C. 지구 내 공무원에게 8시간 노동을 강제하였다.상해 노동자에 대한 권리도 보장되어, 1914년 우체국 직원을 상대로 상해보험이 도입되었으며 1916년 컨-맥길커디 법으로 노동을 하다 다친 근로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연방 직원들을 위한 의료보험 서비스도 도입되었다. 한편, 군인과 관련해서는 전사한 해군 병사의 유족들에게 6개월간 추가적인 연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윌슨의 대통령 취임부터 1922년 전국적으로 아동노동이 금지될 때까지 아동노동이 50% 가까이 감소하였다고 한다.
3.5. 농민 권리 개선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평생 대변하고자 한 농민의 권리도 크게 개선되었다. 1916년 연방 농민대출법으로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싼 이자에 돈을 대출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농민에 대한 평생교육도 진행되었고 윌슨의 임기 도중 3번이나 이와 관련된 법이 통과되었다.3.6. 이 외의 정책
1916년 연방 고속도로 건설법을 제정했고 이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 주간 고속도로 시스템으로 확대 계승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환경보호 정책을 계승해,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윌슨은 개인적으로 여성 참정권에 반대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생각을 뒤집었으며, 여성 참정권을 옹호하고 그의 임기 이후 비준된 수정헌법 제19조(여성의 참정 권리 보장)가 의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하였다.
루스벨트와 마찬가지로 상원 의원 직선제를 지지했으며, 그의 임기 내에 수정헌법 제17조가 비준되어 1914년 중간선거 때부터 상원의원을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주의회에서 상원의원을 선출했다. 윌슨의 정책은 아니었지만, 그의 임기 때 상원 원내대표, 원내총무 등 각종 원내 조직이 정비되어 현재와 같은 의회 조직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편 금주법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보였고 볼스테드 법이라 불리는 공화당의 금주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1918년 중간선거에서 압승한 공화당 앞에 윌슨의 거부권은 무력했으며, 공화당은 압도적 다수로 윌슨의 거부권을 취소하고 미국 전역에서 주류 판매 및 유통을 금지시키는 수정헌법 제18조를 통과시켰다.
4. 뉴 내셔널리즘과의 차이
뉴 프리덤이라는 용어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세운 뉴 내셔널리즘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나온 용어였고 뉴 내셔널리즘과 뉴 프리덤은 큰 차이가 있었다. 내셔널리즘과 프리덤이라는 용어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 뉴 내셔널리즘은 가부장적 보수주의 내지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복지국가를 지향했다면, 뉴 프리덤은 상대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루스벨트는 아동노동 금지, 8시간 노동제 등의 노동권 향상 어젠다를 내세웠고, 반대로 뉴 프리덤은 중앙은행의 설치, 독점법 개혁 등의 경제 개혁 어젠다를 내세웠다.비록 루스벨트 대통령이 낙선하면서 뉴 내셔널리즘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우드로 윌슨은 뉴 내셔널리즘의 정책도 일부 수용해 자신의 임기 내에 상당수 현실화시켰다. 대표적으로 윌슨 대통령은 1916년 아동노동을 크게 규제시켰으며, 애덤슨법으로 8시간 노동제의 기틀을 닦았다. 반면 루스벨트의 낙선으로 공화당 내 진보파가 퇴조하자 공화당은 윌슨의 여러 진보적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1] 이런 이유로 윌슨 대통령의 당선과 루스벨트의 낙선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각각의 진보 / 보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게되는 중대한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5. 비판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윌슨은 남북전쟁 이후 남부주의 산물이어서 그런지, 다른 면에서는 그토록 진취적인 사람이 흑백 문제에 있어서는 그토록 놀라운 정신상태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럽에 맴도는 전운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흑인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케네스 데이비스, "미국에 대해 알아야하는 모든 것: 미국사" (2004)
이렇듯 과감한 진보주의적 정책을 추진한 윌슨이었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그의 인종주의적 정책이 발굴되어 비판받는다. 그는 흑인들이 공직을 얻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직장 내 분리를 지지하였다. 그의 재무장관 윌리엄 깁스 매커두는 이러한 분리가 "경제적 효율을 위한 당연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윌슨이 은밀한 KKK단 지지자였다는 주장도 있다.[2]케네스 데이비스, "미국에 대해 알아야하는 모든 것: 미국사" (2004)
이는 다소 과장된 면이 있으며, 1912년 대선에서 NAACP와 W. E. B. 두보이스와 같은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들이 공화당 태프트 대통령의 반동적 인종주의에 반발해 윌슨을 지지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많은 역사가들은 윌슨이 인종주의를 부추겨 흑인 민권을 퇴보시켰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윌슨은 재임 2기 도중 국가 안보를 이유로 유진 V. 데브스를 포함한 사회주의자, 반전운동가를 탄압하였으며 그들을 구속시키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윌슨 대통령의 임기 후반 좌익 탄압은 A. 미첼 팔머 법무장관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러한 팔머의 위법적인 탄압은 "팔머 습격"이라고 불린다. 현대의 좌파 사학자 일부는 이것이 그의 개인주의 신념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기도 한다.
일부 사학자들에게는 재임 기간 도중 자신의 견해를 자주 바꾼 것도 비판받는다.[3]
6. 여담
- 여러모로 현대 진보주의의 기틀을 닦은 정책이라 할만하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인종주의적 견해만이 부각되고 진보적 대내 정책이 묻히는 주객전도에 가까운 평가가 많아지고 있다. 실제로 젊은 층의 비율이 높은 미국의 역사 관련 커뮤니티일수록 윌슨에 대한 평가는 매우 나쁜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윌슨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반독점으로 유명하고,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로 잘 알려져있다보니 윌슨의 진보적 정책이 부각되지 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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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8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하자, 공화당은 윌슨의 여러 진보 정책을 취소했고 1920년 하딩 대통령으로의 정권교체와 함께 보수적인 정책을 다수 추진하였다.[2] 백악관에서 영화 "국가의 탄생"을 관람하고 극찬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이는 거짓이다. 영화를 본 것은 맞지만 그냥 저냥한 반응만 보였다고.[3]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아동노동법, 여성참정권 등에 반대했으나 대통령으로 재직하며 이를 추진시켰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주의를 자처했지만 정작 재임 2기에는 국제연맹 가입과 1차대전 참전 같은 국제주의적 정책을 내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