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4 22:09:34

개인주의

1. 개관2. 전체주의에 반대되는 가치관으로서
2.1. 개요2.2. 개인주의와 다른 관점의 관계2.3. 개인주의의 이기성
2.3.1. 이기주의로 변질된 개인주의2.3.2. 반론
2.4. 공동체주의 및 사회주의와 양립할 가능성
2.4.1. 가능하다는 의견2.4.2. 불가능하다는 의견
2.5. 서양은 개인주의이고 동양은 공동체주의인가?2.6. 개인주의자는 매정하다?2.7. 개인주의 사회는 부조리 혹은 집단괴롭힘 등이 없는가?2.8. 대한민국에서의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2.9. 갈등에 대한 해결 방안2.10. 관련 사상
3. 개인 권리 이론
3.1. 개요3.2. '가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3.3. 관련 인물3.4. 갈등에 대한 해결방안

1. 개관

個人主義 / Individualism

2. 전체주의에 반대되는 가치관으로서

2.1. 개요

전체주의 사상에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이 당연히 희생되는 것에 반발하여 생겨난 사상으로, 어떻게 보면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피를 흘려가며 배운 가치이다.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의 질서와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좋다고 믿어온 파시즘의 결말을 목격하고 유럽인들은 더 이상 국가의 선전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국가와 같은 거대한 집단을 견제할 수 있는 시민 개개인의 정치적 권리와 자발적인 감시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68운동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반전사상, 표현의 자유, 소수자 보호 같은 가치는 개인주의를 토대로 자라난 것이다. 사실 맹아적인 개인주의는 근대 유럽에서 항상 있어 왔다. 개인을 강조한 수 많은 근대 사상을 생각해보라.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 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공동체주의에 비해 개인의 자유를 더 인정하기 때문에 개인주의 사회의 사람들은 더 심리적 자유를 느끼기 쉽다. 그래서 공동체주의에 비해 더 행복한 사람이 많다.[1]

2.2. 개인주의와 다른 관점의 관계

개인주의는 자유주의에 철학적 뿌리를 두고 있다. 무슨 소리냐면, 자유주의는 정부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해선 안 된다는 사상이고, 이런 사상이 커지면서, "내 권리는 내가 지킨다."라는 개인주의로 연결된다.

또, 개인주의는 이미 국가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사상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와는 어울릴 수 없지만, 자유주의는 국가가 일정선을 지키는 방향으로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2]와도 어울릴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주의가 경제적으로 극대화된 것이다.

개인주의는 자유주의와 피를 나눈 친형제 관계라면, 민주주의와는 친구 또는 부부 관계다.

2.3. 개인주의의 이기성

2.3.1. 이기주의로 변질된 개인주의

가장 전형적인 비판은 이기주의로 변질되기 쉽다는 것과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 개인주의에서 나왔다는 비판이다.

자유주의가 개인주의에 기초하는 점 때문에,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자유주의, 개인주의에 기초하는 점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에게 까이기도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이 개인주의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주요 논지는 개인의 파편화로 인해 사회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지나치게 되는 경우 사회의 공동 목적이 모호해지고, 공동선 추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공의 이익을 저해하는 경우에 개인주의는 그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

예를 들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경우 도덕적 논쟁이 해결 불가능하게 된 원인으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지목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자아는 자신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독립적인 이성적 판단자로 자신을 이해한다. 현대 자아가 중립적이며 특정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주장은 도덕적 논의를 어렵게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서, 개인주의의 팽배로 인해 어떤 일이 도덕적인지 평가할 수있는 보편적인 윤리적 토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2.3.2. 반론

개인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벌이나 개미와 같은 군체의식을 갖게 되어 순수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면, 또 그렇게 한다면 위와 같은 문제는 사라질 수 있겠지만 그러기를 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라고 되묻는다. 인간의 자유와 천부인권을 빼앗아버리지 않는 이상 위와 같은 문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한 조직이나 단체 결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개인주의 하에서도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은 주로 자본주의와 연관이 있다. 당장 개인주의적인 원칙에 입각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대두한 역사적 배경이라고 볼 수 있는 프랑스 대혁명 역시 배후에 자본가가 있었고, 자본주의 사회로 귀결되며 최종적으로 자본가 계급이 가장 이득을 보았다는 것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결국 개인주의 없는 자본주의는 상정하기 어려우며,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들 중 대부분은 사실상 자본주의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이다. 따라서 비판과 수정의 대상은 자본주의 체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맥킨타이어가 제시한 비판은 사실상 다른 체제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민족이나 국가 같은 공동체 중심의 이념이 중심이 되었을 때도 상당히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당장 세계대전 역시 배후에 자본이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민족의 문제였다. 따라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이긴 하지만, 공동체가 우선시될 때 발생하는 도덕적 문제가 만만치 않음을 감안한다면 현실적으로 수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3]

그리고 이기주의 부분도, 집단주의를 강조했던 국가들에서 심각한 집단이기주의를 보여준다. 다만 그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마을이나 사회 같은 집단이라는 것뿐이다. 거기에 이런 집단이기주의는 개인의 이기주의보다 영향력이 강해서 개인의 이기주의의 폐해는 심해봤자 법에 의해 억제되어 사회의 양극화 정도로 나타나지만 집단 이기주의는 심해진다면 조직적 행동에 의해 국가 전복 시도는 다반사요, 대학살이 펼쳐질 위험이 있다.[4]

2.4. 공동체주의 및 사회주의와 양립할 가능성

2.4.1. 가능하다는 의견

위와 같은 문제들 때문에 명목상 개인주의 지수가 높은 나라들도 실제로는 순수한 개인주의 사회를 추구하기보다는 이러한 반대론자들[5]의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의 개인주의자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요시하므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위협받는 경우에는 투쟁하기도 하지만,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거나 묵인하는 평등주의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현대의 수정된 개인주의는 공동체주의와 대립하지 않으며 사회주의와도 양립할 수 있다. 즉, 적어도 현대에 흔히 언급되는 개인주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도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누릴 수 있고 개인의 완성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의 개인주의는 공동체주의와 무조건 대립하는 사상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중 어느 것을 우선시하는지만 다를 뿐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수정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맹목적인 희생과 체제의 극단성 지속을 강요하는 집단주의·전체주의를 혐오하지,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인 헌신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모두 개인주의 지수가 높은 편이다.그 결과 다들 미국으로 이민을 하기 시작해서, 노르웨이계 미국인은 4,642,526 명으로 본토 인구보다 많다.다만 이러한 의미의 수정 개인주의를 과연 엄밀한 의미의 개인주의로 볼 수 있는지는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으며, 아직까지도 공화주의와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가 훈훈한 관계라고 하기에는 여러 난점들이 있다.[6] 이러한 면에서는, 현대 국가는 고전적 개인주의 또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고전적 공화주의라는 두 개의 기둥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2.4.2. 불가능하다는 의견

하지만 위의 문단은 지나치게 정치세력적인 근거로 개인주의를 해석한 것이기도 하다. 관점 설명의 한계이기도 하다. 아래의 자연법적인 권리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는 사회주의와 종교, 공동체주의자들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집단의 권위를 무리하게 개인주의와 결합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영국이 2류 강대국으로 떨어지고, 영국인들이 더 많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영국인들이 경제생활에 더 많은 안보위협을 받게 된 이유를 갑자기 수정 개인주의라는 멋진 이름에 포장한 것에 가깝다. 개인은 공동체에서 벗어나면 성립할 수 없다고 하는데, 저 말을 하는 경우는 백이면 백 타인의 부유한 재산을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강제로 사용하겠다고 선포할 때만 쓰는 말이다.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 개인주의 의식이 높으니 양립 가능하다는 의견은 따져볼 가치도 없다. 사민주의의 나라들에서는 40%를 넘는 소득세와 기타 세금과 사민주의를 피해 호주와 영국, 미국 등으로 이민하는 인구가 매우 많은 반면, 그 반대는 무척 적다. 당장 노르웨이계 미국인만 하더라도 464만 명인데, 노르웨이 본토 인구보다 훨씬 많은 게 현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개인주의자들의 생산성을 착취하고 정체성을 공동체와 양립시키려 하지만, 결국 이들은 지구 곳곳에 개인주의의 자유가 남은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개인 주권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일.

이런 사회에서는 수 많은 공동체들이 한정된 부유한 사람들의 재산을 어떻게든 강제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여, 공동체끼리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고 규제한다. 그러나 과거와 다르게 되려 개인이 공동체를 선택 가능한 게 현대의 모습이디. 권리 이론으로서 존재하는 개인주의와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부분.

2.5. 서양은 개인주의이고 동양은 공동체주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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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별 개인주의 지수, 색이 짙을수록 지수가 높다.)

흔히 동양권 시민의 입장에서 서구인들은 모두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도 문화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발전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서구권에서도 그리스나 포르투갈 및 일부 남유럽 국가나 동유럽, 중남미는 공동체주의 성향이 더 짙다. 반면에 서구 중에서도 영미권(앵글로색슨 문화권)은 개인주의 지수가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7] 보통 농업 사회일수록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 일본의 개인주의 성향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것은 가장 빠르게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같은 농업사회라도 밀, 보리, 옥수수 농사가 주류인 나라는 벼농사가 주류인 나라보다 개인주의로 이행하기 쉽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실제로 인도,[8] 일본을 제외하면 위의 개인주의 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모두 다 맥류나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이다. 또한 종교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개인주의 지수가 꼴찌로 나온 인도네시아는 다들 알다시피 1990년대 후반까지도 독재정권이 집권했고 극단적으로 집단주의적인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국가주의와 종교적 배타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극단적인 집단주의 사회가 정착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유럽의 개인주의에 대한 대체적인 인식을 비교하자면 유럽인들은 시민 사회 보호를 우선시하며 이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권리 행사와 정부의 개입을 선호한다. 물론 모든 유럽인들이 좌파라는 건 아니고 단지 우선 순위가 다를 뿐이다. 반면 미국인들은 국가의 개입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개인의 가능성을 중시한다.

두 사회의 차이는 각각 일장일단이 있다. 우선 유럽은 사회 안정을 위한 분배에 신경을 쓴다. 서민들의 삶의 수준은 더 좋지만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훼손하는 단점이 있다. 영국병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미국은 사회가 역동적이고 팽창적이지만 사회 통합에서 문제점이 있고[9]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가장 고스란히 보여주는 나라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정책 시스템[10]에 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매우 당연하지만 미국에서는 주민등록상의 이유로 신분증 만들 때 지문 인감 등록하는 것도 국가가 개인의 가장 중요한 생체 정보인 지문을 무슨 권리로, 왜 수집하느냐 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CSI를 보면 알지만 지문을 수집하는 건 전과자에 한정하기 때문. 이건 일본도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기본적인 보호에 관한 사항조차 '나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라는 반론이 많은 공감을 얻기도 하는데, 그런 주장이 기업가 정신이나 개척 정신, 아메리칸 드림과 같이 미국을 성장시킨 이념과 뿌리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면 함부로 평가하기 어려워진다.

서양인들의 개인주의적인 사고는 언제나 속도와 효율을 위해 다른 가치를 희생시키며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이질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는 시민의 권리를 우선시하여 수 많은 희생을 통해서 절충하고 발전한 것이므로 한국도 서구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풍조로 바뀌고 있는 현실에서 쉽게 개인주의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한국인이 흔히 서양이라 부르는 유럽에서 주로 지었던 밀 농사와 아시아권의 쌀 농사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차이를 낳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사이언스 지의 발표에 따르면 쌀 농사는 농경지에 물을 대주는 관개 시설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대규모의 토목 공사가 이루어지고 이렇게 얻은 수자원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협조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관개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공동의 노동력이 필요하고, 관개시설 주변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공동체주의의 문화로 발전했다고 한다. 반면 밀은 맨땅에서 자라는 작물로 그런 관개 시설이 필요 없으므로 공동체주의의 형성이 더뎠고 개인주의적인 생활 양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11]

물론 공동체주의는 서구에서도 주류였으며, 단지 동양에 비하면 개인주의가 반세기 일찍 보급되었을 뿐이라는 관점도 있다.

이 곳에서 서구에 대한 서술은 영미권 외의 유럽의 기준에 쓰인 것에 가까우니 주의

서양은 원래 개인주의, 동양은 공동체주의[12]라고 많이 오해를 한다.[13]

그러나 20세기 68운동 전에는 서구에서도 공동체주의가 주류였고, 아무리 올려 잡아도 종교개혁 쯤은 되어야 일부 지역 한정으로 개인주의가 맹아 수준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를 보더라도 노동은 ‘사적 영역’에 국한된 활동이었다. 그리스의 자유 시민은 자신이 해야 할 노동을 노예에게 시켜 대신 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 시민들은 생물학적 종속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대신 이들은 남는 시간에 아고라에서 폴리스 내의 정치적 현안을 논의했다. 그리스 시민들은 ‘공적 영역’에서 ‘행위의 자유’를 펼치는 것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웅변술이 발전한 것은 이 때문이었고, 시민 공동체에 공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개별 생명의 무상성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14] 여겨지던 게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였다. 더군다나 고대 그리스는 자연권 개념이 없었다. 즉 개인의 권리 역시도, 천부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에 기반한 권리였다. 이는 공동체주의적 권리관에 가깝다.

고대 로마 공화국의 경우로 넘어가더라도, 시민들은 공공의 재산(res publica), 곧 공화국(republica)을 기반으로 개인의 권리를 이해했다. 로마인들의 영웅이란, 개인의 굴욕을 견디고 공동체에 오롯이 헌신하여, 마침내 그 공동체를 영광스럽게 한 아이네아스임을 생각해보자.[15] 또한 개인의 영광을 위해 달려든 아킬레우스에 대한 평가를 낮추고,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미친 듯이 구른 헥토르에게 열광한 게 로마인들이었다.[16] 물론 그리스인들 역시도 아킬레우스의 오만을 경계했지만, 로마인들은 개인의 영광을 위해 달려든 행동 자체에 "영문을 모르겠어."라고 반응했다.

그나마 철학사적 관점에서 볼 경우 개인주의로 볼 건덕지가 있는 것은 스토아 학파에피쿠로스 학파 정도이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경우 공공선을 강조했고, 공공선은 개인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고 여겼다. "전체에 이로운 것이라면 부분에게도 해롭지 않다. 전체는 그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만족할 것이다."라는 <명상록>의 구절이 여기서 기인한다. 이는 전형적인 공동체주의적 공공선 개념이다. 또한 에피쿠로스 학파가 국가라는 기관도 결국 개인의 행복을 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후일 개인주의자들에게 힌트가 되었을 순 있지만, 이 것을 개인주의로 확대 해석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왜냐 하면 애초에 공동체주의에서도 공동체를 그렇게 이해했으니까.[17]

또한 로마 공화국의 시민들에게도, 후일의 중세 이탈리아의 여러 공화국들의 시민들에게도, 자유란 '공동체의 간섭'이 부재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들은 개인이 개인에게 예속(隸屬)되는 것의 부재를 자유로 이해했으며, 이는 개인주의적 자유관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로마 시민들과 제노바 시민들, 베네치아의 시민들에게 '개인의 의지'에 예속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맞았지만, 공동체의 법에 복종하는 것은 자유의 침해가 아니었다. 설령 침해라고 하더라도 매우 부차적인 침해로 여겼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란, 오직 자유시민들로 이루어진 공화국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법의 간섭'은 자유의 침해가 아니라 자유의 친구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였다.[18] 제노바와 같은 공화국을 벗어나, 프랑스영국, 신성로마제국 등으로 넘어간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서구에 본격적 의미의 개인주의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개혁 이후이다. 하지만 정작 종교개혁의 시작인 마르틴 루터는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인데, 1520년에 이미 루터는 보편 사제직에 대한 자신의 학설을 토대로 개혁을 그리스도교 귀족과 제국 도시 당국의 수중에 맡겼다. 즉 인민이 아니라 귀족에게 보내는 호소였고, 1526년 슈파이어Speyer 제국 의회에서는 영주들이 개혁을 떠맡았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평화 회의에서는 영주가 믿는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가 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제국 법률이 되었다. 가톨릭을 선택할지 루터교를 선택할지는 인민 개개인이 아닌 영주들의 자유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짠하고 개인주의가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철학사적 의미에서 개인주의는 이후 칼뱅 등 후속 개신교인들에 의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혹 네덜란드의 독립을 개인주의와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네덜란드에서는 가톨릭 신자에게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남부지방 상당수가 다른 나라로 떨어져나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지역에 따라서 가톨릭에 관용적인 지역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관용 차원이였지 공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가톨릭뿐 아니라 알미니우스파, 루터파 등의 다른 개신교파들도 자유를 누리지 못했으며 개혁교회조차 국왕의 눈 밖에 나면 바로 탄압당하는 일이 많았다.[19]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자유가 네덜란드 헌법에 명시된 건 1848년이 되어서고, 가톨릭이 금지에서 풀린 건 1853년 부터이다. 그 이후로 20세기 초까지도 네덜란드 사회에서 '관용'이란 어디까지나 같은 종교 혹은 이념을 공유하는 공동체 간의 관용을 의미했으며[20] 개개인의 취향을 완전히 관용하게 된 것은 나머지 서유럽처럼 1970년대에 들어서였다.

프랑스 혁명 역시도 그 기반은 공화주의적 혁명이였고, 가톨릭 사제들에게 교황이 아닌 파리의 중앙정부에 순명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 강요에 응하지 않은 사제들은 '공동체의 적'으로 판명하고 탄압했으며, 같은 원리로 방데의 인민들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하여 학살했다. 그나마 개인주의적 경향이 국민 개개인에게 보급된 건 미국 정도.

결국 개인주의가 단순히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수준을 넘어, '서구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보급된 건 68운동 이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개인주의적 낌새를 보이는 사상들이야 철학사에서 있어왔지만, 그것이 '서구인'이라는 집단의 개인주의적 경향을 대변한다면, 같은 원리로 양주 등의 사례를 들어, 고대 중국인들에게도 개인주의가 보급되어 있었다는 이상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이분법적으로 서양은 개인주의, 동양은 공동체주의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인류 보편적으로 공동체주의가 두루두루 대세였다가 20세기 중반 서구에서 (특히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개인주의가 보급되었다고 보는 게 알맞을 것이다.

오늘날 영장류들 중에도 오랑우탄을 빼면 집단으로 살아가지 않는 종이 있던가? 인간도 선사시대 시절부터 초원에서 다른 개체들과 함께 집단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단 한 번도 홀로 살아간 적이 없다. 다만 진화심리학자들 중에는 온대기후에 속해 전염병이 많이 일어나는 지방에는 타인의 불필요한 행위를 감시하는 문화가 집단주의로 발달했다고도 한다. 불ㅡ편해하는 사람들

2.6. 개인주의자는 매정하다?

누군가가 개인주의자냐의 여부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말해져야 한다. 모든 개인주의자가 매정한 것은 아니며 개인주의자들 중에도 남을 우선시하는 인성을 갖춘 사람은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처럼 집단주의적[21]인 성격이 강한 나라에서 위험에 빠진 타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즉, 어떤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가지는 관심의 정도가 그 사회의 개인주의/집단주의적인 성격과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이러한 사회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그 사회가 얼마나 선진적인지, 사회 구성원의 시민 의식이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좌지우지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개인주의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마음껏 누리는 게 가능하다'라는 논리에서 '타인이 옆에서 사고를 당해 죽어가고 있어도 어차피 내가 일으킨 일이 아니므로 괜히 내가 책임져서 내 자유를 희생할 수는 없다'라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주의자 중에서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매정하고 냉정한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을 수는 있다. 물론 개인주의가 보급된 사회에서도 흔히 말하는 '의로운' 개인들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개인주의라는 사상 그 자체가 시민들에게 그 행동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 저런 행동은 개인주의냐를 떠나 인간 누구에게나 본능 차원에서 있는 무언가에서 비롯된 것이라 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공동체의 해체 및 상실 어쩌구 하는건 학계에서도 이미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다.
두 번째는 바우만(Zigmunt Bauman)의 ‘개인화된 사회’(Individualized Society)라는 개념이다.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다양한 지적들이 있지만, 개인과 사회를 연결해 주는 정치사회적 수단들이 상실 또는 해체되는 과정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바우만의 관찰은 단연 돋보인다. 비이성적 시장경쟁의 도덕적 무관심, 정치적‧사회적 자유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향유되는 경제적 자유, 사회 안전망의 붕괴, 경제에 대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오직 소수만이 향유하는 풍요가 개인화된 사회의 단면이다(Bauman 2001, 83-96). 특히 개개인의 상호관계에서의 변화와 정치적 영역의 축소를 연관시킨 부분이 인상적이다. 상대방을 즐거움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실용적 태도, 지속적인 관계보다 즉흥적인 만남을 선호하는 경향, 그리고 이러한 태도와 경향으로 형성되는 삶의 방식이 궁극적으로 정치의 몰락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다(Bauman 1999). 비록 서구사회에 국한된 관찰이라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한국 사회도 이러한 분절적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곽준혁 교수, <왜 그리고 어떤 공화주의인가?>
아렌트(Hannah Arendt)와 포콕(John Pocock)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그들은 인간이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이익과 취향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인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의 소유자로 규정함으로써 공적 영역의 황폐화를 초래했다. 그 결과 인간은 전체주의 체제의 야수적 지배도 경험했고, '경제인'(homo economicus)으로서 시장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서양의 민주주의적 공화국을 세운 것은 공적 영역에서 덕을 발휘한 '정치인'(homo civicus)이었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다.
이러한 주장은 20세기 후반 정치철학에서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mism)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논의되었다. 공동체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서 공동체의 공동선 혹은 공익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규정하듯이 '무연고적 존재'(unencumbered self)가 아니다. 따라서 오늘날 필요한 민주주의는 사익을 추구하는 원자화된 개인들이 공적인 일은 단순히 국가의 행정적·법적 제반 절차에 맡기는 '절차적'(procedural)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로서 시민들이 참여하고 심의해야 하는 참여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자유주의는 과연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좋은 삶을 살도록 요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공화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참여적 삶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좋은 삶이라고 주장한다. 즉 덕을 실천하는 삶이 좋은 삶이다. 공화국의 호출에 시(공)민으로 응하지 않는 인간들은 지배와 예속의 사슬에 얽매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니다.[22]
조승래, <공화국을 위하여>

개인주의를 변호하면서 가장 쉽게 저질러지는 오류는, 개인주의에 대한 공격이 일괄적으로 '집단주의'로 취급되면서, "그러면 집단주의는?"이라는 식으로 되물어버리고, 집단주의의 폐해를 논하면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덮어버리는 데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개인주의가 가져온(혹은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폐해를 논하는 것이 단지 집단주의자들만의 사악한(?) 음해는 아니다. 개인주의에 대해서 여러 논쟁들이 따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이 집단주의를 옹호한다고 잠정적으로 가정하는 것 만큼은 지양해야 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개인주의를 변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주의가 인간 본연의 이타심을 말살하는 사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주의 사회에서의 의로운 개인들은 '개인주의는 이타심을 요구한다'라는 설명에는 근거로 부적절하지만, '개인주의가 이타심을 말살하지는 않는다'라는 설명에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경제학적으로 본다면, '선행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자기만족'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효용함수를 지닌 개인주의자는,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타인을 도우려 할 것이다.

2.7. 개인주의 사회는 부조리 혹은 집단괴롭힘 등이 없는가?

이론적으로 공동체주의나 집단주의 자체를 배제한 순수한 개인주의 사회라면 성립하기 힘들다. 그러나 현실은 서구조차도 완벽한 개인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절대 아니며, 일부 공동체주의적, 집단주의적 요소들도 섞여 있다.

흔히 학교, 군대, 직장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는 큰 테두리 안에서 다른 하나의 작은 사회가 형성 되어서 그 안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개인적 인성과 개인의 방향성에 의해 집단적으로 발생한다.

어떤 집단을 이루는 개개인들 중 집단을 이끌어가는 무리에 의해 이기주의로 바뀌고 그 집단 안에서 발생하는 부조리 혹은 따돌림이 존재할 수도 있다.

흔히들 특정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나 특정 사건들을 보고 '외국도 저렇게 하는데 뭘' 라고 개인주의 오류라고 판단하기 쉬우나, 엄밀히 따지자면, 이것은 개인주의와 관계가 없다. 자신의 가치관과 권리를 존중받기 원하는 만큼 상대방의 가치관을 존중해야하는 개인주의를 벗어난 이기주의 혹은 집단주의, 전체주의 차원에서는 발생할 수 있다.

개개인이 개인주의를 추구할지라도, 개인주의자들이 모여 어떠한 집단을 이뤘을 때 발생시키려는 유대감이 변질되어 집단 이기주의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흔히 범하는 논리적 오류들로 "미국" 이나 서양권 국가를 예로 들어 개인주의를 비난하는데 미국이나 많은 서양권 국가들에서도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공존하며 민족주의를 외치는 경향이 강한 국가 일수록 개인주의와는 멀다는 점을 유의해주기 바란다.

특정 국가를 두고 개인주의다 아니다로 판단 할 수 없다. 개인주의는 말 그대로 개개인을 두고 판단해야한다.

2.8. 대한민국에서의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

한국에서는 개인주의 자체를 이기주의로 취급하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당장 인터넷만 검색해봐도 멋 모르고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하며 폄하하는 이런 잘못된 시각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특히 농경사회, 또는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변화하는 시기에 성장한 중장년층과 노년층에서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많이 보인다.[23] 이러한 시각이 형성된 원인으로는 20세기 초까지 존속했던 왕조 체제, 성리학적 세계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지배, 민족주의의 발호, 박정희의 민족국가 지상주의적 사고방식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서는 서구의 Individualism에 해당하는 정확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리처드 니스벳의 저서 생각의 지도에 따르면, 동양에는 서양에서 말하는 정확한 의미의 Individualism이 존재하지 않고, 이를 가장 가깝게 번역한 단어인 개인주의 역시 어쩔 수 없이 이기주의를 내포한다고 한다. 리처드 니스벳이 생각하는 본래의 서양적 Individualism이 이기주의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개념이라면, 대한민국 그리고 아시아의 개인주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개인주의가 내포하는 이기주의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Individualism 과는 다르다는 견해이다.

러시아 출신 한국학자 박노자박정희의 국가주의적 사고방식한겨레신문 기사, 제국주의에 대한 패배의식, 개인주의에 대한 비틀린 인식 등 때문에 개인주의가 부정적인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주장했다. 박노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제국주의에 대한 패배의식은 더 큰 문제를 몰고 왔다. 초기 개화파들 가운데 일부는 인권과 자유와 평등 등을 근대화의 지표로 받아들였지만, 이들의 관심은 곧바로 국가와 국민 같은 ‘집단’으로 기울었다. 제국의 힘에 대항하려면 국가의 힘을 키우고 국민을 훈육하는 ‘부국강병’의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의 썩은 정신을 뜯어고치지 않고는 독립도 자주도 없다는 이광수 류의 민족개조론, 그러니까 끝내는 광적인 친일로 빠져들 지적 사생아가 태어났다.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며 근대화 기수로 나섰던 박정희의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 여기에 닿아 있음은 물론이다."

박노자는 또한 좌파든 우파든 개인주의를 비정상적인 것처럼 몰고 왔다고도 지적했다. 박노자는 "우파든 좌파든 영향력 있는 주요 논객들은 개인주의를 비사회적이거나 반사회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가령, 초기 마르크스 주의자였던 박영희는 좌익적 잡지였던 <개벽>의 1924년 7월호에 쓴 글에서 개인주의를 극단적 이기주의, 반사회적 자기중심주의와 동일시했다. 그에게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간 <인형의 집>의 노라는 ‘패륜’의 대명사일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박노자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개인주의자로 윤치호를 지목했는데, "일상생활에서 개인주의를 존중했던 윤치호 같은 개화파 지식인들도 정치적 자유를 위한 싸움에는 무감각했고, 결국엔 매판 지식인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진정한 개인주의는 유행을 좇고 안일을 옹호하는 사이비 개인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여담으로 구 7차 교육과정까지의 국정 도덕 교과서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 취급하면서 열심히 디스하며 공동체주의(의 탈을 쓴 집단주의)와 민족주의, 유교 사상을 띄워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개인주의에 대한 현 세대의 부정적 인식도 물론 이러한 교육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현재의 도덕, 윤리과목 계통 교과서는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탈을 쓴 집단주의)를 대칭적으로 설명한다는 면에서 과거에 비해서는 이런 부분에서 조금이나마 나아진 편. 다만 개인주의(자유주의)는 그나마 고등교육이나 언론, 서적 등을 통해서 접할 기회라도 많은데, 공동체주의(공화주의)에 대한 진지한 담론은 오히려 한국에서 보기 힘들다는 게 아이러니. 단지 집단주의에 대한 강요만이 있을 뿐, 정작 정치적 담론으로 진지하게 논의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24] 다만 영미권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공화주의(공동체주의)가 많이 연구되고 있다.

다만, 6차 교육과정의 사회 교과서 같은 경우에는 개인을 중시하지만,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 것이라며 이기주의와 구별해서 서술하기도 했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이원복이 설명한 것과 매우 비슷한 관점이다. 그래서 6차 교육과정 교과서로 배운 세대는 이기주의와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2.9. 갈등에 대한 해결 방안

누군가를 바꾸거나, 오지랖,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것은 인간관계상 대립유발요인이다.[25] 그것이 옳은 것이건 옳지 않은 것이건, 다른 사람과의 충돌과 대립, 대결, 적대관계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 혹은 어떤 진리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강요와 오지랖이 사라진다면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할 일이 없다. 사람의 가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먼저 상대방을 설득하려 들거나,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것부터가 일종의 고집일 수 있다. 자신이 상대방의 입장, 가치관처럼 바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갈등과 대립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점에서 알아야 할 것은, 개인주의의 근간은 상대방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서로 인정한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서 '나도 남들과는 다른 개인이니 너도 누군가와는 다른 너만의 특징을 가진 개인이겠지.' 일단 개인주의는 나와 남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 상대방이 나와 다른 생각, 취향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굳이 누군가를 설득하려 들지도 않고 누군가를 바꾸려 들지도 않을 것이며, 오지랖도 줄어들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충돌과 대립은 당연히 줄어드는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에서의 '공동체'는 특정한 정체성, 기호, 성향을 통한 공통적 연대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너는 나와 같은 한국인이니까 공동체가 아니고, '너는 나와 같은 기호 혹은 성향을 갖고 있으니까 나와 그 부분만큼은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거야' 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자들은 '우리나라'라는 표현도 쓰기 싫어한다. 그 우리에 대한 정의는 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친했던 누군가가 국적을 바꿀 수도 있고, 자신이 국적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복합적이지만 이 대전제는 개인주의에서 말하는 공동체에 대해 항상 성립한다.

2.10. 관련 사상

3. 개인 권리 이론

3.1. 개요

“I swear, by my life and my love of it, that I will never live for the sake of another man, nor ask another man to live for mine.”

“내 삶에,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에 걸고 서약하노니 나는 결코 타인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 나를 위해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26]
움츠린 아틀라스 中, 저자 아인 랜드[27]

윤리·정치적 개념으로 개인주의는 개인들의 주권을, 말하자면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단위라는 원칙에서의 주당이다. 윤리·심리학적 개념으로는 사람의 지성의 주권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사람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인간의 생명을 인간의 가치 기준으로 보는 윤리 규범에는 개인주의가 암시되어 있고, 또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그런 것으로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68운동 등으로 인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최근 수백 년 동안 개인주의를 실천할 일괄된 방법에 대해 정의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된 개인주의는 모두 관점의 이론에서 서술했기에 상대성, 심지어 정치구도에 비추어 서술된 경향이 크다. 이와 다르게 아인 랜드객관주의철학파는 개인주의를 권리에 대한 이론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상대성에 비추어 설명된 개인주의는 권리적 측면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모순이 많은 채 설명된다. 권리로써의 개인주의와 관점으로써의 개인주의에서 큰 차이는, 개인주의를 모순이 없는 기본 권리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가장 차이가 큰 근거는 도덕과 윤리에 있어 개인 단위의 부산물인 이기심을 어떤 원리로 보냐는 것. 권리로 설명되는 개인주의는 이 부분을 크게 근거로 한다. 자세한 서적으로는 아인 랜드의 <<이기심의 미덕, Virtue of Selfishness>> 등이 있다

3.2. '가짜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

앞선 설명에서 비판 항목처럼, 개인주의는 흔히 다른 이들의 권리를 무시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니체 같은 철학자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 주장은 대부분 대중이나 집단을 향해 인용된다. 대중이나 집단을 유지하려는 이유이다. "집단 내에서, 자신이 희생당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득해야한다. 그래야 대중과 집단, 이 종속적인 틀을 지배하는 기득권이 깨지지 않는다.

그런 해석에 대한 반박은 명확하다. 개인주의가 윤리적 원칙으로 존속하는 합리적인 바탕에 대한 대답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인간 존재로 생존하는데 바로 필요한 '권리'"이다.

어느 사람도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범할 도덕적 권리를 절대로 주장하지 못한다. 다른 이의 침범 불가능한 권리를 인정 않는다면, 본인도 그런 권리를 박탈 당하는 것은 자동적이다. 이런 논리가 가능한 이유는 권리의 바탕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모순되는 것에 대해 도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개인주의자는 거래자로서 사람들을 다루지, 약탈자로서 사람들을 다루지 않는다. 개인주의자는 생산자로서 사람들을 다루지, 히틀러나 아틸라 같은 침략자로서 사람을 다루지 않는다.

집단과 대중의 역할을 강요하길 바라는 기득권들은 사람들이 마치 주인을 섬기는 노예의 사고처럼 잊길 바라는 것이 있다. 바로 거래자/약탈자, 생산자/침략자의 존재를 구분하는 힘이다.

여전히 개인주의는 변질된 공산주의자, 권위가 섞인 종교의 근본주의, 전체주의자에 의해 권리의 조건으로 희박하게 받아들여질수록 오독되고 잘못쓰이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극대화라는 뜻은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뭉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주의가 태동하기 이후부터 더욱 복잡하고 많은 공동체가 태어나고 있다.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뜻이 공동체주의가 아닌 만큼, 인간 권리와 행동의 단위를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보는 것이 개인주의임을 알 필요가 있다.

3.3. 관련 인물

3.4. 갈등에 대한 해결방안

"합리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해 관계의 충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는 욕망과 개인주의, 이 두 단어를 자주 부적절하게 서로 섞어 사용하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선 위에서 개인주의를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개인주의가 필연적으로 타인과 갈등을 일으키며, 충돌과 대립은 필연적이지만 최소화는 그 과제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권리라는 것이 타인과 갈등을 일으키며, 타인과 나의 같은 권리가 충돌하고 대립한다는 것은 권리라는 뜻 자체에서 성립되지 않는다.

대신 개인주의를 권리로 이해하는 자가 합리적이라면, 이해 관계의 충돌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이해 관계에는 4가지 고려사항이 있다. 1. 현실 2. 맥락 3. 책임 4. 노력이다. 개인과 타인의 인지에 의해 그려진 4가지 고려사항은 이해 관계 그 자체이며, 서로 다른 인지 기준으로 타협을 찾기 쉽다. 이해 관계라는 추상 명사는 가치와 욕망, 목표와 현실 등의 문제를 포함할 것이다. 그 추상적인 것은 도덕적으로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체로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이 합리이다. 타협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로 말할 수 있길, 본인이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 중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점에서 설명한 개인주의와 같이 이것이 타인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욕망이 인지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개인의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이해관계가 희생된다고 믿는 축이다. 그것은 사람(타인)의 가치와 이해관계에 대해 욕망으로 비춘 주관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다. 타인에겐 그렇지 않음에도, 본인의 욕망이 정당하다고 믿는 상태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권리로의 개인주의에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상태와 같다.

어떤 사람이 케이크를 먹는 즐거움과 간직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없다고 울부짖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사례는 이념화된 사회에선 특정 부류를 특별나게 더 위하는 곳이 아니라면 고려 사항에 제외하기가 쉽다.


[1] Diener, E., Diener, M., & Diener, C. (2009). Factors predicting the subjective well-being of nations. In Culture and well-being (pp. 43-70). Springer, Dordrecht.[2] 소위 사민주의라 하는 것.[3] 논리학에서 중요시하는 논리의 구성에만 따진다면 개인주의의 문제가 맞다. 다만 개인주의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고, 종교나 민족 혹은 국가 같은 특정한 주의가 대두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대부분의 사상, 이념 및 체제에 관한 맹목적인 도입과 문제점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가진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다. 현 시대에도 사람들이 신경을 못 쓰고 몰라서 그렇지 극단적 추구로 인한 갈등과 다툼의 세기 자체는 국지적 분쟁의 원인이 쉽게 될 만큼 격렬하다.[4] 물론 개인의 이기주의가 괜찮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게 문제가 없다면, 왜 20세기 중반부터 공동체의 붕괴와 양극화를 연결하는 학계 담론들이 나오겠는가. 더 잘 살기 위한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시궁창에 쳐박고 비웃는 행위가 실현되면서 정당성도 갖추고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그 건 인권과 세계 평화의 기본 논조인 자유와 인륜을 저버린 참극이요, 노예제의 부활과도 상통할 수 있을 만한 죄악이다. 또한 격차가 계속 벌어진다면, 결국 어느 날부터는 강제에 가까운 요구 또는 남에게 예속되어야만 하는 환경이 만들어져 진정한 공리까지 넘어서 사람들이 휘둘리기 시작하며,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공화주의 참고. 또한 개인도 결속하면 국가 전복 시도를 하는 게 가능하다. 아나키즘 분파 중 요상하게도 경제적 압박과 차별의 존재를 무시하는 부류는 자본을 바탕으로 강경책을 실행해 국가 전복과 세금 제도 붕괴를 논하기도 한다. 이기주의와 엮인다면 의로운 뜻 같은 것도 없는데 들고 일어나서 나라를 뒤엎고 괴뢰정부를 만드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5] 공동체주의자, 사회주의자, 종교인 등.[6] 당장 복지에 대한 관점에서도 서로 대립한다. 공화주의에서는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여 복지를 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에서는 부자들의 자발적 자선을 더 강조하는 편이다. 실제로 공화주의적 전통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유럽의 경우 자선보다는 세금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대로 자유주의적 전통이 많이 남아 있는 미국의 경우 자선을 더 강조한다.[7] 또한 종교적으로도 북미와 북유럽은 탈종교화와 세속화가 극도로 이루어진 사회이며,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지 않거나 되려 강해지는 추세를 보이는 국가들은 집단주의 성향 역시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8] 그러나 이 쪽은 쌀과 밀이 모두 주식인 문화, 쌀만 주식인 문화가 혼재해 있는 국가다.[9] 다만 이 것은 개인주의 때문이 아니라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정치·사회·문화·종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이다.[10] 대표적으로 의료보험, 총기규제 같은 것.[11] 금교영, “쌀농사는 집단주의, 밀농사는 개인주의 낳았다.”. 이코노믹 리뷰, 2014년 7월 4일 작성됨, 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9415.[12]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과거 전국시대에도 개인주의적 주장이 존재하긴 하였다. 양주 문서 참고. 참고로 성과 이름 표기 순서에도 서양은 개인을 중시해서 이름을 앞에 쓰고 동양은 집단을 중시해서 성을 앞에 쓴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일 뿐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서양 성씨는 자신의 소속을 나타나는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뿌리를 나타내는 성씨가 뒤로 간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개인을 중요시했다면 톰슨이나 잭슨 같은 성씨가 생겨서 계속 이어져 올 리가 없다.[13] 게다가 한국에서는 집단주의가 곧 공동체주의라고 오해되기 쉬워서 이 문제를 더욱 키운다. 공동체주의 항목을 참조하자.[14] '사회적 동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는 로마인들의 미묘한 번역 때문이다. '정치적 동물'이 본래 의미에 부합한다.[15] 아이네아스가 언제부터 로마의 건국자로 여겨졌는지는 논란이 있다. 다만 아무리 늦게 잡아도 공화정 말기에는 아이네아스가 로물루스와 함께 시조로 대접 받았다.[16] 물론 일리아스에서도 헥토르는 결코 쩌리가 아니라 주인공급 위치이지만, 로마인들은 여기서 더 더욱 평가를 높였다.[17] 읽어보면서 느끼겠지만, '고대 그리스에 개인주의적 씨앗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넘어, '개인주의가 있었다.'라는 이야기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권리'라는 개념을 순수하게 개인주의적 개념으로 오해하거나, 공동체주의와 집단주의를 혼동하는 데서 일어난다.[18] 다만 공화국 바깥에서는, 법의 간섭이 자유를 침해한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 법이란, 군주 개인의 의지가 지배하기 때문이다.[19]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된 바 있지만, 성경 해석이나 신앙고백서 개정 논란으로 인해 1834년에는 '분리'(afscheiding)운동이 촉발되었는데 이 분리파 개혁교회들도 초기에는 불법적으로 집회를 열었다 하여 꽤나 핍박을 받았었다.[20] 그래서 기둥화라 불리웠다. 개혁주의 개신교, 가톨릭, 우파 세속주의, 사회주의가 네덜란드란 나라를 지지하는 기둥에 비유되었기 때문이다.[21] 홉스테드의 문화 차원 이론으로 따지면 집단주의, 즉 Collectivism은 개인주의, Individualism과 대비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22] 즉 참여가 결여되어버린다면 결국 폭정에 의해서 시민들의 자유는 박살나버린다는 뜻이다. 물론 공화국 자체가 이미 폭정의 사슬로 묶여있을 때, 독재자의 호출에 오냐오냐 응하라는 의미는 아니다.[23] 일례로 국내 코미디 프로그램인 "코미디 빅 리그"에서 진행하는 코너 중 하나인 "개인주의"의 경우가 그렇다. 실제로 이 코너는 재미가 있냐 없냐와는 상관없이 제목 하나 때문에 당연히 욕을 듣고 또 욕을 들었다.[24] 엄밀한 의미의 공동체주의는 혼밥을 두려워하는 이상한 관습 따위가 아니라, 베네치아와 피렌체 등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아테네 등 고대 헬라스의 폴리스 시민들이 가졌던 시민적 덕성에 더 가깝다.[25] 나중에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다, 나중에 가서 깨달을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나중에 가서 상대방이 반드시 본인의 의도를 깨닫거나 회심한다는 근거도 희박하다.[26] 움츠린 아틀라스 소설의 인물 존 갈트가 한 말이다.[27] 급진 개인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그의 사상이 담긴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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