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6:58:29

막스 슈티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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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슈티르너
Max Stirner
파일:MaxStirner1.svg
본명 요한 카스파어 슈미트
Johann Caspar Schmidt
출생 1806년 10월 25일
바이에른 왕국 바이로이트
(現 독일 바이에른 자유주 바이로이트)
사망 1856년 6월 26일 (향년 49세)
독일 연방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직업 철학자
성향 청년 헤겔주의
모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학사)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에고이스트 아나키즘
3.1.1. 정신의 발전3.1.2. 유일자와 에고이스트3.1.3. 에고이스트 연합
4. 저술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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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ch hab' mein' Sach' auf Nichts gestellt. (I have set my cause on naught.[1])
나는 어떠한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
독일청년헤겔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로서 후대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정신분석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 영향을 끼친 인물. 슈티르너의 주요저서로는 『유일자와 그 소유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가 있으며, 이 책은 1845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다.

2. 생애

막스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 소유』의 저자로서 에고이스트 아나키즘(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을 주장했으며, 엄밀히는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데다 살아서는 거의 주목받지 않았고, 평생 채 500쪽도 되지 않는 분량의 짧은 글만을 남긴 사람이지만,[2]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미하일 바쿠닌 생전, 혹은 이 셋의 등장 이전의 헤겔 좌파독일 관념론의 경향성을 설명하는 문헌에서 종종 언급되고는 한다.[3][4] 슈티르너는 당대 젊은 헤겔좌파 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자유인의 일원이었으며,[5] 헤겔적 변증법의 영향을 받았다.

극단적인 관념론자였던 슈티르너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모든 것을 (자아)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인 유령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특정한 권리라는 것은 사람이 어떠한 신념, 특히 국가사회적 규범에 복종함으로서 주어지는 것이기에 자유라는 명목으로 도덕을 강제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혁명주의에 대하여 모든 형태의 권위적 제도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과 더불어 순수히 지배로부터 탈피하려는 움직임인 반체제 반란[6]을 옹호하고 새로운 약속을 만드는 과정인 혁명을 거부했다. 슈티르너는 사람이 도덕을 극복하고 구체제의 제약 없이 자신의 욕구에 충실해지며, 법이라는 강압으로 규정된 소유권의 벽을 허물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7]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각종 체제에 대한 거부를 꿈꾼 에고이즘적 아나키즘, 슈티르너주의미하일 바쿠닌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무정부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프리드리히 니체도 슈티르너의 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8][9] 대표적으로 들뢰즈의 니체 해석이 그러하다. 그러나 니체의 출판물, 논문 또는 서신 어디에도 슈티르너에 대한 언급이 존재하지 않기[10] 때문에 니체가 실제로 그것을 읽었다는 근거는 없다.[11]

3. 사상

3.1. 에고이스트 아나키즘

국가는 노예적 노동으로 유지된다. 노동이 해방된다면, 국가는 소멸할 것이다.
The State rests on the — slavery of labor. If labor becomes free. the State is lost.
『유일자와 그 소유』 中
"국가는 누구든지 자기의지를 가지지 말것을 강요한다. 만약 한 인간이 그것을 가졌다면 국가는 그를 배제하고 폐쇄하고 추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그것을 가진다면 그때는 그들이 국가를 배제할 것이다. 자기의지와 국가는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적대관계에 있는 힘이다. 양자간에 영원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3.1.1. 정신의 발전

인간은 '자기의지'로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나, 탄생하는 순간 '자기의지'로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져야하는 피투적 숙명에 놓이게 된다. 모든것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는 자기자신의 고유성과 타자와의 충돌을 경험하며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유지해야 하는 인정투쟁이 불가피한 것이다. 최초의 인간은 물질과 자연의 힘 앞에 강요를 당한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 자신의 결정과 용기로 이내 강요를 극복하며, 자신을 강요해 왔던 대상들이 자신의 용기와 의지보다 약하다는 실체를 깨닫고서는 그것들을 더이상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내 인간은 정신을 발견하며 관념의 동물이 된다. 인간은 새로이 발견한 정신의 힘으로 세상을 극복하려 한다. 그는 사상이란 이름의 유령을 만든다. 그 사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 조국, 민족, 그리고 '인간일반' 같은 것들이다. 동시에 그것들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며, 또한 어디에서나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같은 것들이다. 어째서인가? '국가와 신' 같은 것들은 그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선 관념의 '동물'인 인간의 '의지'가 필요하다. 사상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한 정당성을 보유하기 위해 관념을 '천상의 것'으로 드높였고, 반대로 '대지의 것'은 경멸할만한 것으로 매도 되었다. 인간 자신의 의지 마저도. 그리고 이내 인간은 그 신성한 사상들을 의심하게 되며, 사상에 지배당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문제삼는다. 그는 사상들의 배후에서 개인의 의지를 본다. 따라서 그는 사상을 숭배의 대상이 아닌, 관념의 동물인 인간의 창조물로서 여기게 되며 자신의 본래 힘을 깨닫게 된다. 그는 사상들을 휘어잡아 모든 것을 자기존재와 연결시키는 '에고이스트'로서의 개인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사상들은 육체화 되어 더이상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며, 되려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는 신성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유령들은 본디 나의 힘이다. 나는 나의 힘의 소유자이며, 나는 그러한 힘을 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나 자신을 위하여 철저히 '에고이스트'적 이유로 사용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유령은 스스로 힘을 얻어 반대로 창조자를 지배하게 되었다. 개인이 유령에게 휘둘리는 것은 '자기소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자기소외로 부터의 탈피를 위해선, 우선 모든 사상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창조한 에고이스트로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자각해야한다. 슈티르너는 그의 저서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첫번째 장에서, 개개인 본래의 모습인 '에고이스트적 인간' 대한 자각을 다음과 같이 요구 한다.
All Things Are Nothing To Me(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무이다.)
"대체 나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선이란 이유, 그리곤 신, 인류, 진리, 자유, 인간성, 정의, 그 다음으로 나의 국민, 나의 군주, 나의 조국이라는 것, 끝으로 정신과 그 밖의 다른 무수한 것들이 모두 나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오직 '나'의 것만이 결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라, 자신만을 생각하는 에고이스트여!"[12]

3.1.2. 유일자와 에고이스트

슈티르너 사상의 사실상의 핵심요소. 슈티르너의 사상을 일반적으로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즘'이라고 부른다. 에고이즘은 이기주의 혹은 자아주의로 번역된다. 여기에는 주의 해야할 점이 있는데, 슈티르너가 말하는 에고이즘이란 독자를 향한 요구가 아니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에고이스트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이 에고이스트임을 자각하는 자발적 에고이스트와 그렇지 못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로 나뉜다.
"그대가 신의 계명과 그 밖의 명령에 그토록 귀 기울이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대는 아마도 오직 신만을 위한 친절에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그대는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주체이고, 각자는 자신에게 '나'만이 모든 것이고, '나'는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동한다고 솔직히 털어 놓아야 한다. 만일 신과 명령들은 오직 그대에게 해를 끼치며, 그대를 파국으로 이끄는 것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당신은 마치 기독교인이 아폴로나 미네르바 또는 이교도의 도덕을 비난하여 예수나 성모, 기독교의 도덕으로 대치시킨 것처럼 그것들을 폐지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만일 당신이 종교를 가지고 신을 숭배하여 내면의 안식을 얻는다면, 그대 자신의 위해 그렇게 행동 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당신이 재물을 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대 자신의 안위 때문이 아닌가? 만일 당신이 재물보다 금욕을 택한다면, 그것은 그대 자신의 내면의 안위 때문이 아닌가? 혹은 그대가 독재자의 탄압이 두려워 침묵하기를 선택 했다면, 그것은 그대 자신의 안위 때문이 아닌가? 혹은 그대가 독재자의 아래에서 안락함을 택했다면, 그 또한 그대 자신의 안위 때문이 아닌가? 혹은 그대가 국가나, 민족을 위해 행동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이 가져다 줄지도 모르는 힘과 풍요 때문이 아닌가? 그대가 신과 국가, 민족, 그리고 '돈'과 같은 것을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대는 에고이스트이고, 그대가 그러한 사실을 자각한다면, '자발적 에고이스트'로서 사상에 매몰되지 않는 자기 자신의 소유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는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는 그러한 사상들이 본래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인지 모른채 그것에 지배 당하여, 자기자신으로부터 소외 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상이 자신의 창조물임을 자각한 자발적 에고이스트에게는 신성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비자발적 에고이스트는 사상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숭배한다. 그러한 행위는 사상을 방대하게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 어째서일까? 사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인간만이 생각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허상이 힘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의지가 박탈당하여 허상에 의하여 사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상이 숭배될수록 인간은 약화된다. 결국 이러한 숭배는 현실과는 반대로 사상을 실체화하고 인간을 허상화 함으로서 인간을 극단적인 자기소외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여기서 멈춘것이 아니다. 그는 사상과 인간의 주객이 전도 되는 것만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13] 인간과 사상이 전도된 것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거기서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사상이 인간을 술어화 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허나 그는 인간이 사상화 되어 개인을 술어화 하는 문제에 대한 비판까지 나아간다.
"근대의 입구에 '신인'이 서 있다. 그 출구에는 '신인' 중에 신만이 사라져 버렸을까? 그리고 만일 '신인' 중에서 신만이 죽었다[14]면 신인도 실제로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이러한 물음을 고려하지 않고 오늘날 승리감에 도취되어 계몽의 사업인 신의 극복을 완성하여 과업이 완성된줄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15]이 스스로 유일신이[16] 되어 높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신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비록 신이 자리를 내주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위해서였다. '신인' 가운데 신만이 아닌 인간까지도 죽지 않는 한 과연 '신인' 이 죽었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가 신이라는 말과, 인간이라는 말을 합친 '신인' 이라는 표현을 한점에 주목하라. 어째서 였을까? 철학의 입장에서 볼때 신은 오랜시간 정신의 세계에서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이다. 그렇다면 신이 죽어버렸다면, 인간은 찬사를 불러야 하는 것을 그는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은 신이라는 사상을 만든 창조자이다.그렇기에 허상인 신이라는 말을 독단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실체인 인간을 붙여서 '신인'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나. 그러나 문제가 있는데, 나는 인간일까? 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냐? 그들이 말하는 인간이란, 우선 많은 수의 개인들에게서 포착 되는 '일반적인' 특징과 그들이 '인간적인' 이라고 부르는 미덕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되지 못한 개인의 고유성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결국 신성화된 인간이라는 유령 아래서 억압받을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새로운 독재가 되려 하고 있으나,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나요, 유일자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문제를 생각치도 않은 채 '인간적인' 이라는 미덕에 대하여 탐구하고, 과거의 사제들이 그러해왔던 것과 같이 동일할 정도로 개인을 지배하려는 새로운 율법을 만들고 있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새로운 신을 향한 숭배 사상이, 이전의 종교 보다도 방대하고 억압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그이유는 '인간' 이라는 사상이 다른 시대의 유령과는 다르게, 나의 무언가에 대하여 말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더욱이 개인이 가진 인간이라는 보편적 무엇에 대하여 말을 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서, 개인에 대한 지배를 더욱 심원적이고 더욱 은밀하고, 더욱 일상적인 영역까지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였다. 슈티르너가 볼때 이러한 학자들의 논의는 사제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정신의 지배를 더욱 일상적인 영역까지 확장하려는 무시무시한 시도를 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사제들보다 위험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때 당대의 학자들, 특히 청년 헤겔학파 철학자들은, 기독교의 억압을 극복하는 것이아니라, 그것의 모양을 변형한 채로 억압을 계승시킨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간교는 단지 기독교의 마지막 변형일 뿐이다. ...... 인간교는 나의 본질을 나에게서 분리해 그것을 나 위에 놓는다. ...... 인간교는 다른 종교가 그들의 신이나 우상을 찬양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인간'을 찬양한다. ...... 인간교는 내것을 다른 세계의 어떤 것으로 만든다. ...... 요컨데 ...... 인간교는 나를 인간 아래에 놓고, 그럼으로써 나에 대해 소명을 창조한다."

슈티르너는 인간[17]이라는 표현 자체조차도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인간이라는 표현이 개인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규정하는 사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슈티르너에 의하면 개개인은 인간이라는 말로서 표현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만인은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을 지낸 유일한 존재, 즉 '유일자'이다. 유일자는 유일하기 때문에 수로서 표현될 수 없으며, 타인으로 대체될 수 없다.때문에 어떠한 희생도 정당화 될 수 없다.다수의 이득을 위하여 소수를 희생시킨다는 생각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그것은 소수의 희생으로 공공의 이득을 만들어 낸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이라는 이름의 유령과, 사소한 숫자놀음을 위하여 유일한 세계를 종말 시킨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꿈, 관념, 사상을 탐구하면서 시작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성한 이론' 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대는 그대의 신들이나 우상보다도 오히려 그대 자신으로 돌아가라. 그대가 간직하고 있는 것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끄집어내고, 드러내 놓고, 그리고 그대 자신을 공개하라."

3.1.3. 에고이스트 연합

슈티르너는 자유로운 아나키스트의 공동체인 에고이스트 연합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그는 그것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하진 않았다. 다만 다른 아나키즘 사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참여와 탈퇴가 자유로워야 하고 쓸모없는 권력이 존재해선 안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집단은 자기자신을 소유하려 하는 '자발적 에고이스트'로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만인이 자기소유 외에는 어떠한 관심사, 숭배의 대상을 갖지 않는 에고이스트의 집단은 어떠한 신성한 권력도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유와 에고이스트 연합
"정치적 자유는 폴리스 또는 국가가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심의 자유가 양심이 자유롭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처럼 종교적 자유는 종교가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국가, 종교,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나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배하고 정복하는 권력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 종교, 양심 같은 나를 지배하는 전제자들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같은 국가, 종교, 양심의 전제자들은 나를 노예로 만들고 그들의 자유는 나를 속박하는 족쇄인것이다."

슈티르너는 자유라는 개념 또한 비판했는데, 주로 '소극적 자유'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했다. 반면 그가 내세운 소유란 단지 외적인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모든 내적인 압력으로 부터 벗어나 자신의 힘을 자신이 소유하여 완전한 자기해방의 길로 향하는것이 소유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그는 자유자체를 허상이라고 치부하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는데, "자유가 외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면, 정말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라는 문제 때문이었다.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의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만들거나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그것을 원하고 동경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요, 유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현실의 족쇄는 매순간 나의 육체에 가장 깊숙한 상처를 새겨 넣는다. 그러나 나는 나의 소유로 남는다. 내가 주인에게 노예이기를 거부할 때 나는 오직 내 자신과 이익만을 생각한다. 그가 나에게 채찍질을 할 때 나는 그 매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 그것을 참아낸다...... 내가 나 자신과 나의 이익만을 응시할 때 나는 주인을 구덩이에 처넣을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나의 에고이즘이 전제 되었을 때만이 나는 주인과 그의 채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다만 주류 아나키즘에서는 여러모로 많이 까이는 신세이다. 기본적으로 관념론에 많이 입각하다보니 유물론적 철학을 지니고있던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들한테서 많은 비판을 받았고[18] 실제로도 투쟁의 방법이 지나치게 개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개인의 테러등에 맞춰젔으며[19] 사회마저도 거부하는 특유의 급진성과 원시주의로 많이 흘러갈정도로 개인의 자아를 넘어서 인간의 기초적인 본능에만 집중할정도로 개인주의적이기에 다른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이들과 연대하려는 시도 자체가 적은 편이다. 물론 그전에 에고이스트 자체가 수가 작지만 말이다.
"내가 나를 사물들의 배후에서 발견하고, 그리고 더욱이 나를 정신으로서 발견한 것처럼, 또한 그렇게 나중에 나는 나를 사상들의 배후에서, 다시 말해 나를 사물들의 창조자이고 소유자로서 발견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정신의 시대에 사상들은 사상들을 탄생시킨 나에게 더는 복종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사상들은 고열에 인한 환각과 같이 주위를 맴돌고 나를 진동시키는 하나의 전율케 하는 힘인 것이다. 사상은 그 자체로 자신을 위해 육체를 갖추게 되어,신,황제,법왕,조국 등과 같은 유령이 되었다. 나는 사상들이 육체화된 것을 깨부순다. 그래서 나는 사상들을 나에게로 되찾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만이 육체를 갖춘 존재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사상이 나에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나의 것으로서, 나의 소유로서 세계를 받아들인다. 즉 나는 모든 것을 나와 연관시킨다."

에고이스트 연합( 독일어 : Verein von Egoisten)에 대한 슈티르너의 아이디어는 "The Ego and Its Own"에서 처음으로 설명되었다. 에고이스트 연합은 슈티르너가 국가와 대조적으로 제안한 자발적이고 비체계적인 연합으로 이해된다. 각 연합은 의지의 행위를 통해 모든 당사자의 지원에 의해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에고이스트 간의 관계로 이해된다. 연합은 모든 당사자가 의식적인 에고이스트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일방적으로 묵묵히 괴로움을 당하고도 참아내고 겉모습을 유지한다면 그 연합은 다른 것으로 타락한 것이다. 이 연합은 자신의 의지에 위배되는, 권위가 아니라 구성원의 의지에 종속되는 자발적인 관계로 본다. 이 아이디어는 정치, 경제, 로맨스 등에 연결되어 재해석 될 수 있다.
에고이즘은 사상에 반대하지도 사랑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사랑의 달콤함의 적이 아니며, 헌신과 희생의 적도 아니다. 친밀한 따스함의 적이 아니며, 또한 비판이나 사회주의의 적도 아니다. 요컨대 에고이즘은 특정한 관심사의 적이 아니다. 이것은 특정한 관심사의 배제가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무심함과 무관심에 대항할 뿐이다. 사랑에 반대하지 않으나, 신성한 사랑에 대한 반대이며, 사상의 반대가 아니라 신성한 사상에 대한 반대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신성한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마치 자신을 고립시키고, 유리시키며, 고독에 빠져들길 원하는처럼 보이는 에고이스트의 배타성이란, 오로지 무관심의 배제를 통하여 관심사에 대한 완전한 참여를 하기 위한 것이다. — Max Stirner. Stirner’s Critics
그러나 내가 왜 공공선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공공선은 나의 선이 아니며, 단지 자기부정의 최악의 형태일 뿐이다. 내가 “굴복” 할 때만이 공공선이 번영할 것이며, 내가 굶주릴 때만이 국가가 화려해 질 것이다…… 인민은 발언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입이 없는 자가 발언을 할 수 있다니! 오직 개인만이 발언권을 가질 뿐이다. 그러니 언론의 자유의 모든 문제가 “인민의 자유”라는 형태를 취할 때, 모든 것이 뒤집어진다. 이것은 오직 개인의 권리이자, 개인의 더 나은 힘일 뿐이다. 만일 인민이 언론의 자유를 가진다면, 인민의 가운데서도 나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인민의 자유는 내 자유가 아니며, 인민의 자유로서 언론의 자유는 반드시 나에게 적대하는 언론의 법과 함께 나타날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의 자유에 대한 노력에 대항하며 선언되어야 한다. 인민의 자유는 내 자유가 아니다! 인민의 자유, 인민의 권리라는 이 범주를 허용해 보자. 예를 들어, 인민의 권리로서 모두는 무장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중에 권리를 박탈당한 자가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 그 자신의 권리를 박탈할 수 없지만, 나에게 속한 권리가 아닌 인민에게 속한 권리로서 그것을 박탈당할 것이다.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나는 감금될 수 있으며, 죄수로서 무장할 권리를 잃는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인민의 자유, 공동체의 자유, “사회”의, 보편의, 인류의, 인류의 이상의, 인민의, 공동체의, 발언권을 가진 “사회”의 창조에 대한 마지막 시도로 나타난다. 개인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인민은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 자유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아닌, 인민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더욱 자유로워 지면, 개인은 더욱 구속된다. 아테네의 인민은 정확히 그들이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에, 도편추방제를 만들었고 무신론자들을 추방했으며, 가장 현명한 사상가를 독살했다…… 모든 신성한 것은 구속이자, 족쇄다. 신성한 모든 것들은 법의 파괴자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시대는 모든 영역에서 이 파괴자의 무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법을 위해 이 법을 어길 준비를 하고 있다…… 인민은 강한 시민을 추방하고, 교회의 이단자들에 대한 종교 재판을 자행하며, 국가의 반역자에 대한 종교재판을 행함으로써 그 자신의 왕권 위에 서려는 자들을 억압할 것이다. 인민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주장일 뿐이다. 이것은 모두에게서 “애국적 희생”을 요구한다. 따라서 모두는 그 자신으로서는 다르지 않으며 무의미하고, 그가 그 스스로 해야 하는 것들, 즉 자신을 실현하게 하는 것들은 할 수도 없으며 허용될 수조차 없다. 모든 인민, 모든 국가는 개인에게 불의다…… 내가 헌법, 헌장, 법률에 자신을 가두어 “내 몸과 마음을 인민에게 바친다”라고 선언해야 한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 능력이 “사회의 조화를 방해하지 말라”라는 그들의 규율 안에서만 허용되고 개발될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일 수 있겠는가? 인민과 인류의 몰락은 나를 나의 부흥으로 이끌 것이다. 들어보라, 내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우리의 사랑스러운 독일 존재의 1000년을 기념하는 내일의 축제를 위한 종소리가 시작되고 있다. 이 종소리는 이 장례식의 장송곡의 소리다!... 독일 민족과 독일 인민들은 그들 뒤에 1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기나긴 삶인가! 그러니 가서 잠들어 다신 깨어나지 말아라, 그렇게 네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슬로 묶어왔던 모든 이들이 이로써 자유로워 질 것이다. 인민은 죽었다. 나여 영원하라! 오, 그대 너무도 고통받는 독일 인민이여 너의 고통은 무엇이냐? 그것은 사상이 그 자신의 육신을 만들지 못하는 고통이며 새벽이 가기 전에 무로서 사라져 버릴 유령 들린 정신의 고통 이건만, 너는 아직 구원과 성취를 갈망하구나. 그대 친애하는 사상이여, 그대 친애하는 유령이여, 너는 내 안에서도 오랫동안 살아왔다. 나는 너의 구원을 위한 말을 거의 발견했다고 상상했었고, 배회하는 정신을 위한 살과 뼈를 발견했었다. 그리고 나는 너의 영원한 안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가며, 마지막 사랑도 사라져갔다. 그리고 나서 나는 황량한 죽은 자의 집에서 빠져나와 산자들을 부른다. 오직 살아있는 자만이 권리를 지닌다. 잘 가거라, 그대 수백만의 꿈이여, 잘 가거라, 그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천년의 폭정이여! 내일 그들은 너를 무덤으로 데려갈 것이다. 곧 너의 자매들과 너의 인민들이 너를 따르리라. 그러나 그들 모두가 뒤따랐을 때, 인류는 매장될 것이고, 나 자신은, 웃고 있는 상속자일 것이다! — Max Stirner. The Unique and Its Property pp. 225-229

모든 운동과 이데올로기에는 권리의 주체가 되는 일종의 정체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그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정체성(성, 인종, 민족 등)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의 집단 정체성(혹은 그것의 도덕성)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며, 이렇게 사람은 세계를 그 자신으로서 직접 마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 개인은 이에올로기에 연계하지 않고서는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 누군가 그 정체성에서 벗어난다면(혹은 쫓겨난다면) 그는 곧 이데올로기가 그에게 약속한 모든 권리를 박탈 당할 것이다. 결국 사람은 그 정신에 복종하는한 자유로울 권리가 있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이를 정신의 지배로서 파악한다. 이에 맞서서 등장한 개념이 어떠한 정신의 지배와도 연계하지 않은 고유한 개인(혹은 유일자)이 그들의 공통된 욕망을 위해 상호적으로 교류하는 연합체인 에고이스트 연합이다.

4. 저술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
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
<colbgcolor=#fff,#1f2023> 1842년
예술과 종교
Kunst und Religion
1842년
유일자와 그의 소유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1844년
슈티르너 비평가들
Recensenten Stirners
1845년
철학적 반동주의자들
Die Philosophical Reactionäre
1847년
 반동의 역사[20]
Geschichte der Reaktion
1851년
『유일자와 그의 소유』가 그의 대표작이며, 이 밖에 몇몇 짧은 글[21]을 남겼다.

5. 여담

  • 파일:Stirner02.jpg

    얼굴이 있는 사진이 아예 남아있지 않고, 엥겔스가 그린 이 조악한(?) 그림이 초상화로서 유일하게 남아있다. 이 그림은 슈티르너의 전기 작가 맥케이의 요청에 따라 엥겔스가 40년 후 기억으로 그린 캐리커처이다. 그래서 실존인물이 아니라 엥겔스가 스스로와 대화하려고 만들어낸 다른 자아라는 썰도 있지만, 엥겔스가 슈티르너를 반박하기 위해 쓴 글의 양이 슈티르너가 평생 남긴 글보다 많을 정도이기 때문에, 엥겔스가 슈티르너의 또 다른 자아라는 썰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 서양철학사에 그의 분류는 보통 청년헤겔학파(헤겔 좌파)에 속하는데, 그의 무정부주의적 주장에 근거하여 아나키즘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다만, 동시대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 먼저 아나키즘의 대부로 활동했고, 이후의 아나키즘 철학자인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이 비록 슈티르너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지만 그들은 슈티르너 보다는 프루동을 아나키즘의 대표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보통은 아나키즘에서 프루동 - 바쿠닌 - 크로포트킨의 계보를 우선적으로 인정하고, 이 사이에 슈티르너의 큰 영향력을 인정하는 편이다. 게다가 슈티르너는 프루동 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스엥겔스 등과 더 관련이 있고 헤겔주의자들의 모임[22]에도 수년간 같이 참석했기 때문에 보통 청년헤겔학파로 분류되는 편이다. 또한 굳이 위의 고전적 아나키즘 3대장이 아니더라도 슈티르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포이어바흐를 극복하는 것에 크나큰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청년헤겔학파와 아나키즘 중 하나를 굳이 선택하자면 보통은 청년헤겔학파(헤겔 좌파)로 분류된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슈티르너가 아나키즘 철학자가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애초에 둘이 양립 불가능한 분류가 아니다. 넒게보자면 바쿠닌이나 프루동까지 헤겔 좌파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으며, 슈티르너를 제하더라도 헤겔 좌파에는 아놀드 루게라는 아나키스트가 하나 더 있었다. 다만 현대 아나키즘 판에서는 선술한 프루동-바쿠닌-크로포트킨 계보와 마흐노의 강령주의로 대표되는 조직지향적 아나키즘과 슈티르너를 기반으로 들뢰즈-가타리 듀오나 밥 블랙, 머레이 북친 등의 생태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은 거의 상극에 가깝다. 이름만 똑같은 다른 사상이라고 봐도 된다.
  • 디시인사이드의 기능인 디시콘 중에 슈티르너를 다룬 디시콘이 있다. 이름은 유우령콘(...). 디시콘답게 개드립 위주로 가득 담았지만 본 문서의 내용이 대부분 들어 있을정도로 알차다.

[1] 이 경구는 종종 "나에게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All things are nothing to me) "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오역이라는 추세이다.[2] #[3] 다만 역시 막스 슈티르너도 헤겔 좌파(청년헤겔학파)에 속하기에 유물론을 기반으로 두긴 했다. 다만 그 유물론에서의 해석에서 나는 존재하지만 다른 것이 실제로 존재는 하는가?로 귀결되기에 사실상 관념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에 관념론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실재론 대 관념론 도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매우 기형적인 형태의 유물론인 셈이다.[4] #, #[5] 마르크스와 슈티르너가 만난 적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엥겔스는 슈티르너와 자주 교류했으며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모임은 젊은 철학자들의 토론회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슈티르너는 세심한 청중이었지만 본격적인 참여는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6] 반역, 반란 같은 레토릭이 사용되지만 이는 혁명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혁명은 결국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반란은 어떠한 체제든 체제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7] 하지만 소위 포스트 레프트 아나키즘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이러한 막스 슈티르너의 이론을 다르게 해석하여 노동조차도 개인의 취미로만 활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원시주의로의 회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벤자민 터커와 같은 이들은 그것을 아나코 캐피탈리즘의 일면으로 해석하기도 하는 모습 등을 보였다. 물론 진짜 막스 슈티르너가 이러한 모습을 원했을 리는 만무하다.[8] Some people believe that in a sense a "second positive part" was soon to be added, though not by Stirner, but by Friedrich Nietzsche. The relationship between Nietzsche and Stirner seems to be much more complicated. According to George J. Stack's Lange and Nietzsche, Nietzsche read Lange's History of Materialism "again and again" and was therefore very familiar with the passage regarding Stirner.[9] 다만 니체와 슈티르너의 사상은 차이점이 많이 보인다. 니체는 결국 세상을 받아들어야함을 애기했다. 세상의 억압을 받아들이고 그 억압을 극복하여 하나의 위버멘쉬가 되자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초인사상이다. 즉 니체는 개인의 에고는 시작부터 발현되어있지 않으며 억압을 극복함에서 발현된다고 봤기에 그에게 유령은 극복을 위한 도구가 된다. 반면 슈티르너는 인간은 그 시작부터 에고가 발현되어있는 에고이스트라고 규정한다. 단지 이를 자각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만 된다. 그렇기에 슈티르너에게 유령이란 도구가 아닌 그저 억압의 존재일 뿐이며 확고하게 이를 부셔야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슈티르너는 반란을 옹호했으며 니체는 극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을 하지 않았다.[10] 역설적으로 미하일 바쿠닌에 대한 언급은 존재한다. 물론 니체 글이 다 그렇듯이 까는 내용이다.[11] However, there is no indication that he actually read it as no mention of Stirner is known to exist anywhere in Nietzsche's publications, papers or correspondence. (Albert Levy, Stirner and Nietzsche, Paris, 1904.)[12] 해당 책의 마지막 장은 책의 제목과 일치하며 끝이 난다. "나에게 나 이상의 것은 없다."[13] 그의 저서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주로 청년헤겔학파를 비판하기 위해 쓰였다.[14] 니체는 슈티르너에게서 영향을 받았다[15] 그는 인간이라는 개념, 무언가 인간적인 것이 단지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건 결국 또다른 유령이다.[16] '인간적인'이라는 유령이 정신의 독재자가 되려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17] 슈티르너는 당대에 새로이 등장한 인간주의적 사상, '유적존재'라는 개념이, 또다른 숭배현상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러한 숭배는 또한 결국 개인을 지배 할 것이고 자기소외의 길로 이끌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는 이것을 종교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는데, '인간'이라는 형상이, 종교, 국가, 자본, 같은 것들이 하는 것과 동일하게 개인을 억압하며 숭배를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당대 청년헤겔학파의 주류 입장에 대한 중대한 비판이 된다.[18] 바쿠닌이 신과 국가에서 대차게 비판하였는데 관념론은 이 땅에 설 자리가 없으며 오직 유물론만이 진리라고 한 바 있다.[19] 이를 마흐노는 개인의 무책임하고 그저 혼돈만 불러올 뿐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이들이라며 하며 비판한 바 있다.[20] 슈티르너의 온전한 저술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슈티르너가 발췌 번역한 책이다. 물론 이 책의 서론과 기존 번역에 추가한 구절들은 슈티르너의 저술.[21] 대표적으로 모두 내겐 의미 없는 것이다 등이 있다.[22] '자유인'이라는 헤겔 좌파 모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