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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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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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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에라스뮈스
Erasmus
파일:에라스무스.jpg
이름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1]
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출생 1466년(추정) 10월 28일
부르고뉴국 로테르담
(現 네덜란드 로테르담)
사망 1536년 7월 12일 (향년 70세)
스위스 바젤
(現 스위스 바젤슈타트)
국적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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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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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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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학력 파리 대학교, 콜레주 드 몽테귀[2]
토리노 대학교 (신학 / 박사, 1506년)
경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퀸스 컬리지 강사
루뱅 대학교 교수 (1517-21년)
분야 성경적 인문주의[3]
종교 가톨릭[4]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파리 대학으로2.3. 왕성한 저술 활동2.4. 루터와의 논쟁2.5. 말년
3. 사상
3.1. 인문주의와 교육3.2. 종교3.3. 자유의지
4. 저서
4.1. 우신예찬
5. 어록6. 여담

[clearfix]

1. 개요

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가톨릭 사제이자, 철학자이다. 당대 유럽 인문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그리스ㆍ로마 고전 문학에 능통하였으며, 고전에 대한 언어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당시 가톨릭에서 권위있던 불가타 성경[5]의 오역을 지적하고,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새롭게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스어 성경의 독해를 바탕으로 성경에 근거가 없는 면죄부 판매, 의례와 축일의 준수, 단식 등을 비판하여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했으나, 막상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를 중재하고 화해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가 바랐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을 통한 교회 체제 내의 개혁이었지, 그리스도교 세계의 분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중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평생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퍼뜨린 그의 세계시민주의와 평화의 정신은 이후 유럽의 문화와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2.1. 초년기

에라스뮈스는 1466년(추정) 10월 27일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결혼할 수 없는 신부였으나, 한 여자와 오랜 기간 동안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며 그의 형과 에라스뮈스를 낳았다. 에라스뮈스는 사생아로 태어난 자신의 출생 사실을 나중에 알았던 것 같다. 출생의 오점에 대해서 아주 예민했기 때문에 그는 훗날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거짓을 보태어 낭만적으로 꾸몄다.[6]

어린 시절 그를 둘러싼 환경은 열악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막 네 살인 어린아이 때 이미 형 페더와 함께 호우다의 학교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데벤터에 있는 성 레부인 교회 산하의 유명한 학교에 에라스뮈스를 보낸 것은 아홉살 때였다. 어머니가 그를 따라갔다. 그는 1475년에서 1484년까지 9년 동안 데벤터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데벤터 시절의 회상은 그의 글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는 거기서 받은 교육에 대해 별로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다. 학교는 야만적이었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비난했다.[7]

어머니가 도시를 휩쓴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에라스뮈스의 데벤터 학창 시절은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에라스뮈스 형제를 호우다로 불러들였는데, 그 직후 아버지도 사망했다.[8] 아버지 사망 이후에 에라스뮈스 형제는 세 명의 보호자들에게 맡겨졌다.[9] 보호자들은 각각 21세와 18세인 형제를 부아르뒤크에 있는 학교로 보냈다. 형제는 학교가 소속된 공동생활형제회 건물에서 살았다. 데벤터 시절보다 더 열악했다.[10] 그런데 또다시 전염병이 창궐하여 에라스뮈스 형제는 부아르뒤크를 떠나 호우다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세 명의 보호자는 노골적으로 형제에게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종용했다. 에라스뮈스는 가기 싫었지만 결국 보호자들의 종용에 굴복하여 스테인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 직후인 1488년에 수도자가 되겠다는 서약을 했다.[11]

비록 훗날 에라스뮈스가 스테인 수도원에 있었던 시절을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긴 하지만, 그 시절 그가 쓴 편지들을 살펴보면 생각보다는 괜찮았던 것으로 보인다.[12] 스테인에서 그는 상당한 자유를 누렸고, 고전 고대에 대한 지적인 동경을 함양하면서 라틴어 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수도자들과 교분을 쌓았다. 특히 로테르담의 세르바티우스 로저, 호우다의 빌렘 헤르만스, 약간 나이가 많은 호우다의 코르넬리우스 헤라르트와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에라스뮈스는 이들과 함께 즐겁게 글을 읽거나 농담을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13] [14] 이런 분위기로부터 에라스뮈스의 최초 저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는 이 원고를 그 후에 잃어버렸다가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부분적으로 되찾게 되는데 제목은 『야만인에 반대하며』이다.[15]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원은 점점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에라스뮈스는 1492년 4월 25일 위트레흐트 주교에 의해 신부로 서임되었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평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때마침 캉브레 주교인 베르겐의 앙리가 그에게 비서직을 제안했고 그 덕분에 에라스뮈스는 수도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캉브레 주교는 추기경 자리를 얻기 위해 로마로 여행할 계획이었는데, 라틴어를 잘하는 에라스뮈스의 재주가 소용이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한 듯하다.[16] 당시 에라스미스는 23살이었다.[17]

2.2. 파리 대학으로

하지만 주교 밑에서 근무하는 것은 결국 실망스러운 일로 판명되었다. 주교는 너무 바빴고 주교를 수행하는 것은 수도원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에라스뮈스는 다시 우울해졌다.[18] 여기서 빠져나갈 길을 알려준 사람은 제임스 바트였다. 바트는 파리 대학을 추천해 주었는데, 바트의 영향력과 노력 덕분에 주교는 파리 행을 승인하면서 약간의 급여를 약속했다. 에라스뮈스는 1495년(추정) 늦여름에 온 세계의 대학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파리 대학을 향해 출발했다.[19]

하지만 파리 대학도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있었고, 이는 금욕과 고행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감이 다시 한 번 에라스뮈스의 내면에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1499년까지의 파리 체류는 고통과 분노의 시기였다. 학자 생활에 필수적으로 따라다니는 가난과 그 가난을 이겨내기 위하여 부끄러운 생계 수단(가정교사 혹은 잡문 쓰기)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고통의 시기였다.[20] 게다가 치밀한 논리만을 강조하는 학교 분위기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건조하고 쓸모없는 방법론만 가르치는 스콜라주의에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21] [22]

그 대학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파리 인문주의자들의 우두머리인 로베르 가갱과 친분을 쌓는 일이었다. 그리고 곧 에라스뮈스는 그 덕분에 자신의 이름을 파리의 독자층에 알릴 수 있게 된다. 가갱의 책이 인쇄가 될 때 2페이지 정도 공백이 생겼는데, 그 당시 책에 공란을 남겨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여백을 에라스뮈스가 장문의 추천사로 채워 넣었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의 이름이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덕분에 우리는 에라스뮈스의 경력에서 늘 발견되는 문필업과 인쇄업 사이의 연결고리를 최초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23]

그 당시 지적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의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고, 또 언제나 고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에라스뮈스 같은 처지의 문필가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교회의 성직급이나 저명한 후원자의 지원, 혹은 그 둘 다에 의존해야 됐다.[24] 다행히 파리에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학생인 마운트조이(윌리엄 블라운트)를 후원자로 만들 수 있었고, 마운트조이를 따라 영국에 처음 건너가서 1499년 초여름부터 1500년 초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영국 체류는 그가 내면적으로 더욱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알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인품을 갖추고 있는 두 명의 새로운 친구, 존 콜렛과 토머스 모어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25] [26]

2.3. 왕성한 저술 활동

영국 생활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체류 기간이 끝나고 1500년 1월 영국 땅을 떠나면서 에라스뮈스는 봉변을 당했다. 에드워드 3세의 금은 반출 금지 법령으로 인해, 어렵게 모은 돈 20파운드를 세관에서 모두 빼앗겨버린 것이다. 에라스뮈스는 졸지에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돼버렸다. 그는 그야말로 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 하나가 책을 써서 돈을 버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격언집』이다. 이 책은 고대의 라틴 작가들로부터 약 8백 개의 격언들을 뽑아서 모아 놓은 것인데, 우아한 라틴어 문장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격언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책은 꽤 잘 팔렸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에라스뮈스는 인문주의 문필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27] [28]

1년 뒤에는 『기독교 전사를 위한 지침서(엔키리디온)』를 집필했다. 하루는 어떤 군인의 아내가 방탕한 자신의 남편를 감화시킬 그런 말을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에라스뮈스는 그 책을 지었다고 밝혔다.[29] 이 책에서 에라스뮈스의 주장은 이렇다. 종교는 외면적 의례를 지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아무런 감흥 없이 시편 전편을 읽어 내려가는 것보다는, 단 한 줄이라도 시편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며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하여 더 깊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례는 영혼을 새롭게 하지 못할 경우 아무 가치도 없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30]

1504년 여름, 루뱅 근처의 파르크에 있는 프레몬스트라텐시아 수도원의 도서실에서, 그는 발라의 신약성경 주석 원고를 발견했다. 그것은 복음서, 바울 서한, 계시록 등의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주석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었다. 불가타(라틴어역 성경)가 오류가 전혀 없는 번역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13세기 초에 로마에서 공인되었다. 수도원 종단과 개인 성직자들이 그것을 교정하려 했으나, 그 작업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 에라스뮈스는 자신이 그 일을 하려고 한다. 성경의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된 것이다.[31]

1505년 가을에 에라스뮈스는 영국으로 가서 마운트조이의 성관에서 여러 달을 보냈고, 콜렛과 모어를 만났다.[32] 마침 거기서 조반니 바티스타 보에리오[33]를 소개받았는데, 그는 이탈리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두 아들을 대동할 선생을 찾고 있었다. 에라스뮈스는 그 자리를 수락했다.[34] 그렇게 해서 에라스뮈스는 난생처음 이탈리아 땅을 밟았다. 그리고 1506년 9월, 토리노에 도착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35] 볼로냐는 다음 행선지였다.[36] 볼로냐에서 에라스뮈스는 계약에 의거하여 그 해(1506년) 말까지 보에리오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했다.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다음해에 에라스뮈스는 베네치아의 유명한 인쇄업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에게 편지를 보내서 에우리피데스 라틴어 번역본을 출판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제안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졌고 내용이 엄청나게 불어난 『격언집』도 발간할 의사를 보이자, 에라스뮈스는 계획되었던 로마행을 취소하고 그 대신 베네치아로 가서 그의 책 출판을 직접 감독하기로 했다.[37] 에라스뮈스는 알두스의 집에서 8개월을 보내면서, 인쇄소에서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을 맡았다. 에라스뮈스가 교정하고 편집하면, 알두스는 그것을 바로 인쇄하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베네치아에서 새롭게 사귄 문학 친구들이 미출간 그리스 저자들의 책자를 제공해 주었는데, 이 모든 작업은 그에게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38] 그러면서 1509년 초에는 로마를 다녀왔다.[39]

1509년 4월 21일 영국왕 헨리 7세가 죽고, 그의 후계자 헨리 8세가 왕이 되자, 영국 친구들은 에라스뮈스에게 후원자를 얻을 겸 헨리 8세를 뵈러 영국으로 오기를 권했다.[40] 에라스뮈스는 영국을 가기로 결정하고 알프스를 넘어갔다.[41] 알프스 산길을 말 타고 넘어갈 때, 장차 에라스뮈스의 대표작이 되는 『우신 예찬』이 구상된다. 그는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모어의 집에 여장을 풀고서, 며칠 사이에 이미 구상되어 있던 내용들을 써 내려갔다. 옆에 고전 작가들의 텍스트를 대기시켜 놓지도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이미 쓰고 싶은 말이 다 정리되어 있었다. 창조적 충동이 순간적인 영감을 발하면서 만들어진 걸작인 『우신 예찬』은 어리석음이 인생과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어리석음의 신'(우신)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42]

에라스뮈스는 영국에 머물면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퀸스 칼리지에서 신학과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강의는 별로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43]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고 에라스뮈스는 『격언집』의 판매에 매달렸다. 그러던 중에 이후 평생토록 연을 맺게 되는 바젤의 요하네스 프로벤이라는 인쇄업자를 알게 된다.[44] 1513년 봄, 영국은 오랫동안 준비해 온 프랑스 공격을 마침내 감행하자, 전쟁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던 에라스뮈스는 영국을 떠나기로 마음을 완전히 굳혔다.[45] 그리고 에라스뮈스는 프로벤을 만나러 1514년 8월 말에 바젤로 들어가서, 6년 전 베네치아 인쇄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커다란 인쇄소에서 여러 학자들에 둘러싸여 원기왕성하게 일했다. 가끔 휴식을 취할 때면 학자들이 그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시했다. "나는 아주 상쾌한 뮤즈의 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학식을 갖춘 뛰어난 학자들이 옆에 많이 있습니다!"[46]

그는 1516년 초, 이 인쇄소에서 그의 주석이 달린 교정된 그리스어 텍스트로 된 신약성경을 발간했다. 또한 기존 불가타와는 크게 다른 에라스뮈스의 라틴어 번역본 신약성경도 함께 발간했다. 에라스뮈스의 라틴어역 신약성경은 대담한 신학적 시도였는데, 이 두 중요한 저작이 나오자 에라스뮈스는 신학 연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고전 문학의 태두요 기준인 동시에 이제 신학 연구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권위는 모든 나라에서 높아졌고 그의 편지들은 점점 분량이 늘어갔다.[47] 게다가 에라스뮈스는 젊은 카를 5세의 고문관 자리에 임명되었다. 군주의 고문관이라는 자리에 걸맞게 그는 『기독교 군주의 교육』이라는 논문을 저술했다.[48]

2.4. 루터와의 논쟁

점점 더 많은 칭송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사람들은 뭔가 위대한 사업을 기대했고, 에라스뮈스가 그런 일을 해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브뤼셀에 가면 스페인 사람, 이탈리아 사람, 독일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왔다. 츠빙글리는 1516년에 이렇게 썼다. "스위스 사람들은 에라스뮈스를 한 번 보았다는 것을 엄청난 영광으로 생각한다."[49] 그는 단지 뛰어난 학자나 재치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명을 회전시키는 중심축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시대의 두뇌, 심장, 양심이 되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50]

여러 곳에서 에라스뮈스를 불렀지만, 그는 루뱅 대학에 가기로 결정했다. 루뱅의 성직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에라스뮈스를 환영했다. 대학의 부학장은 그리스어판 신약성경을 어러 번 칭찬하여 에라스뮈스를 기쁘게 했다. 곧 에라스뮈스는 신약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보수적인 루뱅 신학 교수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51]

그는 사람들이 불가타의 텍스트를 두고서 서로 싸우는 것을 역겨워 했다. 사람들은 불가타의 텍스트가 그리스어 원본과 차이가 있고, 또 와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어 원전으로 되돌아가서 원래의 형태와 최초의 의미를 파악하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는 성경을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접근해서, 무슨 말이 나왔고, 누가 했으며, 누구를 위해서 했으며, 발언의 시간과 장소를 따지고 말의 선후를 살펴보는 것 등, 역사적 문헌 비평을 통하여 성경의 모든 뉘앙스를 밝혀낼 수 있다는 것만을 기뻐했다.[52] 불가타 텍스트를 수정하려 들면 성경에 대한 믿음이 끝장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직자들을 에라스뮈스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그가 교회, 성사, 교리 등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은 더 이상 가톨릭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언어학적 통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어떤 파급 효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지 못했다.[53]

사실, 에라스뮈스는 1516년에 이름 없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자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 있는데,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였다. 에라스뮈스는 그런 종류의 편지들을 워낙 많이 받았으므로, 그는 그 후로 이 편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54]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판매로 촉발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독일 전역에 유통되면서 온 교회를 뒤흔들자,[55]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95개조를 아무런 논평 없이 토머스 모어에게 보냈고, 지나가는 어조로 콜렛에게 로마 교황청이 너무 뻔뻔하게 면죄부를 유통시킨다고 불평했다.[56] 에라스뮈스는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면죄부 판매를 못마땅했었기 때문에, 이 무렵 루터의 지지자인 존 랭에게 편지를 보내어 95개조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했다는 아주 호의적인 언급을 하기도 했다.[57]

1519년 3월 28일, 이제 한층 더 유명해진 루터가 에라스뮈스에게 다시 편지를 보낸다. "온화한 신사인 나의 에라스뮈스여, 당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이 작은 형제의 존재를 인정해 주소서. 나는 당신을 정말로 존경하고 당신이 나의 친구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외에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무식하여 세상 한 구석에 무명의 상태로 엎드려 있다가 사라져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촌스럽지만 영악하고, 또 절반쯤 아이러니가 담긴 이 편지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루터는 에라스뮈스로 하여금 명확한 입장을 밝히게 하여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학문과 문화의 기준인 이 강력한 권위자를 종교개혁의 대의에 동참시키려 하는 것이다.[58]

가톨릭교회에 대해 지속적으로 풍자와 비난을 퍼부었던 에라스뮈스였지만, 그는 가톨릭과 개혁 세력 중 그 어느 편에도 끼지 않으려 했다. 에라스뮈스는 가톨릭교회를 도덕적으로 개혁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아예 갈라서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59] 그래서 에라스뮈스는 루터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고, 루터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당신(에라스뮈스)을 그처럼 괴롭힌다고 하니, 나는 당신의 이름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좋은 친구들 또한 그렇게 할 것입니다."[60]

그러나 싸움의 소음이 점점 심해지면서 루뱅 대학의 분위기는 점점 살벌해졌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싶어 했고, 그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를 바랐다. 어쨌든지 에라스뮈스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루터와의 관계에 대하여 교황에게 애매모호한 회피적 답변을 했고, 루터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많은 소란스러운 수도자들은 에라스뮈스가 루터의 편이라고 설교를 해댔고, 또 조롱하는 비아냥거림 속에서 두 사람이 실은 한 사람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또한 개혁파들도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그런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라고 압박해 왔다. 이런 혐의와 비난에 맞서서 에라스뮈스는 자신을 열정적으로 옹호하고 변명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에라스뮈스가 바랐던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입장은 점점 더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결국 루뱅 대학 교수진들이 루터의 여러 의견을 공식적으로 비난한다는 선언을 하고 루뱅이 개혁자들에 반대하는 중심적 요새가 되자, 에라스뮈스는 루뱅을 떠나기로 결심했다.[61] [62] [63]

이미 오래 전부터 루뱅을 떠날 구실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스어 신약성경 제 3판을 내는 일로 다시 한 번 바젤로 가는 것이었다. 10월 28일 그는 어려운 4년간을 보낸 루뱅을 떠났다. 대학에 있는 그의 숙소는 비워 두었고, 장서들도 그대로 놔두었다. 11월 15일 그는 바젤에 도착했다.[64] 그렇다고 해서 그가 평화에 대한 신념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화에 대한 불평」, 「전쟁은 그것을 모르는 자에게만 달콤하다」, 「평화와 불일치에 대한 연설」 등 언제나 평화의 대의를 위해 글을 썼고, 복음 철학에 관한 편지에서는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조롱과 위협, 무력과 불공정이 아닌, 신중함, 헤택, 온유함, 관용의 힘으로 저항합시다."[65]

바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격화됨에 따라 루터에게 반박하는 글을 쓰라는 압력은 점점 강해졌다. 에라스뮈스의 오랜 친구인 턴스톨을 통해 영국의 헨리 8세도 재촉을 해왔다. 작센의 게오르게도 비슷한 요청을 해왔고, 예전의 후견인이었던 교황 아드리아누스 6세도 사망 직전에 독촉을 했다. 에라스뮈스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66] 그리하여 마침내 에라스뮈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던 그 일,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67] 다만 에라스뮈스는 종교개혁의 논쟁에서 그다지 핵심 주제[68]가 아닌 신앙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거론한다. 1524년 9월에 출간한 「자유 의지에 관한 논고」에서 에라스뮈스는 루터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없애버렸다고 비판했다. 자유 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정의나 하느님의 자비라는 용어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모든 것이 불가피한 필연에 따라 벌어지는 것이라면, 성경의 가르침, 비난, 경고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선한 일이나 좋은 일이나, 목수의 도끼처럼 하느님의 손에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왜 순명을 그토록 칭송하는가? 이런 필연의 교리를 일반 대중에게 가르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도덕은 자유의 의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69]

루터는 이 자유의지론을 혐오와 경멸의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에라스뮈스가 가톨릭교회의 단점과 비참한 상태는 도외시하고 오로지 그 문제만을 거론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그에 대한 답장으로 「노예 의지에 대하여」를 썼다. 여기에서 루터는 아무런 유보 조건 없이 아주 극단적 형태의 예정론을 지지한다. 루터의 주장은 이러하다. 하느님은 인류에 대하여 영원한 증오심을 갖고 계신다. "인간의 죄악과 자유의지의 소행에 대한 증오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도 그런 증오가 존재했다." 루터가 볼 때, 모든 인간의 운명은 하느님의 장엄한 증오에 의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서로 협력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에라스뮈스의 주장은 하느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이다.[70] [71]

2.5. 말년

아이러니한 점은 에라스뮈스가 보수적인 가톨릭 옹호자들의 강압으로부터 도망쳐 바젤 시로 왔건만, 바젤 시는 얼마 안 가 개혁 세력이 장악했고 이들은 가톨릭 옹호자들을 전부 쫓아내고 에라스뮈스에게 입장을 뚜렷히 정하라고 강요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톨릭과 개혁 세력 사이에서 애매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독립적인 생활을 지키기 위해 고령의 몸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부르크로 이주하기를 택했다.[72]

프라이부르크에서 에라스뮈스는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렸고, 1521년 루뱅을 떠날 때보다 더 환멸을 느꼈으며, 종교개혁과 관련해서는 더욱 보수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종교개혁가들을 "가짜 복음주의자들"이라고 경멸하는 어조로 불렀다. 그는 1528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루터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로부터 이탈하느니 차라리 온 독일 사람들의 증오를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외쳤다. "복음파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들은 저보다 더 좋아졌습니까? 그들이 전보다 사치, 육욕, 탐욕 등에 덜 탐닉하고 있습니까? 복음으로 인해 바뀐 사람들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술꾼이 술 끊은 사람이 되고, 금수가 온유한 인간이 되고, 구두쇠가 관대한 사람이 되고, 뻔뻔한 자가 순결한 자로 바뀐 경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전보다 더 나빠진 많은 사람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73]

만년에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도덕적ㆍ신학적 사상의 결산이요 완벽한 표현이 될 대작, 『설교론』을 쓰는 데 모든 노력을 바쳤다. 그러나 『설교론』은 피곤한 정신으로 쓴 작품이고 그 시대의 요구에 날카롭게 대응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에라스뮈스가 『설교론』을 완성하기도 전에, 그 책을 헌정할 예정이었던 존 피셔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1535년 6월 22일, 존 피셔는 수장령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거부하고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그는 헨리 8세의 명령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다. 이것은 토머스 모어도 마찬가지였다. 피셔가 처형된 지 2주 후인 1535년 7월 6일, 토머스 모어도 참수대 위에 올랐다. 이 두 고상한 친구들의 죽음은 에라스뮈스를 아주 슬프게 했다. 그는 너무나 상심하여 지난 몇 년 동안 하지 않았던 시 쓰기를 다시 했다.[74]

1535년 6월, 『설교론』이 인쇄에 들어갔고 에라스뮈스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프로벤의 인쇄 일을 돕고 교정하기 위해 바젤로 갔다. 바젤에 있는 많은 친구들이 에라스뮈스를 잊지 않고 환영해 주었다. 전에 그를 바젤로부터 몰아냈던 교회 내의 폭풍우도 가라앉아 있었다. 8월 들어 건강이 악화되자 그는 다시 프라이부르크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75] 그래서 1536년 2월에 에라스뮈스는 그곳에서 최후의 신변 정리를 하고 유언장을 남겼다.[76]

1536년 7월 12일, 그에게 최후의 날이 찾아왔다. 침상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그가 끊임없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O Jesu, misericordia; Domine liber me; Domine miserere mei! (오 자비로우신 예수님. 주님,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주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어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그는 네덜란드어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Lieve God. (하느님을 사랑하라.)[77] 유해는 바젤의 대성당에 묻혔으며, 유산은 고아들과 고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78] 22년 뒤, 교황 파울루스 4세는 에라스뮈스를 제1급 이단자로 지정하고 그의 모든 저서는 금서 조치되었다.[79]

3. 사상

3.1. 인문주의와 교육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세례를 받은 사람도 서품을 받은 사람도 교회에 가는 사람도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 내면 가장 깊이 끌어 안고서, 믿음 깊은 행동으로써 그를 모방하려는 사람이다.
Erasmus. D. The Education of a Christian Prince (1965) p.153
에라스뮈스는 고전 연구를 통하여 ‘인간성’(humanitas)의 개념을 인간의 덕, 윤리, 고결 등의 의미로 규정하고, 그 개념이 기독교적인 것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대체로 그리스로마 고전에만 관심을 기울인데 비해, 에라스뮈스는 고전 연구의 방법론을 기독교의 교부철학과 성서 연구에 도입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는 문헌학적, 수사학적 차원에서 고대 그리스어로 된 성서의 원전을 연구함으로써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했고, 이는 당시 스콜라학의 형식논리학적, 사변적 방법론[80]에 대한 비판과 도전이기도 했다.[81] [82] [83]

그는 고대의 고전 작품에서 순수한 인간성과 숭고한 신성을 찾았으며 그것이 기독교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대의 지식이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승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소유한 이성의 궁극적 원천은 하느님의 이성(로고스; logos)이므로, 그리스 철학자들이 탐구한 이성적 지혜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글로 대변된다. "거룩한 소크라테스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즉, 그는 고전 문학에서 발견되는 인문교육의 이상으로서의 교육적 가치와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되는 성경 속의 예수의 삶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가치를 결합함으로써 학문과 종교의 조화를 추구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의 고전들과 그 시대 교부들의 저작 속에 포함된 정신을 종교적 도덕의 표준으로 간주함으로써 그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해석하는 기독교적 인문주의의 철학적 원리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시민을 위한 학문과 도덕을 내포한 인문주의 교육을 통해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에라스뮈스는 평민이든 상인이든 귀족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인간다움을 갖추기 위해서 이러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아동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을 중시했는데,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의 상상력에 기초해서 공부의 과정에 놀이의 외양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이 교사를 좋아하고 존경하여 그를 본받고자 하며, 인문교양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불명예를 싫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교육은 공공의 책임이기 때문에, 교육을 책임질 교사들 역시 법제화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3.2. 종교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사이의 모든 긴장은 1525년에 아주 확연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해에 쯔빙글리와 루터는 모두 에라스무스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글을 썼는데, 두 사람 모두 '의지의 자유' 개념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두 개혁자들이 보기에 인간의 의지의 완전한 자유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를 이끌어낼 우려가 있었다. 쯔빙글리의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주석"(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과 루터의 "노예의지론"(On the Bondage of the Will)의 출판은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사이에 늘 있어왔던 긴장을 모든 사람에게 명백히 드러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씀, 최재건 번역, "종교개혁사상"(Reformation Thoughts: An Introduction) 제3증보판 111쪽
교황청과 루터 사이에서 에라스무스가 처한 상황과, 외견상 개신교와 가지는 공통점(스콜라학에 대한 반감, 성경 원문에 대한 관심) 때문에 에라스무스를 가톨릭도 개신교도 아닌 제3의 분파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에라스무스는 '신학적 견해'가 가톨릭 '신학'과 차이가 있을 뿐 죽을때까지 가톨릭 신자로 남았으며, 심지어 반교도권주의자조차 아니다. 만년의 에라스무스는 비교리적인 회의주의자도 아니고, 자유사상가도 아니었고, 오히려 신앙심 깊고 계시와 결부되어 있는 교회에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신학자였다.(Karl Heinz Oelrich, Der späte Erasmus und die Reformation, Münster, 1961)

교단 정체성이 아닌 인문주의 및 신학적인 면만 하더라도, 루터가 토착어 성경을 통해 독일 민족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을 결부시킨 데 반해서, 에라스무스는 토착어를 반대하고 국제어로서의 라틴어를 미는 확고한 세계시민주의자였다. 또한 인용 고전의 신학적 정통 여부에서 에라스무스가 루터보다 훨씬 리버럴했으며(예: 오리게네스의 잦은 참고) 은총과 자유의지의 관계에서 루터와는 중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육체의 외관과 '유대이즘', 율법 준수와 선행을 실천하는 것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것에 대한 단죄,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권리 요구는 루터에게도 역시 아주 소중한 동기들이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에라스무스는 독일 종교개혁가들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 올바른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의 구조에 관한 문제는 '그리스도교 철학'이나 신학에 속한 사안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교회 교도권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신학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신자들은 그분들의 장엄한 결정들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에라스무스는 생각했다.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a (1996) 제3권, 윤주현(역), 가톨릭출판사, 2018, 183-184쪽
가령 교회론 문제만 하더라도, 에라스무스는 교회론을 신학의 대상이 아니라 봤다는 점에서 확실히 가톨릭 신학 정통과는 거리가 있고, 루터와도 당연히 다르다.(가톨릭에서도 루터교에서도 교회론은 신학의 대상이다.)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사실상 성경과 교부에 관한 '문헌학'의 영역으로 축소될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에라스무스는 비록 교회론이 신학의 대상은 아니지만 교회는 순명의 대상이라 봤으며, 신학자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도권에 순명해야 한다고 봤다. 즉, 에라스무스는 '종교'로는 형식적으로든 실질적으로도든 가톨릭이 분명했지만, 동시에 '신학'적인 면에서는 당대 가톨릭 교도권 신학과 루터의 신학과는 다른 제3의 분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신학적인 면에서 에라스무스의 특징은 스콜라학의 사변과 형식논리학보다는, 문헌학적과 수사학적인 성경 연구에 강한 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그리스도교 병사의 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과 그 밖에 다른 여러 작품에서 제시하고자 했던 단순한 철학은 다름 아닌 모든 이들, 심지어 가정주부와 농부들에게까지도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을 의미했다. 그는 이 책의 서두에서, 그리스도는 강력하고 복잡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책들을 읽을 수 없는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돌아가셨기 때문에, '복음과 사도들 그리고 아주 전문적인 주석가들로부터 보다 순수한 원천들을 끌어들이고, 그리스도의 철학이 갖는 근본적인 특징들을 단순하게 종합해서 간략하고 명료하게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명료함, 단순성, 순수함, 원천들{{{-2 (ad fontes)''}}}, 곧 성경과 교부들로 돌아가는 것, 이 모두는 에라스무스가 몹시 열망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목적들이다.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a (1996) 제3권, 윤주현(역), 가톨릭출판사, 2018, 181-182쪽
후대의 신학 분과 명칭을 빌려서 말하자면, 에라스무스는 교의신학자라기보다는 성서학자였으며, 성서학자 중에서도 사목적인 배려를 선호하는 유형이었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간단명료하고 자명한 진리를 성경에서 알아볼 수 있다고 낙관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사색신학을 혐오한 반면 성서신학에는 매력을 느겼다. 그는 『진정한 신학방법』(Ratio verae theologiae)에서 당시 유행하던 신학자에 반대되는 새로운 신학자의 이미지를 묘사했다. 그에 따르면, 참된 신학자는 쓸데없는 문제로 인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진정으로 회심하는 자세로 믿음과 경건하게 말하는 사람이며, 천상에 맞갖은 영으로 풍요롭게 되도록 인도하는 영혼, 곧 하느님을 아주 큰 열정으로 연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a (1996) 제3권, 윤주현(역), 가톨릭출판사, 2018, 187쪽

종교개혁의 갈등이 고조되는 동안 가톨릭은 그를 교회를 부패시킨 자로 보았고, 개신교는 그를 복음의 파괴자로 보았다. 하지만 그가 외친 절제와 관용의 정신이 양측에 의해 완전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양측은 에라스뮈스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했다. 양측이 이렇게 나온데는 초당파적인 여론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여론은 에라스뮈스를 존경하고 숭배했던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재건과 복음교회의 건설에는 로욜라루터만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온건하고, 지적이고, 타협적인 세력들도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가령 멜란히톤이나 사돌레트 같은 사람들은 에라스뮈스와 동맹을 했고, 또 그의 입장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종교적 갈등에서 어떤 타협을 이끌어내려는 거듭되는 노력은 모두 에라스뮈스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84]

오늘날에도 양측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다. 비록 에라스뮈스가 전적으로 옳은 건 아니라 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한복판에서 이성과 대화를 중시한 점이 양측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현대 개신교계는 에라스뮈스를 루터와 영향을 서로 주고받은 (비록 개신교 종교개혁가는 아니지만) 종교개혁가로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며, 가톨릭 내부에서 가톨릭 개혁운동을 벌인 온건주의자로 (비록 가톨릭 신학적으로 비정통에 속하지만) 꽤 예우해준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요법을 시도했던 다른 종교개혁가보다, '내부에서의 개혁'이라는 훨씬 어려운 길을 걸었다"면서 존경하는 시선도 있다. 교파 불문하고 한국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에라스뮈스를 반드시 언급한다. 학부 과정에서는 루터파 파트를 공부할 때 반드시 언급하고, 대학원 과정에서는 꽤 비평적으로 분석한다.

가톨릭의 평가는 다음 발췌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역사 서술의 입장에서 에라스무스의 모습은 인문주의의 다른 위대한 대변자들에게 유보된 것과 동일한 대우를 받고 있다. 1700년대와 1800년대의 역사 기술은 에라스무스를 종교개혁의 선구자요 루터의 동맹자,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기수로 보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에 대한 최근의 역사 기술에서는 인문주의를 종교적-가톨릭적 의미에서, 정신 문제들을 강하게 느낀 운동으로 개정해 나아가는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즉 역사 기술은 당시의 에라스무스를 문화적, 종교적 문제들에 민감한 가톨릭 지성인이자 진실한 신자로서, 또한 복음적인 진리를 통해 스콜라 시대의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난해한 언어보다 분명하고 단순하며 이해 가능한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던 한 신학자로 바라본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교 철학’과 ‘성경신학’은 정확히 말해 바로 이러한 요청들에 응답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에라스무스에 관한 수많은 연구 과정에서 에라스무스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가 무엇보다도 신학자로서, 아니 오히려 진지한 신학자로 보인다.
... 비록 에라스무스가 오랫동안 수도복을 입고 『세상을 경멸함에 대하여』De contemptu mundi라는 작품을 쓰긴 했지만, 수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사제이자 진실한 신자였으며 최고의 가톨릭 지성인이었다.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a (1996) 제3권, 윤주현(역), 가톨릭출판사, 2018, 193-194쪽

3.3. 자유의지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가톨릭개신교가 갈라선 이후, 교황청의 요청에 의하여 에라스뮈스는 마르틴 루터의 예정론을 반박하는 글을 쓴다. 그는 『자유의지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견해를 거부한다.

그는 루터의 노예의지대로라면, 선한 일을 하도록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전가하는 것이 과연 정의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관계에 관한 여러 교부 철학자들의 논쟁을 개괄한 뒤, 그는 양 극단을 통합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의지에 속하지만 실제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도 자유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일에는 시작, 과정, 결말의 세 단계가 있는데 시작과 결말은 하느님이 예정한 것에 속해서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시작과 결말의 중간인 '과정'에는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개별적 행위는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라는 두 원인이 동시에 작용하며, 하느님의 의지는 주도적 원인, 인간의 의지는 이차적 원인이 된다.

그는 불을 예로 들어 이 관계를 설명한다. "불의 본래 성질로 인해 불이 날 경우, 그 불이 일어나게 만드는 하느님은 일차적 원인이다. 만약 일차적 원인이 없어지면 불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즉, 건조한 날씨로 메마른 숲속에 누군가 성냥불을 버리면 산불이 난다. 이 경우, 불이 나기 좋은 건조한 날씨와 적당한 산소량 등, 가연성이라는 불의 성질은 일차적 원인이고 성냥불을 던지는 행위는 이차적 원인이다. 성냥불을 아무리 던져도 불이 날 조건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불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일차적 원인으로서 하느님이 예정한 결과로 귀결되며, 그럼에도 선과 악의 행위는 인간 의지의 작용에 따라 일어날 수 있으므로 하느님은 그 인간 행위의 의지를 파악하여 포상 또는 징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4. 저서

4.1. 우신예찬

에라스뮈스는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청빈과 기도, 눈물과 고행에 몰두해야 할 교황 율리오 2세가 그렇게도 많은 재물과 영광, 세금과 면죄부를 통해 쾌락에 빠져 있으면서 전쟁을 자신의 주된 업무로 생각하는 것을 보고 극한 실망감에 빠진다. 그리고 1509년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오는 길에 그는 이런 물음에 사로잡힌다.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고 행동을 부추기는 동기가 무엇인가? 진실과 사랑, 지성과 현명, 이런 고상한 것보다는 허영과 욕망, 정념과 어리석음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영국 런던에 도착하여 토머스 모어 집에 머물면서 일주일 만에 『우신예찬』[85]을 쓴다.

『우신예찬』의 주인공은 '모리아(Moriae; 우신, 바보신)'이다. 모리아는 라틴어로 '어리석은 여신'을 말하는 것으로, 토머스 모어의 '모어'와 유사해서 선택한 단어라고 에라스뮈스는 밝힌다. 물론 모어는 어리석음과 거리가 멀지만, 그는 친절하고 너그러울 뿐 아니라 유머감각이 뛰어나 자신의 재치 넘치는 풍자에도 크게 즐거워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86] 에라스뮈스는 『우신예찬』에서 '어리석음'을 대략 3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리석다고 말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실 똑똑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한다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또한 그는 바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혜로운 자들을 말할 때도 '어리석음'을 사용한다.

그는 "스토아 학자라도 아버지가 되고 싶다면 바보신(우신)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라며, 무엇으로 인간을 만드는지 묻는다. "머리나 얼굴로? 가슴으로? 손 아니면 귀처럼 정숙한 부분으로? 아니 그렇지 않다. 인류를 널리 번식시켜 퍼뜨리는 그 부분은 너무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아서 웃지 않고는 언급할 수 없는 부분이다."[87] 그리고 바보신은 생명이 어리석음을 통해 태어날 뿐 아니라 어리석음 때문에 유지된다고 역설한다. "사람은 어리석고 미칠수록 즐겁고 어리석을수록 타인과 잘 어울린다. 아첨과 속임수가 없다면 백성이 지배자를, 상전이 하인을, 마님이 하녀를, 선생이 학생을, 아내가 남편을, 지주가 소작인을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바보신은 이렇게도 반문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법칙, 또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 의해 다스려진 나라가 단 하나라도 있는가?" 영웅들의 고귀한 행위도, 수많은 찬란한 글도, 도시도, 제국도, 사법행정도, 종교도, 인간의 계획과 판단도 모두 어리석음과 허영, 광기에 의해 유지된다. 인간이 이용하는 기술도 명예욕 때문에 나온 것이며 온갖 학문과 예술도 모두 이와 같은 것 때문에 나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어리석음은 인간의 본성에 꼭 어울린다. 인간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온갖 근심과 걱정을 벗어날 수가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을 즐길 수 있다.

또 바보신은 실상은 어리석으면서도 현명한 척하는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자기 아내가 수많은 남자를 가졌는데도 마치 정숙한 부인이라고 생각하는 남편들, 사냥에 미쳐 날뛰는 귀족들, 노름꾼들, 거짓말쟁이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해 면죄부를 받았다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등은 모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바보신은 '기독교적 어리석음'을 논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이나 힘있는 자들, 가진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여자들과 어부들을 가까이 한 것, 짐승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당나귀를 고르신 것, 성령이 독수리의 형상이 아니라 비둘기의 형상을 하고 내려 온 것,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양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어린양이라고 부르게 한 것 등은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높이 인정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바보신은 반문한다. 또한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에겐 하느님의 능력이며, 하느님은 세상의 미련한(어리석은) 것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어리석음과 혈연관계를 가진 종교라는 것이다.

5. 어록

당신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유물을 만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이 물려준 최고의 것, 즉 순수한 삶의 모범을 경멸합니다. [88]
나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파벌에 봉사할 수 없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89]
전쟁은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에게만 달콤합니다. [90]
이 세계, 즉 지구라고 불리는 행성 전체는 그 위에서 살고 숨쉬는 모든 사람들의 공동 국가입니다. [91]
나는 내 모든 관심을 그리스어에 돌렸습니다. 돈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리스 작가들의 책을 사는 것입니다. 그 후에 나는 옷을 사겠습니다. [92]
소경[93]의 나라에서는 외눈박이가 왕입니다. [94]
막이 내릴 때까지 모두가 역할을 맡는 연극이 아니라면 인생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95]

6. 여담

  • 자국어 발음을 우선하는 국립국어원의 한글표기 규칙에 따라 네덜란드어 발음인 '에라스뮈스'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그가 저술한 대부분의 책들이 라틴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국 학계에서는 라틴어 발음인 '에라스무스'를 많이 사용한다.[96]
  •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이자, 독일 초상화 예술의 정점인 한스 홀바인토머스 모어에게 추천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이 페이지에 실린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뮈스의 초상화가 에라스뮈스의 초상화들 중 가장 유명하다. 후에 홀바인은 토머스 모어헨리 8세의 초상화도 남겼다. 이들의 초상화 또한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 특이하게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에라스뮈스의 목조 조각상이 있는데 그 기원은 윌리엄 애덤스가 타고온 선박 에라스뮈스호의 선미상(船尾像)을 누군가가 노획하여 도치기현 류코인(龍江院)이라는 절에 세워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유물은 일본의 국보이다. 2012년부터 에라스뮈스 대학교를 주축으로 로테르담에서 반환 요청의사를 꾸준히 밝혀오는 중이나 매번 거절당하는 중이다. 네덜란드-일본 정상회의때도 마르크 뤼터 총리가 정중하게 반환의사를 보였음에도 아베 신조일본 총리는 "방법을 생각해보겠다"며 즉답을 회피했다.
  • 독일을 위한 대안싱크 탱크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 재단 또한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네덜란드 출신의 범유럽주의자인 에라스뮈스의 이름을 독일의 반EU정당인 대안당의 정책연구소에 썼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 재단 측에서는 "에라스뮈스의 자유주의 사상과 유럽적 가치관이 대안당과 일치하여 그의 이름을 땄다"고 밝혔다. #

[1] "에라스뮈스"는 그의 세례명이고, "데시데리위스"는 그가 1496년부터 추가해서 사용한 이름이다. "로테로다뮈스"는 그의 출신 지역 로테르담을 말한다. 라틴어인 이 단어들을 모두 함께 직역하면 "로테르담의 사랑받는 갈망"이 된다.[2] Collège de Montaigu. 파리 대학교 산하 인문학부(Faculté des Arts).[3]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33 에 에라스뮈스의 사상이 '성경적 인문주의'라고 나옴.[4] 에라스무스의 개혁적 성향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가톨릭'이라는 오해가 많지만, 에라스무스의 정체성은 분명하게 가톨릭이었다.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노예 의지론(인간은 천성이 악하여 예수와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는 선을 행할 수 없는 노예 의지의 상태에 있음)과 반대되는 입장인 가톨릭의 자유 의지론을 옹호하였다.[5] 382년에 히에로니무스가 교황 다마소 1세의 명을 받고 그리스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 중세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 전체가 이것을 표준적인 성서로 사용하게 되었다.[6] 에라스뮈스는 1466년(추정) 10월 27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이 그의 가계와 친척들에게 신비의 베일로 싸여 있다.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사생아 탄생 사실을 나중에 알았던 것 같다. 출생의 오점에 대해서 아주 예민했기 때문에 그 비밀을 공개하기보다는 감추려고 더 애를 썼다. 그가 만년에 출생에 대해 내놓은 그림은 낭만적이면서도 애수적인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의사의 딸을 만나 그녀와 결혼할 목적으로 구애를 했다. 아버지의 부모와 형제들은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하면서 결혼을 만류하는 동시에 성직자가 되라고 설득했다. 젊은이는 어린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집에서 달아났다. 그는 로마로 가서 원고를 베껴쓰는 필사자로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친척들은 젊은이에게 사귀던 여자가 죽었다는 거짓 소식을 보냈다. 그는 깊은 슬픔에 빠졌고 그 때문에 신부가 되어 종교 생활에 전적으로 헌신했다. 그러다가 고국에 돌아온 그는 가족들의 소식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제 신부의 몸이 되어 결혼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에 좋아했던 여자와 일체 접촉을 끊었다. 하지만 아들 에라스뮈스에게는 폭넓은 인문 교육을 시키기 위해 무척 애를 쓴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생후부터 줄곧 돌보았으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아버지도 곧 어머니의 뒤를 따라 사망했다. 에라스뮈스의 기억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열두 살 혹은 열세 살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에라스뮈스가 17세였떤 1483년 이전에는 사망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출생과 관련하여 에라스뮈스의 연대는 언제나 부정확하다. 에라스뮈스는 자신이 내놓은 이런 출생 이야기의 세부 사항들이 상당 부분 정확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는 그 젊은 여자와 알게 되어 에라스뮈스를 임신시켰을 무렵에 이미 신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임신은 두 젊은 남녀의 충동적인 행동에서 빚어진 것도 아니었다. 남녀는 상당히 오랫 동안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듯하다. 왜냐하면 에라스뮈스보다 세 살이나 많은 형 페터가 3년 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1~32)[7] 그를 둘러싼 환경이 열악하여 에라스뮈스는 순조로운 성장을 하지 못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막 네 살인 어린아이 때 이미 형 페더와 함께 호우다의 학교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데벤터에 있는 성 레부인 교회 산하의 유명한 학교에 에라스뮈스를 보낸 것은 아홉살 때였다. 어머니가 그를 따라갔다. 그는 1475년에서 1484년까지 9년 동안 데벤터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간에 위트레흐트 대성당의 성가대 소년으로 뽑혀 가 데벤터에 없었던 기간도 있었다. 에라스뮈스 자신은 14세 때 데벤터를 영원히 떠났다고 만년에 말했는데, 아마도 위트레흐트에 머물기 위해 잠시 떠났던 기간을 완전히 떠난 것으로 착각한 듯하다. 데벤터 시절의 회상은 그의 글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는 거기서 받은 교육에 대해 별로 고마움을 느끼지 않았다. 학교는 여전히 야만적이었다고 말했고, 아주 오래된 중세의 교과서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어리석음과 황당무계함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비난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4~35)[8] 어머니가 도시를 휩쓴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에라스뮈스의 데벤터 학창 시절은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에라스뮈스 형제를 호우다로 불러들였는데, 그 직후 아버지도 사망했다. 아버지는 교양인었다. 그는 그리스어를 알았고, 이탈리아에서 저명한 휴머니스트들의 연설을 들었으며,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복사하여 상당히 가치 있는 서재를 남겨 놓았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6)[9] 아버지 사망 이후에 에라스뮈스 형제는 세 명의 보호자들에게 맡겨졌다. 나중에 에라스뮈스는 그들의 배려와 의도에 대해 아주 나쁘게 회상했다. 그들의 행동을 에라스뮈스가 얼마나 과장한 것인지는 알기가 어렵다. 보호자들 중 한 사람은 호우다 학교의 교사인 페터 빙켈이었는데 중요한 직책에 있었으면서도 새로운 고전주의에 대해서는 별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의심할 나위 없이, 그의 피보호자들은 그 고전주의에 열광하고 있었다. (중략) 보호자들은 에라스뮈스 형제가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에라스뮈스 형제들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부담을 덜어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에라스뮈스가 볼 때, 그들의 이런 희망은 불성실한 보호를 은폐하려는 아주 이기적이고 한심한 작태였다. 그것은 권한과 권위를 징그러울 정도로 남용하는 것이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6~37)[10] 빙켈은 각각 21세와 18세인 형제를 이번에는 부아르뒤크에 있는 학교로 보냈다. 형제는 학교가 소속된 공동생활형제회 건물에서 살았다. 여기에는 데벤터 시절의 영광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에라스뮈스는 이 학교가 형제의 자연스러운 소질을 파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형제를 때리고, 비난하고, 엄격하게 대함으로써 수도원 생활에 알맞은 영혼으로 재창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형제의 보호자들이 의도했던 것이라고 에라스뮈스는 생각했다. 이제 대학에 갈 나이가 되었으나 형제는 의도적으로 대학 진학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식으로 여기서 2년 세월이 낭비되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7)[11] 또다시 전염병이 창궐하여 에라스뮈스 형제는 부아르뒤크를 떠나 호우다로 돌아왔다. (중략) 세 명의 보호자는 이제 노골적으로 형제에게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종용했다. (중략) 에라스뮈스는 보호자들의 종용에 굴복하여 스테인에 들어갔고, 그 직후인 1488년에 수도자가 되겠다는 서약을 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8~39)[12] 만년에 이르러 수도원에 들어가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왜곡되어 자리 잡았다. 수도자 신분에 대한 후회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그런 심리적 왜곡이 발생했던 것이다. (중략) 그러나 스테인 시절에 에라스뮈스가 쓴 편지들은 수도원 생활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보여 주지 않는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40)[13] 스테인에서 그는 상당한 자유를 누렸고, 고전 고대에 대한 지적인 동경을 함양했으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수도자들과 교분을 쌓았다. 특히 그의 관심을 끈 수도자가 셋 있었다. 에라스뮈스의 친한 친구는 스테인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로테르담의 세르바티우스 로저, 호우다의 빌렘 헤르만스였고, 그 외에 약간 나이가 많은 호우다의 코르넬리우스 헤라르트가 있었는데 보통 아우렐리우스라고 불렀다. 에라스뮈스는 이들과 함께 즐겁게 글을 읽거나 농담을 하며 놀았다.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편지를 교환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41)[14] 데벤터 학교에서 고전 고대에 대하여 새로운 취향을 갈고 닦을 기회가 그리 적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스테인 수도원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라틴 문학을 공부했다. 에라스뮈스가 후에 회상한 바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그는 상당히 많은 라틴어로 글을 쓰는 저자들을 알고 있었다. (중략) 그는 라틴어로 시를 쓰고 순수한 라틴어 문장을 쓰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45~47)[15] 이런 분위기로부터 에라스뮈스의 최초 저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는 이 원고를 그 후에 잃어버렸다가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부분적으로 되찾게 되는데 제목은 『야만인에 반대하며』이다. 닥터 알렌에 의하면, 그는 이미 스테인 시절에 이 작품의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52)[16]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원 담장은 점점 더 그를 억세게 조여 들어왔다. 친구들과의 박식한 시문 교환, 사스보우트라는 친구와의 그림 그리기 등에 몰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갑갑한 수도원 생활과 협량하고 비우호적인 환경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중략) 에라스뮈스는 1492년 4월 25일 위트레흐트 주교인 부르고뉴의 다비드에 의해 신부로 서임되었는데, 우리는 이때의 주변 상황이나 에라스뮈스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그의 서임은 수도원을 떠나려는 계획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수도원을 떠난 후에는 미사에도 잘 참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캉브레 주교인 베르겐의 앙리를 보좌하는 비서직을 제안 받았기 때문에 수도원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라틴어 학자 겸 문필가라는 명성 덕분에 이런 보직을 얻었다. 캉브레 주교는 추기경 자리를 얻기 위해 로마로 여행할 계획이었는데, 에라스뮈스의 재주가 소용이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한 듯하다. 위트레흐트 주교, 수도원 원장, 종단의 원장 등도 에라스뮈스의 보직 변경을 위한 이동을 승인했다. 하지만 수도원을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에라스뮈스는 주교의 비서로 근무하면서 수도원 참사회원의 복장을 갖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52~53)[17] 에라스뮈스가 수도원을 떠난 해는 1493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 23세였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54)[18] 주교 밑에서 근무하는 것은 결국 실망스러운 일로 판명되었다. 에라스뮈스는 베르겐, 브뤼셀, 메흘린 등지로 관저를 빈번히 옮겨 다니는 주교를 수행했다. 주교는 아주 바빴으나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쁜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의 소망인 로마 여행은 성사되지 않았다. 주교는 처음 몇 달 동안에는 에라스뮈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여 주었으나, 그 후에는 기대한 것만큼의 배려가 없었다. 그리하여 에라스뮈스는 다시 우울한 심리상태에 빠져들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55)[19] 에라스뮈스와 캉브레 주교와의 관계가 실망스럽게 끝나자 거기서 빠져나갈 길을 알려준 사람은 제임스 바트였다. 바트는 파리에서 예전에 공부한 적이 있는데, 에라스뮈스는 이제 로마행이 좌절되었으므로 파리로 갈 생각을 했다. 주교는 파리 행을 승인하면서 약간의 급여를 약속했다. 에라스뮈스는 1495년(추정) 늦여름에 온 세계의 대학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파리 대학을 향해 출발했다. 바트의 영향력과 노력 덕분에 이런 행운을 잡은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58)[20] 스탄동크는 호우다에 있는 공동생활형제회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아주 엄격한 개혁 정신을 전수받은 수도자였다. 그는 빈데스하임 수도회에서 요구하는 절제된 금욕보다 더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했는데, 이런 명성은 교회 이외의 분야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그는 식사 중에 일체의 고기반찬을 거부했다. 몽테귀 대학의 학장 자격으로 스탄동크는 가장 엄격한 생활 규칙을 부과했고, 조금이라도 그것을 위반하면 징벌을 가했다. 그는 이 대학에 가난한 학자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했는데, 학자들은 이곳에서 거의 수도원 공동체 같은 생활을 했다. 캉브레 주교는 이 사람에게 에라스뮈스를 추천했다. 비록 에라스뮈스는 가난한 학자들의 공동체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ㅡ그는 거의 서른 살이 다 되었다 ㅡ 그 대학의 가혹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이 체험이 파리 체류 초창기의 추억을 더욱 씁씁하게 만들었고, 금욕과 고행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감이 그의 내면에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더욱 지독한 형태로 다시 맛보기 위해 파리로 왔단 말인가? 에라스뮈스가 파리 행을 결심한 주된 목적은 신학박사 학위를 따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에라스뮈스로서는 그리 어려운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수사로서 수도원에서의 학력이 인정되어 문과대학에서의 사전 학습은 면제되었고, 게다가 그의 학식, 놀라운 지능, 부지런함 덕분에 단시일 내에 시험과 논문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파리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는 중간에 다른 곳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1499년까지의 파리 체류는 고통과 분노의 시기였다. 학자 생활에 필수적으로 따라다니는 가난과 그 가난을 이겨내기 위하여 부끄러운 생계 수단(가정교사 혹은 잡문 쓰기)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고통의 시기였다. 그렇지만 앞날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는 빛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61~62)[21] 에라스뮈스는 신학 연구를 시작했다. 성경과 『문장의 책』 강의를 열심히 수강했다. 『문장의 책』은 중세의 신학 교과서인데 그 당시에도 널리 교재로 이용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성경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그는 인근 성 주네비에브 수도원에 가서 성자들을 기념하는 설교를 했다. 하지만 그는 상의나 설교에 대해서는 별로 신명이 나지 않았다. 치밀한 논리만을 강조하는 학교 분위기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어떤 형태의 스콜라주의든 싸잡아서 비난했고, 그 사상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63)[22] 에라스뮈스에게 혐오증을 안겨준 것은 그 시스템의 건조하고 쓸모없는 방법론만이 아니었다. 에라스뮈스의 사상과도 관련이 있었다. 에라스뮈스의 마음은 넓고 날카로웠지만 철학적이거나 교리적 추론을 깊게 파고들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콜라주의만 싫어한 게 아니었다. 에타펠의 르페브르가 가르치는 젊어진 플라톤 사상과 재해석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도 고리타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파리 시절, 에라스뮈스는 성경정, 도덕적 바타을 깔고서 라틴 문학을 선호하는 휴머니스트였고, 오래 전부터 좋아해 온 히에로니무스 연구에 몰두했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에라스뮈스는 자신을 시인 겸 연설가라고 소개했는데, 연설가는 곧 문필가라는 뜻이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66)[23] 에라스뮈스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문학적 휴머니즘의 본부를 접촉했다. 이 이름 없는 네덜란드 수도자는 칭송으로 가득 찬 장문의 자기소개 편지를 썼고 거기에다 자신이 공들여 쓴 시도 첨부했다. 편지의 수신인은 삼위일체파의 단장이고 파리 휴머니스트들의 우두머리인 로베르 가갱이었다. 가갱은 아주 호의적인 답변을 보냈다. "당신이 보낸 서정시로 미루어 볼 때, 공부를 많이 한 학자인 것 같습니다. 당신만 좋다면 언제든 교제할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칭찬을 너무 많이 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때로는 그것이 아첨처럼 보이니까." 이런 편지 교환을 한 직후 에라스뮈스는 이 저명한 인사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가갱의 이름 덕분에 파리의 독자층에 그의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덕분에 우리는 에라스뮈스의 경력에서 늘 발견되는 문필업과 인쇄업 사이의 연결고리를 최초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갱은 만능의 인물이었고 그가 라틴어로 집필한 프랑스어 역사책인 『프랑스인들의 기원과 업적 집성』이 막 인쇄 중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나온 최초의 휴머니스트 역사서였다. 인쇄소는 이 책을 1495년 9월 30에 인쇄 완료했으나, 총 136전지 중 2장의 전지가 공백이었다. 그 당시에는 책의 페이지를 공란으로 남겨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갱은 당시 몸이 아파서 그 여백을 채워 넣을 수가 없었다. 인쇄소는 지혜를 발휘하여 1장의 전지는 가갱의 시, 간기, 파우스투스 안드렐리누스와 또 다른 휴머니스트의 칭송시 각 1편으로 채워 넣었다. 그러나 마지막 1장이 문제였다. 이때 에라스뮈스가 등장하여 장문의 추천사를 써줌으로써 그 여백을 채웠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의 이름이 가갱의 역사서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일로 에라스뮈스는 가갱의 후원을 더욱 확고하게 받게 되었고, 가갱 또한 에라스뮈스의 놀라운 라틴어 실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67~68)[24] 그 당시 지적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의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고, 또 언제나 고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교회의 성직급이나 저명한 후원자의 지원 혹은 그 둘 다에 의존해야 되었다. (중략) 에라스뮈스 같은 처지의 문필가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메세나(후원자)를 찾는 것이었다. 휴머니스트의 뒤를 봐주는 메세나는 생활비를 대주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격언집』 중 「암소가 죽지 말기를」이라는 부분에서 에라스뮈스는 메세나를 얻는 그럴 듯한 방법을 묘사하고 있다. 파리 시절, 에라스뮈스의 행동이 좀 품위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현대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시 그는 호구지책이 막연한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70)[25] 파리에서 그는 새로운 학생으로 마운트조이(윌리엄 블라운트)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화살통에 두 개의 화살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바트를 계속 격려하면서 베레의 안나에게 자리를 얻을 수 있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마운트조이를 후원자로 모시는 것이었다. 에라스뮈스는 친구 빌렘 헤르만스에게 젊은 마운트조이 공에게 편지를 써서 공의 문학 애호를 칭송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추천해 주도록 부탁했다. (중략) 에라스뮈스는 마운트조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영국으로 떠났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73~74)[26] 에라스뮈스는 영국에 처음 건너가서 1499년 초여름부터 1500년 초까지 그곳에 머물었다. 영국 체류는 그가 내면적으로 더욱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박식한 시인, 지체 높은 귀족의 피보호자 자격으로 영국에 건너갔고, 문학적 재능을 알아주고 평가하는 더 넓은 세계와 더욱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영국을 떠날 무렵에는 장래에 여건이 형성된다면 좀 더 진지한 사업에 자신의 재능을 활용할 수 있기를 열렬히 바랐다. 이런 심적 변화는 영국에서 두 명의 새로운 친구를 만났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었다. 두 친구는 지금까지 알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인품을 갖추고 있었는데 바로 존 콜렛과 토머스 모어였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75)[27] 이제 영국 체류 기간이 거의 끝나가자 그는 파리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체류 말미에 그는 이탈리아 머물고 있는 예전 제자 로버트 피셔에게 편지를 썼다. 영국 체류가 아주 만족스럽다는 활기찬 글이었다. 그는 날씨에 아주 민감한 사람인데 영국의 부드럽고 상쾌한 날씨가 마음에 든다고 적었다. (중략) 1500년 1월 영국 땅을 떠나면서 에라스뮈스는 봉변을 당했다. 그것은 영국에 대한 즐거운 기억을 망쳐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앞날에 또 다른 장애를 설치해 놓았다. 그 일은 그의 민감한 영혼에 날카로운 가시로 남았고,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를 괴롭힐 터였다.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파리에서 해온 생활은 아주 불안정한 것이었다. 주교의 지원은 거의 끊긴 상태였다. 베레의 안나는 보조를 해주기는 했지만 아주 조금씩 찔끔찔끔 지원해 주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마운트조이에게 일방적으로 기댈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오는 날을 대비하여 모아 놓은 약간의 돈은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어렵게 모은 돈 20파운드를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왔다. 그런데 에드워드 3세의 법령은 황금과 순은의 해외 반출을 금지했다. 그러나 모어와 마운트조이는 영국 동전이 아니라면 안전하게 영국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다고 에라스뮈스를 안심시켰다. 막상 도버 세관에 도착하니 그곳 관리들은 다른 말을 했다. 그는 여섯 개의 "에인절" 동전만 가지고 나갈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세관 관리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맡기는 것이지 사실상 몰수였다. 이 사건의 충격 때문에 에라스뮈스는 칼레에서 파리로 오는 도중에 자신이 도둑과 살인자들에게 위협당하는 광경을 여러 번 공상하게 되었다. 그 돈을 잃어버린 것은 에라스뮈스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하기 싫은 벨에스프리(재미있게 가르치는 사람) 직업을 다시 잡아야 했다. 후원자들로부터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온갖 굴욕스러운 가르침도 다 해주어야 되었다. 그것은 위엄을 중시하는 그의 정신 상태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런 재정적 불운이 이 세상과 에라스뮈스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어려움 때문에 이 세상에 『격언집』이라는 책이 나왔고, 그 책 덕분에 에라스뮈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87~89)[28] 그가 이미 손 놓아 버린 문학 연구의 결과물 덕분에 에라스뮈스에게 명성이 찾아들었다. 도버에서 봉변을 당한 해인 1500년에 이 작품이 출간되어 마운트조이에게 헌정되었는데 제목은 『격언집Adagiorum Collectanea』이었다. 이 책은 고대의 라틴 작가들로부터 약 8백 개의 격언들을 뽑아서 모아 놓은 것인데, 우아한 라틴어 문장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격언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헌사에서 에라스뮈스는 고대의 유명한 문장들을 이런 식으로 한데 모아 놓은면, 문장 스타일 아름답게 하고, 또 글의 주장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지적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96)[29] 에라스뮈스는 나중에 『엔키리디온(기독교 전사를 위한 지침서)』은 우연한 충동에 의해 집필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부 환경이 내면의 충동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외부 환경은 이러하다. 투르넴 성에 바트의 군인 친구가 자주 놀러 왔다. 그는 아주 방탕한 인물이었는데 신앙심이 경건한 아내에게 아주 못되게 굴었다. 게다가 그 군인은 교양이라고는 별로 없었고 신부들을 아주 미워했다. 그 외에는 그런대로 인품이 괜찮았는데, 특히 에라스뮈스는 성직자인데도 미워하지 않았다. 그 군인의 아내는 바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런 부탁을 해왔다. 에라스뮈스가 남편에게 종교적 감화를 줄 수 있는 메모를 좀 써주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에라스뮈스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고 장 비트리에도 에라스뮈스가 써낸 메모에 대해서 적극 동조했다. 에라스뮈스는 나중에 이 쪽지들을 루뱅으로 가져가서 다듬었는데, 그것이 디르크 마에르텐스에 의해 안트베르펜에서 출간되었다. 이것이 『엔키리디온』이 나오게 된 외부적 경위이다. 하지만 내면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에라스뮈스는 당시의 종교적 생활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기계적인 전례와 영혼 없는 기독교적 의무를 강조하는 그 생활이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런 비판적 의식이 밑바탕이 되어 『엔키리디온』이 나온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18~119)[30] 이상이 책의 외부적 윤곽이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신학적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기회를 발견한다. 그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성경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성경의 순수한 1차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자면 기독교인은 고대 작가들, 웅변가들, 시인들, 철학자들을 공부하면서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 또 초기 교회의 교부들 가령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보다 후대의 많은 논평가들까지 섭렵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에라스뮈스의 주된 주장은 이러하다. 종교는 외면적 의례를 지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유대주의적 의례주의이고 아무런 가치도 없다. 아무런 감흥 없이 시편 전편을 읽어 내려가는 것보다는, 단 한 줄이라도 시편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며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하여 더 깊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례는 영혼을 새롭게 하지 못할 경우 아무 가치도 없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미사를 몇 번 참석했다고 회수를 헤아리면서 그 회수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미사 도중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미사가 끝나고 교회를 나서면 일상생활의 습관으로 고스란히 되돌아가는 것이다." "당신은 매일 희생을 봉헌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당신은 성인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유물을 만지고 싶어 한다. 당신은 베드로와 바울의 은총을 얻고 싶은가? 그렇다면 베드로의 신앙과 바울의 자비를 모방하도록 하라. 이렇게 한다면 로마 순례를 열 번 갔다 온 것보다 더 많은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교리와 성무일과를 거부하지 않는다. 비천한 사람들의 신앙을 동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성무일과로 구성된 컬트가 되어 버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신앙을 그토록 허물어트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런 얘기를 하기가 정말 부끄럽다,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소한 의례에만 매달린다. 그 의례라는 것은 한심한 심성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때로는 그런 것을 만든 의도조차도 의심스럽다. 그런데 성직자들은 남들에게 그 의례를 준수하라고 밉살스러울 정도로 강요하면서 그것을 따르면 신임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을 해댄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진정한 기독교 정신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 이 말씀은 기독교적 자유의 교리를 온전히 포함하고 있고, 나중에 종교개혁의 시대가 도래하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게 된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20~121)[31] 1504년 여름, 루뱅 근처의 파르크에 있는 프레몬스트라텐시아 수도원의 도서실에서, 그는 발라의 신약성경 주석 원고를 발견했다. 그것은 복음서, 바울 서한, 계시록 등의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주석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었다. 불가타(라틴어역 성경)가 오류가 전혀 없는 번역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13세기 초에 로마에서 공인되었다. 수도원 종단과 개인 성직자들이 그것을 교정하려 했으나, 그 작업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세기에 들어와 리라의 니콜라스도 이 일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역시 흐지부지 되었다. 발라의 원고가 에라스뮈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에라스뮈스는 원래 히에로니무스의 저작을 편집하고 바울 서신을 논평할 계획이었다.(그는 나중에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냈다.) 그러나 발라의 원고를 읽은 것을 계기로 신약성경 전체로 관심을 돌려서 성경의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로 결심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30)[32] 1505년 가을 에라스뮈스는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갔는데 그 이유와 경위는 불분명하다. (중략) 여러 면에서 영국에 체류하는 것이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더 유리해 보였다. 거기에는 지위가 높고 배려심이 많은 오랜 친구들이 있었다. 그는 영국에 도착하자 마운트조이의 성관에서 여러 달을 보냈고, 콜렛과 모어를 만났다. 영국에서 탁월한 그리스어 학자들을 만났는데, 그들과의 대화는 유익하고 또 유쾌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31~132)[33] 헨리 7세의 궁정 주치의인 제노바 사람[34] 헨리 7세의 궁정 주치의인 제노바 사람 조반니 바티스타 보에리오는 이탈리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두 아들을 대동할 선생을 찾고 있었다. 에라스뮈스는 그 자리를 수락했다. 두 아들을 가르치거나 그들의 일과를 따라다녀야 할 의무는 없고, 그들의 공부를 감독하고 안내만 해주면 되는 조건이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35)[35] 에라스뮈스는 1506년 9월 4일, 토리노에 도착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박사 학위 자체는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신학적 저술 능력을 인정해 주는 공식 증표로 여겼고, 나중에 비판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그의 입장을 옹호해 줄 것으로 보았다. 그는 편지에서 박사 학위를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초창기 파리 유학 시적에 박사 학위를 받을려고 애쓰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네덜란드 친구들에게조차도 그 학위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1501년 초 베레의 안나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이탈리아에 가서 박사 학위나 따 볼까요? 이탈리아 여행도 박사 학위도 다 어리석은 계획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시대의 관습에 순응해야 합니다."세르바티우스와 요하네스 오브레히트에게는 절반쯤 변명하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네. 이건 전혀 나의 의도가 아니었어. 친구들의 기도가 너무 간절하여 받아들이기로 했지."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38~139)[36] 볼로냐는 다음 행선지였다. 에라스뮈스가 거기 도착했을 때 전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어서 할 수 없이 당분간 피렌체로 가 있어야 했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율리우스 2세 교황은 군대의 맨 앞에 서서 볼로냐를 향해 행군했다. 벤티볼리로부터 그 도시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은 곧 달성되었고, 볼로냐는 이제 방문해도 좋은 안전한 도시가 되었다. 1506년 11월 11일, 에라스뮈스는 용감한 교황이 그 도시에 입성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39)[37] 볼로냐에서 에라스뮈스는 계약에 의거하여 그 해(1506년) 말까지 보에리오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했다.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중략) 1507년 10월 에라스뮈스는 볼로냐에서 베네치아의 유명한 인쇄업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바디우스의 기존 출판본이 절판되었고, 또 너무 내용이 허술하므로 자신이 새롭게 라틴어로 번역한 에우리피데스 희곡 두 편을 출판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중략) 그 해 말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친밀해져서 에라스뮈스는 계획되었던 로마행을 취소하고 그 대신 베네치아로 가서 그의 책 출판을 직접 감독하기로 했다. 이제 두 사람의 출판 계획은 에우리피데스 라틴어 번역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알두스는 엄청나게 내용이 불어난 『격언집』도 발간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39~141)[38] 에라스뮈스는 베네치아에 도착하자마자 인쇄소를 직접 찾아갔으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알두스는 원고 교정을 보느라고 바빴고, 그를 찾아온 손님이 평소에도 자주 인쇄소에 들려 괴롭히는 호사가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하여 무시했다. 그러나 그 손님이 에라스뮈스라는 것을 알고서는 진심 어린 환영을 했고, 곧 장인 안드레아 아솔라니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도록 조치해 주었다. 그는 이 집에서 8개월을 보냈고, 인쇄소가 그의 적성에 딱 맞는 일터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신명이 나서 열심히 일했지만 때때로 너무 황급하게 일하는 것을 탄식했다. 그래도 인쇄소에서 교정하고 편집하는 것은 그의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다. 볼로냐에서 손대기 시작한 『격언집』의 증보 작업은 아직 완료가 되지 않았다. 에라스뮈스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주 황급하게 일을 했습니다. 나는 글을 쓰고 알두스는 인쇄를 했지요." 한편 그는 베네치아에서 '뉴 아카데미'의 새로운 문학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들은 요하네스 라스카리스, 밥티스타 에그나티우스, 마르쿠스 무수루스, 그리고 젊은 제롬 알레안더 등인데 알레안더는 아솔라니의 집에서 에라스뮈스와 한 방에 기거하면서 많은 미출간 그리스 저자들의 책자를 가져와 『격언집』 증보를 위한 새로운 자료들을 제공했다. 플라톤의 저작들, 플루타르코스의 『위인전』과 『모랄리아』, 핀다로스, 파우사니아스 등인데, 이런 저자들로 인하여 『격언집』의 내용은 크게 불어나게 되었다. 안면이 없지만 에라스뮈스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그에게 새로운 자료들을 가져다주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42~143)[39] 1508년 연말 무렵에 그는 젊은 알렉산더 스튜어트의 수사학 선생 자리를 받아들였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의 사생아인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였고, 현재는 파두아 대학에 유학 온 학생이었다. 전쟁의 위험 때문에 그들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시에나로 옮겨 갔다. 여기서 에라스뮈스는 로마를 방문할 휴가를 받았다. 그는 1509년 초에 로마에 도착했는데, 북유럽의 이름 없는 성직자가 아니라 잘 알려지고 존경받는 작가로서 대접을 받았다. 영원한 도시의 매력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고, 고위 성직자들의 배려와 환대에 마음이 우쭐해졌을 것이다. 조반니 데 메디치, 도메니코 그리마니, 리아리오, 기타 고위직들이 그를 접대했다. 그는 교황청의 어떤 보직도 제안 받은 듯하다. 하지만 그는 젊은 대주교에게 되돌아가야 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49)[40] 1509년 4월 21일 영국왕 헨리 7세가 죽었다. 그의 후계자 헨리 8세는 에라스뮈스가 1499년에 엘섬 궁에서 만나 영국을 칭송하는 찬시를 바쳤던 젊은 왕자였다. 그 왕자는 에라스뮈스가 볼로냐에 머물던 시절 라틴어 편지를 써서 그에게 보내기도 했는데, 이 편지는 에라스뮈스가 작성했다는 설도 있고, 아니면 15세의 왕자가 썼다는 설도 있다. 후원자를 얻는 절호의 기회라고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이 학문을 숭상하는 왕자가 이제 헨리8세로 영국의 보위에 올랐으니 정말 좋은 기회였다. 에라스뮈스의 가장 충직한 메세나인 마운트조이 공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 사실을 1509년 5월 27일자 편지에서 그에게 지적해 보였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50)[41] 에라스뮈스가 영국 방문을 결정하기 전에 망설였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로마의 그리미니 추기경이 그를 붙잡으려 한다고 에라스뮈스는 말했지만 뿌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509년 7월 로마와 이탈리아를 영영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로 알프스를 넘어갔다. 이번에는 프랑스 쪽으로 가지 않고 슈플뤼겐을 경유하여 스위스를 통과했다. 3년 전 이탈리아로 오는 길에는 영감이 떠올라서 「말 탄 사람의 노래」를 썼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장래의 경건한 신앙생활을 명상하는 기교적이면서도 애수어린 시였다. 이번에도 그의 천재성이 다시 발동하여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지만, 라틴 뮤즈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애수적인 명상의 시보다 훨씬 심오하면서도 규모가 큰 작품이었다. 제목은 『우신 예찬』인데 장차 에라스뮈스의 대표작이 된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52~153)[42] 알프스 산길을 말 타고 넘어갈 때 틀에 박힌 업무에서 자유롭게 해방된 에라스뮈스의 정신은 지난 몇 년 동안에 공부했던 것, 읽었던 것, 보았던 것을 곰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엄청난 야망, 자기기만, 오만, 자부심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다시 만나게 될 토머스 모어를 생각했다. 모어는 그가 아는 친구들 중에 가장 재치 있고 현명한 사람인데 기이하게도 모로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모로스는 그리스어로 바보 라는 뜻인데, 그건 모어의 성격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토머스 모어와 대화를 하면서 나누게 될 즐거운 농담을 기대하면서 에라스뮈스의 마음속에서는 상쾌한 유머와 현명한 아이러니가 가득 찬 책, 모리아이 엔코미움, 즉 『우신 예찬』이 구상되었다. 이 세상은 어디에서나 어리석음이 저질러지는 무대라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인생과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 모든 사실이 스툴티티아(Stultitia: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라틴어, 곧 우신愚神)의 입을 통하여 발언되다. 스툴티티아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와 정반대 위치에 있는 어리석음의 여신인데 자기 자신의 위력과 유용성에 대하여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계속 자신을 칭찬한다. 이 작품은 그가 라틴어로 번역한 리바니우스의 『웅변』처럼 웅변의 형식을 취한다. 주제로 말해 보자면 그가 3년 전에 번역했던 루키아노스의 『갈루스』에서 그 유희의 정신을 배워 왔을 것이다. 이 작품은 에라스뮈스의 총명한 정신 속에서 오랫동안 은밀하게 숙성되어 왔다. 그가 『격언집』의 증보판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고전 작품들이 그의 엄청난 기억 창고 속에 저장되어 즉시 꺼내 쓸 수 있는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고전 작가들의 지폐를 바로 옆에 대기시켜 놓은 상태에서 그는 자신의 논증에 필요한 핵심들만 뽑아내어 이 작품을 썼다. 그는 런던에 도착하여 버클러스베리에 있는 모어의 집에 여장을 풀고서, 신장결석의 간헐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며칠 사이에 이미 구상되어 있던 내용들을 써 내려갔다. 옆에 고전 작가들의 텍스트를 대기시켜 놓지도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이미 쓰고 싶은 말이 다 정리되어 있었다. 스툴티티아는 자매 여신인 팔라스(미네르바)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태어났다. 형식이나 이미지에 있어서 『우신 예찬』은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고, 창조적 충동이 순간적인 영감을 발하면서 만들어진 걸작이다. 우신이 그녀의 청중을 상대로 웅변을 한다는 형태가 끝까지 잘 유지되고 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54~156)[43]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에라스뮈스는 고열이 나는 발한증으로 런던에서 한동안 드러누워 있어야 했다. 이어 병에서 회복하자 전에 머물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퀸스 칼리지로 갔다. (중략) 케임브리지에서 에라스뮈스는 신학과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수입은 더 더욱 올리지 못했다. 그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성직록이 마침내 수여되었다. 후견자인 윌리엄 워럼 대주교가 1512년에 그를 켄트 주의 올딩턴에 있는 교회의 비상근 신부 자리를 주었던 것이다. 그 교회에 내려가 살 필요는 없었고, 연간 20파운드의 연금을 받는 조건이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77~180)[44] 1513년 1월 5일 그는 런던에서 증보판 『격언집』에 들어갈 서문ㅡ바디우스가 애타게 기다리는 것ㅡ을 완성했다. 그런데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과 플아스에서 저자와 출판사 사이에서 대리인으로 일하는 쾰른의 프란시스 버크만이 그 서문을 에라스뮈스에게서 받아서 파리의 바디우스가 아니라 바젤의 요하네스 프로벤에게 건넨 것이었다. 프로벤은 당시 에라스뮈스의 승낙도 없이 베네치아 판 『격언집』의 재판을 막 끝낸 상태였다. 에라스뮈스는 이런 착오 혹은 배신에 대하여 분노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6개월 뒤 에라스뮈스는 가방을 싸들고 바젤로 가서 프로벤과 화기애애한 사업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이름은 영원히 맺어지게 되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85)[45] 1513년 봄, 영국은 오랫동안 준비해 온 프랑스 공격을 마침내 감행했다. 영국은 막시밀리안 황제의 군대와 협력하면서 기네게이트 근처에서 프랑스 군을 격파했고, 테루안을 항복시켰으며, 그 후에는 투르네도 함락시켰다. (중략) 헨리 8세는 군사적 명성을 드높이면서 1513년 11월에 영국으로 되돌아와 의회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에라스뮈스는 영국 내의 일반적 즐거움과 열광적 칭송에 동참하지 않았다. 전쟁의 소란과 전쟁의 광적인 의미에 대하여 에라스뮈스는 깊은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중략) 1514년 여름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에라스뮈스는 영국을 떠나기로 마음을 완전히 굳혔다. 그는 짐 가방을 안트베르펜의 친구 페터 길레스에게 미리 보냈고 칼레 근처의 햄스 성에 있는 마운트조이를 잠시 찾아갔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중략) 며칠 뒤인 1514년 7월 초, 그는 영국 해협의 반대편에 도착했다. 그는 1514년 이후 영국에 잠시 다녀온 적이 세 번 있었지만, 그 날에 눌러 살지는 않았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87~191)[46] 에라스뮈스는 먼저 남부 네덜란드를 통과하면서 여러 명의 친구들과 후견인들을 만났고, 루뱅 대학과의 안면을 새롭게 텄다. 이어 라인 강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1514년 8월 말에 바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일찍이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명예롭고 즐거운 환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의 휴머니스트들은 편지와 리셉션과 주연을 통하여 그를 "이 세상의 빛"이라고 칭송했다. 그들은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네덜란드의 학자들에 비하여 훨씬 더 진지하고 열광적으로 그를 찬양했다. 그들은 에라스뮈스가 마치 독일 사람인 것처럼 혹은 독이르이 보석인 것처럼 높이 평가했다. 프로벤을 처음 만났을 때 에라스뮈스는 일부러 신분을 감추고서 자신을 에라스뮈스의 친구 겸 대리인인 척 소개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즐거움을 맘껏 맛보았다. 독일의 환경은 그의 마음에 딱 들었다. "나의 독일, 내가 너무 늦게 알아 후회되고 부끄러운 나의 독일." 곧 그가 감독하기 위해 찾아온 인쇄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6년 전 베네치아 인쇄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원기왕성하게 일했다. 그는 커다란 인쇄소에서 여러 학자들에 둘러싸여 열심히 일했다. 가끔 휴식을 취할 때면 학자들이 그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시했다. "나는 아주 상쾌한 뮤즈의 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학식을 갖춘 뛰어난 학자들이 옆에 많이 있습니다!" 8월에 플루타르코스의 사소한 작품들의 번역본이 프로벤에 서 발간되었다. 『격언집』은 수정ㆍ증보되었고, 당초 바디우스에게 주려던 서문이 수록된 상태로 인쇄되었다. 동시에 루뱅에서는 디르크 마에르텐스가 에라스뮈스의 저작을 작업하고 있었다. 그가 루뱅을 경과하는 중에 디르크에게 쉬운 라틴어 텍스트 모음집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프로벤을 위해서 에라스뮈스는 세네카 작품을 작업하여 1515년에 펴냈고, 또 라틴 건축에 관한 저작도 한 권 발간했다. 하지만 히에로니무스 편집과 신약성경 주석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96~197)[47] 신약성경 주석은 히에로니무스보다 더 그의 마음 가까이에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그 주석 작업의 성격도 점점 바뀌었다. 발라의 『주석』을 읽고서 불가타의 텍스트 비평에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1505년에서 1506년까지 두 번째로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존 콜렛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약성경을 그리스어 원본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본은 불가타와 다른 점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콜렛 이외에 이 번역본을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주석이 들어간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발간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젤에 도착한 직후, 프로벤과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발간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했다. 그러다 후에 마음을 바꿔 그것을 이탈리아에서 출간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탈리아로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프로벤의 더 좋은 제안에 마음이 움직여 이탈리아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1515년 봄에 영국으로 짧은 출장을 다녀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거기에 놔두고 왔던 신약성경 라틴어 번역본을 가져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름에 그는 바젤로 돌아와 프로벤의 인쇄소에서 다시 작업을 재개했다. 1516년 초, 에라스뮈스의 주석이 달린 교정된 그리스어 텍스트로 된 신약성경이 발간되었고, 또 불가타와는 크게 다른 에라스뮈스의 라틴어 번역본 신약성경도 함께 발간되었다. 특히 에라스뮈스의 라틴어역 신약성경은 대담한 신학적 시도였는데, 이 두 중요한 저작이 나오자 에라스뮈스는 신학 연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고전 문학의 태두요 기준인 동시에 이제 신학 연구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권위는 모든 나라에서 높아졌고 그의 편지들은 점점 분량이 늘어갔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198~199)[48] 1515년에 새롭고 유망한 후견인이 등장했다. 그는 브라반트의 총리인 장 르 소바주였는데, 에라스뮈스에게 젊은 카를 5세의 고문관 자리를 추천했고 1516년 초에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것은 명예직에 불과했으나 그래도 연간 2백 플로린의 연금이 나오는 자리였다. 하지만 아주 부정기적으로 지급되었다. 군주의 고문관이라는 자리에 걸맞게 그는 『기독교 군주의 교육』이라는 논문을 저술했다. 군주의 교육을 다룬 것인데 에라스뮈스의 성격과 기호에 걸맞게 정치적 문제보다는 도덕을 논한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00)[49] 하지만 그는 루뱅에서 4년(1517-21)을 보내게 된다. (중략) 1516-18년은 에라스뮈스의 경력이 절정에 오른 시기였다. 점점 더 많은 칭송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사람들은 뭔가 위대한 사업을 기대했고, 에라스뮈스가 그런 일을 해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브뤼셀에 가면 스페인 사람, 이탈리아 사람, 독일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에라스뮈스와 인터뷰한 사실을 나중에 자랑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중략) 츠빙글리는 1516년에 이렇게 썼다. "스위스 사람들은 에라스뮈스를 한 번 보았다는 것을 엄청난 영광으로 생각한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07)[50] 그는 뛰어난 라틴어 학자 겸 재치 넘치는 사람에서 훌쩍 성장하여, 그 시대의 문명을 회전시키는 중심축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시대의 두뇌, 심장, 양심이 되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위대한 구원의 말씀을 발언하도록 소명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으리라. 어쩌면 이미 그런 말씀을 발언했는지도 몰랐다. 그는 순수한 지식이 손쉽게 승리를 거두고 장차 기독교적 온유함이 온 세상에 충만하리라고 믿었다. 그런 목소리가 이미 에라스뮈스의 라틴어역 신약성경 서문에 들려온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12~213)[51] 루뱅의 성직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에라스뮈스를 환영했다. 그들의 지도자인 대학 부학장 아트의 장 브리아르는 그리스어판 신약성경을 어러 번 칭찬하여 에라스뮈스를 기쁘게 했다. 곧 에라스뮈스는 신약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루뱅 신학 교수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곳의 학문적 분위기는 보수적이었고, 영국 학자들과 비교해 볼 때 그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어떤 묘한 정신적 분위기를 느꼈고, 결국에는 그것을 불신하게 되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72)[52] 사람들이 불가타의 텍스트를 두고서 서로 싸우는 것은 그를 역겹게 했다. 그들은 불가타의 텍스트가 그리스어 원본과 차이가 있고, 또 와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어 원전으로 되돌아가서 원래의 형태와 최초의 의미를 파악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는 이제 비난을 받는다. 일개 문법학자의 자격으로, 사소한 실수나 오탈자를 빌미로 삼아 성경(불가타)의 텍스트를 공격하려 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들은 사소한 세부 사항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부 사항 때문에 위대한 성직자들이 실수를 하거나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문헌학적인 고증은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음식, 우리의 옷, 우리의 돈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까다로우면서, 유독 성스러운 문헌 속에서 찾아낸 언어학적 정밀성이 왜 그토록 당신들을 불쾌하게 만듭니까? 사람들은 에라스뮈스가 쓸데없이 땅위에서 기어간다, 혹은 단어와 음절을 두고서 헛고생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이름으로 경배하고 예배하는 그 분의 말씀을 왜 이토록 무시합니까? 그냥 놔두십시오! 내가 더 나은 다른 일이 없어서 또는 게으른 마음, 차가운 심장, 천학비재 때문에 이런 아주 저급한 일을 하고 있다고 그들이 멋대로 상상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기독교 사상에 의하면, 경건한 열정을 가지고 해놓은 일은 모두 선량한 일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벽돌을 가져와 하느님의 신전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에라스뮈스가 옹고집은 아니었다. 전례, 학교, 설교에서는 불가타를 그냥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성경을 읽으려는 사람은 불가타보다는 새로운 라틴어역 신약성경을 읽는 것이 성경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는 새 번역본을 읽은 사람이 의문을 표시하면 거기에 대하여 해명을 할 것이고, 그 자신이 오류를 저질렀다면 고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언어학적 비판 방식이 교회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듯하다. 그는 적들의 맹렬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순화된 형태의 성경을 읽고, 또 그 원래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들(성직자)의 권위가 일거에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단지 성경을 언어학적으로 정밀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만을 기뻐했다. 무슨 말이 나왔고, 누가 했으며, 누구를 위해서 했으며, 발언의 사간과 장소를 따지고 말의 선후를 살펴보는 것 등, 역사적 문헌 비평을 통하여 성경의 모든 뉘앙스를 밝혀낼 수 있다는 것만을 기뻐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35~237)[53] 에라스뮈스가 보수적인 성직자들의 속 좁은 마음을 비웃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불가타 텍스트를 수정하려 들면 성경에 대한 믿음이 끝장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을 에라스뮈스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신부는 놀라는 신자들을 앞에 두고 내가 거룩한 복음이나 주기도문을 고치려 든다고 화를 내며 말합니다. 나는 무지와 부주의로 신약성경의 문장을 와전시킨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인데 마치 내가 마태나 누가를 비난한 것처럼 말합니다. 도대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가능한 한 정확한 신약성경을 갖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까?" 원래의 모습 그대로 순수한 성경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는 에라스뮈스에게 이런 주장은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보수적 성직자들의 본능은 정확했다. 그들은 어떤 개인의 언어학적(학문적) 판단이 성경 텍스트의 정확성을 결정해 버린다면 교리 그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고 생각했다. 에라스뮈스는 가능한 한 교리를 공격하는 논평은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그가 교회, 성사, 교리 등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은 더 이상 가톨릭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언어학적 통찰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이 어떤 파급 효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지 못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82~283)[54] 1516년이 저물어 가던 시점에 에라스뮈스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사서 겸 비서인 게오르게 스팔라티누스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 편지는 정중하고 공경하는 어조로 위대한 에라스뮈스에게 접근해 왔다. "이곳에 있는 우리는 당신을 무척 존경합니다. 선제후는 당신이 쓴 모든 책을 서재에 소장하고 있으며, 앞으로 나오는 책들도 모두 사들일 예정입니다." 그 편지의 목적은 스팔라티누스의 친구가 해온 부탁을 전하려는 것이었다. 에라스뮈스를 무척 존경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한 수도사가 성 바울의 해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특히 로마서의 의례 부분에 대하여 언급했는데, 에라스뮈스가 의화(義化, justitia)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고, 또 원죄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에라스뮈스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읽는다면 한결 도움을 받으리라는 조언도 했다. 이 이름 없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자는 마르틴 루터였는데, 당시 그가 교수로 봉직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이외의 지역에서는 무명 인사였다. 그는 자신이 힘들게 획득한 신앙의 요체인 믿음에 의한 의화를 에라스뮈스에게 지적하려 했던 것이다. 에라스뮈스는 이 편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그런 종류의 편지들을 워낙 많이 받았고, 당시만 해도 비난은 거의 없고 칭찬 일색이었다. 설사 이 편지에 답장을 했더라도 그것은 스팔라티누스의 손에 들어가지 않은 듯하다. 에라스뮈스는 그 후 이 편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87~288)[55]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항의는 특히 마양스 대주교의 면죄부 판매 지시로 촉발되었다. 루터의 항의문은 독일 전역에 유통되면서 온 교회를 뒤흔들었다. 일찍이 에라스뮈스는 기계적ㆍ파편적ㆍ율법적 종교관에 저항한 바 있는데, 루터의 저항 또한 그런 종교관을 정조준한 것이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89~290)[56] 1518년 내내 에라스뮈스는 바젤 여행, 그곳 인쇄소에서의 중노동, 그리고 돌아오는 길의 와병 등으로 너무 바빠서 루터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3월에 그는 루터의 95개조를 아무런 논평 없이 토머스 모어에게 보냈고, 지나가는 어조로 콜렛에게 로마 교황청이 너무 뻔뻔하게 면죄부를 유통시킨다고 불평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90)[57] 당시 루터는 이단으로 선언되고 아우구스부르크 의회에 출두하도록 소환을 받았다. 그는 교황 대리인 카예타누스 앞에 서서 자신의 신조를 철회하는 것을 거부했다. 루터를 두러싸고 치열한 논쟁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바로 이 무렵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지지자인 존 랭에게 편지를 보내어 95개조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했다는 아주 호의적인 언급을 했다. "나는 현 상태의 로마 교황청 제도는 기독교 세계에 전염병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상처를 노골적으로 찔러대는 것이 좋은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군주들이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 군주는 교황과 결탁하여 면죄부 판매 대금의 일부를 챙기고 있습니다. 에크가 무슨 생각으로 루터에게 곤봉을 쳐 들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91)[58] 1519년 3월 28일, 루터가 처음으로 직접 에라스뮈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의 보석이며 우리의 희망인 에라스뮈스여, 당신도 내 얘기를 많이 듣고 나도 당신 얘기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서로 만나지 못했군요." 그는 에라스뮈스가 많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건 하느님이 그를 축복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루터)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더 오랜 침묵이 지속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온화한 신사인 나의 에라스뮈스여, 당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이 작은 형제의 존재를 인정해 주소서. 나는 당신을 정말로 존경하고 당신이 나의 친구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외에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 무식하여 세상 한 구석에 무명의 상태로 엎드려 있다가 사라져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촌스럽지만 영악하고, 또 절반쯤 아이러니가 담긴 이 편지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루터는 에라스뮈스로 하여금 명확한 입장을 밝히게 하여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학문과 문화의 기준인 이 강력한 권위자를 종교개혁의 대의에 동참시키려 하는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92~293)[59] 이러한 가톨릭교회에 대해 에라스뮈스는 지속적으로 풍자와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하여 "에라스뮈스가 종교개혁을 알을 낳았고, 루터와 츠빙글리가 품어서 부화시켰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의 대표작 우신 예찬이나 대화집에는 이런 풍자와 비난이 가득하다. (중략)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부분은 에라스뮈스와 루터의 갈등이다. 에라스뮈스는 가톨릭과 개혁 세력 중 그 어느 편에도 끼지 않으려 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449~450)[60] 루뱅에서 에라스뮈스에게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는 에라스뮈스가 토마스 모어에게 보낸 재치 넘치고 약간 악의적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루뱅 대학의 학장은 에라스뮈스와 에그몬다누스를 화해시키기 위해 함께 불렀는데 그때 에그몬다누스의 분노가 가관이더라는 내용이었다. (중략) 자신은 루터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에라스뮈스의 항변은 점점 어조가 강해졌다. 이미 오래 전에 에라스뮈스는 루터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고, 루터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당신(에라스뮈스)을 그처럼 괴롭힌다고 하니, 나는 당신의 이름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좋은 친구들 또한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에라스뮈스는 수도자들의 비난이 너무 심하다고 계속 불평했고, 탁발 수도자들이 특정인을 비난하는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03)[61] 두 당파의 심연이 점점 벌어지면서 "나는 루터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에라스뮈스의 항변은 더욱 빈번해졌다. 루뱅 대학의 분위기는 점점 살벌해졌고, 에라스뮈스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은 아주 험악했다. 1519년 8월 그는 교황에게 호소하면서 자신을 이 반대자들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아직도 양측의 불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 갈등을 학자들의 싸움이라고 보았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97)[62] 하지만 싸움의 소음이 점점 심해지면서 그의 목소리는 전처럼 강력하지 못했다. 1519년 10월 19일, 지난봄에 작센 선제후에게 보낸 것과 동일한 내용의 편지를 마양스 교구의 알베르트 추기경에게 보냈다. 이 편지는 즉각 루터의 지지자들에 의해 유통되었다. 에라스뮈스가 "나는 루터를 모른다"고 거듭 항변하는데도 보수주의의 지지자들은 이 편지로 에라스뮈스를 공격했다. 에라스뮈스가 바랐던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입장은 점점 더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쾰른 대학의 교수인 야콥 호그스트라텐이 심문관 자격으로 루뱅을 찾아왔다. 그는 전에도 로이힐린을 상대로 비난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루터가 대상이었다. 1519년 11월 7일 루뱅 대학 교수진은 쾰른 대학 교수진의 사례에 따라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루터의 여러 의견을 공식적으로 비난한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루뱅은 개혁자들에 반대하는 중심적 요새가 되었고, 그런 만큼 루뱅은 에라스뮈스가 머물기에는 적절치 못한 곳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98)[63] 실제로 에라스뮈스는 엄청난 국제적 지명도 때문에 황제와 교황의 정책에서 소중한 자산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싶어 했고, 그가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는 그 어떤 상황이 되었든 그것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루터와의 관계에 대하여 교황에게 애매모호한 회피적 답변을 했고, 루터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많은 소란스러운 수도자들은 에라스뮈스가 루터의 편이라고 설교를 해댔고, 또 조롱하는 비아냥거림 속에서 두 사람이 실은 한 사람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런 혐의와 비난에 맞서서 에라스뮈스는 자신을 열정적으로 옹호하고 변명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개혁파들도 또한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그런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라고 압박해 왔다. 1520년 10월 말경,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엑스라샤펠에서 거행되었다. 에라스뮈스는 이 대관식에 참석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황제를 따라 쾰른까지 갔다. 그는 11월 5일 쾰른에서 루터 후견인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회담하며 루터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회의 후, 그는 선제후에게 설득 당하여 루터의 대의에 관한 22개의 명제를 작성했다. 이 명제는 에라스뮈스의 의도와는 다르게 즉각 출판되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00~301)[64] 루뱅에서도 갈등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루뱅 성직자들 중 가장 위엄 있고 유능한 라토무스가 이제 루터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로 인해 에라스뮈스도 간접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카르멜회 수도사인 에흐몬트의 니콜라스도 루터 반대자였는데 여기에 도니미크회 수도사인 하를렘의 빈센트 디르크스도 가세했다. 에라스뮈스는 이런 교수진을 상대해야 되었고, 새로운 공격에 맞서서 왜 자신이 루터를 반대하는 글을 쓰지 않았는지 해명해야 되었다. 그는 곧 루터의 저서를 읽고서 그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글을 쓰겠따고 말했다. 그는 6월에 루뱅에 도착한 알레안더를 설득하여 그에 대한 비난 설교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다시 에라스뮈스와 사이가 좋게 된 교황은 알레안더가 에라스뮈스를 잘 설득하여 다시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에라스뮈스는 유일한 추구 전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루뱅과 네덜란드를 떠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위협받는 독립적 생활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루뱅을 떠날 구실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스어 신약성경 제 3판을 내는 일로 다시 한 번 바젤로 가는 것이었다. 그건 영원히 떠나가는 것은 아니었고, 그는 루뱅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10월 28일 그는 어려운 4년간을 보낸 루뱅을 떠났다. 릴리 대학에 있는 그의 숙소는 비워 두었고, 장서들도 그대로 놔두었다. 11월 15일 그는 바젤에 도착했다. (중략) 닥터 알렌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는 이런 본의 아닌 상황을 두려워하고, 또 피하려 했던 것이다. 결코 신체적 안전을 찾아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이나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에라스뮈스는 너무나 소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그의 인신을 해치는 조치는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독립적인 생활이 침해되는 것이 아닐까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그 생활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 그는 바젤에 눌러앉았고 다시는 루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08~209)[65] 바젤 시절, 에라스뮈스의 세계관과 사회관은 완전히 실패했다. 1517년 전에 그가 굳게 믿었던 평화와 빛의 황금시대는 어떻게 되었는가? 젊은 카를5세를 위해 『기독교 군주의 교육』을 썼던, 그 선의와 합리적 통찰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되었는가? 에라스뮈스가 볼 때, 국가와 사회의 복지라는 것은 단지 개인적 도덕과 정신적 계몽의 문제였다. 이 두 가지를 강조함으로써 그 자신이 엄청난 혁신안을 제공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신학적 논쟁이 분노에 가득 찬 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참여자이기를 거부하고 방관자로 남았다. 교회 내의 엄청난 싸움에 직접 참여하는 배우가 되기보다 그 연극의 무대를 자발적으로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복음 철학에 관한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조롱과 위협, 무력과 불공정이 아닌, 신중함, 헤택, 온유함, 관용의 힘으로 저항합시다." (중략) 일치, 평화, 의무감과 친절함 등이 에라스뮈스가 높이 평가하는 가치였으나 그런 것이 실제 생활에서 실현되는 것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는 인생에 환멸을 느꼈다. 정치적 낙관론이 지속되던 짧은 시기가 흘러간 후, 그는 언제나 씁쓸한 어조로 그 시대를 말했고, '가장 범죄적인 시대' 혹은 가장 불행하고 가장 타락한 시대'라는 말도 했다. 그는 「평화에 대한 불평」, 「전쟁은 그것을 모르는 자에게만 달콤하다」, 「평화와 불일치에 대한 연설」 등 언제나 평화의 대의를 위해 글을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12~313)[66] 루터에게 반박하는 글을 쓰라는 압력은 점점 강해졌다. 에라스뮈스의 오랜 친구인 턴스톨을 통해 영국의 헨리 8세도 재촉을 해왔다. 작센의 게오르게도 비슷한 요청을 해왔고, 예전의 후견인이었던 교황 아드리아누스 6세도 사망 직전에 독촉을 했다. 에라스뮈스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화집』 스타일의 대화를 써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런 형식은 에라스뮈스를 자기들 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루터가 1520년에,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이름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한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개인적 편지 교환이 없었다. 이제 에라스뮈스가 루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루터가 1524년 4월 15일자로 에라스뮈스에게 편지를 보내와 이렇게 요구했다. "제발 그동안 공언해 오신 대로 비극의 구경꾼으로 남겠다는 그 자세를 견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루터의 말에는 냉소적인 경멸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에라스뮈스는 그 편지가 "인간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첨꾼들 때문에 그런 인간미를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루터와 깨끗한 양심으로 싸우기 위해 에라스뮈스는 자신이 정말로 루터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논쟁의 화제로 선택했다. 교회의 구조와 관련된 문제들 가령, 의례, 축일의 준수, 단식 등에 대해서는 강도가 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에라스뮈스도 루터처럼 반대했으므로 그런 문제를 다룰 수는 없었다. 또 각종 성사나 성 베드로의 수위권 등에 대해서도 에라스뮈스는 나름대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에라스뮈스는 이런 문제들은 놔두고 두 사람이 성격상 아주 다르게 파악하는 문제, 그러니까 신앙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거론했다. 그것은 선과 악, 죄책과 충동, 자유와 구속, 하느님과 인간 등 핵심적이고 영원한 문제였다. 루터는 답장에서 에라스뮈스가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었다고 말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33~335)[67] 마침내 에라스뮈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썼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때 에라스뮈스가 생각했던 멋진 계획을 닮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에 기독교권의 대동단결과 신앙의 일치를 호소하면서 격렬한 성품의 루터에게 제동을 걸어 온 세상이 합리적인 정신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논쟁은 두 사람 사이의 논쟁으로 그치는 것이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32)[68] 의례의 폐지와 주교 서임 폐지 등.[69] 「자유 의지에 관한 논고」는 1524년 9월에 나왔다. 에라스뮈스는 이런 논문을 쓸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방법론에 따라서, 또 교회의 권위와 전통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 입각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신학박사들이 확인하고, 철학자들이 증명하며, 인간의 이성이 증언하는 주장을 펼쳤다. 즉 인간의 의지는 마땅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정의나 하느님의 자비라는 용어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모든 것이 불가피한 필연에 따라 벌어지는 것이라면, 성경의 가르침, 비난, 경고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선한 일이나 좋은 일이나, 목수의 도끼처럼 하느님의 손에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왜 순명을 그토록 칭송하는가? 이런 필연의 교리를 일반 대중에게 가르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도덕은 자유의 의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35)[70] 루터는 이 자유의지론을 혐오와 경멸의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답장을 하면서도 외적으로는 그런 감정을 억제하고 공손한 예절을 지켰다. 그의 내적인 분노는 「자유롭지 않은 의지에 대하여(노예의지론)」의 행간에서 드러난다. 이 답장에서 루터는 에라스뮈스가 비난한 루터의 행동, 바로 그것을 하고 있다. 즉, 이탈해 나간 회원을 정반대 방향으로 선회시켜 그를 치료해주려 하는 것이다. 루터의 불같은 마음은 자신의 불타는 신앙으로부터 놀라운 추론을 이끌어낸다. 그는 아무런 유보 조건 없이 아주 극단적 형태의 예정론을 지지한다. 에라스뮈스가 주장한 자유의지론을 뒤흔들어 놓기 위해, 원시적 비유를 사용한다. 그런 비유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열광적인 신앙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루터의 주장은 이러하다. 하느님의 의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인류에 대하여 영원한 증오심을 갖고 계신다. "인간의 죄악과 자유의지의 소행에 대한 증오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도 그런 증오가 존재했다."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등에 탈 수 있는 맹수에 비유한다. 이 맹수는 하느님과 악마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 맹수의 등에 하느님이 올라타든 혹은 악마가 올라타든, 다시 말해 그 어떤 기수가 올라타든 맹수는 하느님의 상태 혹은 악마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유롭지 않은 의지에 대하여」에서 루터가 강조하는 것은 신앙을 부흥시키고 종교적 관념("자유 의지는 영혼의 구원을 가져온다")은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루터는 심오하고 신비한 신앙의 바탕 위에 서 있다. 영원(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식이 그 글 전편에 스며들어가 있다. 루터가 볼 때, 모든 종교적 관념은 하느님의 장엄함 앞에서는 메마른 볏짚처럼 불타 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볼 때 인간이 서로 협력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종교적 관념)은 하느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죄악과 은총, 구원과 하느님의 영광을 모든 것의 근본적 원인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는 루터의 그런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35~337)[71] 여기서 동시대 가톨릭 학자가 에라스뮈스와 루터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 말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F.X. 키에플은 이렇게 말했다. "자유롭고 훼손되지 않은 인간성이라는 에라스뮈스의 개념은 루터의 개념보다 훨씬 더 교회에 낯선 것이다. 그러나 에라스뮈스는 아주 회의적인 자세로 오로지 자유 의지라는 문제만 가지고 논쟁을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열정적 심리 상태에 있던 루터는 그리스도 교회의 단점과 비참한 상태는 도외시하고 오로지 그 문제만을 거론한 에라스뮈스를 비난했다. 그런 논쟁은 독자들의 비웃음만 살 뿐이라고 생각했다. 에라스뮈스가 깊은 고뇌와 함께 하느님 앞에 교회의 심각한 문제를 고발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39~340)[72] 하지만 그가 이미 말했듯이, 그의 신변에 보다 가까운 곳에서 다른 어려움들이 생겨났다. 바젤 시의 상황은 이미 몇 년 동안 그를 놀라게 하고, 또 괴롭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중략) 이어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베른 시가 1528년 개혁 지지 도시로 돌아서자 오이콜람파디우스는 바젤 또한 동일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1528년 연말에 바젤 시는 거의 내전 일보 직전까지 갔다. 시민 봉기는 시의회의 저항을 물리쳤고, 의회로부터 가톨릭 의원들을 몰아냈다. 1529년 2월, 가톨릭 미사는 금지되었고, 성화들은 교회로부터 철거되었으며, 수도원들은 철폐되고, 대학은 휴교 조치되었다. 오이콜람파디우스는 뮌스터에서 최초의 목사가 되었고, 바젤 교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바젤 교회를 위해 개혁적 강령을 제정했다. 새 주교는 포랑트뤼이에 남았고, 교구청은 프라이부르크로 옮겨 갔다. 이제 에라스뮈스가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1529년의 바젤 상황은 시간을 되돌려보면 1521년의 루뱅 상황과 비슷했다. 그 당시 가톨릭 지지자들은 루터에 대항하여 에라스뮈스의 도움을 얻고자 했다. 이제는 복음주의자들이 에라스뮈스를 바젤에 머물게 함으로써 이득을 보려 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하나의 깃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존재는 개혁 도시 바젤의 지위를 강화시켜 줄 터였다. 사람들은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가 종교개혁가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오래전에 도시를 떠났을 것이라고. 게다가 그의 존재는 절제와 온건을 표상하기 때문에 많은 망설이는 사람들을 이 도시로 끌어들일 수 있을 터였다. 따라서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독립적인 생활을 확보하기 위하여 거주지를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주가 아주 고통스러웠다. 이 무렵 고령에다 병약하여 집에 머무르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청 측의 시비를 우려하여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제국 내의 안전 운행과 궁전으로 초대장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페르디난트는 형인 카를 5세를 대신하여 독일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고, 당시 막 스파이어 의회를 주재했다. 에라스뮈스는 안식처로 바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를 선택했다. 이 도시는 오스트리아 왕가의 직할령이었고, 그래서 바젤 시 같은 상황 변화를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56~359)[73] 프라이부르크로 이주한 고령의 에라스뮈스는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렸고, 1521년 루뱅을 떠날 때보다 더 환멸을 느꼈으며, 종교개혁과 관련해서는 더욱 보수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다. (중략) 그는 이제 종교개혁의 대의에서 아주 멀어졌다. 그는 종교개혁가들을 "가짜 복음주의자들"이라고 경멸하는 어조로 불렀다. 그는 1528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루터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로부터 이탈하느니 차라리 온 독일 사람들의 증오를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는 외쳤다. "복음파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들은 저보다 더 좋아졌습니까? 그들이 전보다 사치, 육욕, 탐욕 등에 덜 탐닉하고 있습니까? 복음으로 인해 바뀐 사람들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술꾼이 술 끊은 사람이 되고, 금수가 온유한 인간이 되고, 구두쇠가 관대한 사람이 되고, 뻔뻔한 자가 순결한 자로 바뀐 경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전보다 더 나빠진 많은 사람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63~365)[74] 만년에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도덕적ㆍ신학적 사상의 결산이요 완벽한 표현이 될 대작, 『설교론』을 쓰는 데 모든 노력을 바쳤다. (중략) 『설교론』은 피곤한 정신으로 쓴 작품이고, 그리하여 그 시대의 요구에 날카롭게 대응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에라스뮈스가 설교론을 완성하기도 전에, 그 책을 헌정할 예정이었던 존 피셔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중략) 1535년 6월 22일, 존 피셔는 헨리 8세의 명령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 이것은 토머스 모어도 마찬가지였다. 모어와 피셔는 수장령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일관되게 거부했던 것이다. 피셔가 처형된 지 2주 후인 1535년 7월 6일, 토머스 모어도 참수대 위에 올랐다. 이 두 고상한 친구들의 죽음은 에라스뮈스를 아주 슬프게 했다. 그는 너무나 상심하여 지난 몇 년 동안 하지 않았던 시 쓰기를 다시 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72~375)[75] 1535년 6월, 예전과 마찬가지로 프로벤의 인쇄 일을 지원하기 위해 바젤로 갔다. 『설교론』은 마침내 인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면밀한 검토와 즉석 교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병들고 나이든 에라스뮈스는 아직도 바젤에 살고 있는 많은 친구들의 환영을 받았다. 에라스뮈스는 전에 그를 바젤로부터 몰아냈던 교회 내의 폭풍우가 가라앉은 것을 발견했다. 치안 상태가 잘 유지되고 있었다. (중략) 8월 들어 그는 프라이부르크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10월에 그는 프라이부르크 집을 팔았고, 가구들을 순차적으로 바젤로 옮겨 왔다. 376~377[76] 1536년 2월 12일, 에라스뮈스는 최후의 신변 정리를 했다. 1527년에 그는 이미 유서를 작성하여 프로벤 출판사에서 그의 전집을 출간하는 문제에 대하여 세세하게 지시해 놓았다. 1534년, 그는 완벽한 소유물 대장을 마련했다. 그는 자신의 도서를 폴란드 귀족인 요하네스 아 라스코에게 팔았다. 1536년의 신변 정리는 그가 인생에서 소중하게 여긴 두 가지 사항을 정리한 것인데, 하나는 프로벤 출판사와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사후 유언을 집행해 줄 친구들의 문제였다. 보니파스 아머바흐는 그의 상속자가 되었다. 프로벤 출판사의 경영자인 히에로니무스 프로벤과 니콜라스 에피스코피우스가 유언 집행인으로 지명되었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그의 친구들 각자에게는 장신구를 하나씩 유증했다. 그것은 에라스뮈스가 군주들이나 지상의 위인들과 맺은 관계를 말해주는 물품이었는데, 특히 절친한 친구 루이스베르와 베아투스 레나누스 등이 그것을 받았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결혼할 처녀와 장래가 유망한 청년들에게 소정의 금액을 남겼다. 그는 이런 자선 행위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아머바흐에게 일임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81~382)[77] 1536년 7월 12일, 최후의 날이 찾아왔다. 그의 침상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그가 끊임없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O Jesu, misericordia; Domine liber me; Domine miserere mei!(오 자비로우신 예수님. 주님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주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어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가면서 네덜란드어로 말했다. Lieve God.(하느님을 사랑하라.)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83)[78] 1536년 7월 12일, 여러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 유해는 바젤의 대성당에 묻혔으며, 유산은 고아들과 고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음.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461)[79] 1558년 교황 파울루스 4세는 에라스뮈스를 제1급의 이단자로 지정. 그의 모든 저작을 금서 조치함.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462)[80] 다만 공정함을 위해 스콜라학을 옹호하자면, 스콜라학은 역사적 상황이 후기 고대(곧 교부 시대) 및 초기 근대(곧 에라스무스의 시대)}와 달랐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교부 시대는 상당 기간에 걸쳐, 헬레니즘 다신교, 마니교, 아리우스파 등이 교부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교부들의 문체는 자연스럽게 사목적, 호교적, 수사학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상대를 설득하여 올바른(최소한 교부들이 보기엔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문학적이고 명료한 화법을 사용했다. 반면 스콜라학의 시대는 이미 가톨릭이 서방을 통일한 상태였고, 유다인, 무슬림, 각종 이단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통일된 세계였던 건 분명하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스콜라학자들은 호교적이고 수사학적인 '사목자의' 문체보다는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대학교수의' 문체를 사용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둔스 스코투스 중 누가 더 옳은지는 대중과는 별 상관이 없는 신학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명 이후 대중의 독서 수요가 급증하면서 스콜라학의 사색적이고 형식논리학적인 문체는 호소력이 낮을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에라스무스는 옛 교부들의 수사학적 문체에 강한 호감을 느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성기 스콜라학자들의 입장에서 "그런 사변적인 문체 말고 사목적이고 수사학적인 문체를 써라"는 초기 근대 인문주의자들의 비판이 억울할 소지는 충분하다.[81] 에라스뮈스는 비합리적인 것, 무미건조한 것, 오로지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을 아주 싫어했다. 아무런 동요가 없었던 중세의 문화는 오로지 이런 것들로만 사상의 세계를 채워 넣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린 시절 라틴어를 배웠떤 저 황당무계한 라틴어 교과서를 생각할 때마다 내면에서 구역질을 느꼈고, 그 책들을 저주했다. 마메트렉투스, 브라킬로구스, 에브라두스, 기타 저자들이 집필한 라틴어 교과서는 당장 없애 버려야 할 쓰레기였다. 쓸모없고 알맹이가 없는 낡은 것들에 대한 혐오증은 그보다 더 넓은 범위로 퍼져 나간다. 그는 사회, 특히 종교계가 각종 관행, 의식, 전통, 고정 관념 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고, 그 세계에서 종교의 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보았다. 에라스뮈스는 그런 관행들을 무조건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런 이해나 진정한 느낌없이 그런 관행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이 정말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의 정신은 어리석고 황당한 것들을 비판했고, 수준 높은 예절과 내면적 위엄을 추구했다. 그런 만큼 의례와 전통의 분야는 쓸모없는 것, 아니 인간의 어리석음과 이기심을 부추기는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14~215)[82] 중세 기독교 문명은 신비주의의 바탕, 철저한 위계 구조, 신-인간-동물-사물 사이의 적절한 균형 등을 갖춘 아주 영광스러운 구조물이었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는 이런 구조물의 외양을 장식하는 세부 사항과 장식물들만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져와 세운 스콜라 철학의 구조와 그 구조 위에 단테가 세워 올린 천국-연옥-지옥의 정신적 구조가 분명 있었지만, 에라스뮈스는 그것들을 도외시하고 자신만의 다른 세계를 보았다. (중략) 에라스뮈스가 상상하는 세계는 순수 고전주의와 순수 기독교 정신이 융합된 세계였다. 에라스뮈스에게 순수 고전주의라 함은 키케로, 호라티우스, 플루타르코스 등을 의미하며, 플루타르코스 이전의 만개한 그리스 문명은 포함되지 않는다. (중략) 에라스뮈스 정신의 주축은 기독교이고 고전주의는 정신의 형식을 부여해 주는 보조물이다. 그는 고전 고대에서 기독교적 이상에 부응하는 윤리적 경향만을 취해 온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18~221)[83] 성경적 휴머니즘 ㅡ 진리는 단순 명료해야 한다. 세네카는 "진리의 언어는 단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처럼 단순명료하고 진실한 말씀은 없다." 에라스뮈스는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이 단순명료하고 순수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누언에서 철학을 함으로써 오리지널 언어의 지식을 충분히 갖추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전면에 떠오른다. 이것은 단지 문헌학적(언어적), 철학적 요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윤리적, 미학적 필연성도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잡박하지 않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근원적이고 순수한 것은 아주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에라스뮈스는 그것을 우리가 직접 나무에서 따는 사과에 비유했다. 이 세상을 학문의 원시적 단순명료함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흐리고 탁해진 물웅덩이 같은 세상을 맑고 순수한 수원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가장 맑은 물이 흐르는 수원은 복음의 교리이다. 그는 이 원천을 회복하는 것이 신학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맑은 물의 비유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에라스뮈스가 신봉하는 원칙의 심리적 측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233)[84]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에라스뮈스의 정신이 당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갈등이 고조되는 동안 가톨릭은 그를 교회를 부패시킨 자로 보았고, 프로테스탄트는 복음의 파괴자로 보았다. 하지만 그가 외친 절제와 관용의 정신이 양측에 의해 완전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양 캠프는 에라스뮈스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했다. 로마 교황청은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지는 않고 신자들에게 그의 책을 조심스럽게 읽으라고 경고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역사는 그를 종교개혁가의 일인으로 치부하려고 노력해 왔다. 양측이 이렇게 나온데는 초당파적인 여론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여론은 에라스뮈스를 존경하고 숭배했던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재건과 복음교회의 건설에는 로욜라와 루터만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온건하고, 지적이고, 타협적인 세력들도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가령 멜란히톤이나 사돌레트 같은 사람들은 에라스뮈스와 동맹을 했고, 또 그의 입장에 공감하는 태도를 보였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종교적 갈등에서 어떤 타협을 이끌어내려는 거듭되는 노력은 모두 에라스뮈스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 『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13, p.393~394)[85] 원제: Moriae Encomium. (우신예찬)[86] 에라스뮈스 『우신예찬』 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2011. p.12~13[87] 성기를 말한다.[88] 『기독교도 병사의 휴대서』[89] 출처: Spongia adversus aspergines Hutteni (1523), § 176, As quoted in Desiderius Erasmus of Rotterdam (1900) by Ephraim Emerton, p. 377[90] Dulce bellum inexpertis. 에라스뮈스의 논문 제목이다. 원래는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가 했던 말이다.[91] This world, the whole of the planet called earth, is the common country of all who live and breathe upon it. (The Complaint of Peace, 1521)[92] Jacob Batt에게 보낸 편지(1500년 4월 12일). Ad Graecas literas totum animum applicui; statimque ut pecuniam accepero, Graecos primum autores, deinde vestes emam. (에라스무스 전집 1집; 1974))[93] 시각장애인[94] 『격언집』에 나오는 말.[95] 『우신 예찬』에 나오는 말.[96] '에라스무스'라는 명칭은 한국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고,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서도 관용어를 허용하기 때문에, '에라스무스'라고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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