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父
라틴어: Pater Ecclesiae
영어: Father of the Church[1]
1. 개요
그리스도교 역사의 초기에 활동한 이들로서 종교의 기초를 다진 인물들이다.예수의 십자가 수난 이후,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으며 세계 각지로 흩어져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하고 선교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정리하고 신학을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 작업을 한 대표적인 학자, 성직자들이 바로 '교회의 아버지', 한자로 번역하여 '교부(敎父)'들이다. 그리스도교를 제대로 된 종교로 확립한 공로 때문에 그리스도교 내에서 이들 교부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상당하다.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원래 교부, 즉 '교회의 아버지'란 단어는 신자들을 사목하는 책임자인 주교를 가리켰지만, 점차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시기적으로는 보통 예수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부터 그리스도교회의 조직체계가 확립되고 스콜라 철학이 등장하기 시작한 8세기 무렵까지를 이들 교부들의 시대로 부른다. 명확히 정해진 기준이랄 건 없지만, 관습적으론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650?~754) 정도를 최후의 교부로 본다. 세부적으로는 12사도의 제자이거나 그들의 가르침을 직접 접한 시기(1세기 말~2세기 초),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시기(2~3세기),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시기(4~8세기)로 나뉜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교부들은 크게 서방 교부와 동방 교부로 나뉜다. 서방 교부는 이탈리아 반도를 포함하여 라틴어 문화권, 동방 교부는 그리스어 문화권 및 근동에서 활동한 교부들을 일컫는다.[2] 이들 교부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아직 서방의 가톨릭 교회와 동방의 정교회가 확실하게 분리되기 이전이므로, 서방 교부는 천주교, 동방 교부는 정교회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좋은 예로 서방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와의 일치 속에서 살았고, 동방 교부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로마 주교와의 일치 속에서 살았다. 오늘날에도 가톨릭 신자에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당연히 성인이고, 정교회 신자에게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성인으로 존대한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이란 모토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리스도교란 종교의 사상적/교리적 역사에서 교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기 때문에 천주교와 정교회만큼은 아니더라도 개인 성향에 따라 많이 인용하는 사람은 많이 인용한다.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도 교부들을 많이 인용했고 어지간한 개신교파들은 교부들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개신교는 성경에 집중하면서 교부들의 말은 마음에 드는 것들만 참고사항으로 인용하는 수준이기도 하고 교부들이 남긴 기록들 중 성인 공경, 연옥, 실체변화 등 개신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교리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3] 교부학이란 분야에선 가톨릭이나 정교회보단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공의회에 참석한 성직자들도 한국 천주교에서는 '교부'라고 부르지만, 영어권에서는 Council Father라고 구분하여 지칭한다.
한국어 번역서적에서는 번역자들이 '교부'라는 개념과 단어를 몰라서 단순히 (영어 서적의) Father라는 단어만 보고 신부(神父)라고 오역하는 사례가 흔하다. 고대 말-중세 유럽의 인물이고 그리스도교 성직자인 것 같은데 father라고 지칭되니까 으레 신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정의
5세기경, 레랭의 빈첸시우스는 자신의 작품 <비망록>에서 교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시했다.교부들에 관한 한, 신앙과 가톨릭 친교 안에 거룩하고 현명하고 항구하게 살며 가르치고 굳건히 머물며, 그리스도께 충실한 가운데 죽거나 그분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기쁨을 누린 이들의 생각만을 고려해야 한다.
<비망록> - 레랭의 빈첸시우스
이는 오늘날까지도 교부들을 규정하는 권위 있는 고전적인 정의로 평가된다.<비망록> - 레랭의 빈첸시우스
2.1. 4가지 공통 요인
교부라는 개념은 4가지 공통 요인을 갖고 있다. 1. 고대성[4] 2. 교리의 탁월성 3. 정통성 4. 삶의 거룩함이 그것인데, 여기서 뒤의 두 요소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교부들의 시대에는 아직 모든 교리가 정확히 규정되지 않았고,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논의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삶의 거룩함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도 문제가 된다.그래서 교부학에서는 앞의 두 가지 요소(고대성, 교리의 탁월성)를 중점으로 본다면, 보다 폭넓은 전망을 다루는 신학사에서는 네 가지 요소가 모두 고려된다.
2.2. 가톨릭 교부학
교부학은 20세기에 들어 큰 발전을 이루어냈다. 특히 1930년대부터 원천으로의 회귀라는 기치를 내걸고 발전했으며, 이는 현대 신학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교부학'은 교부들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신학이라기보다 문학적인 특징을 지닌 학문에 가깝다. 그래서 교부학에서는 고대 그리스도교 작가들의 문학 유형과 문체 등을 연구한다.반면, 교부 신학은 가톨릭 교회의 정통 교리를 유지하고 옹호하며, 심화하기 위한 관점에서 교부들의 사상, 특히 그들의 신학을 연구 대상으로 갖는다. 특히 교부 신학은 고유한 이론적 특성을 지니며, 교의신학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2.2.1. 교부들의 신학이 지닌 특징
교부들의 신학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에 두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성찰한다. 초대 교회 당시의 환경에서 정통 신앙을 수호하며, 이를 윤리적, 영성적인 삶의 차원에서 도출해낸 결론들을 규명한다. 교부들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성경적 특징, 그리스도 중심적 특징, 주석적 특징, 플라톤적 특징을 띤다.2.2.1.1. 성경적 특징
초대 교회 당시 교부들이 의존할 수 있던 유일한 권위는 성경이었기 때문에 교부들은 반드시 성경을 기반으로 자신의 신학을 구축해야 했다. 때문에 교부들은 본질적으로 성경을 깊이 이해한 주석가들이었다. 또한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교부들과 이단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신학 논쟁은 성경에 대한 해석과 인용의 차이에 있었다.2.2.1.2. 그리스도 중심적 특징
교부들의 신학은 예수를 이해하고 그를 수호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그리스도교 신앙 속 진리들을 종합해냈고, 이 과정에서 그들이 신경 썼던 것은 하느님의 유일성과 단일함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이단적 사상에 맞서서 교부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학적 성찰을 이루어냈고 이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에페소,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확립된 그리스도론의 이정표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2.2.1.3. 주석적 특징
교부들의 신학은 구체적으로 성경에 대한 주석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들의 성경 주석은 비평적 주해, 의역적 주해, 대논문, 강론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말씀의 의미를 파악해냈다. 교부들은 '문자적 해석'과 '우의적 해석'이라는 두 가지 성경 해석 방법을 사용했고, 이는 다양한 신학적 논쟁이나, 그리스도교 윤리, 신앙 규범 등에 활용되었다. 후에 교부들의 성경 주석서들은 수도원과 신학교 교육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2.2.1.4. 플라톤적 특징
교부들의 성경 주석 방법에는 플라톤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다. 그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도구로 플라톤 철학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주류 철학이 플라톤 철학이기도 했으며, 그 철학적 전망이 그리스도교적 세계관과 상당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발전에서 플라톤 철학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교부들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 아래에서 신앙의 토착화 작업을 시도했다. 물론 플라톤 철학에는 그리스도교와 맞지 않은 여러 요소들도 있었기에,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요소들은 걸러냈고, 알맞는 요소들은 받아들여 이를 성경 주석에 적용했다.
2.2.2. 교부들의 신학이 지닌 중요성
교부들의 신학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학은 교회 역사상 최초의 신학이며 교회의 전승과 정통 이론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남긴 방대한 작품들은 교회의 영적 유산이 되었으며, 후대의 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교부들이 남긴 가르침과 작품들은 사목적이며 신학적이고, 교리교육적인 동시에 문화적이고 영성적이며, 다른 시대의 신학 작품들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2.2.3. 교부 시대의 구분
교부 시대의 기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학자들은 동방 교회에서는 사도 이후 시대부터 다마스쿠스의 요한까지, 서방 교회에서는 사도 이후 시대부터 세비야의 이시도르까지로 교부 시대를 잡고 있다. 약 7세기에 걸친 이 시기의 신학은 박해 시대[5]의 신학과 제국 교회 시대[6]의 신학으로 세분화된다. 박해 시대의 신학은 다시 초기 시대, 이단들과의 논쟁 시대, 첫 체계화 시대로 구분되며, 제국 교회 시대의 신학은 다시 황금시대[7]와 쇠퇴기[8]로 구분된다.3. 교부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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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hurch fathers라 하기도 함[2] 다만 안타깝게도 시리아어 교부 등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 자주 그리스어권 교부가 곧 동방 교부로 동일시된다. 그러나 비그리스어권 동방 교부라고 해서 안 중요한 교부인 건 절대로 아니고, 시리아의 성 에프렘처럼 중요한 교부들은 얼마든지 있다.[3] 따라서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기록들을 보여주며 개신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교리를 언급해도, 개신교 측에선 그것들을 사도들에 의해 전체 교회에 직접적으로 전해진 전통이라는 충분한 증거라고 받아들이기를 자의적으로 거부하기에, 그러한 기록들의 전승적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4] 8세기 이전까지[5] 1세기말~4세기[6] 4-8세기[7] 4-5세기[8] 6-9세기[라틴] 라틴 교부[라틴] [라틴] [교황] 교황[라틴] [14]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알] 알렉산드리아 학파[16]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콘스] 콘스탄티노플 교부[카파] 카파도키아 교부[19]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콘스] [21]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사도] 사도 교부[시리아] [알] [라틴] [아프] 아프리카 교부[사막] 사막 교부[알] [아프] [아프] [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