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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c18b,#dcc18b><colcolor=#3b394c,#3b394c> 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306년경 |
로마 제국 메소포타미아 니시비스 | |
사망 | 373년 6월 9일 (향년 70 ~ 71세) |
로마 제국 에데사 | |
국적 | 시리아 |
직책 | 부제, 신학자, 작가, 시인, 작곡가, 작사가, 교사, 웅변가 |
칭호 | 성령의 하프, 교회학자[1], 교부, 신앙의 스승, 신앙의 기둥, 원죄 없는 잉태의 증인 |
이명 | 시리아의 에프렘
|
상징물 | 두루마리, 전례복, 향로, 리라 |
축일 | 1월 28일(비잔틴 전례 교회) 부활절 전 7번째 토요일(시리아 정교회) 6월 9일(가톨릭, 성공회) 6월 18일(마론파) 에피프 15일(콥트 정교회) |
수호 | 영적 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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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령의 하프(ܟܢܪܐ ܕܪܘܚܐ)[2]
로마 제국 시대에 활약한 시리아의 부제, 신학자, 작가, 시인, 종교음악 작곡가 및 작사가, 교사, 그리고 웅변가. 현재 그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의 성인으로 추대되고 있으며 교회 전례에 노래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자 성서학의 기틀을 공고히 다지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다.주로 출신지 이름을 넣어 '시리아의 에프렘', 혹은 '니시비스의 에프렘', '에데사의 에프렘'이라고도 불리운다.
2. 생애
로마 제국의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 태생인 에프렘은 어느 이방인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양친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됨에 따라 18세 때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니시비스의 성 야고보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후일 이 학교의 교사이자 책임자가 되었다. 325년에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였기도 했다.350년, 페르시아의 침입 때 에프렘은 신에게 기도를 올려 니시비스가 해방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며, 이후 그는 학교를 세워 니시비스가 동방 학문의 중심지로 부흥하는 데에 일조를 했다. 그러나 363년 요비아누스 황제가 니시비스 지역을 페르시아에 이양하자, 그는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에데사로 피신한 뒤 그곳의 동굴에 머무르며 고향의 신자들과 에데사의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큰 신용을 얻었다. 에프렘은 부제로 서품되었고, 그를 공경하는 주변 인물들이 그에게 주교와 사제 같은 더 높은 자리로 오르기를 원했지만 정작 에프렘 자신은 이를 사양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지만, 그는 오히려 에데사의 동굴에서 검소하고 엄격한 생활을 했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목동'이라고 낮춰 부르며 언제나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다.
에프렘은 372년 에데사에서 전염병이 나돌고 극심한 기근이 발생했을 때, 병마와 식량난에 시달리는 마을 주민들을 위하여 직접 그 험난한 현장을 찾아가 봉사를 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주된 일은 에데사의 모든 주민들에게 공평하게 식량을 나누어 주는 작업이었다고 하는데, 마을 주민들은 식량을 정확히 배분해 줄 사람은 에프렘말고는 없다고 모두 입을 모았을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일했던 그는 자신 역시 전염병에 걸려 373년 세상을 떠났다.
3. 업적 및 평가
“아람인들의 왕관”
— 사루그의 야고보
— 사루그의 야고보
“당신은 이제 신성한 제단에서, 생명의 왕자 앞에서, 천사와 함께, 가장 거룩한 삼위일체를 찬양하며 하느님을 보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 니사의 그레고리오
— 니사의 그레고리오
“그러므로,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기독교 정체성은 에프렘 그 자신의 문화적 표현의 특수성에서 나타난다: 믿음과 하느님께 모든 기대를 걸며 이 세상에서 궁핍하고도 순결하게 사는 것을 가능케 하는 희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간호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바칠 정도로 베푸는 자선이다.”
— 교황 베네딕토 15세
대학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글솜씨에 깊은 통찰력, 그리고 박학다식한 지성까지 겸비한 에프렘은 성서적 근원을 밝히는 데에 큰 비중을 차지한 굵직한 저서들을 비롯하여 종교적인 내용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시들, 그리고 성서 주석, 교의 및 수덕 생활에 관한 수많은 글을 시리아어로 남겼다. 또한 그는 이단을 반박하는, 특히 아리우스파와 영지주의를 공격하는 중요한 논리를 서술하였고,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신학적 기틀을 다졌다. 이외에도 에프렘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깊었는데, 그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음을 학문적으로 단언하였기 때문에 흔히 '원죄 없는 잉태의 증인'으로도 불린다. 그의 글들은 일찍이 코이네 그리스어, 라틴어, 콥트어, 고대 아르메니아어, 고대 조지아어 등 여러 나라의 언어들로 번역되어 자주 사용되었고, 훗날 성서학과 같은 종교적인 영역을 넘어 단테 알리기에리 등과 같은 문학 및 예술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교황 베네딕토 15세
시간이 흘러 에프렘은 1920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에프렘의 행보와 업적이 동방 교회를 넘어 서방 교회까지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3.1. 성가
에프렘의 대표적인 칭호는 다름 아닌 '성령의 하프'인데, 이는 그가 만든 성가들에 기인한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도 지녀 수많은 성가들을 작곡 및 작사를 했고, 이를 교회 예배에 최초로 도입함과 더불어 신앙 교육에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3] 현재까지도 그의 성가들은 시리아 전례 교회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