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3월 18일 |
성인 | 성인 치릴로 (Cyril) |
생몰년도 | 315년 ~ 387년 |
출생지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예루살렘 관구 |
신분 | 주교 교부 교회학자 |
같은이름 |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
[Clearfix]
1. 개요
"예비자 교리"를 저서한 성서학자이자 설교가.대한성공회 기일은 3월 18일이다.
2. 이름
한국어 |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
영어 | Cyril of Jerusalem, St. |
그리스어 | Κύριλλος Α Ἱεροσολύμων |
라틴어 | Cyrillus Hierosolymitanus |
3. 행적
키릴로스는 315년 예루살렘 근저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의 그리스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자라며 교육을 받았다. 342년 또는 그 후에 성 막시무스 2세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고, 348년 막시무스의 후계자로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었다. 성 키릴로스는 수 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막시무스 2세가 사망하자 그를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그는 아리우스파 이단자들에게는 철천지 원수였기에, 예루살렘을 두고 교계적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의 아리우스파 주교 아카키우스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모함을 받았다.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자 키릴로스는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일이 아카키우스 등에게 빌미를 잡혀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쓰고는 타르수스로 유배를 떠났다가 359년 셀레우키아 주교회의에서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로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키릴로스를 축출했는데, 참으로 얄궂게도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다시 복직시키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키릴로스는 367년에 세 번째로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유배된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하자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안티오키아 공의회가 니사의 성 그레고리우스를 팔레스티나로 파견하여 그가 설파하던 '호모우시오스'란 개념으로 발생한 잡음을 조사토록 하였는데, '호모우시오스'는 니케아 신경의 기본 용어이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예루살렘 주교좌는 파벌주의와 아리우스주의로 뒤엉켰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타락했지만, 키릴로스의 신앙과 주교좌는 올바르다는 판단하고 보고서를 올렸다.
그 후 키릴로스와 그레고리우스는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였는데, 여기서 키릴로스는 니케아 공의회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주교로 인정받았다.그는 혼신을 다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다가 여러 차례에 걸쳐 유배를 겪어야 했다. 그는 유명한 <교리서>에서 자기 백성에게 신앙과 성서 그리고 교회 전통의 참된 가르침을 설명한 교회학자이다. 축일은 3월 18일인데 주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비에 대한 참된 지식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강론 24편으로 구성된 <예비자 교리(Catecheses)>가 가장 유명하며 후대에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키릴로스는 성서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였다. 위에서도 언급한 <예비자 교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6년 예루살렘에 완공한 성묘 성당에서 348년 사순과 부활시기에 한 강론을 모은 책으로, 예비신자와 새 영세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위한 명쾌한 지침서이자 교리 해설서일 뿐만 아니라, 전례학에서도 4세기 팔레스티나 전례를 자세히 보여주는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가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키릴로스가 철저한 아리우스주의 반대자였고, 그의 정통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387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났고, 교황 비오 10세가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4. 기타
- 예비자의 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