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04:30:09

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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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M.
보나벤투라
Bonaventura
파일:보나벤투라.png
<colbgcolor=#cc3b0d><colcolor=gold> 본명 조반니 디 피단차
(Giovanni di Fidanza)
출생 1221년
교황령 라티움 바뇨레지오
사망 1274년 7월 15일 (향년 52~53세)
아를 왕국 리옹네 리옹
학력 파리 대학교
종교 가톨릭
성향 스콜라 철학,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신플라톤주의
직업 성직자(추기경), 신학자, 철학자, 교수, 작가
주교 수품 1273년 6월 3일
추기경 임명
1273년 11월 11일
알바노교구장 임명, 주교 수품
재임 기간 제7대 작은형제회 총장
1257년 2월 2일~1274년 6월 3일
제41대 알바노교구장(주교급 추기경)
1273년 6월 3일~1274년 7월 15일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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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작은형제회 총장
6대 7대 8대
조반니 다 파르마 (1247년~1257년) 보나벤투라 (1257년~1274년) 지롤라모 마시 (1274년~1279년)
역대 가톨릭 알바노교구장
40대 41대 42대
로돌프 드 셰브리에르 (1261년~1270년) 보나벤투라 (1273년~1274년) 벤티벤가 데이 벤티벤기 (1278년~1288년)
}}}}}}}}}}}} ||
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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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3b0d><colcolor=gold> 성인명 보나벤투라
[언어별 명칭]
라틴어: 보나벤투라 (Bonaventura)
영어: 보나벤처 (Bonaventure)
프랑스어: 보나방튀르 (Bonaventure)
독일어: 보나벤투라 (Bonaventura)
스페인어: 부에나벤투라 (Buenaventura)
이탈리아어: 보나벤투라 (Bonaventura)
칭호 교회학자, 세라핌 박사
시성 1482년 4월 14일, 교황 식스토 4세
축일 7월 15일
}}}}}}}}} ||
문장
파일:보나벤투라문장.png
SOLI DEO HONOR ET GLORIA
(오직 하느님께 존경과 영광)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파리 대학교에서의 생활2.3. 작은형제회 총장으로서2.4. 알바노의 추기경으로 임명되다2.5. 리옹 공의회와 죽음
3. 여러 가지 일화4. 보나벤투라의 스콜라 철학
4.1. 토마스 아퀴나스와의 학문적 차이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추기경, 신학자, 철학자, 교수, 작가. 출신지 바뇨레지오를 이름에 덧붙여 보나벤투라 다 바뇨레지오(Bonaventura da Bagnoregio)라고도 부른다.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인 학자 중 하나이자 기독교 역사상 가장 권위 있는 지식인 중 하나로 기존의 신학적·철학적 사상이 토마스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로저 베이컨[1]을 위시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던 시대에 교부들의 신학과 플라톤 철학을 융통성 있게 지킨 신플라톤주의적 사상가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그는 수많은 신학 및 철학 저서, 성경 주석, 설교문, 그리고 역사서를 저술해 당대 가톨릭뿐만 아니라 이슬람에서도 인정을 받았고, 훗날 그 공로로 1587년 교황 식스토 5세로부터 교회학자세라핌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2].

가톨릭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7월 15일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보나벤투라는 1221년 교황령 비테르보 근교에 있는 마을 바뇨레지오에서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와 마리아 디 리텔라(Maria di Ritell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와 동일한 조반니 디 피단차라는 이름을 가졌다.
파일:La_curacion.png
성 프란치스코에 의해 치유되는 어린 성 보나벤투라 (La curación de San Buenaventura niño por San Francisco)
대(大) 프란시스코 에레라 作, 루브르 박물관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서 딱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보나벤투라라는 그의 이름에 관한 일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그가 큰 병을 앓게 되자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찾아간 뒤 그에게 자신의 자식이 치유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사경을 헤매던 이 아기를 위해서 기꺼이 기도해 주었더니 머지않아 아기는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프란치스코는 "오, 부오나 벤투라![3](오, 운이 참 좋구나!)"라고 감탄했고 이를 기념해 아기의 이름도 조반니에서 보나벤투라로 바꾸었다. 보나벤투라는 이 이름을 소중히 여겨 1243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을 때도 수도명으로 그대로 썼다.

2.2. 파리 대학교에서의 생활

파일:San_Buenaventura.jpg
프란치스코회의 수도복을 받는 성 보나벤투라 (San Buenaventura recibe el hábito de San Francisco)
대(大) 프란시스코 에레라 作, 프라도 미술관
1235년 보나벤투라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인문학 공부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파리로 유학을 보냈다. 그렇게 보나벤투라는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243년 그는 신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 출신 작은형제회 신학자 알렉산더 할렌시스(Alexander Halensis) 문하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보나벤투라는 알렉산더의 강의에 깊은 영감을 받아 성실히 학문에 임했으며, 결국 알렉산더가 각별히 총애하는 제자가 되었다. 얼만큼이었냐면 알렉산더가 보나벤투라를 "원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같은 해 보나벤투라는 알렉산더를 따라 파리에 있는 작은형제회에 입회한 뒤 파리 대학교에서 모든 과정을 순조롭게 이수했고, 1248년 자신의 모교에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유명 스콜라 신학자 피에르 롱바르가 쓴 <명제집>에 관한 강의를 맡았으며, 동시에 해당 저서의 주석을 저술해 1255년 마지스테르 학위[4]를 취득했다.

그러나 학문적 명성을 차치하고 보나벤투라의 교수 활동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파리 대학교에서는 재속 수도자[5]가 아닌 탁발 수도자를 교수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세속 학자들의 반발이 있었는데, 그 학자들이 보나벤투라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특히 기욤 드 생타무르(Guillaume de Saint-Amour) 교수는 대다수의 탁발 수도자들이 속해 있는 작은형제회와 도미니코회를 맹비난을 함으로써 대학 내에 탁발 수도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했다. 이에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가르치는 수도자 학생들을 지키고자 도미니코회의 탁발 수도자이자 친구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포함한 여러 탁발 수도자 동료들과 함께 혐오 세력에 맞섰다. 보나벤투라는 <마지막 시대의 환난>,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글을 통해 기욤이 내세우는 입장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반박했고,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기욤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는 데에 기여했다. 하지만 1256년 기욤은 <근래의 위험들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해 물러서지 않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좀체 사그러들지 않자 결국 보나벤투라는 그 해에 교수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1257년 보나벤투라는 탁발 수도회에 대한 혐오를 조장한 기욤을 비판하며 이런 태도를 고수하다가는 훗날 큰 봉변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 뒤 대학을 떠났다. 이때 보나벤투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신학 박사를 칭호를 얻었는데, 이는 수도자로서는 최초였다. 그리고 학교를 떠난 그 해에 보나벤투라는 작은형제회의 탁발 수도자들을 지켜 준 것에 대한 공로로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기욤 드 생타무르는 결국 보나벤투라의 경고대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앙화를 받았다.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기욤에 분노한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1257년 보나벤투라가 학교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기욤이 집필했던 모든 논문들에 대한 승인을 취소한 후 전부 불태운 것을 모자라 그를 파문하고 국외 추방을 명령했다. 알렉산데르 4세가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266년이 되어서야 추방 명령이 철회되어 기욤은 다시 프랑스 왕국으로 돌아왔으나 그 어떤 대학도 그를 교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기욤은 1272년 부르고뉴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2.3. 작은형제회 총장으로서

1257년 선임 총장인 조반디 다 파르마(Giovanni da Parma)의 추천과 수도자들의 만장일치로 작은형제회의 총장이 된 보나벤투라는 학업을 잠시 제쳐 두고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본래 작은형제회는 엄격한 청빈 정신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는데,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사후 전체적인 수도회를 이끌 마땅한 중심이 없어 결국 신령파와 수사파로 분열된 상태였다. 신령파는 기존보다 더욱 엄격한 청빈 정신으로 수도회의 질서를 바로잡자고 고집했던 반면, 수사파는 청빈 정신을 고수하는 대신 교육을 중점적으로 실시해 수도회의 질서를 바로잡자는 입장을 내세웠다.

혼란을 잠재우고자 보나벤투라는 먼저 교통정리를 했다. 우선 그는 분열의 도화선이 된 신령파, 특히 신령파 내에 있는 조아키노 다 피오레(Gioacchino da Fiore)의 추종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시토회의 수도자이자 신학자였던 조아키노 다 피오레는 극단적인 청빈 정신과 종말론적인 주장[6]을 펼쳐 이단으로 정죄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령파가 이러한 불결한 사상을 들여옴으로써 물을 흐렸다는 것이 비판의 이유였다. 또한 그는 각지에 설립된 작은형제회 수도원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분열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각 분파의 중심 인물들이 피력하는 의견들을 들어보고 서로 타협하는 데에 만전을 기했다. 아울러 그는 분열로 인해 내팽개쳐 있었던 수도자들이 사도적 직무를 재개한 후 이를 성실히 임하도록 지시하는 동시에,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 청빈 정신을 바탕으로 한 수도 생활 방식이 기본 중의 기본임을 강조하는 것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근면 성실한 태도와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보나벤투라는 1260년 프랑스 왕국 나르본에서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신령파와 수사파의 각 의견들 중 일부를 수용함과 더불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제정한 회칙을 시대적 상황에 맞게끔 조정을 한 첫 회헌을 선포해 분열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또 다시 조아키노 다 피오레와 같은 이단 사상이 유입될 것을 방지해 앞으로 간부의 허가 없이는 그 어떤 출판물이라도 반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수도회의 일치에 기여하기 위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공식적으로 엮으라는 의뢰를 받아 작업에 착수했다. 성 프란치스코가 묵상 도중 성흔을 받았던 라베르나 산에서 피정의 시간을 보내며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을 썼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전기>는 1263년에 완성되어 피사 총회에 제출되었고, 1266년에 열린 파리 총회에서는 이 대전기(Legenda Maior)[7]만 남기고 다른 프란치스코 전기를 모두 파기하기로 하기까지 한다. 이 덕분에 하나된 프란치스코의 의지 아래 수도회는 다시 뭉칠 수 있었으며, 중재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제2의 창립자로 존경받게 된다.

2.4. 알바노의 추기경으로 임명되다

보나벤투라는 1265년, 교황 클레멘스 4세로부터 잉글랜드 왕국 요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한사코 그 자리를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1273년까지 파리 대학교에 출강하여 강의와 설교를 하였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9세 일가 앞에서도 설교할 정도로 저명있는 신학자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활발했던 활동은 자신의 업적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닌, 교회와 프란치스코회를 외부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바쁜 세월을 보내던 1273년 봄, 여느 때처럼 파리 대학교에서 천지창조에 대해 강의를 하던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지지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이탈리아 반도 알바노의 추기경으로 서임하니, 이번에는 사양치 말고 로마로 튀어오라는 서한이 도착한다. 이번에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순명을 어길 수 없는 그는 로마를 향한 여정을 떠났고, 무제로라는 곳의 작은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묵던 중 때마침 추기경 서임 칙서를 전하러 교황 사절이 도착했다. 그 때 보나벤투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부엌에서 친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으나, 이 모습을 표현한 성화가 존재할 정도로 그의 겸손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는 자기가 설거지를 다 끝낼 때까지 추기경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고 기다리라 하였다.

1273년 5월 알바노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에 임명된 보나벤투라는 대신 작은형제회 총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와 함께 추기경으로 임명된 도미니코회의 피에르 드 타랑테즈와 페드로 훌리아는 각각 인노첸시오 5세요한 21세 교황이 되었는데…

2.5. 리옹 공의회와 죽음

파일:El_concilio.png
리옹 공의회에 있는 성 보나벤투라 (San Buenaventura en el concilio de Lyon)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作, 루브르 박물관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8]추기경 자격으로 참석한 보나벤투라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축일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자리에서 교황가톨릭, 정교회 사제들 앞에서 강론을 한 뒤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회기 중이던 7월 15일 새벽에 사망하였으며, 교황과 모든 사제들이 그의 죽음을 크게 애석해했다. 대체로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게 정설이지만, 일각에선 보나벤투라가 추기경이 되자마자 사망한 것을 심상치 않게 여겨 독살당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카더라.

보나벤투라의 유해는 리옹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치되었고, 1482년 4월 14일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더불어 1588년 3월 14일에는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던 1562년, 개신교 칼뱅파인 위그노들이 그의 무덤을 파헤쳐 광장에서 관 채로 싸그리 불태워버린(…) 사건이 벌어지는데, 누군가가 그 와중에 그의 두개골만은 어찌어찌 빼돌려 잘 보관하고 있다가 프랑스 혁명 때 그마저도 어디론가 망실되고 말았다. 그렇게 그를 기념할 만한 물질적인 것이라곤 그저 그가 남긴 숱한 저서들밖에는 없게 되었다.

3. 여러 가지 일화

성 보나벤투라에 대한 일화는 대부분 토마스 아퀴나스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들은 대학 동기였고, 같은 수도자였으며, 교류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친한 친구였을 거라 추측하는 쪽이 많다. 다만 성화에서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좀처럼 없기도 하고 사상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었으니, 절친까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날, 교황 우르바노 4세는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성체 찬미가를 작사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교황의 명을 받아 각각 시를 지어와 누구의 시가 더 의도에 합당한지 대조하기 위해 서로 자신의 시를 낭독하였다. 먼저 토마스 아퀴나스자신의 시를 낭독하였고, 보나벤투라는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라고 칭찬하며 즉석으로 자신이 지은 시를 찢어버렸다. 그러니까 낭독을 안 했다. 결국 시는 고를 것도 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것으로 뽑혔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절하나이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神性)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人性)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9]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 주는 살아 있는 빵이여,
제 영혼 주님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사랑 깊은 펠리칸, 주 예수님,
더러운 저를 주님의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구해 내시리이다.

예수님, 지금은 가려져 계시오나
이렇듯 애타게 간구하오니
언젠가 드러내실 주님 얼굴 마주 뵙고
주님 영광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또 하나는 보나벤투라가 한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전기>를 집필할 때의 일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나벤투라를 만나러 왔다가 마침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집필 삼매경에 빠져있는 보나벤투라를 보게 되는데, "아이쿠 방해하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발길을 돌려 돌아갔다는 이야기.

기타 짧은 일화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보나벤투라의 지혜가 놀라웠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를 찾아가 "그 높은 지성의 비결이 무엇입니까?"이라고 묻자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지혜의 샘입니다.”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와, 한 할머니가 보나벤투라를 만나 "수사님의 지혜를 하느님께서 아시니, 천당에선 분명히 하느님의 앞자리에 앉을 거요."이라고 칭찬하자 "저보다 할머니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실 수도 있죠."하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보나벤투라는 단테 알레기에리신곡 천국편 12곡에 등장하여, 단테에게 안내자 역할을 한다. 거기에는 단테 본인이 토마스 아퀴나스나 보나벤투라의 사상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도 있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11곡에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찬양하는 대신 자신이 속한 도미니코회는 대차게 깠고, 보나벤투라는 다음 12곡에서 성 도미니코의 업적을 말한다.

4. 보나벤투라의 스콜라 철학

보나벤투라의 성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심미적인 신비가. 머리보다 가슴이 더 중요한 사상가이다.

지금이야 프리드리히 니체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철학에 익숙한 현대인들이라면 뜬구름 잡기식의 이야기겠지만, 13세기는 철학이 신학과 기민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신학이 없는 철학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철학계의 큰 문제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1255년 3월 파리 대학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종교에 융합시키느냐가 관건이었다.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그리스도교와 충돌점이 아주 많았고, 잘못하면 종교적 사상이 분열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 열광하여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먼 자연주의적 사상을 채택한 사람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든 그리스도교에 흡수시키려 노력한 사람으로 나뉘게 되는데, 후자에 속하는 인물 중 가장 저명한 학자들이 바로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보나벤투라 및 로저 베이컨이나 도미니코회 회원인 대 알베르토[10] 및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이었다.

여기에서 아베로에스(Averrhoës)라는 에스파냐 출신 이슬람 철학자의 소개가 중요한데, 이슬람식 이름으로 이븐 루시드(Ibn Rushd)라고 하는 그는 자신이 크게 영향을 받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해 그의 사상을 유럽에 전파한 업적으로 유럽에서 그를 따르는 무리까지 나타나게 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류를 플라톤으로 메우려 했던 이븐 시나까지도 까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감쌌다. 이렇게 지나치리만치 진취적이었던 아베로에스는 이슬람 사회에서 대차게 까였는데, 역으로 유럽에서는 여태까지 영향을 끼치던 이븐 시나를 밀치고 일명 '라틴아베로에스주의'를 구축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당시 그 사상이 니체 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조심스러운 중립적 성향이었던 보나벤투라는 처음부터 아베로에스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에 그리 비판적인 성향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사상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아베로에스의 여파를 온몸으로 느낀 이후로는 태도가 바뀌었다. 大 알베르토는 물론이요 그에게서 배운 토마스 아퀴나스는 스승의 사상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나름대로 독자적인 접목 방식으로 새로운 철학을 구축했던 것과 달리, 보나벤투라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동료인 로저 베이컨의 지나치리만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주장을 비판해야만 했다. 가만 들어보니,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한 그의 주장은 신학도 결국 과학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수도자로서는 잘못된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나벤투라가 1267년 아베로에스파의 주장을 보수적 성향의 파리 주교 에티엔느 탕피에에게 고발함에 따라, 1270년에는 파리 교구가 아베로에스파가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13개 명제를 단죄, 로저 베이컨도 이단으로 규정되어 수도회에서 쫓겨났다.(…) 이것만으로 아베로에스파의 활동이 멈추지 않아 보다못한 교황청이 1277년 1월 탕피에에게 자료를 가져오라 하지만, 성질 급한 탕피에는 자기가 직접 219개의 명제를 만들어 그 내용을 몽땅 단죄해 버린다. 이 사건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긍정적으로 생각한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게도 위기로 다가왔다. 다만 그 때는 보나벤투라고 토마스 아퀴나스고 다 죽은 후였기 때문에… 다만 토마스 아퀴나스 등은 철학신학의 우위에 두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죄당하지 않았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라는 말로도 알 수 있듯이.

간단히 말하면 보나벤투라에게 쫓겨난 로저 베이컨은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고, 大 알베르토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대세였던 그 사상을 그리스도교와 잘 버무려 어떻게든 유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중도적 입장, 보나벤투라는 새로 밀려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신경 쓰기보다 본래의 플라톤적 관념에 더 충실한 입장이었다.

4.1. 토마스 아퀴나스와의 학문적 차이

우리 지능이 밝히는 빛이 우리 마음까지 감동시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빛이다.

영적인 보나벤투라와 지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각은, 최상위의 윤리의식이자 양심의 불꽃이라 불리는 '신데레시스(synderesis)'에 대한 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먼저 보나벤투라는 "이성은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빛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으며, 진리란 명상과 기도로 영혼을 끊임없이 단련하여 하느님과 직접 일치할 때 알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성이 아예 필요하지 않다는 소리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1차적인 단계이자 도구라는 이야기이며, 간단히 말해 머리로 지식을 습득한 뒤에도 가슴으로 통찰까지 하여야만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일단 하느님을 본 경험을 이끌어내는 이성의 단계와 그를 통해 하느님을 본받은 영혼을 느끼는 감각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하느님과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일치하는 일종의 황홀감, 즉 관조(觀照)의 단계에 이르는 3가지 과정이 중요하다는 관점. 아우구스티노 같은 초대 교부들의 의지를 그대로 받든 것이며, 그야말로 수도자답고 사제다운 발상이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진리의 인식은 그와 반대로 작용한다. 기도나 명상으로 영혼의 단련을 통해 하느님을 보지만 이해할 수 없으며,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슴으로 '응시하는' 것을 통해 머리를 굴려 그 뜻을 이해하라는 이야기다. 아니,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굴려 이해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창하는 것은 실천적 지성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그리스도교를 그 나름대로 융합한 결과이다.

이 의견의 차이는 그들이 속한 수도회의 성향과도 관련이 있다. 보나벤투라가 속한 프란치스코회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절반은 폐쇄된 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속한 도미니코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고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교육시키고 전파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보나벤투라가 세라핌 박사라 불리는 이유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성흔을 받은 라베르나 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여섯 날개 세라핌의 환영을 보았던 것도 있고, 그런 그가 저서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ITINERARIUM MENTIS IN DEUM)>에서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을 그 세라핌의 여섯 날개[11]로 나누어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단계: 하느님에게 올라가는 단계와 그분의 흔적을 통하여 관상함에 대하여 (DE GRADIBUS ASCENSIONIS IN DEUM ET DE SPECULATIONE IPSIUS PER VESTIGIA EIUS IN UNIVERSO).

2단계: 이 감각적 세계 속에 그분의 흔적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DEI IN VESTIGIIS SUIS IN HOC SENSIBILI MUNDO).

3단계: 타고난 능력에 각인된 그분의 형상을 통하여 하느님을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DEI PER SUAM IMAGINEM NATURALIBUS POTENTIIS INSIGNITAM).

4단계: 은총의 선물에 의해 재형성된 그분의 형상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DEI IN SUA IMAGINE DONIS GRATUITIS REFORMATA).

5단계: 하느님의 일차적인 이름인 존재를 통하여 하느님의 하나이심을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DIVINAE UNITATIS PER EIUS NOMEN PRIMARIUM, QUOD EST ESSE).

6단계: 선이신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하느님삼위일체를 관상함에 대하여(DE SPECULATIONE BEATISSIMAE TRINITATIS IN EIUS NOMINE, QUOD EST BONUM).

최종 단계: 호한 사랑 속에 하느님을 향하여 상승하는 영혼에게 휴식을 주는 신비로운 영적 황홀에 대하여(DE EXCESSU MENTALI ET MYSTICO, IN QUO REQUIES DATUR INTELLECTUI, AFFECTU TOTALITER IN DEUM PER EXCESSUM TRANSEUNTE).


[1] 다만 로저 베이컨은 같은 프란치스코회로서 보나벤투라의 철학을 계승하기도 했다[2]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3] O, buona ventura![4] Magister. 현재의 박사 학위에 해당한다.[5] 수도회에 속해 있지만 세속에서 지내는 평신도를 일컫는다.[6] 가령 "예수그의 사도들은 완전한 청빈 정신을 따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무소유를 내세워 설교 활동을 했다"든지 "성부성자의 시대는 실패했고 성령의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7] 베네딕토 16세에 의하면, 라틴어인 '레젠다'(Legenga)는 전설의 레전드 상상의 산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식적으로 "읽어야 하는" 권위 있는 본문을 의미한다.[8] 개최한 주된 이유는 가톨릭정교회의 화합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와 많은 정교회 주교들이 참석했으나, 이는 동로마 제국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고 이후 약 100년여 동안 동서 교회 일치 시도는 중단된다.[9] 예수십자가에 못박힐 때, 예수의 오른편 십자가에 못박혔던 죄수. 이름은 디스마라고 하며, 가톨릭에서는 성인(聖人)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3월 25일. 반면 예수의 왼편 십자가에 못박혔던, 끝까지 뉘우치지 않은 강도의 이름은 제스따스라고 한다. 물론 제스따스에게는 공경 같은 거 없다.[10] 축일 11월 15일.[11] 실제 챕터 수는 7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