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5:37:06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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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위상3. 공통 역사4. 교회별 총대주교

1. 개요

이집트아프리카 교회의 수장. 현재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정교회 총대주교콥트 정교회 총대주교, 콥트 가톨릭 총대주교로 3명이고, 이 중 정교회 총대주교와 콥트 정교회 총대주교는 "교황(Παπας, Ⲡⲁⲡⲁ)이자 총대주교''이다. 제13대 총대주교 헤라클레우스 때부터 교황의 명칭을 사용했으며, 로마 교황청 또한 이 칭호를 인정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회가 정교회콥트 정교회로 분리된 건 이 이후의 일인데 둘 다 교황이라는 명칭은 고스란히 가져갔다. 그러나 정교회나 콥트 정교회 내에서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들이 가톨릭의 교황처럼 특별히 주교들의 으뜸가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Παπας'/'Ⲡⲁⲡⲁ'를 교황이라는 말보다는 '아버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맞다고 볼 수 있다.

2. 위상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기준으로 할 때, 전체 교회에서 로마 다음가는 주교좌(곧, 동방에서 가장 대우 받는 주교좌)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가 동로마의 도성에 있다는 이점을 통해 부상하면서 교회정치적으로 알렉산드리아와 충돌하게 되며, 여기서 로마는 대체로 친알렉산드리아 노선을 타는데[1] 바로 이 관계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칼케돈 공의회까지 4차례 세계 공의회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3. 공통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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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교회는 기원후 69년 복음사가 성 마르코에 의해 세워졌다는 전승에 따라 초대 주교의 이름에 마르코를 올려두었다. 한편 마르코가 자신의 제자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는 설도 있다.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현지 주교로서 교회를 발전시켰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일면서 체포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마르코는 목에 줄을 매 읍내를 돌게 되고 참살당하게 된다. 사후 마르코의 유해는 알렉산드리아에 매장되었지만, 나중에 이집트가 이슬람권에 편입되면서 그의 무덤이 훼손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행히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성 마르코의 유해를 옮길 계획을 세우게 된다. 밀수과정에서 세관에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슬림이 만지지도 못하는 돼지고기로 유해를 덮어 세관을 통과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성인의 유해는 별 탈 없이 배에 오르고 베네치아를 향해 무난한 항해를 해 오늘날 산 마르코 대성당에 모셔질 수 있었다.[2] 서기 827년의 일이다.

13대 헤라클레우스 총대주교(재임 227~240) 때에 교황[3]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25대 디오스코루스 1세를 시작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합성론파들이 칼케돈 신조에 반발하자 칼케돈파 총대주교와 비칼케돈파 총대주교가 양립과 통합을 반복하는 등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권을 이용하여 비칼케돈파를 완전히 축출한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알렉산드리아의 정교회 총대주교구이다.

하지만 7세기 들어 이슬람 세력이 동로마 제국을 격파하고 이집트를 차지하게 되면서, 일명 '황제파'(멜키트)라 불리던 칼케돈파 정교회를 엄청나게 탄압했다. 이후로 이집트는 쭉 이슬람 세력권에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정교회 총대주교구는 10세기 가까이 사실상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로 전락한다.

이후 19세기 들어 그리스인들의 이집트 이민이 대거 급증하면서[4] 알렉산드리아 교회 또한 크게 성장하게 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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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콥트 정교회
테오도로스 2세 타와드로스 2세

2012년 새로이 착좌한 콥트 교회의 총대주교 이름이 '타와드로스 2세', 즉 그리스식으로 명명하면 '테오도로스 2세'인데, 현재 정교회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이름 역시 '테오도로스 2세'이다. 각기 역사적 이유로 갈라져 동일하게 복음사가 성 마르코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두 교회 수장이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미 착좌해 있던 정교회 테오도로스 2세도 타와드로스 2세에게 보내는 축전에 '이름이 같은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잘해보자'는 식으로 축전을 보내기까지 했다.

4. 교회별 총대주교


[1] 왜냐하면 도시의 정치적 위상이 주교좌의 위상을 좌우한다는 식의 콘스탄티노폴리스식 전제가 로마의 이해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이해에 의하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비록 알렉산드리아는 마르코를 통해서 간접적 방식일 순 있으나, 베드로 사도에게 연결되므로(그래서 이 셋을 묶어서 'Petrine Sees'라고도 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는 케이스가 다르다.[2] 이후로 베네치아는 수호성인으로 성 마르코를 모시고 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물론 현재까지도 베네치아시의 상징은 '성 마르코의 사자'라고 불리는, 마르코 복음서를 들고 있는 사자 모양이다. 도시 곳곳에 보인다.[3] Παπας(파파스), 사실 어원적으로 교황보다는 "아버지"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이는 가톨릭의 교황 역시 마찬가지.[4] 1940년대에는 이집트 내 그리스인들의 숫자는 25만 명에 달하기도 했다. 이후 1953년 혁명의 여파로 많은 수가 이집트를 떠났지만, 여전히 이집트 내에서 그리스인은 주요 소수민족들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