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2004년 네덜란드 가톨릭 방송 KRO가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핌 포르타윈 | 빌럼 1세 판 오라녀 | 빌럼 드레이스 | 안토니 판레이우엔훅 | 에라스뮈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요한 크루이프 | 미힐 더라위터르 | 안네 프랑크 |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레인 | 빈센트 반 고흐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알레타 야콥스 |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 아니 M. G. 슈미트 | 율리아나 여왕 | 요한 뤼돌프 토르베커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알리다 보스하르트 | 안톤 필립스 | 프레디 하이네컨 | 하니 스하프트 | 빌헬미나 여왕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바뤼흐 스피노자 | 톤 헤르만스 | 클라우스 폰암스베르크 | 요한 판올덴바르네벌트 | 마르코 반 바스텐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핏 피터르손 헤인 | 요프 던아윌 | 얀 레이흐바터르 | 파니 블랑커르스쿤 | 판코턴 언 더비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후고 그로티우스 | 요한 더빗 | 안토니 포커 | 에뒤아르트 데커르 |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자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빔 콕 |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 마르코 보르사토 | 에릭 하젤로프 룰프제마 | 티에스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베아트릭스 여왕 | 티튀스 브란츠마 | 코르넬리스 렐리 | 한스 테이우언 | 요서프 륀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레온틴 판모르설 | 빌럼 콜프 | 홋프리트 보만스 | 헨드릭 안톤 로런츠 | 아벌 타스만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요프 판던엔더 | 안드레 판다윈 | 요스트 판던폰덜 | 리누스 미헬스 | 미스 바우만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빌럼 바런츠 |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언하위스 | 뤼트 뤼버르스 | 얀 틴베르헌 | 빔 소네벌트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요커 스밋 | 프리츠 볼케스테인 | 히에로니무스 보스 | 조니 크라이캄프 | 마르하 클롬페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요하너스 페르메이르 | 딕 브뤼나 | 알베르트 플레스만 | 요프 주테멀크 | 헬라 하서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토마스 아 켐피스 | 윌리엄 3세 | 케나우 시몬스도흐터르 하셀라어르 | 요하너스 디데릭 판데르발스 | 부보 오컬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아나 마리아 판스후르만 | 헤르만 부르하버 | 루드 굴리트 | 모니크 판더번 | 프레이크 더용어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안톤 픽 | 바우데베인 더그로트 | 빌럼 프레데릭 헤르만스 | 피터르 옐러스 트룰스트라 | 알버르트 헤인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파울 더레이우 | 약 P. 테이서 | 얀 볼커르스 | 핏 몬드리안 | 시몬 스테빈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하윌라우머 흐룬 판프린스테러르 | 륏허르 하우어르 | 하리 뮐리스 | 아브라함 카위퍼 | 마르턴 트롬프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빔 칸 | 폴 버호벤 | 이자벨 드 샤리에르 | 람서스 샤피 | 아버 렌스트라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666><colcolor=#fff> 히에로니무스 보스 Hieronymus Bosch[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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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예로니뮈스 판아컨 Jheronimus van Aken |
출생 | 1450년경 |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브라반트 공국 스헤르토헨보스 | |
사망 | 1516년 8월 9일 (향년 65~66세)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브라반트 공국 스헤르토헨보스 | |
국적 | 네덜란드 |
직업 | 화가 |
사조 | 플랑드르파, 르네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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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 출신 화가로 '초기 네덜란드파'라고도 하는 플랑드르파[2]의 대표 주자 중 하나로 꼽힌다.1450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1516년 사망하여 동년 8월 9일 장례미사가 거행되었다. 보스의 그림은 환상적이고도 독특한 화풍이 특징이다.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을 소름끼치게 표현하였기 때문에 지옥의 화가, 혹은 악마의 화가라 불렸다.
2. 생애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오늘날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브라반트 주에 속하는 스헤르토헨보스에서 주거하며 활동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인 보스 역시 이 도시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보스를 '보스'라 부른 최초의 예는 1504년 부르고뉴 공국의 대공이자 네덜란드의 군주인 미남왕 필리프의 '최후의 심판' 제단화 의뢰로 보인다. 이 제단화 의뢰에서 왕은 보스를 '보스라 불리는 예로니무스 반 아켄'이라고 칭한다.[3] 보스가 활동하던 시기 스헤르토헨보스는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서, 농업 지대의 중심지이자 발전하던 상업 도시였다.당시 스헤르토헨보스는 종교 부흥이 크게 일어나던 도시 중 하나였는데, 수많은 수도원과 수녀원이 도시 내외에 자리잡고 있었다[4]. 보스 역시 자신이 거주하던 당대 도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보스의 가문은 14세기 말 ~ 15세기 초 사이 스헤르토헨보스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본명인 예룬 반 아켄(Jeroen van Aken)의 반 아켄(van Aken)이라는 성은 독일의 도시 아헨을 가리키며, 그들의 출신이 독일임을 말해준다. 보스의 집안을 보면 보스의 형인 호센 반 아켄(Goossen van Aken), 아버지 안토니우스 반 아켄(Anthonis van Aken)과 할아버지 얀 반 아켄(Jan van Aken) 역시 보스와 같은 화가였으며, 보스의 삼촌 세 명[5]도 화가였던 미술가 집안이었다.
보스의 출생과 생애,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 보스는 일기나 편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가들은 그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스헤르토헨보스 시(市) 문서나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회계 장부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늘날 보스의 사생활이나 출생일 등을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6]
보스의 이름이 최초로 문서에 언급되는 것은 1474년 스헤르토헨보스 시 문서이며, 그의 두 형제와 한 명의 누이가 같이 기재되었다. 1479 ~ 1481년 사이에 보스는 그보다 몇 살 연상인 알레이트 고이아르츠 반 덴 메르베네(Aleyt Goyaerts van den Meerveen)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가문은 부유했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었다.[7]
1486 ~ 1487년 당대 네덜란드 북부와 베스트팔렌에서 세력을 떨치던 성모 마리아 형제회(화어: Illustre Lieve Vrouwe Broederschap)의 구성원 명단에서 최초로 보스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있다. 보스의 가문은 대부분 이 종교회 소속이었고, 형제회로부터 다양한 예술 작품 의뢰를 맡았다. 보스의 아버지 안토니우스는 형제회의 예술고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보스 역시 기록만으로도 1493 ~ 1494년 형제회 신축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1511 ~ 1512년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 상, 1512 ~ 1513년 샹들리에 디자인 등 형제회로부터 다양한 일을 의뢰받았다.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보스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516년 그의 사망 기록으로, 동년 8월 9일 형제회는 성 요한 교회에서 보스를 추모하는 장례 미사를 거행하였다.[8]
3. 작품
3.1. 초기 성화(聖畵)
보스의 초기 작품(1470 ~ 1485년경)은 주로 성서의 일화를 주제로 하고 있다. 월터 S. 기브슨은 보스의 초기 작품을 네덜란드 미술 중 사본장식화에 가깝다고 보았다.이 초기 작품에 대표적인 예로는 필라델피아 예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 프랑크푸르트 슈태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사람을 보라>,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제단화 날개 패널인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등이 있다. 이 초기 작품들의 특징은 구성이 단순하며 성화의 전통적 유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9]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초기 성화 모음 (도해 1, 2, 3, 4) | |
도해 1. < 동방박사의 경배 > | 도해 2. < 이 사람을 보라 > |
도해 3. <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 | 도해 4. < 보행용 도구를 갖고 있는 아기 그리스도 > (도3의 뒷면) |
3.2. 중기 작품
보스의 중기 작품(1485 ~ 1500년경)부터는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보스의 인간 풍자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이러한 태도는 중세 시대로부터 유래된 당시 북유럽인들의 관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이와 같은 관점을 취하는 작품으로는 1494년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에 의해 발표된 풍자 연작시 『바보배(독어: Das Narrenschiff)』가 있다.[10] 이 작품은 인간의 실수와 어리석음을 꼬집으며 '온 세계가 어둡고, 맹목적인 죄악이 끊이지 않고, 거리마다 바보들로 가득하다.'고 불평하고 있다.[11] 중세 유럽에서는 신의 말을 거역한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것에 강하게 투쟁하거나 저항하지 않으며, 짐승의 단계로 추락하기 쉬운 나약한 존재로 보았다.
보스의 중기 작품 시기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로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프라도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도해 5)이 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일상 속에서 범하는 일곱 가지 대죄를 사소한 장면 속에서 생생하게 담고 있다. 원환형 레이아웃의 중앙에 위치한 예수의 그림은 '신의 눈'을 의미하며, 자신의 성흔을 작품의 관람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이미지(동공을 상징)를 두르고 있는 금색 글자는 라틴어로 'CAVE CAVE DEUS VIDET'라고 적혀 있으며, 이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하느님이 지켜보신다.'라는 뜻이다.
도해 5. <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 > |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 세부 (도해 5-1 ~ 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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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 5-1. < 폭식 > | 도해 5-2. < 나태 > | |
도해 5-3. < 사음 > | 도해 5-4. < 오만 > | |
← 도해 5-5. < 분노 > | ||
도해 5-6. < 질투 > | 도해 5-7. < 탐욕 > |
신의 동공 바깥에는 인간들이 죄를 범하는 모습들이 차례대로 그려저있다. (도해 5-1)은 폭식을 나타낸다. 주부가 식탁에 가져온 다량의 음식들을 모두 먹어치우고 있다.(도해 5-2)는 나태를 상징한다. 난롯가에서 남자가 졸고 있으며, 그가 신앙적 의무를 지키지 않고 있음을 좌측에서 묵주를 들고 들어오는 여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도해 5-3)은 천막 안에 있는 여성들을 통해 사음을 나타낸다. (도해 5-4)는 악마가 거울을 비춰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채 허영에 차 새로 산 모자를 보며 감탄하는 여성을 통해 오만을 나타낸다. (도해 5-5)는 분노를 상징한다. 술집 앞에서 두 남자가 서로 싸우고 있다. (도해 5-6)은 질투를 상징하며, 구혼을 거절당한 남자가 질투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도해 5-7)은 탐욕을 나타내며 판사가 우측 남성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다.
원환 상하에는 각각 문구가 적힌 띠가 그려저있는데, 이 띠에는 신을 저버린 인간들이 신의 눈길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적혀있다. 상하 띠는 해석하자면 각각 '이 생각 없는 민족, 철없는 것들아. 조금이라도 슬기로웠더라면 알아차렸을 터인데. 저희들이 장차 어찌될는지 깨달았을 터인데.' / '그들에게 내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결국 어찌되는가 두고 보리라.'라고 적혀있다.[12]
도해 5-8. < 지옥에서 벌을 받는 저주받은 자 >, <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 > 세부 |
원환 바깥에는 네개의 작은 원형이 각각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네가지 종말을 나타낸다. 보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은 잘못을 범하기 쉽지만, 인간을 지켜보는 신의 시선을 의식하면 이러한 우행이 고쳐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당대 네덜란드에서 이러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은 대게 가정용품 등으로 장식되었다.
도해 6. < 바보 치료 > |
보스의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작품은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외에도 <바보 치료>, <바보배>가 있다. 1494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 <바보 치료>는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형 레이아웃 안에 풍요로워 보이는 여름 풍경 속에서 머리에 깔때기를 쓰고 있는 외과의사처럼 보이는 시술자가 의자에 묶인 남성의 머리에서 무언가를 제거하고 있다. 물병으로 보이는 물건을 들고 있는 검은 후드차림의 수도사는 불만스러운 듯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모습이며, 그 옆의 수녀 복장을 한 여성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수수방관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는 책이 얹어져 있다.
원형 레이아웃 바깥에는 세련된 금박 글씨로 '선생, 돌을 빼 주시요. 나는 루베르트 다스라고 합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루베르트'라는 이름은 당시 네덜란드 문학에서 우둔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사용되었다. 또한 시술자가 의자에 묶여있는 남성의 머리에서 제거하고 있는 것은 튤립으로, 이것은 16세기 네덜란드에서 우둔함, 바보스러움을 상징했다.[13] 시술자는 튤립을 제거함으로써 바보를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보스는 바보의 상징으로 튤립을 사용하였지만, 원래 당대 '바보를 치료하는 시술'은 환자의 머리에서 돌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시술법이 실제로 실행된 것은 아니고 일종의 엉터리 치료법으로써 문학작품 등에서 나타났다.
시술자가 이런 기괴한 치료법을 시행하고 있는데도 성직자로 보이는 두 인물은 방관하고 있다. <바보 치료>는 엉터리 치료법으로 사람을 속이는 사기꾼과 함께 교회-성직자들을 비판하고 있다.[14][15]
4. 화풍
그림체가 어떻게 보면 경쾌하고, 어떻게 보면 기괴하다. 벽화라는 것을 감안해도 인간의 크기를 작게 그리고, 대신 수많은 인간을 그려넣어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연출한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지독한 염세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죄악을 풍자하는 그림이 대부분이다.이 죄악의 풍자라는 게 굉장히 에로틱하면서도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사람을 마구 집어삼키면서 동시에 배설하고 있는 새 머리 괴물이라든가, 꼬챙이에 꿰뚫리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그렇지만 이 풍자들 중 많은 것들은 현대 미술에나 등장할 법한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때문에 500년을 앞서간 천재로 불린다. 또한 전체적인 그림을 통해서 보여주는 구도는 작게 그려놓은 인간들과 달리 정말 웅장하면서도 위압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위의 현대 미술에나 등장할 법하다는 그림들 때문에 미래인 내지는 외계인 떡밥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확실히 저런 주장이 튀어나온 게 이해가 될 정도로 현대적인 구도가 많다. 사람을 집어삼키는 동시에 배설하는 새 머리 괴물이 앉아 있는 의자는 수세식 변기를 연상시키고, 머리에 둥근 유리구를 뒤집어 쓴 사람은 우주인을 연상시킨다. 거기에 허리가 끊어진 채 속이 텅 빈 한 남자의 토르소는 확실히 그 시대 사람의 작품이라기보다 현대 미술의 느낌이 강하다.
대표작인 삼면화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혹은 정원)의 왼쪽 날개 하단 디테일. 프라도 미술관 소장.[16]
이것이 논란이 되는 외계인/미래인 떡밥의 중점. 저 의자는 수세식 변기, 혹은 외계의 발전된 변기이며 괴물 밑의 초록색에 둥그런 유리 머리를 가진 생명체는 외계인/미래인 이라는 이야기다. 다른 그림에 나오는 성채는 로켓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떡밥일 뿐 진짜라고 믿으면 곤란하다.
기괴한 그림 때문에 이런 저런 오해를 많이 받은 화가이다. 그 중 하나가 이러한 그림을 인간의 무의식에 빗대어 표현했다는 건데 이것도 15세기 중세인을 20세기의 관점으로 이해 하려다 생긴 억측이다. 사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은 상당히 교회의 메세지를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 그는 타락한 세상과 지옥을 그림으로써 기독교적 가치의 상실로 인해 발생한 세상의 혼란과 타락한 인간상을 자비 없이 풍자하고 꾸짖었다. 타락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그는 예수와 성인들의 삶에 눈을 돌린다. 근엄한 아기 예수나 광야에서 수행하며 악마의 유혹을 뿌리친 성 예로니모 등을 그림으로써 그는 세상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성인들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했고 교회는 그를 꾸준하게 후원했다. 교회의 후원 덕에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의 기괴한 그림과 풍자는 네덜란드 속담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거나 설교서의 삽화에서 모티브를 얻어온 것이다. 예를 들면 <건초 수레>는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건초더미일 뿐이다."와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물건들을 건초더미처럼 쌓아두었지만 사람은 건초수레를 독차지하려 한다."라는 네덜란드 속담에서 모티브를 얻어왔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라는 속담을 나타내기 위해 발이 없는 '동물' 말이 빠르게 달리는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또한 보스의 그림에서 나오는 괴물들의 원형은 네덜란드에서 당시 출판되던 설교서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모티브는 속담이나 삽화에서 따 왔지만 보스는 자기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핑크레이디 클래식에서는 지옥을 만드는 괴팍한 노인이자 출연한 화가 중 유일하게 악역에 가깝게 묘사되었는데 실제로는 고지식하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을 확률이 99%다. 보스의 아버지와 형제는 수도원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말년에는 무료로 봉사까지 했다고 한다. 저 지옥 같은 그림도 "지옥을 만들어야지 우헤헤"라는 사고방식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착하게 안 살면 이렇게 되니 속죄하고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자" 라는 뜻이 더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천재성이 수그러드는 것은 아니다. 언어 유희적 요소라 해도 이런 수많은 인간 군상과 조형을 현대에 와서도 세련되어 보일 정도로 배치해 놓은 것은 그의 천재성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보스의 그림은 후대 초현실주의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다.
5. 여담
- 참고로 저 그림을 좋아했던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스페인의 펠리페 2세다. 젊었을 적부터 압박에 시달린 데다가 말년에 늘 우울했던 그는 그의 그림만 보면 표정이 풀어지곤 했다.
-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한국어 표기는 다양한데 본 문서에서는 보스로 작성되었지만 보쉬, 보슈라고도 많이 표기된다. 보스의 모국어인 네덜란드어로는 히에-로니뮈즈 버스([ɦijeːˈroːnimʏz ˈbɔs])라고 읽는다. 강세는 "로"와 "버"에 있다.
6. 대중 매체에서 보스와 그의 작품들
- 베르세르크 - 미우라 켄타로의 만화, 단행본 34권에서 페무토가 지상에 강림한 뒤 나머지 넷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 중 고드 핸드 보스의 그림을 참고한 장면이 나온다. '쾌락의 동산' 중 '지옥' 부분에 나오는 중앙의 몸이 빈 남자의 모습 같은 구조물이 주변에 보스의 그림에 나올 법한 괴물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안에 조그맣게 유빅이 여러 괴물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다.[17]
- 해리 보슈 시리즈 - 마이클 코넬리의 추리소설 시리즈, 본작의 주인공 해리 보슈의 본명이 히에로니무스 보슈로, 주인공의 어머니가 이 작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담으로 그의 동료나 지인들은 히에로니무스라는 발음이 어려워서 해리라는 애칭을 많이 쓰고, 처음 그의 이름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읽는 거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시리즈 중 <다크니스 모어 댄 나이트>에서는 대놓고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작품이 언급되기도 한다.
- 앨리스 매드니스 리턴즈 - 작중 루트릿지 정신병원에서 앨리스를 진찰했던 의사의 이름인 '히에로니무스 Heironymous' 윌슨으로 패러디되었다.
- 네이 오블리비스카리스의 2집 앨범 <Citadel> - 보스의 작품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에서 삼연작(Triptych) 구조를 빌려와 앨범 전체와 2번 트랙에서 사용하고 있다. 가사에도 해당 작품이 직접 언급된다.
- 핑크레이디 클래식 - 헤르만 괴링과 의기투합해 지옥을 만들었고, 붙잡혀온 윤현석에게 다친 오른팔로 지옥의 풍경을 그리는 벌을 주었지만 보스의 지옥으로 끌려온 파블로 피카소를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내려는 현석의 제안[18]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피카소가 완성한 '납골당'을 보고 감동한 보스는 두 사람을 풀어줬고, 반 메헤렌이 괴랑과 함께 '납골당'의 지옥으로 떨어질 때 자신의 죗값을 치르겠다며 스스로 뛰어들었다. 사실 핑크레이디 클래식은 어떻게 보면 보스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메리 수 및 악담에 가깝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스의 이미지를 괴팍하고 음험한 염세주의자로 박아버린데다가 우영욱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역량에 압도당하는 내용이니. 위에서도 말했지만 보스의 그림은 교회를 찾는 일반 대중을 위한 경고 및 풍자의 성격이 강한 그림이었다. 중2병 넘치게 지옥을 구현하자는 게 그의 의도가 아니라 '이렇게 무서운 곳 가기 싫으면 착하게 살자' 라고 말하는 게 그의 의도였다. 거기에 당시의 보스에게 피카소의 그림을 보여주면 '이게 그림이냐?' 라고 반응할 게 분명하다.
- 비포 더 플러드 - 환경 다큐맨터리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 그림을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 문명 6 - 위대한 예술가 중 르네상스 시대의 위인으로 등장하며, 쾌락의 정원, 최후의 심판, 건초용 마차 3부작 등 종교물 그림을 준다. 이름 표기가 '히로니뮈스 보스'로 되어있다.
- 메타포: 리판타지오 - 작중 등장하는 괴생명체 "인간"의 디자인을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한다.
[1] 네덜란드어 발음은 /j/ 활음 첨가와 자음동화가 반영된 [ɦijeːˈroːnimʏz ˈbɔs\](히예로니뮈즈 보스)이며, 네덜란드어 표기법상으로는 '히에로니뮈스 보스'로 표기할 수 있다. 네덜란드어의 다중문자 sch는 [ʃ\]('시' 또는 '슈'로 옮김)가 아닌 [sx\]('스흐'로 옮김)를 나타내며 어말에서는 [s\]로 조음된다.[2] 이것은 15~16세기에 걸쳐 당시 부르고뉴 공국 ~ 스페인령 네덜란드였던 저지대 국가 시절에서 성행한 미술운동으로, 회화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조. 이 미술 운동은 네덜란드의 위대한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며, 북부 르네상스 파의 일파로 취급된다.[3]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 김숙(역). 시공사, 2001, p 18.[4]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 김숙(역). 시공사, 2001, pp 13 - 14.[5] 보스의 할아버지인 얀 반 아켄(Jan van Aken)의 아들들, 즉 안토니우스 반 아켄(Anthonis van Aken)의 형제들.[6] 보스의 출생년도에 관해서 연구가들은 대체로 1450년경으로 보고 있다.[7]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 김숙(역). 시공사, 2001, pp 14 - 16.[8]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 김숙(역). 시공사, 2001, p 17.[9]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김숙(역). 시공사, 2001, p 20.[10] 대한민국에서는 2006년 안티쿠스에서 노성역 역으로 출간하였다, 본 번역은 노성역 역을 따랐다. 또한 『바보배』는 '광인들의 배'라고도 번역된다. 대표적으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있다.[11]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 김숙(역). 시공사, 2001, p 33.[12]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 김숙(역). 시공사, 2001, pp 35 - 36.[13]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 김숙(역). 시공사, 2001, p 40.[14] 이미 보스 시대에 보스가 거주하던 스헤르토헨보스 시는 수많은 수도원이 있었고, 이들의 존재와 경제적 경쟁력은 도시민들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불러온 듯 하다. - 『히에로니무스 보스 -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 . 김숙(역). 시공사, 2001, p 14.[15] 보스의 과학적 접근을 조명하는 관점도 있다. <바보 치료>에 등장하는 시술자의 시술이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에서 실제로 행해졌던 두부절개술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조아니 스쿨테누스(Joannis Scultetus)의 저서 『Armamentarium Chiruigicum』의 외과저서에 등장한 개두술과 본 도해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아 <바보 치료>가 사회 풍자 외에도 보스 본인의 앎(지식)의 한 방법이자 지적 소산의 결과라고 보았다. - 신방흔. (2004). 이미지와 병리: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회화에 대한 푸코적 관점. 미술사학보, (22), 5-36.[16] 참고로 상단의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위에서 말한 특징이 잘 드러난 일부분일 뿐이고, 전체 그림은 이렇게 생겼다.[17] 여담으로 나머지 셋을 상징하는 그림은 다음과 같다 : 보이드 - 위에서 내려다본 뇌의 모습. 슬렁 - 불길 혹은 빛 속에서 춤추는 슬렁의 모습, 콘라드 - 콘라드의 얼굴을 이루고 있는 쥐 떼.[18] 당신이 상상도 하지 못한 지옥을 피카소가 그려낼 수 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