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1:35:46

부르고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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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의 행정 구역과 군구
(1789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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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조세 재판소 설치 지역, : 지방 삼부회 설치 지역, : 직접세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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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르도 파일:아키텐 레지옹, 귀엔 문장.svg귀옌
2 프로방스 파일:프로방스 백국 문장.svg프로방스 백국
3 아미앵 파일:피카르디 문장.svg피카르디
4 부르주 파일:베리(프랑스 왕국) 문장.svg베리, 파일:니에브르 데파르트망 문장.svg니베르네
5 파일:노르망디 문장.svg노르망디
6 샬롱 파일:샹파뉴 문장.svg샹파뉴
7 부르고뉴(디종) 파일:부르고뉴 문장.svg부르고뉴 공국
8 그르노블 파일:도피네 문장.svg도피네
9 리옹(Riom) 파일:오베르뉴 문장.svg오베르뉴
10 리옹(Lyon) 파일:리옹 문장(단순).svg리오네, 보졸레, 포레
11 몽펠리에 파일:랑그도크의 문장.svg랑그도크
12 파리 파일:일드프랑스(프랑스 왕국) 문장.svg일드프랑스
13 푸아티에 파일:푸아투 문장.svg푸아투
14 루앙 파일:노르망디 문장.svg노르망디
15 툴루즈 파일:랑그도크의 문장.svg랑그도크
16 투르 파일:투렌 문장.svg투렌, 멘, 파일:앙주 문장.svg앙주
17 메스 파일:로렌 공국 국장.svg로렌(삼주교구)
18 파일:브르타뉴 문장.svg브르타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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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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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니에브르 데파르트망 문장.svg니베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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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몽토방 파일:아키텐 레지옹, 귀엔 문장.svg귀옌(오트귀옌)
24 알랑송 파일:노르망디 문장.svg노르망디
그랑페르슈
25 페르피냥 루시용
26 브장송 파일:프랑슈콩테 문장.svg프랑슈콩테
27 발랑시엔 파일:전통적 플란데런 문장(위키미디어 공용).svg플랑드르 에노 프랑세가 플랑드르에 포함
28 스트라스부르 파일:알자스 문장.svg알자스
29 브르타뉴 파일:브르타뉴 문장.svg브르타뉴
30 파일:전통적 플란데런 문장(위키미디어 공용).svg플랑드르, 파일:아르투아 문장.svg아르투아
31 라로셸 파일:오니스 문장.svg오니, 파일:생통주 문장.svg생통주
32 낭시 파일:로렌 공국 국장.svg로렌
33 트레부 파일:부르고뉴 문장.svg부르고뉴(동브)
34 코르스 파일:코르시카 문장.svg코르스
35 오슈 파일:가스코뉴 문장.svg가스코뉴
36 바욘 라부르 1784년~1787년 이후 오슈 편입
37 베아른, 술 1784년~1787년 이후 오슈 편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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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이후에 편입된 군구 혹은 지역(35~43)
(병합 후 데파르트망으로 편입)
번호 이름 비고
35 콩타 브네생 1791년 편입
36 뮐하우젠 공화국 1798년 편입
37 사부아 공국 1860년 최종 편입
38 니스 백국 1차 병합(1793~1814), 1860년 2차 병합. 현 알프마리팀 데파르트망.
39 몽벨리야르 공령 1793년 편입
40 망통-로크브륀 자유시 1861년 편입
41 탕드 백국 2차 세계대전 이후 편입
42 자르베르덴 백국 1793년 편입. 현 바랭
43 살름살름 공령 1793년 편입
}}} ||
부르고뉴 공국
Duché de Bourgogne

880년~1477년[1]
1477년~1790년
[2]
파일:부르고뉴 십자가(옛 깃발형-기본형).svg 파일:2000px-Arms_of_Eudes_de_Bourgogne2017.png
<rowcolor=#fede00,#fede00> 부르고뉴 십자가[3] 카페-부르고뉴 문장
파일:발루아-부르고뉴기.svg 파일:발루아부르고뉴 문장(1364-1404)-2000px.png
<rowcolor=#fede00,#fede00> 발루아-부르고뉴기[4] 발루아-부르고뉴 문장[5]
파일:Bourgogne_in_France_(1789).svg
프랑스 혁명 이전(1789)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
<colbgcolor=#0701a0,#0701a0><colcolor=#fede00,#fede00> 프랑스어 Duché de Bourgogne
라틴어 Ducatus Burgundiae
네덜란드어 Hertogdom Bourgondië
위치 프랑스 동부(욘, 코트도르, 손에루아르, [6])
수도 디종
정치체제 봉건제
국가원수 공작
주요 공작 선량공 필리프 3세(1419~1467)
용담공 샤를 1세(1467~1477)
언어 프랑스어, 부르고뉴어, 프랑코프로방스어
종족 프랑스인, 부르고뉴인
종교 가톨릭
성립 이전 부르군트 왕국
프랑스 왕국
주요사건 1032년 건국
1474 ~ 1477년 부르고뉴 전쟁
1477년 용담공 샤를의 죽음
동년 공국 영토 분할
멸망 이후 파일:프랑스 왕국 어기.svg프랑스 왕국에 통합
1790년 데파르트망 행정구역이 만들어져
행정구역상의 부르고뉴 공국 소멸.
1. 개요2. 상징3. 역사
3.1. 카페-부르고뉴 공국3.2. 발루아-부르고뉴 공국3.3. 프랑스의 영토가 된 이후
4. 기타5. 역대 부르고뉴의 지배자
5.1. 부르고뉴 가문 이전5.2. 카페-부르고뉴 가문5.3. 발루아-부르고뉴 가문5.4. 저지대 국가 통치자의 명목상 칭호

[clearfix]

1. 개요

부르고뉴 공국은 9세기~1477년까지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에 존재했던 공작령으로, 프랑스 왕국에 통합된 이후 1790년까지 존재했던 군구(도)였다.

이름은 부르군트족부르군트 왕국에서 유래되었다. 중세, 근세 시대에 프랑스 동부 지역에 위치했던 공국이었다. 카페 왕조 초기부터 '왕자령'(appanage)으로서 프랑스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중세 프랑스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발루아 왕조 성립[7] 이후에는 당시 유럽의 경제 중심지였던 플랑드르 일대를 상속받기도 했으며, 백년전쟁 도중 자치권을 확보한 뒤부터는 자국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으나 용담공 샤를(Charles le Téméraire)의 전사를 끝으로 가문이 단절되면서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보통 부르고뉴 공국이라고 하면 위의 지도에 있는 프랑스 동부 영토를 말하고, 저지대 국가로 영토를 확장한 시기(1366~1477년)를 부르고뉴국(États bourguignons)이라고 부른다.

2. 상징

파일:발루아-부르고뉴기.svg 파일:2000px-Arms_of_Eudes_de_Bourgogne2017.png
발루아-부르고뉴기[8] 카페-부르고뉴 문장
우측의 카페-부르고뉴 문장은 카페-부르고뉴 가문이 썼던 문장이며 형태가 바뀌었을 뿐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후 부르고뉴 지역의 상징으로 정착하여 부르고뉴프랑슈콩테 레지옹이 된 지금도 쓰이고 있다.
파일:부르고뉴 십자가(문장형).svg 파일:부르고뉴 십자가(옛 깃발형-기본형).svg 파일:부르고뉴 십자가(왕관).svg 파일:부르고뉴의 십자가(나뭇가지형)-1.svg
부르고뉴 십자가(문장) 부르고뉴 십자가 부르고뉴 십자가(왕관)[9] 깃발(현대 비율)

용맹공 장부터 쓰기 시작한 부르고뉴 십자가는 처음에 성 안드레아 십자가에 색을 바꾼 형태로 쓰였다. 이후 잘린 나뭇가지가 남아있는 형태로 갔다가 나중에는 톱날 형태에 가까워진다

위에 있는 발루아-부르고뉴기가 부르고뉴 공작의 상징으로 쓰였다면 아래의 십자가는 부르고뉴 공국을 포함한 영지 전체의 상징으로 쓰였다. 그래서 부르고뉴 전쟁과 관련된 그림에서는 두 깃발을 모두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영토가 된 이후에는 발루아부르고뉴기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상징으로 쓰였고, 부르고뉴 십자가는 주로 스페인 제국카를로스파를 상징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3. 역사


3.1. 카페-부르고뉴 공국

그 원류는 부르군트 왕국이다. 카롤루스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부르군트 왕국 중 손 강 서편의 지역이 서프랑크로 넘어갔고, 이 지역에 부르고뉴 공국이 생긴 것이 시초이다. [10]

이 부르고뉴 공국의 공위는 로베르 가문[11]에 넘어갔다가 982년 외드 앙리 대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외드 앙리의 양자였던 부르고뉴 백작 오토 빌헬름과 외드 앙리의 조카인 프랑스 왕 로베르 2세 사이에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은 로베르 2세였고,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령으로 흡수되었다가 로베르 2세의 뒤를 이은 앙리 1세가 자신의 동생 로베르에게 왕자령으로 수여함으로서 약 300년 간 존속하게되는 카페 왕조 부르고뉴 공국이 탄생했다.

이때 왕자령(appanage)은 중세시대 프랑스 왕이 부족한 행정력을 가지고 왕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며, 봉건 봉신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왕자들에게 영지를 수여한 것을 말하는데, 왕자령은 후계가 단절될 때, 다시 영지가 왕령지로 넘어가는 구조를 가졌으며, 전반적으로 프랑스 왕의 통치에 우호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부르고뉴 공국 역시 카페 왕조 시기 대표적인 왕자령으로서 국왕의 통치에 협력했는데, 이는 부빈 전투, 쿠르트레 전투 등 카페 왕조 시기 치러진 주요한 전투에 종군해 프랑스군의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확인이 된다.

카페-부르고뉴 가문은 카페 왕조에 협력하며 별 탈 없이 300년 넘게 부르고뉴의 공작위를 지켰으나, 실제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은 미미했고, 후대의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에 비하면 별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한편 프랑스 왕실 본가인 카페 왕조는 샤를 4세를 끝으로 직계가 단절되면서 발루아 백작 필리프[12]필리프 6세로 왕위에 올라 발루아 왕조의 막이 올랐고, 백년전쟁의 화근이 되었다.

1361년 카페-부르고뉴 가문의 대가 끊겨 환수될 당시 부르고뉴 공작은 꼬마아이에 불과했던 필리프 1세로, 부친을 전쟁으로 여의고, 뒤이어 조부를 흑사병으로 잃어 3세에 작위를 승계받은 까닭에 실제 통치는 할 수 없었으나 어머니에게서 오베르뉴와 기네를, 할머니에게서 아르투아와 부르고뉴 자유백국을 물려받는 등 상당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리프 1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승마 사고로 요절해버렸고, 백년전쟁의 패전으로 지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재기를 위한 기반이 절실히 필요했던 프랑스 왕 장 2세는 즉시 작위를 상속받고[13] 막내아들인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앉혔다. 바야흐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유럽사에 등장한 것이다.

여담으로 이 카페-부르고뉴 가문이 포르투갈 왕조들의 시조이다.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14]의 손자인 앙리(엔히크 드 보르고냐)가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의 사위가 되어 포르투갈 백작령을 하사받았고, 그 아들인 아폰수 1세[15]가 포르투갈의 초대 국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르고냐 왕조[16]를 이은 아비스 왕조시조가 보르고냐 가문의 페드로 1세의 사생아였고, 아비스 왕조를 이은 브라간사 왕조는 아비스 왕조의 방계 가문이었다.

3.2. 발루아-부르고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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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개창과 동시에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바로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호담공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여백작 마르그리트 3세[17]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인데, 마르그리트 3세는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의 유일한 상속녀였을 뿐만 아니라, 전 남편인 필리프 1세 드 카페-부르고뉴의 사망 이후 아르투아와 부르고뉴 자유백국을 상속받아 본인 스스로도 상당한 영토를 소유한 대영주였다. 이로서 호담공 필리프 2세 드 발루아-부르고뉴는 자신의 세력권을 저지대 지역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18] 당시 유럽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저지대의 위상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이후 부르고뉴 공국이 부흥하게 되는 가장 큰 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호담공 필리프 2세의 치세에 분란의 씨앗도 함께 싹텄는데, 바로 그것은 당시 정신병자였던 프랑스 왕 샤를 6세 대신 프랑스를 통치하는 섭정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었다.[19] 당시 호담공 필리프 2세는 자신을 따르는 부르고뉴파(Bourguignons)의 지지를 받으며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샤를 6세의 동생)와 그를 따르는 아르마냑파(Armagnacs)와 대립했는데, 이는 백년전쟁이 재개되고 호담공 필리프 2세의 사후 그의 작위를 아들 용맹공 장 1세가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오를레앙 공 루이 1세가 부르고뉴파에게 암살되고, 용맹공 장 1세는 또 아르마냑파의 지지를 받는 샤를 도팽(후일의 샤를 7세)과의 협상 도중 암살되면서 갈등은 점점 격화, 결국 부르고뉴파는 당시 전쟁중이었던 잉글랜드와 결탁해 프랑스 발루아 왕실을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부르고뉴의 지지를 얻은 잉글랜드군은 샤를 6세로부터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는 트루아 조약[20]까지 조인받는다. 그러나 헨리 5세가 급사하고 그 유명한 잔 다르크의 등장과 함께 기세를 되찾은 프랑스군이 파타이 전투를 기점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에 부르고뉴파는 잔 다르크를 영국에 넘겨 처형시키는 식으로 대응을 했으나 이미 사실상 결정된 전세를 뒤집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샤를 7세 역시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상태로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이렇게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에 따라, 휴전 회담 도중 교묘하게 잉글랜드 측을 배제시킨 체로 부르고뉴-프랑스 양국 간의 협상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라스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대신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국에 대한 봉건 의무에서 해방되면서 사실상 독립국으로 거듭났고 볼로뉴, 베르망두아 등에서의 지배권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역시 잉글랜드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마침내 1453년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세력을 축출함으로서 백년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국은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프랑스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기조로 삼았고, 이는 아라스 조약을 체결한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은 용담공 샤를 시기에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용담공 샤를은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 과정이 끔찍했는데, 과거 스위스 군인들을 잔인하게 죽인 탓에 원한을 갖게 된 어느 스위스 할버드(halberdier) 병사가 재빨리 샤를의 머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탓에 전사하자 스위스 군인들이 그의 시체에 모여서 오체분시하여 알수 없게끔 훼손시켜버렸다.[21]화가 무로가 그린 1862년작 그림

나중에 아들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프랑스측에 의해 캉브레 조약을 거쳐 프랑스 왕국에 통합됐다.

3.3. 프랑스의 영토가 된 이후

파일:부르고뉴 공국(현재 행정구역 기준)2,130 × 2,508.png
18세기 부르고뉴 행정구(généralité de Bourgogne)를 현재 행정 구역으로 놓았을 때[22]

프랑스 왕국의 행정 구역[23]으로 존재했다가 프랑스 혁명에 의해 1789년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고 1790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복수의 데파르트망으로 흩어지면서 형식적으로 존재했던 부르고뉴 공국이 해체됐다.[24]
이후 1956년에 레지옹이 생기고 1982년에 일반 영토 집합체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바뀌면서 부르고뉴 지역도 (약간 다른 경계로) 부르고뉴 레지옹으로 부활했다가 2016년에 프랑슈콩테 레지옹과 합치면서 부르고뉴프랑슈콩테 레지옹이 되었다.

4. 기타

  • 문화와 예술을 가장 많이 후원한 선량공 필리프 3세는 무예가 뛰어난 귀족들 24명을 모아 황금양모 기사단[25]라는 기사단을 창시하기도 했다. 이들의 대장은 특히 신분이 높은 귀족이어야만 했으며, 초대 단장은 선량공 필리프 3세 본인이었다. 단원들 역시 귀족이어야 했으며, 이들은 모두 범죄나 이단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대에도 그리스 신화에나 나올법한 황금양털이란 이교스러운 이름 탓에 빈축을 사기도 했으니, 할 일 없는 높으신 분의 코스프레라 봐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러나 의외로 명망이 높았는지 기사단장직의 계승 문제에 교황이 관여한 적도 있었고, 기사단장직은 역대 부르고뉴 공작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 스페인의 국왕들에게 계승되었으며, 스페인의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되자 자신이 정통 기사단장이라고, 보르본(부르봉) 왕조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 Paradox Interactive의 게임 Crusader Kings 2Europa Universalis IV에서 구현되어 있다. 크킹에서는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 나오는데, 1066년 시나리오로 시작 시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가 왕위를 찬탈하고 내전이 펑펑 터져 게임 진행이 역사와 달라지게 하는 제일 큰 원흉이 된다. 유로파4에서는 독립 국가로서 실제 역사대로 프랑스와 서로 대립하는데, 후사 없이 통치자가 사망하면 나라가 자동으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황제국에 상속되는 부르고뉴 상속 이벤트도 구현되어있다.
  • 코에이의 게임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역사적 사건 이벤트가 발생할 때와 각종 퀘스트를 통해 간접 언급되며, 대항해시대 이후 네덜란드가 되는 지역을 점유한 걸 반영해서 부르고뉴가 연관된 사건에선 결말에 따라 네덜란드에게 혜택이나 불이익이 주어진다.

5. 역대 부르고뉴의 지배자

파일:부르고뉴 십자가(옛 깃발형-기본형).svg
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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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보손 왕조
정의공 리샤르 라울 흑색공 위그 1세 질베르
<rowcolor=#fff> 로베르 왕조 카페 왕조
오토 앙리 1세 오토 빌헬름 현명공 로베르 1세
<rowcolor=#fff> 카페 왕조 카페-부르고뉴 왕조
앙리 2세 노인공 로베르 2세 위그 2세 적색공 외드 1세
<rowcolor=#fff> 카페-부르고뉴 왕조
위그 3세 외드 2세 위그 4세 외드 3세
<rowcolor=#fff> 카페-부르고뉴 왕조
위그 5세 로베르 3세 위그 6세 외드 4세
<rowcolor=#fff> 카페-부르고뉴 왕조 발루아-부르고뉴 왕조
필리프 1세 호담공 필리프 2세 용맹공 장 선량공 필리프 3세
<rowcolor=#fff> 발루아-부르고뉴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용담공 샤를 1세 부귀공 마리 1세 미남공 필리프 4세 샤를 2세
<rowcolor=#fff> 합스부르크 왕조
막시밀리앙
<rowcolor=#fff> 합스부르크 왕조
필리프 5세 이자벨 필리프 6세 바보공 샤를 3세
알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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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세 루이 2세 샤를 4세 마리 2세
<rowcolor=#fff>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조제프 레오폴드 프랑수아 }}}}}}}}}

5.1. 부르고뉴 가문 이전

이름 재위 비고
"정의공" 리샤르 880-921 보손 가문, 부르고뉴 공국 탄생
라울 921-923 후일 프랑스 왕이 된다.
"흑색공" 위그 1세 923-952 라울의 동생
질베르 952-956 마지막 보손 가문 출신 공작
오토 956-965 로베르 가문
앙리 1세 965-1002
오토 빌헬름 1002-1004 마지막 로베르 가문 출신 공작
"현명왕" 로베르 1세 1004-1016 카페 왕조 통치, 프랑스 왕, 국왕령으로 편입
앙리 2세 1016-1032 프랑스의 왕

5.2. 카페-부르고뉴 가문

이름 재위 비고
"노인공" 로베르 2세 1032-1076 프랑스 왕 앙리 1세의 동생. 왕자령으로 분봉받았다.
위그 2세 1076-1079
"적색공" 외드 1세 1079-1103
위그 3세 1103-1143
외드 2세 1143-1162
위그 4세 1162-1192
외드 3세 1192-1218
위그 5세 1218-1271
로베르 3세 1271-1306
위그 6세 1306-1315
외드 4세 1315-1350
필리프 1세 1350-1361

5.3.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이름 재위 비고
"호담공" 필리프 2세 1364-1404
"용맹공" 장 1404-1419
"선량공" 필리프 3세 1419-1467
"용담공" 샤를 1세 1467-1477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낭시 전투에서 전사
"부귀공" 마리 1세 1477-1482 용담공 샤를의 딸로 부친의 남성 후계가 없어 공작위를 계승했으며, 오스트리아 대공인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했다.[26]

5.4. 저지대 국가 통치자의 명목상 칭호

이후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속령이 되지만 부르고뉴를 실제로 통치하지도 않는 저지대 국가 통치자의 명목상 칭호로 부르고뉴 공작이 계속 사용되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가문 군주들이 계속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가지고 있는데 이건 실제로 부르고뉴를 통치한게 아니라 저지대 국가의 통치를 나타낸거다.
[1] 정의공 리샤르~용담공 샤를[2] 프랑스 왕국의 하위 군구(province)인 부르고뉴 공국.[3] 부르고뉴 전쟁 관련 그림에서는 성 파트리치오 십자와 비슷하게 생긴 깃발이 나오는데 이 십자가도 부르고뉴의 십자가인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따라서는 X의 위아래 끝의 4부분만 가시가 달린 것도 있고 가시달린 십자가도 나온다.[4]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확장을 하면서 해당 영토의 문장을 추가하는 식으로 깃발과 문장이 변형된다. 프랑스 왕국에 병합된 뒤에는 이것을 상징 깃발로 사용하였다.[5] 호담공 필리프의 문장. 부르고뉴의 문장과 투렌의 문장이 2개씩 배치돼있다.[6] 프랑스 왕국 편입 이후, 참고자료[7] 프랑스, 부르고뉴 둘 모두에 해당된다.[8] 투렌기+카페-부르고뉴 문장[9] 각종 그림이나 동전에서 비슷한 형태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10] 다른 부르군트 지역은 고지 부르군트, 저지 부르군트로 나뉘었다가 얼마 후 통합하여 제2 부르군트 왕국(아를 왕국)을 구성했다. 제2 부르군트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 넘어갔다.[11] 에스베의 로베르를 시조로 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위그 카페 역시 로베르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편의상 보통 위그 카페 이전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한 파리 백작 외드, 그의 동생 로베르 1세로베르 왕조로, 위그 카페 이후를 카페 왕조로 정의하는 편이다. 딱히 로베르 왕조가 갈라진 건 아니기 때문에, 로베르 왕조를 그냥 카페 왕조로 통칭하는 경우도 있다.[12] 발루아 백작령 역시 왕자령으로, 필리프 6세는 샤를 4세와 사촌지간이었다.[13] 필리프 1세 드 카페-부르고뉴의 증조부인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3녀 마르그리트가 프랑스 카페 왕조 제12대 왕 루이 10세의 왕비이자 나바르 여왕 호아나 2세(잔느)의 모후였다. 로베르 2세의 3녀의 가계인 카를로스 2세 데브뢰는 반발했으나 발루아 왕조 제2대 왕 장 2세는 호아나 2세(잔느)의 친부가 프랑스 왕 루이 10세가 아닌 필리프 드 오네이일 수 있다면서 거절했다.[14] 상술한 로베르 2세의 아들이자 앙리 1세의 동생[15] 즉, 로베르의 증손[16] '부르고뉴'의 포르투갈식 발음[17] 프랑스 카페 왕조 제14대 왕 필리프 5세- 부르고뉴 백작부인 마르그리트 1세(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와 혼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 플랑드르의 여백작 마르그리트 3세(카페-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와 초혼,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2세와 재혼)[18] 공식적으로 플랑드르와 아르투아가 영지가 된 건 호담공 필리프 2세와 마르그리트 3세의 아들인 용맹공 장 1세 시기였다.[19] 최근 연구에서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대립이 섭정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일 뿐만 아니라 도시민,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 사이의 대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20] 이때 샤를 도팽은 샤를 6세의 사생아로 몰렸다.[21] 버려진 시체에서 공작 본인이라는 것을 판별할 때까지 3일이 걸렸다[22] 앵(01) 쪽은 역사적으로 사부아 쪽에 있었다. 17세기부터 부르고뉴에 편입되었다가 레지옹으로 부활할 때 론알프로 갔다가 오베르뉴 레지옹과 합쳐서 오베르뉴론알프 레지옹이 되었다. 부르군트 왕국의 영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앵 지역이 당시 부르고뉴에 편입된 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23] 엄밀히 말하자면 프랑스 왕국이 직접 통치하는 부르고뉴 공국이라는 이름은 군구(Gouvernements généraux et particuliers 혹은 Provinces militaires)였고, 행정구로서의 부르고뉴는 Généralité de Bourgogne 혹은 Généralité de Dijon(부르고뉴 행정구 혹은 디종 행정구)이었다. 군구와 행정구의 관할구역이 항상 동일했던 것은 아니지만, 부르고뉴는 군구와 행정구의 관할구역이 동일했다.[24] 참고자료 1790년에 기존 행정구역이 83개의 데파르트망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신설된 데파르트망이 나온다.[25] 프랑스어: Ordre de la Toison d'or, 스페인어: Orden del Toisón de Oro[26] 이 인물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는 그녀의 초상화가 '부르고뉴 여공작'이라는 유명한 벨기에 맥주 브랜드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