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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제2대 황제 요제프 2세 Joseph 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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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이름 | 요제프 베네딕트 아우구스트 요한 안톤 미하엘 아담 (Joseph Benedikt August Johan Anton Michael Adam) | ||
출생 | 1741년 3월 13일 | ||
오스트리아 빈 쇤브룬 궁전 | |||
사망 | 1790년 2월 20일 (향년 48세) | ||
오스트리아 빈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 ||
1765년 8월 18일 ~ 1790년 2월 20일 | |||
독일왕 | |||
1764년 3월 27일 ~ 1790년 2월 20일 | |||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국왕 | |||
1780년 11월 29일 ~ 1790년 2월 20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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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 (1765년 결혼 / 1767년 사망) | |||
자녀 |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크리스티나 | ||
아버지 | 프란츠 1세 | ||
어머니 | 마리아 테레지아 | ||
형제 |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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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lles für das Volk, nichts durch das Volk
만사는 백성을 위하여 행하되, 백성에 의해서 행해져선 안된다.[2]
만사는 백성을 위하여 행하되, 백성에 의해서 행해져선 안된다.[2]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 부국강병을 위하여 여러 개혁을 실시하여 대표적인 계몽군주로 꼽히고 있다. 너무 많은 급진적인 정책들을 무리하게 시도하려 했다가 귀족부터 평민까지 많은 계층의 반발을 사버려 상당수 실패했으나, 몇가지 주요한 개혁과 영향은 그대로 남아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당하고 나서도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존속하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고, 제국을 구성하던 각국의 근대화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요제프 2세 사후 합스부르크 왕가에 개혁군주는 두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2. 즉위 전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어린 시절 초상화 |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으로, 덕분이 일찍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아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뛰어났고 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가 급사한 뒤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어 요제프 2세로 대관식을 치렀다.[3]
3. 치세
3.1. 공동통치기
아버지처럼 완전한 허수아비 신세는 아니었지만 선임 통치자인 어머니의 공동 통치자로서 2인자, 즉, 콩라인이었다. 일단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나 당시 황권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실질적인 권력은 자신의 영지에서만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세습령의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작위는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의 네 자리였다. 이 작위를 모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가장 중요한 결정권도 어머니가 행사했고, 그의 위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자라는 애매한 자리[4]였다. 그의 재위 기간 25년 중 15년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애와 겹치고, 그 기간 동안 그는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 통치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 했다. 그래도 나름 반항하여 어머니와 자주 충돌했고 폐위시키겠다는 협박도 쳐봤으나 오히려 어머니에게 "폐위당할래?"라는 협박을 받았다.모자간의 대립은 정치관과 사상의 차이에서 왔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끝에 유럽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토 확장보다는 제국의 안정을 중시했고 아들의 젊은 혈기와 성급한 성격에 대해 항상 우려했다. 반면에 요제프 2세는 여느 다른 유럽 젊은이들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의 빠로, 프로이센 왕국을 본받아 전제적 계몽주의를 수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펴고자 하였다.[5] 종교관과 사상에 있어서도 어머니는 경건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적인 가톨릭 신앙의 정치적 수호자로서 역할에 열의를 보였던 전형적인 17세기의 합스부르크 가톨릭 군주였으며, 폴란드 분할에서 보여주듯 이런 교파주의적 도덕관과 대외관에 민감한 모습을 보였던 반면 아들은 계몽주의의 세속주의적 이성주의를 추구하며 이에 따라 국익이나 팽창을 위해서는 종교적, 역사적 우방이고 나발이고 없는 근대주의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모자간에 불화가 있었다고는 해도 이 동안 요제프 2세는 주로 제국 의회[6]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발표할 연설문을 작성하곤 했다. 이 연설문에도 자기 자신의 정치사상이 그대로 들어갔다.
대외적으로는 1772년에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1774년에는 오스만 제국 산하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 북부를 점령하여 이듬해 양도받아 부코비나 공국을 수립했다. 둘 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생존해 있던 공동통치기간의 일인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폴란드 분할이나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 등 영토 확장에는 다소 소극적이었고 주로 요제프 2세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3.2. 단독 통치기
1780년 11월,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자 마침내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제적 계몽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보여준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가적 한계를 체험한 그는 개혁을 단행했다.그의 개혁은 당시에는 굉장히 진보적이었는데, 1781년, 농노를 해방령을 선포하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해방된 농노에서 얻은 세수 기반의 경제 정책을 시행하였다. 아울러 토지에 대한 대대적인 평가 조사를 통해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공정한 세금 징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784년에는 라틴어가 신민들의 언어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헝가리 의회에서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했으며[7], 이에 따라 자연스레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용어가 독일어로 변경되었다.[8] 1787년에는 모든 시민의 보장된 자유 및 법률의 동등한 적용을 골자로 하는 요제프 민법과 요제프 형법을 반포하였고, 여기에는 사형 제도 제한 및 잔인한 형벌 금지 등도 포함되었다.
복지 및 의료 제도에 있어서도 많은 개혁을 시행했다. 국민 문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초등교육을 의무화했으며, 가난한 인재들을 위한 장학금 제도를 설립했고, 교육 언어도 독일어로 통일시켰다. 1784년 빈 종합 병원과 군의관 학교인 요세피눔, 유럽 최초의 정신병원인 나렌투름을 설립하는 등 의료 발전에 힘쓰기도 했고, 지하수 보호를 위해 도시에서 묘지를 건설하지 못하게 했으며, 다수의 고아원 및 빈민원들을 설립했다. 그 밖에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후원하고 부르크 극장을 독일 국립극장으로 공포하는 등 예술 진흥에도 힘썼다.
한편, 요제프 2세는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에 벗어나고자 가톨릭교회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1781년에 실시한 종교 관용령(Toleranzpatent)이다. 이 정책을 통해 예배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도 유대교, 정교회, 루터파, 칼뱅파 등 국교인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믿는 것이 가능해졌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다르게 유대인에게도 다소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 유대인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할 것을 허가하는 등 법제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눈치를 보며 살 필요가 없어졌다. 때문에 그의 공적을 기려서 프라하의 유대인 거주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 '요제포브' 혹은 '요제보브'라고 불린다. 그는 프리메이슨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자기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지는 않았다.[9] 그 외에도 수도원 감축, 십일조 폐지, 교회 재판소 폐지, 성직자 교육의 국가 통제, 가톨릭 미사 단순화, 오스트리아 주교들과 교황청 간의 직접 소통 금지 등부터 교회에서의 결혼을 법률적인 결혼으로 대체시키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가톨릭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려고 노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그는 독자적으로 대서양으로의 해양 진출을 꾀하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10]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1781년에는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와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령 발칸반도를 분할하기로 합의하여 1788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이 점유하던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며 승전을 이어갔으나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프로이센이 후방을 위협하여 1791년 시스토바 조약을 맺고 약간의 땅을 얻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11] 한편 독일 문화 중심의 개혁을 시도한 군주답게 독일계 지역인 바이에른의 병합을 시도하려 했으나 프로이센 왕국의 견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요제프 2세는 장기적으로는 어짜피 멀리 떨어져서 관리도 힘든 비독일계 저지대를 포기하고 옆동네 독일계 지역인 바이에른을 먹으려는 구상이었으나 프로이센과 독일 제후들이 가만히 있을 택이 없었다.
여러 대내외 정책들은 당대에는 큰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낙담한 요제프 2세는 심신이 피폐해지기 시작하며 건강도 악화되었다. 말년에는 프랑스에서 터진 혁명의 영향력을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결국 1790년 1월, 개혁을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나중에는 건강까지 악화된 터라 2월 들어 49세의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다. 지치고 낙담한 그는 카푸친 교회에 세워질 자신의 묘비명을 "여기 모든 것에 실패한 요제프 2세가 눕다"로 새기게 했다. 유언은 "온 유럽에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노라."였다.
4. 평가
4.1. 부정적 평가
요제프 2세의 개혁정치는 제대로 된 기반 없이 성급히 행해졌던 것이었기에 상당수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반대로 내부의 혼란만 가중되는 결과를 빚었다.가장 큰 반발을 샀던 정책은 종교 개혁이었다. 상술한 다양하고 강력한 세속주의적-탈가톨릭적 정책은 성직자들부터 보수적인 농민들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계층을 막론하고 제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가톨릭교도들에게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고 개신교적이라고 비판받았으며 그에 대한 국민적인 지지를 크게 감소시켰다.
경제적으로도 그의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일례로, 그는 농민들에게 급여로 현물 대신 현금을 지불하라는 칙령을 내렸는데, 현물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의 이행은 상업 발전에 있어서 큰 기반이 되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당시엔 아직 현금이 부족했던 시기였던지라 돈을 주는 주체인 귀족과 성직자부터 돈을 받는 농민 당사자들까지 모두에게 큰 반발을 사버렸다는 것이었다. 현실과 영 동떨어진 조치였던 셈. 비엔나 종합 병원을 설립하는 등 의료 시설을 중앙집중화시키려는 시도도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병원의 사망률이 한때 20%까지 치솟는 등 많은 부작용을 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투자 대비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1787년부터 1791년까지 4년간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을 벌였고 전염병의 창궐[12]과 후술할 반란들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 일대를 점령하는 등 선전했으나 프랑스 대혁명 발발과 프로이센 왕국의 위협으로 인해 자진 철수하며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털어내버렸다는 상징적인 성과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영토적 소득을 얻지 못했다.
중앙집권정책과 독일어 공용화는 예로부터 지방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치가 행해졌던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귀족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 강화는 현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의 네덜란드 지역은 혁명의 영향을 거세게 받으며 1789년부터 1790년까지 브라반트 혁명이 일어나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의 네덜란드 정책도 실패하고 말았다. 헝가리에서도 급진적인 중앙집권적-독일화 개혁에 대한 반발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그는 농노제 폐지, 종교 관용, 하급 사제들의 재정 보조 세 가지 개혁을 제외하고는 헝가리 내의 모든 개혁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요제프 2세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우려가 옳았던 셈이다. 그가 섣불리 추진했던 개혁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역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결집을 약화시켰다. 한마디로 의도는 좋았으나 목표만 높았던 현실감각 없는 군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4.2. 반론 및 긍정적 평가
하지만 그렇다고 요제프 2세를 무능한 군주라고 볼 수는 없으며, 그의 개혁은 죽음 직후 후퇴된 것을 제외하면 장기적으로는 결실을 맺었다. 특히 그가 이 정도의 개혁이라도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합스부르크 제국이 분할되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철을 밟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중앙집권화에 실패하고 지방 귀족들의 이권에 휘둘려 국가까지도 해체되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와는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은 나중에 오스트리아 제국을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편될지라도, 오스트리아 중심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요제프 2세의 실패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을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체되기 전까지 다민족 국가로서의 중심을 세우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다시 말해 그의 정책들 대다수는 그가 죽고 나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대외 정책에 있어서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최대의 불운 때문에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본 이득을 대부분 토해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혁명 발발 이전까지는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테레지아 공동 통치기 동안 바이에른 계승 전쟁 당시 참전하진 않았지만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를 위협한 러시아 제국과는 1781년 동맹을 맺어 후에 오스만 제국을 같이 패는 등 크게 관계를 호전시키며 기존의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을 사실상 백지화시켜버린다.[13]두 국가는 훗날 나폴레옹 전쟁까지 함께 동맹으로 싸우게 되고 신성 동맹을 맺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시킨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오헝제국의 가장 큰 위협이 대러 전선이었던 점을 떠올린다면 외교적인 혜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오헝 제국의 한 축이 된 헝가리 왕국의 경우,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책 덕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장악력이 강화되었다. 헝가리 왕권의 상징인 성 이슈트반 왕관은 부다페스트에서 아예 빈으로 가져와 버리기에 이른다.[14] 특히 농노 해방으로 전통적인 독립 주도 세력인 헝가리 지방 귀족 계층의 경제적, 정치적 힘에 치명타를 꽂아버린 것이 가장 유효했다. 헝가리의 경우 상공업이 아닌 농업으로 먹고 사는 지역이었고, 수도인 부다페스트 등 서부 지역에서의 공업화도 오헝제국 시기에서야 이루어졌기에, 농노 해방은 귀족 계층에게 여간 타격이 아닐 수가 없던 것이다. 말년에 상심하여 헝가리 내에서의 주요 개혁을 철회하면서도 농노 해방만큼은 철회하지 않은 것은 신의 한수라고 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이전에 이 정도로 미리 밭갈이(?)를 해놨기 때문에 19세기 민족주의 광풍이 헝가리를 휩쓰는 와중에서도 합스부르크 왕가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조련하고 헝가리 귀족과 민중 사이의 간극을 이용하며 한편으로는 합스부르크 충성파를 육성하는 등 헝가리 독립을 막아낼 수 있었다.
또한 저지대의 경우, 최대한 자치를 보장해주었더라도 19세기 민족주의 광풍의 시대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를 유지했을 여지는 매우 적었다. 애초부터 오스트리아 본토와는 동떨어져 오스트리아의 숙적이던 프랑스 및 프로이센에게 위협받기 딱 좋은 위치였을 뿐더러, 전통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거센 반발이 있었던 곳이었다. 요제프 2세는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일단 점유하고 있을 동안은 강한 통제로 억눌러놓되 되도록 바이에른과 맞바꾸려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물론 바이에른을 먹겠다는 발상이 비현실적인 것은 맞았으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네덜란드가 관리될 것이라고 보지 않은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견해였고, 이것을 요제프 2세가 막을 수도 없었다.
내정에 있어서도 훗날 오스트리아의 국력 강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조사 및 개혁, 그에 수반한 세금 개혁을 단행하고 교회의 경제적 특권을 몰수하여 안정적인 국가 재정의 기반을 놓았다. 도시에서의 상업 길드가 가진 경제적인 특권을 폐지하고 이를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한 시스템인 공장에게 준 것도 요제프 2세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농노제 폐지는 세수 증가와 동시에 머지 않아 도래할 산업혁명기에 오스트리아의 공업화에 필요하게 될 대량의 인구를 미리 준비해둔 셈이 되었다. 이후 산업혁명기를 거쳐 오스트리아, 체코는 중부유럽에서 손꼽히는 공업 지대로 발돋움하여 오늘날까지도 공업 강소국으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고, 헝가리 또한 그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 견실한 제조업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법률적인 측면에서 그가 남긴 영향도 거대하다. 모든 시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 요제프 민법은 1811년 일반 민법으로 대체되었으나, 사실상 후계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 흔적을 강하게 남겼다. 이 일반 민법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모든 계층의 시민에 대한 법률의 평등한 적용을 담은 요제프 형법도 1803년 새로운 법으로 대체 되었으나[15], 오스트리아 법률의 토대를 이루게 되는 합법성의 원칙, 즉 모든 행정은 법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법률 없이는 처벌도 없다는 원칙을 남기게 된다. 쉽게 말해 요제프 2세는 오스트리아 법치주의의 초석을 세웠다.
국민 문해력 상승을 위해 초등 교육을 의무화한 것은 덤. 문해력이 국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말 안해도 알 것이다."슐람페라이"로 알려진 오헝제국의 관용/포용 정책도 요제프 2세 시기에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적 관용, 범죄자에 대한 인권 향상, 문화 전반에 대한 검열 완화 등이 시행되었다. 교육 개혁, 종교적 관용, 문화 검열 완화 등은 피지배의 위치에 있던 체코인들마저 긍정적으로 평가했을 정도이다. 빈에 여러 대형 의료 시설들을 건립한 것도 초기에 전염병 관리 미숙으로 인해 사망률이 올라간 바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19세기 빈을 유럽에서 손꼽히는 첨단 의료 도시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교황청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가톨릭 시스템을 유지하려 한 것에 대해선 유독 요제프 2세만 비판받을 일은 못 된다. 이미 프랑스는 수백 년 간 소위 '갈리아 교회주의'를 표방하며 독실한 가톨릭 국가임과 동시에 교황청의 영향력을 철저히 배제시켜냈으며, 훗날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문화 투쟁까지 이어가기도 했다.[16] 즉, 기독교 국가의 중앙집권화 과정에 있어서 교황청 영향력 배제 정책은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서 늘상 있어왔던 것이었다.
4.3. 총평 및 학계의 평가
요제프 2세는 분명히 앞 시대를 바라볼 줄 아는 탁월한 식견이 있었고, 의지도 충만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구체제의 전유물이 군주 한 사람의 짧은 통치기에 바뀌기에 역부족이었다는 점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넘쳐나는 의지는 부족한 참을성을 의미했고, 너무 급진적인 개혁 정책들은 그의 재위기에 빛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건강도 좋지 못했고,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인 대폭발을 직격으로 맞는 불운까지 겪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말하며 죽었지만, 그의 정책들은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참을성 부족이 더이상 필요 없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야 수십년의 세월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력 강화에 큰 주춧돌로써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작용하고 있었다.요제프 2세에 대한 재평가가 현대에 와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요제프 2세 사후 프란츠 2세는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 신물이 나 강경 보수주의-반동 정책을 펼쳤고, 뒤를 이은 황제들 및 집권층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1848년 혁명이 비엔나에서도 발생하는 등 자유주의, 진보주의가 오스트리아 제국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요제프 2세와 그가 남긴 업적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그에 대한 서적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요제프 2세가 "인민의 황제", "개혁황제"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 무렵이다. 이 시기 자유주의자들에겐 거의 숭배 대상에 가까웠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너무 빠른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하려 한 그의 조급함과 그로 인한 당대의 실패들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오스트리아의 근현대화를 열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5. 가족
5.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요제프 2세 (Kaiser Joseph II.) |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1세 (Kaiser Franz I. Stephan) | <colbgcolor=#ffffe4,#323300> 로렌 공작 레오폴드 (Léopold, duc de Lorraine) | |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c de Lorraine) | |||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von Österreich) | |||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Charlotte d'Orléans) |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duc d'Orléans) |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Prinzessin von der Pfalz) | |||
마리아 테레지아 (Kaiserin Maria Theresia) | |||
카를 6세 (Kaiser Karl VI.) | |||
레오폴트 1세 (Kaiser Leopold I.) | |||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von Pfalz-Neuburg) | |||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Herzog Ludwig Rudolf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 |||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Christine Luise von Oettingen-Oettingen) |
5.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1녀 |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 (Erzherzogin Maria Theresia) | 1762년 3월 20일 | 1770년 1월 23일 |
2녀 | 마리아 크리스티네 여대공 (Erzherzogin Maria Christine) | 1763년 11월 22일 | 1763년 11월 22일 |
5.3. 가족과의 관계
5.3.1. 아내들
첫번째 아내는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의 딸 파르마의 이사벨라 공녀[17]로 정략결혼으로 맺어졌다. 그러나 요제프는 뛰어난 미모에 재주도 많은 재원인 이사벨라를 무척이나 사랑하였고 부부사이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사벨라가 21세에 두 번째 출산 직후 천연두에 걸려 요절한 뒤, 죽은 아내를 마냥 그리워하던 요제프는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이사벨라는 요제프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편의 여동생, 즉 시누이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장 사랑받은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열렬히 사모하는 레즈비언이었다. 이것을 알게 된 계기도 이사벨라를 잊지못한 요제프가 재혼을 한사코 거부하자, 보다 못한 크리스티나가 진실을 알려주는데, 크리스티나는 요제프 2세가 받을 충격뿐만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던 이사벨라에게는 물론 동생인 자신에게 배신감이 들지 않을거라고 생각한 건지, 본인에게 쓴 이사벨라의 연애편지를 보여주며 모든 진실을 알려줬다. 안 그래도 성격이 까칠했던 요제프 2세는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첫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이후로 더욱 냉소적이고 인간불신적인 성격으로 변했다.이후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의 딸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으나, 부부 사이는 매우 소원했고 요제파 역시 천연두에 걸려 요절한다. 그리고 이사벨라가 남긴 유일한 자녀로서 매우 귀애했던 딸 마리아 테레지아(쁘띠 테레즈)마저 늑막염에 걸려 8세라는 어린 나이에 죽는 참척의 고통을 겪는다. 이런 일을 연속적으로 겪으며 요제프는 결국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의 사후 제위는 남동생으로 토스카나 대공이던 레오폴트 2세가 이어간다.
5.3.2. 부모형제들
차갑고 냉정하며 거의 인간 불신에 가까운 성격이었다지만 가족들과는 대체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제위를 물려받을 장남이자 계승자이긴 했으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총애는 커녕 외면받았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총애받던 카를과 크리스티나와는 사이가 나빴던 반면 똑같이 차별당하며 비슷한 처지였던 누이와 나머지 동생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큰누나 마리아 안나와는 원래는 좋은 관계였으나 자신과 결혼한 파르마의 이사벨라와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요제프와 안나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안나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어머니의 냉대로 인해 외로운 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해준 아버지 프란츠 1세가 똑같이 뛰어난 미모에 지적이고 프랑스 혈통 출신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에 입성해 처지가 비슷한 며느리인 이사벨라를 사랑해주자 질투했던 것이다. 이사벨라는 시누이인 마리아 안나의 차가운 태도에 깊은 상처를 받아 다시는 그녀를 믿지 않았으며, 마리아 안나와 달리 자기 부인인 이사벨라를 마음 깊이 사랑했던 요제프 역시 마리아 안나와 멀어졌고, 이는 남매가 화해하기 전까지 앙금으로 남아 마리아 안나의 자선 사업을 요제프가 방해하거나 재산 문제로 다투게 되는 등의 갈등이 있었다. 때문에 요제프가 즉위한 후에 안나는 쫓겨나다시피 수녀원에 들어갔는데, 이후 두 남매는 화해를 했지만 그래도 안나는 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특히 자신보다 14살이나 어린 나이이자 거의 조카뻘인 막내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를 딸처럼 여겨 사이가 좋았다. 동생 바보였던지라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에 동행했고 이후 남편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불임이라는 소문이 돌 때 여동생을 위해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가명[18]을 자칭해 직접 프랑스로 진상을 확인하러 갔다. 루이 16세를 만나 대화하고서는 "프랑스 국왕은 처음에 딱 봤을 때는 바보 같았는데 차분하게 길게 이야기를 나눠 보니 이 사람이 생각보다 지성인임을 알겠더라"라는 평가[19]를 남겼다고. 진상은 그의 성기능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성관계를 극구 기피하는 성향이었던 것이고, 요제프 2세의 설득에 따라 그와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 자녀들이 생기게 되었다.
동생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마리 앙투아네트의 철부지 행동에 뒷목을 여러번 잡으며 어떻게든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신을 바로잡아주려고 노력했고, 특히 프랑스에 방문했을 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처참한 프랑스 국민들의 삶과 불안한 정국을 직접 목도하면서 부르봉 왕조와 여동생 부부를 무척 걱정하며 수십 조항에 달하는 권고문을 남겼다.[20] 요제프 2세와 대화를 나누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그가 계몽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고 한다.
6. 여담
- 요제프 2세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며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악기 연주와 작곡을 취미 삼아 하기도 했고, 목관악기 위주로 구성되는 소규모 취주악단 하르모니무지크의 창단을 처음 지시하였다. 모차르트에게 독일어로 된 오페라를 발주하기도 했고,[21] 뉴비 시절의 베토벤은 그가 사망했을 때 장송 칸타타를 작곡해 바쳤다. 음악황제라는 별명도 있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조연으로 나온다[22]. 음악을 즐기는 소탈한 계몽군주라는 면이 부각되어 인간불신이 심했던 냉철한 면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점잖고 친절하고 사람 좋은 높으신 분이라는 이미지로 나온다. 다만 모차르트의 '현대적인' 음악을 다소 이해를 못 하기도.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하네 마네로 옥신각신할 때 "지금 굳이 백성들과 귀족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실제 역사에선 백성부터 귀족까지 모두 자극해버렸다와"내 여동생 안토니아도 자기 백성이 두려워진다고 편지했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머지않아 닥칠 프랑스 대혁명을 암시했다.
-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대니 휴스턴이 연기했다. 실제 역사대로 불안한 프랑스 정국을 바로 보지 못하고 폴리냑 부인같은 총신들하고만 놀기에 바쁜 여동생을 무척 걱정하며 충고해주고 매제인 루이 16세에게 성교육을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도록 유도해주었다.
- 연극을 보는 관객들의 기분이 나빠지면 안된다며 부르크 극장에서 슬픈 내용의 극을 상영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은 비극이었음에도 해피엔딩으로 바뀌어서 상영되어야 했다.(...)
[1] 이사벨라의 남동생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가 요제프의 여동생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와 결혼하였으므로 겹사돈이다.[2] 그의 계몽군주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어록.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와 비교하면, 군주제와 민주정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3] 여담으로 이 대관식을 지켜본 사람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위대한 문학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였다.[4] 황제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될 수 있겠지만,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여러 영방국가들이 독립적인 행보를 취해온 지가 이미 백년이 넘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칭호는 이름만 남은 자리일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영토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및 지벤뷔어겐 대공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이었고 모자의 공동통치기간에 추가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이 있었는데 이 영토들의 군주는 요제프 2세가 아니라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심지어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만 후보로 나올 수 있게 반세습화 되었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태자가 없는 선거군주제였기 때문에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에서는 태자도 아니었다. 조악하게나마 한국사에 비유하자면 마리아 테레지아가 상왕이고 요제프는 상왕이 죽어야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5] 심지어 1769년에는 극비리에 국경을 넘어 적국인 프로이센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열광적인 추종자인 요제프 2세를 마치 아들처럼 환대해 주었으며, 2박 3일동안 통치술에 대해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치고 받고 싸웠던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어졌을 것이다.[6]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제국이다.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용어를 거리낌 없이 차용했다.[7] 왜 헝가리어가 아닌가 하면, 당시 헝가리 왕국의 영토는 지금의 헝가리 영토보다 훨씬 방대했기 때문에 헝가리인 외에도 북부의 슬로바키아인, 트란스카르파티아의 루신인과 우크라이나인, 에르데이의 루마니아인, 남부 국경지대의 세르비아인 등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수 세기에 걸쳐 이주한 독일인 등도 있었기에 헝가리어가 아닌 오스트리아에서 사용하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려 했다. 물론 이는 제국 전반에 걸쳐 언어를 단일화하여 오스트리아와 빈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제 국가를 수립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마디로 과거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자치를 존중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정책을 펼친 셈이다.[8] 헝가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지 않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였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이나, 독일계와 독일어를 쓰는 귀족들이 다수 있던 보헤미아 왕국은 굳이 독일어를 의무화할 필요가 없었고, 헝가리 왕국 하나에만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한 것이 아닌 헝가리 왕국을 시발점으로 하여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등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에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하려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9] 1738년 이래로 가톨릭 신자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면 자동 파문을 당한다. 즉, 가톨릭 군주가 함부로 가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10] 현재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11] 참고로 이 조약 이후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긴 악연이 끝나게 되었으며, 1차 세계대전에는 급기야 동맹국으로 함께 싸우게 된다.[12] 전선을 시찰하던 요제프까지 말라리아에 걸렸을 정도다.[13]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 대왕 사후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즉위 초반부터 빡센 외교 고립에 놓이게 되었다.[14] 요제프 2세 사후 반환되기는 한다.[15] 사형제 폐지도 1803년 새로운 형법으로 인해서 중범죄의 경우 선고될 수 있도록 바뀜으로써 뒤엎어졌다.[16] 물론 독일 남부 지역은 사실상 독실한 가톨릭 지역이였기에 결론적으로 실패했다.[17]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파르마 공국이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로 넘어갔고 이사벨라의 아버지 펠리페 왕자가 파르마 공작이 되면서 그녀 역시 파르마 공녀가 되었다.[18] 다만 무지렁이 백성이 아니고서야 팔켄슈타인 백작이 요제프 2세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팔켄슈타인 백작위 자체가 부친 프란츠 1세의 작위 중 하나로 그의 사후 자식인 자신이 물려받은 것이었기 때문. 그렇기에 대부분의 프랑스 백성은 그가 요제프 2세임을 알았고 그의 방문은 프랑스 전 신민의 관심을 모았다. 요제프 2세는 또 신민의 관심을 받는 법을 잘 알던 지라 프랑스 체류 중 베르사유 궁전에 국빈으로 머물지 않고 파리에 숙소를 마련했고,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사람을 만나 큰 이슈가 되었다. 참고로 이 팔켄슈타인 백작위는 러시아 제국에 갔을 때도 써먹었다. 이쯤 되면 외교용으로 신분을 명목상으로나마 가리기 위한 작위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19] 루이 16세 항목 참조.[20] 이 중 한 구절에서 혁명이 언급된다. 프랑스의 불안한 정세를 경고하며 왕과 왕비가 잘 처신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결국 요제프의 예상은 최악의 형태로 실현되고 만다.[21] 생활언어는 독일어였지만, 당시 오페라는 주로 이탈리아어로 불렀다.[22] 배우는 미국 배우 제프리 존스, KBS판 더빙 성우는 박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