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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2대 국왕 보헤미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초대 국왕 울라슬로 2세 II. Ulászló | |
출생 | 1456년 3월 1일 |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 |
사망 | 1516년 3월 13일 (향년 60세) |
헝가리 왕국 부더 | |
재위 | 보헤미아 왕국의 왕 |
1471년 ~ 1516년 3월 13일 | |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 |
1490년 ~1516년 3월 13일 | |
배우자 |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 (1476년 결혼 / 1500년 무효화) |
나폴리의 베아트리체 (1490년 결혼 / 1500년 무효화) | |
푸아캉달의 안 (1502년 결혼 / 1506년 사망) | |
자녀 | 언너, 러요시 2세 |
아버지 | 카지미에시 4세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
형제 | 야드비가, 카지미에시,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조피아, 엘즈비에타, 지그문트 1세, 프리데리크, 엘즈비에타, 안나, 바르바라, 엘즈비에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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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초대 국왕이자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2대 국왕.위정자로써의 능력은 가히 최악으로 유럽 역사의 수많은 암군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인물이다. 요약하자면 마차시 1세가 구가한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전성기를 단 4년만에 망하기 직전까지 전락시킨 원흉이었다.
2. 언어별 표기
체코어 | Vladislav Jagellonský (블라디슬라프 야겔론스키) |
헝가리어 | II. Ulászló (울라슬로 2세) |
슬로바키아어 | Vladislav II. Jagelovský (블라디슬라프 2세 야겔로프스키) |
크로아티아어 | Vladislav II. Jagelović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로비치) |
폴란드어 | Władysław Jagiellończyk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 |
3. 생애
1456년 3월 1일 폴란드 왕국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와 독일왕이자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겸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딸 엘리자베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457년 11월 23일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이었던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사망한 후, 카지미에시 4세는 아내가 라디슬라우스의 누이였던 점을 근거로 삼아 자신이나 아내가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 모두 폴란드 왕을 섬기지 않기로 결의했다. 헝가리-크로아티아는 1458년 1월 24일 마차시 1세를 국왕으로 선출했고, 보헤미아 왕국은 그해 3월 2일에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를 왕으로 선포했다.브와디스와프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의 유력 후계자였기에 어렸을때부터 제왕학을 익혔다. 그러던 1466년, 교황 바오로 2세가 이단인 얀 후스의 교리를 아직도 따른다는 이유로 이르지를 파문하고 십자군을 선포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이르지에 맞서 봉기하면서 마차시 1세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마차시 1세는 1468년 3월 이르지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모라바를 침공했다. 이르지는 카지미에서 4세에게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사이의 평화 조약을 중재해준다면 브와디스와프를 후계자로 지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이 제안에 혹해 마차시 1세에게 평화조약을 맺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마차시 1세는 이를 거절했지만, 1469년 초 빌레모프에서 이르지의 군대에게 포위된 뒤 휴전 협정을 맺는 대가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1471년 3월 22일 이르지가 사망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5월 27일 브와디스와프를 보헤미아의 새 국왕 블라디슬라프로 선출했다. 교황 특사 로렌초 로베렐라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마차시가 보헤미아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제국의회를 개최해 이를 묵살하고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1471년 8월 22일 프라하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블라디슬라프는 폴란드군을 데리고 오지 못했기 때문에 보헤미아 귀족들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 결과, 보헤미아 의회는 그의 치세 동안 자체적으로 법령을 제정 및 반포하는 등 국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471년 마차시가 모라바로 가서 보헤미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헝가리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블라디슬라프의 동생 카지미에시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카지미에시 4세는 카지미에시에게 군대를 맡겨 헝가리를 공격하게 했지만, 마차시 1세가 즉각 반격을 가하여 폴란드군을 격파했다.
1472년 3월 1일, 교황 식스토 4세는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가 마차시 1세를 상대로 전쟁을 지속한다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그해 5월 31일 카지미에시 4세, 블라디슬라프, 그리고 마차시는 평화 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휴전을 갖는 데 합의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의 끝에 1474년 2월 21일 3년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474년 3월, 블라디슬라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와 다시 전쟁을 벌였다.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 10월에 슬레스코를 침공하여 브라티슬라프에 있던 마차시를 포위했으나, 마차시가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 공급에 차질을 겪은 끝에 퇴각했다. 이후 슬레스코-모라바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마차시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12월 8일 마차시와 1년 휴전 협약을 맺었다.
1476년, 글로가우 공국의 공작 하인리히 11세가 사망했고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1]가 공국을 상속받았다.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에 바르바라와 결혼함으로써 글로가우를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그러나 마차시 1세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11세의 조카 요한 2세가 글로가우에 쳐들어와서 바르바라를 몰아냈다. 그는 글로가우를 탈환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기로 했다. 교황 특사 발다사레 데 피사로부터 마차시의 영토를 침범한다면 파문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1476년 12월 5일 또다시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고 마차시와 전쟁을 단행했다. 1477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3세는 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공인했다. 이틀 후, 마차시가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지원군을 보냈지만, 적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자 7월 말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프리드리히 3세는 빈에서 헝가리군에게 포위되자 12월 1일 마차시 역시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1478년 1월 15일, 발다사레 데 피사는 마차시와 전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블라디슬라프와 추종자들을 파문했다. 이에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와 재차 협상을 벌였고, 1478년 3월 28일에 최종적으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모두 보헤미아 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으며, 보헤미아 본토는 블라디슬라프가 가지되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에서는 마차시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7월 21일 올로모우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평화 협약을 비준했다.
올로모우츠 협약 이후, 마차시를 지지했던 가톨릭 귀족들이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블라디슬라프는 몇 차례 파문당해서 떨어진 위신을 되살리고 보헤미아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들의 지위를 강화하기로 했다. 그는 보헤미아 각지의 시 의원들을 후스파에서 가톨릭 시민으로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후스파였던 이르지 전 국왕의 두 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여기에 더해 프라하 대교구를 가톨릭 사제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프라하 시민들은 1483년 9월 봉기를 일으켰다. 반란군은 도시 내의 대다수 가톨릭 성직자와 장로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했고, 독일인과 유대인을 박해했다.
블라디슬라프는 가까스로 프라하에서 탈출한 뒤 진압군을 보내려 했지만, 님부르크, 자테츠, 흐라데츠크랄로베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면서 병력 모집이 어려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반란군과 타협하기로 했다. 그 결과 1484년 후스파 의원들이 대거 복직했고, 후스파 성직자들의 권리가 공인되었다. 1485년 3월 쿠트나 호라에 소집된 회의에서 블라디슬라프의 중재하에 후스파와 가톨릭 귀족들간의 타협안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귀족과 평민 모두 가톨릭과 후스파 중 하나를 자유롭게 택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리하여 보헤미아의 종교 갈등은 어느정도 수습되었다.
1486년 2월 16일, 프리드리히 3세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선거를 열었고 선제후들은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을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보헤미아 국왕으로서 선거권이 있었던 블라디슬라프와 마차시는 불참했다.[2] 그들은 그해 9월 이흘라바에서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귀족들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블라디슬라프는 곧 마음을 바꿔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을 인정했다. 이후 마차시와 프리드리히 3세의 전쟁을 관망하면서, 양측의 지원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1490년 4월 6일 마차시 1세가 빈에서 통풍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5월에 국왕 선출을 위해 모였을 때, 4명의 경쟁자가 경합했다. 마차시 1세의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는 헝가리 남부의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막시밀리안 대공은 1463년 노이슈타트에서 마차시가 합법적인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할 경우 프리드리히 3세나 그의 후계자들이 헝가리를 상속하자고 했던 협약을 상시키기며 자신이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자신이 마차시 1세의 전임 국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누이의 장남이니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이자 폴란드 왕인 카지미에시 4세는 모든 아들들에게 독립된 왕국을 물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 얀 올브라흐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대다수의 헝가리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블라디슬라프가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에 혹해 그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 1세의 미망인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몰다비아 공작이자 헝가리의 봉신 슈테판 3세와 팔 키니시가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7월 4일 코르빈 야노시를 격파해 헝가리에서 축출했다. 7월 15일, 헝가리 의회는 블라디슬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추대했고 크로아티아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블라디슬라프는 8월 9일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 도착한 뒤 특별세를 부과하거나 다른 "유해한 세금"을 도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의회와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의 헌장을 발표했다.
1490년 9월 18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울라슬로 2세'로 대관식을 거행한 후 부더에 정착했고, 보헤미아 왕국은 보헤미아 의회에 의해 대리 통치되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 역시 그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생 얀 올브라흐트는 자신이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얀은 에게르를 점령한 뒤 9월에 커셔를 포위했다. 독일왕 막시밀리안 역시 헝가리를 침공해 11월 말에 솜버트헤이, 베스프렘,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울라슬로는 에스테르곰에서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비밀 결혼을 했고, 그녀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자금을 활용해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다. 이후 헝가리군이 반격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을 포섭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막시밀리안은 12월 연말에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울라슬로는 여세를 이어가 커셔를 구원했고, 얀 올브라흐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1491년 2월 20일 글로가우 공국과 슬레스코 절반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헝가리 왕위 주장을 취소했다. 1491년 가을 얀 1세가 다시 헝가리를 공격했지만, 서포여이 이슈트반이 이끄는 헝가리군이 격파했다.
1491년 11월 7일, 울라슬로는 포조니에서 막시밀리안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마차시 1세 생전에 헝가리가 빼앗았던 모든 오스트리아 영토를 막시밀리안에게 돌려주며, 울라슬로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했다. 그 대신, 막시밀리안은 헝가리에 대한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헝가리 왕위를 굳혔지만, 그는 마차시 1세의 중앙집권화 정책을 포기하고 거의 모든 정책이 의회에서 정해지게 내버려뒀다. 의회에서 정해진 결의안에 대한 서명을 요구받을 때마다 "도브르제"(Dobrze)[3]라고 말하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명했다. 마차시 1세 재위 32년 동안 5번밖에 소집되지 않았던 의회는 1492년 초 소집된 이래 그의 치세 내내 거의 매년 빠지지 않고 열리면서 헝가리의 중대소사를 결정했고, 자연히 의회를 운영하는 대귀족들의 권세가 대단히 강해졌다.
1492년 6월 7일,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각각 울라슬로의 동생인 얀 올브라흐트와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에게 넘기고 사망했다. 그는 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폴란드 귀족들은 이를 무시했다.[4]
마차시 1세는 생전에 2만 기병대와 8천 보병대로 구성된 최정예군인 '검은 군대(Fekete sereg)'를 양성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해 헝가리 왕국이 승승장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마차시 1세 치세 때 이들에게 억압당했던 귀족들은 울라슬로 집권 이래 검은 군대에게 줘야 할 급료를 일부러 대폭 삭감해버렸다. 급료가 오랫동안 지급되지 않자, 검은 군대는 반란을 일으켜 사바강 유역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그러나 팔 카니시가 이끄는 진압군이 9월에 이들을 무찔렀다. 대다수 부대원들은 처형되었고, 1493년 1월 3일에 잔당들도 강제 해산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최강의 정예군은 마차시 1세 사후 3년도 안 되어 사라졌다.
검은 군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헝가리의 국방력이 약화되자, 오스만 제국은 이때를 틈타 헝가리를 공격했다. 1493년 9월 11일, 오스만군은 크르바바 평원 전투에서 크로아티아 귀족 연합군을 격파한 뒤 네레트바 강 북쪽의 아드리아 해 연안을 병합했다. 오스만 습격대는 이후로도 헝가리 남부 지역을 거의 매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울라슬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494년 봄 의회의 승인없이 특별세를 부과했다. 귀족들은 왕국 전역에서 세금에 항의했는데, 특히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었던 우일러키 뢰린츠(Újlaki Lőrinc)는 세금 징수원들을 살해하고 울라슬로를 황소라고 모욕했다. 이에 울라슬로는 1495년 초 우일러키 가문이 오스만 제국과 협력했다고 비난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우일러키 뢰린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항복하고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대부분의 영지를 보전받았다.
1495년 4월 울라슬로 2세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바예지트 2세는 3년간 휴전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습격대는 이후로도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남부 일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했다. 1496년 5월, 헝가리 의회는 울라슬로의 재무관 에르누스트 지그몬드를 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울라슬로는 귀족들의 강권에 못 이겨 에르누스트를 체포했고, 에르누스트는 40만 골드 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풀려났다.
1498년, 헝가리 의회는 지주들이 자신의 가신들에게 지불하기 위해 세금의 절반을 보유할 수 있게 하고, 가장 부유한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사병을 양성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했다. 또한 귀족 배심원들이 회의에 참석해야만 왕실 평의회의 결정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법령도 반포되었으며, 도시와 시민들의 경제적 특권을 제한하는 법령도 통과되었다. 1500년 3월 11일에는 왕실이 귀족들의 토지 소유를 간섭할 수 없다는 내용의 법령도 반포되었다. 이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귀족들은 왕의 간섭을 걱정할 필요없이 평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울라슬로가 통치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의회가 내정을 이끄는 것을 내버려두면서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나름의 조치를 내렸다. 1498년 7월 20일 크라쿠프에서 얀 1세와 군사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올 경우 서로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코르빈 야노시와 화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방위를 그에게 맡겼다. 검은 군대가 해산되면서 국방력이 크게 약화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다행히도 바예지트 2세가 페르시아와 지중해 연안 공략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에 생전에 오스만 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을 겪지 않았다. 1495년에 체결되었던 휴전 협약은 1498년, 1503년, 1511년에 갱신되었다.
울라슬로는 1476년 글로가우 여공작인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1478년 글로가우 영지를 요한 2세에게 빼앗겨버린 그녀와 결혼 생활을 이어가봐야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고 여기고 결혼을 없었던 일로 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490년 헝가리 왕이 되기 위해 전임 왕 마차시 1세의 미망인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비밀리에 중혼했다. 이 일이 나중에 공개되면서 심각한 논란이 일어났다. 교황은 바르바라의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는 요구에 난색을 표했고, 많은 성직자들이 베아트리체와 헤어지라고 종용했다.
울라슬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중혼 생활을 이어갔지만, 정작 베아트리체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하자 지극히 실망했다. 1493년, 울라슬로는 교황에게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에 반하여 베아트리체와 결혼하도록 강요당했다고 알렸다. 이에 교황은 조사 위원회를 소집해 7년간 사건의 전말을 조사했다. 1500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베아트리체와 울라슬로의 결혼이 불법이라고 선언했고, 베아트리체는 재판 비용을 지불한 뒤 나폴리로 돌아갔고, 1508년 9월 23일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한편, 보헤미아에 남겨졌던 바르바라는 중혼 생활을 고집하는 남편에게 환멸을 느끼고 1493년 프랑켄 출신의 기사 콘라트 폰 하이데크와 비밀리에 약혼했다. 그러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그녀는 콘라트와의 약혼을 파기할 때까지 쿨름바흐의 플라센부르크 성에 수감되었다. 그 후 베아트리체와 울라슬로의 결혼이 무효가 되었을 때 그녀와 울라슬로의 결혼 역시 무효가 되었다. 바르바라는 플라센부르크에서 빈곤하게 살다가 1515년 9월 4일 안스바흐에서 사망했다.
1500년 베아트리체, 바르바라와의 결혼 무효 선고를 받아낸 울라슬로는 캉달 백작 가스통 드 푸아와 푸아의 카트린[5]의 딸인 안과 약혼했고 1502년 9월 29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는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도 고왔던 안을 무척 사랑했으며, 정치 문제에 관해 그녀의 조언을 기꺼이 들었다. 1503년 두 사람 사이에서 딸 언너가 태어났고, 1506년 7월 1일에 울라슬로가 오래도록 기다렸던 남자 후계자인 러요시 2세를 낳았다. 그러나 안은 출산으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리다가 아들을 낳은 지 3주가 조금 넘은 1506년 7월 26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울라슬로는 아내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죽을 때까지 기면증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약화되었던 왕의 권력은 유명무실해졌고,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Bakócz Tamás), 궁정백 페레니 임레(Perényi Imre), 그리고 재상 서트마리 죄르지(Szathmári György)가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주도했다. 1516년 3월 13일 부더에서 사망했고, 3월 19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사후 10살된 아들 러요시 2세가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보헤미아의 새 왕으로 등극했다.
[1]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딸.[2] 그러나 황제선거는 과반수였기 때문에 블라디슬라프와 마차시의 마음대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둘은 독일 선제후들에게는 외국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더욱 불리했다.[3] 폴란드어로 아주 잘했다는 말. 얼마나 정치에 무감각한 예스맨이었으면 네네하면서 서명해주기 원툴이었다는 말이다.[4] 통념과 달리 폴란드 왕국은 야기에우워 왕조가 집권했을때도 세습제가 아닌 선거군주제였다. 반대로 리투아니아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전신인 게디미나스 가문 시절부터 통치했기 때문에 혈통으로 세습이 보장되었다.[5] 레오노르 1세와 가스통 4세 드 푸아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