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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11대 국왕 이슈트반 2세 II. István | |
출생 | 1101년경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사망 | 1131년 3월 1일 (향년 29~30세)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재위 |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트 왕국의 왕 |
1116년 ~ 1131년 3월 1일 | |
배우자 | 카푸아의 로베르토 1세의 딸 |
아버지 | 칼만 |
어머니 | 시칠리아의 펠리시아 |
형제 | 소피아, 라슬로, 보리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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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 제11대 국왕. 치세 내내 신성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동로마 제국 등 이웃나라들과 전쟁을 치렀다.2. 생애
1101년경 칼만과 시칠리아 백작 루제루 1세의 딸인 펠리시아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소피아와 라슬로가 있었다. 1105년 달마티아에서 승리를 거둔 아버지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116년 2월 3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며칠 만에 에스테르곰의 로리크 대주교에 의해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당시 국제 정세는 그에게 불리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후원해준 알모스를 잔혹하게 숙청한 칼만에게 불만을 품었고, 교황과의 주교 서임권 분쟁에서 헝가리가 교황 편에 선 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보헤미아 공작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편에 서서 헝가리와 대결했고, 칼만에게 달마티아를 빼앗긴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헝가리를 적대했다.그는 사방이 적국인 상황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와 헝가리-모라비아 국경 지대의 오슬라바 강에서 만나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서로간의 입장차가 커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116년 5월 13일 양측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격돌했다. 동시대 연대기 작가 코즈마 프라가이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수많은 헝가리인의 시신이 레흐 강을 따라 흘러내려갔다고 한다. 그에게는 다행히 보헤미아 공국에서 공작의 자리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덕분에 보헤미아군이 헝가리 국내로 몰려오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내전을 피해 헝가리로 이주해온 보헤미아인들을 받아들였다.
1116년 5월, 베네치아 도제 오르델라포 팔리에로가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후원에 힘입어 달마티아를 향한 대대적인 원정에 착수했다. 1116년 6월 29일, 베네치아군은 자라 인근에서 클레딘이 이끄는 헝가리군을 격파하고 스플리트, 트로기르, 비오그라드 등 주요 도시를 확보했다. 이리하여 달마티아 전체가 베네치아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헝가리군은 순순히 달마티아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클레딘은 군대를 수습한 뒤 수 년간 베네치아를 향한 공세를 펼쳤다. 1118년, 오르델라포 팔리에로는 자다르 인근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리하여 헝가리는 비오그라드, 스플리트, 토르기르 등을 탈환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제 도메니코 미켈레가 반격에 착수해 헝가리군을 또다시 몰아내고 달마티아 전역을 확보했다.
1119년, 전쟁에 지친 양국은 5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1124년, 이슈트반 2세는 동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달마티아를 공격해 스플리트와 트로기르 등 달마티아 중부 지역을 탈환했다. 그러나 1125년 봄 베네치아 함대가 돌아와서 빼앗긴 영토를 전부 탈환했다. 이때 비오그라드와 모루 시민들이 베네치아군에 저항했다가 철저하게 학살당하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이슈트반 2세는 이후로 달마티아를 탈환하지 못했다.
한편, 이슈트반 2세는 분열된 키예프 루스를 통합하려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를 막기 위해 블라디미르에게 추방당한 볼히니아 공작 야로슬라프를 지원했다. 헝가리군은 키예프로 진군해 포위전을 벌였지만, 도중에 야로슬라프가 사망해버렸다. 이슈트반 2세는 그래도 포위 공격을 계속하려 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이 통치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 새로운 왕을 선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어쩔 수 없이 헝가리로 돌아와야 했다.
집권 이래로 실패를 연이어 겪은 그에게 반감을 품은 영주들은 칼만에게 실명당한 뒤 유폐생활을 하던 알모스를 지원했고, 교회를 강하게 통제하려는 아버지의 종교 정책을 받든 그에게 불만을 품은 교회 세력 역시 알모스를 후원했다. 이에 알모스는 1125년 또는 1126년에 반란을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당하자 아들 벨러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속한 페치바러드(Pécsvárad)로 도피했다.
1126년 가을, 이슈트반 2세는 보헤미아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공작에 오른 소베슬라프 1세와 만나 화해하기로 했다. 또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오스트리아 공작과도 화해했다. 반면 정적인 알모스를 받아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슈트반 2세는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에게 알모스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했지만, 요안니스 2세는 오히려 알모스를 성대히 환대했다. 요안니스 2세의 황후이자 라슬로 1세의 딸이었던 헝가리의 이리니는 두 나라 중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126년, 이슈트반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가서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파괴한 뒤 소피아를 거쳐 플로브디프까지 진격했다. 이에 요안니스 2세는 군대를 보내 헝가리 국경 안까지 반격을 가했다. 이후의 진행과정은 기록이 부실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헝가리가 먼저 공격하고 동로마 제국이 반격하는 패턴이 수년간 반복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던 1127년 9월 1일 알모스 왕자가 사망했지만, 두 나라의 적대 행위는 종식되지 않았다. 그러던 1128년, 이슈트반 2세는 하람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에게 참패하여 10,000 명에서 15,000명에 달하는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인만이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은 도나우 강과 사바 강 사이에 위치한 곡창지대인 시르미움으로 쳐들어가 철저히 약탈한 후 귀환했다.
1128년 말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독립 투쟁을 시작한 세르비아 대공 우로시 1세와 동맹을 맺고 1129년 공세를 개시해 브라니체보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다시 쳐들어와서 헝가리군을 격멸하고 헝가리의 도시인 시르미움을 점령했다. 결국 이슈트반 2세는 1129년 말 평화 조약을 맺고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는 대신 빼앗긴 영토를 돌려받았다.
1128년, 보리스 칼라마노스와 이반 백작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해 위상이 떨어진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남은 추종자들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이에 가담한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하지만 자신의 입지가 날로 약화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던 그는 1128년 또는 1129년에 알모스의 아들인 벨러와 화해하고 그를 토리나에 정착시킨 뒤 왕족에 적합한 대우를 받게 했다. 이에 벨러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접으면서, 헝가리의 혼란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는 일련의 실패에 고통스러워한 끝에 건강을 해쳤고, 오랜 투병 끝에 1130년 3월 1일에 사망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그가 생전에 설립한 너지바러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아들을 얻지 못했기에, 알모스의 아들 벨러가 벨러 2세로서 헝가리 왕에 올랐다.
[1] 확실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