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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6대 국왕 벨러 1세 I. Béla | |
출생 | 1015년에서 1020년 사이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사망 | 1063년 9월 11일 (향년 42~48세) |
헝가리 왕국 키니저 강변 | |
재위 | 헝가리 왕국의 왕 |
1060년 12월 6일 ~ 1063년 9월 11일 | |
배우자 | 폴란드의 리헤자 |
아버지 | 바줄 |
어머니 | 타토니 가문의 여인 |
형제 | 레벤테, 언드라시 1세 |
아들 | 게저 1세, 라슬로 1세, 람페르트 |
딸 | 소피아, 에우페미아, 옐레나 리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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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의 제6대 국왕.2. 생애
1015년에서 1020년 사이에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니트러 공작 바줄과 타토니 가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 사이에서 출생했다. 형제로 두 형 레벤테와 언드라시 1세가 있었다. 1031년 9월 2일 헝가리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임레 왕자가 헤기쾨츠첸티엠레(현재 루마니아 산팀레우)에서 사냥하던 중 멧돼지의 뿔에 찔려 죽었다. 임레 사후 차기 후계자로는 이슈트반 1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바줄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슈트반 1세는 바줄이 경박하고 어리석으며 가톨릭 신앙도 두텁지 못하니 왕위를 이을 그릇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일타이크 연대기에 따르면, 이에 반감을 품은 바줄은 네 명의 귀족을 꼬드겨 왕을 암살하게 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했고, 이슈트반은 네 귀족들의 팔을 자르게 한 뒤 바줄의 두 눈을 멀게 했다. 반면 바줄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들의 치하에서 쓰여진 후기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이슈트반은 바줄을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지만 그의 아내 기젤라를 포함한 바줄의 적들이 왕의 사절이 도착하기 전에 바줄의 눈을 멀게 하고 귀구멍을 납으로 채워버렸다고 한다.
바줄의 세 아들들은 체포를 피해 폴란드 왕국으로 달아났다. 이후 벨러는 폴란드에 남았고, 언드라시와 레벤테는 키예프 루스로 망명하여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보호를 받았다. 벨러는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 휘하에서 군인으로 활약했다. 특히 포메른인과의 전쟁에서 폴란드군의 선두에 서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미에슈코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딸인 리헤자를 그와 결혼시켰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오르세올로 페테르가 헝가리인 귀족들을 정치에서 소외시키고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에게 중요한 직책을 부여했다. 게다가 외국군을 데려와서 헝가리 민중을 억압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을 자처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은 1045년 반란을 일으켰고, 키예프로 피신했던 두 형 레벤테와 언드라시가 비밀리에 헝가리로 들어왔다. 레벤테는 모종의 사유로 사망했지만, 언드라시는 성공적으로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무찌르고 1046년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로 즉위했다.
이후 페테르를 후원하던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언드라시는 1048년 폴란드에 있던 동생 벨러를 초빙했다. 그는 군사적 역량이 탁월한 동생을 헝가리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국토의 3분의 1을 맡겨 통치를 알아서 하게 했다. 또한 자신이 죽으면 벨러가 뒤이어 왕위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05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예상대로 헝가리를 향해 진군했다. 그들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했다. 하인리히 3세가 이끄는 본대는 바그 강을 건너 니트라 강을 거슬러 내려가서 슈타이어마르크를 거쳐 트란스다뉴비아로 진격했다. 레겐스부르크의 게브하르트 주교가 이끄는 또다른 군대는 도나우 강을 확보하고 보급품을 군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벨러는 이에 맞서 청야 전술을 구사했다. 제국군은 가는 곳마다 황폐화되어 있어서 식량과 물자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진군을 강행한 끝에 헝가리의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했다. 벨러는 적의 보급로를 차단한 후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어 적의 진지를 급습해 화살을 날린 뒤 적이 반격하기 전에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로 인해 탈진한 데다 세케슈페하르바르의 방비가 강했기 때문에 공성전을 벌여봐야 공략할 가능성이 희박했기에, 제국군은 공성전을 포기하고 보급품을 운반하는 선박이 있는 베르테스를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벨러 1세는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사절 한 명을 독일인으로 가장하여 게브하르트 주교에게 보내 배를 거둬들여 본국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로 인해 베르테스에 도착했을 때 선박이 없자, 제국군은 완전히 낙심한 채 레겐스부르크로 퇴각했다. 그 과정에서 헝가리군이 끈질기게 추격하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1051년 봄에 헝가리를 다시 침공했다. 제국군은 도나우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조니를 포위하여 8주 동안 공성전을 벌였다. 이때 조문트라는 이름의 수비대 전사가 밤에 강을 헤엄쳐서 적 선박 근처에 숨은 뒤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이로 인해 배에 물이 차서 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제국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 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는 교황 레오 3세의 중재에 따라 헝가리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는 상당한 돈과 영토를 요구했지만, 독일 내부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협상이 중단되었다.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6살 된 아들 하인리히 4세가 독일왕이 되었다. 왕의 어머니로서 섭정을 맡은 푸아투의 아녜스는 국내 사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헝가리와 이 이상 전쟁을 이어가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기고 1058년 헝가리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은 채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양자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언드라시 1세의 아들 셜러몬과 하인리히 3세의 딸인 슈바벤의 유디트와 약혼했다.
언드라시 1세는 전쟁을 종결한 후 아들 셜러몬을 공동 왕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벨러가 반발했고, 헝가리 왕국은 또다시 내란의 조짐을 보였다. 얼마 후 둘째 아들 다비드가 태어났지만, 언드라시 1세는 기쁨을 채 누리기 전에 뇌졸중에 걸려서 신체 일부가 마비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대로 죽으면 동생 벨러가 두 아들을 해칠까 두려워했다. 왕실 고문들은 벨러를 죽이라고 권했지만, 언드라시는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기에 벨러에게 셜러몬을 위해 은퇴하기를 권하기로 했다.
1059년, 언드라시 1세는 벨러를 티서바르코니의 별궁으로 초대한 뒤 그에게 왕관과 검을 내밀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지시했다. 왕관은 왕국을, 검은 두카트를 상징했다. 벨러가 왕관을 선택한다면 왕의 추종자들이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일 것이고, 그가 검을 가져가면 그는 자신이 맡은 영지에서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었다. 벨러가 한동안 망설이고 있을 때 벨러의 추종자인 미클로스가 "오래 살고 싶으면 검을 선택하십시오."라고 속삭였다. 벨러는 그 말에 따라 검을 선택했고, 언드라시는 동생을 돌려보냈다.
그 후 벨러는 형이 언젠가는 자신을 해칠 거라 여기고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의 지원을 받아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언드라시는 이에 맞서 아녜스 황후의 지시에 따라 바이에른, 보헤미아, 작센에서 파견된 제국군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몬슨 인근에서 맞붙었고,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벨러가 승리했다. 언드라시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사전에 탈출로를 차단한 기병대에 의해 사로잡혔다. 이후 바코니 숲의 지르크 저택에 갇혀 지내다 1060년 12월 6일 이전에 사망했다. 그 후 벨러는 1060년 12월 6일 헝가리 국왕 벨러 1세로 등극했다.
벨러 1세는 등극 직후 형의 아내와 자식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켜주겠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해 내란의 여지를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1061년에 각 마을에서 대표 2명을 선출해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열리는 공개 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그는 이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정통성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벽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일부 대표자들이 가톨릭 신앙 강요를 중단하고 마자르족 고유의 신앙을 회복해달라고 요구했다.
급기야 지난날 이교 회복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던 바타 족장의 아들 야노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세케슈페헤르바르를 급습했고, 왕의 추종자들은 인근 요새로 도망쳤다. 벨러 1세는 일단 반란군에게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겠지만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 그들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사흘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이에 병력을 은밀히 끌어모은 뒤,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던 반란군을 습격해 모조리 섬멸했다. 이후 헝가리에선 두 번 다시 이교도의 반란이 벌어지지 않았다.
1063년, 벨러 1세는 독일로 망명한 셜러몬에게 귀국을 권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여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셜러몬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헝가리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벨러 1세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도모스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그해 9월 11일, 그는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케페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왕좌에 앉은 채 고심하던 중 왕좌가 돌연 부러지는 바람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수하들은 급히 왕을 들것에 실어서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왕궁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왕은 키니저 강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베네딕토회에 소속된 섹사르드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아내 폴란드의 리헤자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 게저 1세, 라슬로 1세, 람페르트와 세 딸 소피아, 에우페미아, 옐레나 리예파를 낳았다. 그들은 벨러 1세 사후 폴란드로 망명했고, 셜러몬이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에 의해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훗날 그의 아들들이 폴란드의 지원에 힘입어 헝가리로 돌아와서 왕위를 잇따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