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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22대 국왕 벨러 4세 IV. Béla | |
출생 | 1206년경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사망 | 1270년 5월 3일 (향년 63~64세) |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 |
재위 |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왕 |
1235년 ~ 1270년 5월 3일 | |
배우자 | 마리아 라스카리나 (1218년 결혼) |
아버지 | 언드라시 2세 |
어머니 | 메란의 게르트루트 |
형제 | 언너 마리어, 에르제베트, 칼만, 언드라시 |
자녀 | 이슈트반 5세, 벨러, 쿠니군다, 머르기트, 언너, 커털린, 에르제베트, 콘슈탄치어, 욜란, 머르기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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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제22대 국왕. 아버지 언드라시 2세 치세 때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몽골 제국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참화를 겪었다. 몽골군이 철수한 뒤 국가를 빠르게 재건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해 '제2의 건국자'(a második honalapító)라는 칭송을 받았으나, 말년에 맏아들 이슈트반 5세와 내전을 치렀다.2. 생애
1206년경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언드라시 2세와 메란의 게르트루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칼만, 언드라시, 이슈트반, 마리아, 에르제베트, 욜란다가 있었다. 부왕 언드라시 2세는 1205년 조카 라슬로 3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독일인 친족을 요직에 임명하고 광범위한 영지를 하사하는 등 막대한 지원을 해줬고, 자연히 헝가리 내에서 이들의 입지는 매우 강성해졌다.이에 헝가리 영주들은 반감을 품었고, 1213년 9월 23일 언드라시 2세가 할리치나 원정을 떠난 후 국정을 도맡고 있던 게르트루트 왕비를 습격해 살해했고, 그녀의 형제 베르톨트와 레오폴트는 간신히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아났다. 언드라시 2세는 귀국 후 이 소식을 전해듣고 페터르 이슈트반을 체포해 기둥에 매달아 죽였으나,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워낙 많아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왕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더는 사건의 전말을 캐지 않았다. 하지만 벨러 왕자는 이 참극을 지켜보며 마음 속에 어머니를 잔혹하게 죽인 헝가리 귀족들에게 원한을 품었다.
1218년,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하던 언드라시 2세는 니케아에서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의 딸 마리아 라스카리나와 벨러를 결혼시켰다. 1222년에는 헝가리 왕국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크로아티아-달마티아 공작에 선임되면서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그런데 언드라시 2세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보는 귀족들이 벨러 주변에 포진하는 바람에, 부자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벨러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아내로 삼았던 마리아 라스카리나와 이혼했다. 그러다가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재결합을 강권하자, 벨러는 1223년 가을에 마리아를 다시 거둬들였다. 언드라시 2세가 이에 분노를 터트리자, 벨러는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주했다. 1224년, 언드라시 2세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아들과 화해했고 다시 크로아티아-달마티아 통치를 맡겼다.
1226년, 언드라시 2세는 벨러를 에르데이 공작으로 전출하고 둘째 아들 칼만을 크로아티아-달마티아 공작으로 선임했다. 1228년, 언드라시 2세는 벨러에게 귀족들의 영지 소유를 조정할 권한을 부여했다. 벨러는 어머니 게르트루트 살해 사건에 가담한 혐의가 있던 시몬 카치치스와 반크 바르칼란의 영지를 몰수했으며, 아버지가 귀족들에게 퍼주었던 토지 보조금을 대거 회수했다. 또한 1229년에는 자신에게 복종했던 쿠만 족장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벨러의 활동을 지지했지만, 언드라시 2세는 귀족들이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해 종종 벨러의 정책 수행을 저지했다.
1229년 봄, 동생 언드라시가 할리치나에서 쫓겨났다. 이에 벨러는 동생을 복위시키기로 마음먹고, 1229년 또는 1230년 쿠만족과 함께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할리치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수비대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전염병 마저 창궐하자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가 동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231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아센 2세가 라틴 제국을 심하게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언드라시 2세에게 불가리아를 공격하라고 종용했다. 안 그래도 일전에 십자군 원정을 치른 후 귀환하다가 이반 아센 2세에게 억류되어 딸 마리어를 아센에게 시집보내고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넘겨줘야 했던 것에 불만이 가득했던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명분삼아 불가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벨러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1231년 말 또는 1232년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탈환했다. 뒤이어 스레데츠를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벨러는 1233년 왈라키아 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불가리아의 반격을 저지하고자 여러 요새를 세웠다. 이 시기, 벨러는 카르파티아 동부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자 "쿠마니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235년 9월 21일, 아버지 언드라시 2세가 사망했다. 일찌감치 후계자로 공인되었던 벨러는 별다른 반대없이 그해 10월 14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벨러 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이슈트반 1세가 세운 성모 대성당이 아니라 이슈트반 1세의 아버지 게저 대공이 세운 성 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에서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베르트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
얼마 후 언드라시 2세가 말년에 왕비로 맞아들인 베아트리체 데스테 왕비가 임신 소식을 공개하자, 벨러 4세는 늙은 아버지가 임신시켰을 리 없다며, 그녀가 아버지의 치세 때 재무관으로서 권세를 누린 데네시와 간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데네시를 실명형에 처하고 베아트리체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베아트리체는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 사절단의 도움으로 남장한 채 탈출한 뒤 튀링겐에서 아들 이슈트반을 낳은 뒤 이 아이가 아르파드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러 4세를 비롯한 언드라시 2세의 다른 자식들은 이슈트반을 왕실의 일원으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왕족으로서 지원금을 받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벨러 4세는 언드라시 2세 치세 때 발표된 금인칙서를 통해 특권을 공인받은 귀족들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여기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1237년, 1196년 이후에 제정된 모든 왕실 토지 보조금 헌장을 개정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립하고, 언드라시 2세가 귀족들에게 지급한 보조금을 전부 회수하려 했다. 이에 귀족들이 대거 반발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결국 1239년, 벨러 4세는 귀족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보조금 회수를 잠정 중단했다.
이 무렵, 몽골 제국군이 키예프 루스를 침공해 막대한 인명을 살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에 몽골 제국군에게 쫓기던 쿠만인 40,000명이 헝가리 왕국의 동쪽 국경에 접근해 자신들을 받아들여준다면 헝가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벨러 4세는 이들과 손잡고 몽골 제국군의 예상되는 침략에 맞서기로 하고, 쿠만족 지도자 쾨텐에게 추종자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피난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쾨텐은 흔쾌히 수락하고 티서강변의 평원 지대에 정착했다. 쿠만인들은 그곳의 현지 주민들과 종종 마찰을 벌였고, 때때로 강도, 강간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벨러 4세는 몽골군의 임박한 침략을 막으려면 쿠만인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여겼기에 눈감아줬고, 헝가리인들은 자연히 쿠만인들을 감싸돌고 자신들의 고충을 알아주지 않는 왕을 원망했다.
1240년 말, 바투 칸과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 동쪽 국경에 도달했다. 벨러 4세는 전국에 소집령을 내리고, 독일 기사들을 대거 고용했다. 그런데 쿠만족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헝가리 귀족들과 독일 기사들이 쾨텐을 습격해 살해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쿠만족은 헝가리 남부로 이동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소규모 병력과 함께 오다가 소규모 몽골 제국군을 격퇴한 뒤 빈으로 회군했다.
1241년 봄, 몽골 제국군은 헝가리를 본격적으로 침공했다. 벨러 4세는 가급적 많은 병력을 끌어모은 후 적과 교전하려 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왕의 허락 없이 몽골군과 독자적으로 싸웠고, 일부는 아예 영지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그는 이대로 지체하면 군대가 와해될 거라 여기고 모히 평원으로 진군해 마차를 이용하여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 1241년 4월 10~11일, 몽골군 35,000~10만 명과 헝가리군 25,000~80,000명은 모히 전투에서 격돌했다. 초기에는 바투 칸의 무리한 사요 강 도하로 인해 몽골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헝가리군이 승기를 잡는 듯했지만, 수부타이가 다른 길을 통해 강을 건넌 후 역습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이 왕의 통제에 불응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다가 각개격파당하는 바람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벨러 4세는 동생 칼만과 함께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주했지만, 뒤에 남겨진 헝가리군은 궤멸되었다.
벨러 4세는 몇몇 추종자들을 데리고 포조니로 이동했다가 몽골 제국군이 추격해오자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그를 도와주긴 커녕 감옥에 가둔 뒤 오스트리아 국경 인근의 포조니, 쇼프론, 바스 주를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벨러 4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뒤 겨우 풀려난 후 가족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이후 교황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 몽골 추격대가 접근해오자, 가족들을 클리스 요새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트로기르로 피신했다. 추격대 지휘관 카단 칸은 벨러 4세가 가족들과 함께 있을거라 판단해 클리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패배했고, 벨러 4세는 트로기르에 있는 것을 안 몽골군은 트로기르를 포위 공격했지만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격파되어 돌아간다.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에서 즉시 철수한 뒤, 벨러 4세는 수도로 귀환한 후 폐허가 되어버린 나라를 제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부더로 천도한 그는 이전에 왕실 보조금을 강제로 회수하려 했다가 대귀족들의 반발을 사는 바람에 국론이 분열된 탓에 몽골 제국군의 침략에 합심하여 대항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후로는 귀족들과 가능한 한 합의하여 국가를 운영하기로 했다. 우선 모든 사람이 정당한 재산을 갖는 것을 보장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또한 몽골 제국군이 또다시 쳐들어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상 헝가리 일대에 최신식 석조 성을 지으면서, 각지의 영주와 지주들에게 자신처럼 성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마리아 왕비 역시 1250년경 비셰그라드 성을 짓는 등 모범을 보였다. 이에 귀족들이 왕실을 본받아 성채를 대거 건설하면서, 총 100여 개의 성채가 새로 건조되었다. 헝가리는 이를 통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력을 갖췄지만, 그 과정에서 지방 영주들의 군사력이 강해져서 왕권이 장기적으로 저해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또한 벨러 4세는 고품질의 금화를 주조하고 무역을 활성화해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자 했으며, 소금 생산을 독점하고 관세를 착실히 거둬들임으로써 국고를 채우고자 했다. 이렇게 확보한 국고를 토대로 병력을 늘리고 장비를 개선했으며, 몽골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각 도시에 일정한 수의 중무장 기사를 배치하게 했다. 이 기사들은 대부분 독일 출신으로, 국가로부터 급료를 지급받는 대가로 방위를 수행했다. 한편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를 초토화하며 학살을 자행한 데다 뒤이은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벨러 4세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1247년 구호 기사단과 계약을 맺고 쇠레네세그(Szörénység)[1], 쿠노르자그(Kunország)[2], 바르카사그(Barcaság)[3]를 영지로 주되 그곳에 성을 세우고 자신이 부르는 즉시 소집하도록 했다. 그러나 구호 기사단이 통제에 잘 따르지 않자, 벨러 4세는 1260년 이전에 그들을 추방했다.[4]
한편,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벨러 4세가 약속한 대로 포조니를 접수하고자 1242년 봄에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헝가리군이 이를 격퇴하고 이전에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1246년 초, 프리드리히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을 무찌른 뒤 헝가리를 재차 공격했다. 이에 벨러 4세는 키예프 대공 로스티슬라프 4세와 손을 잡고 대항했다. 1246년 6월 15일 라이타 강둑에서 양측이 격돌했다. 헝가리는 이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전투 중에 전사했다. 이로 인해 수 세기 동안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했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내에서 공작위를 둘러싸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1251년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1세의 아들인 모라비아 변경백 오타카르가 차지했다. 1253년,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 공국을 침공해 모라비아를 약탈했다. 이후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중재로 평화 협약을 맺고, 제머링 계곡 남쪽 영토가 헝가리에 양도되었다. 그는 이 지역을 아들 이슈트반에게 맡겼지만, 1258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슈트반을 축출한 뒤 오타카르에게 합류했다. 오타카르는 나중에 오타카르 2세로서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다.
1260년 초 평화 협약이 만료되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헝가리는 쿠만, 키예프 루스, 폴란드 왕국,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2제국,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지원을 받았다. 양군은 7월 12~13일에 모라비아에서 맞붙었고 헝가리군이 패배했다. 결국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영토 관할권을 포기해야 했다.
1261년, 벨러 4세는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를 맡겨 불가리아 제2제국을 공격하게 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불가리아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도나우 강 하류의 룸과 비딘을 공략했다. 당시 내전이 한창이던 불가리아로서는 이에 대항할 수 없었고, 콘스탄틴 아센 1세는 헝가리가 그 지역을 가지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 무렵 벨러 4세가 어린 아들 벨러를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임명하고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슈트반 왕자는 아버지가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막내 동생 벨러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이리하여 양측간에 관계가 악화되었고, 1261년 가을에 양측 군대간에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여러 대주교들이 중재하자, 양자는 도나우 강을 따라 국가를 분할하기로 했다. 강 서쪽의 땅은 벨러 4세가 직접 통치하기로 했고, 동부 영토는 이슈트반이 다스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양자의 갈등은 깊어졌다. 급기야 1264년 이슈트반이 도나우 강 동쪽에 있는 모후 마리아와 누이 언너의 영지를 몰수하자, 언너는 아버지를 부추겨 그해 여름에 이슈트반을 공격하게 했다. 언너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어 샤로슈퍼터크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이슈트반의 아내 에르제베트와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왕실군은 여세를 몰아 이슈트반 왕자를 몰아쳐서 그가 에르데이의 동쪽 끝에 있는 페케테할롬(Feketehalom)[5]까지 도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슈트반이 지지자들을 끌어모아서 병력을 추스린 뒤 반격을 가했고, 1265년 3월 이사제그 전투에서 벨러 4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1266년 3월 23일 토끼 섬[6]에 있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서 양자는 다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도나우 강을 따라 국가를 양분하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슈트반 왕자가 세금 징수권과 평민 통제 등 국왕의 권리 상당수를 공유하는 것 역시 허용되었다.
이 무렵, 헝가리의 봉신이었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가 불가리아로 귀순했다. 1265년, 불가리아 차르 콘스탄틴 아센 1세는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아들과 화해한 벨러 4세는 자신의 영지인 에르데이에 피해를 입힌 불가리아에 역공을 가하기로 하고, 이슈트반에게 군대를 맡겼다. 1266년 6월 비딘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불가리아 수도 벨리코 터르노보까지 진격하여 그 주변을 파괴하였고, 플레벤을 함락한 뒤 돌아갔다. 이에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버리고 헝가리의 봉신이 되었다.
1267년, 에스테르곰에 귀족들을 소집한 뒤 언드라시 2세가 반포했던 금인칙서에 명시된 그들의 특권을 재확인했다. 얼마 후,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1세가 벨러 4세와 이슈트반 왕자의 내전으로 헝가리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헝가리에 속한 미흐바를 침공했다. 이에 벨러 로스티슬라비치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격해 세르비아군을 격파하고 스테판 우로시 1세를 사로잡았다. 벨러 4세는 자기 손녀 카테리나와 결혼한 스테판 드라구틴이 세르비아에서 더 많은 권력을 얻고 국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다는 조건 아래 그를 풀어줬다.
1269년 여름, 벨러 4세의 총애를 받던 막내아들 벨러가 사망했고, 1270년 1월 18일에 막내딸 머르기트도 사망했다. 이에 깊은 슬픔에 잠긴 그는 곧 중병에 걸렸다. 자기가 죽고 나면 이슈트반 왕자가 가족들을 해칠 것을 우려한 그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아내 마리아와 딸 언너를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1270년 5월 3일 사망했고, 장자 이슈트반이 이슈트반 5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비 마리아 라스카리나와의 사이에서 2남 8녀를 낳았다. 첫 아이인 쿠니군다는 1224년생으로, 1246년 크라쿠프 공작 볼레스와프 5세와 결혼했다. 둘째 딸 머르기트는 1225년에 태어났지만 1242년 이전에 미혼인 채 사망했다. 셋째 딸 언너는 1226년에 태어나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와 결혼했다. 그녀는 여자의 몸으로도 군대를 능숙하게 운용할 정도로 통솔력이 뛰어났고 무용도 준수했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다만 이 때문에 남동생 이슈트반의 질투심을 사서 내전이 벌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넷째 딸 커털린는 미혼으로 사망했고, 다섯째 딸 에르제베트는 1245년경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3세와 결혼했다. 여섯째 딸 콘슈탄치어는 1251년경 할리치나 공작 다닐 로마노비치의 둘째 아들 레우 다닐로비치와 결혼했다. 일곱번째 딸 욜란은 폴란드 고공 볼레스와프 5세의 아내가 되었다. 여덟번째 딸 머르기트는 1242년에 태어나 성모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로서 일생을 보내다 1270년에 사망했다.
벨러 4세의 첫째 아들 이슈트반은 1239년에 태어나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선보였지만, 권력욕이 강하여 아버지 및 형제자매들과 마찰이 심했다. 둘째 아들 벨러는 1243년에서 1250년 사이에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어린 나이에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269년에 사망해버려 벨러 4세가 슬픔에 못이겨 중병에 걸려 죽는 계기를 제공했다.
3. 기타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ősök tere) 14인의 동상 위인 중 1명이다.즈보니미르의 왕관(Starohrvatska kruna)[7]을 쓰고 마지막으로 대관식을 치른 헝가리 국왕이다.
[1] 바나트(Banat) 동부 산악 지대로 중심지는 커란셰베시. 카란세베스 전투가 이 일대에서 벌어졌다.[2] 쿠만족이 살던 곳으로 오늘날의 몰다비아 일대.[3] 에르데이 지역 남부 브란 일대.[4] 구호 기사단이전에도 헝가리는 1212년 경에 쿠만족을 막기 위해 십자군 기사단인 튜튼 기사단을 유치했다가 이들 역시 통제를 안따르자 역시 추방시켜버린 전례가 있었다.[5] 현재 루마니아 코들레아(Codlea).[6] 현재 부더페슈트의 머르기트 섬.[7] 성 이슈트반 왕관과 비슷하게 크로아티아 국권의 상징인 왕관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른 인물은 나폴리 왕국 국왕 라디슬라오였고, 이후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