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8:20:52

프르셰미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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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 문장
존속년도 9세기 ~ 1306년
국가 보헤미아 공국,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오스트리아 공국,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주요 군주 프르셰미슬
보르지보이 1세
바츨라프 1세
볼레슬라프 1세
브르제티슬라프 1세
브르제티슬라프 2세
블라디슬라프 2세
오타카르 1세
오타카르 2세
바츨라프 2세

1. 개요2. 역사3. 역대 프르셰미슬 왕조 통치자 목록
3.1. 전설상의 통치자3.2. 보헤미아 공작3.3. 보헤미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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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헤미아 공국보헤미아 왕국 최초의 역사적 왕조. 전설상의 인물 프르셰미슬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1306년 바츨라프 3세가 암살될 때까지 보헤미아를 통치했다. 모라바 변경백국, 폴란드 왕국,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오스트리아 공국-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통치하기도 했다.

2. 역사

2.1. 보헤미아 공국

2.1.1. 프르셰미슬 전설

12세기 프라하 성 비타 대성당 학장이자 연대기 작가이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했던 코스마스(Cosmas, 1045년경 ~ 1125년)가 집필한 <보헤미아 연대기>에 따르면, 보헤미아 내 부족민들간의 분쟁이 갈수록 심화될 때 크록(Krok)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분쟁을 슬기롭게 중재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크룩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장녀 카지(Kazi)는 약초와 점술에 대한 지식이 뛰어났고, 차녀 테타(Teta)는 보헤미아 전통 신앙을 도입했다. 셋째 딸인 리부셰는 막내였지만 지혜는 가장 뛰어났고, 보헤미아에서 가장 강력한 성을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본떠서 '리부신(Libušín)'이라고 이름 붙였다.

크룩이 사망한 후, 부족민들은 리부셰를 판관으로 선출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예언을 했는데 전부 들어맞았다. 한 번은 신탁의 정력이 리부신에 내려오자, 그녀는 위대한 도시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사람들에게 특정 장소에 성을 지으라고 지시한 뒤 그곳에 프라하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한 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금속 매장지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 지 조언해주기도 했고, 사람들이 앞으로 겪을 많은 전쟁과 고난을 예견했으며, 아들의 황금 요람을 블타바 강에 가라앉히고 요람이 나타났을 때 더 좋은 때가 올 거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리부셰는 사람들간의 분쟁을 공정하게 판결해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부족의 남자들이 여자가 판관이라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남자를 공작으로 세우라고 요구하자, 리부셰는 산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산 너머에 작은 강 빌리나(Bilina)가 있고, 그 강둑에는 스타디체(Stadice)라는 마을이 있다. 그 안에는 길이가 12보이고 너비도 같은 경작지가 있다. 이 경작지는 수많은 들판 사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밭에도 속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공작은 이 경작지에서 가지각색의 황소 2마리를 쟁기질하고 있다. 황소 중 하나는 흰색 줄무늬로 띠를 띠고 있는 것 같고, 머리도 흰색이다. 다른 하나는 머리부터 등까지 모두 흰색이며, 뒷다리도 흰색이다. 자, 원한다면 내 지팡이와 외투와 공작의 옷을 가져다가 백성과 나의 명령에 따라 가서 그를 당신들의 공작이자 내 남편으로 데려와라. 그 남자의 이름은 프르셰미슬이다. 그 사람은 너희의 머리와 목에 떨어질 많은 법을 고안할 것이다. 이 이름은 '계획적인' 또는 '과도한 생각'을 의미하게 때문이다. 그의 후손들이 이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부족민들은 곧바로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프르셰미슬이 리부셰가 묘사한 모습 그대로 땅을 갈고 있는 것을 찾아냈다. 사절단이 그에게 공작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프르셰미슬은 사절들에게 농민들이 먹는 음식을 대접한 뒤 자리에 앉아 지팡이를 땅에 꽃았다. 지팡이는 식사하는 동안 3개의 콩나물이 있는 나무로 변했는데, 한 새싹은 무성하게 자랐지만 나머지 2개는 말라버렸다. 사절들이 이 일이 벌어진 이유를 궁금해하자, 프르셰미슬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리부셰와 결혼하면 세 아들이 태어나겠지만 한 사람만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 후 프르셰미슬은 호화로운 말과 신발을 신었고, 좋은 말을 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고 나무 인피로 짠 신발과 베낭을 가져다가 미래를 위해 보존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리부셰와 결혼한 뒤 세 아들 네자미슬, 라도빌, 루도미르를 낳았고, 보헤미아인들을 현명하게 다스려 야만성을 억제하고 오랫동안 유효한 법을 제정했다. 프르셰미슬의 통치는 리부셰가 죽을 때까지 평온했지만, 리부셰 사후 부족 내 여인들이 남자에게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아 블라스타라는 여인의 주도하에 비셰가르드 맞은 편에 데빈 성을 지었다. 이후 남자와 여자간의 전쟁이 7년간 벌어진 끝에 블라스타가 전사했고 남자들이 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프르셰미슬은 왕조의 창시자로서 보헤미아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보헤미아 통치자들은 그들의 기원을 드러내기 위해 대관식 중에 그의 그림이 그려진 라프테(Lapte: 슬라브 농민들이 주로 신은, 나무 인피나 자작나무 껍질로 짠 신발)를 신었고, 그의 베낭을 어깨에 매었다.[1] 이 유물들은 비셰흐라드에 있는 공작의 방에 보관되었고, 바츨라프 4세 시기까지 보헤미아 군주의 대관식에서 사용되었다. 이 유물들은 1420년에 후스파가 비셰흐라드를 함락시켰을 때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1.2. 보르지보이 1세에서 바츨라프 1세까지

전설을 배제했을 때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보헤미아 공작은 보르지보이 1세다. 보르지보이 1세가 집권하던 9세기 후반, 보헤미아 일대는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지의 통치자들은 보헤미아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고 있던 동프랑크 왕국대 모라비아 왕국 중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했다. 872년 5월, 마인츠 대주교 리우베르트(Liutbert)가 이끄는 프랑크군은 모라비아로 진격한 카를로만의 본대를 돕기 위해 모라비아 왕국을 돕는 보헤미아인들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했다. 튀링겐인과 작센인으로 구성된 리우베르트의 군대는 블타바 강가에서 보헤미아인들을 격파해 많은 적병을 사살하거나 부상 입혔고, 일부 보헤미아인은 강에 빠져 익사했지만 탈출한 사람들은 요새로 피신했다.

이때 보헤미아군 사령관 스바토슬라프(Svatoslav), 비티슬라프(Vitislav), 헤리만(Heriman), 스피티미르(Spytimír), 모이슬라프(Mojslav) 등 5명의 보헤미아 통치자들이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는 '고리웨이(Goriwei)'이라는 이름이 여섯 번째로 명시되었는데, 현대 학자들은 보르지보이와 동일인물로 간주한다. 19세기의 체코 역사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 ~ 1876)는 그가 여섯 번째로 명시된 것은 블타바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부하들에게 리우베르트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체코의 법학자이자 역사가 바츨라프 바네체크(Václav Vaněček, 1905 ~ 1985)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이 전투에 아예 관여하지 않았으며, 보헤미아 남부의 다른 통치자들이 동프랑크 왕국과의 전쟁에서 큰 손실을 입은 틈을 타 보헤미아 남부를 장악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874년 또는 875년에 슬라비보르(Slavibor)의 딸 루드밀라(Ludmila)와 결혼했다. 코스마스와 <성 바플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리의 전설>에 따르면, 슬라비보르는 프쇼바니족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반면 러시아에 보존되어 있는 고대 슬라브어로 쓰여진 <성 루드밀라 서문>에 따르면, 어퍼 루사티아에 거주하는 서브 슬라브 부족 중 하나인 밀차니족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성 바츨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라의 전설>(이하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루드밀라와의 사이에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료에는 두 아들 스피티흐네프 1세브라티슬라프 1세만 알려졌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의 궁정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지만, 이교도들이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였던 스바토플루크 1세가 탁자 위에서 식사하는 동안 자신은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했다. 당시 모라비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메토디오스는 이 광경을 보고 그에게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어째서 땅바닥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이후 그는 메토디오스와 심도 높은 대화를 나눈 뒤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고, 아내 루드밀라와 함께 메토디오스로부터 세례받았다고 한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그가 세례받은 시기가 메토디오스가 바이에른 주교구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직후인 874년이라고 추정했고, 고고학자 이반 보르코프스키는 스바토플루크 궁정에서 가톨릭 방식의 예배가 성행하기 시작한 880년 이전에 세례가 이뤄졌을 거라고 추정했다. 반면 체코 역사학자 바츨라프 로보트니(Václav Novotný, 1869 ~ 1932)는 스바토플루크가 보헤미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된 시기인 882년 즈음일 거라 추정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서 돌아온 뒤 레비 흐라데츠에 교황 클레멘스 1세를 기리는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후, 불만 세력이 그의 친척인 스트로미르(Strojmír)를 공작에 추대하고자 반란을 일으켰고, 보르지보이는 모라비아로 도망쳤다. 일부 학자들은 스트로미르가 다른 통치자들과 함께 블타바에서 리우베르트와 맞서 싸웠던 스피티미르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제기했지만 근거가 부족해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스트로미르는 독일인들과 함께 오래 살아서 슬라브어를 잊어버렸다. 이로 인해 보르지보이를 몰아내고 그를 추대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문제로 불만을 품은 이들이 늘어났다. 보르지보이의 지지자들은 이런 갈등을 조장하면서 반격할 기회를 엿봤다.

이후 보르지보이와 스트로미르는 한 곳에 만나서 협상하기로 했다. 스트로미르의 추종자들은 무기를 옷 아래에 숨긴 뒤, 그들 중 한 명이 "변화하자!"라고 외치면 무기를 들어 보르지보이 편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내부의 배신자에 의해 보르지보이 추종자들에게 전해졌고, 보르지보이 추종자들 역시 무기를 숨겨두고 있다가 "변화하자!"라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무기를 곧바로 빼들어 스트로미르 지지자들을 선제 공격했다. 스트로미르 지지자들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무너졌고, 스트로미르는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보르지보이는 보헤미아로 돌아와 공작위를 되찾았다고 한다.

체코 고고학자이자 역사가 즈데네크 메르진스키(Zdeněk Měřínský, 1948 ~ 2016)는 이에 대해 다소 변형된 가설을 제기했다. 보르지보이 1세는 스트로미르의 반란으로 축출되어 모라비아로 도망친 뒤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 1세는 884년 가을까지 판노니아에서 카란티아 변경백 아르눌프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그를 도와줄 여유가 없었고,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3세의 중재로 아르눌프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스바토플루크가 885년에 비로소 반란을 진압하고 그를 보헤미아 공작에 다시 앉혀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보르지보이 1세는 모라비아에 망명 가 있는 동안 기독교 신앙이 더욱 투철해졌고,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에게 성당을 하나 더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귀환한 그는 약속대로 프라하성모 마리아 성당을 건설했다.

888년에서 890년 사이에 보르지보이 1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들은 통치하기엔 나이가 아직 어렸다. 이에 모라비아 국왕 스바토플루크 1세가 890년 3월에 판노니아의 오문테스페르흐(Omuntesperch)에서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회담을 가진 끝에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고 통치를 행사했다. 894년 스바토플루크 1세가 사망한 뒤, 보르지보이 1세의 장남인 스피티흐네프 1세가 비로소 보헤미아 공국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895년 7월 보헤미아의 유력 귀족인 비티슬라프(Vitislav)[2]와 함께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가 개최한 총회가 열린 레겐스부르크에 방문해 아르눌프의 가신이 되는 대가로 동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또한 보헤미아는 공식적으로 레겐스부르크 주교구에 포합되었다. 이로 인해 보르지보이 1세가 보헤미아로 데려왔던 슬라브 성직자들이 추방되었다.

대 모라비아 왕국의 새 국왕 모이미르 2세는 이에 반발해 보헤미아를 여러 번 공격했다. 이에 보헤미아인들은 896년에 아르눌프에게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욫어했고, 897년에 보헤미아 사절단이 재차 레겐스부르크로 찾아와서 모라비아인들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후 보헤미아인들은 아르눌프와 함게 모이미르 2세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스바토플루크 2세를 지원했다. 900년 여름, 스피티네프가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헤미아 전사들이 바이에른을 침공한 모라비아인들에 대항하는 바이에른인들을 도왔다. 이후 모이미르 2세는 901년에 바이에른인들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906년, 에르츠 산맥 북쪽에 위치한 글로마코베족은 작센 공작 오토 1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공세에 직면하자 마자르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자르족은 이들을 돕기 위해 진군하던 중 보헤미아 영토를 지나갈 때 스피티네프 1세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스피티네프 1세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마자르족과 싸우고 싶지 않았고, 작센을 약화시키고 싶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마자르족은 보헤미아를 통과한 뒤 글로마코베족과 연합하여 작센군을 격파했다. 한편, 같은 해에 동생 브라티슬라프 1세가 하벨 강 중류 주변에 정착한 슬라브 부족인 스토도르 족의 공주 드라호미라와 결혼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작센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맺어진 정략결혼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보헤미아 중부에 위치한 프르셰미슬 왕조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프라하에서 26~34km 떨어진 언덕에 5개 요새를 건설하고 그 안에 교회를 세운 뒤 왕실 내 여러 구성원들을 배치했다. 이 요새들은 훗날 멜니크 시, 리부신 시, 테틴 시, 르슈테니 시, 볼레슬라프 시로 발견했다. 또한 프라하 성 요새화에도 힘을 기울여 해자 성 주변에 건설하고 프라하 주변에 여러 소형 요새를 세웠으며, 프라하 시 자체도 확장했다.

915년 스피티흐네프 1세가 사망한 후, 동생 브라티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즉위 직후 장남 바츨라프의 머리를 자르는 의식을 프라하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거행하면서, 베로나의 주교 노테리우스 2세를 초빙했다. 체코 역사가 두샨 트르제스티크(Dušan Třeštík, 1933 ~ 2007)는 노테리우스가 동프랑크 국왕 콘라트 1세에 맞서 싸우던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가 보헤미아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파견된 외교 사절이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다른 학자들은 브라티슬라프 1세가 노테리우스의 축복을 받고 보헤미아 통치자로 선포되기를 원했거나, 크로아티아 일대를 지배하던 트르피미르(Trpimir) 가문간의 결혼 동맹을 노테리우스의 중재하에 성사시키려 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

바츨라프 찰루페츠키(Václav Chaloupecký, 1882 ~ 1951)는 14세기에 쓰여진 비엔나 그림 연대기를 바탕으로 브라티슬라프 1세가 모라비아에서도 통치를 행사했으며, 작센과 손잡고 마자르족에 대항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샨 트르제스티크는 브라티슬라프 1세는 보헤미아 중부 지역만을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형의 정책을 그대로 받들어 마자르족과 싸우기보다는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했다. 11세기 후반의 연대기 작가 브레멘의 아담 역시 보헤미아인들이 마자르족의 915년 작센 원정에 따라갔다고 밝혔다. 현대 학계는 두샨의 주장 대로 브라티슬라프 1세가 마자르족에게 협력했을 거라고 본다.

그는 902년경 프라하 성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조지 대성당을 건설했다. 이 대성당은 이후 프르셰미슬 가문의 묘지로 각광받았으며,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의 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 또한 2층 짜리 왕궁과 파벨 신부의 목조 거주지도 건설되었으며, 형이 시작한 프라하 인근 언덕에서의 요새 건설 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브라티슬라비아 언덕 요새'로 명명된 목조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훗날 브로츠와프 시로 발전했다.

921년 2월 13일, 브라티슬라프 1세는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케자의 시몬에 따르면, 마자르족이 판노니아를 정복했을 때 브라티슬라프 1세가 부상을 입었고 곧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샨 트르제스티크는 시몬이 후대의 보헤미아 공작이자 국왕 브라티슬라프 2세와 착각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후 장남 바츨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나이가 어렸기에 어머니 드라호미라와 할머니 루드밀라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안가 공국의 권력과 바츨라프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두 여성과 추종자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그러던 921년 9월 15일, 루드밀라가 테틴 언덕 요새에서 드라호미라의 시종인 투나(Tunna)와 고몬(Gommon)에 의해 베일로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드라호미라는 루드밀라를 살해한 뒤 바이에른 성직자들을 추방했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는 이를 빌미삼아 922년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기록상에는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925년 즈음에 성년이 된 바츨라프 1세는 루드밀라의 유해를 테틴 언덕에서 프라하로 이송하고, 드라호미라에게 추방된 사제들을 불러들였으며, 어머니 드라호미라를 추방하고 어머니를 추종한 인사들의 준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뒤이어 코우르짐의 통치자 바츨라프 또는 라드슬라프와 맞붙어 승리했지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그곳을 계속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3] 이후 930년경에 성 비타 대성당을 세우고, 여전히 이교도가 많은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하고자 성직자들의 선교 활동을 후원했다.

기독교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는 거의 수도자처럼 살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고 과자를 굽는 일을 했으며, 죄수들을 해방시키고 교수대를 허물었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또한 언젠가 동생 볼레슬라프 1세에게 공작위를 넘겨주고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길 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은 훗날 성인이 된 그를 미화하고자 창작된 이야기로 간주한다.

그가 집권할 무렵, 보헤미아는 세 세력 사이에 끼여 있었다. 동쪽에는 유럽 전역에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던 마자르족이 있었고, 북쪽에는 엘베강 유역에 거주하는 슬라브 부족들[4]이 있었으며, 서쪽엔 독일 왕국에 속한 바이에른이 있었다. 보헤미아 공국은 스피티흐네프 1세 때부터 마자르족 및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마자르족이 바이에른 등지를 습격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추방한 뒤, 어머니가 추방했던 선교사들을 불러들이고 바이에른과 화해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29년, 독일왕 하인리히 1세가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을 정벌했을 때, 어머니가 속한 스토도르족의 수도 브란덴부르크가 함락되었다. 그후 하인리히 1세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과 함께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글로마코베족을 공격해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뒤이어 하인리히 1세와 아르눌프가 프라하로 진격하자, 바츨라프 1세는 두 사람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그 해 초여름, 바츨라프 1세는 독일 왕국에 매년 공물을 바치고 독일 군주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서약하는 대가로 그들이 보헤미아를 파괴하지 않고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코스마스는 보헤미아 공국이 소 120마리와 은 500 흐리브니아를 806년부터 비정기적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 피핀 카를로만에게 바쳤다고 기술했다. 현대 학자들은 카롤루스 대제 시기엔 보헤미아 공국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코스마스가 잘못 기술했다며, 실제로는 바츨라프 1세 시대부터 독일 왕국에 공물을 바쳤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그 양이 코스마스의 기록과 같은 지는 불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동생 볼레슬라프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시기에 순교한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의 축일인 9월 27일에 형 바츨라프를 볼레슬라프 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다음날 아침, 바츨라프 1세가 아침 예배를 하러 교회에 갔다가 귀가하던 중 볼레슬라프와 마주치자 덕담을 건넸다.
"네가 어제 우리를 잘 섬겼으니, 신께서 너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볼레슬라프가 외쳤다.
"오늘 나는 당신을 이렇게 섬기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검을 빼들어 형의 머리를 가격했다. 바츨라프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지만, 형제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볼레슬라프가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린 것을 빼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이 뒤이어 바츨라프를 살해했다. 10세기 중반에 고대 슬라브어로 작성된 <성 바츨라프의 생애>에서는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바츨라프와 볼레스와프 형제가 아침에 미사를 드리러 가던 중 길가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볼레슬라프가 검을 빼들어 바츨라프를 공격하려 했지만, 바츨라프가 이를 막고 볼레슬라프를 쓰러뜨렸다. 이때 볼레슬라프의 측근인 투자(Tuža)가 달려들어 바츨라프의 팔을 때렸다. 바츨라프는 교회에 숨기 위해 달려갔지만, 교회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고, 뒤따라 달려온 볼레슬라프의 부하들이 그를 검으로 난자해 살해했다.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귀족 므스티니(Mstiny)를 포함해 바츨라프와 함께 있던 인사들 역시 이날 피살당했으며, 볼레슬라프의 추종자들은 곧장 프라하로 달려간 뒤 바츨라프의 추종자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산 채로 블타바 강 깊은 곳에 수장시켰다고 한다. 이때가 벌어진 해는 문헌 기록에 전해지지 않았는데, 1960년대까지는 929년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여러 역사 기록들과의 대조를 통해 935년에 사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살인 동기 역시 불분명하다. 일부 기록에서는 볼레슬라프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형제를 살해했다고 기술되었고, 몇몇 학자들은 바츨라프 1세가 막대한 공물을 독일 왕에게 바치는 굴욕을 감수한 것에 대해 반감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이 볼레슬라프를 충동질했으리라 추정한다. 바츨라프 1세는 970년경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1세레겐스부르크에서 거행한 성찬식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았고, 오늘날 기독교적 미덕을 지닌 성자로서 체코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2.1.3. 볼레슬라프 1세부터 올드르지흐까지

볼레슬라프 1세가 형 바츨라프 1세를 살해하고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을 무렵, 독일 왕국의 국왕 하인리히 1세뇌졸중에 시달리고 있었다. 936년 7월 2일, 하인리히 1세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뒤 아들 오토 1세가 뒤를 이었다. 이에 지난날 하인리히 1세의 원정으로 복속되었던 엘베 강 유역 슬라브 부족인 루티키인과 오보르테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역시 이에 호응해 지난날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끊고 하인리히 1세에게 귀부했던 이웃 공국을 치기로 했다. 이 이웃 공국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대체로 믈라다 볼레슬라프 인근의 자브루샤니 언덕 요새 또는 흘로우메크 언덕 요새일 거라고 추정한다.

오토 1세는 엘베 강 유역의 슬라브족 반란 진압에 직접 착수하는 한편, 부하들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메르제부르크에서 아식(Asic)이 이끄는 군대가 출발했고, 튀링겐에서 또다른 군대가 출격했다. 메르제부르크에서 출발한 군대에 소속된 장병들은 범죄를 저지른 뒤 처벌 대신 군복무를 택한 자들이었다고 한다. 볼레슬라프 1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나눠 각 군대와 상대하기로 했다. 중세 작센 연대기 작가 코버리의 비투간트에 따르면, 튀링겐군은 보헤미아군이 자신들을 향해 접근해오자 전투를 회피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식이 이끄는 메르제부르크군은 보헤미아군과의 첫 전투에서 가볍게 승리를 거뒀지만, 이후 약탈에 전념하다가 볼레스와프 1세가 군대를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하자 크게 패했고, 아식은 전사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독일군을 격파한 뒤 이웃 공작의 성채를 완전히 허물고 새 성채를 세운 뒤 측근을 그곳의 영주로 삼았다.

938년, 볼레슬라프 1세는 볼레스와프 마을에 묻혀 있던 형의 유해를 프라하로 옮겨서 성 비타 대성당에 안장했다. 10~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아말피 대주교였던 로렌티우스가 라틴어로 집필한 연대기 <성 바츨라프의 수난>에 따르면, 볼레슬라프 1세는 바츨라프 1세의 유해가 담긴 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온종일 회개했다고 한다. 반면 코스마스는 바츨라프의 무덤에서 기적이 연이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두려움을 느끼고 시신을 성 비타 대성당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가 형의 유해를 옮긴 것에 대해 형을 죽인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설과 바츨라프 1세를 추앙하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를 상대로 14년간 전쟁을 벌였다고 전해지지만, 국경 지대에서 사소한 전투가 벌어졌을 뿐 이렇다할 큰 충돌이 벌어지진 않은 듯하다. 그러다 모든 반란을 제압한 오토 1세가 950년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쳐들어갔다. 그의 군대는 볼레슬라프 1세의 아들이 있던 성을 포위했지만, 병사들이 약탈하려 들자 이를 막느라 공성전을 미뤄야 했다. 볼레슬라프 1세는 아들을 구하려 했지만 적군의 숫자가 대단히 많은 걸 확인하고 오토 1세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또한 오토 1세는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보헤미아 감독을 맡겼다.

그후 볼레슬라프 1세는 오토 1세와 동맹을 맺었고, 955년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때 1,000명의 보헤미아 정예병을 파견해 오토를 도왔다. 960년대에 중부 유럽을 여행한 무슬림 유대인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Ibrahim Ibn yaqub)는 자신이 볼레슬라프 제국의 국경에서 프라하까지 이르는 데 3주가 걸렸다고 밝혔다. 슬로바키아 고고학자 미할 루토프스키(Michal Lutovský, 1961 ~)는 이를 근거로 볼레슬라프 1세가 키예프 루스와 접하는 부크강에서 스티르강 및 산 강까지의 영토를 통제했다고 추정했다. 또한 모라비아 남부 지역도 볼레스와프 1세의 손아귀에 넘어갔거나 간접 지배를 받았으며, 크라쿠프도 950년 이전에 볼레스와프 1세의 손아귀에 넘어갔을 거라고 추정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설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보지만, 볼레슬라프 1세 치세 때 보헤미아 공국이 영역을 상당히 확장했다는 건 분명하다고 본다.

한편, 볼레슬라프 1세는 보헤미아식 데나리온을 최초로 주조했다. 이 시대에 주조된 데나리온의 지름은 21mm로 순은으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약 1g이었다. 데나리온에는 새, 칼, 십자가 또는 그리스도의 초상 등 기독교의 고전적인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이 동전은 발트해 연안, 포메른, 심지어 스웨덴의 고틀란드까지 출토될 정도로, 중부와 동부 유럽에 널리 쓰였다. 이브라힘 이븐 야쿠브는 보헤미아식 데나리온을 '데나르'라고 지칭하면서, 실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밝혔다. 하지만 야쿠브는 무역은 대부분은 물물교환으로 이뤄졌고, 오직 가장 높은 사회 계층만이 데나리온으로 거래했다고 덧붙였다.

965년, 볼레슬라프 1세는 자신의 딸 두브라우카를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와 결혼시키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967년, 그는 2개의 기병 부대로 구성된 보헤미아 군대를 미에슈코 1세에게 지원해, 미에슈코 1세가 슬라브족의 지도자 비흐만 2세를 패사시키고 오데른 강 어귀를 장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966년에 딸 믈라다를 로마로 파견해 교황 요한 13세로부터 프라하 주교구를 바이에른 대주교구로부터 독립시키고 보헤미아에 최초의 수녀원을 설립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보헤미아 최초의 수녀원은 프라하의 성 조지 대성당에 세워진 베네딕토회 수녀원이었고, 첫 수녀원장은 믈라다였다.

볼레슬라프 1세는 7월 15일에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사망년도는 불확실하다. 코스마스는 그가 967년에 사망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코버리의 비투간트가 967년에 미에슈코 1세에 대해 기술한 대목에서 "볼레슬라프 1세와 같은 세대"라고 밝힌 것을 볼 때 967년에 사망하지 않았고, 972년에 사망했다는 일부 연대기들의 기술이 좀더 그럴듯 하다고 본다. 이후에 집권한 장남 볼레슬라프 2세는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사망한 뒤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오토 1세의 어린 아들 오토 2세를 밀어내고 제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밀 때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와 함께 하인리히 2세를 도왔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오토 2세와 하인리히 2세의 내전이 발발했다. 하인리히 2세는 보헤미아 전사들의 지원을 받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지만, 976년, 오토 2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대대적인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보헤미아로 망명했다. 이후 오토 2세는 보헤미아를 상대로 2차례 공세를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레슬라프 2세는 977년 오토 2세를 주군으로 인정할 테니 전쟁을 중단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어냈고, 978년 크베들린부르크에서 오토 2세를 알현해 경의를 표했다.

977년, 미에슈코 1세의 아내이자 볼레슬라프 2세의 여동생이었던 두브라우카가 사망했다. 그후 폴란드와 보헤미아간의 우호 관계가 악화되었다. 980년 봄 또는 여름, 미에슈코 1세는 북방변경백 디트리히의 딸인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재혼했다. 이후 미에슈코 1세의 장남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마이센 변경백 릭다그의 딸[5]과 결혼했다. 하지만 볼레슬라프 2세가 985년에 락다그가 사망하면서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마이센 성을 공략하고 마이센 주교 볼콜트를 추방하자, 미에슈코 1세는 며느리가 쓸모 없다고 보고 결혼을 무효화한 뒤 헝가리 대공 게저 또는 트란실바니아 대공 줄러의 딸 유디트와 장남을 결혼시켰다. 이로 인해 보헤미아가 폴란드와 헝가리 연합에 둘러싸일 위험에 처하자, 984년 하인리히 2세와 동맹을 굳건히 했다.

이 무렵, 보헤미아 북동부의 리비체나트치들리노우와 쿠트나 호라를 거점으로 삼은 슬라브니크(Slavník) 가문의 위세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코스마스에 따르면, 슬라브니크는 서쪽으로는 보헤미아,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모라비아, 북쪽으로는 폴란드에 걸쳐 상당한 영토를 가진 강력한 영주였다고 한다. 현대의 일부 역사가들은 슬라브니크의 아내로 명시된 스트르제지슬라파(Střezislava)는 볼레슬라프 1세의 누이였을 거라고 추정하며, 슬라브니크는 볼레슬라프 1세로부터 보헤미아를 경유하는 상인들의 여행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리라 추정한다.

981년 슬라브니크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소베슬라프는 보헤미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폴란드와 작센과 외교 활동을 벌였다. 이를 경계한 볼레슬라프 2세가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했고, 소베슬라프는 2차례 영토를 떠났다가 복귀하길 반복했다. 그러던 983년 프라하의 주교 데트마르가 사망한 뒤, 소베슬라프의 형제인 보이치에흐가 새 주교에 선임되었다. 이로 인해 슬라브니크 가문의 위세가 더욱 강해졌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슬라브니크 가문이 지배하던 지역에서 화폐를 독자적으로 주조했다고 한다.

986년, 독일 왕위를 찬탈하려는 하인리히 2세와 대적하던 오토 3세는 하인리히 2세를 지원하는 보헤미아를 응징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볼레슬라프 2세는 크게 패해 마이센으로 도피했고,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는 즉시 오토 3세를 알현한 뒤 막대한 선물을 넘겼다. 이후 오토 3세와 미에슈코 1세는 슬라브 원정에 가담해 각지를 황폐화하고 수많은 적병과 민간인을 살상했다. 두 사람이 공격한 지역의 위치는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한데, 일부 학자들은 폴라비아였을 거라 추정하고, 다른 학자들은 보헤미아였을 거라 본다. 990년, 미에슈코 1세는 보헤미아를 공격해 실레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브로츠와프, 글로구프, 오폴레에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워폴스카(Małopolska)를 정복하고 장남 볼레스와프의 영지로 삼았다.

992년, 오토 3세에게 복종한 볼레슬라프 2세는 오토 3세와 함께 폴라비안 슬라브족을 정벌하는 원정을 진행했다. 995년, 그는 보헤미아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브르쇼브치(Vrshovichi)를 지원해 갈수록 강해지며 독립을 꾀하는 슬라브니크 가문을 공격하게 했다. 브르쇼브치 가문은 리비체나트치들리노우를 공략하고 슬라브니크 가문에 속한 스피티미르, 포브라슬라프, 포르제이, 카슬라프, 소베보르 등 5명을 처형했다. 슬라브니크 가문에 속했던 프라하 주교 보이치에흐는 이에 분노해 브르쇼브치 가문을 파문하면서, 그들이 3번 멸망할 거라는 예언을 남겼다. 이후 보이치에흐는 프라하를 떠나 로마로 망명했다.

996년, 교황 요한 15세는 보이치에흐가 프라하 주교로 복귀하게 하자는 마인츠 대주교 빌리기즈의 주장을 받아들여 보헤미아 당국에 요청했지만, 볼레슬라프 2세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 후 보이치에흐는 폴란드로 이동한 뒤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지시에 따라 고대 프로이센으로 가서 선교 활동을 벌였지만, 그 해 4월 23일에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999년 볼레슬라프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볼레슬라프 3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형제들을 잠재적인 정적으로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001년, 그는 야로미르가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적용해 거세했다. 이후 올드르지흐까지 살해하려 하자, 야로미르와 올드르지흐는 바이에른으로 도주했다. 1002년, 보헤미아 유력 귀족인 브르쇼프 가문이 폭정을 자행하는 공작을 몰아낸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볼레슬라프 3세는 반란군에게 패배한 뒤 노르가우 변경백인 슈바인푸르트의 하인리히에게 망명했다.

이후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블라디보이가 폴란드군의 지원에 힘입어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1002년 11월, 그는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조언에 따라 레겐스부르크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보헤미아를 봉토로 받았다. 이로써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보헤미아를 봉토로 부여받은 최초의 보헤미아 통치자가 되었고,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이를 근거로 삼아 프르셰미슬 가문 출신 공작들의 계승에 반복적으로 개입했다.

1003년 1월, 블라디보이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이에 볼레슬라프 3세는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게 하인리히 2세에 대항하는 봉기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고, 볼레스와프 1세는 이를 믿어주기로 하고 볼레슬라프 3세의 복위를 주선했다. 그 해 2월, 볼레슬라프 3세는 폴란드군의 지원에 힘입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곧 이를 뒤집고 브르쇼프 가문 인사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인사들이 살해당하자, 이에 반발한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이 각지에서 발발했다.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그가 폭정을 일삼아 보헤미아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자 크라쿠프로 초대한 뒤 곧바로 체포한 후 실명형에 처한 뒤 알려지지 않은 곳에 가두었다.

그 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보헤미아를 침공해 프라하를 장악한 뒤 공작을 맡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하인리히 2세에게 볼레슬라프 2세의 아들 야로미르를 공작으로 모시고 싶으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004년 가을, 하인리히 2세가 파견한 독일군이 폴란드군을 보헤미아에서 몰아냈고, 야로미르는 보헤미아 공작에 등극한 뒤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으로서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1005년 하인리히 2세가 폴란드를 공격했을 때 이에 호응해 부디신을 공략했다. 그러나 1007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반격해 부디신을 탈환했다.

1012년, 볼레슬라프 2세의 또다른 아들인 올드르지흐가 반란을 일으켜 야로미르를 축출하고 보헤미아 공작위를 찬탈했다. 그해 10월, 하인리히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보헤미아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았다. 1014년 브르쇼프 가문을 비롯한 야로미르의 추종자들을 집단 처형해 입지를 강화했다. 1015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올드르지흐에게 장남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를 비롯한 사절단을 보내 동맹을 제안했다. 하지만 올드르지흐는 이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하인리히 2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후 하인리히 2세가 아버지를 위해 위험한 임무를 맡은 미에슈코 2세를 가상하게 여겨 풀어주라고 지시하자, 올드르지흐는 이에 따라 미에슈코 2세를 석방했다.

이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하인리히 2세와 전쟁을 벌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모라비아를 점진적으로 공략했으며, 1017년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의 보헤미아 침공을 격퇴했다. 또한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1세와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를 결혼시킴으로서 당시 오스트리아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바벤베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고 그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아냈다. 1024년 독일왕에 오른 콘라트 2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보헤미아 지배를 재차 인정받았다.

1031년, 올드르지흐는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와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협공으로 인해 정신없는 틈을 타 모라비아 전역을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하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에게 모라비아 행정을 맡겼다. 그해 가을, 미에슈코 2세가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의 공세를 피해 보헤미아로 망명하자, 그는 과거에 미에슈코 2세의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자신의 형인 볼레슬라프 3세를 크라쿠프로 유인한 뒤 체포 후 실명형에 처했던 것을 보복하고자 미에슈코 2세를 체포한 뒤 거세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배신하여 붙잡은 뒤 그가 더 이상 자손을 낳을 수 없도록 그의 성기를 가족끈으로 묶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인 볼레스와프 왕이 그들의 왕자와 삼촌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후 미에슈코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다시는 아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올드르지흐는 얼마 후 미에슈코 2세를 석방시켜 폴란드 대공에 복위하게 했는데, 그런 조치를 내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그는 신성 로마 제국군이 폴란드를 장악하는 걸 돕기를 거부해 콘라트 2세의 의심을 샀다. 결국 1033년, 콘라트 2세는 올드르지흐를 소환한 뒤 반역 혐의로 고발해 체포한 후 바이에른으로 유배보냈다. 이후 그에게 축출된 뒤 21년간 위트레흐트에 조용히 지내던 야로미르가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1034년 봄, 올드르지흐가 콘라트 2세에 의해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다. 콘라트 2세는 올드르지흐를 복위시키는 대신 보헤미아를 야로미르와 함께 나눠가지고, 모라비아 일대는 올드르지흐의 아들인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올드르지흐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지배권을 형과 아들과 함께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하들을 시켜 야로미르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뒤 감옥에 갇히게 했고,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아버지를 피해 해외로 도주했다.

2.1.4. 브르제티슬라프 1세부터 스바토플루크 2세까지

1034년 11월 9일, 올드르지흐가 급사했다. 야로미르는 올드르지흐 사후 석방되었지만 거세된 데다 눈까지 멀었기에 공작이 되기를 거부했고, 보헤미아 귀족들은 올드르지흐의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추대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38년 폴란드 대공국이 내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먼저 이교도를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폴란드로 진군하여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고 철저하게 약탈했으며, 포즈난과 크루슈비차 주교구를 파괴했다. 이후 폴란드의 수도 그니에즈노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미에슈코 1세가 성당에 기증했던 금 십자가를 비롯한 수많은 귀중품과 보석을 약탈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니에즈노, 포즈난, 크루슈비차는 이후로 오랫동안 버려졌으며 야생 동물들이 은신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여기에 더해 레드니카 호수 위의 섬에 있던 성과 석조 교회를 파괴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한 기츠에 살던 수많은 공예가들을 보헤미아로 이주시켜 헤드차니에 정착히켰다. 이 시기에 실레시아와 소 폴란드가 보헤미아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독일왕 하인리히 3세는 보헤미아 공국이 이대로 모라비아와 폴란드를 석권해버리면 장차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들 거라 여기고, 보헤미아군에 쫓겨 독일로 망명한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를 돕기로 했다. 1039년, 카지미에시 1세는 하인리히 3세로부터 중무장한 독일 기사 500명과 재정 지원을 받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여기에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도 카지미에시 1세를 지원하기로 했고, 자신의 여동생인 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를 그와 결혼시켰다. 이후의 전쟁 과정은 전해지지 않으나, 1041년 레겐스부르크 협약이 체결되면서 보헤미아 측이 실레시아를 제외한 모든 폴란드 영토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1040년, 하인리히 3세가 보헤미아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응전에 나섰고, 양군은 1040년 8월 22~23일에 브로테크에서 처음으로 격돌했다. 당시 하인리히 3세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기에 가능한 한 빨리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로 진격하려 했고, 진군로에 펼쳐진 울창한 숲을 제대로 정찰하지 않고 강행군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브로테크 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통나무와 바위로 퇴로를 막은 뒤 기습 공격을 가해 수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숲에 들어가지 않은 후위대에 있던 하인리히 3세는 어떻게든 통나무와 바위를 치우고 아군을 구조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나머지 병사들만 수습해 바이에른으로 퇴각했다. 그 후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없다고 여긴 하인리히 3세는 거부하고 재차 침공했으나, 9월 22일 흘루메크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했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재차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하인리히 3세는 단호히 거부한 뒤 1041년 재차 대군을 일으켜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이번에는 국경 방어선을 우회하고 프라하에서 브르제티슬라프 1세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으며, 프라하의 세비르 주교를 비롯한 많은 프라하 귀족들이 황제에게 귀순했다. 결국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월 15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참석해 참회자의 예복을 입은 채 맨 발로 걸어가다가 하인리히 3세의 발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 하인리히 3세는 그를 사면하고 실레시아와 모라비아를 가지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조공을 매년 바치고 경의를 표해야 하며, 다른 정복지는 포기하게 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의 충실한 봉신이 된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1042년 하인리히 3세의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헝가리 국왕에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에 참여해 도나우 강 북쪽 영토를 점거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3세는 점령지를 지키기에 충분한 병력을 끌고 오지 못했기에 곧 철수했고, 헝가리 국왕 어버 샤무엘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다. 1043년, 하인리히 3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다시 공세를 개시해 라바 강까지 이르며 헝가리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1044년, 하인리히 3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3번째로 헝가리로 진군했다. 1044년 7월 5일, 제국군과 보헤미아군은 멘포에서 헝가리 귀족들이 대거 배신한 덕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어버 샤무엘은 전사했다. 하인리히 3세는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헝가리 왕위에 복위시키고 헝가리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삼았다.

1046년,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되찾으려고 쳐들어왔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즉지 군대를 이끌고 저지했다. 이후 양자는 마이센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050년,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재차 침공해 일시적으로 공략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하인리히 3세에게 "카지미에시가 자신의 정당한 영지를 침략하고 있다"고 제소했고, 하인리히 3세는 그 해 11월 고슬라르에서 카지미에시 1세를 소환해 보헤미아와 적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후 1054년 5월 22일 크베들린부르크 회의에서, 카지미에시 1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하인리히 3세의 중재하에 협상한 끝에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갖고, 보헤미아는 그 대가로 매년 은 500 그지브나(grzywna)와 금 30 그지브나를 폴란드로부터 제공받기로 했다.

1054년경,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다섯 아들과 귀족들을 불러다놓고 "나이가 가장 많은 자가 항상 공국의 권력과 권위를 갖고, 모든 형제와 후손들은 그의 통치 아래 복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는 장남 스피티흐네프 2세가 온전히 갖고, 모라비아는 세 아들 브르제티슬라프 2세(올로모우츠 지방), 콘라드 1세(브르노 지방), 오타 1세(즈노이모 지방)에게 분할되도록 했으며, 막내아들 야로미르는 수도자가 되도록 했다.

1055년 1월 10일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스피티흐네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곧바로 하인리히 3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로부터 보헤미아를 영지로 보유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1056년, 그는 보헤미아 뿐만 아니라 모라비아 역시 온전히 독차지하기 위해 세 형제들을 프라하로 불러들이고 그들의 영지를 회수했다. 어머니 유디트가 이를 반대하자, 그는 어머니를 국외로 추방했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 계속 있다간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또한 사자바 수도원에서 슬라브 사제를 추방하고 라틴 전례를 수행하는 독일 사제로 대체했다. 이후 300명의 모라비아 귀족을 흐루딤으로 소집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들이 불응하자 군대를 보내 체포해 프라하 성채에 가둬놓고 자신에게 철저히 복종하겠다고 서약할 때까지 고문을 가했다.

1057년경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1세의 딸 아들레타 우헤르스카와 결혼하자, 스피티흐네프 2세는 그가 헝가리군의 지원을 받고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1058년 도로 불러들여 화해하고 올로모우츠 영지를 돌려줬다. 1060년경 교황 니콜라오 2세에게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연간 100파운드를 교황청으로 보내는 대가로 주교관을 착용할 권리만 허락받았다.

1061년 1월 28일 스피티흐네프 2세가 사망한 뒤, 동생 브르제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고, 형제 콘라드 1세와 오타 1세는 모라비아의 영지를 돌려받았다. 이 무렵, 독일왕 하인리히 4세가 왕위 찬탈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슈바벤의 루돌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하인리히 4세를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진군했다. 이때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가 이를 기회로 삼아 보헤미아의 영역이었던 실레시아 서부 지역인 오파비안 실레시아를 침공해 흐라데츠 나드 모라비치 시를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현지 보헤미아군이 도중에 매복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가까스로 도주했다.

1062년 아들레타 우헤르스카가 사망헌 뒤,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와 화해하고 그의 누이인 시비엥토스와바 스와티와와 결혼했다. 1063년 다른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과 함께 셜러몬을 헝가리 왕위로 올리기 위한 원정을 단행해 성사시켰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1070년경 보헤미아인들이 폴란드로 쳐들어왔다가 볼레스와프 2세에게 패배했고, 볼레스와프 2세는 그들을 모라비아까지 추격했다고 한다.

1067년, 프라하 주교 세비르가 사망했다. 수도자로서 성직 생활을 하고 있던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막내 동생 야로미르는 자신을 프라하 주교로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자신의 집사 렌크가 프라하 주교가 되기를 원했지만, 형제들과 여러 보헤미아 귀족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자 어쩔 수 없이 야로미르를 프라하 주교로 선임했다. 다만 야로미르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올로모우츠에 주교구를 설립해 프라하 주교구를 견제하게 했다. 이후 야로미르는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폐지하기 위해 형과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1070년, 야로미르와 올로모우츠 주교 얀과의 재산 분쟁이 벌어졌다. 두 사람 모두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야로미르는 교황청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1071년 모라비아로 가서 얀 주교를 체포한 뒤 채찍질을 가했다. 또한 얀 주교가 이를 고발하기 위해 로마로 보낸 사절단을 도중에 붙잡아 신체 절단형에 처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2세가 보낸 교황 특사가 이 일을 문제삼았고,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즉시 법원을 소집하고 야로미르에게 출석 명령을 내렸다. 야로미르가 이에 불응하자, 교황 특사는 주교직 수행을 금지했고, 야로미르는 해외로 망명했다.

1071년 가을,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는 마이센에 있는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 연대기 작가인 헤르스펠트의 람페르트에 따르면, 황제는 두 사람에게 평화를 이루고 현재 국경에 만족하라고 명령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1072년, 볼레스와프 2세는 마이센 협약을 파기하고 보헤미아를 공격했다. 이에 진노한 하인리히 4세는 1073년 5월 폴란드를 응징하기 위한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나 작센 귀족들이 황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폴란드로의 원정 계획을 취소했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공의회에서 프라하 주교구와 올로모우츠 주교구가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간의 성직자 서임권 분쟁이 벌어졌을 때,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하인리히 4세 편에 섰고, 그레고리오 7세 편에 선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이 독일 본토를 노리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편에 선 그에게 보답하고자 루사티아 변경백과 마이센 영주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는 마이센과 루사티아가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하고, 그 대신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동부의 변경백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는 바벤베르크 가문이 통제하고 있었기에, 그저 허울 뿐인 칭호였다.

1079년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가 폴란드 귀족들의 정변으로 폐위되고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폴란드 대공에 선임되었다. 이후 1080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딸 유디트 프르세미슬디카와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보헤미아 공국과 폴란드 대공국간의 오랜 갈등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1080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교황청에 슬라브 전례의 복원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며 거부했다.
Quia nobilitas tua postulavit, quo secundum Slavonicam linguam apud Vos divinum annueremus celebrari officium, scias nos huicpetitioni tuae nequaquam posse favare.
그대와 귀족들이 슬라브어에 따라 성무일도를 거행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입장으로서 여러분의 요청을 어떤 식으로든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1082년, 콘라드 1세, 오타 1세와 함께 그레고리오 7세 지지를 천명한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을 침공해 그 해 5월 12일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2세를 메일베르크 전투에서 격파했다. 1085년 4월, 하인리히 4세는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자신을 충실하게 섬긴 브르제티슬라프 2세에게 크랄(král) 칭호를 내림으로써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임했다.[6] 단, 이 왕위는 상속될 수 없었으며, 의무 수수료를 면제하는 대신 독일왕이 로마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 참여해야 했다. 1086년 6월 15일, 트리어 대주교 에길베르트의 주관하에 보헤미아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폴란드 국왕이라는 칭호도 주어졌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칭호였을 뿐 실권은 없었다. 이때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도서인 비혜흐라드 코덱스가 제작되어 그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야로미르를 궁재로 삼은 하인리히 4세의 요청에 따라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프라하 주교구에 통합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1088년,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다시 세우기로 했다. 야로미르는 이를 항의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도중에 사망했다.

1087년 오타 1세 올로모우츠가 사망했다.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올로모우츠 공국을 오타 1세의 아들 오타 2세가 아닌 자신의 아들 볼레슬라프에게 넘겼다. 오타 1세의 아내 에우페미아는 이에 맞서 브르노 공작 콘라드 1세 등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귀족들과 함께 할거했고, 볼레슬라프는 그 와중에 사망했다. 그는 이를 응징하고자 1091년 모라비아를 침공해 브르노를 포위했지만, 도중에 그의 아들 브라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본토에서 아버지를 축출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장로들의 권고에 따라 콘라드와 화해하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후 브라티슬라프 2세는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로 망명했다.

1092년 1월 14일, 브르제티슬라프 2세는 낙마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후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된 동생 콘라드 1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사절을 보냈고, 프라하와 올로모우츠의 주교단을 재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1092년 9월 6일 재임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아들 브라티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된 뒤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대가로 보헤미아를 영지로 삼는 것을 승인받았다. 그는 브르쇼프 가문의 가주 무티나가 폴란드 대공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한 끝에 그의 직위를 박탈하고 전 재산을 압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1094년 평민들 사이에서 아직도 행해지고 있던 이교 의식을 금지하고, 이교도들이 신봉하는 '신성한 나무'를 뽑아내고 숲을 파괴했다. 1097년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의 유산인 슬라브 전례에 따른 예배를 여전히 지키고 있던 슬라브 수도자들을 사자브 수도원에서 추방하고 라틴 전례를 준수하는 베네딕토회가 사자브 수도원을 관리하게 했다.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십자군이 보헤미아를 통과하면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를 피해 헝가리와 폴란드로 도주했다. 1098년, 브라티슬라프 2세는 해외로 도주한 유대인들이 재산을 옮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했으며, 여전히 보헤미아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켰다.

1097년 브르노 공작이자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동생 콘라드 1세의 장자로서 브라티슬라프 2세의 사촌인 올드르지흐가 브라티슬라프 2세 사후에 자신이 나이가 가장 많으니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나이가 가장 많은 자가 항상 공국의 권력과 권위를 갖고, 모든 형제와 후손들은 그의 통치 아래 복종하라"고 정한 원칙에 따라 자신에게 보헤미아 공작위가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격분한 브라티슬라프 2세는 올드르지흐를 체포해 클라드스코 성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1099년 부활절에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브라티슬라프 2세는 자기 아들 브라티슬라프 대신 이복 남동생 보르지보이 2세를 상속인이자 후계자로 지명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로부터 보르지보이 2세가 보헤미아를 영지로 삼는 것을 승인받았다. 그가 이런 조치를 내린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사촌 올드르지흐의 영지를 몰수하고 보르지보이 2세에게 넘겼다. 이에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동생이며 올로모우츠 공작이었던 오타 1세의 아들들인 오타 2세, 스바토플루크 2세는 숙청될 것을 우려해 해외로 망명했다.

1100년 12월 22일, 브라티슬라프 2세는 즈베치노 마을 인근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던 중 로렉(Lorek)이라는 괴한이 쏜 화살에 맞아 암살당했다. 로렉은 도주를 시도했지만 체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단검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자살했다. 그에게 큰 피해를 입었던 브르쇼프 가문이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과 보르지보이 2세가 사주했다는 설이 세간에 나돌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브라티슬라프 2세가 암살된 뒤, 이복 동생인 보르지보이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110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 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보헤미아를 영지로 상속받는 것을 인정받았고, 올드르지흐를 석방시키고 영지를 돌려주라는 황제의 지시 역시 따랐다. 올드르지흐는 브르노로 돌아온 뒤 보헤미아 공작위를 탈취하기로 마음먹고, 오스트리아 용병대를 고용하는 한편,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5세는 교황청과 성직자 서임권 분쟁에 몰두하고 있던 터라 그를 도와줄 여유가 없었다. 올드르지흐는 쿠트나 호라 인근으로 진군해 보헤미아 귀족들이 자신에게 호응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보르지보이 2세와의 첫번째 교전을 치른 올드르지흐는 용병들이 그를 위해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다며 뿔뿔이 흩어지자, 보르지보이 2세와 협상한 끝에 더이상 공작위를 욕심내지 않겠다고 약조하고 브르노를 계속 다스리는 걸 인정받았다.

1103년, 보르지보이 2세는 폴란드 대공국을 양분하고 있던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즈비그뉴 형제 중 즈비그뉴와 손잡고 볼레스와프 3세의 영역을 동시에 공격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맞서 부하 젤리스와프에게 모라비아를 습격하게 했다. 젤리스와프는 모라비아의 많은 도시와 마을을 약탈했지만, 귀환하던 중 보르지보이 2세의 습격을 받고 패배했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 본인이 직접 모라비아로 재차 출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자 외교술을 구사하기로 했다. 보르지보이 2세는 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즈비그뉴와의 동맹을 끊었다.

1105년, 보르지보이 2세는 자신에게 폐위된 뒤 복위를 꾀한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 대적하는 하인리히 5세를 지원하기 위해 바이에른으로 진군했다. 사촌인 스바토플루크가 이를 이용해 프라하에서 정변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폴란드 대공국으로 망명해 볼레스와프 3세의 보호를 받았다. 1107년,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 국왕 칼만과 연합해 보헤미아로 쳐들어가 보르지보이 2세를 축출하고 스바토플루크를 보헤미아 공작 스바토플루크 2세로 앉혔다. 보르지보이 2세는 하인리히 5세에게 망명했다.

이후 하인리히 5세는 공작위에 오른 스바토플루크 2세를 소환했고, 스바토플루크 2세는 형제 오타 2세에게 통치 대행을 맡기고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가 체포되었다. 보르지보이 2세는 스바토플루크 2세가 체포된 틈을 타 그로이츠슈 백작 비프레히트 2세의 지원을 통해 복위를 꾀했지만, 스바토플루크 2세를 대신해 통치를 맡고 있던 오타 2세에게 격퇴되었다. 그 후 스바토플루크 2세는 하인리히 5세에게 많은 양의 금을 지불하고 항상 복종하겠다고 맹세해 석방된 뒤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보르지보이 2세는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스바토플루크 2세는 폴란드의 지원 덕분에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지만 볼레스와프 3세의 간섭을 받기를 거부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볼레스와프 3세는 1108년 스바토플루크 2세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군의 헝가리 원정에 동행한 틈을 타 보르지보이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도중에 포모제인이 북쪽 국경을 넘어 여러 마을을 파괴하자 군대를 북쪽으로 돌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스바토플루크 2세는 혹여 보헤미아 내에서 볼레스와프 3세에 호응해 자신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을 우려해 보헤미아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브르쇼프 가문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여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1109년, 스바토플루크는 하인리히 5세와 손잡고 폴란드를 향한 원정을 단행하려 했다. 그러나 그 해 9월 21일 군대를 사열하던 중 어느 기병의 급습을 받고 뒤에서 창으로 찔려 암살당했다. 암살자 얀 브르쇼프는 도주했다가 1년 후 체포된 뒤 코가 잘리고 눈이 뽑히는 형을 받았다. 보르지보이 2세는 그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프라하로 진격했지만 오타 2세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힌 뒤 프라하 요새에 감금되었다. 비프레히트 2세의 장남 비프레히트 3세가 그를 도우려 했지만 프라하 인근 전투에서 오타 2세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양자는 보헤미아 각지에서 내전을 이어가다가 1110년 하인리히 5세가 보르지보이와 비프레히트 3세를 봉국을 혼란에 빠뜨린 죄로 체포하고 보르지보이 2세의 남동생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선임하면서 분쟁이 종식되었다.

블라디슬라프 1세는 공작위에 선임된 후 잠재적인 정적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형제 소베슬라프 1세는 폴란드로 망명한 뒤 볼레스와프 3세와 손잡았다. 1110년, 볼레스와프 3세는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기 위해 프라하로 진격했지만, 보헤미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보헤미아군의 추격을 받았지만 1110년 10월 8일 트루티나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바닥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물러났다. 1111년, 양자간의 협상 끝에 합의가 도출되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블라디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는 대신 흐라데츠 크랄로베 시의 통치권을 얻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1115년에 브르노 및 즈노이모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1114년 1월, 블라디슬라프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잉글랜드 공주 마틸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수석 시종을 맡았는데, 이는 훗날 체코 군주가 선제후로서 독일왕을 선출할 권리를 확보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1117년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3세의 압력에 못 이겨 보르지보이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시키고 자신은 자데츠만 소유했다. 하지만 보르지보이 2세는 이후 3년간 홍수와 폭풍 등 자연재해에 시달리는 바람에 민심을 잃었고, 그는 이를 틈타 1120년 정변을 일으켜 보르지보이 2세를 헝가리로 축출했다. 이후 소베슬라프 1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해 해외로 망명하게 만들고, 브르노를 오타 2세에게, 즈노이모를 콘라드 2세에게 양도했다.

2.1.5. 소베슬라프 2세부터 오타카르 1세까지

1125년 임종을 눈앞에 둔 블라디슬라프 1세는 사촌 오타 2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어머니 시비엥토스와바와 프라하 주교 오토 밤베르스키가 강력히 반대하자, 그는 마음을 바꿔 형제 소베슬라프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해 4월 12일 블라디슬라프 1세가 사망한 후 소베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오타 2세는 이에 불복했고, 독일왕 로타르 3세의 지지를 확보했다. 로타르 3세는 보헤미아 승계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소베슬라프 1세를 불렀지만, 소베슬라프 1세는 함정을 의심해 가지 않고 별다른 권한이 없는 사절단만 로타르 3세에게 보냈다.

로타르 3세는 불충한 봉신을 정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1126년 초 보헤미아를 전격 침공했다. 당시 1125년 말과 1126년 초 겨울 날씨는 매우 혹독했지만, 로타르 3세는 이를 감안하지 않았다. 여기에 보헤미아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으지 않고 작센 공국 동부의 전사들만 동원했다. 소베슬라프 1세는 이 정보를 입수하고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성 오드리의 깃발과 성 바츨라프의 창을 병사들에게 보이며 다음과 같이 독려했다고 한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거룩한 순교자인 바츨라프와 오드리의 공로로 우리 땅이 외국인들에게 넘겨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노라."

1126년 2월 18일, 소베슬라프 1세는 눈 덮인 산기슭으로 이동 중이던 적군을 흘루메크 언덕에서 기습 공격했다. 당시 로타르 3세의 독일 기병대는 내리는 눈을 뚫고 나아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말에서 내려야 했고, 무거워서 눈밭을 헤쳐나가기 어려운 갑옷 역시 벗어야 했다. 그러다가 보헤미아군의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을 받자 크게 패해 달아났고,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던 오타 2세는 로타르 3세, 훗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될 알브레히트 1세와 함께 근처 언덕으로 피신했다. 이후 보헤미아군이 언덕 밑에서 포위한 뒤 공세를 벌인 끝에, 오타 2세는 전사했고 로타르 3세와 알브레히트 1세는 생포되었다. 소베슬라프 1세는 즉시 로타르 3세와 알브레히트 1세를 풀어줬고, 로타르 3세는 그 대가로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인정하고 독일 군주 선거에서 투표권을 가진 최고 시종 칭호를 내렸다.

신성 로마 제국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면서 입지를 공고히 한 소베슬라프 1세는 입지 강화에 나넜다. 먼저 오타 2세의 자식들인 콘라드 2세와 브라티슬라프로부터 즈노이모, 올로모우츠, 브르노 등 영지를 몰수하고, 인드르지흐 즈디크 주교를 통해 올로모우츠를 직접 통치했다. 또한 브라티슬라프 2세의 외아들인 브라티슬라프를 1126년에 체포해 도닌 성에 투옥했고, 1129년 데친 성으로 옮겼다. 1130년 여름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적발한 뒤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실명형을 가했고, 주동자들의 사지를 4등분으로 절단하는 형벌을 가했다.여기에 데친 성에 갇혀 있던 브라티슬라프가 이 음모와 연관시켜 실명형에 처했다.

한편, 그는 로타르 3세의 충성스러운 가신으로서 활약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과의 전쟁에 언제나 참여해 로타르 3세를 도왔고, 로타르 3세가 헝가리 내전에 개입했을 때도 힘을 보탰다. 1132년, 그는 로타르 3세의 지원 덕분에 헝가리 국왕으로서 입지를 굳힌 벨러 2세, 페레미실 공작 볼로디미르코와 함께 폴란드를 공격해 소폴란드로 진입하여 비실리카를 공략했다. 이후에도 폴란드와 수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르다가 1137년 크워츠코에서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와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다만 이 협약에 대한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1138년 독일왕으로 선출된 콘라트 3세가 개최한 밤베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소베슬라프 1세는 콘라트 3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수석 시종을 세습할 권리를 인정받고, 자신이 죽으면 장남 블라디슬라프가 보헤미아 공작위를 세습하는 것 역시 인정받았다. 그 해 6월, 그는 보헤미아 귀족들을 사드스카로 소환한 뒤 블라디슬라프의 계승을 확인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1140년 2월 14일 소베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콘라트 3세는 약속을 뒤집고 전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의 아들이며 소베슬라프 1세의 조카인 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 공작에 세웠고, 보헤미아 귀족들 역시 받아들였다. 이는 보헤미아 공작에 통제하기 쉬운 젊은이를 세우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블라디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 공작이 된 뒤 귀족들의 바람과는 달리 정무에 정력적으로 임했고 귀족들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이에 자신들이 오판했다는 걸 깨달은 귀족들은 반기를 들기로 하고, 1142년 당시 생존한 프르셰미슬 왕조 일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콘라드 즈노젬스키를 보헤미아 공작에 세우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브르노의 브라티슬라프와 오타 3세를 포함한 모라비아 지역의 공자들도 가세했다. 그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카슬라프 지역의 비소카 언덕에서 형제 디에폴트 1세와 인드르지흐, 올로모우츠 주교 인드르지흐 즈디크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과 맞섰다.

1142년 4월 25일, 양군은 비소카 언덕에서 맞붙었다. 일부 귀족들이 전투 도중에 반란군 편으로 돌아서면서 전세가 기울자, 그는 적진 한 가운데로 돌진해 돌파에 성공하고 형제들과 함께 프라하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어서 반란군에 자력으로 대응할 수 없게 되자, 디에폴트 1세에게 프라하 성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인드르지흐 즈데크와 함께 콘라트 3세에게 찾아가서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콘라트 3세로부터 원군을 받아낸 그가 프라하로 돌아오자, 디에폴트 1세의 철저한 방비에 막혀 프라하를 공략하지 못하고 있던 반란군은 항복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이 승리를 이용해 모라비아를 프라하의 지배하에 두었고, 올로모우츠 주교 인드르지흐 즈데크의 협력을 통해 모라비아 교회의 영지와 물품들을 세속 군주들의 통제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했다.

1147년 콘라트 3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을 때 동행했고, 교황 특사 귀도가 그를 대신해 보헤미아를 통치했다. 하지만 그는 도중에 이탈해 아그림으로 가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와 접견했고, 키예프와 크라쿠프를 거치며 이교도 슬라브족을 상대로 십자군 전쟁을 벌였다. 1152년 새 독일왕이 된 프리드리히 1세가 소베슬라프 1세의 자식들 중 한 사람을 보헤미아 공작에 앉히려 하면서, 처음에는 그와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가 냉각되었다. 하지만 프라하 주교 다니엘의 중재 덕분에 양자는 화해했고, 1156년 6월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 참석한 블라디슬라프 2세는 공작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1157년 프리드리히 1세의 폴란드 원정에 참여해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북부 이탈리아 도시, 특히 밀라노를 공략하려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1158년 1월 11일,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에 보답하고자 레겐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공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보헤미아 왕관을 씌워주고 크랄(král) 칭호를 내림으로써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임했다.[7] 그 해 여름, 블라디슬라프 2세는 황제와 함께 밀라노 원정에 나썻고, 브레시아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밀라노는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1161년 장남 베드르지흐와 디에폴트를 이탈리아로 보내 황제를 돕게 했지만,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1162년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3번째 밀라노 원정에 착수해 마침내 공략에 성공하고 금, 은 등 막대한 금은보화를 보상으로 지급받고 귀환했다.

1161년, 소베슬라프 2세는 용병대를 고용한 모라비아로 진군해 올로모우츠를 점령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진압에 착수했지만 여의치 않자 협상하고 싶다며 그를 프라하로 초대했다. 소베슬라프 2세는 이에 응해 프라하로 갔다가 체포된 뒤 프르짐다 성에 또다시 투옥되어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한편, 헝가리 왕국에서는 1162년 국왕 게저 2세가 사망한 뒤 게저 2세의 아들인 이슈트반 3세와 게저 2세의 두 동생인 이슈트반 4세와 라슬로 사이의 내전이 발발했다.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가 자국으로 망명했던 이슈트반과 라슬로 왕자에게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이슈트반 3세에 대항하게 하자, 이슈트반 3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했기에 거부했다. 이슈트반 3세는 마누일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끝에, 그는 황제로부터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동생 벨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고, 동생 벨러가 아버지 게저 2세로부터 부여받은 아파치 공국(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등 헝가리 왕국의 일부 영역)을 동로마 제국이 장악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마누일 1세는 이 정도면 헝가리를 약화시키고 제국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여기고 이슈트반 4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 이슈트반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접근했고, 헝가리의 여러 성직자와 귀족들이 신성 로마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종주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슈트반 3세는 낌새를 읽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칠 테니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일단 헝가리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그의 신하들인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헝가리를 예의주시하라고 지시했다.

1164년,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이 가져갔던 벨러 3세의 영지인 중앙 달마티아를 탈환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슈트반 4세가 용병대를 규합해 시르미움을 공략하고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슈트반 3세는 이에 맞서 주변 세력에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오스트리아, 할리치나 방면에서 파견된 군대와 함께 이슈트반 3세를 지원하러 출진했다. 연합군은 헝가리 각지에서 약탈을 벌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곧 헝가리로 진군하여 바치까지 진군하자, 그는 이슈트반 3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권고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시르미움을 포기하기로 하고, 그 대신 황제가 이슈트반 4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그는 장남 베드르지흐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헬레나를 마누일 1세의 친척인 페트라리프 가문 인사와 결혼시켰다고 전해진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서 30여년간 통치를 이어가면서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프레몽트레회, 시토회, 구호기사단 등 성직자 조직을 보헤미아에 수용했다. 그의 치세에 스트라호프 수도원, 플라시 수도원, 젤리브 수도원, 독사니 수도원을 포함한 여러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1160년경에는 프라하에 석조로 제작된 주디스 다리가 세워지기도 했다. 또한 이전에 개발되지 않았던 숲이 우거진 지역이 여러 소귀족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어 개간되면서 국가 경제가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흐라비시츠, 로젠베르크, 스트라코니츠 등 새로운 영주 가문이 등장했다.

그러나 1167년 프라하 주교 다니엘이 사망한 후, 프리드리히 1세와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간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168년 블라디슬라프 2세의 아들인 보이테흐가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선임되자, 프리드리히 1세는 이러다가 보헤미아 공국의 영향력이 오스트리아까지 미칠까 염려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히테흐 선임을 인정받기 위해 상당량의 금액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1169년 밤베르크 제국 의회에서 보이테흐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테흐는 잘츠부르크 주교구의 실질적인 주교로서 통치를 행사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장남 베드르지흐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물려주길 갈망했다. 애초에 그가 장남 이름을 베드르지흐라고 지은 것도 프리드리히 1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8]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베드르지흐의 왕위 상속이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그는 생전에 장남에게 왕위를 넘겨줌으로써 기정사실로 만들기로 하고 1172년 말에 아들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넘겨주고 스트라호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로서 말년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곧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소베슬라프 1세의 아들들인 올드르지흐, 바츨라프 2세 등은 1173년 9월 베드르지흐를 몰아내기 위해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황제의 승인 없이 계승이 이뤄졌으니 조치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보헤미아 왕위 계승이 이뤄졌다는 소식에 진노해 베드르지흐에게 소환령을 내렸고, 베드르지흐는 감히 황제에 대적할 엄두를 못내고 이에 응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의 조치를 무효로 처리하고 보헤미아 국왕 칭호를 회수한 뒤 올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했다. 하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은 올드르지흐를 공작으로 섬기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무산되었고, 그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던 소베슬라프 2세가 석방된 뒤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공작이 되자마자 자신을 그동안 학대했던 간수 콘라드 슈투름을 참수했다.

1176년, 소베슬라프 2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요구에 따라 황제의 이탈리아 원정에 보헤미아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황제의 군대는 레냐노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달베르트를 대주교의 직위에서 면직시켰고, 이로 인해 아달베르트의 삼촌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와 갈등을 벌였다. 즈노이모 공작 콘라드 2세도 아달베르트를 옹호했다. 이에 소베슬라프 2세는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하기로 하고,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와 연합한 뒤 군대를 일으켜 헝가리군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2차례 공격해 하인리히 2세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하인리히 2세는 도망치던 중 사망했고, 오스트리아 전역이 보헤미아군에게 황폐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약탈당하자,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7년 소베슬라프 2세를 파문했다.

1178년,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와 협력해 자신의 봉신인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피해를 입힌 소베슬라프 2세에게 분노해 그를 폐위시키고 프르셰미슬 왕조의 또다른 구성원인 베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세우겠다고 선포했다. 소베슬라프 2세가 쉽사리 물러나지 않자, 프리드리히 1세는 새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즈노이모 공작 콘라드 2세까지 베드르지흐를 도왔다. 소베슬라프 2세는 로데니체 전투에서 이들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뒀지만, 뒤이은 프라하 성벽 인근의 노베메스토 전투에서 참패해 해외로 망명했다. 베드르지흐는 자신이 보헤미아 공작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동생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 공작에 선임해, 올로모우츠가 속한 모라비아 전역에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게 했다.

1179년, 소베슬라프 2세는 베드르지흐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슈바벤으로 간 틈을 타 군대를 끌어모아 프라하로 쳐들어갔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베드르지흐는 독일에서 용병대를 모집하여 보헤미아로 돌아갔다. 도중에 소베슬라프 2세의 매복 공격을 받고 패배했지만 콘라드 2세의 구원군과 합세한 뒤 다시 공세를 개시해 프라하 인근에서 소베슬라프 2세를 격파했다. 소베슬라프 2세는 해외로 도망쳐 재기를 꾀했지만 1180년 1월 9일에 사망했다.

1182년, 콘라드 2세가 모라비아에서 반기를 일으켜 오타카르 1세를 올로모우츠에서 몰아내고 즈노이모, 브르노, 올로모우츠를 통합해 모라비아 전역을 통일시킨 뒤 프라하로 진격했다. 베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달려간 뒤 도움을 호소했고, 황제는 베드르지흐가 보헤미아 공작을 계속 맡는 대신 콘라드 2세를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하고 보헤미아 공작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185년, 오타카르 1세가 이끄는 베드르지흐의 군대는 모라비아를 보헤미아의 지배하에 되돌리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후 즈노이모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타카르 1세와 콘라드 2세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오타카르 1세는 철수해야 했다. 1186년, 양자는 크닌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콘라드 2세는 변경백 칭호를 유지하면서도 보헤미아 공작의 패권을 인정했으며, 베드르지흐의 후계자가 되었다.

1187년, 베드르지흐와 그의 사촌이자 프라하 주교인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인드르지흐는 베드르지흐가 관료들을 프라하 주교구에 파견해 감독들의 재산 관리에 자유롭게 간섭한 것에 반감을 품고 프리드리히 1세를 찾아가 중재를 요청했다. 황제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제국 의회가 열릴 때까지 결정을 연기했다. 베드르지흐 본인은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인드르지흐가 공작을 상대로 불평할 권리가 없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1187년 3월 5일, 프리드리히 1세는 베드르지흐가 의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고 간주하고 인드르지흐 주교에게 황금 황소를 선물했으며, 보헤미아 공작과는 별개로 황제 직속의 공작으로 지명되었다. 이리하여 주교구의 재산은 보헤미아 공작의 권위에 속하지 않게 되면서, 주교구와 보헤미아 공국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

1189년 3월 25일, 베드르지흐는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황제에 합류하려 하던 중 사망했다. 이후 콘라드 2세가 크닌 협정에 따라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가 재통합되었다. 콘라드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189년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지령을 받들어 프리드리히 1세와 많은 갈등을 벌였던 베틴 가문의 영지인 마이센 인근에 군대를 배치해 압박을 가한 끝에 마이센 변경백으로 프리드리히 1세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오토 2세가 세워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콘라드 2세는 1189년 사드스카에서 최초의 보헤미아 법률인 <콘라드 법령(Statuta Konrádova)>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영주 가문은 농노를 세습할 수 있으며, 여성의 상속권도 인정되었다. 반면 과부는 상속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범죄에 적용되는 관습법을 성문화했으며, 국왕이 사법권과 행정권을 좀더 강하게 행사할 수 있게 했다. 그 대가로, 보헤미아 귀족들의 재산은 오랜 법적 절차을 거치고 관습에 어긋나지 않아야만 몰수될 수 있는 등 귀족들의 특권이 보장되었다.

1191년, 콘라드 2세는 프리드리히 1세 사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 로마로 진군한 하인리히 6세를 따라갔다. 그 해 4월 로마에서 열린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뒤,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에 재편입하기 위해 남하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거점 나폴리를 포위 공격할 때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해 9월 9일 진영에서 나돌던 페스트에 걸려 병사했다.

콘라드 2세는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소베슬라프 2세의 남동생인 바츨라프 2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프라하 주교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가 그가 보헤미아 공작이 된 것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1192년 1월 하인리히 6세를 찾아가 블라디슬라프 2세의 아들인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하인리히 6세는 6,000 그리브냐 은화를 제공하겠다는 오타카르 1세의 약속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오타카르 1세를 보헤미아 공작, 오타카르 1세의 형제인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를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하기로 했다. 이후 오타카르 1세가 독일에서 용병대를 고용한 뒤 쳐들어오자, 바츨라프 2세는 프라하에서 몇달 동안 항전했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이 전부 오타카르 1세에게 귀순하자 결국 1192년 초 항복하고 자신을 도왔던 스피티네프와 함께 망명했다. 그러나 둘 다 도중에 오타카르 1세의 처남인 마이센 변경백 알브레히트 1세에게 체포되었다. 스피티네프는 감옥을 성공적으로 탈출했지만, 그는 더 이상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러지 못하고 옥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타카르 1세는 하인리히 6세의 지원 덕분에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될 수 있었지만, 약속했던 돈을 지불하길 꺼리면서 하인리히 6세와 갈등을 벌였다. 그러던 1193년, 오타카르 1세가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 1세가 주도하는 반(反) 하인리히 6세 연합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하인리히 6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헤미아 공작을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해 6월, 하인리히 6세는 인드르지흐 브르제티슬라프로부터 은화 6,000 흐리브냐를 받는 대가로 보헤미아 공작을 수여하기로 했다. 그해 8월, 인드르지흐는 독일군을 이끌고 보헤미아로 향했지만 주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고, 오타카르 1세는 그를 물리치고자 보헤미아 귀족들이 이끄는 사병대를 집결시켜 진군했다. 그러나 즈디체 인근에서 양군이 대치했을 때, 오타카르 1세 휘하에 있던 귀족들이 대거 편을 바꾸는 바람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오타카르 1세는 프라하로 도피했다.

오타카르 1세는 프라하에서 주민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1193년 성탄절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함락되기 직전까지 몰리자 친척인 보겐 백작 알브레히트 3세에게 망명했다. 인드르지흐는 프라하에 입성하여 입지를 다진 뒤 1194년 여름 모라비아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의 항복을 받아내고 프라하로 데려감으로써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이후 하인리히 6세의 명령에 따라 마이센 변경백 알브레히트를 향한 원정에 동행했다.

1195년 12월 6일 하인리히 6세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일으키겠다고 선포하자, 인드르지흐는 이에 호응했다. 그러나 나폴리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하인리히 6세의 십자군 원정은 지연되었다. 그 사이 병에 걸린 인드르지흐는 프라하를 떠나 조용한 마을인 체브로 옮겨 요양 생활을 하다가 1197년 6월 15일에 사망했다. 이후 프라하 감옥에 갇혀 있던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가 석방된 뒤 귀족들의 추대에 힘입어 보헤미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오타카르 1세는 이에 불복해 그 해 12월 보헤미아로 쳐들어갔고,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는 이에 맞서고자 진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동복형제끼리 피튀기는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프라하 주교 다니엘과 귀족들의 중재에 따라 협상했다. 그 결과 1197년 12월 6일, 오타카르 1세가 보헤미아 공작이 되고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는 모라비아 변경백에 복위한다는 합의를 맺었다.

2.2. 보헤미아 왕국

2.2.1. 오타카르 1세

오타카르 1세가 보헤미아 공작에 복위했을 무렵, 호엔슈타우펜 가문베틴 가문이 각각 필리프오토 4세를 신성 로마 황제로 내세우며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는 이중 필리프 편에 섰고, 그를 돕기 위해 라인강으로 진군했다. 필리프는 오타카르 1세의 지원을 확실히 받아내기 위해 1198년 9월 또는 10월에 보헤미아 국왕 칭호를 내렸다. 이때 필리프는 보헤미아에서 선출된 사람은 누구나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보헤미아 왕은 보헤미아에 소속된 주교들을 서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오타카르 1세는 1172년 아버지 블라디슬라프 2세가 퇴위한 이래 26년만에 보헤미아 국왕 직위를 부활시키고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오타카르 1세는 필리프를 돕는 한편, 보헤미아 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모라비아 지방의 브르노 영주로서 자신이 보헤미아 군주가 되는 것을 계속 막았던 스피티흐네프를 체포한 뒤 영지를 몰수하지 않는 대신 실명형에 처해 곧 죽게 만들었다. 스피티흐네프의 형제 스바토플루크는 1200년에 사망했는데,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오타카르 1세에게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올로모우츠 공작 브르제티슬라프의 아들인 시프리드는 본래 올로모우츠를 계승할 권리가 있었지만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의 압력을 받고 성직자가 되었고, 나중에 올로모우츠 교구의 학장이 되었다. 이후 올로모우츠는 오타카르 1세가 직접 관리했고, 즈노이모와 브르노는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가 관리했다.

1198년, 오타카르 1세는 아들레타가 4촌 관계라는 이유로 결혼을 무효로 처리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199년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의 딸인 콘슈탄치어와 결혼했다. 아들레타는 자식들을 데리고 베틴 가문의 영지에 망명한 뒤 자신의 아들 브라타슬라프의 계승권을 지켜내기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항소했다. 교황은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보헤미아 공작'이 아내를 버리고 음란한 여자를 데려왔다며 비난했다.

1201년, 인노첸시오 3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를 유일한 로마 왕으로 선포하고, 오타카르 1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가 보헤미아 국왕이 되는 것을 공인하겠다고 약속했댜. 이에 오타카르 1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등을 돌리고 오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에 필리프는 1203년 4월 동부 보헤미아 영주 디에폴트 3세에게 보헤미아를 봉토로 부여하는 등 오타카르 1세와 적대했다. 그해 5월, 오타카르 1세는 튀링겐에서 필리프의 군대를 직접 격파했다.

1203년 8월 24일, 그는 교황 특사인 프라이네스테의 귀도의 주관하에 치러진 대관식을 통해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했으며, 이전에 부여된 모든 왕실 특권을 확인받았다. 그는 이 참에 프라하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려 했지만, 인노첸시오 3세는 이것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사자바 수도원의 창시자 프로코프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1204년 후반기에 필리프가 반격을 개시해 벨프 가문이 쇠락해지자, 그는 입장을 바꿔 필리프를 지지했다. 또한 교황청과 화해할 길을 모색하던 필리프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들레타를 잠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1205년 콘슈탄치어가 아들 바츨라프를 낳자, 그는 아들레타를 다시 추방했다. 1206년, 인노첸시오 3세는 부적합한 결혼에 대한 재판을 통해 오타카르 1세를 정죄했다.

1207년 12월 오타카르 1세의 2살된 아들 바츨라프와 필리프의 딸 쿠니군데가 약혼했다. 이리하여 보헤미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필리프는 신성 로마 황제로서 입지를 굳히는 듯했다. 그러나 1208년 6월 21일, 바이에른 궁정백인 비텔스바흐의 오토가 필리프를 암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리하여 보헤미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 황실과의 인연이 끊어져버렸다. 1209년 10월, 베틴 가문이 내세웠던 오토 4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등극했다. 오토 4세는 오타카르 1세를 매우 냉담하게 바라봤고, 언젠가 그를 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오토 4세의 정책에 발끈한 인노첸시오 3세가 1210년 11월 18일에 파문을 선고하고 선제후들에게 새로운 황제 선거를 열라고 요구하고 이에 호응한 독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오토 4세는 보헤미아에 더는 신경쓸 수 없게 되었다.

1211년 봄, 오타카르 1세는 마인츠 대주교 지크프리트, 튀링겐 변경백 헤르만,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와 함께 반(反) 오토 4세 연합을 결성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오타카르 1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로 하고, 때마침 아들레타가 사망하자 오타카르 1세와 콘슈탄치어의 부부 관계를 합법화하고 그가 두 결혼에서 낳은 모든 자녀 역시 합법적인 자식으로 규정했다. 9월 초, 반 오토 4세 연합은 뉘른베르크로 가서 시칠리아 국왕 페데리코 2세독일왕으로 선출했다. 1212년 초 독일에 도착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을 옹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그에게 큰 보상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212년 9월 26일, 프리드리히 2세는 오타카르 1세와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에게 시칠리아 왕의 황금 인장으로 봉인된 3개의 문서를 보냈다. 일명 <시칠리아의 황금 황소>로 명명된 이 문서는 신성 로마 제국 내 보헤미아 국왕와 보헤미아 왕국의 지위를 정했다. 오타카르 1세는 이 문서를 통해 자신과 후계자들이 왕위를 세습하는 것을 인정받았고, 보헤미아 귀족들이 왕을 자율적으로 추대하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프라하와 올로모우츠 주교를 서임할 수 있엇고, 보헤미아 영토를 침범받지 않을 권리도 인정받았다.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는 오타카르 1세를 주군으로 받드는 것을 인정받았고, 모라비아 변경백국 전체에 대한 통치 역시 인정받았다.

이리하여 보헤미아 왕국의 입지를 굳힌 뒤, 오타카르 1세는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독일인들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독일인들이 정착한 곳에 '독일법'을 도입했으며, 특별 판사를 두는 걸 허용했다. 또한 모라비아에서 브룬탈, 유니초프, 오파바, 글루브치체 등 여러 도시가 세워졌고, 보헤미아에서도 즈노이모, 젬니체, 흐라데츠 크랄로베 시가 건설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대체로 독일에서 이주한 이들로 구성되었고, 마그데부르크 법이 그대로 도입되었다.

1214년 다니엘 주교가 사망한 후, 프라하 교장 온드르제이가 오타카르 1세에 의해 프라하 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는 초기에는 오타카르 1세에게 복종했지만, 1215년 11월 22일에 열린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한 뒤 교회를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고 보헤미아에 실천하려 했다. 오타카르 1세가 주교구의 재산에 간섭하는 걸 그만두라는 요청을 거부하자, 온드르제이는 1216년 말 로마로 떠난 뒤 프라하 교구에 대한 성무 금지령을 선포하고, 오타카르 1세와 보헤미아 귀족들이 교회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보헤미아에서 십일조의 징수가 불충분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평신도가 주교의 승인 없이 사제에 임명되고 있고, 세속 법원이 성직자를 처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촉발된 분쟁은 수년간 질질 끌다가 1222년 초 사크라 호라에서 오타카르 1세, 주교들, 교황 특사 그레고리 드 크레센시오 및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많은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타협안이 마련되면서 마무리되었다. 1222년 3월 10일 오타카르 1세가 프라하에서 발표한 '보헤미아 교회의 대특권'에 따르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왕이나 법원 판사의 심판을 받고, 사형이 아닌 범죄의 경우 총리의 심판을 받아야 했다. 단, 세속 영주들은 교회 영지에서 숙련된 신민을 받을 수 없었으며, 군대와 귀족은 수도원의 동의가 있어야만 수도원 영지를 이용할 수 있었고, 수도원은 더 이상 전투에 나가는 왕실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수도자들은 성, 해자 건설 등의 노동 의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었고, 왕은 수도원장과 다른 교회 고위 인사들의 조언을 귀담아들어야 했다. 오타카르 1세와 교황 호노리오 3세 모두 이 협약에 만족을 표했지만, 온드르제이는 생명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해 프라하로 돌아가지 않고 로마에 계속 머물렀다.

오타카르 1세는 온드르제이 주교와 논쟁을 벌이는 것과 동시에 후계자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들레타와의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 브라티슬라프가 마이센 친척들의 지원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콘슈탄치어와의 사이에서 낳은 바츨라프 왕자의 계승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하기로 마음 먹었다. 1216년 6월 8일, 프라하에서 열린 왕실 의회에서, 오타카르 1세는 바츨라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와 보헤미아 귀족 대표자들이 왕의 선택을 받아들였고, 프리드리히 2세 역시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1216년 7월 26일 바츨라프가 보헤미아를 세습받는 것을 받아들였다.

1222년 8월 12일 동생이자 모라비아 변경백이었던 블라디슬라프 인드르지흐가 사망했다. 이후 오타카르 1세의 아들 블라디슬라프가 모라비아 변경백에 지명되었다. 그는 황실과의 유대를 강화시키기 위해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7세와 자신의 딸 아네슈카 체스카를 결혼시키려 했다. 두 사람간의 약혼이 성립되었고 막대한 지참금이 보헤미아에서 지급되었지만, 하인리히 7세는 보헤미아가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한 아버지의 지령에 따라 돌연 약혼을 깨고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의 딸 마르가레테와 결혼했다.

오타카르 1세는 레오폴드 6세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 거라 여기고 1226년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가 개입해 화해를 종용했고,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아네슈카는 평생 결혼하지 못하고 수녀가 되었고, 프린치스코회 수도원을 프라하에 세우고 빈민 구제 활동을 몸소 이끌었다. 1227년 모라비아 변경백을 맡던 아들 블라디슬라프가 사망하자, 오타카르 1세는 또다른 아들 프르셰미슬을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했다.

2.2.2. 바츨라프 1세

1230년 12월 15일 오타카르 1세가 사망한 뒤, 바츨라프 1세가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 오타카르 1세의 독일인 이주 수용 정책과 도시 건설 정책을 그대로 이어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라하 시가지가 확장되었고, 스트르지브로, 로케트, 자테크, 체브 시가 보헤미아에서 건설되었으며, 모라비아에서는 이흘라바, 올로모우츠, 브르노, 프르제로프가 건설 및 확장되었다.

1231년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 호전공(Friedrich II. der Streitbare 1211~1246)에 불만을 품은 카우링 가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구원을 요청하자, 그는 즉시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북쪽 지대를 철저하게 약탈한 뒤 귀환했다. 1233년 바츨라프 1세가 브르제크라브를 카란티아 공작 베르나르드 2세와 자신의 누이 유디타의 아들인 울리히 3세에게 넘기려 하자, 모라비아 변경백이자 바츨라프 1세의 형제인 프르셰미슬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해 7월, 프리드리히 2세는 바츨라프 1세와 프르셰미슬간의 갈등이 벌어진 틈을 그해 7월에 모라비아로 진격해 비토프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도중에 병이 나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야 했고, 바츨라프 1세는 그 사이에 모라비아로 진격해 브르노를 정복하고 프르셰미슬을 복종시켰다.

123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에게 대적하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의 직위를 박탈한다고 선포하고 바츨라프 1세에게 오스트리아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겼다. 바츨라프 1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로어 오스트리아 일대와 을 점령했다. 하지만 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국경 인근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가 명백히 확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대공과 화해하고 황제의 추가 공격 명령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 대공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조카 게르트루드를 바츨라프 1세의 장남 블라디슬라프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하고, 지참금으로 다뉴브 강 북쪽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보헤미아 왕국에 넘기기로 했다.

1237년, 바츨라프 1세는 모라비아 변경백 프르셰미슬과 또다시 갈등을 벌였다. 그는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모라비아로 진격했고, 프르셰미슬은 헝가리 뫙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와 바츨라프 1세와 프르셰미슬의 어머니인 콘슈탄치어가 중재하자, 양자는 화해하기로 했다. 이후 프르셰미슬의 통치는 올로모우츠와 오파바로 제한되었고, 바츨라프 1세의 장남 블라디슬라프가 모라비아 변경백에 선임되었다.

1241년, 몽골제국군폴란드 대공국을 침략했다. 그는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로부터 구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몽골제국군이 보헤미아까지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했다. 그러나 그는 레그니차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배치해두고 상황을 지켜봤고, 헨리크 2세는 몽골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사했다. 헨리크 2세가 참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보헤미아로 철수했다. 이후 몽골군 습격대가 글라드스코를 거쳐 보헤미아로 침입하려 했지만 바츨라프 1세가 산길에 배치해둔 군대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패퇴했다.

얼마 후 몽골군 분견대가 마이센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마이센을 향해 진군했지만 도중에 모라비아가 몽골군에게 약탈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라비아로 이동했고, 1241년 말 몽골군 분견대가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빈을 향해 진격하는 것을 저지했다. 그 후 몽골제국군은 유럽 원정을 중단하고 돌아갔고, 몽골군을 연이어 격퇴한 바츨라프 1세와 보헤미아 왕국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서 크게 상승했다.

1246년, 바츨라프 1세는 오스트리아 대공 프리드리히 2세가 조카 게르트루드를 자신의 장남 블라디슬라프와 결혼시키는 걸 좀처럼 진행시키지 않다가 게르트루드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제안한 것에 격분해 헝가리 국왕 벨러 4세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뒤 브르제크라브 공작 울리히 3세에게 오스트리아 침공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해 1월 26일, 울리히 3세는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국경 지대인 라 안 데르 타야에서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 하지만 바츨라프 1세가 대대적인 공세를 가할 것을 우려한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블라디슬라프와 게르트루드의 결혼이 성사되게 했다.

1246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으로 쳐들어갔다가 레이타 강 전투에서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블라디슬라프가 오스트리아 공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 다수의 귀족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승인을 받기도 전인 1247년에 급사했다. 이리하여 프르셰미슬 가문이 오스트리아 공국을 손에 넣을 기회는 날아갔다.

블라디슬라프가 사망한 후, 모라비아 변경백 직위는 바츨라프 1세의 차남인 오타카르 2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아버지의 통치에 불만을 품을 귀족들을 비밀리에 포섭한 끝에 1248년 7월 31일 자신을 "젊은 왕"이라고 칭하며 반기를 들었다. 보헤미아 대귀족이자 대법관인 크티보르 등 보헤미아 대귀족들이 오타카르 2세를 지지했고, 프라하는 순식간에 오타카르 2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바츨라프 1세는 자신을 추종하는 병사들을 끌어모은 뒤 프라하를 되찾으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보헤미아 북서쪽으로 후퇴한 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마 왕 콘라트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구원은 제때 오지 않았고, 오타카르 2세는 1248년 가을 아버지를 마이센으로 밀어내고 보헤미아 전역을 장악한 뒤 자신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칭했다.

이후 콘라트 4세와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의 지원을 받은 바츨라프 1세는 반격을 개시했다. 리즈므부르크체코의 보레스 2세가 이끄는 바츨라프군은 모스트 인근에서 오타카르군을 격파하고 프라하를 압박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보레스 2세와 협상해 자신이 "젊은 왕"이라는 칭호만 사용하고 보헤미아 왕국을 아버지와 양분하겠다고 제안했다. 보레스 2세는 이에 응하려 했지만, 아들의 반역에 잔뜩 분노한 바츨라프 1세는 이를 거부했다. 1249년, 바츨라프 1세는 본군을 이끌고 리토메르지체로 진군한 뒤 프라하를 향해 행진했다. 그해 8월 5일, 바츨라프 1세는 일부 주민이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프라하 시에 입성했다.

오타카르 2세는 프라하 성채로 피신했지만, 포위 공격에 시달린 끝에 젊은 왕이라는 칭호를 포기하고 성을 내주는 대신 모라비아 변경백으로 돌아가는 데 동의했다. 그해 9월, 바츨라프 1세는 오타카르 2세와 반란 당시 오타카르 2세를 지원했던 자들을 티르조프 성에 초대한 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모조리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오타카르 2세는 곧 사면을 받고 모라비아로 돌아갔지만, 반란의 주동자들은 감옥에 그대로 갇혀 있거나 처형되었다.

1251년, 바츨라프 1세는 바이에른을 직접 침공했다가 병에 걸리자 프라하로 돌아갔고, 전쟁 지휘권은 오타카르 2세에게 맡겨졌다. 그해 12월, 헝가리 왕국과 비이에른 공국의 침략에 시달리던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오타카르 2세를 공작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이에 헝가리 국왕 벨러 4세는 갈리치아-볼히니아 국왕 다니엘 로마노비치, 바이에른 공작 오토 2세,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5세, 오폴레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와 함께 반 보헤미아 연합을 결성했다. 1253년 여름, 연합군은 오파바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뒤이어 모라비아를 침공해 올로모우츠 인근에서 모라비아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에 바츨라프 1세와 오타카르 2세 부자가 각각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접근해오자, 연합군은 즉시 철수했다.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중재 하에 보헤미아 왕국-오스트리아 공국과 반 보헤미아 연합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던 1253년 9월 23일, 바츨라프 1세는 크랄루프 드부르의 별궁에서 급사했다. 당시 크라쿠프 주교 파벨의 도움을 받아 볼레스와프 5세가 보헤미아 포로들을 돌려주게 하고 오스트리아에서 피해 복구에 전념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던 오타카르 2세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헤미아로 이동해 한 달만에 도착했고 보헤미아 귀족들로부터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1254년 5월 3일 브라티슬라바에서 벨러 4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오타카르 2세는 슈타이어마르크 남부를 헝가리에 양도해야 했고, 벨러 4세는 오타카르 2세가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북부를 통치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2.2.3. 오타카르 2세

2.2.3.1. 내치
할아버지 오타카르 1세, 아버지 바츨라프 1세가 지속적으로 추진한 독일인 이주 및 도시 개발 정책은 오타카르 2세의 치세에 정점을 찍었다. 그의 치세 동안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등지에 야로메르, 타호프, 이흘라바, 브루크 안 데어 무어, 마르체그 등 30개가 넘는 도시들이 새로 건설되었고, 하인부르크, 클라드스코, 크렘제, 리토메르지체 등 여러 도시가 확장되거나 재건되었다. 오타카르 2세는 마그데부르크 법을 이 도시들에 그대로 적용해 상업 및 무역 특권을 누리도록 해줬으며, 독일인들을 자신의 영지 전역의 주요 도시에 정착시켰다. 또한 토지 소유 등기, 의회 결의문, 법원의 판결 및 일반ㄹ적인 규칙이 담긴 젬스케 데스키(Zemské desky)가 그의 치세에 작성되었는데, 이것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체코 법률이었다.

오타카르 2세는 보헤미아-모라비아 고원에 묻혀 있던 은을 채굴하기 위한 대규모 광산 사업을 벌였다. 이흘라바 시는 이 고원에서 채굴된 은의 품질을 관리하고 유럽 각지에 유통시키는 핵심 기지로서 번영을 구가했으며, 보헤미아-모라비아 고원에서의 채굴은 소위 이흘라바 광업법에 따라 수행되었다. 이에 따르면, 광맥을 발견한 사람이 토지 소유자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면 그것을 사용할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다. 오타카르 2세는 이흘라바 법의 원칙을 다른 지역에도 적용했다. 보헤미아 귀족인 스밀에 의해 건설된 스밀루브 브로드 시(오늘날 하블리치쿠프브로트)는 이흘라바 법이 적용된 대표적인 도시로서 은 채굴로 인해 번영했다.

이렇듯 광산업이 크게 성행하면서, 오타카르 2세는 막대한 재원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연간 은화 80,000 ~ 100,000흐리브냐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확보할 수 있었고, 말기에는 최대 110,000 ~ 120,000흐리브냐의 은화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에서는 53,000 흐리브냐, 슈타이어마르크에서는 14,000흐리브냐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막대한 자금을 토대로 호화스러운 궁정 생활을 누리며 군주로서의 권위를 드높였고, 군사력 강화에도 힘을 기울여 보헤미아 왕국의 위세를 최대한 드높이고자 하는 야망을 충족시키는 데 활용했다.

오타카르 2세는 유대인들의 탁월한 상업 역량에 주목하고, 그들을 보호해주면 수입을 더 늘릴 수 있다고 보고, 기독교도들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해주고자 노력했다. 1262년, 그는 32조항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규례(Statuta Judæorum)>를 반포했다. 그는 이 규례에서 유태인은 대부분의 경우 기독교도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하며, 기독교인과 동일한 관세를 지불하면서 자국을 언제든지 여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 대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도시의 주민들과 동일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며, 국왕에게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공물을 납부해야 했다. 유대인이 기독교인을 살해했다는 거짓 고발을 받고 자신을 성공적으로 변호했다면, 고발한 기독교인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유대인이 살해된 경우에는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직접 조사를 진행해야 했다. 또한 유대인을 폭행하거나 강간한 기독교인은 손을 절단당하며, 유대인 어린이를 납치하는 자는 강도로 취급되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었다.

오타카르 2세는 통치 초기에는 군주가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관행을 이어갔지만,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그리고 케른텐 등지를 손에 넣으면서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확보한 뒤에는 귀족들의 영지 확장을 제한하고 분할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귀족들의 영지에 왕실 성과 도시를 건설하거나 재개발했으며, 영주 가족의 임시 행정에 맡긴 성을 왕실 소유권으로 되돌리고자 했다. 이에 귀족들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자, 그는 이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헝가리, 바이에른 등 외세와의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갈수록 귀족들을 제어하는 데 애를 먹었고, 결국 통치 말기에 귀족들의 잇따른 배신으로 그동안 쌓았던 모든 업적이 허물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2.2.3.2. 대외 활동
1254년, 오타카르 2세는 올로모우츠 주교 브루노가 조직한 프로이센 십자군에 보헤미아, 모라미아, 오스트리아의 영주들과 함께 참여했다. 원정대의 목표는 이교도인 프로이센인들을 복종시키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원정을 통해 교황청의 신임을 얻어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1255년 1월 중순, 십자군은 엘블롱에서 튜튼 기사단의 기사단장 포포 폰 오스테르나와 합류한 뒤 프로이센인들이 지배하고 있던 메데나우를 기습해 공략했고, 뒤이어 루다바 성을 공격해 많은 프로이센군을 사살하고 성을 함락시켰다. 프로이센인들은 패배 후 항복을 선언하고 브루노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그는 튜튼 기사단이 프레골라 강변에 성채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튜튼 기사단은 그를 기리기 위해 "왕의 산"이라는 의미로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이름을 붙였고, 훗날 자신들의 본거지로 삼았다.

밤베르크 주교구의 기록에 따르면, 오타카르 2세는 1255년 봄 플랑드르 백작부인 마가렛 2세로부터 로마 왕 선거에 출마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가 이 시기에 대공위시대의 혼란상에 휘말린 독일의 군주로 자리잡을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게 자신이 독일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다며, 통치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빌럼 2세를 사임시키고 자신이 로마 왕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4세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비텔스바흐 가문이 빌럼 2세를 지지하면서 독일이 다소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던 1256년 1월 28일, 빌럼 2세는 후그우드에서 프리슬란트인과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를 면치 못하고 홀로 얼어붙은 호수를 말을 타고 건너려 했다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호수에 빠진 뒤 추격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로마 왕은 공석이 되었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3세가 로마 왕 후보로 나섰다. 여기에 전임 군주 콘라트 4세의 어린 아들인 콘라딘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타카르 2세는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1258년 1월 13일 쾰른의 콘라트 대주교, 팔츠 변경백 루트비히, 마인츠 대주교 게른하르트와 함께 콘월의 리처드를 로마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그해 4월 1일, 알폰소 10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3세,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1세, 트리어 대주교 아르눌트가 알폰소 10세를 로마 왕으로 추대했다. 이때 그는 슈타이어마르크 주교이자 자신의 대리인인 인드르지흐를 통해 알폰소 10세의 집권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리처드 세력과 알폰소 10세 세력이 서로 충돌하는 동안 중립을 고수하면서 이득을 마음껏 챙겼다.

1256년 4월, 오타카르 2세는 파사우의 오토 주교, 르제슈프의 알베르트 주교와 함께 빈에서 반 비텔스바흐 연합을 결성했다. 1년 후인 1257년 8월, 그는 어퍼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가 라인란트로 간 틈을 타 오스트리아-보헤미아 연합군을 이끌고 바이에른을 전격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바이에른을 철저하게 약탈하면서 란츠후트까지 침투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가 서둘러 돌아오자, 오타카르 2세는 잘츠부르크 지역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뮐도르프 인근에서 추격군에 따라잡혀 크게 패했고, 많은 병사들이 인 강을 건너 달아나려다가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강에 빠져 익사했다. 또다른 군인 400명은 어느 탑에 피신했다가 적병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몰살당했다.오타카르 2세는 잔여 병력을 겨우 수습해 묄도르프 성채로 피신한 뒤 며칠 동안 바이에른군에 포위되었다. 다행히 공성 준비가 덜 되었던 바이에른군이 공성전을 중단하고 물러난 덕분에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 후 양측이 캄 시에서 평화 협상을 이어간 끝에 1257년 11월 보헤미아 측이 국경지대의 요새 몇 곳을 내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1258년, 오스트리아 공국 제머링 계곡 남쪽 영토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헝가리 왕자 이슈트반을 축출한 뒤 오타카르 2세에게 귀순했다. 이슈트반은 즉각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했고, 1259년 봄 반란군을 도운 케른텐 공국의 공작 울리히 3세를 보복하고자 케른텐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하지만 슈타이어마르크 영주들은 이슈트반 왕자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감을 품고, 오타카르 2세의 후원에 힘입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페타우 일대를 제외한 슈타이어마르크 전역이 오타카르 2세의 편에 섰다. 이에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국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다.

헝가리 왕국은 쿠만, 키예프 루스, 폴란드 왕국,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2제국,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보헤미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변경백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다. 1260년 6월 25일, 이슈트반은 모라바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군 400여 명을 사살했다. 이에 사기가 떨어진 오스트리아 귀족들이 철수를 건의했지만, 오타카르 2세는 받아들이지 않고 모라바 강둑을 따라 이동해 크레센부룬에서 강을 사이에 둔 채 헝가리군과 대치했다.

이후 양자간 논의 끝에, 헝가리군이 7월 12일에 강을 건넌 뒤 다음날 정오에 전투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이후의 전개에 대해 양측의 기록이 엇갈린다. 보헤미아 측 기록에 따르면, 이슈트반은 이 협의를 무시하고 강을 건너자마자 오타카르 2세의 군대를 향해 돌격했다고 한다. 반면 헝가리 측 기록에 따르면, 오타카르 2세는 합의를 준수하지 않고 이슈트반의 군대가 강을 건너자마자 공격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보헤미아군이 상대를 압도한 것만은 분명하다. 헝가리 경기병들은 보헤미아 중기병들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뒤이어 보헤미아 보병대가 헝가리 보병대를 몰아붙이자, 헝가리 장병들은 혼란에 빠진 나머지 도주하다가 많은 이가 강에 빠져 익사했다. 보헤미아군은 다음날까지 패주하는 적을 추격해 10,000명 가량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크레센브룬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뒤, 오타카르 2세는 브라티슬라바로 진군해 그곳에 도망친 벨러 4세와 이슈트반 왕자를 압박했다. 결국 벨러 4세는 평화 협상을 하자고 요청했고, 오타카르 2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벨러 4세는 슈타이어마르크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 벨러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타 3세의 딸이자 오타카르 2세의 조카인 쿠니쿤다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해 12월, 오타카르 2세는 슈타이어마르크를 방문해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261년 3월 말 빈에서 정식으로 평화 협상이 맺어지면서, 그는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에 정식으로 복위했다.

1261년 10월 18일, 오타카르 2세는 프라하로 돌아간 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이를 낳을 가망이 없는 마르가레트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오스트리아로 보냈다. 이후 그해 10월 25일에 브라티슬라바에서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손녀이자 갈리시아 공작 로스티슬라프의 딸인 쿠니군다와의 결혼을 거행했다. 이 조치는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승인 없이 이뤄졌다. 교황청은 절차를 문제삼으며 한동안 승인하지 않았지만, 갈수록 강력해지는 보헤미아 왕국과 적대하는 건 곤란하다는 걸 인식하고 1262년 4월 20일에 승인했다. 오타카르 2세는 쿠니군다와의 결혼식을 거행한 뒤 그때까지 미뤘던 보헤미아 국왕 대관식을 성 비타 대성당에서 거행했다. 이 대관식에는 프라하 주교, 올로모우츠 주교, 파사우 주교, 프로이센 주교, 마인츠 대주교도 참석했고, 아내 쿠니군다도 보헤미아 왕비로서 참여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폰 에프슈타인(Werner von Eppstein 1225~1284)에게 보헤미아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고 여행과 관련된 모은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해 호의를 얻어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은 여전히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로마 왕을 자처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콘월의 리처드는 자국 문제에 전념하느라 독일에 들리지 못했고, 제후들은 황제가 국내에 없는 틈을 타 세력 다툼을 벌였다. 오타카르 2세는 이러한 상황을 관망하다가 1262년 여름 리처드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리처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 해 8월 9일 그에게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오스트리아 및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영지를 수여하겠다는 문서를 발행했다. 그가 갑자기 리처드를 지지하기로 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가 콘라트 4세의 아들이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마지막으로 남은 계승자인 콘라딘을 로마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의 상속녀인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가 아들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보헤미아에서 바이에른으로 망명한 뒤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264년 10월 5일, 헝가리 왕자 벨러와 오타카르 2세의 조카 쿠니군다의 결혼식이 브라티슬라바에서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게 된 오타카르 2세는 1266년 5월 어머니의 지참금을 회수하겠다는 명목으로 체브스코를 점령하고 그곳 주민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이후 체브스코와 인근 로케츠크의 행정권을 보헤미아 슬리브노 가문의 야노스에게 맡겼다. 이후 보헤미아군과 바이에른군이 국경지대에서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1266년 7월, 오타카르 2세는 도마즐리체에서 바이에른 공작으로부터 독립하기를 갈망한 르제츠 시민 대표와 협상한 끝에 동맹을 맺었다.

1266년 8월, 오타카르 2세는 "정당한 로마 왕 리처드를 받들지 않는 바이에른 공작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두번째로 바이에른을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레겐슈타우프, 니테나우 등 여러 성을 공략했고, 그와 동맹을 맺은 올로모우츠 주교와 슈타이어마르크 총독 브루노가 이끄는 슈타이어마르크-케른텐 부대는 동쪽에서 바이에른을 침공했다. 오타카르 2세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레겐스부르크 공략에 성공했지만 식량 부족으로 인해 체브스크로 후퇴했고, 브루노 역시 로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8세의 역습을 받고 후퇴했다. 그해 11월 하인리히 8세가 파사우를 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1267년 보헤미아군이 바이에른을 재차 침공해 리트를 공략했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1267년 9월, 오타카르 2세는 프로이센에서 발발한 대규모 이교도 반란에 시달리고 있던 튜튼 기사단과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첼름스크, 삼비아, 바르미아, 나탄지아에서 기사단의 권리를 인정했고, 기사단은 오타카르 2세가 갈린디아, 자트베시스크,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고 갈린디아, 자트베시스크, 리투아니아에 설치될 주교구를 올로모우츠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렇게 준비를 갖춘 오타카르 2세는 1267년 11월에 프로이센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크라쿠프 연대기에 따르면, 보헤미아군은 폴란드를 지나가면서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스툴라 강 여울목의 얼음이 갑자기 녹으면서 진군이 중단된 데다 교황청이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시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268년 10월 29일, 시칠리아 왕국을 탈환하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로 진군했던 콘라딘이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에게 참패하여 생포된 뒤 나폴리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교황청은 오타카르 2세의 첫째 딸 쿤후타와 카를루 1세의 아들의 결혼을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쿤후타가 이미 튀링겐 변경백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인 마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와 약혼했다며 거절했다. 그 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콘월의 리처드 모두 독일에 별다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마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를 로마 왕이자 시칠리아 국왕으로 내세우기로 했다. 마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예비 장인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시칠리아 국왕이란 칭호를 썼고, 이탈리아 내 기벨린파 역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교황청과 카를루 1세가 단호히 거부했고, 오타카르 2세가 프리드리히 1세를 옹립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내려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 무렵, 오타카르 2세는 슈타이어마르크 귀족들이 자신에게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실레시아의 트제브니차에서 슈타이어마르크 귀족들을 소환한 뒤 체포해 반역죄로 고발하고, 성채를 개방하거나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귀족들이 응할 때까지 계속 가둬두다가 1269년 3월 17일 귀족들이 지시에 따르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자 풀어줬다. 그는 슈타이어마르크 총독 브루노에게 이를 이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브루노는 얼마 후 총독 직위를 사임하고 그곳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이후 하소브의 오스트리아 판사 오토와 리히텐슈타인 출신의 하인리히가 슈타이어마르크 총독에 선임되어 그곳을 안정시켰다.

1268년 12월 초, 케른텐 공작 울리히 3세는 자신이 사망하기 전에 상속인을 얻지 못할 경우 오타카르 2세에게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1269년 6월, 오타카르 2세는 즈노이모에서 바이에른 주교들을 초대해 그들의 호의를 사고자 노력했다. 그 해 9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그레고리오가 사망하자, 그는 즉시 프리올리를 점령한 뒤 아퀼레이아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이후 아퀼레이아 대주교구는 오타카르 2세와 울리히 3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울리히 3세의 동생이자 전 잘츠부르크 대주교였던 필리프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1269년 10월 27일 울리히 3세가 사망하자, 오타카르 2세는 울리히 3세의 유언장에 따라 케른텐 공국을 점거하고 케른텐 공작을 자처했다. 이에 필리프는 자신이 고인의 동생이었으니 마땅히 자신이 케른텐 공작이 되어야 한다며 반발했고, 헝가리 왕자 이슈트반에게 서신을 보내 보헤미아 국왕의 전횡에 맞서 싸우자고 제의했다. 오타카르 2세는 이에 대응해 1270년 2월 초 프리지아 주교와 브릭센 주교로부터 케른텐과 크라인 주교구의 재산을 자신의 관할하에 들어가는 것을 인정하게 했다. 이후 케른텐 총독으로 사촌인 헌부르크의 올드르지흐를 세웠다가 곧 해임하고 사위인 드른홀레츠의 올드르지흐를 총독으로 선임했다.

1270년 5월 3일, 헝가리 국왕 벨러 4세가 사망했다. 이후 이슈트반 왕자가 이슈트반 5세로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전, 벨러 4세는 아들 이슈트반이 가족들을 해칠 것을 우려해, 오타카르 2세에게 아내 마리아와 딸 언너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서신을 보냈다. 벨러 4세의 딸이며 이슈트반 왕자와 심한 갈등을 벌였던 언너는 아버지가 죽고 이슈트반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버지의 심복들과 함께 보헤미아로 도주했다. 이때 그들은 헝가리 서쪽 국경 지대의 여러 요새를 오타카르 2세에게 넘겨줬다. 이슈트반 5세는 중신들이 떠난 자리에 심복들을 앉힌 뒤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270년 8월 말에 볼레스와프 5세와 동맹을 맺었고, 포조니 인근의 도나우 강 유역의 한 섬에서 오타카르 2세를 만나 땅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오타카르 2세는 벨러 4세의 서신을 제시하면서 자신은 고인의 뜻에 따랐을 뿐이라고 답했다. 결국 양자는 2년간의 휴전 협정만 맺었을 뿐 별다른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270년 말, 오타카르 2세는 케른텐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군해 필리프를 지지하던 류블랴나 시를 점령했다. 이에 필리프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를 케른텐 공작으로 인정하고, 아퀼레이아 대주교 직위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 사이, 이슈트반 5세는 휴전 협정을 무시하고 습격대를 오스트리아에 파견해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1271년 4월 도나우 강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데베니, 포조니, 너지솜버트를 포함한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5월 15일 모숀머저로바르 전투에서 이슈트반 5세의 헝가리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병력을 수습한 이슈트반 5세가 반격을 가했고, 5월 21일 라이카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이후 그는 소수의 추종자만을 이끌고 달아나는 오타카르 2세를 맹추격해 까지 이르렀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슈트반 5세는 오타카르 2세의 적들을 돕지 않기로 했고, 오타카르 2세는 언너와 추종자들이 넘겨줬던 요새들을 헝가리에 돌려주기로 했다.

이 무렵, 아퀼레이아 대주교를 맡고 있던 필리프가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그에게 반감을 품은 아퀼레이아 사제들과 시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이에 케른텐 총독인 드른홀레츠의 올드르지흐는 1272년 5월 프리올리를 장악한 뒤 교황청이 아퀼레리아 대주교를 선임할 때까지 오타카르 2세를 임시 대주교로 옹립했다. 필리프는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오타카르 2세로부터 케른텐 및 오스트리아 영지의 관리자 직함을 받았다. 이로서 오타카르 2세는 보헤미아 국왕,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공작에 이어 아퀼레이아 일대까지 통제하면서 유럽 전역에 위세를 떨쳤다.

1272년 8월, 이슈트반 5세가 10살된 아들 라슬로를 납치해 코프리브니차 성에 연금한 크로아티아 영주 요아킴 펙타르를 응징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급사했다. 이후 라슬로의 어머니 에르제베트가 라슬로를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데려온 요아킴과 서둘러 협상한 뒤 라슬로 4세로서 헝가리 국왕에 올렸다. 그러나 이슈트반 5세의 측근들은 엘리자베트 왕비가 어린 아들을 왕으로 올리기 위해 요아킴과 짜고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했다. 이슈트반 5세의 재무관 에기디우스 모노즐로는 여러 인사를 포섭한 뒤, 우선 라슬로를 빼돌린 후 왕비의 숙소를 공격했다. 하지만 요아킴의 지지자들이 이들의 공격을 격퇴했고, 모노즐로는 포조니로 후퇴한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은 후 오타카르 2세에게 투항했다. 오타카르 2세는 모노즐로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막대한 선물을 제공했다.

이에 헝가리의 실권자인 쾨세그 공작 헨리크는 오타카르 2세가 헝가리 왕국을 분열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여기고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1272년 11월, 귀족들이 퀼락 섬에서 향락을 즐기고 있을 때 헨리크가 마초 공작 로스티슬라프와 이슈트반 5세의 누이 언너의 아들인 벨러를 반역 혐의로 고발했다. 벨러가 이에 격하게 항변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헨리크가 검을 뽑아 벨러를 찔러 죽였다. 이후 헨리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왕실로부터 사면을 받고 슬라보니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벨러는 오타카르 2세의 처남이기도 했기에, 오타카르 2세는 이를 구실로 삼고 지난날 이슈트반 5세에게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1273년 4월, 오스트리아 공국과 모라비아 군대가 헝가리를 전격 침공했다. 그들은 죄르솜버트헤이를 공략하고 헝가리 서부 일대를 약탈했다. 요아킴이 두 달 후에 두 요새를 탈환했지만, 얼마 후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가 헝가리를 침공하여 죄르와 쇼프론을 포함한 많은 요새를 공략했다. 헝가리 왕국에 귀속되어 있던 쿠만족이 이에 대응해 모라비아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오타카르 2세의 사위이자 케른텐 총독인 드른홀레츠의 올드르지흐가 헨리크를 추종하는 무장병들의 습격으로 암살당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오타카르 2세가 이끄는 보헤미아군이 헝가리를 압도했다. 오타카르 2세는 쇼프론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원정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그곳을 포위해 몇 달간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가 헝가리 원정에 전념하는 사이, 성공을 구가하던 그의 운명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2.2.3.3. 몰락
1272년 4월 콘월의 리처드가 사망한 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독일 제후들에게 모두의 인정을 받을 만한 로마 왕을 세우라는 압력을 가했다. 당시엔 알폰소 10세가 여전히 로마 왕을 자처하고 있었지만 독일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고 교황청 역시 그를 무시했다. 또다른 후보인 팔츠 변경백 루트비히 역시 교황청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시칠리아 국왕이자 앙주 공작 카를루 1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를 로마 왕 후보로 제시했지만 프랑스 왕국의 통치를 받고 싶지 않았던 독일 제후들로부터 경원시되었다.

오타카르 2세 역시 로마 왕 후보로 종종 거론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국왕으로서 국왕 선거에 투표를 행사할 권리가 있었고, 브란덴부르크와 작센 선제후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254년 콘라트 4세가 사망한 이래 20년 가까이 이어진 대공위시대의 혼란에 지칠 대로 지친 독일의 많은 영주들도 강력한 군사력과 부를 갖춘 그라면 혼란을 잠재우고 제국을 재건할 수 있을 거라 희망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1271년 쾰른 대주교가 프라하를 방문하여 오타카르 2세에게 로마 왕이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오타카르 2세가 거부했다고 한다. 대다수 역사가들은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하지만, 오타카르 2세가 로마 왕으로서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로마 왕이 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고, 헝가리와의 전쟁에 전념하느라 독일의 동향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로부터 "선제후들이 로마 왕을 선출하지 않는다면 내가 추기경들과 함께 로마 왕을 직접 세우겠다"는 통보를 받은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폰 에프슈타인은 1273년 9월 라인궁정백 겸 오버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와 함께 선제후들을 불러모으고 논의한 끝에 안할트의 지그프리트 1세와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4세를 후보자로 삼기로 했다. 9월 11일, 호엔촐레른 가문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9]의 주도로 선제후들은 보파르트에서 지그프리트 1세를 배제하고 루돌프 4세를 로마 왕으로 세우는 것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9월 29일, 7명의 선제후 중 오타카르 2세를 제외한 6명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최종 회의를 가졌고, 10월 1일 루돌프 4세가 로마 왕 루돌프 1세로 선포된 뒤 10월 24일 아헨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쇼프론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오타카르 2세는 새 로마 왕이 그토록 신속하게 정해졌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전쟁을 중단하고 프라하로 귀환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선거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레고리오 10세에게 루돌프 1세가 로마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보헤미아 왕실의 공증인이자 연대기 작가인 이세르니아의 인드르지흐에 따르면, 그가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래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맹인 선거인들은 빈곤의 무게에 짓눌린 무일푼 백작을 로마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로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3세 역시 루돌프의 1세의 집권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두 사람은 1274년 3월 중순 도마즐레치에서 만나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교황청과 대다수의 독일 제후들은 루돌프 1세의 선출이 독일의 혼란을 종식시켜줄 거라고 믿고 오타카르 2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돌프 1세는 교황청의 호감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해방을 위한 십자군을 벌이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 대공위시대 동안 소외된 땅에 대한 제국의 지배권을 재확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타카르 2세에게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체브스코, 케른텐, 크라인을 제국에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그 땅들은 본래 원주인이 있었는데 오타카르 2세가 무력으로 빼앗았으니 마땅히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타카르 2세는 이에 대해 본인은 콘월의 리처드에게 그 땅들을 봉토로 수여받았다고 반박했지만, 루돌프 1세는 이를 묵살하고 오타카르 2세를 "독일 땅을 정복하고 폭정을 자행한 오만한 슬라브인"이라고 비방하는 선전물을 제국 각지에 퍼트렸다.

오타카르 2세와 루돌프 1세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지자, 이로 인해 독일이 또다시 내란에 휘말릴 것을 우려한 그레고리오 10세는 올로모우츠 주교인 샤우엔부르크의 브루노와 세카우 주교인 마르츠바추의 배른하르트를 통해 오타카르 2세에게 루돌프 1세를 로마 왕으로 인정해준다면 루돌프 1세가 그의 영토를 건드리지 않도록 중재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는 1274년 7월 12일 교황청에 답신을 보내 십자군 전쟁을 마친 후에야 중재 판결에 따르겠다며 사실상 거부했다. 이후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 9월 26일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루돌프 1세가 로마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루돌프 1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프리드리히, 티롤-고리스키 백작 멘하르트와 알베르 등 오타카르 2세와 자주 다투었던 인사들을 반 보헤미아 연합에 끌어들였다. 1274년 아퀼레이아 대주교에 선임된 레이몬도 델라 토레 역시 아퀼레이아를 장악하고 대주교 직위를 1년간 임시로 맡기까지 한 오타카르 2세를 적대시해 루돌프 1세의 편에 섰다. 1274년 11월, 루돌프 1세는 뉘른베르크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다. 오타카르 2세가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참석하지 않고 대표를 보내지도 않자, 루돌프 1세는 그가 의무적인 공물을 지불하지 않았고 자기 땅을 봉토로 수여받는 의식도 하지 않았기에 불순종하다고 비난했다. 이후 1275년 초에 열린 뷔르츠부르크 의회에 반드시 참석해서 자신을 변호하라고 통보했지만, 오타카르 2세는 이번에도 불응했다.

1275년 2월 초, 루돌프 1세는 케른텐과 크라인의 영주들에게 오타카르 2세에게 복종하지 말라고 촉구했고, 지난날 오타카르 2세에 의해 케른텐과 크라인의 계승권을 잃어버린 필리프를 그 곳의 영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오타카르 2세는 이에 대응해 데디체의 밀로타를 슈타이어마르크 총독으로 선임했고, 알프스 지역에서 벌어진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1275년 3월 9일, 오타카르 2세는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루돌프 1세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 비난을 퍼붓고 자신이 4년 이내에 예루살렘으로 십자군 수행을 하러 가겠으니 루돌프 1세가 자신의 영지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5년 5월 초에 로마 왕에게 복종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1275년 5월 초, 오타카르 2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세카우 주교 마르바추의 베른하르트를 사절로 파견했다. 베른하르트는 오타카르 2세의 지령에 따라 루돌프 1세의 황제 선출은 무효이며 새 독일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돌프 1세는 이에 격노해 오타카르 2세가 영지 공물을 미납했으므로 모든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선포했다. 6월 24일, 루돌프 1세는 제국추방령을 선포하고 그를 제국의 적으로 낙인찍었으며, 신민들에게 오타카르 2세에게 불복종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에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폰 에프슈타인은 오타카르 2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1276년 6월, 루돌프 1세는 뉘른베르크에 오타카르 2세를 정벌하기 위해 제국군을 소집시켰다. 오타카르 2세는 이에 대응해 빈을 요새화하고 귀족과 시장들에게 자식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때까지 오타카르 2세와 동맹을 유지하고 있던 로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3세는 보헤미아 왕국에 대항하는 원정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어퍼 오스트리아 영지를 주겠다는 루돌프 1세의 제안에 혹해 동맹을 파기하고 황제를 돕기로 했다. 1276년 8월, 티롤-고리치아 백작 마인하르트와 알브레히트가 남쪽에서 오타카르 2세의 영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아퀼레이아 대주교의 지원을 받으며 케른텐과 크라인을 공격해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드른홀레츠의 올드르지흐를 격파하고 케른텐과 크라인의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슈타이어마르크를 침공해 디데체의 밀로타의 저항을 물리치고 유덴부르크를 공략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마르바추의 베른하르트를 포함한 오타카르 2세의 지지자들이 점차 루돌프 1세 편으로 돌아섰다.

1276년 10월 초, 루돌프 1세의 군대가 바이에른-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어퍼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린츠를 점령했다. 뒤이어 엔체, 이브스, 툴른안데어도나우 등지가 루돌프 1세에게 복종했고, 일전에 오타카르 2세에게 진압당했던 알프스 주민들이 다시 반기를 들어 오타카르 2세로부터 독립했다. 올로모우츠 주교인 샤우엔부르크의 브루노가 이끄는 기병대가 후방에 있던 클로스터노이부르크를 공략해 루돌프 1세가 빈으로 진군하는 걸 한동안 미루게 했지만, 10월 16일 라인 궁정백 겸 오버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가 이 성을 탈환하면서 루돌프 1세가 빈으로 진군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 18일, 루돌프 1세는 빈 인근에서 티롤 백작 마인하르트 및 알베르와 합세한 뒤 여전히 오타카르 2세를 추종하는 빈을 포위했다.

한편, 오타카르 2세는 여전히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귀족들의 사병들을 끌어모으고 데디체의 밀로타와 합세한 뒤 다뉴브 강변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보헤미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루돌프 1세에게 평화 협상을 맺자고 제안했다. 1276년 11월 21일, 두 사람 사이에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오타카르 2세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제외한 모든 영지를 포기하고 루돌프 1세를 로마 왕으로 인정하고, 루돌프 1세는 그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다스릴 권리를 인정하고 제국 추방령을 해제하며, 오타카르 2세의 아들 바츨라프 2세와 루돌프 1세의 딸 중 한 명의 약혼을 거행하기로 했다.

굴욕적인 평화 협약을 맺고 보헤미아로 돌아온 오타카르 2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보복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는 반란의 주모자인 팔켄슈타인의 자비슈가 소유한 주요 도시인 유인드르지후프 흐라데츠와 크룸코프를 순식간에 공략했고, 자비슈는 독일로 피신한 뒤 루돌프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277년 5월 6일, 루돌프 1세는 오타카르 2세에게 오스트리아에 아직 남아있는 그가 소유한 성과 마을들을 자신에게 넘기며, 최근에 그가 자비슈로부터 빼앗은 모든 재산을 자비슈가 속한 비트코프 가문에게 돌려주라는 내용의 보충 협약을 제시했다. 이후에도 비트코프 가문은 보헤미아 국왕에게 계속 저항했고, 오타카르 2세는 루돌프 1세에게 저들이 왕의 영지를 약탈하고 불지르고 있으니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1277년 9월, 루돌프 1세의 장남 알브레히트가 프라하를 방문해 오타카르 2세 및 비트코프 가문과의 협상을 중재했고, 9월 12일에 최종 협약이 맺어졌다. 이에 따르면, 오타카르 2세는 로마 왕의 명령에 따라 군사적 지원을 하거나 직접 이끌고 전장에 참전해야 했다. 또한 비트코프 가문을 사면하되, 그들이 계속 저항한다면 응징할 권리가 주어졌다. 한편, 로마 왕은 "모든 해충과 적"으로부터 보헤미아 왕국을 보호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이렇게 합의가 맺어졌지만, 오타카르 2세와 루돌프 1세간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본래 루돌프 1세의 아들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쿤후타는 프라하의 성 아네슈카 수도원에 들어갔고, 루돌프 1세는 보헤미아에서 오타카르 2세를 상대로 저항을 이어가는 비트코프 가문에 동조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반란 진압에 전력을 기울인 끝에 1278년 초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섬멸한 뒤 반란군 지도자 보레슈를 체포해 유죄 판결을 내린 뒤 즉결 처형했다. 여기에 자비슈와 로슈므베르크의 인드르지흐 1세 등은 보헤미아에서 추방되었다.

보헤미아 반란을 수습한 뒤, 오타카르 2세는 복수전을 준비했다. 그는 먼저 어퍼 오스트리아를 주겠다던 약속을 좀처럼 이행해주지 않는 것에 실망한 로어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3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여기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와 알브레히트 3세, 요한 2세 형제,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와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도 갈수록 강대해지고 점점 고압적으로 나오는 루돌프 1세를 경계해 그의 편에 섰다. 1278년 6월 말, 오타카르 2세는 오스트리아로 진군해 오스트리아-모라비아 국경을 따라 여러 도시와 성채를 공략했다. 드로젠도르프는 2주만에 공략되었고, 라바 성도 2주간 저항한 끝에 항복했다. 한편, 루돌프 1세는 티롤의 멘하르트 백작, 잘츠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대주교, 뉘른베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와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빈에서 대기했다.

이윽고 지원군과 합세한 루돌프 1세는 에덴슈파이켄 마을 앞에 숙영지를 세웠다. 8월 20일, 오타카르 2세가 루돌프 진영에서 5km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대치했다. 8월 26일, 양자는 모리비아 평원, 일명 마르히펠트에서 격돌했다. 오나카르 2세는 첫번째 대열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출신의 중기병대를 배치했고, 두번째 전선엔 튀링겐, 마이센, 브란덴부르크, 바이에른에서 파견된 부대를 배치했으며, 세번째 대열에 폴란드와 실레시아에서 파견된 경기병대를 배치했다. 첫번째 대열은 전 슈타이어마르크 충독 데디체의 밀로타가 맡았고, 2번째 대열은 오타카르 2세가 지휘했다. 각 대열은 약 2,000명의 군인을 구성되었다. 한편, 루돌프 1세가 편성한 첫번째 대열에는 2,000명의 헝가리 경보병대가 배치되었고, 활과 화살로 무장한 쿠만군 500명이 그들과 함께 했다. 두번째 대열에는 1,150명 이상의 오스트리아군이 배치되었고, 세번째 대열에는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슈바벤, 알자스, 스위스 및 뉘른베르크 출신의 전사들이 배치되었다. 루돌프 1세는 세번째 대열을 직접 지휘했고, 50~60명의 기병과 300명의 맨앳암즈를 예비대로 배치해 적군이 아군의 측면을 돌파하거나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출몰하는 등의 비상 상황에 대비하도록 했다.

이윽고 쿠만인들이 화살을 쏘며 도발하자 데디체의 밀로타 휘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중기병대가 돌격하면서 전투의 막이 올랐다. 중기병대는 처음에는 기세좋게 전진했지만 쿠만인과 헝가리인들의 화살 세례에 말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지거나 달아나면서 점점 기세가 줄어들더니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흩어졌다.[10] 이후 오타카르 2세의 2번째 대열이 전진하자 헝가리, 쿠만 경보병대는 후방으로 물러섰고, 루돌프 1세의 두번째 대열이 응전했다. 오타카르 2세의 부대는 상대에 비해 잘 훈련되었고 전투 경험이 풍부했으며 무장 수준도 뛰어났기 때문에 적군을 점차 압도했다.

이에 루돌프 1세는 3번째 대열을 투입시켜 아군을 돕게 했고, 보헤미아군은 다시 뒤로 천천히 밀려났다. 하지만 후방에 있던 폴란드와 실레시아 경기병대를 투입시킨다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타카르 2세가 최전선에서 정신없이 싸우느라 후방에 있던 경기병대를 투입시킬 생각을 못했던 반면, 최후방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루돌프 1세는 사전에 빼두었던 예비대에게 적군의 측면을 요격하게 했다.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공격받은 보헤미아군은 혼란에 휩싸여 도망쳤고, 후방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폴란드, 실레시아 경기병대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도주했다. 오타카르 2세는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과 함께 끝까지 항전하다가 결국 전사했다.

2.2.4. 바츨라프 2세

오타카르 2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내 쿠니군다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오토 5세는 루돌프 1세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였다. 루돌프 1세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모라비아의 즈노이모, 올로모우츠, 브르노, 흘루브치체, 이흘라바 등 여러 도시에 들러 충성을 서약받았다. 뒤이어 프라하에 도착한 오토 5세는 쿠니군다의 동맹자로 행동하지 않고 프라하 성을 강제로 점거한 뒤 부르주아지 및 귀족들과 연대해 이곳을 사유지로 삼으려 했다. 이에 경악한 쿠니군다는 브로츠와프 공작이며 어린 시절 오타카르 2세의 궁정에서 길려졌고 오타카르 2세의 원정을 도왔던 헨리크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헨리크 4세는 이에 응해 카슬라프로 진군해 동부의 보헤미아 귀족 일부의 지지를 받아냈다.

루돌프 1세는 이에 대응하고자 제국 내 동맹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뒤 보헤미아-모라비아 국경을 넘어 차슬라프스크로 진군했다. 쿠니군다는 루돌프 1세에게 자녀들과 함께 그의 보호를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하면서도, 브로츠와프 공작이 어린 바츨라프의 수호자로 인정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오토 5세는 보헤미아의 동맹자들과 함께 콜린으로 이동해 루돌프가 프라하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이후 전쟁이 곧 벌어지는 듯 했지만, 양자가 합의를 맺으면서 무산되었다. 바츨라프 및 보헤미아 정부에 대한 후견권은 오토 5세에게 5년간 부여되었고, 루돌프 1세 역시 같은 기간 동안 후견권을 맡았으며, 헨리크 4세는 루돌프 1세로부터 크워츠크와 크로스노오잔스키에 대한 지배권을 인계받았다. 그리고 쿠니군다는 오파바 지역의 수입을 받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바츨라프 2세는 5년 후 단독으로 보헤미아 왕국을 통치할 예정이었다.

1278년 겨울, 바츨라프 2세는 루돌프 1세의 딸 유타와 약혼했다. 1279년 2월 초 프라하로 돌아온 후 베즈데즈로 옮겨졌다. 이후 쿠니군다는 아들 바츨라프를 브란덴부르크 공작 오토 5세에게 맡기고, 본인은 데디체의 밀로타(Milota z Dědice), 크라바르제의 볼크 1세(Vok I. z Kravař), 풀스테인의 허버트와 함께 남은 영지의 통치를 이끌었다. 1280년, 쿠니군다는 팔케슈타인의 자비쉬(Záviš z Falkenštejna)를 애인으로 삼고, 흐라데츠 나드 모라비치의 성관백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마치펠트 전투 당시 헝가리군에 사로잡혔던 미쿨라시 오파브스키가 돌아와서 오파바를 접수하면서, 그녀와 자비쉬는 오파바를 떠나야 했다. 1282년경, 쿠니군다는 자비쉬의 사생아인 예셰크를 낳았다.

한편, 바츨라프는 1279년 말 베즈데즈에서 지타바로 이송되었고, 나중에는 베를린을 거쳐 슈판다바로 옮겨졌다. <즈브라슬라프 연대기(Zbraslav Chronicle)>에 따르면, 그는 오토 5세에게 박대당했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당시엔 오토 5세의 어머니이며 바츨라프의 숙모인 베아트릭스가 아직 살아 있었고, 명목상 바츨라프의 후견인이기도 했기에, 오토 5세가 바츨라프를 무작정 학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오토 5세가 바츨라프를 최대한 붙잡아둬서 보헤미아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던 것은 분명하다.

1280년, 루돌프 1세는 쿠니군다의 요청에 따라 보헤미아로 진군해 브란덴부르크군을 몰아내고 보헤미아 정부를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이 오토 5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에게 제대로 된 협조를 하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바츨라프를 프라하 성으로 다시 데려오겠다는 오토 5세의 약속만 받아내고 돌아갔고, 오토 5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던 1282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기근이 닥치면서 민심이 악화되고 보헤미아 귀족들이 바츨라프의 귀환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브란덴부르크의 많은 귀족들도 바츨라프를 이만 귀국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오토 5세는 마침내 1283년 5월 바츨라프를 보헤미아로 보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바츨라프가 5월 24일에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 많은 영주와 기사들이 그를 맞이하러 수 마일을 나왔고, 백성들은 성가를 부르면서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쳤다고 한다. 오토 5세는 그 대가로 많은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바츨라프 2세가 돌아온 후, 보헤미아 정부는 그가 억류에서 해방되는 데 기여한 귀족 집단들의 주도로 통치를 행사했다. 그러다 쿠니군다 여왕이 프라하로 돌아온 직후, 여왕의 애인 자비쉬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귀족들을 권좌에서 밀어내고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을 요직에 앉혔다. 이에 권좌에서 밀려난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루돌프 1세가 양자를 중재해 4년간 현 상황을 유지한다는 합의를 이뤄내게 했다.

1285년 1월, 바츨라프와 유타의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두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이후 바츨라프는 루돌프 1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루돌프는 딸을 다시 데려갔다. 이후 루돌프 1세는 일전에 오타카르 2세와 함께 자신에게 맞섰던 미쿨라시 오파브스키와 화해하고 먼 친척인 아델헤이다를 미쿨라시와 결혼시켰다. 그는 미쿨라시가 자비쉬를 견제하게 함으로써 보헤미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바츨라프 2세는 1285년부터 자신을 보헤미아 국왕이자 모라비아의 변경백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1285년 9월 쿠니군다가 사망한 후에도 쿠니군다의 애인이었던 자비쉬를 총애했고, 자비쉬와 쿠니군다의 사생아인 예셰크에게 보헤미아 동부의 넓은 영토를 하사했다. 그러던 1287년 6월, 바츨라프의 아내 유타가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그 후 유타의 측근들이 궁정에서 권력을 확보하기 시작하면서, 자비쉬는 궁정에서 영향력을 서서히 잃었다. 자비쉬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바츨라프의 허락을 받고 헝가리의 전임 국왕 이슈트반 5세의 딸인 엘즈비에타와 재혼함으로써 헝가리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1287년 말, 헝가리에 가서 결혼식을 하려던 자비쉬는 리히텐베르크의 보헤미아 귀족 인드르지흐가 파견한 습격대의 공격을 받고 오파토비체 수도원으로 도주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바츨라프 2세는 그가 헝가리로 무사히 피신할 수 있게 도와줬다. 이후 자비쉬는 엘즈비에타와 무사히 결혼한 뒤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유타 왕비를 비롯한 자비쉬의 정적들은 자비쉬가 보헤미아에 없는 틈을 타 왕과 자비쉬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결국 바츨라프 2세는 왕국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보헤미아로 돌아오던 자비쉬를 긴급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바츨라프 2세와 유타 부부는 1290년 부활절에 에르푸르트에서 루돌프 1세를 알현했고, 루돌프 1세는 그에게 독일왕을 선출하는 선제후가 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바츨라프 2세의 요청에 응하여 아들 루돌프와 밤베르크 주교 아놀드 폰 솔름스에게 군대를 맡겨서 보헤미아에서 자비쉬의 투옥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비트코프치 가문을 토벌하게 했다. 루돌프 왕자는 프라하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사방했지만, 그의 전사들은 보헤미아에 남아서 반란을 진압했다. 여기에 자비쉬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폴란드 대공 헨리크 4세와 헝가리 국왕 라슬로 4세가 모두 이 해에 사망하면서, 친 자비쉬 세력은 해외에서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

자비쉬는 1290년 여름까지 감옥에 갇혀 있다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바츨라프는 루돌프 1세의 조언에 따라 비트코프치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남부 보헤미아의 성채들에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자비쉬를 처형하겠다"라고 위협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다가 자비쉬의 형제 비테크가 방어하는 흘루보카 성에 이르렀을 때, 비테크가 항복을 끝까지 거부하자, 바츨라프 2세는 그해 7월 4일에 자비쉬를 흘루보카 인근의 초원에서 참수형에 처했다. 비테크는 이에 분노해 인질로 잡고 있던 카메니체의 체네크를 처형했지만, 얼마 후 흘루보카 성이 함락되면서 목숨을 잃었다. 자비쉬의 유해는 그의 유족에게 인계되어 비슈슈이 브로트에 있는 비트코프치 가문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자비쉬가 몰락한 뒤, 바츨라프 2세는 친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자비쉬와 관련 있는 인사들을 해임하고 친 합스부르크 귀족이나 반 자비쉬 인사, 자비쉬를 따랐다가 전향한 인사들을 기용했다. 또한 보헤미아의 평화를 해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집행되었고, 자비쉬가 그동안 불법적으로 획득한 재산을 회수해 바츨라프 2세의 충성스러운 귀족들에게 분할되었다. 다만 자비쉬의 형제 및 심복들이 처벌받거나 해외로 도주한 것 외에는 정치 보복이 딱히 벌어지지 않았고, 비트코프치 가문은 바츨라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보헤미아 궁정에 합류했다. 이후 보헤미아는 수년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1292년, 바츨라프는 즈브라슬라프에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기 위해 시토회 수도원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수도원은 1년 후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바츨라프는 이 수도원에 종종 찾아와서 기도하곤 했고, 계약을 체결하거나 중요한 국정 문제를 논의할 때 수도원에서 행하곤 했다. 이후 즈브라슬라프 수도원은 프프르셰미슬 왕실의 묘지로 활용되었다.

한편, 바츨라프 2세는 1290년 6월 23일 폴란드 대공 헨리크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을 틈타 폴란드 국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자신의 숙모이자 폴란드 전임 대공 레첵 2세의 미망인인 그리피나를 통해 폴란드 대공국의 수도인 크라쿠프를 위시한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루돌프 1세 역시 인정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2세는 이에 맞서 헨리크 4세가 소폴란드를 자신에게 양도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고 주장하며 폴란드 대공을 자처했다. 여기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측은 폴란드 대공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가 자국의 영역이라며 프셰미수 2세와 대립했다.

프셰미수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군사력과 부가 막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힘만으로는 보헤미아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1290년 10월 14일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 스빈카가 주재한 공의회에 참석해 여러 귀족 및 사제들과 두루 논의한 끝에, 보헤미아 국왕에게 소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넘기고 금전적 보상을 받기로 합의했다. 1291년 1월 6일에 발행된 문서에서 '크라쿠프 공작'을 칭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폴란드 대공을 공식적으로 칭하지 않았고, 1291년 4월 10일 바츨라프 2세가 크라쿠프 공작을 칭하는 문서를 발행했다. 뒤이어 4월 하반기에는 밤베르크 주교 아눌프가 이끄는 체코군이 소폴란드의 핵심 요충지인 바벨에 주둔했다.

이 무렵,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는 폴란드 대공위를 놓고 헨리크 4세와 맞붙었다가 패배한 뒤 소폴란드에 속한 산도미에시 공국에서 할거하고 있었다. 프셰미수 2세는 헨리크 4세 사후 폴란드 대공을 자처하면서도 브와디스와프를 내버려뒀지만, 바츨라프 2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많은 소폴란드 귀족들이 그에게 그다지 충성하지 않고 브와디스와프를 두둔하는 기색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여기에 브와디스와프 역시 크라쿠프를 탈환하고자 크라쿠프 주변 지역에 대한 약탈 습격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야기했다. 크라쿠프 귀족들이 자기들 영지를 약탈하는 브와디스와프에게 반감을 품고 바츨라프 2세 지지로 돌아서 버린 것이다.

바츨라프 2세는 폴란드 문제는 일단 내버려두고, 루돌프 1세가 1291년 7월 15일에 슈파이어에서 사망한 뒤 독일왕을 새로 선출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먼저 보헤미아의 중요한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인 에거란트를 인수했다. 뒤이어 루돌프 1세의 아들이며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작인 알브레히트 1세가 당선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2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와 손잡았고, 알브레히트 2세와 오토 5세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보헤미아 군주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고 공개 선언했다. 다른 선제후들 역시 오스트리아와 스티리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에 반대하는 이들이 일으킨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지 못하는 알브레히트 1세가 독일왕으로서 제대로 통치하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별로 지지하지 않았다.

1292년 4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열린 선거에 참석한 바츨라프 2세는 보헤미아에서 개발한 은광에서 나오는 막대한 은을 가지고 여러 선제후들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선제후들은 나사우 가문의 일원이자 명망높은 용병이었던 아돌프를 새 독일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아돌프는 용병으로서 명성이 높긴 했지만 나사우 가문이 별로 유망한 가문이 아니었고, 합스부르크 왕가처럼 큰 영지를 보유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루돌프 1세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에 경계심을 품었던 선제후들이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바츨라프 2세는 여기에 더해 아돌프의 아들과 자신의 딸 아네슈카와의 결혼을 주선해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확실히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아네슈카가 1296년 8월 6일에 사망해버리면서 결혼은 무산되었다. 한편, 그는 오타카르 2세 치세 때 확보했다가 루돌프 1세에게 빼앗겼던 오스트리아, 스티리아, 카린티아에 대한 영유권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이제 신성로마제국의 뒷배를 얻게 된 바츨라프 2세는 본격적으로 폴란드 공략에 착수했다. 1291년 9월 1일 리토미슐에서 소폴란드 귀족들을 소집해 그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지원을 약속받았다. 뒤이어 1292년 브란덴부르크와 상부 실레시아의 지원군을 규합한 그는 산도미에시로 진격하여 우키에테크 시를 별다른 희생을 치르지 않고 공략했다. 뒤이어 그 해 여름 시에리츠에 입성했고, 브와디스와프의 항복을 받아냈다. 바츨라프 2세는 뒤이어 엘베 강 하류에 위치하여 보헤미아 왕국에 상업적으로 중요한 곳인 마이센에 변경백 자리가 비어있는 틈을 타 즉시 접수하고 심복인 카메니체의 버나드(Bernard z Kamence)를 그곳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버나드는 1294년 여름에 드레스덴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피르나 성과 그 주변 마을을 바츨라프 2세에게 넘겼다. 드레스덴 영주 프리드리히는 바츨라프 2세의 가신이 되었으며, 드레스덴 귀족들은 프리드리히가 사망할 경우 보헤미아 정부에 영지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프셰미수 2세는 대폴란드 공국의 코앞인 시에리츠까지 군대를 진주시킨 바츨라프 2세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맞설 준비에 착수했다. 1293년 1월, 프셰미수 2세는 브와디스와프와 형제 카지미에시 2세를 칼리슈로 불러들인 뒤, 크라쿠프의 지위를 계승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처음에는 그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 대공을 맡고, 자신이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죽으면 브와디스와프가 뒤를 이어 맡고, 마지막에는 카지미에시 2세가 맡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 보헤미아로부터 소폴란드를 회복하는 걸 목표로 삼고 서로 힘을 합쳐 협력하기로 했으며, 그니에즈노 대주교에게 순은 300 그지브나(grzywna)를 매년 지불하고 첫 2년 동안엔 그 두배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와구프 공작 헨리크 3세와도 동맹을 체결하고 실레시아의 병력 지원을 약속받았다.

칼리슈 회의를 마친 뒤, 프셰미수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알베르트 3세의 딸 마가레타와 결혼했다. 이는 장차 있을 보헤미아와의 무력 충돌 때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지원을 확보하고,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공작위를 계승받을 때 이들의 용인을 받아내기 위한 조치였다. 1295년 6월 26일, 프셰미수 2세는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아내 마가레타와 함께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프셰미수 2세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뒤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로 가서 올리바, 자르노비에츠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의 특권을 확인했다. 이후 그단스크, 트체프, 시비에 등 주요 도시들을 잇따라 방문해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바츨라프 2세는 이에 대응해 "프셰미수 2세가 교황청의 허가도 받지 않고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지만, 대폴란드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주민들은 프셰미수 2세를 정당한 통치자로 여겼다.

그러다 1296년 2월 8일, 프셰미수 2세가 로고즈노에서 괴한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당대 연대기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암살을 주도했다는 설, 대폴란드 귀족들이 암살극을 주동했다는 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과 폴란드 귀족 가문들이 협력했다는 설을 제시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그가 죽으면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바츨라프 2세가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이후 쿠야비아 공작 브와디스와프와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 레첵 지에모미슈비치가 서로 갈등을 벌이면서, 폴란드는 자중지란에 휩싸였다.

바츨라프 2세는 폴란드의 이같은 상황을 내버려둔 채 독일왕 아돌프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간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아돌프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면서도, 알브레히트 1세와도 화해하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랜 관계를 유지한 외교관이자 마인츠 대주교인 페터 폰 아스펠트를 기용했다. 그러다 아돌프가 노골적으로 자신이 점거한 마이센을 노리자,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 편으로 돌아섰다. 1297년 6월 2일 프라하에서 친 합스부르크 인사들을 초빙해 알브레히트 1세를 새 독일왕으로 세우기로 합의했다. 이날 바츨라프 2세와 유타가 보헤미아 국왕과 왕비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타 왕비는 9번째 아이를 출산한 이후로 병을 앓던 중 호화로운 의식을 치르느라 몸을 혹사한 나머지 2주 만인 6월 18일에 사망해 프라하의 오타카르 2세의 무덤 인근에 안장되었다.

그후 바츨라프 2세는 폴란드 국왕을 칭했다가 피살당한 프셰미수 2세의 딸인 리체차 엘즈비에타와 약혼해 폴란드 왕위에 대한 정통성을 강화했고, 1298년 2월 빈에서 알브레히트 1세를 독일왕으로 추대하고 알브레히트 1세가 군대를 일으킬 때 필요한 군자금을 제공하는 대가로 바이에른-보헤미아 국경에 위치한 여러 성을 넘겨받는 협약을 체결했다. 1298년 6월 23일, 선제후들은 마인츠에 모여 아돌프의 폐위를 선언하고 알브레히트 1세를 새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그 해 7월 초, 괼하임에서 아돌프와 알브레히트 1세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수적으로 불리했던 아돌프가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고, 알브레히트 1세는 1298년 8월 24일 아헨에서 정식으로 독일왕으로 즉위했다.

1299년 8월, 바츨라프 2세는 클레카에 머물고 있던 대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프라하로 찾아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그가 프셰미수 2세가 사망 후 확보한 영지들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브와디스와프는 그의 요구를 따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이에 바츨라프 2세는 1300년 브와디스와프 1세에게 반감을 품은 대폴란드 귀족 및 성직자 대표들과 접견한 뒤 브와디스와프 대신 자신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 후 보헤미아군을 대폴란드 공국으로 파견했고, 대다수의 대폴란드 귀족과 튜튼 기사단이 호응하면서 삽시간에 대폴란드 대부분을 석권할 수 있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1300년 가을, 바츨라프 2세는 그니에즈노에서 폴란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리체차 엘즈비에타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제 그는 보헤미아 국왕이자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다만 대폴란드 일부 지역에서는 브와디스와프 1세를 추종하는 이들이 항거했다.

1301년 1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3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언드라시 3세 생전부터 헝가리 왕을 자처하던 나폴리 왕국카로이 로베르트 왕자가 에스테르곰으로 가서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추대를 받으면서 헝가리 국왕이 되는 듯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교황이 지지하는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교황의 간섭에 시달릴 것을 우려했기에 추대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대관식이 거행되는 세케슈페헤르바르가 아닌 에스테르곰에서 대관식이 거행된 것은 무효라며 카로이 로베르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소집된 헝가리 의회에서, 바츨라프 2세의 아들이자 언드라시 3세의 딸 에르제베트와 약혼한 바츨라프 3세와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고, 헝가리 귀족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안겨줬다. 이에 헝가리 귀족들은 바츨라프 왕자를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1301년 8월 27일, 바츨라프 3세는 아버지가 보내준 수행원과 보헤미아군과 함께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한 뒤 컬로처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쓰고 '라슬로'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를 '라슬로 5세'라고 칭하기도 한다. 헝가리 귀족들은 대부분 바츨라프 3세의 집권을 받아들였지만,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카로이 로베르트만을 왕으로 모셨다. 이에 1301년 8월 말,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진해 에스테르곰을 공략했고, 카로이는 헝가리 남부로 피신했다. 하지만 카로이를 따르는 주들을 본격적으로 정벌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고, 헝가리는 카로이를 지지하는 세력과 바츨라프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나마도 강력한 권세를 떨치는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했고, 바츨라프와 카로이 모두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자신의 허락 없이 아들을 헝가리 왕으로 세운 것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1301년 9월 헝가리를 방문한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는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에게 "교황이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 카로이를 지지하라"고 설득했다. 이에 보헤미아 왕국은 헝가리 귀족들을 묶어두기 위해 그들에게 큰 영지와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 결과, 바츨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세우는 데 일조했던 컬로처 대주교 이슈트반을 포함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1302년 상반기에 카로이 지지로 돌아섰지만, 귀족들은 바츨라프 3세를 계속 왕으로 모셨다.

1302년 9월, 카로이가 바츨라프 3세가 있던 부더를 포위했다. 그는 부더 시민들에게 바츨라프 3세를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시민들은 끝까지 바츨라프를 지지했다. 그 사이,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여 포위를 풀었고, 카로이는 어쩔 수 없이 달마티아로 철수했다.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가 부더에서의 성무 집행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자, 부더의 사제들은 교황과 헝가리의 주교들을 파문했다. 1303년,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로마로 출두해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바츨라프 2세가 응하지 않자, 그해 5월 31일에 "바츨라프 왕의 헝가리 왕 선출은 무효이며 카로이야말로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여기에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도 바츨라프 2세에게 "아들을 헝가리에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카로이 편에 돌아섰고, 바츨라프 3세의 세력은 부더와 그 주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아들을 구하고 카로이를 무찌르기 위해 1304년 5월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행진하며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에스테르곰을 공략하고 에스테르곰 주교 에호르를 생포했다. 그러나 카로이를 지지하는 영주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들을 왕으로 받든 영주들도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고 자기들 권익을 챙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들이 헝가리에 계속 체류했다간 위험해지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아들을 보헤미아로 데려가되 헝가리 왕위는 계속 유지하고 이반 쾨체그를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 통치자로 세웠다. 이때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보헤미아로 이송되면서, 헝가리 민심이 악화되었다.

1304년 9월, 카로이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가 모라비아를 침공했지만 바츨라프 2세에게 격파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 1세와 바츨라프 2세간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이 무렵 결핵에 걸려 건강이 악화된 바츨라프 2세는 1305년 4월부터 병상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다가 1305년 6월 21일에 사망했다. 보헤미아 왕국은 13세기부터 은광이 대대적으로 개발된 덕분에 매우 부유했지만, 그의 치세 말기엔 거듭된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재정적 의무를 지키고 빚을 갚겠다고 맹세하게 한 뒤 "시토회 수도자수도복을 입고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그러나 이 유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유해는 왕의 예복을 입힌 채 즈브라슬라프의 시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2.5. 바츨라프 3세와 프르셰미슬 왕조의 단절

바츨라프 2세 사후, 바츨라프 3세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에 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보헤미아와 폴란드 왕위까지 물려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왕실의 재정은 빚더미에 쌓였고, 폴란드의 상황은 귀족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웠으며, 헝가리에서는 이름만 내걸었을 뿐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와의 평화 협상을 이어갔다. 1305년 8월 18일, 알브레히트 1세는 보헤미아 국왕을 반역자로 비난했던 칙령을 취소하고 바츨라프의 전임자들이 소유한 권리와 특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한 권리를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그는 체브스코(Chebsko)를 알브레히트 1세에게 양도하고 베틴 가문에 모젤을 넘겨야 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의 분쟁을 종결한 뒤, 바츨라프는 헝가리 문제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무력으로 해결하기에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고 성공 가능성도 불확실하다고 보고 외교로 해결하기로 했다. 1305년 10월 9일, 그는 브르노에서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나고 성 이슈트반 왕관과 보석을 포함한 헝가리 왕좌에 대한 권리를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에게 넘겼다. 그 대신 니더바이에른 공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왕위를 유지하고자 했다.

한편, 그는 언드라시 3세의 딸 에르제베트와 맺었던 약혼을 파기하고 테셴-아우슈비츠 공작 메세크의 딸 비올라와 결혼했다. 이 선택은 당대에도 의외라는 평을 받았다. 테셴 공작의 권위나 위세 모두 프르셰미슬 왕조에 비할 바 아니었고, 폴란드에서 프르셰미슬 왕조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즈브라슬라프 연대기 작가 페트르 자타프스키는 그가 강력한 권위를 갖춘 왕족과 결혼해서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기들을 억압할 것을 우려한 보헤미아 귀족들이 일부러 보잘 것 없는 공작의 딸과 결혼하라고 부추겼다고 기술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그가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를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 보헤미아와 크라쿠프간의 연락로 사이에 있는 테셴-아우슈비츠를 확실한 동맹으로 삼고자 결혼을 주선했다고 추정한다. 그는 이와 더불어 1306년 2월 13일 여동생 안나를 케른텐 공작 하인리히와 결혼시킴으로써 아군을 늘리고자 했다.

즈브라슬라프 연대기에 따르면, 바츨라프는 아버지를 섬겼던 노련한 신하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또래 귀족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그들로부터 온갖 추잡한 이야기를 듣고 음란해져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절제한 성생활을 보냈고, 술에 중독되어 술에 빠져 지냈다. 젊은 귀족들은 왕을 그렇게 만든 뒤 그로부터 보물, 마을, 도시 등 많은 재산을 빼돌렸고 여러 특권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브와디스와프 1세가 저항군을 이끌고 크라쿠프를 위협하면서 폴란드에 대한 프르셰미슬 왕조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그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토지세를 부과해 군자금을 마련하여 용병들을 고용한 뒤 폴란드 원정에 착수하려 했다. 귀족들이 토지세에 반발하자, 그는 그들의 재산을 강압적으로 몰수하고 많은 이를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었다.

1306년 7월, 바츨라프는 군자금을 어느정도 확보한 뒤 올로모우츠로 가서 용병들을 모집했다. 그러는 동안 보헤미아 정부를 처남이자 케른텐 공국의 공작인 하인리히에게 맡겼다. 그런데 1306년 8월 4일, 그는 올로모우츠에서 암살당했다. 향년 16세. 그는 생전에 왕비로 들였던 비올라로부터 자식을 낳지 못했고, 단지 사생아로 엘리자베트만 뒀다. 이리하여 프르셰미슬 왕조는 단절되었고, 처남 하인리히가 보헤미아 국왕 인드르지흐 코루탄스키(Jindřich Korutanský)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307년 알브레히트 1세가 보헤미아를 침공해 프라하를 점령하고 아들 루돌프 3세를 보헤미아 국왕 루돌프 1세로 선출했다. 이후 보헤미아는 루돌프 1세와 인드르지흐와의 내전에 수년 간 시달렸다. 1307년 루돌프 1세가 사망하면서 인드르지흐가 복위했지만, 1310년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축출되고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얀 루쳄부르스키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했다.

3. 역대 프르셰미슬 왕조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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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상의 통치자 프르셰미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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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자]: 프리드리히 2세의 자매인 마르가레테의 아들 하인리히와 프리드리히
마르가레테의 두 번째 남편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
프리드리히 2세의 조카인 게르트루드의 첫 번째 남편 모라비아 변경백 블라지슬라프
게르트루드의 두 번째 남편 바덴의 헤르만
게르트루드의 세 번째 남편 로만 다닐로비치
게르트루드의 아들 바덴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가 혈연 관계를 근거로 오스트리아 공작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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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츠와프 3세 브와디스와프 1세 카지미에시 3세 루드비크 야드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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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드라시 1세 벨러 1세 셜러몬 게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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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파드 왕조 프르셰미슬 왕조 비텔스바흐 왕조 앙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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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5세 페렌츠 요제프 1세 카로이 4세 }}}
}}}}}}}}}

3.1. 전설상의 통치자

3.2. 보헤미아 공작

3.3. 보헤미아 국왕


[1] 14세기에 집필된 달리밀의 연대기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만이 자신이 농민 출신이라는 걸 부끄러워해 대관식에서 이 유물들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2]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스피티네프 1세의 남동생인 브라티슬라프 1세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3] 그리스도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츨라프 1세는 전투 도중 사상자가 많이 생기자 코우르짐의 통치자에게 결투를 신청해 동의를 얻어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전진했을 때, 바츨라프의 이마에 십자가 형태를 띤 환상이 생겨났다. 코우르짐의 통치자는 그걸 보자마자 무기를 멀리 내던지고 바츨라프 1세의 발 앞에 몸을 던지며 "하느님께서 표창을 내려 도움을 베푸시는 사람을 이길 자가 없다"고 선언했다고 한다.[4] 드라호미라가 속한 스토도르족이 여기에 해당했다.[5]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6] 크랄(král)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카롤루스 대제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게 정설이다.[7] 크랄(král)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카롤루스 대제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게 정설이다.[8] 베드르지흐(Bedřich)는 독일의 남성 이름인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식 이름이다.[9] 나중에 독일을 통일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의 직계조상으로 호엔촐레른 가문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5대조이다.[10] 많은 연대기 작가들은 데디체의 밀로타가 오타카르 2세를 배신할 마음을 진작에 품었기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