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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DB1,#5E253C><colcolor=#fff> 검은 독수리의 가슴에 흰 곡선이 그려진 문양은 대대로 실롱스크(실레시아, 슐레지엔)를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 ||
시기 | 1241년 (오고타이 칸 13년) 4월 9일 | |
장소 | 실롱스크 공국령 레그니차 남동쪽 근교 (現 폴란드 돌니실롱스크 주 레그니차) | |
원인 | 칭기즈 칸 사후 서방 재원정, 헝가리 원정군의 측면 안정화 | |
교전국 | 몽골 (공세) 승 | 폴란드계 공국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바이다르 오르다 카단 | 지휘관 헨리크 2세 (폴란드 국왕) † 볼레슬라프 † 미에슈코 2세 |
병력 | 몽골군: 3,000명 ~ 8,000명 | 연합군: 2,000명 ~ 8,000명 - 성전기사단원 : 65명 ~ 88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최고 지휘관 전사 대부분의 병력 전멸 |
결과 | 몽골의 승리 | |
영향 | 몽골군의 헝가리 원정 가속화 - 폴란드의 통합 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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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어로는 발슈타트 전투라고 불린다. 실롱스크 공국의 레그니차에서 몽골 제국의 바이다르와 오르다가 지휘하는 서방 원정군과 실롱스크 공작이자 폴란드 고공(Maximus Dux)[1]이었던 헨리크 2세가 지휘하는 폴란드 제공국 및 유럽 기사단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다.2일 뒤 몽골군의 승리로 끝난 모히 전투(1241년 4월 11일)와 함께, 유럽에 몽골의 전투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전투였으며, 폴란드와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당시 실레시아는 분열된 폴란드 왕국의 일부로서 피아스트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2] 이 항목에선 라틴어 이름인 실레시아나 독일어 이름인 슐레지엔 대신 실롱스크로 쓴다.
2. 배경
폴란드는 1138년 볼레스와프 3세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들이 폴란드 왕국의 땅을 나누어 가지면서 분열되었다.폴란드는 연장자령 포메른, 대폴란드 공국, 실롱스크 공국[3], 산도미에시 공국, 마조프셰 공국, 웽치차 공국, '연장자령' 폴란드로 나뉘어졌다.
이들 중 연장자령은 폴란드의 가장 핵심 지역으로 큰아들이 실롱스크 공국에 더해 지배하도록 했다. 아들들이 나누어 가진 땅은 이후 각각 독립국으로 기능했고, 이 피아스트 왕조의 공국들 중 크라쿠프를 차지하는 공국은 폴란드 고공(Maximus Dux)의 타이틀을 얻어 폴란드를 대표하는 통치자가 될 수 있었기에 분열된 각 공국들은 이 자리를 놓고 다투거나 혼인관계에 따라 자리를 넘겼다.
각 공국들의 공작들이 서로 대공위를 넘기거나 빼앗기다가, 1231년부터 실롱스크 공작이었던 '수염공' 헨리크 1세(Henryk Brodaty)가 크라쿠프를 차지하여 폴란드 고공이 되었고, 1238년 그의 아들인 헨리크 2세가 실롱스크 공작위와 폴란드 고공위를 이어받았다.
당시 분열되어 있었던 폴란드는 이 '헨리크 공작들'에 의해 실롱스크 공국을 중심으로 절반 가까이 통합되어 있었다. 헨리크 2세는 대폴란드와 소폴란드에 이어 마조프셰의 일부 지역도 차지했고, 폴란드의 나머지 부분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편 먼 동방에서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3세기 초 몽골 제국은 아시아 지역을 대부분 정복하고 키예프 루스를 잿더미로 만든 뒤, 서쪽의 유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칭기즈 칸 사후 후계 구도가 정리되는 상황에서 발생한 얼마 간의 지배력 공백으로 인해서, 칭기즈 칸 시기에 멸망했던 나라들 중 일부가 다시금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이에 몽골 제국의 제2대 군주였던 오고타이 칸은 1235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유럽쪽으로의 서방 원정을 결의했다. 장남 주치 가문의 당주인 바투가 서방 원정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부장은 칭기즈 칸의 노장이자 이미 칼가강 전투 등 유럽군과의 교전 경험이 있었던 수부타이가 맡았다. 이 서방 원정군은 몽골 기병대, 튀르크계 보병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출정한 몽골군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럽·러시아까지 완전하게 정복하고 헝가리 왕국으로 서진했다. 이 시기 몽골군은 항복받은 지역에서 징집한 병사들까지 포함하여 대군을 형성했다.
헝가리에는 1229년부터 러시아에서 넘어온 보야르들에 의해 몽골의 위협이 전해졌다.[4] 1239년 바투의 원정 때문에 쑥대밭이 된 키예프 공국에서 40,000호에 달하는 쿠만-킵차크인들이 탈출해 헝가리로 도망쳤다. 헝가리 왕 벨러 4세는 이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과 미래의 몽골 침공시 함께 맞서 싸운다는 조건으로 헝가리 내에 정착하도록 했고, 쿠만인들은 이 조건에 응했다. 서방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는 이들을 당장 돌려놓으라고 헝가리 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으나[5] 거부당했고 곧 헝가리 침공이 준비되었다.
수부타이는 헝가리를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전에, 측면에서 헝가리에 원병을 보내 올 수 있었던 폴란드 왕국을 미리 쳐부수기로 했다.[6] 그는 1241년 1월, 원정에 동행했던 바이다르[7], 오르다[8], 카단[9]에게 2개 튜멘(12,000~20,000명)을 붙여 폴란드를 침공하도록 했다. 이들은 기동력을 이용해 폴란드 각 소공국들의 군대가 연합하지 못하도록 각개격파했다.
2월 투르스코 전투(Battle of Tursko)에서 크라쿠프 태수(Voivode) 브워드지미에시(Włodzimierz)가 이끄는 약 1,500명의 병력이 몽골군에게 격파당했다.
3월 크라쿠프 근방 흐몔니크 전투(Battle of Chmielnik)에서 아직 규합되지 못한 폴란드군이 차가타이의 차남 바이다르가 이끄는 몽골군에게 크게 패배해, 폴란드 대공의 도시 크라쿠프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고, 크라쿠프로 진입한 몽골군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동시에 오고타이의 아들 카단이 이끄는 병력은 소폴란드(Małopolska) 지역의 남은 폴란드군을 타첵 전투(Battle of Tarczek)에서 격파하고, 4월 브로츠와프 근방에서 바이다르군과 합류했다.
한편, 폴란드 공국들을 다시 규합하며 연합군을 집결시키고 있었던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는 모라비아와 성전기사단 등의 지원까지 얻어 몽골군에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보헤미아 왕국의 왕 바츨라프 1세도 원병을 모아 한창 폴란드로 달려가고 있었다. 보헤미아 말고도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제후국들이 원병을 파견한다는 약속을 했으나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헨리크 2세는 빠르게 출정해 몽골군과 맞서려고 했다.
대폴란드~소폴란드 지역을 초토화시키며 진군하던 몽골군은 4월 9일 실롱스크 공국의 레그니차에 모습을 드러냈고, 약 3,000 ~ 8,000명의 폴란드 연합군은 몽골군에 맞섰다.
3. 전개
3.1. 포진
1241년 4월 9일, 대공 헨리크 2세는 폴란드 연합군을 모아 레그니차에서 동남쪽으로 4km 떨어진 레그니키에 폴레[10]에 포진했다.
헨리크 2세는 군대를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
- 제1진은 모라비아 변경백의 적자인 볼레슬라프(Boleslaus Děpolt)의 지휘 아래, 모라비아인, 대폴란드 지방의 농민 징집병,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자원병, 소수의 기사대로 구성되었다.
- 제2진은 크라쿠프의 기사이자 고위귀족[11]이었던 술리스와프(Sulisław of Cracow)의 지휘 아래 대폴란드(비엘코폴스카), 소폴란드(마워폴스카)와 크라쿠프, 시에라츠, 웽치차 공국 등의 기사와 종자들로 이루어졌다.
- 제3진은 오폴레-라치부시 공작 미에슈코 2세(Mieszko II)가 이끄는, 그의 영지에서 데려온 징집병과 소수의 기사대였다.
- 마지막 제4진은 본진으로서 헨리크 2세가 직접 이끄는 실롱스크의 기사대, 폴란드 각지의 기사대와 성전 기사단 등 서유럽에서 지원 온 기사단[12] 그리고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진의 주력이었던 실롱스크의 기사들은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 상상화의 기사는 13세기 중반의 실롱스크 기사로, 시기적으로 레그니차 전투와 일치한다. 트렌지셔널 아머나 플레이트 아머가 나오기 전, 중세 중기 유럽의 기사들이 최대한 중무장한 모습으로 성전 기사단, 일부 폴란드 기사들도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몸 전체에 메일(mail)을 두르고,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마갑을 말에 입혔으며 방패와 약 3~4m에 이르는 랜스를 들고 돌격했다. 또한 백병전 시엔 검과 메이스 등의 무기를 사용했다. 전투에 참여한 보병은 대부분 징집병이었기에 사진의 보병[13]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14]
1월 12,000 ~ 20,000여 명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던 몽골군은 레그니차까지 진군하는 3개월의 기간 동안 병력을 조금씩 손실해 전투 직전 그 수가 약 8,000명 남짓이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기마궁수였고, 소수는 전투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을 중장기병이었다고 한다. 몽골군의 사령관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데, 대체로 폴란드를 침공했던 차가타이의 차남 바이다르(Baidar)와 바투의 형 오르다(Orda)였을 것이라고 본다. 어쨌든, 몽골군은 군대를 4개로 나눴고, 기마궁사들로 이루어진 전방 3개 진은 횡대로 넓게 벌렸다. 후방 중앙에는 기마궁사와 소수의 중장기병들이 예비대로 있었다.
3.2. 전개
레그니차 전투의 전개에 대해선 역사가들마다 견해가 크게 다르다. 실롱스크 기병대의 돌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견해도 있고, 징집병의 돌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몽골군의 기병대를 너무 쫒아간 기병대가 폴란드어로 "달려"라고 외친 것을 혼동해 오폴레 공작이 군대를 철수해버리는 바람에 헨리크 2세가 전투 중심부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도 한다. 이 항목에 올라온 전투 전개도는 http://www.arsbellica.it/가 출처인데,[15] 따라서 이 전개도 및 해당 사이트의 설명과 위키백과의 내용을 참조해 서술한다.↑유럽군 제2진의 일부인 실롱스크의 기병대가 몽골군 전방의 만구다이[16]에게 돌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몽골군의 화살 세례를 받은 후 격퇴되었다.
조바심이 난 헨리크 2세는 전방 부대의 총공격을 지시했고, 술리스와프가 제2진 전체를, 오폴레 공작이 그의 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에게 재돌격했다. 또한 양익의 징집병들도 천천히 돌격했다. 만구다이들은 이 공격을 받고 퇴각했는데, 이것은 거짓이었고, 폴란드의 기병대는 몽골군 깊숙히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보병대가 기병대와 분리되자 양익에 배치된 몽골 기병대가 보병들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헨리크 2세는 자신의 기사대를 이끌고 역시 공격해 들어갔다.
백병전을 벌이던 몽골군은 조금씩 퇴각해 거리를 벌린 뒤, 야크와 양꼬리털로 만든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 들판에 불을 피웠다. 엄청난 연기가 발생하자, 몽골군의 움직임은 가려졌고 유럽군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17] 15세기의 연대기 작가였던 얀 드우고슈(Jan Długosz)는 몽골군의 이 작전에 대해 이렇게 썼다.
"타타르인들은 전쟁을 할 때, 점술과 사악한 마술에 의지한다던데, 그들은 정확히 우리에게 그 짓을 했다."
몽골군은 곧 말머리를 돌려 화살을 쏘며, 혼란에 빠진 폴란드군에 돌격해 들어갔다. 측면에선 화살이 쏟아지고, 중앙에선 몽골의 중장기병들이 돌진해 들어오자 그대로 대학살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모라비아의 볼레슬라우((Boleslaus Děpolt)는 전사했고, 헨리크 2세는 후퇴해 전열을 가다듬고자 했다.
그러나 혼란한 와중에 어느새 유럽군의 잔여 병력은 몽골군의 포위 공격에 거의 궤멸되었고, 호위대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대공 헨리크 2세는 호위대 병력을 쪼개어 탈출구를 열어보려고 했지만, 곧바로 몽골군의 포위에 가로막혀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오직 4명의 병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헨리크 2세를 태울만한 말들도 다친 상태로 방치되다가 몽골군의 공격에 죄다 죽어버렸으나, 다행히 휘하 기사가 어떻게든 말을 찾아다 구해주어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본 몽골군이 헨리크 2세를 알아보고는 곧바로 그를 포위했다.
헨리크 2세가 일격을 가하기 위해 팔을 들자, 겨드랑이에 몽골군의 창이 박혔고, 곧 화살 두 발도 맞았다. 대공이 땅에 떨어지자 몽골군은 그를 참수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레그니차 전투가 끝난 뒤 몽골군이 전과를 확인하기 위해 유럽군 전사자의 한쪽 귀를 잘라낸 것이 커다란 자루 9개에 가득 찼다고 한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전투 전개에 관한 설명은 정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유럽의 중세 시대 전투에 관한 사료가 부족하고, 아직도 레그니차 전투 전개에 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4. 영향, 뒷이야기
레그니차 전투가 끝났을 때, 원병으로 가고 있었던 바츨라프 1세의 보헤미아군은 레그니차에서 약 하루 거리에 있었다. 폴란드군의 참사를 듣고 그는 헝가리에도 가지 않은채, 그대로 후퇴했고, 마이센과 튀링겐의 원병을 받아 자국인 보헤미아의 방어에 전념하기로 했다. 레그니차 전투에서의 승리로 몽골군의 폴란드 침공 목표는 완벽하게 달성되었다. 헝가리의 주변 강국들은 아무도 원병을 보낼 수 없었고, 이 때문에 헝가리는 아직 약했던 오스트리아 공국, 그리고 성전 기사단으로부터 소수의 지원만 받아 모히 전투를 치렀다가 몽골군에게 참패했다.바투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를 초토화한 후, 신성 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체크하고[18]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스스로 물러나길 요구하며
"나는 너의 왕위를 빼앗으러 가고 있다."
라는 편지를 보냈다.[19] 하지만 1241년 말, 바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유럽에 오지 않았다.[20] 한편 폴란드의 공국들은 그 참혹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공국들과는 달리 몽골의 영향권 밖에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헨리크 2세의 전사, 그리고 실롱스크 공국의 국력 약화에 따라 폴란드의 통일은 약 80여 년이나 지연되었다. 헨리크 2세가 꽤 많은 폴란드 공국을 연합했다는 사실에서, 만약 몽골의 침입이 없었고 그가 좀 더 오래 통치하게 되었다면 그의 치세때 폴란드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헨리크 2세의 사후, 1290년대에 다시 폴란드 절반을 장악한 대폴란드 공 프셰미스우 2세가 통일에 가까이 갔으나 국왕으로 대관한 직후인 1296년에 암살당하면서 그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고, 브와디스와프 1세의 통치기인 1320년에야 폴란드는 다시 통일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실롱스크 공국은 보헤미아의 속국이 되어버렸고, 결국 병합되면서 오랫동안 폴란드 역사에서 떨어져 나가 있게 되었다.[21]
한편, 1241~1242년의 제1차 폴란드 침공에서 폴란드의 힘을 파악한 몽골은 부룬다이(Burundai)의 지휘하에 1259년, 오로지 약탈을 목적으로 폴란드를 재침공했다. 이전보다 더 큰 규모였던 몽골군의 침략에 대해 분열되어 있었던 폴란드는 다시 한 번 패배했고, 전역이 약탈당했으며 크라쿠프는 또다시 불태워졌다. 1287년 탈라부가(Talabuga)가 이끈 제3차 침공은 헝가리의 지원을 받은 폴란드가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1] 폴란드어로는 Książę zwierzchni.[2] 분열된 다른 공국들도 대부분 피아스트 왕조의 공작들이 지배했다. 다만, 폴란드의 일부였던 포어포메른의 포메른 공국은 폴란드 분열 이후 12세기 후반부터 그라이펜 가문이 지배했고, 곧 독일화되었다.[3] 큰아들이 가져갔다.[4]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인 자카르파탸가 1918년 이전까지는 헝가리 영토였다. 그래서 헝가리 동부에는 슬라브계 귀족들이 제법 있었다. 헝가리와 슬라브 사이의 관계가 완전 낯설지만은 않았던 것이다.[5] 그냥 통첩이 아니라 "당신한테 도망친 우리의 종인 쿠만족들을 당장 우리한테 돌려보내라. 쿠만족들은 말을 타고 있어서 달아날 수 있었지만, 당신들은 어떻게 달아날 셈인가?"라는 내용이 들어가서 쿠만족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6] 폴란드와 헝가리는 옛부터 지금까지 최우방으로, 동맹까지 맺는 친밀한 관계였다.[7] 차가타이 칸의 차남[8] 주치의 장남, 총사령관 바투의 형[9] 오고타이 칸의 아들[10] Legnickie Pole, 독일어 Wahlstatt[11] 그의 형이 크라쿠프 궁정의 팔츠백이었다.[12] 현재 독일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참여 여부는 의심스럽다고 한다. 독일 기사단장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이것은 거짓이고 1244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다만 성전 기사단의 참여는 확실한 듯 하다. 완전 무장한 기사들로 약 68~88명이 참전했다고 한다.[13] 13세기 말 폴란드 보병[14] 참고로 뒤에 있는 하얀 보병은 발트 십자군의 일부였던 도브르진 기사단(Order of Dobrzyń)의 '형제' 기사이다. 이 기사단은 문양이 검의 형제 기사단과 비슷했지만, 두 기사단은 엄연히 달랐다.[15] 유럽사의 주요 전투의 전개와 의의를 다루는 사이트이다. 다만 이 사이트에도 독일 기사단장이 사망했다고 나오기에, 적어도 레그니차 전투에 관해서만큼은 소스로서 정확하진 않다.[16] 몽골 선봉대. 주로 기마궁사로 이루어진 경기병이었다.[17] 그냥 불이 아니라 화약이나 독극물을 함께 태웠다는 추측도 있다.[18] 참고로 이후 몽골군은 폴란드 근처에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 중 하나인 마이센 변경백국(후일의 작센 선제후국이자 오늘날 작센주.)을 약탈했다.[19] 프리드리히 2세는 "나는 새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좋은 매잡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몽골인들은 예로부터 매사냥을 즐겼다.[20] 이전까지는 오고타이 칸의 붕어로 서방 원정군이 회군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현재는 이에 대한 이론이 많다.[21] 1291년 보헤미아 프르셰미슬 왕조의 바츨라프 2세가 폴란드의 고공위를 손에 넣으면서 폴란드와(엄밀히 말하면 크라쿠프 공작령) 보헤미아는 동군연합으로 묶이게 되었고, 이때부터 실롱스크는 보헤미아의 영향권 내에 들게 되었다. 1306년 바츨라프 3세의 사망 이후 동군연합은 깨졌고, 뒤이어 보헤미아의 왕이 된 룩셈부르크 왕조의 얀 루쳄부르스키가 다시 폴란드의 왕위를 요구하며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1세와 대립했다. 브와디스와프 1세의 후계자인 카지미에시 3세(카지미에시 대왕)는 얀이 폴란드 왕위를 영구히 포기하는 대가로 보헤미아의 실롱스크 지배권을 인정했다. 1335년 실롱스크 공국은 보헤미아에 병합되었다. 폴란드는 실롱스크(실레지엔)를 1945년에 가서야 소련의 도움으로 회복했다. 즉 700년 동안 실롱스크는 폴란드와 아무 상관이 없는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