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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58년(몽케 칸 8~9년, 남송 보우 6년~개경 원년), 몽송전쟁 때 쿠빌라이가 몽골 동로군을 이끌고 악주[1]를 침공했다가 가사도에 의해 격퇴당한 작전이다.2. 배경
남송(南宋) 보우(寶祐) 6년이자 몽케 칸 8년(1258년) 2월, 몽케는 송(宋)을 전면 침공하여 남송(南宋)을 완전히 정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서로(西路)는 몽케(蒙古)가 사천(四川)을 친정하고, 종왕 타차르가 동로군을 이끌고 형산(荊山, 지금의 안후이(安徽) 회원서남)을 공격하여 송(宋)의 병력을 분전하였다. 11월, 타차르의 송군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몽케는 동생 쿠빌라이에게 동로군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몽케는 천촉을 점령한 뒤 쿠빌라이의 동로군과 악주를 공격해 남송의 수도 임안으로 향할 것을 계획했다. 그해 11월 쿠빌라이는 카이펑을 출발했다.남송(南宋) 개경(開慶) 원년(1259년) 7월 쿠빌라이 군이 여남(汝南, 지금의 하남)에 이르러 몽케가 조어성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헛소문으로 오인하여 계속 전진하였다. 8월 15일 쿠빌라이는 주력을 이끌고 회하를 건넜다. 20일 대승관을 함락해 송군을 몰살했다. 만호 장유는 군사를 이끌고 가장 험한 요충지인 호두관(虎頭關, 지금의 후베이 마성 동북)을 공격하여 먼저 송군과 싸우고, 아들 장홍범은 송군을 격파하였다. 21일에는 쿠빌라이에서 황피까지, 30일에는 군사를 이끌고 장강 북안에 도착한다.당시 남송 연강제치부사였던 원개는 권신 정대전의 당우(黨羽)로 그에게 아부하여 가렴주구를 가하자 현지 백성들은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군이 도착하자 백성들은 몽골군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 9월 초하루에 사천을 공격하던 종왕 말형(末兄)으로부터 파견되어 몽케의 죽음을 알리고 북쪽으로 돌아가 가한 자리를 다투도록 청하였다. 쿠빌라이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여전히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넜다.
3. 전투 시작
9월 3일, 쿠빌라이는 양순보 북쪽에 올라 큰 강을 내려다보고 진영을 구축했다. 송군은 큰 배로 강을 제압하고, 군사를 10만, 군사를 옹위하고, 선박 2000을 거느린 뒤 강에 진을 쳤는데, 수륙의 진용이 정연하였다. 몽골군은 즉시 군사를 파견해 배 2척을 빼앗고 밤새 배를 마련해 점양순보를 빼앗아 강을 건너려 했다.초사흘 아침에 비바람이 어두워 여러 장수들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쿠빌라이가 따르지 아니하고 깃발을 휘날리며 북을 벌하고 세 길로 군사를 나누어 병진하여 용장 동문병은 결사대를 거느리고 수십 백 명을 앞세우고 북을 치며 급진하여 남안까지 갔는데, 제군들이 서로 싸워 도하하자 송군이 영전하여 세 번 싸워 모두 패하였다. 부장 장영실은 군대를 이끌고 가벼운 배를 타고 북안에서 악전고투하여, 송의 함선 20척을 노획하였고, 송나라 장수 여문신[2]을 참하였다. 수군 만호해성부장 주국보는 정병을 거느리고 송군과 중류에서 싸웠으며, 무릇 17전, 송선 천여 척을 빼앗고 송군을 참살했다. 송군이 모두 패하자 몽골군은 신속하게 강을 건넜다. 동문병은 동문용을 보내 가벼운 배로 강을 건너 쿠빌라이에게 승전보고를 한 뒤 이에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하며 전군을 악주 성에 포위하도록 전령을 내렸고, 한편으로는 강서를 공격하고 다른 병사를 호남에 파견하여 대리[3]를 우회하여 광서를 거쳐 북진하는 우량카다이의 군대를 도와 송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4. 전투 경과
쿠빌라이는 강을 건넌 후, 황주에 주둔하였다. 이후 사자를 보내 성에 항복을 권하라고 하였다. 사자가 동문에 이르자 송군의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쿠빌라이는 송군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9월 초 군사를 이끌고 악주를 포위했다. 몽고의 사천 침공으로 추밀사 가사도와 사천제치부사 여문덕 등이 이끄는 대군이 모두 장강 상류를 지원하였는데, 악주는 도통권주사(都統權州事) 장승만 있을 뿐 병력이 허전해지자 악주 수비가 위급해졌다.11일 쿠빌라이는 성 북동쪽 압운정에 올라 높은 누각을 세우고 성중의 군사를 살피다가 출병하자 군사를 파견해 맞받아 송군 2명을 포로로 잡았다. 후견은 송(宋)을 거느리고 성 아래로 항복을 권유했고, 장승은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죽이고 군사를 보내 출격했다가 또 격파당했다. 장승은 시간을 벌기 위해 몽골군의 철수를 권유하였다. 몽골군은 계략에 걸려 철수했고, 장승은 그 틈을 타 성 주변의 민가를 불태워 악주 성방을 하나로 만들었다.이때 고달이 강릉에서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였다. 몽골군 백호장 공언휘(孔彦輝)[4]가 맞서 싸웠는데, 고달은 군대를 매복시킨 뒤 거짓으로 퇴각하여 일거에 공언휘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종은 한편으로는 의용병을 조직하고 한편으로는 각 제사에 진병을 명하여 구원하였다. 28일, 송 조정은 가사도로 하여금 강서, 양번의 군대를 통제하라 명하였고, 즉시 중류를 원조하여 몽골군의 침공에 저항하게 했다.
가사도는 10월 한양(漢陽, 지금의 호북성 무한시 한양구)에서 악주성으로 들어가 전쟁을 지휘했다. 이종은 그를 우승상으로 배향했다.
몽골군은 악주를 포위한 뒤 성 밖에 5장 높이의 전망대를 만들었다. 쿠빌라이는 매일 위에서 공성을 지휘하였다. 악주를 오랫동안 공격했기에, 또 송의 원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쿠빌라이는 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몽골군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용장 장유, 장홍범 부자가 이끌고, 자성 동남쪽 모퉁이에서 전투에 돌입하여, 장유는 중상을 입고 물러났다.쿠빌라이는 상황을 보고 장유에게 성을 함락시키라 명하였고, 장유는 명을 받아 공성병기를 만들고 굴을 파고 입성하였고, 치열한 전투 끝에 동남쪽을 파했다. 고달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고, 인력을 조직하여 성벽을 쌓고, 부서진 성벽을 보수하여 몽골군이 들어갈 수 없게 하였다.
몽골군이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사도가 송군에게 명하여 성벽 내벽을 따라 목책을 쌓았는데, 단 하룻밤 만에 성을 둘러싼 목책이 모두 완공되었다. 쿠빌라이는 이를 듣고 가사도의 군사적 재주를 인정하면서 이에 대해 개탄한다.
가사도의 지휘 아래 남송의 여러 지원군들이 잇달아 악주를 구했다.[5] 특히 여문덕은 중경(重慶)에서 강을 따라 내려와 악주(岳州·지금의 후난 웨양)에서 장유의 요격을 격파한 뒤 11월 초하루에 악주에 도착한다.
악주는 일단 상황이 좋지만 대부분 송나라의 군사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운남으로 우회한 몽골군의 우량카다이는 유주(지금의 광서 유주)와 정강부(지금의 광서 계림)를 공격하였고, 소로에서 북상하여 송 형호남로의 주도 담주(지금의 호남 장사) 성 아래까지 이른다. 강서 일대도 정정이 이끄는 몽골 기병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이에 이종은 11월 초하루에 조서를 내려 가사도로 하여금 황주로 포위를 뚫고 이동하도록 명하고, 그 조직에 새로운 방어선을 만들어 송군 전역의 전투를 더욱 잘 지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악주에서 황주로 가는 길은 매우 위험하였는데, 여문덕은 손호신을 정병 7백으로 호송하다가 몽고군을 만났으나 다행히 모두 노약자와 약탈한 금백의 자녀였기 때문에 손호신이 군사를 이끌고 무찔렀고 가사도는 무사히 황주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로써 양회·강서 일대를 고무하였다.
시간은 겨울에 접어들었다. 몽골군은 누누이 악주를 향해 강공을 퍼부었지만, 역병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포위부대는 10분의 4,5로 감원되었다. 송군의 사상자는 이미 1만 3천여 명에 달했고, 전투 초기의 수장 장승도 전사하였다. 쿠빌라이는 아내로부터 쿠빌라이의 동생 아리크부카가 몽골의 대칸 자리를 물려받을 계획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했다. 몽케 사후 빈 가한의 자리는 계속 허전했다. 아들 몇이 막 성년이 되어 가한 자리를 다툴 실력이 못 되어 왕좌를 차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칸의 자리 싸움은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두 형제의 손에서 벌어졌다. 모신 학경[6]은 송을 멸망시키는 것을 장기전으로 보고 쿠빌라이에게 먼저 귀국해 가한의 자리를 차지할 것을 권했다.
이때 가사도가 몽골에 사자를 보냈다. 송과 몽골 양측 모두 탈진했으니 휴전하는 게 낫다고 가사도가 말하였다.[7] 이후 쿠빌라이는 형세에 못 이겨 가사도의 요청을 들어준다.
11월 28일, 쿠빌라이는 철군을 결정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와 몽골 가한 쟁탈전을 시작했다.
5. 이후
몽골군이 철군한 뒤 가사도는 몽골군에 자신이 화의를 제안한 것은 숨기고 몽골군을 격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송 이종은 가사도가 나라를 구하였다고 하면서 그를 칭찬하였다. 가사도는 남송의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악주전에 참여한 여문덕, 고달과[8] 유정[9]은 모두 승진하게 되었다.6. 악주 화약 논란
사람들은 가사도가 싸우지도 않고 몽골군과의 화약을 요청했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송대 이후부터 역사문헌이 몽골에 대한 할지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쿠빌라이의 철군을 틈타서 송이종(宋理宗)에게 대첩을 속이고 몽골에 할지를 약속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범행을 감추기 위해 몽골 사자인 학경을 일부러 억류해 송이종과 만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중국 사서에서는 남송의 권신인 가사도가 여러 중병을 거느리고 악주를 구원하러 갔지만, 은밀히 몽골군에게 화해를 구하고 몽골에 신하를 칭하고 장강을 경계로 삼자고 하였던 것이 그것이다.이 같은 주장에 대해 모 중국 사학자는 악주전투 때 송몽(宋蒙) 사이에 의논과 사절 접촉이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몽골 측이 가사도가 '할강건계(江江乾界)를 삼고 은(銀)·견( 二十) 20만'을 받는 조건으로 퇴군하겠다고 한 것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른바 악주화약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쿠빌라이의 책략으로 받아들였다. 첫째는 송나라를 공격하여 구실을 찾고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고, 둘째는 몽원의 이간지책으로 간주하여 사실을 혼동함으로써 송정 내부의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며, 셋째는 몽고군이 전력을 다해 어주를 공격하였으나 허사였다. 퇴병의 원인을 남송의 타협으로 항복한 것이라고 한다면 패배한 몽골군을 풀어줄 수 있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가령 가사도가 실제로 몽골에 이런 혜택을 주었다면 몽골은 철군 후 파견해 공물 바칠 것을 요구하거나, 송나라 침공 때도 이를 과장했어야 했는데, 사서를 뒤적거려도 그런 기록이 보이지 않았다. 가사도가 진실을 숨겼다면 남송은 기록이 없어야 하고 몽골 측도 기록이 없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당시 가사도는 송군의 전적 지도자였을 뿐, 권신도 아니었고, 할지와 배상금, 칭신 등 이런 중대한 일을 송이종에게 물어야 했다. 진회가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 소흥 화의를 주재하는 것은 여전히 송 고종에게 의지해야 했다.
역사적인 실상은 '악주의화'가 있어야 하지만 '악주화의'는 없다는 주장이다. 가사도는 양쪽의 힘이 균형을 이루자 몽골에 군사를 보내 퇴병을 권유했다. 송나라는 전통적으로 정의와 전통이 있어 가사도가 상징적으로 세화를 제시하는 것은 미봉책일 뿐이지만, 이른바 강을 국경선으로 긋고 신하로 칭하는 것은 가사도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며,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가사도는 승승장구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송군은 전투 전후에 줄곧 버텨, 조금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방어하였다. 어렵더라도 야전에서 몽골군을 추격하는 것은 더 승산이 없을 것이다.
후대에 가사도가 악주에서 매국행위를 했다고 오명이 남은 것은 가사도의 명성이 너무 구겨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가사도는 남송 말년에 공전법 등 개혁을 단행해 거물급 신사와 관료의 기득권을 건드렸고, 타산법을 실행하여 부패한 군인들을 처벌하였다. 이 사람들이 원나라에 투항한 후 쓴 필기소설에는 춘추필법이 크게 쓰였는데, 가사도를 아주 악인으로 묘사하였다고 한다.
[1] 오늘날 후베이 성 우한 시 우창 구. 장강 중류에 위치하고 한수(漢水)의 입구를 통제한다. 이는 행정구역상 형호북로 영할에 속하며, 양양·강릉과 경호전구(京湖戰區)를 이루고, 강을 사이에 두고 회남서로(淮南西路)를 인접하고, 동남수창군(지금의 후베이 어저우 시)과 강남서로 흥국군(興國軍, 지금의 후베이 양신)을 접하고 있어 형세가 매우 험하다. 서쪽은 촉을 지원할 수 있고 동쪽은 양회를 지원할 수 있으며 북쪽은 형호 방면을 지원할 수 있다. 일찍이 남송 초년에 명장 악비와 악가군이 주둔하였던 지역으로, 악주의 중요한 군사적 지리적 의의를 알 수 있다.[2] 1275년 원나라의 군대에 의해 전사하는 여문덕의 아우인 여문신과 동명이인이다.[3] 윈난 성 다리 지역[4] 원나라의 개국공신 장유의 부장이었다.[5] 악주는 양양과 함께 남송 정권의 또 하나의 요충지였다. 악주는 북쪽으로 경호 방면을 원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쪽으로는 사천, 동쪽으로는 양회 방면을 원조할 수 있었다.[6] 1261년 양회 지역에서 억류되고, 가사도가 대패한 1275년 풀려난 뒤 그 해 사망한다.[7] 그러나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대부분 가사도가 병법도 학문도 모르는 건달인 데다가 악주로 나아간 뒤에는 악주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겁내다가, 몽케가 죽고 몽골군이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반격하기는커녕 송경을 몽골 군영으로 밀파하여 장강을 국경으로 하고, 매년 은(銀)과 견필( 匹筆)을 각각 20만 냥씩 바치겠다고 제안했으며, 몽골에 신하의 예를 바치겠다는 역사문헌이 많다.[8] 사람들이 공을 논할 때 여문덕이 1위, 고달이 2위라고 하였다.[9] 나중에 여문덕의 무시를 받았고,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에 빠져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한다. 유정의 투항은 몽골군이 수군을 육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