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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Magyar Királyság | ||
국기[1] | 국장 | |
1000년 ~ 1526년 1867년 ~ 1918년 1920년 ~ 1946년 | ||
표어 | Regnum Mariae Patrona Hungariae (헝가리의 수호자 마리아의 왕국) | |
국가 | Himnusz ("Isten, áldd meg a magyart") | |
위치 | 동유럽 | |
면적 | 325,411㎢ | |
수도 | 에스테르곰→페슈트→포조니→페슈트→부다페스트 | |
정치체제 | 선거군주제 → 입헌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주요 국왕 | 이슈트반 1세(1000~1038) 벨러 4세(1235~1270) 러요시 1세(1342~1382) 마차시 1세(1458~1490) | |
주요 섭정 | 후녀디 야노시 호르티 미클로시 | |
공용어 | 헝가리어 라틴어 독일어 | |
민족 |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독일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체코인, 우크라이나인(루신인) | |
종교 | 가톨릭 등 | |
통화 | 플로렌티누스 → 탈러 → 플로린 →굴덴 →크로네 → 코로나 →펭괴 | |
1차 성립 이전 | 헝가리 대공국 | |
1차 멸망 이후 | 오스만 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 |
2차 성립 이전 | 오스트리아 제국 | |
2차 멸망 이후 3차 성립 이전 | 헝가리 제1공화국 | |
3차 멸망 이후 | 헝가리 제2공화국 |
언어별 명칭 | ||||
헝가리어 | Magyar Királyság | |||
라틴어 | Regnum Hungariae | |||
독일어 | Königreich Ungarn | |||
크로아티아어 | Kraljevina Ugarska | |||
기타 언어별 명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중세 헝가리어 | Mogyër Királyság | ||
슬로바키아어 | Uhorské kráľovstvo | |||
루마니아어 | Regatul Ungariei[2] | |||
세르비아어 | Краљевина Угарска/Ма̏ђарска (Mȁđarskā) | |||
슬로베니아어 | Kraljevina Ogrska | |||
체코어 | Uherské království | |||
폴란드어 | Królestwo Węgier | |||
튀르키예어 | Macaristan Krallığı | |||
프랑스어 | Royaume de Hongrie | |||
이탈리아어 | Ungheria | |||
고대 교회 슬라브어 | Ѫгри (Ǫgri) | |||
이디시어 | אונגאַרן (Ungarn)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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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00년부터 1946년까지 헝가리와 그 주변 지역[3]에 존재하였던 국가이다.1526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867년에 대타협을 통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립과 함께 주권 상당부분을 되찾았으나,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없어졌다.
이후 잠시 동안 공화정과 공산 정권이 들어서지만 트리아농 조약으로 왕정이 부활하고 1920년부터 1944년까지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을 맡아 집권하였다. 1944년 말부터는 살러시 페렌츠가 집권하였으며, 1945년엔 소련에 점령당해 소련의 괴뢰국으로 전락한다.
2. 역사
2.1. 997 ~ 1038, 이슈트반 1세의 건국 후
※ 11세기 헝가리의 모습 |
※ 1210년 헝가리 왕국의 영역 |
특히 헝가리는 동로마 제국의 콤니노스 왕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동로마 내 세르비아인과 연대하여 제국에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견제를 꾀했지만, 콤니노스 왕조가 하람 전투와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하면서 헝가리를 약 30여년간 동로마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시켰다. 당시의 왕이었던 이슈트반 3세의 동생 벨러 3세가 제국의 봉신으로 거의 10년간 대제 마누일 1세의 궁정에 묶여있었을 수준.
다만 폴란드 왕국과 함께 중유럽의 강자로 불리기는 충분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후 동로마 제국이 4차 십자군의 침공으로 몰락하자 동로마 제국에 적대하지 않겠다는 봉신서약을 깨고, 세력권을 발칸 반도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2.2. 전성기와 몰락
1241년, 동방에서 쳐들어온 몽골제국 바투 칸의 원정군과 싸워 참패한 후[4],헝가리 전역이 몽골 제국군의 맹렬한 침략을 받았고, 전염병까지 만연하게 됨에 따라 헝가리의 국력은 일시적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이 때 헝가리 인구의 약 60%가 사망하였고, 이 인구를 회복하는데 약 300년의 기간이 걸릴 정도였다.[5] 기존에 헝가리인이 살던 지역은 다른 민족들[6]이 들어오게 되어 헝가리인이 헝가리 전체 인구의 반절 남짓한 수준을 차지하는 기현상이 벌어졌고, 결국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가 영토 상당 부분을 잃는 결과로 이어졌다.2.2.1. 1288 ~ 1381, 1차 전성기
14세기 중반, 1000년 이래 헝가리 왕국 통치한 아르파드 왕가의 대가 끊기고 헝가리 왕위는 나폴리 왕국을 다스리던 앙주 왕가[7]의 카로이 로베르트(Károly Róbert)에게 넘어갔다. 카로이와 그의 아들 러요시의 재위기(1342-1381)에 헝가리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하지만 이 때 왈라키아 지방의 바사라브 1세는 오히려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왈라키아 공국을 세운 후, 이를 진압하러 온 카로이 1세를 포사다(Posada) 전투에서 격퇴했다.
카로이 로베르트의 아들, 러요시 1세는 계속된 정복전쟁으로 방대한 영토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후반기엔 폴란드 왕위까지 겸하게 됨으로써[8] 강력한 대왕국을 일구었지만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세우는데는 실패했다. 헝가리는 거대한 영토 때문에 많은 나라들과 접경하고 있었고 폴란드, 오스트리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 세르비아 왕국과 싸웠으며, 이는 주변 모든 나라가 잠재적 적국이었다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9] 또한 상술하다시피 1241년, 몽골 제국에게 모히 전투에서 참패한 여파로 헝가리 인구가 회복세에 접어들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고, 이는 국가 발전의 저해요소가 되었다.
※ 1370년대 헝가리의 영역 |
2.2.2. 중흥기 : 마차시 1세
하지만 그렇다고 헝가리가 약해진 것은 아니어서 1456년에는 후녀디 야노시의 주도로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벨그라드에서 저지하였으며, 그 아들로 왕위에 오른2.2.3. 멸망, 모하치 전투(1526)
다만 그가 1490년에 죽고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인 브와디스와프[13]가 울라슬로 2세(II. Ulászló)[14]로 즉위하면서 국운이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이후에 왕에 오른 러요시 2세(II. Lajos)[15]의 치세인 1526년, 쉴레이만 1세가 거느린 군대와 모하치 전투에서 교전한 후 2만 대 10만이라는 병력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완패하면서 멸망을 맞게 되었다.[16]이렇게 어이없게 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헝가리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하고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한 상태였는데, 마차시 1세는 제도적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가더니 마침내는 문화 부흥과 국방 강화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17]로 면세권을 비롯해 귀족들이 그간 누려 오던 특권들을 모조리 폐지하는 등 전제군주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귀족들의 입장에서 '저 왕이 언제 죽나' 라고 벼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가 서자만을 남기고 죽자 그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유언을 무시하고 3대 전 왕의 조카이자 2대 전 왕의 조카라는 이유로 브와디스와프를 데려다 앉혀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귀족들이 다른 헝가리 왕 후보들을 제치고 그를 옹립한 건, 강인하고 총명하다는 이유가 아닌 띨띨하고 모자라서 '예스맨'으로 부려먹기 딱 좋겠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울라슬로 2세는 자신 앞에 무슨 서류가 내밀어지든 일단 서명부터 하고 보는 버릇이 있었고[18] 결국 헝가리는 귀족들의 사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요컨대 마차시 1세가 죽으면서, 그의 군사, 문화적 업적까지 다함께 관짝에 들어간 셈이었다.
※ 1683년 당시의 옛 헝가리 영토와 그 주변. 합스부르크 헝가리(A Magyar Királyság a kora újkorban)와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에르데이 공국과 고지 헝가리 공국, 오스만 직할령으로 나뉘었다. |
한편 그 사이 헝가리는 문화적으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합스부르크령 헝가리를 제외하고 상당수 백성들이 칼뱅파로 개종하였다. 이로 인해 헝가리도 체코처럼 가톨릭 이외에 개신교 문화유산이 건재하게 되었다.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빈 함락에 실패한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폴란드-리투아니아-베네치아 공화국-루스 차르국이 엮인 신성 동맹 군대의 역공을 받았다. 1686년 신성 동맹은 헝가리의 옛 수도였던 부더를 탈환해 1541년 부더 함락 이후 145년 동안 이어졌던 오스만의 지배를 끝냈으며 이듬해인 1687년에는 161년 전 모하치 전투가 벌어졌던 그 모하치 평원에서 대승을 거두고 오스만 제국을 도나우 강 이남으로 몰아냈다. 오스만 제국군은 다시 도나우 강 이북으로 올라가 헝가리를 탈환하기 위해 10년 가까이 전쟁을 지속했으나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결국 오스만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의 잔존 영토와 에르데이 공국을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다.[20] 헝가리 왕국 전체가 중세에 그렇게 날을 세웠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21]
한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왕 레오폴트 1세는 제2차 빈 공방전의 원인[22]인 헝가리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새로 탈환한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새롭게 정복한 '적'의 영토로 취급하고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새로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된 헝가리 동부와 에르데이의 헝가리인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탄압에 분개하였고 결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고 난 1703년 헝가리의 대귀족 라코치 페렌츠 2세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에르데이 공작으로 선출되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라코치의 독립전쟁은 수년을 끌었으나 제앞가림에 바빠진 루이 14세가 지원을 거부하였고 고립된 라코치의 독립군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지지하는 헝가리인 귀족들의 원군과 세르비아인·루마니아인 민병대에 의해 격파당했다. 독립전쟁을 진압한 후 레오폴트 1세는 1711년 반합스부르크파의 온상인 에르데이 공국의 주권을 폐지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서트마르 조약으로 헝가리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을 바치는 조건으로 합스부르크가 헝가리 귀족들의 권리를 존중해주는 타협을 맺었다. 이로서 헝가리 왕국은 완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23]
2.3. 트란스라이타니아
자세한 내용은 성 이슈트반 왕관령 문서 참고하십시오. 헝가리 왕국 웅가른 왕국, Königreich Ungarn 머저르 왕국, Magyar Királyság(헝가리어) | ||
국기 | 국장 | |
오스트리아 제국 시절 | ||
1526년 ~ 1867년 | ||
1867년 ~ 1918년 | ||
위치 | 중동부 유럽 헝가리 | |
수도 | 부다페스트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공용어 | 헝가리어, 독일어 | |
역사 | 1867년 성립 1918년 해체 | |
통화 | 굴덴, 크로네 | |
성립 이전 | 오스트리아 제국 | |
해체 이후 | 헝가리 제1공화국 |
[clearfix]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 퍼뜨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헝가리인은 수백년 동안 헝가리를 지배해 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격렬한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빈 체제'에 항거한 3월 혁명이 일어나고 새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하자 헝가리인의 저항은 더욱 고조되어 코슈트 러요시의 주도 아래 부다페스트와 데브레첸에서 반 오스트리아 혁명을 일으켰다. 이 때 헝가리 혁명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독립에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등 헝가리 내부의 소수민족과의 갈등과 자국내 분리주의 운동의 확산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했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고 난 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보복으로 헝가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에르데이 대공국과 크로아티아 왕국 등 소수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분리한 후 헝가리어의 교육을 금지하고 독일인을 이주시키는 등 헝가리 왕국의 독일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이런한 강압적인 통치 방식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맞았다. 결국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하며 독일 통일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당하자 오스트리아 제국은 방침을 전환해 제국 내 제2의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헝가리인에게 공동의 제국을 제안했다. 대타협[24]의 결과 헝가리인은 독립적인 정부와 의회 등을 구성하는 대가로 오래 전에 헝가리 공주와 결혼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머나먼 후손인 현재의 황제 프란츠 요제츠 1세를 왕으로 인정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했다. 헝가리인은 비록 오스트리아 황제를 왕으로 모셨지만 분리된 왕국을 만들었다. 1868년에는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으로 크로아티아계는 트란스라이타니아 내에서 대폭적인 자치권을 보장받았고[25]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이 수립되어 헝가리 왕국 산하 자치국이 되었다.
1867년부터 헝가리인은 독일인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에르데이 등 트란스라이타니아 지역의 다른 민족들[26]을 탄압했다. 이 중 가톨릭 교도가 아닌 정교회 신자였던 루마니아인과 세르비아인, 우크라이나인 등은 더 많은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878년 이후에는 제국 바깥에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소수 민족 탄압은 루마니아, 세르비아의 반감과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발칸 반도에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입지를 좁히게 만들었다.
산하 향토방위군은 왕립 헝가리 혼베드였다.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면서 헝가리 왕국도 소멸되었다.
2.4. 현대 헝가리 왕국: 합스부르크 왕조 이후 호르티의 섭정기
자세한 내용은 헝가리 왕국(1920~1946) 문서 참고하십시오.3. 관직
헝가리 왕국의 귀족 작위와 직책들헝가리 왕국 역시 중세 중기가 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들처럼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정 관직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은 몽골 제국의 침략 전까지는 봉건제가 제대로 잡지 않아 백작 이상의 대영주들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스판이라는 왕이 임명한 지방관들이 지방의 귀족 세력들을 통제했다.
- 허르커
9~10세기 마자르 족들의 직책으로 사법 권한을 보유한 군사 지도자로 서부 트란스다뉴비아에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 졸러
허르커와 동일한 직책으로 동부 에르데이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해당 직책들은 헝가리의 서구화와 함께 사라졌고, 중세 중기가 되면서 새로운 직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궁중백(Nádor)
11세기 초에 만들어진 직책으로 헝가리 국왕의 대리인이며 동시에 군사 보좌관으로서 전쟁시에 왕의 친정이 아닐 때는 총사령관을 맡기도 했으며, 궁정의 재정 관리 및 법률 업무등을 담당했다.
- 왕실 법관(Országbíró)
1127년에 만들어진 직책으로 궁중백 다음으로 왕실 재판정의 2인자였다.
- 에르데이 군공(Erdélyi vajda)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에르데이 전역을 총괄한 직책으로 에르데이 지역의 이스판들을 통제했으며, 나아가 행정, 사법, 군사권을 장악했다.
- 슬라보니아 영작(macsói bán)
1224년 행정적으로 크로아티아에서 분리된 슬라보니아의 총독격인 직책이다.
- 세베린 영작(szörényi bán)
1227년 지금의 올테니아 지역(Oltenia)[27]을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이다.
- 세케이 이스판(székelyispán)
1228년 세케이 지역을 담당하기 위해 신설된 이스판
- 재무대신(tárnokmester)
1214년 왕실 재정을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으로 1376년 이전까지는 부다의 사법권을 보유했으나 이후 포조니, 너지솜버트, 쇼프론, 커셔, 에페례시, 바르트퍼에서도 사법권을 행사했다. 16세기 경 폐지되었다.
- 거마 관리관(főlovászmester)
1225년 왕실 마굿간을 관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직책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콘스테이블과도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었다.
- 헌잔 관리관(főpohárnok,)
성경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변역되는 그 직책으로 1148년 기록상 언급되었으며, 또한 왕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기에 왕의 최측근들이 맡은 자리였던 만큼 1220년대에 고위 직책으로 분류되었다.
- 집사장(étekfogómester)
프랑스의 세네샬, 잉글랜드의 스튜어트에 대응되는 직책으로 1148년 이전에 만들어졌다.
- 테메슈 주 이스판(temesi ispán)
12세기경 테메슈바르를 담당하기 위해 신설된 이스판
- 포조니 주 이스판(pozsonyi ispán)
1000년경에 포조니를 담당하기 위핸 신설된 이스판
이밖에도 1760년대 합스부르크 가문의 국왕들을 호위하기 위한 헝가리 귀족들로 구성된 귀족 경비대를 지휘한 왕립 귀족 경비대장(királyi nemesi testőrség), 1439년 성 이슈트반 왕관의 수호를 위한 왕관 경비대장(Koronaőrök), 1181년 서유럽의 첸슬러와 어느 정도 대응되는 재상(Kancellár), 1464년 왕실 판사와 별개의 사법직이었던 대법원장, 헝가리 1260년 왕실 재산의 회수와 법률 사건에서 왕을 대표하는 왕립 성왕관의 검사(Királyi ügyigazgató) 등이 있습니다.
4. 관련문서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뒤, 1946년까지 사용된 헝가리 왕국 국기는 이렇다.[2] 또는 Regatul Maghiar.[3] 현재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 슬로베니아의 프레크무리에(Prekmurje) 지방,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자치주,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우크라이나의 자카르파탸, 슬로바키아 전역.[4] 심지어 이때 바투는 오만한 어투로 보잘 것 없는 헝가리의 왕(!!!)은 즉각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하기도 했다.[5] 이 추정은 과거의 것으로, 현재에는 다른 견해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1960년대 학계에서는 1240년도의 헝가리 인구를 200만 가량으로, 몽골 침공 이후의 인구를 100만 ~ 120만, 1300년의 인구를 140만 ~ 160만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몽골 침공 직전에 헝가리 인구를 120만 ~ 135만 가량으로 낮추어 추측하고 있다.[6]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 자카르파탸의 우크라이나인 등[7] 잉글랜드의 앙주 왕조와는 다른 가문으로, 프랑스 카페 왕가의 방계 가문이다. 원래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가였으나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시칠리아를 상실,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북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을 다스리는 왕가가 되었다.[8] 다만 러요시 1세의 폴란드 통치는 딸 야드비가의 폴란드 왕위 계승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귀족들에게 막대한 권한을 양보했고 이는 왕권 약화로 귀결되었다. 러요시 1세가 헝가리에서는 대왕이라 불리지만 폴란드에서는 헝가리인 루드비크 정도로만 불리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9] 비슷하게 프랑스 역시 거대한 영토를 지녔지만 헝가리와는 다르게 프랑스의 지형은 바다와 산맥들로 자연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헝가리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방어선을 펼쳐도 충분히 국경을 지킬 수 있었다.[10] 1369년에도 오스만과 세르비아가 코소보에서 싸운 탓에, 2차 코소보 전투라고도 한다.[11] 특히 마차시 1세가 건립한 포조니에 건립한 왕립 도서관인 비블로티카 코르비니아나(Bibliotheca Corviniana)는 방대한 서적을 구비하여,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까지 올라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보다 규모가 컸던 도서관은 바티칸 도서관이 유일했다.[12] 헝가리 왕국의 상비군은 '검은 군대(Fekete sereg)' 라고 불렸는데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전성기 때의 병력은 2만 8천 명에 달했다. 반면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왕국을 제외하면 동시대에 상비군을 두었던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는 가장 규모가 컸던 15세기 후반을 살펴보아도 꼴랑 4천 명이었다. 또한 검은 군대는 중기병에 경기병, 보병까지 다양한 병종을 두었으며 총기를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의 4천 명은 전부 중기병이었다.[13]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4세의 맏아들로 동생들인 얀 1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지그문트 1세가 연달아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14] 재위: 1490 ~ 1516[15] 재위: 1516 ~ 1526[16] 여담으로,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인은 힘든 일을 겪으면 '모하치의 패배보다 더하다' 라는 말을 한다. 한이 제대로 맺힌 모양.[17] 실제로 이와 비슷하게 확보한 재정을 통해 상비군 검은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 것이 결국 마차시 1세 사후 4년만에 검은 군대가 해체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18] 부친인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4세도 똑같았다. 카지미에시 4세가 예스맨 본능으로 귀족들에게 남발한 특권이 결국 폴란드 왕국을 옥죄어 멸망의 씨앗을 심었다면, 울라슬로 2세의 예스맨 본능은 헝가리 왕국의 분열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19] 모하치 전투 직후에 헝가리의 귀족 가운데 하나였던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라는 트란실바니아의 귀족이 동부 헝가리 귀족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왕을 자칭했지만, 모하치에서 전사한 헝가리 왕 러요시 2세는 생전에 매형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를 후계로 지목했다. 따라서 이들 두 사람은 각자 헝가리의 왕을 자칭하며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신하국이 되겠다고 요청, 쉴레이만 1세는 당장 그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헝가리 왕국은 일단 양분되었는데, 1541년에 야노시가 죽고 갓난아이인 야노시 2세가 즉위하자 '얘를 지금 그대로 헝가리 왕에 앉혔다간 합스부르크한테 다 뺏기겠다' 라고 판단한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왕국을 분할하여 중부는 직할지로 삼고 비교적 안전한 동부만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역사가들은 이 야노시의 헝가리를 동헝가리 왕국이라고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1570년에 야노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2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완전히 양도하면서, 그는 '에르데이 공작이자 헝가리 왕국 영토 일부의 지배자(여기까지가 공식 직함이다)' 가 되었다.[20] 단, 현재의 티미쇼아라를 중심으로 하는 바나트(Banat) 지방은 1718년에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 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21] 또한 임시수도 포조니에 있던 헝가리 의회는 합스부르크의 부다 수복과 2차 모하치 전투의 공로를 인정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왕위 사실상 세습을 인정하여 헝가리 왕위 후보자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배출하도록 하였다.[22] 1670년 반합스부르크파 헝가리 귀족들이 프랑스와 오스만의 지원을 얻어 합스부르크를 전복하려던 즈린스키 역모 사건이 발각되어 여기에 가담한 귀족들이 대거 처형당했는데 그중에는 훗날 반란을 일으키는 퇴쾨이 임레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합스부르크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퇴쾨이 임레는 1678년 반란을 일으켜 상부 헝가리 대부분을 장악하고 오스만에게 신종하는 조건으로 오스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요청을 받아들인 메흐메트 4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을 정복하기 위해 15만 대군을 빈으로 보내면서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헝가리 귀족들과의 사이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좋지 않았다. 물론 합스부르크 왕가는 전임 왕조인 야기에우워 왕조와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서 정당하게 헝가리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헝가리 귀족들에게는 자력으로는 맞설 수 없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선택한 차악이었다보니 좋을 리가 없었다. 특히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독립전쟁이나 1848년 헝가리 혁명 등 헝가리 동부와 에르데이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들은 1526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충성한 헝가리 서북부나 크로아티아에 비해 반항심이 거셌다.[24] 독일어로 '아우스글라이히', 헝가리어로 '키에제제시'.[25] 원래 헝가리는 크로아티아인이 가지고 있던 자치권을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크로아티아인의 반발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개입해 타협을 제의했다. 크로아티아인은 헝가리 왕국이 삼분할된 시절부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고 헝가리 독립전쟁을 역으로 저지하는 등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유별났다.[26]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등.[27] 현재 루마니아 왈라키아 지역의 서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뒤, 1946년까지 사용된 헝가리 왕국 국기는 이렇다.[2] 또는 Regatul Maghiar.[3] 현재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 슬로베니아의 프레크무리에(Prekmurje) 지방,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자치주,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우크라이나의 자카르파탸, 슬로바키아 전역.[4] 심지어 이때 바투는 오만한 어투로 보잘 것 없는 헝가리의 왕(!!!)은 즉각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하기도 했다.[5] 이 추정은 과거의 것으로, 현재에는 다른 견해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1960년대 학계에서는 1240년도의 헝가리 인구를 200만 가량으로, 몽골 침공 이후의 인구를 100만 ~ 120만, 1300년의 인구를 140만 ~ 160만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몽골 침공 직전에 헝가리 인구를 120만 ~ 135만 가량으로 낮추어 추측하고 있다.[6]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 자카르파탸의 우크라이나인 등[7] 잉글랜드의 앙주 왕조와는 다른 가문으로, 프랑스 카페 왕가의 방계 가문이다. 원래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가였으나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시칠리아를 상실,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북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을 다스리는 왕가가 되었다.[8] 다만 러요시 1세의 폴란드 통치는 딸 야드비가의 폴란드 왕위 계승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귀족들에게 막대한 권한을 양보했고 이는 왕권 약화로 귀결되었다. 러요시 1세가 헝가리에서는 대왕이라 불리지만 폴란드에서는 헝가리인 루드비크 정도로만 불리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9] 비슷하게 프랑스 역시 거대한 영토를 지녔지만 헝가리와는 다르게 프랑스의 지형은 바다와 산맥들로 자연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헝가리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방어선을 펼쳐도 충분히 국경을 지킬 수 있었다.[10] 1369년에도 오스만과 세르비아가 코소보에서 싸운 탓에, 2차 코소보 전투라고도 한다.[11] 특히 마차시 1세가 건립한 포조니에 건립한 왕립 도서관인 비블로티카 코르비니아나(Bibliotheca Corviniana)는 방대한 서적을 구비하여,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까지 올라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보다 규모가 컸던 도서관은 바티칸 도서관이 유일했다.[12] 헝가리 왕국의 상비군은 '검은 군대(Fekete sereg)' 라고 불렸는데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전성기 때의 병력은 2만 8천 명에 달했다. 반면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왕국을 제외하면 동시대에 상비군을 두었던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는 가장 규모가 컸던 15세기 후반을 살펴보아도 꼴랑 4천 명이었다. 또한 검은 군대는 중기병에 경기병, 보병까지 다양한 병종을 두었으며 총기를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의 4천 명은 전부 중기병이었다.[13]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4세의 맏아들로 동생들인 얀 1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지그문트 1세가 연달아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14] 재위: 1490 ~ 1516[15] 재위: 1516 ~ 1526[16] 여담으로,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인은 힘든 일을 겪으면 '모하치의 패배보다 더하다' 라는 말을 한다. 한이 제대로 맺힌 모양.[17] 실제로 이와 비슷하게 확보한 재정을 통해 상비군 검은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 것이 결국 마차시 1세 사후 4년만에 검은 군대가 해체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18] 부친인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4세도 똑같았다. 카지미에시 4세가 예스맨 본능으로 귀족들에게 남발한 특권이 결국 폴란드 왕국을 옥죄어 멸망의 씨앗을 심었다면, 울라슬로 2세의 예스맨 본능은 헝가리 왕국의 분열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19] 모하치 전투 직후에 헝가리의 귀족 가운데 하나였던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라는 트란실바니아의 귀족이 동부 헝가리 귀족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왕을 자칭했지만, 모하치에서 전사한 헝가리 왕 러요시 2세는 생전에 매형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를 후계로 지목했다. 따라서 이들 두 사람은 각자 헝가리의 왕을 자칭하며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신하국이 되겠다고 요청, 쉴레이만 1세는 당장 그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헝가리 왕국은 일단 양분되었는데, 1541년에 야노시가 죽고 갓난아이인 야노시 2세가 즉위하자 '얘를 지금 그대로 헝가리 왕에 앉혔다간 합스부르크한테 다 뺏기겠다' 라고 판단한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왕국을 분할하여 중부는 직할지로 삼고 비교적 안전한 동부만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역사가들은 이 야노시의 헝가리를 동헝가리 왕국이라고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1570년에 야노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2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완전히 양도하면서, 그는 '에르데이 공작이자 헝가리 왕국 영토 일부의 지배자(여기까지가 공식 직함이다)' 가 되었다.[20] 단, 현재의 티미쇼아라를 중심으로 하는 바나트(Banat) 지방은 1718년에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 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21] 또한 임시수도 포조니에 있던 헝가리 의회는 합스부르크의 부다 수복과 2차 모하치 전투의 공로를 인정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왕위 사실상 세습을 인정하여 헝가리 왕위 후보자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배출하도록 하였다.[22] 1670년 반합스부르크파 헝가리 귀족들이 프랑스와 오스만의 지원을 얻어 합스부르크를 전복하려던 즈린스키 역모 사건이 발각되어 여기에 가담한 귀족들이 대거 처형당했는데 그중에는 훗날 반란을 일으키는 퇴쾨이 임레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합스부르크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퇴쾨이 임레는 1678년 반란을 일으켜 상부 헝가리 대부분을 장악하고 오스만에게 신종하는 조건으로 오스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요청을 받아들인 메흐메트 4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을 정복하기 위해 15만 대군을 빈으로 보내면서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헝가리 귀족들과의 사이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좋지 않았다. 물론 합스부르크 왕가는 전임 왕조인 야기에우워 왕조와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서 정당하게 헝가리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헝가리 귀족들에게는 자력으로는 맞설 수 없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선택한 차악이었다보니 좋을 리가 없었다. 특히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독립전쟁이나 1848년 헝가리 혁명 등 헝가리 동부와 에르데이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들은 1526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충성한 헝가리 서북부나 크로아티아에 비해 반항심이 거셌다.[24] 독일어로 '아우스글라이히', 헝가리어로 '키에제제시'.[25] 원래 헝가리는 크로아티아인이 가지고 있던 자치권을 빼앗을 생각이었지만 크로아티아인의 반발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개입해 타협을 제의했다. 크로아티아인은 헝가리 왕국이 삼분할된 시절부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고 헝가리 독립전쟁을 역으로 저지하는 등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유별났다.[26]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등.[27] 현재 루마니아 왈라키아 지역의 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