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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년간 치러진 대튀르크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169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동유럽의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조약으로 평가받는다.카를로비츠는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는 지역으로 현재의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스렘스키카를로브치(Сремски Карловци)"이다.
2. 배경
1683년, 오스만 제국은 150여 년 전에 이어 또 한번 빈을 포위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의 구원병이 빈을 공격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오스만 제국군의 배후를 기습공격하는 바람에 오스만군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이후 전쟁은 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의 신성동맹군과 오스만군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으로 이어졌다. 1697년, 파디샤 무스타파 2세가 이끈 친정군이 젠타 전투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의 오스트리아군에게 대패한 오스만 제국은 결국 전쟁을 끝내기 위해 평화협상에 나섰다.
이에 1698년 11월 16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신성동맹과 오스만 제국은 양측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카를로비츠에서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이듬해 1월 26일에 조약을 체결했다.
3. 조약의 내용
기본적으로 조약의 내용은 당시 각국이 점령한 지역을 기반으로 과거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겼던 지역의 회복까지 포함해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얻어냈고 퇴쾨이 임레의 봉기로 이탈한 상헝가리[1]를 되찾았다.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은 쉴레이만 1세에 의해 붕괴된 후 오스만 제국이 직접 지배하는 중부의 오스만 헝가리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한 러요시 2세와의 혼인 관계를 이유로 합스부르크 왕조가 차지한 서북부 지역과 크로아티아 왕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자 헝가리인의 자치공국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이때 모두 합스부르크 세습령으로 편입되었다. 오스만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 헝가리 왕국으로 합병되었고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명목상으로는 자치권이 인정되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파견한 총독이 통치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옛 헝가리 왕국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2]
-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겼던 포돌리아 지역을 되찾았다. 포돌리아는 현재 우크라이나 중서부 지역으로 드네스테르 강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약 320km 구간에 걸친 4만 제곱킬로미터의 광활한 평원으로 중심지는 카미야네치포딜스키이다. 또한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갔던 드네스트르 강 서안에 사는 코자키들의 종주권을 되돌려 받았다.
- 베네치아 공화국
이 조약으로 달마티아 지역 대부분을 획득했다. 그리스의 모레아 반도(現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확보했으나 20년 뒤의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다시 오스만 제국에 반환했다.
- 오스만 제국
옛 헝가리 왕국 영토의 대부분, 중부 우크라이나 일대, 아조프, 펠레폰네소스 반도 등 상당한 영토를 내주었으나 대신 전략적 요충지인 바나트 지역[3]과 크림 칸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의 종주권은 인정받았다.
4. 조약의 결과
카를로비츠 조약은 이후 동유럽의 정세를 결정 짓는 조약으로 작용했다.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손에 넣으면서 헝가리 전역을 차지하는데 성공하였고, 19년 후에는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바나트까지 차지하면서 명실상부하게 헝가리 왕국 전역을 차지하였다.하지만 한편으로 동유럽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현재 세르비아에 해당하는 도나우강-사바강 남부까지 후퇴하게 되면서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이 지역은 말 그대로 화약고가 되었다. 특히 이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은 동유럽의 종주권을 놓고 보이지 않는 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각 종족들이 혈투를 벌이게 되면서 소위 동방 문제가 떠오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동방 문제는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는 19세기 중후반에 더 격화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