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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8대 공 퇴쾨이 임레 Thököly Imre | |
이름 | 퇴쾨이 임레 (Thököly Imre) |
출생 | 1657년 9월 25일 합스부르크 제국 헝가리 왕국 케슈마르크[1] |
사망 | 1705년 9월 13일 (향년 47세) 오스만 제국 이즈미트 |
재위 | 상헝가리 공국의 공작 |
1682년 ~ 1685년 |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작 | |
1690년 9월 22일 ~ 1690년 10월 25일 | |
배우자 | 옐레나 즈린스카 (1682년 결혼 / 1703년 사망) |
자녀 | 라코치 죄르지(양자), 라코치 율리안너(양녀), 라코치 페렌츠 2세(양자) |
아버지 | 퇴쾨이 이슈트반 |
어머니 | 줄러피 마리어 |
형제 | 아담, 이슈트반, 커털린, 마리어, 에버 |
종교 | 루터교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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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18대 공2. 생애
2.1. 초년기
1657년 9월 25일 합스부르크 제국에 귀속된 헝가리 왕국 케슈마르크에서 출생헀다. 증조부 퇴쾨이 셰베슈첸은 본래 너지솜바트에서 말과 소를 키운 뒤 판매하는 목축업자로, 막대한 재산을 모은 뒤 합스부르크 황실에 자금을 종종 빌려줬고, 그 공을 인정받아 1572년 귀족 작위를 받았고 1598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케슈마르크(현재 슬로바키아 케주마로크) 성과 저택을 인수했다. 이후 퇴쾨이 가문은 대대로 이 성에서 거주했으며, 아버지 퇴쾨이 이슈트반은 1654년 백작 작위를 받았고, 이크타르의 영주인 줄러피 사무엘의 딸이자 트란실바니아 공 베틀렌 이슈트반의 조카인 줄러피 마리어와 결혼했다.퇴쾨이 이슈트반과 줄러피 마리어 부부는 퇴쾨이 임레 외에도 아담, 이슈트반, 커털린, 마리어, 에버를 낳았다. 아담과 이슈트반은 유년기에 사망했고, 커털린(1655 ~ 1701)은 셈프레 성주 에스테르하지 페렌츠의 부인이 되었고, 마리어(1656 ~ 1695)는 페터 라슬로[2], 나다스디 이슈트반[3], 프랑스 출신의 헝가리 귀족 투르농 헨리크 야노시[4]와 잇따라 결혼했다. 그리고 에버(1659 ~ 1716)는 헝가리 왕국 궁정백 에스테르하지 팔의 부인이 되었다.
퇴쾨이 임레는 다섯 번째 아들이었지만, 두 형 아담과 이슈트반이 유년기에 사망했기에 유일한 아들이 되었다. 2살 때인 1659년 어머니 줄러피 마리어가 사망했다. 이후 아버지 퇴쾨이 이슈트반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1664년 8월 11일에 오스만 제국과 버슈바르 조약을 체결했을 때 크로아티아 해안지대와 헝가리 영토 일부가 도로 오스만 제국으로 반환된 것에 분노한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귀족들이 결성한 모반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1670년 12월 역모를 조기에 적발한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아르바 성에서 포위된 뒤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아르바 성은 며칠 후 항복했다. 퇴쾨이 이슈트반은 죽기 전에 아들 퇴쾨이 임레를 리카바 성에 보내뒀고, 측근들은 임레를 데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거쳐 트란실바니아 공국 후스트로 피신했다. 이리하여 13세에 부모를 모두 잃은 퇴쾨이 임레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강한 적의를 품었다.
2.2. 헝가리 망명자들의 지도자가 되다
그 후 에페리에시의 루터교회 고등학교와 너제네드(현재 루마니아 아이우드)의 개혁 대학(현재 베틀렌 가보르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간 퇴쾨이 임레는 1677년 11월 27일 트란실바니아 공 어퍼피 미하이 1세의 허락을 받아 헝가리 망명자들로 구성된 쿠루츠(Kurucs)와 합류했다. 이 군대는 1670년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귀족들의 반 합스부르크 음모를 진두지휘했던 삼촌 베셀리니 페렌츠가 처형된 뒤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한 베셀리니 팔이 압솔론 다니엘, 파이겔 페테르, 파르카스 파비안과 함께 결성한 것으로,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14세의 재정 지원을 받았다.1678년 3월 7일 너지숌쿠트(현재 루마니아 숌쿠타마레)에서 열린 회의에서 총리 텔레키 미하이를 중심으로 한 12명으로 구성된 트란실바니아 평의회가 선출되었는데, 퇴쾨이 임레는 여기에 포함됨으로써 쿠루츠 내 2인자로 발돋움했다. 이에 베셀리니 팔은 자기는 여러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지만 임레는 별다른 경력이 없는데 2인자가 된 것에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해 5월 11일, 텔레키 미하이가 이끄는 트란실바니아군과 퇴쾨이 임레가 이끄는 쿠르츠 군대가 키라이더로츠(현재 루마니아 크라이도롤츠)와 터슈나드(현재 루마니아 터슈나드) 마을 사이에서 연합했다. 연합군은 헝가리 왕국으로 진군해 일부 성을 공략했지만, 텔레키 미하이는 에페리에시를 포위 공격하던 중 8월 13일 오스트리아군이 접근하자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퇴쾨이 임레는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고, 여름과 가을에 4개의 석조 성과 쾨르뫼츠바녀(현재 슬로바키아 크렘니차)를 제외한 모든 광산 마을을 점령하고 거럼 강(현재 슬로바키아 흐론 강)까지 진군했다. 11월 1일 거럼센트케레스트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한 뒤 광산 마을에서 물러났지만, 헝가리 왕국의 여러 지역을 계속 장악했다. 그 덕분에 자기의 능력을 입증할수 있었고, 자기를 비방하던 베셀리니 팔을 일시적으로 침묵시켰다.
1678년 9월, 퇴쾨이 임레는 사절단 4명을 가치(현재 슬로바키아 할리치) 성에 파견했다. 그곳의 치안판사 포가치 아담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와 사절단간의 회담을 중재했다. 사절단에 속한 스잘라이 팔은 빈에서 사흘간 보내면서 황제와 협상했다. 트란실바니아 공 어퍼피 미하이 1세는 임레가 자신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황제와 직접 협상한 것에 분개해, 퇴쾨이 임레의 헝가리 및 트란실바니아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스잘라이 팔은 25개 항목의 평화 협약을 가지고 2번째로 빈으로 향했고, 12월 내내 빈에서 머물면서 협상한 끝에 2개월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이 휴전 협정은 1679년 3월에 6주 연장되었다.
1679년 6월 말, 어퍼피 미하이 1세는 퇴쾨이 임레와 화해했고, 그가 총리 텔레키 미하이의 대리인 자격으로 쿠루츠의 수장으로 군림하는 걸 용인했다. 하지만 7월 28일 일부 쿠루츠 부대가 베셀리니 팔을 지도자로 선출했다. 이로 인해 쿠루추는 퇴쾨이 임레를 따르는 세력과 베셀리니 팔을 따르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11월 3일, 퇴쾨이 임레는 아바우이의 우이팔루에서 황제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에 감명받은 상 헝가리 인사 133명은 1680년 1월 8일 소보슬라 의회에서 퇴쾨이 임레를 최고 지도자로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베셀리니 팔 역시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깨닫고 퇴쾨이 임레가 최고 지도자가 되는 걸 받아들였다.
퇴쾨이 임레는 1680년 원정을 재개해 바그 강 계곡 일대를 습격했고, 모라바까지 침공했다. 8월 15일 고향인 케슈마르크를 탈환헀고, 뒤이어 뢰체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1월 15일 합스부르크 제국과 휴전 협정을 맺고 우코사와 서트마르에서 겨울 기간 동안 숙영했다. 1681년 4월 28일 레오폴트 1세가 쇼프론에서 의회를 소집하자, 쿠루츠는 소프론에 서신을 보내 자기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6월에 의회가 재차 소집되었을 때, 헝가리 궁정백이며 퇴쾨이 임레의 누이 에버의 남편이기도 한 에스테르하지 팔이 쿠루츠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의회가 개신교 신자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문제를 논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참여를 거부했다. 그 해 5월 30일, 부더의 이브라힘 파샤가 퇴쾨이 임레에게 오스만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쿠루츠를 대대적으로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알렸다. 이에 고무된 퇴쾨이 임레는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휴전 협정을 파기했다.
한편, 어퍼피 미하이 1세는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네이메헌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하자, 합스부르크 제국이 트란실바니아에 전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그들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따라 퇴쾨이 임레에 대한 지원을 대폭 축소했다. 그러자 퇴쾨이 임레는 1681년 그의 아들 어퍼피 미하이 2세가 트란실바니아 공을 세습하는 걸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노골적으로 적대 의식을 내비쳤다. 이에 오스만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퇴쾨이 임레의 편을 들어 어퍼피 미하이 1세에게 퇴쾨이 임레에 대한 원조를 재개하라고 명령했다.
1681년 9월, 퇴쾨이 임레는 바러드의 파샤, 어퍼피 미하이 1세와 함께 서볼치 일대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 후 퇴쾨이 임레의 사절단과 레오폴트 1세의 사절단은 11월 13일 하이두스조보스즐로에서 휴전 협정을 맺었다. 퇴쾨이 임레는 그해 12월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에 아래의 조건으로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1. 쿠루츠는 전임 트란시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1세 치세인 1645년 페르디난트 3세와 린츠 평화 협약을 체결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확보했던 영토인 어버우, 베레그, 보르소드, 웅, 젬플렌, 서볼츠, 서트마르 등 7개 주를 통치하되, 레오폴트 1세를 주권자로 받아들인다.
2. 레오폴트 1세와 후계자들은 개신교 신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보장한다.
3. 쿠루츠에 가담한 인사들의 몰수된 재산을 반환한다.
4. 레오폴트 1세는 퇴쾨이 임레와 옐레나 즈린스카의 결혼을 승인한다.
2. 레오폴트 1세와 후계자들은 개신교 신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보장한다.
3. 쿠루츠에 가담한 인사들의 몰수된 재산을 반환한다.
4. 레오폴트 1세는 퇴쾨이 임레와 옐레나 즈린스카의 결혼을 승인한다.
그러나 레오폴트 1세는 퇴쾨이 임레와 옐레나 즈린스카의 결혼을 승인했을 뿐 나머지 요구를 무시했다. 이에 1682년 1월, 쿠루츠 사절단이 코스탄티니예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의 완전한 정복을 위해 대군을 일으켰을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으며, 그 대가로 헝가리의 영주가 되는 것을 받아들여달라고 요청했다. 그 해 5월 초, 퇴쾨이 임레는 부더의 이브라힘 파샤에 의해 부더의 공으로서 대우받았다. 이후 그는 레오폴트 1세와 다시 한 번 협상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6월 24일 휴전을 파기하고 전쟁을 재개했다.
1682년 7월 말, 이브라힘 파샤는 30,000 가량의 군대를 이끌고 부더에서 출발했고, 8월 초 어퍼피 미하이 1세가 8,000명을 이끌고 트란실바니아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퇴쾨이 임레도 군대를 이끌고 가세했다. 연합군은 8월 14일 커셔를 공략했고, 뒤이어 에페리에시, 뢰체, 풀레크(현재 슬로바키아 필라코보), 그리고 센드뢰를 잇달아 공략했다. 9월 16일, 이브라힘 파샤는 풀레크 성에서 퇴쾨이 임레를 헝가리의 왕으로 선임한다는 파디샤 메흐메트 4세의 칙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그는 헝가리 국왕을 칭하는 레오폴트 1세를 지나치게 자극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부하들에게 자기를 '왕'이라는 칭호 대신 상헝가리의 공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 후 연합군은 1682년 10월 광산 마을을 향해 진군해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퇴쾨이 임레는 그곳에 남아서 금을 채굴했고, 이브라힘 파샤는 여세를 이어가 에스테르곰과 에르셰쿠이바르로 진군했다. 11월 19일, 합스부르크 제국은 트란실바니아 사절단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쿠루츠가 거럼 강 까지의 영토를 소유하는 걸 확인했다. 다만 일부 제국 경비대는 해당 지역 내의 몇몇 요새에 잔존했다. 광산 마을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반환되었지만, 레오폴트 1세는 광산에서 체결된 수입 중 3,000 탈러를 쿠루츠에게 넘겼다. 이후 퇴쾨이 임레는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의 중재를 반복적으로 수행했다.
2.3. 제2차 빈 공방전과 퇴쾨이 임레의 쇠락
1683년 1월 11일, 퇴쾨이 임레는 레오폴트 1세에게 새로운 평화 협약을 제안했다. 그는 쿠루츠가 점령한 13개 주의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기에게 제국 공작의 칭호를 수여하며, '헝가리 지역의 공'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대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이 또다시 발발할 때는 레오폴트 1세를 주권자로서 받들고 그를 위해 싸울 것이며, 후계자가 없는 자기가 사망하면 합스부르크 제국에 영지를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레오폴트 1세는 이번 제안도 거부했다. 그 해 4월 1일, 오스만 제국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대군을 일으켜 빈 원정을 단행했다. 6월 21일, 퇴쾨이 임레는 합스부르크 제국과의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대재상과 합류한 뒤, 오스만 제국군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들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헝가리의 대다수 영주가 퇴쾨이 임레에게 항복했고, 오스만 제국군에게 식량과 무기를 지원했다.그 후 퇴쾨이 임레는 도나우강의 왼쪽 강둑을 따라 북서쪽으로 행진하면서 약탈을 행했다. 7월에는 너지솜바트와 포조니가 귀순했지만, 7월 29일 제국군 총사령관인 로렌 공작 샤를 4세가 포조니에서 쿠루츠를 몰아냈다. 8월 26일, 쿠루츠는 모라바 인근의 부야노프(Bujanov)에서 빈을 향해 진군하는 얀 3세 소비에스키 휘하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게 참패했다. 다음 날, 퇴쾨이 임레는 빈 공방전에 참여하라는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재차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 그는 포조니와 광산 마을을 자기에게 넘겨준다면, 자신은 병사 25,000명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겠다고 제안했다. 샤를 4세는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지만, 합스부르크 전쟁 위원회는 거부했다.
1683년 9월 4일,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완패하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이에 퇴쾨이 임레는 동쪽으로 후퇴했고, 대재상의 합류 명령을 재차 거부했다. 이후 10월 7~9일 샤를 4세가 철수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추격하면서 벌어진 파르카니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자신과 개인적으로 친한 얀 3세 소비에스키에게 레오폴트 1세와는 별도의 중재를 요청했지만, 얀 3세 소비에스키는 제국군에 대한 즉각 항복 없이는 중재를 거부했다. 1684년 1월 레오폴트 1세가 오스만 제국의 편으로 귀순한 헝가리 귀족들을 사면하겠다고 반포하자, 퇴쾨이 임레는 이러다가 쿠루츠 무리가 레오폴트 1세에게 대거 귀순해서 자기 세력이 약해지는 걸 우려했다. 이에 그는 헝가리인과 기독교 세계를 대상으로 선언문을 반포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자신은 기독교를 수호하고 국가의 자유를 위해 지금까지 헌신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개신교 신도들을 박해한 사례들을 열거했고, 쿠루츠 운동의 주요 목표는 개신교의 합법성 회복과 신앙의 자유 보장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레오폴트 1세가 파견한 제국군이 오스만 제국을 몰아붙이는 한편, 그를 정벌하기 위해 별동대를 상헝가리로 투입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1684년 9월 에페리에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지금까지 확보했던 영토를 대거 상실한 뒤, 그는 레체크 성에서 농성했다. 황제군은 이 성을 21일간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1685년 2월. 포가라스에서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퇴쾨이 임레가 트란실바니아 공에게 불충했다고 선고하고, 트란실바니아 내에 있는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 해 5월, 황제군은 웅그바르를 3주간 포위했지만 함락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페리에시는 2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9월 11일에 함락되었다.
1685년 10월 15일, 퇴쾨이 임레는 바러드의 파샤를 찾아가 자기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바러드의 파샤는 그를 제국군에게 넘겨버렸다. 그는 먼저 보로스제노 성으로 이송된 뒤 벨그라드로 옮겨져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커셔가 2주간의 공방전 끝에 항복했고, 상 헝가리의 대다수 성채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황제군에 귀순했다. 오직 뭉카치만이 퇴쾨이 임레의 아내 옐레나 즈린스카의 진두지휘 아래 1688년 1월까지 항전했다. 한편, 퇴쾨이 임레를 추종했던 17,000~ 18,000명 가량의 쿠루츠 부대가 레오폴트 1세에게 귀순했다.
1686년 1월 2일 벨그라드에서 탈출한 그는 어떻게든 세력을 복원하려 애썼다. 우선 오스만 제국 영내로 가서 오스만 궁정에 뭉카치를 구원할 병력을 보내달라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후녀드 카운티 내 자기 영지로 가서 병력을 모집하려 했지만, 트란실바니아 총리 텔레키 미하이의 명령으로 추방되었다. 1687년 2월, 그는 바러드로 찾아가서 그곳의 파샤로부터 병력을 받아낸 뒤 뭉카치로 가려 했다. 그러나 바러드의 파샤는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오스만 제국군이 주둔한 줄러로 향했다. 1687년 8월 12일 오스만 제국군이 로렌 공작 샤를 4세가 지휘하는 제국군을 상대로 나기하르사니 전투를 치렀을 때, 그는 페테르바러드 다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전투 결과는 오스만 제국군의 참패로 끝났다. 그 해 9월 오스만 제국군 숙영지에서 반란이 벌어지자 급히 도주했고, 10월에 바러드로 돌아갔다.
1688년 1월 17일, 1685년 말부터 2년여 간 뭉카치에서 항전을 이어갔던 옐레나 즈린스카는 식량난으로 인해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오스트리아군과 협상한 끝에 성 수비대와 지휘관들을 사면하고, 재산을 유지하는 걸 허락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그 후 그녀는 자식들과 함께 빈으로 이송되었고, 나중엔 자녀들을 빼앗긴 뒤 1691년까지 솔리아 수도원에 갇혔다.한편 퇴쾨이 임레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항전을 이어갔지만, 1688년 2월 텔레그드와 바러드 인근에서 도나트 요한 하이슬러 폰 하이터샤임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파되었고, 바러드가 함락되자 벨그라드로 피신했다. 그 후 1689년 여름 8,000명의 쿠루츠-오스만 연합군에 가세해 오르소바를 점령한 뒤 우이팔란크를 장악했다. 그러나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이 이끄는 제국군의 역습을 받고 몰다비아 공국으로 피신했다.
2.4. 트란실바니아 공
1690년 4월 15일, 트란실바니아 공 어퍼피 미하이 1세가 포가라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어퍼피 미하이 2세는 14세의 어린 아이였고, 오스만 제국에 의탁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던 퇴쾨이 임레는 1690년 6월 8일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2세로부터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승인되었지만, 레오폴트 1세가 파견한 오스트리아군이 트란실바니아 각지를 장악하고 있던 터라 실제로 통치하지 못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레오폴트 1세가 집권한 빈에 사절을 보내 1687년 벌라주펄버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어퍼피 미하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독자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던 걸 근거로 삼아 어퍼피 미하이 2세를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1690년 8월, 퇴쾨이 임레는 15,000명의 쿠루츠-몰다비아&왈라키아-오스만-크림 타타르 연합군을 이끌고 몰다비아 공국에서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진군했다. 도나트 요한 하이슬러 폰 하이터샤임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 텔레키 미하이가 이끄는 트란실바니아군은 이에 맞서 제르네슈트(현재 루마니아 저르네슈티)에 주둔해, 적의 예상되는 진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그는 통행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산악 지대를 등반한 뒤 8월 21일 적군의 후방을 급습했다. 그 결과 트란실바니아-오스트리아군 연합군은 제르네슈트 전투에서 완패했고, 하이슬러는 체포되었고 텔레키 미하이는 전사했다. 그 후 퇴쾨이 임레는 레오폴트 1세에게 하이슬러를 풀어주는 대신 자기 아내 옐레나 즈린스카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내가 제국 공작 칭호를 받는다면, 앞으로 반 오스만 투쟁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덧붙였다. 레오폴트 1세는 1692년 1월 옐레나 즈린스카를 풀어줬지만 다른 요구는 거절했다.
1690년 9월 22일, 퇴쾨이 임레는 케레스테니시게트(현재 루마니아 크리스티안)에서 소집된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이 이끄는 16개 기병 연대가 벨그라드에서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헀고, 10월 말에 퇴쾨이 임레를 하바살푈드로 밀어내고 상헝가리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그 후 레오폴트 1세는 어퍼피 미하이 2세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오라녜 공 빌럼 3세를 후견인으로 세웠다.
2.5. 말년
1691년 2월, 왈라키아 공작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는 퇴쾨이 임레와 쿠루츠 무리를 추방했다. 이후 그들은 비딘으로 이동했고, 오스만 제국군의 여름 원정에 참여해 헝가리 왕국 남부의 테메슈바르 일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8월 19일 살란케멘 전투에도 참여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패퇴하고 지휘관 쾨프룰뤼 파질 무스타파 파샤가 전사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해 10월 줄러 일대에 침입했지만 소규모 습격전을 벌인 뒤 오스트리아군의 급습을 받고 패퇴했다. 이후 1696년까지 오스만 제국군 사령관으로서 소규모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1697년 6월, 오스만 파디샤 무스타파 2세가 헝가리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때 그는 티서강 유역에서 반 합스부르크 봉기를 일으키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7월 1일 토커이 일대에서만 농노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헝가리 귀족들의 유혈 진압으로 실패했다. 퇴쾨이 임레는 9월 11일 젠타 전투에 참여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사부아 공자 외젠에게 처참하게 패배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1699년 1월 26일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간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 조약을 통해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퇴쾨이 임레의 봉기로 상실했던 상헝가리 역시 되찾았다. 이로써 헝가리 독립을 향한 퇴쾨이 임레의 기나긴 투쟁은 실패했다.
카를로비츠 조약 이후, 퇴쾨이 임레와 쿠루츠 부대는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간의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아나톨리아의 이즈미트로 이주했다. 1705년 9월 13일 그곳에서 사망했고 이즈미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1906년 10월, 그와 아내 엘레나 즈린스카의 유골은 케슈마르크로 이송되어 루터파 신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옐레나 즈린스카(1649 ~ 1703): 크로아티아 왕국 출신 귀족 페타르 즈린스키의 딸. 1661년 라코치 페렌츠 1세와 초혼했고, 1682년 퇴쾨이 임레와 재혼했다. 1671년 아버지가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된 뒤 남편 퇴쾨이 임레와 함께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대로 평생 투쟁했다. 특히 문카치 성에서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1685년 말부터 1688년 1월 17일까지 2년여간 사투를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현재 남편 퇴쾨이 임레, 아들 라코치 페렌츠 2세와 함께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 양자들: 엘레나 즈린스카가 전 남편 라코치 페렌츠 1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다.
- 라코치 죄르지(1667): 요절.
- 라코치 율리안너(1672 ~ 1717): 아스프레몽-린덴 백작 페르디난트- 고베르의 부인.
- 라코치 페렌츠 2세(1676 ~ 1735):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마지막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