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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3대 공 라코치 죄르지 2세 II. Rákóczi György | ||
이름 | 라코치 죄르지 (Rákóczi György) | |
출생 | 1621년 1월 30일 | |
트란실바니아 공국 사로스파타크(현재 헝가리 보르쇼드어버우이젬플렌 주 사로스파타크) | ||
사망 | 1660년 6월 7일 (향년 39세) | |
트란실바니아 공국 너지버러드(현재 루마니아 오라데아) | ||
재위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1차) | |
1648년 10월 11일 ~ 1657년 10월 25일 |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2차) | ||
1658년 1월 14일 ~ 1659년 3월 30일 |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3차) | ||
1659년 9월 24일 ~ 1660년 6월 7일 | ||
배우자 | 로란피 주잔나 (1643년 결혼) | |
자녀 | 라코치 페렌츠 1세 | |
아버지 | 라코치 죄르지 1세 | |
어머니 | 로란피 주잔나 | |
형제 | 라코치 사무엘, 라코치 지그몬드, 라코치 페렌츠 | |
종교 | 칼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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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13대 공.2. 생애
1621년 1월 30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사로스파타크에서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1세와 젬플렌의 지주 로란피 미하이의 딸인 로란피 주잔나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라코치 사무엘[1], 라코치 지그몬드[2], 라코치 페렌츠[3]가 있었다. 1642년 2월 3일,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아들에게 공위를 물려주기를 바란 라코치 죄르지1세의 의향에 따라 그를 공동 공으로 옹립했다. 1644년, 아버지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 페르디난트 3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그는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서 내치를 담당했다.1648년 10월 11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트란실바니아의 단독 공이 되었다. 이 무렵,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가 사망한 뒤 차기 국왕 선출을 놓고 선거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을 겸임했던 걸 재현하고 싶어서 국왕 선거에 입후보했다. 그러나 그 해 11월 20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의 이복 동생인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카자크를 이끌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혼란에 빠뜨리자, 그와와 동맹을 맺고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를 대적했다. 1651년 리투아니아의 야전원수로서 리투아니아를 독립시키고 자기가 리투아니아 군주가 되려던 야누시 라지비우와도 동맹을 맺었다.
한편, 그는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마테이 바사라브와 몰다비아 공국 보이보드 바실레 루푸와의 전쟁이 재개될 때 마테이 바사라브를 지원했다. 바실레 루푸는 이에 맞서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크림 칸국과 손잡았다. 1653년 4월, 그는 몰다비아 보이보드 요구자 게오르게 슈테판을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옹립하기로 하고, 마테이 바사라브와 함께 힘을 합쳐 몰다비아를 침공했다. 연합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바실레 루푸는 4월 13일 이아시를 떠나 우크라이나로 피신한 뒤, 1653년 5월 보그단 흐멜니츠키의 지원을 받아 카자크와 함께 몰다비아 공국을 탈환한 뒤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마테이는 이에 대응하고자 출진해 핀타 전투에서 바실레 루푸를 격파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바실레 루푸는 핀타 전투 패전 후 카자크로 도주했다가 크림 칸국으로 이동한 뒤, 다시 코스탄티니예로 피신했으나 곧 일곱 개의 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그곳에서 옥고를 치르다 1661년경에 사망했다.
1655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 왕국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스웨덴 왕국과 동맹을 맺기로 하고, 1656년 12월 6일 라드노트(현재 루마니아 이에르누트)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여러 개로 분할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스웨덴은 프로이센 공국, 쿠야비, 북부 마소비아, 사모기티아, 쿠를란트, 리보니아를 가지고, 리투아니아 대귀족으로서 스웨덴과 손잡고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대적하던 보구슬라프 라드빌라는 노보그로데크 일대를 확보하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대폴란드를 받고,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 왕국의 남동부(바토흐와 노브고로드-시베르스키 사이의 영토)를 가지며,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크라쿠프를 포함한 소폴란드 일대를 받기로 했다.
1657년 1월, 라코치 죄르지 2세는 라드노트 조약에서 명시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트란실바니아 본토와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에서 파견한 지원군까지 합해 25,000명을 동원하여 폴란드 남부로 진군했다. 여기에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파견한 자포로제 카자크 10,000명도 가세했다. 원정군은 초기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북상하여 3월 28일 소폴란드의 중심 도시인 크라쿠프에 입성했다. 그러나 진군 도중에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폴란드인을 대거 학살해 그들의 공분을 샀다. 이후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크라쿠프에 수비 병력을 일부 남긴 뒤 계속 북진하여 4월 12일 츠미에루브에서 칼 10세 구스타브가 지휘하는 스웨덴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5월 13일 브레스트 요새를 함락시키고 3일간의 포위전 끝에 5월 17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그러나 상황은 곧 꼬이기 시작했다.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의 폴란드군과 파베우 얀 사피에하의 리투아니아군이 연합하여 스웨덴-트란실바니아 연합군을 압박했고, 예르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가 별동대를 이끌고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가 문카치 일대를 파괴했다. 여기에 스웨덴 본토가 덴마크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칼 10세 구스타브가 급히 회군하면서,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졸지에 폴란드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이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급히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려 했지만, 7월 11일 르부프 근처의 마기에루브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게 패퇴했다.
1657년 7월 20일 포돌리아의 차르니 오스트루브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하자, 그는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7월 23일, 양자는 오스트루프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해야 했으며, 크라쿠프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를 반환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657년 7월 26일, 잔존 병력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에게 스카와트에서 급습당했다. 그는 휘하 장성 케메니 야노시에게 군대를 맡긴 뒤 홀로 본토로 돌아왔지만, 트란실바니아군은 끝내 궤멸되어 25,000명 중 함께 돌아온 이는 수백 명에 불과했고, 11,000명이 생포되어 크림 반도로 끌려갔다. 그는 타타르족에게 사로잡힌 장병들의 몸값을 지불해 구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라코치 죄르지 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항하기 위해 왈라키아, 몰다비아, 스웨덴 제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및 카자크와 동맹을 맺으려 하자, 이 동맹이 장차 다뉴브 3공국(트란실바니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계기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라코치 죄르지 2세에게 동맹을 맺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했다. 이제 라코치 죄르지 2세가 원정을 말아먹고 돌아오자, 오스만 궁정은 불충한 가신을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1657년 10월 25일 라코치 죄르지 2세의 폐위를 선고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참담한 원정 실패로 인해 위신이 추락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르헤데이 페렌츠를 새 공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르헤데이 페렌츠는 공으로 선출되기 전에 나중에 오스만 궁정이 동의하면 직위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라코치 죄르지 2세와 비밀리에 맺었다. 1658년 1월 9일,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르헤데히 페렌츠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라코치 죄르지 2세를 공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오스만 궁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기엔 사절을 보내 라코치 죄르지 2세를 도로 폐위하라고 요구했지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658년 여름 군대를 동원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압박해 10월 7일 버르처이 아코시를 새 공으로 세우도록 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파르티움으로 피신한 뒤 그곳의 중심지인 버러드에서 버르처이 아코시를 반기독교인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파르티움으로 쳐들어갈 조짐이 포착되자, 그는 이에 굴복하여 1659년 3월 30일 트란실바니아 공에서 물러나고 버러드를 버르처이 아코시에게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사볼츠와 사트마르 카운티에 있는 자신의 광범위한 영지에서 무장병을 계속 두면서 재기를 꾀했다. 1659년 9월, 버르처이 아코시가 티미쇼아라로 가서 센기자데 알리 파샤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그는 기회를 포착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진군했고, 9월 27일 마로스바사헬에서 열린 트란실바니아 의회에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복위했다. 그 해 10월 버르처이 아코시에 의해 버러드 수비대장으로 선임되었던 할러 가보르를 몰아내고, 귈라이 페렌츠를 새 수비대장으로 세웠다.
1659년 11월, 부더의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버르처이 아코시를 돕기 위해 쳐들어와서 11월 22일 자이카니와 11월 말 토르다에서 라코치를 추종하는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12월에 겨울 한파를 피해 트란실바니아에서 철수했다. 한편 트란실바니아로 귀환한 버르처이 아코시는 나기세벤(현재 루마니아 시비우)으로 이동했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즉각 나기세벤을 포위했지만, 버르처이 아코시는 1660년 봄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가 다시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올 때까지 버텼다. 라코치 죄르지 2세는 일단 군대를 물린 뒤 세즈디 아흐메트 파샤와 맞섰다. 그러나 1660년 5월 22일 사슈페네스 전투에서 패배했고,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뒤 너지버러드로 피신했지만 1660년 6월 7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바토리 조피아(1629 ~ 1680): 바토리 가문의 마지막 남성 구성원이었던 바토리 언드라시의 딸.
- 라코치 페렌츠 1세(1645 ~ 1676): 트란실바니아 공동 공.